고려의 승려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각관 | 각예 | 각운 | 경한 | 광지 |
교웅 | 균여 | 균정 | 김윤후 | 나옹 | |
덕겸 | 덕소 | 도휴 | 몽여 | 묘청 | |
무학대사 | 보우 | 복구 | 소현 | 신돈 | |
연온 | 요세 | 월송 | 의장 | 의천 | |
일연 | 일인 | 정현 | 종린 | 종참 | |
지겸 | 지눌 | 지인 | 징엄 | 천영 | |
천인 | 총서 | 충감 | 충지 | 충희 | |
탁연 | 탄연 | 학일 | 해린 | 허월 | |
현응 | 혜심 | 혼원 | 희랑 | }}}}}}}}} |
조선의 승려 | ||||
{{{#!wiki style="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각성 | 경순공주 | 경허 | 경헌 |
광언 | 기화 | 김연일 | 만공 | |
명안 | 명연 | 무학대사 | 보우 | |
불노 | 선수 | 설제 | 신미 | |
영규 | 유일 | 유정(사명대사) | 윤우 | |
의엄 | 이동인 | 이회광 | 일옥(진묵대사) | |
지안 | 지탁 | 진희 | 청학 | |
체정 | 초의선사 | 쾌선 | 태능 | |
학열 | 학조 | 한용운 | 해안 | |
혜희 | 휴정(서산대사) |
1. 개요
無學大師(1327년 ~ 1405년)
조선 왕조의 유일한 왕사(王師).
속가의 성은 박(朴), 흔히 부르는 '무학'은 호로 법명은 자초(自超). 고려 충숙왕 14년(1327) 9월 20일에 태어났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 천도를 도왔다고 한다.
2. 생애
야사 등지에서는 그가 귀주성 전투의 영웅인 박서의 5세손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박서의 본관인 죽산 박씨 족보에도 그가 박서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합천댐 수문 아래 생가터로 추정된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남도 합천이라는 설과 충청남도 서산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어렸을 때 미미한 신분으로 추정된다. 야사에서는 모친이 수태하던 날 태몽으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과 부러진 붓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이후 그의 운명을 암시했다.충목왕 즉위년(1344) 18살에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하다가 충목왕 2년(1346)에 능엄경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암자 등에서 수행정진하였다. 공민왕 2년(1353) 27세 나이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유학을 떠났다. 대도에서 서역 출신 승려이자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한 지공(指空, 1300-63)대사를 만나 도를 인가받았다고 한다. 한편 이미 고려에서 유명한 고승이었던 나옹화상(懶翁和尙)[1] 역시 원나라로 갔다가 무학을 만났고, 무학은 나옹을 스승으로 모셨다. 무학은 스스로가 지공대사와 나옹화상, 두 고승의 공동제자라고 주장하였다. 나옹화상 또한 지공의 제자였으므로 무학의 사승관계는 조금 꼬였다.
이후 공민왕 5년(1356) 30세에 다시 고려로 귀국했다. 나옹화상 역시 공민왕 7년(1358)에 고려로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는데 이때 무학과 다시 만났다. 무학은 그후 함주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잡아주어 이 때부터 무학과 이성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왕 10년(1384)부터 두 사람은 사제지간을 맺을 만큼 본격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성계와 손을 잡고 역성혁명을 꾀하려던 이유 중에는 정도전이 노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얼이기에 신분상승을 원한 점도 있다는 주장이 있듯, 무학대사 역시 신분상승을 목표로 이성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10월 9일에 왕사가 되었다. 같은 달 11일이 이성계의 탄신일인지라 깨달음에 대해 강의했는데, 불법의 취지를 능히 해설하지 못해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2][3] 태조 2년(1393) 2월 11일에는 한양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관람하면서 이성계가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
태종 2년(1402) 7월 13일에는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고, 같은해 11월 9일에는 이성계가 함주에 있을 때 이방원의 명으로 이성계에게 가서 이방원이 속히 돌아오기를 청한다는 것을 전했다. 태종 5년(1405) 9월 20일에 향년 79세로 입적했고 그 사리는 회암사 부도에 안치되었다. 3년 후에는 태조 이성계도 승하했으며 태종 10년(1410)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학(無學)이라는 법호보다는 자초(自超)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나온다.
일관되이 숭유억불이란 입장을 견지한 태종 입장에서 무학은 껄끄러운 존재였던 듯하다. 본인이 불교나 무학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버지 태조가 무학에게 왕사(王師) 직위를 내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며 존중했던 만큼, 태종으로서도 어느 정도는 격식을 갖추어 대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 10년(1410) 7월에 무학에게 시호를 내리면서 변계량에게 무학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실록은 태종이 무학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한 이유를 "상왕이 그를 존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태종은 신하들에게 계속 자신은 무학을 고승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피력했다.
불씨(佛氏)의 도(道)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려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높이 받들었으나, 그는 끝내 도를 얻은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路上)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라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자 6번째 기사
왜 하필 태종은 무학을 인도 승려 지공과 대비하여 말했을까? 지공과 나옹은 고려말 불교계에서 위상이 어마어마한 고승이었고, 무학은 자신이 지공과 나옹의 공동제자라고 내세웠다. 나옹 또한 지공의 제자였으므로 어느 쪽으로 보든 결국 무학은 지공의 법맥에 속한다. 태종은 일부러 무학을 그의 스승 지공과 대조하여 '스승만 못한 범속한 승려'라고 격하한 것이다.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자 6번째 기사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을 부처의 법을 전하는 조사(祖師)로 여겨 조사전에 모시기도 하였고 '삼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다. '삼화상'이라고 하면 단어 자체만으로는 '고승 세 분'이란 뜻일 뿐이지만, 심지어 현대 한국 불교에서도 '삼화상'이란 단어는 지공-나옹-무학을 함께 일컫는 단어로 통할 정도이다. 한국 불교계에는 불상을 만들어 사찰에 봉안하기 전에 행하는 불복장의식(佛腹藏儀式)이라는 복잡한 의례가 있다. 불복장의식에는 증인이 되어줄 역할로 삼화상을 청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불교계에서 삼화상이 어떤 위상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자장, 원효, 의상, 도의, 도선, 지눌 같은 역사나 전설 등으로 이름을 남긴 승려들을 제치고 지공-나옹-무학이 조선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사로 대우받은 것이다.
정조 16년(1792)에는 개종입교 보조법안 광제공덕 익명흥운 대법사(開宗立敎普照法眼廣濟功德翊命興運大法師)란 호를 추가로 받았다. 실록의 기사
3. 야사
무학이 등장하는 전설이나 야사가 상당히 많다. 세간에 알려진 이성계의 세 서까래 꿈 해몽 전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이야기(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와, 왕십리의 한양 위치 배정 및 이자춘, 이성계의 묏자리를 봐주었다는 전설도 있고, 심지어는 종묘의 칸 수를 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전설에 따르면 경복궁의 자리를 잡을 때 무학이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좌우에 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두어 동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도전이 '제왕은 예부터 북쪽에 좌정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서 사방을 다스렸다.'며 북악산을 주산으로 인왕산과 낙산을 좌우 청룡과 백호로 삼고, 목멱산을 향해 남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반대했기에, 지금과 같이 경복궁과 한양도성의 위치가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 이때 무학대사는 "200년 뒤에 내 말을 다시 떠올릴 날(임진왜란)이 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그러나 이처럼 무학을 풍수를 볼 줄 아는 신승(神僧)으로 묘사하는 전설이나 야사들은 역사적 사실들이 아니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의 비를 두고 이런 전설도 있었다. 무학이 태조 이성계의 뜻에 따라 한양 터를 보러 다닐 적에 길을 잃어 헤매다가 보니 문득 비봉 꼭대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다가가 비문을 읽어보니 신라시대 도선이 세운 것이었는데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리라.)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 전설에서 말하는 북한산 비봉 꼭대기의 비석이 바로 북한산 순수비이므로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고우영 화백의 수레바퀴에서는 재상과 장군이 나오는 묫자리를 왕이 나올 자리라고 했다가 틀렸다고 스승 나옹의 꾸지람을 받거나 왕십리의 유래에도 나오듯이 처음부터 잘못된 위치 선정으로 도선 국사의 가르침을 받는 장면을 보면, '무학(無學)'이라는 이름 그대로 그렇게까지 빼어난 고승은 아니었을 거라고 서술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학이란 배운 게 없음이 아니라, 아라한과 같이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말한다. 물론 자초가 무학이라고 불림은 당연히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뜻한다. 고우영이 만화를 그렇게 그렸다면 언어유희거나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4. 여담
회암사에 무학대사비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태종이 어명을 내려 비석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런데 순조 21년(1821) 지방의 유생 이응준(李膺峻)이 무학대사비가 있는 터가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고 멋대로 비를 허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몰래 투장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이응준은 목이 날아갈 뻔했으나[5] 간신히 목숨은 건져 유배당하고 비석을 복구하여 새롭게 그 자리에 다시 만들어놓았다.(실록의 기사1,실록의 기사2)[6]조선왕조실록에서는 대우가 그리 좋지 않다. 무학대사의 졸기는 짤막하기 짝이 없고 그마저도 그저 무학대사의 유해를 회암사에 두게 했다는 내용뿐이다. 태종과 동서 지간인 조박이라는 대신이 법호를 내려주고 비를 만들어주자고 주장하자, 사간원에선 '별 볼 것 없는 인물을 위해 그래야 하냐'고 반대하고 왕사 자격조차 분수에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간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태종 역시도 이 상소들을 보고 답하기를 상왕의 뜻이라고만 했음을 보면 그 자신도 무학대사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하다. 심지어 무학대사 사후 9년 뒤에는 무학대사를 두고 지공처럼 득도한 고승이라면 존경했겠지만 득도한 것도 없었다고 깠다. 그나마 아버지 친구라 그런지 위에서 말했듯 석비를 만들어주라고 명령했던 모양이다.
5. 대중매체에서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박병호가 연기했다. 실록 및 야사의 내용을 반영하여왕십리와 경복궁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실제와 마찬가지로 태조가 크게 믿고 의지한 정신적 지주로, 신덕왕후가 중병에 걸렸을 때도 무학이 있던 절에서 잠시 요양하기도 했으며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이후로도 함흥에 머물던 태조를 만나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극의 주인공인 태종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으나 태종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장면이 한두 번 나오기도 했다[7]. 한양 천도 이후에 양주 회암사에 머물고 있던 태조가 "예전에 무학대사가 다 내려놓고 던져 버리라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 사람도 이미 가 버렸어..." 라고 독백하는 장면으로 이미 입적했음이 암시되고, 곧바로 내레이션으로 무학의 졸기가 나온다[8]. 작중에서의 마지막 출연은 태조가 임종 직전에 꾼 꿈에서 나온 장면인데, 가장 먼저 등장하여 저승으로 오려는 태조를 맞이한다.
6. 같이보기
[1] 여기서 화상(和尙)이란 덕이 높은 승려를 칭하거나,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2] 이런 일화로 보아 불교 이론 쪽은 그다지 깊게 알지 못했고, 도참사상 쪽에 통달한 스님(?)이었을 수도 있다. 선종 쪽에 가까운 수행을 했다면 불경에 대해선 자세히 모를 수도 있다. 지금 조계종에도 그런 승려들이 많다.[3] 달리 생각하면 실록을 쓴 유학자들의 불교 깎아내리기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무학대사의 입적 뒤의 기록만 봐도 "세상에서 고승이니 왕사니 받들더니만 죽을 때가 되어서는 보통 사람처럼 괴로워서 신음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화장하고 난 뒤에도 뭐 별거 없더만?"라는 식으로 다소 시니컬하게 기술되었도다. #[4] 사극 용의 눈물에도 200년 어쩌고 하는 이야기만 빼고 이 일화가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다만 내레이션으로 이것은 장손이 아니라 방계 자손을 위하는 조치라고 하면서 의안대군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5] 일개 승려의 비문에 지나지 않지만 태종이 어명을 내려 비문을 쓰고 건립한 비석이라, 이응준은 어명으로 만든 물건을 파괴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왕의 글을 모욕한 죄'로 사형을 받을 뻔하였으나, 이런 상황에 해당하는 명시적인 법률이 없단 이유로 목숨은 건졌다.[6] 회암사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후 명종 때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폐사된 이후로는 유생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고 말았다.[7] 대표적으로 태조와 화해하고 나서, 그를 개경까지 호종한 무학을 독대하여 감사를 표하며 왕실이 이제 괜찮을지. 혹시 조언해 줄 것이 없는지 묻는 장면이 있다.[8] 등장인물이 제법 많음에도, 대부분의 인물이 사망하여 퇴장할 때 꼬박꼬박 내레이션으로 졸기가 나오는 것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맨 마지막 장면도 주인공인 태종의 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