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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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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후속편4. 여담

1. 개요

端宗哀史

1928년 11월 30일부터 1929년 12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장편 역사 소설.

2. 내용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총 217회에 걸쳐 연재한 근대 소설로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사악한 한명회수양대군의 음모에 희생된 단종의 눈물 겨운 생애를 예리한 필체로 애틋하게 그려낸 것으로 저술 당시 큰 인기를 끌어 이광수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한명회신숙주, 권람 등이 세운 더러운 계책으로 수많은 소설의 주연들과 충의지사들이 죽음을 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이 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단종을 끌고 가던 왕방연은 청령포에서 하루 종일 운 후 단종을 가두고 떠나기 전날 간장을 끊는 마음으로 시조를 읊는다. 이후 사약을 가지고 왔으나 단종에게 주지 않고 울고만 있는데 공생이 활줄로 단종을 목 졸라 죽이게 되고 단종을 죽인 후 문을 나서다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

한명회, 신숙주 등의 악랄한 모습과 수양대군의 냉혹하고 비정한 모습, 더러운 조선의 상황 속에서 고결하고 슬프게 막을 내린 단종의 생애 등을 잘 그려낸 수작이다.

다른 유명 역사소설처럼, 소설의 내용이 실제 역사로 잘못 알려진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사육신 사건이 터진 직후 신숙주의 아내가 남편을 크게 꾸짖고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실제론 신숙주의 아내는 사육신 사건이 터지기 몇 년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광수의 창작은 아니고 박종화의 단편소설인 <목 매이는 여인>에서 나왔던 부분을 차용한 것.

3. 후속편

이광수는 1940년대에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세조대왕>을 쓴다. 내용은 사실상 <단종애사>에서 이어지는데, 세조는 피를 통해서 등극했고, 이로 인해서 개인적 고뇌를 겪었으나, 백성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평가하는 내용이다. 단종애사에서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로 그려지던 세조가 단종을 귀양 보낸 이후로는 점점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준다. 사육신의 복위 시도 자체를 모르고 있던 단종[1]을 귀양까지 보낼 필요가 있냐고 고민하기도 하고, 결국 귀양을 보내지만 궁녀와 내시들이 귀양 간 단종을 수발들기 위해 따라간 것을 알고도 모른척 해 준다. 후반으로 가면 내가 왕만 아니었어도 불쌍한 조카를 따뜻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세조 본인은 단종을 죽이지는 않으려 했는데 신하들의 등쌀에 못 이겨 사약을 내렸다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후속편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저술한 것인지는 불명.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형국을 단종, 일본을 세조에 빗대었다는 해석도 있고, <단종애사>에서 <세조대왕>으로 변하는 것은 이광수의 변절을 상징한다는 식의 해석도 존재했다. 그런데 이광수가 민족적 경륜이나 민족개조론을 쓰면서 변절한 시기가 <단종애사>를 쓰기 전인 1920년대 초중반이라는 점에서 좀 애매하다. 저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민족적 경륜을 쓸 때는 "자치론이 진짜로 현실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식이 되기 때문이다.

4. 여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소설이 또 하나 있는데, 김동인의 소설 <대수양>이다. 이 소설은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시기의 수양대군을 대놓고 영웅으로 그린다.

단종애사, 세조대왕, 대수양의 세 작품을 두고 "단종과 세조, 그리고 계유정난을 바라보는 대중적인 시각 3가지가 모두 나온다"며 "역으로 말하자면 당시에 대한 대중의 역사적 인식이 일제강점기 소설가들의 창작에서 별로 나아간 것이 없다" 는 뜻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이런 주장은 꽤나 해괴한 것이다. 왜냐하면 계유정난과 단종/세조에 대한 시각이라는 것이 대중적 인식이건 호사가의 인식이건 전문가의 인식이건 뭐건 간에 '단종 지지-정통성은 단종에게 있으며 수양대군은 찬탈자이다'(=<단종애사>의 시각), '세조 지지-능력있는 정치가인 세조가 왕위를 얻는 것이 정당하다'(=<대수양>의 시각)', '중립-세조의 정통성에는 흠결이 있으나 그 능력과 업적 역시 부정할 수 없으니 공과가 모두 있다'(=<세조대왕>의 시각)'의 세 가지 외에는 딱히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그 성과가 누적됨에 따라 발전하는 인식이란 이런 각각의 시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대한 인식이지 각각의 시각 자체가 아니다. 어떤 주제에 대한 시각 자체는 '찬성'과 '반대', '중립' 이외에 딱히 뭔가 더 나올만한 것이 없고, 계유정난을 둘러싼 시각이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찬반양론이 이미 다 나왔던 것이니 뭔가 새로운 시각이 나올 여지도 별로 없는 것이 당연하다.

굳이 위 주장을 선해하자면 "단종과 세조, 계유정난을 바라보는 대중의 역사적 인식 자체가 일제시대 소설가들의 관점에 비해서도 별 발전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다 예시를 좀 잘못 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수는 있겠으나, 이 역시 별로 적절한 지적은 아니다. 수십년간 학계에서 진행된 연구성과까지 볼 것도 없이, 당장 누구나 편집 가능한 본 나무위키단종(조선), 세조(조선), 계유정난 문서만 봐도 이광수나 김동인이 자기 작품에서 보여준 인식보다 훨씬 자세하고 깊이있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당대의 지식인으로 꼽히던 이광수나 김동인보다 고작 위키나 편집하고 있는 현대의 일반 대중이 더 심도있고 입체적인 인식을 보여줄만큼 대중의 역사인식은 충분히 발전했다. (물론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그 정도의 인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도 많겠지만, 이건 공정한 비교가 아니다. 무언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란 그 대상에 대해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알아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던 일제시대 전후에 비해 농업인의 인구가 적어진 현대인의 대다수는 농업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를 근거로 현대 농업의 수준을 일제시대와 비교할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일제시대의 역사 인식 역시 '계유정난이 뭔지도 모르고, 문맹이라 이광수, 김동인의 소설을 읽지도 못하던' 시골의 무학자들까지 포함해서 따지든지.) 결국 '대중의 역사 인식에 별 발전이 없다' 자체가 대중의 무지를 깔보며 잘난척해보고 싶었던 이들의 억지 주장이고, 이 억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견강부회로 억지 근거를 만들어내려 했다는 해석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1] 이것도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성삼문 문서나 사육신 문서에도 나오지만, 성삼문이 "단종이 칼을 주면서 지지를 표했다."라고 증언했던 것이 상왕 취급 받던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서 영월로 유배가는 결정적 배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