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04:02:23

의천

고려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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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왕후 · 왕태후 · 왕태자
왕자 : 국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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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역대 흥왕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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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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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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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200><colcolor=#670000>
고려 문종의 왕자
대각국사 | 大覺國師
파일:external/www.ibulgyo.com/82784_20222.jpg
출생 1055년 10월 30일 (음력 9월 28일)
고려 개경
사망 1101년 10월 28일 (음력 10월 5일) (향년 45세)
고려 개경 총지사
묘소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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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200><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이름 후(煦) / 석후(釋煦)
부모 부왕 문종
모후 인예왕후
형제자매 13남 7녀 중 4남
법명 / 자 의천(義天)
시호 대각국사(大覺國師)
별호 대각대화상(大覺大和尙)
법계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문종)
(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1]
국사(숙종)
(國師)[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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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왕자에서 불교에 귀의2.2. 중국 유학과 고려 불교의 발전2.3. 화폐 주조와 대각국사
3. 평가4. 기타5. 주요 저서6. 같이보기7.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고려 전기의 승려.

2. 생애

2.1. 왕자에서 불교에 귀의

고려 제8대 현종의 손자이자 제11대 문종의 4남으로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의 동생. 모후는 문종의 제2비 인예왕후다. 원래 이름은 후(煦)지만 당시 북송 황제 송철종의 이름과 겹치는 바람에 피휘하느라 평생 자기 이름을 써본 일은 몇 번 안 된다. 대신 자(字)인 의천을 썼으며 법명은 자와 같다. 어느 날 문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출가하여 스님이 될 사람을 찾았는데 이 때 자원하여 11세의 나이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교종의 최고 지위인 승통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문종이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지방 중심의 선종과 중앙의 교종으로 나뉘어 있었고 교종 또한 왕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3]귀족 중심의 법상종[4]으로 나뉘어 있었다. 의천은 '교관겸수'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에서 교단통합운동을 하며 천태종을 도입[5]하였고 이후 국청사를 세우면서 선종까지 통합하려 하였다. 천태종 개창은 교종에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선종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는데 이는 천태종으로 개종한 승려들 전원이 선종 승려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2.2. 중국 유학과 고려 불교의 발전



오랫동안 송나라에 가서 제대로 된 불교를 배우고 싶어했으나 왕자가 위험한 바닷길을 갈 수 없다는 이유와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6] 때문에 계속 저지되었고 결국 송의 상선을 타고 밀항했다. 송 남부에서도 교단을 설립하고 을 세우는 등 활동을 하였지만 소식(소동파) 등의 반대에 부딪힌 바도 있다[7].

송나라, 요나라, 신라 등의 경전 주석서를 모아 4천여권에 달하는 교장(敎藏)[8]을 펴냈는데 후에 송에서는 유실된 경전을 찾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의천이 편찬한 교장은 천태종의 교종에 가까운 면이 드러나는 사례로도 꼽힌다. 의천은 선종을 상당히 싫어하여 교장에 선종 계열 경전은 넣지 않았고 요나라에서 선종의 경전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원효의 화쟁 사상에 주목해 원효를 띄우고 원효에게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고려 초기부터 고려 불교계의 주류였던 균여의 사상은 비판해 그의 저술을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빼버릴 정도였다.

최충 등의 유학과 의천의 불교가 어우러지면서 11세기 후반~12세기 초 고려는 한국사에서 손꼽힐 정도의 문화 전성기를 맞지만 천태종은 교단을 사상적으로가 아니라 인적으로 통합한 것에 불과하였다.[9] 의천 사후 천태종이 분열하면서 교단 통합은 이어지지 못했고 지눌이 나오기 전까지 고려 불교는 다시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했다.

2.3. 화폐 주조와 대각국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의천은 한국사의 화폐사에도 이름이 있는 사람인데, 불교 진흥 뿐 아니라 화폐 도입으로 상업 발전에도 큰 획을 그었다. 송나라 유학 후 화폐의 효율성을 보고 자신의 형 숙종에게 화폐의 유용함을 이야기하여 주전도감을 설립해 해동통보[10], 삼한통보, 삼한중보와 같은 동전, 병 모양인 활구라는 은화도 만들게 하여서 최초로 본격적인 주화 유통을 도입하면서 화폐론이 퍼졌다. 참고.

이렇게 여러가지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에는 소홀하였던 게 화근이었을까? 짧은 일생 동안 너무 많은 일을 했는지 의천은 1101년, 병이 들어 총지사에 눕게 되었고, 그 해에 47세라는 젊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형 숙종은 아우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에게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칭호를 내리고자 했지만, 대관들은 '대각'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시호가 올라갈 당시에는 많이들 반대하였다. 하지만 의천이 왕자였던 점을 들어 아랑곳하지 않고 '대각국사'라는 호칭을 그대로 내렸다. 오늘날 흔히 '대각국사'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가 사후에 받은 시호로, 살아 있을 때는 그리 불리지 않았다. 생전 역임한 법계는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으로 아버지 문종이 승통 법계에 존칭까지 더해서 준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는 이 법호의 약칭인 '우세승통' 혹은 법명인 '의천'으로 불렸다. 이후 형 숙종이 국사로 승진시켰다.

3. 평가

의천의 업적 자체는 상당히 진취적이었지만 모든 것들이 면밀한 검토없이 왕자라는 신분 하나에만 의존하여 시행한 탓에 결과적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의도야 좋았지만 실천 방법은 오로지 신분빨로 밀어붙인 일방통행, 장기적인 대책이 없이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밀어붙였을 뿐이었다. 온갖 것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겠답시고 보자기로 감싼 것도 아니고 튼튼히 못질을 한 것도 아니라 자기 두 손의 힘으로 뭉쳐서 쥐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니 의천이 없어지자 의천이 뭉쳐놓았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진 것이다.

우선 한국사 최초로 불교 교단 통합을 이루었지만 통합을 지시한 의천이 왕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승려들이 어쩔 수 없이 권력에 눌려서 합쳐진 것이라 의천 사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불교의 분열은 단순히 몸이 멀어지니 마음이 멀어져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멀어져서 몸이 분열된 것이다. 의천은 근본적인 문제인 사상적 차이를 등한시한채 그저 몸만 억지로 결합시키기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이 문제는 한참 뒤 지눌이 사상적인 통합이라는 교단 분열의 진짜 원인인 사상적 차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화폐 사용 건의도 마찬가지로 경제학에 무지한 채, 단지 송나라에서 자기가 써보니까 편하고 좋다는 이유만으로 건의한 것이라 제대로 된 화폐 유통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화폐를 도입하려면 정부 자신을 포함해서 사회 많은 곳에서 체제를 철저히 뜯어고치는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도입을 포기하고 내버려두어야 했다. 그런데 무턱대고 주전도감을 세워 화폐를 찍고 보기만 했으니 실제로 사용해야 할 일반 백성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고려 성종건원중보[11], 조선 숙종상평통보에게 밀려 의천의 화폐들은 가짓수는 가장 많지만 인지도가 한없이 떨어진다.[12]

다만 의천이 행한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교단 분열은 확실히 나라의 사상적 기반을 흔드는 좋지 못한 현상이니 통합은 불가피했고, 화폐 도입 또한 궁극적으로는 백성과 나라의 편의성 도모에 필수적인 행위였다. 더불어 의천 본인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해외 유학을 다녀옴으로써 스스로 국내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쌓을 방법을 원천차단하여[13] 형의 왕권 강화에 보탬이 되었다는 좋은 작용도 있었다.[14] 더불어 의천이 송나라 유학 시절 여러 송나라의 경전들을 모아둔 것이 나중에 송나라에서 유실된 경전 복원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의도치 않게 중국의 불교사 보존에도 공헌을 한 셈이다.

종합하자면 그야말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아주 착한 왕자님이 선량한 의도만으로 이것저것 하기는 했는데 너무 착한 나머지 반대파나 불안 요소들을 확실히 정리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추진한 탓에 뚜렷한 업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라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체는 명확하게 파악했고 이 때 의천이 남겨놓은 가이드라인들이 후대의 지표 정도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의천이 국왕이 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의천이 국왕이 되어서 교단 통합이나 화폐 도입 등 위의 정책들을 국왕의 권위로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들었더라면, 고려의 혼란이 더 일찍 터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리더가 성질이 더러워도 능력이 뛰어나면 조직이 그런대로 굴러가는데, 성질이 착해도 능력이 미진하면 신하들에게 휘둘리거나 심각한 실책을 저질러서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은데 의천이 그런 케이스였다. 다행히 의천에게는 선종, 숙종처럼 능력이 뛰어난 형들이 있었고[15] 형들이 의천을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활동을 용인해주었기에 의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사회 혼란이 별로 없을 수 있었다.

의천의 송나라 유학에 대해서 송 - 고려가 단교한 상황에서 왕자가 함부로 송으로 가서 대요 관계를 망칠 뻔 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말도 있지만, 이는 고려 - 요 관계에 무지한 소리다. 당시 고려는 요나라 때문에 공식적으로 송나라와 단교를 선언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여요 전쟁 이후에도 잘만 송과 교류했다. 송 왕조 입장에서는 수교하여 교류한지 한참된 나라의 왕자가 방문한 것이었으며, 이 사실이 요 왕조에게 알려진다고 해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 일은 전혀 없었다.

고려인과 한인들은 의천이 '멋대로' 송으로 갔다고 두려워할 일도 없었고 송 조정은 의천을 쫓아낼 이유도, 껄끄러워할 이유도, 받아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의천 본인 또한 왕자의 신분을 버리거나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는 여요 전쟁으로 고려가 송과 단교했다는 잘못된 낭설이 만들어낸 조잡한 비난이다.

==# 관련 글 #==
본국의 예종이 지은 대각 국사 진영의 찬문(本國睿王御製眞讃)
化身返本     석가불이 본원으로 돌아가고
遺敎流東     유교가 동방으로 흘러온 뒤에
閒生覺智     각지(覺智)가 간간이 출현하여
弘闡宗風     종풍을 크게 천명하였네.
義想始祖     의상 대사가 시조일 적에
元曉同時     원효 성사도 동시대였는데
今繼芳躅     지금 아름다운 자취를 이은 분은
其惟國師     오직 우리 국사 한 분뿐이라오.
割愛王宮     왕궁의 친애의 정을 떼어 버리고
專精佛道     오로지 불도에만 정진하였나니
幼學生知     유년에 생이지지(生而知之)의 학문으로
上乘超悟     상승의 경지에 벌써 뛰어올랐지요.
壯慕先哲     장년에는 선철을 사모하여
遠遊中華     멀리 중화에 유학하였나니
輕涉滄海     망망대해를 선뜻 건너가서
歷叅作家     선지식을 차례로 찾아보았다오.
賢首智者     현수의 화엄종과 지자의 천태종
因明律鈔     인명의 논리학과 남산(南山)의 율초 등
求索諸宗     여러 종파의 교리를 탐구하며
密傳衆妙     오묘한 가르침을 은밀히 전수했네.
星霜換律     한 해 동안의 세월이 지난 뒤에
甁錫登途     행장도 가볍게 귀국길에 오르니
天子送勞     천자는 위로하며 전송을 하고
國人迎蘇     국인은 반갑게 환영을 하였다오.
慧炬重明     지혜의 횃불을 거듭 밝히고
願輪載轄     서원의 수레를 다시 굴렸나니
大心丈夫     대심의 장부요
弘法菩薩     홍법의 보살이었어라.
機鋒不露     기봉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徵應難藏     상서는 숨길 수 없었나니
身生玉粒     몸에서는 옥 사리가 나오고
口出火光     입에서는 광명이 흘러넘쳤다오.
法堂動搖     설법하는 법당이 진동을 하고
神物來護     신물이 와서 보호를 하자
衆皆讚揚     대중이 모두 찬양하였건만
師不廻顧     국사는 돌아보지도 않았지요.
遼皇施信     요나라 황제도 신심을 보이고
倭國寄經     왜국에서도 경서를 부쳤나니
人天蒙福     인과 천이 모두 복을 받고
遐邇歸誠     원근이 마음으로 귀의하였다오.
圓宗類聚     『원종문류圓宗文類』를 정리하고
釋菀詞編     『석원사림釋苑詞林』을 편찬했나니
後生模範     후생의 모범이 되어
歷代流傳     대대로 전해지리이다.
繪事雖工     그림 솜씨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靈臺莫狀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리오.
略記聲熏     아름다운 자취를 대략 기록하여
但伸鑽仰     찬앙하는 마음을 펴고자 하나이다.
『대각국사외집』
고려 예종이 대각국사 의천의 초상화를 보고 남긴 글이다. 예종은 대각국사의 조카이다.

4. 기타

  • 우리나라에서 의천이 남긴 해동 천태종을 자처하는 교단(대한불교천태종)이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의천 천태종의 후신으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해동 천태종은 조선 세종 6년(1424) 세종이 불교 종파들을 선교 양종으로 통합시킬 적에 선종 쪽으로 합쳐져 맥이 끊겼다. 현대 한국의 대한불교천태종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천태종의 후예를 자칭한 곳이라 정말 의천 천태종의 후예로 봐야 할지는 부정적이다. 일단 의천을 천태종의 시조로 모시기는 하지만 천태종 내부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에 사실상 강제 퇴위를 당했을 당시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입장도 보이지 않았다. 친형 숙종이 의천을 계속 지원한 것을 감안하면 이자의의 난 때 숙종을 지지했던 것이 확실하다.

5. 주요 저서

현재 남아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 천태사교의주: 의천의 스승 제관이 집필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의 주석본으로, 이 천태사교의는 현재까지도 천태종의 입문서 격으로 사용되고 있다.
  • 원종문류(圓宗文類)
  • 석원사림(釋苑詞林)
  •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현재 일본에 있는 의천의 문집. 송나라, 요나라, 일본의 불교 문화를 모은 책이다.
  •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현재는 단 1권만 전하는 책으로 서문을 의천이 작성했다. 현장이 간행한 <성유식론>의 해석서로 유식학에 대한 의천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 대각국사문집: 의천의 시와 글을 모은 문집이다. 고려시대에 작성되긴 했지만[16] 작자는 미상. 실전된 줄 알았는데 1937년에 해인사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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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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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통은 교종 계열 법계 중 가장 높다.[2] 삼중대사, 수좌, 승통 세 법계에 오른 교종 승려는 국사에 임명 될 수 있다.[3] '만물이 하나로써 화합을 이룬다.'는 사상이 곧 왕권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원래 똑같은 이유 때문에 화엄종은 신라 왕실의 사랑을 받은 종파이기도 했다.[4] 법상종의 기원인 인도 유가 유식파를 따라 사람은 그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고 최하위인 일천제의 중생은 성불할 수 없다는 오성 각별설을 주장한다. 이 설은 석가모니 본인의 주장은 아니고 힌두교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받아 생긴 주장인데 그 시절에는 서지학이 현대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보니 유식학 계통 승려들은 비판 없이 이 설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기원이 기원이다보니 다른 불교 사상과 차이가 컸다. 중국에 설을 처음으로 전한 현장 삼장법사조차 인도에서 설을 배울 때 현지 유식파 승려들에게 '이거 중국에 전하면 난리날거 같은데 꼭 전해야 돼요?'라고 되물었다가 꼭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전하기로 결심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전해진 이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가 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논박하는 열반경[17]이 전해진 뒤에야 진정된다. 그런만큼 이 사상은 '우리 귀족들은 왕만큼은 아니지만 평민/천민보다는 위'라고 생각하는 귀족들의 구미에도 맞고 그들의 신분과 권력을 정당화시켜줄 근거가 되었기에 자연히 귀족들은 법상종을 좋아했다.[5] 천태종은 원래 중국 수나라 승려 지자가 시작한 종파로 삼국시대부터 수 차례 한국 땅에 전해졌다. 특히 광종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고려 불교를 통합하려는 첫 시도를 하기도 하였는데 의통과 제관을 중국 오월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천의 스승인 의통과 제관이 둘다 송나라에서 귀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천이 천태종을 창립했다는 말은 틀렸다고 개립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그냥 해동 천태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참고로 의통은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천태종의 16대 조사(교조)가 되었다.[6] 이때 고려는 요나라의 압박으로 공식적으로 송나라와의 교류를 잠시 끊은 상태였다. 물론 비공식적인 민간 차원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지만 아무리 출가했다고 하나 왕자가 송에 간다면 요와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7] 소식은 고려가 송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한다고 의천의 입국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사정상 고려 왕자인 의천을 홀대할 수 없었던 송의 사정으로 의천이 송에 건너갔을 때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8] 흔히 '속장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당대에는 교장이라고 하였다. 초조대장경은 경전을 모은 것이고 교장은 경전의 주석서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대장경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하여 학계에서도 '교장'이라는 표현을 권장한다.[9] 왕자이자 왕제인 의천의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하고 의천의 지식과 경전들로 찍어 눌렀다고 보아야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교종과 선종 통합은 고려 왕실의 목표였고 당연히 바로 위의 형인 숙종이 든든히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0] 안타깝게도 해동통보는 의천이 숨지고 이듬해인 1102년에야 이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의천 본인은 이걸 써 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였다. 만일 1년만 더 살았으면 1번 이상 사용할 수 있었을 터.[11] 사료에서 발행과 유통이 확인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이다. 철전으로, 이름은 당나라 화폐에서 따왔다.[12] 물론 화폐 사용 건의 문제는 의천만의 문제점은 아니긴 하다. 후대의 조선에서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인조 등이 대체적으로 무작정 화폐를 찍어내면 장땡이겠지 하고 시도했다가 실패했고[18] 화폐경제가 어느정도 자리잡은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이라는 대삽질을 하기도 했고 서양의 경우도 프랑스에서 미시시피 거품이 터진 것에는 지나친 화폐 발행도 있었다. 거기다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이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 기초조차 없었다. 이 당시만 해도 경제 분야는 그저 국부를 증강시키기 위한 비법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 시대가 농본주의적인 시기라 상업을 통한 국부증강 등은 생소했고 상업 자체도 천시되던 시대였다. 의천을 마냥 비판하기에는 시대적인 문제도 있다.[13] 송나라로 불법 유학을 다녀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만의 하나 의천이 국왕이 되었더라면 이 경력이 문제시되어 국제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의천을 간 크게 차기 국왕으로 밀어주려 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14] 왕의 형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왕권의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만약 의천이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 계속 왕자로만 남아 교단 통합이나 화폐 도입을 주도하려 했었다면 숙종 입장에서는 마냥 곱게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의천이 스스로 왕위와 거리를 둔 덕에 숙종 또한 의천을 잠재적인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형제로서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숙종이 의천의 건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주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며 의천을 추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5] 잘 언급되지 않아서 그렇지 선종 역시 부왕 문종이 이룩한 황금기를 유지시킨 명군이었고 숙종 역시 쿠데타와 비슷하게 정권을 잡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능력이 출중하여 제법 업적을 남긴 케이스였다.[16] 김부식이 쓴 대각국사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