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1:41:20

혜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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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저서4. 제자5. 기타6. 연관 문서

1. 개요

一層看了一層看 한층 다 보고 또 한층 보면서
步步登高望漸寬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地面坦然平似削 지면은 깎은 듯 평평한데
殘民破戶平堪觀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ㅡ혜심, 황룡사 목탑에 올라서(登皇龍塔)

혜심(慧諶, 1178~1234)은 조계종 제2조(曹溪宗第二祖)다.[1]

2. 생애

고려의 승려로 출가 전의 이름은 최식(崔寔). 나주 화순현 사람이다. 자(字)는 영을(永乙),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 아버지 최완(崔琬)은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어머니 배씨는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고 3번이나 벼락을 맞는 태몽을 꾼 다음 임신해 12개월만에 혜심을 낳았다. 태어났을 때 태반이며 탯줄이 겹겹으로 얽힌 것이 승려가 가사(袈裟)를 입은 모습과 같았고 7일만에 눈을 떴으며 젖을 먹은 뒤에는 알아서 어머니를 등지고 돌아 누워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혜심은 출가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아들에게 유학을 배우라고 했다. 어머니의 뜻대로 혜심은 1201년에 최홍윤(崔洪胤)이 주관하는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개경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어머니가 몸져 누웠다는 소식에 학업을 그만두고 나주로 돌아왔다. 혜심은 사촌 형인 배광한(裴光漢)의 집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병하였는데 어머니는 온갖 부처보살이 사방으로부터 두루 나타나는 을 꾸고 나서 병이 나았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혜심은 근처 길상사의 고승을 찾아갔는데 길상사에 수선 결사를 세우고 선종 진작에 힘쓰고 있던 지눌이었다. 혜심이 오기 전날 지눌은 송나라의 유명한 고승이었던 설두현선사(雪竇顯禪師, 980~1052)가 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다음날 수선사로 찾아온 혜심을 만났는데 첫인상만 보고 어디 절의 스님인가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혜심은 자리에서 어머니의 천도재를 청하면서 동시에 지눌에게 승려로 출가하기를 청했고 그 날 외가 사람들은 혜심의 어머니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렇게 혜심은 승려로 출가해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희종 4년(1208년)에 스승 지눌로부터 수선사의 법석(法席)을 넘겨 받게 되었으나 혜심은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숨어 은거하였는데 그로부터 2년만에 보조국사가 사망하고 수선사 문도들이 희종에게 혜심을 수선사 법석에 추대해 줄 것을 요청해 혜심에게 보조국사의 자리를 이으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혜심은 이때에야 비로소 지리산을 나와서 보조국사를 이어 조계종 제2조(祖)가 되었다. 혜심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수선사가 비좁게 되자 강종이 수선사의 증축을 명하고 또 사신을 보내어 수 놓은 가사, 납의 각 1벌, 차, 향(香), 보물 병 등을 하사하였다. 심지어 당시 최씨 무신정권의 수장이었던 진양공(晋陽公) 최우(崔瑀)도 혜심을 몇 번이나 개경으로 초청했지만[2] 혜심은 사양하였고 최우는 자신의 두 아들을 보내어 혜심을 모시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수도에 필요한 온갖 물품을 제공하면서 혜심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이때 혜심은 다음과 같은 를 지어서 최우에게 보냈다고 한다.
야윈 고요히 소나무 꼭대기 위에 섰나니
한가로운 구름은 고갯마루 바람을 가벼이 좇네
그 가운데 면목은 천 리가 같거니
어찌 다시 한 통의 편지를 희롱하리

고종이 즉위하고 혜심에게 선사(禪師)의 법계를 올리고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도 주었는데 승과(僧科)를 치르지 않고 승직을 얻은 최초였다. 1219년에 단속사(斷俗寺) 주지에 나아가라는 왕명이 내려졌는데 혜심은 여러 차례 사양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듬해 단속사 주지직을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수선사에서 머무르면서 필요할 때만 단속사에 갔다고 한다.[3]

혜심이 선사의 법계를 받은 뒤 예전 혜심이 사마시를 치를 때 시험관이었던 참정(參政) 최홍윤(崔洪胤)이 혜심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서 “여만선사 불광(佛光)이 항상 학사(學士) 백거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직접 대승보살계를 주었으며 숭악산(嵩岳山)의 도사(道士)는 기꺼이 비서감 하지장을 영접하여 도교(道敎)의 묘지(妙旨)를 비밀리에 전해 주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혜심은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최홍윤에게 보냈다.
옛날에는 내가 공(公)의 문하(門下)에 있었건만
지금에는 공(公)이 나의 사중(社中)에 들어왔군요
옛날과 지금, 서로가 서로의 손님이 되고 주인이 되니
스승과 제자의 위치도 뒤바뀌어 일정하지 않구료

혜심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유불일치설'이다. 예전 혜심 자신이 유교를 배우면서 최홍윤의 문하에서 급제해 최홍윤의 문생이 되고 이제 승려가 된 혜심에게 최홍윤이 귀의해 제자가 되는 것이 서로 같은 선상에 있듯이 서로의 입장이나 위치라는 것이 딱 하나로 정해져서 그것으로 쭉 가는 것이 아니고 유교와 불교도 이치를 알고 보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서로 다른 곳이 없다는 것이다. 혜심 이전에도 당나라송나라에서 이미 '삼교회통'이라는 이름으로 유교, 불교, 도교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결코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적 해석이 시도되고 있었고 북송의 무위거사(無盡居士) 장상영(張商英)은 논어에서 공자가 결코 하지 않았다는 사무(四毋)[4]를 불교에서 말하는 사진(四眞)[5]과 통하는 것이 있다며 불교적인 관점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게 되는데 혜심은 최홍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장상영의 해석을 소개하고 지지하였다.

다음으로 혜심은 ≪기세계경(起世界經)≫의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두 성인을 진단(중국)에 보내어 교화를 행하리라’ 하셨는데 한 사람은 노자로서 가섭보살(迦葉菩薩)이고 또 한 사람은 공자로서 유동보살(儒童菩薩)이다”[6]라는 말을 인용하여 유교와 도교가 불법에서 기원한 것이니 방편은 다르나 진실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증명으로 공자가 말한 “삼(參)아, 내 도(道)는 하나로 꿰었다(一以貫之)”,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7]에서의 도를 역시 불교적으로 해석하여 “도란 만법을 관통하여 끊어지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끊어지거나 멸하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았기 때문에 공자는 도에 맡겨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혜심은 유불일치를 2가지 점에서 증명하고 결론적으로 당대 선승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卽心卽佛, 非心非佛)”라는 화두를 때때로 참구하여 철저히 깨치는 것을 법칙으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혜심은 어느 서생에게 주는 글에서도 동진의 승려 혜원(慧遠)[8]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과 양나라 심약(沈約)의 <내전서(內典序)>를 인용하면서 역시 유불일치를 말하고 있으며 당대 한유(韓愈)의 배불론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혜심의 유불일치설은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와 불교는 사실 같은 가르침이라고 서로의 교리 합치를 시도한 것으로 훗날 성리학의 도입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그렇게 도입된 성리학은 "유교와 불교는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개소리 집어쳐!"라며 까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정도전불씨잡변이다.

1233년 11월 혜심이 수선사에서 질병을 얻자 최우가 왕에게 알리고 어의(御醫)를 보내서 진찰하게 하며 다음 해인 1234년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기게 했다. 1234년 6월 26일 사망했는데 문인들을 불러 뒷일을 맡기고 월등사 주지 마곡(麻谷)에게 이르기를 “노인네 오늘 몹시 바쁘겠네”라고 하였다. 마곡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하자 혜심은 다시 “노인네 오늘 많이 아파”라고 했고 마곡은 이번에도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있었는데 혜심은 웃으며 마곡을 한 번 쳐다본 뒤 가부좌를 튼 채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사망한 다음날 월등사 북쪽 봉우리에서 화장하고 유해를 송광사로 돌려보냈다.

사후 진각국사(眞覺國師)로 추존되었다.

3. 저서

4. 제자

5. 기타

의천지눌을 주로 다루는 문제에서 꼽사리 식으로 보기 1개를 차지하면서 유불일치설을 주장한 혜심을 오답형으로 출제한다.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원로배우 이대로가 맡았다.

6. 연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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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혜심 사후에 세워진 혜심의 비석에서 혜심을 이렇게 지칭하고 있기도 하고 고려 시대 수선 결사(조계종)를 연 보조국사 지눌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다만 현재 조계종에서는 보조국사가 아닌 남북국시대 신라도의선사를 종조(宗祖)로 하고 있기에 칭호는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다.[2] 당연히 혜심의 이름을 빌어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계산이었다.[3] 단속사는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던 절로 현재는 폐사된 채 두기의 석탑만 남아있다. 최씨 무신정권의 식읍이 진양(지금의 진주시)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혜심을 굳이 단속사로 보낸 저의를 짐작할 수 있다.[4] 논어 자한편 4에 "스승께는 결코 하지 않는 네 가지가 있었다. 삿된 생각을 갖지 않으셨고(毋意), '나는 나다'라는 생각이 없으셨고(毋我), 고집이 없으셨고(毋固), '기어이 해야 한다'는 것도 없으셨다(毋必)”라고 했음.[5] 곧 진의(眞意) · 진아(眞我) · 진고(眞固) · 진필(眞必).[6] 물론 해당 불경 자체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뒤에 제작된 위경이다.[7] ≪논어≫ 이인편.[8] "승려는 부처의 제자로 세외(世外)의 존재이며 세속의 군주인 황제에게 절할 필요가 없다"며 종교가 세속의 일에 관여하며 세속화하는 것을 경계한 사문불경왕자론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