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보 제205호 | |
충주 고구려비 忠州 高句麗碑 | Chungju Monument | |
위치 | <colbgcolor=#fff,#191919>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 2319 (용전리 280-11)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 | 1기 |
지정연도 | 1981년 3월 18일 |
제작시기 | 삼국시대 |
<colbgcolor=#315288> 충주 고구려비 |
[clearfix]
1. 개요
<colbgcolor=#315288> 입석에서 고구려비로 - 충주고구려비 |
1979년 충주 지역 문화재 애호가들이 모인 예성(蘂城) 동호회[1]가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현재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立石)마을에서 발견했다. 발견 경위와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들에 자세히 나와있다.
*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①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에서 ‘한반도 유일 고구려비’를 찾다 (동양일보)
*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② 마멸된 비석에 담긴 고구려의 흔적… 그 가치를 엿보다 (동양일보)
*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3) 국보 205호 중원 고구려비 上 (경향신문)
*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4) 국보 205호 중원 고구려비 下 (경향신문)
이어 1981년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국보 지정 후 개방된 보호각을 지어 안치하였지만, 산성비와 새똥 등으로 훼손이 점점 심해지자 고구려비 전시관을 건축한 뒤 전시관 안으로 옮겼다.
예전엔 '중원 고구려비'라고 불렸는데 이름이 붙여질 당시 비석이 있는 행정구역이 중원군이었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는 중원군과 충주시가 충주시로 합쳐졌기 때문에 현재는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른다.
2. 내역
크기는 높이 203 cm, 전면 폭 55 cm, 좌측면 폭 33 cm이고 1행 23자꼴로 528자를 새겼다. 마모가 심해 해석이 아주 어려웠다.확실한 건립연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래 전문에서 보듯 비문이 대뜸 '5월'부터 시작하기 때문. 12월 23일이 갑인인 것과 좌측면에 신유년이라고[2] 나온 것을 보고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계에서는 건립연대를 두고 449년, 480[3]-481[4]년, 495년 등 여러 연도를 지목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충주고구려비 개관
충주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4면비(그래픽 예시) |
2.1. 397년설 제기
40년 논란 충주 고구려비에서 '397년(영락7년)' 명문 읽었다2019년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최첨단 기술인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하여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영락 7년 정유는 서기 397년이다. 지금까지 학계는 399년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가 고구려에게 원군을 청하고, 이에 광개토대왕이 친정하여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고 여겼다. 만약 충주 고구려비가 정말로 397년에 건립되었다면, 이미 그 이전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5] 발견한 내용이 사실로 인정받으면, 고구려의 모든 대 남방관계사를 다시 써야 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지도와 고려라는 국호를 장수왕 때 바꾸었다는 통념까지 모조리 바꿔야 할 역사적인 발견이다. 그야말로 고구려사와 삼국시대를 다시 써야 할 금석학적 사건이다. 광개토대왕 때 고려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주장한 조경철 선생의 페이스북
그러나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제액 글자배열이 뜬금없이 가로로 나온 점과 마멸도가 심한 점 등 때문에 '7년'이라는 두 글자만 인정하고 다른 사항은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었다.
3.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왜곡
비문이 많이 훼손된 탓에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문화재급 가치가 있는 비석을 겨우 빨래판으로 썼다.'는 낭설이 있으나 사실무근의 역사 왜곡이다. 마모가 워낙 심해 이러한 루머가 붙은것으로 추정되나, 세월을 감안하면 정상적인 수준의 마모라고 볼수 있다. 위의 발견 기록에 나오듯이 마을 사람들도 비석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비범한 돌이라고 여기고 소중하게 다뤘다.국내성 인근의 지안고구려비도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역시도 근거가 없어 왜곡일 수 있다. 현대에 발견된 고대 비석을 두고 으레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설명이 붙는 경우가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비석의 가치도 모르고 무식한 민중들이 빨래판 따위로 쓰면서 비문을 훼손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시선 끌기를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 충주 고구려비 이외에도 빨래판으로 사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경주 문무왕릉비 역시 그 내막은 전혀 다르다.
다만 동네 대장간 기둥으로 쓰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 발견 당시 노인들이 한결같이 증언한 사실이며, 원 발견 위치를 발굴 조사해본 결과 철물주조와 관련된 흔적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4. 전문과 해석
우측면(제2면) |
□□□□□□□□□□□□□□□□□□□□□□□ □□□□□□□□□□□□□□□□□□□□□□□ □□□□□□□□□□□□□□□□□□□□□□□ □□□□□□□□□□□□□□□□□□□□□□□ □公□□□□衆殘□□□□□□□□□不□□使□□ □壬子□□伐□□□□□□□□□□□□□□□□□ □□□□□□□□□□□□□□□□□□□□□□□ |
(판독불가) 마멸이 매우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다. 다만, 壬子(임자), 伐(칠 벌)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어, 시기상 임자년의 392년, 452년, 512년 즈음에 어느 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전면(제3면) |
五月中高麗太王[6][7]祖王[8]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亐桓 奴主簿道德□□□安□□去□□到至跪營□太子共□ 尙□上共看節賜太翟𨛃□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廿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조왕공(祖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9]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10], 태자(太子) 공(共)[11],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12]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해독 |
좌측면(제4면) |
□□□中□□□□城不□□村舍□□□□□□□沙□ □□□□□□□□班功□□□□□□□□節人□□□ □□□□□□辛酉年□□□十□□□□□太王國土□ □□□□□□□□□□□□□□□□□□□□□□□ □□□□□□□□□上有□□酉□□□□東夷寐錦土 □□□□□□方□桓□沙□斯色□□古𨛃加共軍至于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
…… 中 …… 城不 …… 村舍 …… 沙 …… 班功 …… 節人 ……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 (행 전체 마모) 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 에 이르렀다.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판독자에 따라서 각 글자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로 들어가면 각 글자마다 주석을 확인할 수 있다. 뒷면(제1면)에는 글자가 없는데, 글자가 있었다가 없어졌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의견이 나뉜다. 일단은 뒷면에도 글자가 있는 4면비였다는 주장이 더 우세한 듯하다.
당대에 이미 고구려는 자국을 '고려(高麗)'라고 불렀는데,[13],이 비문에 나오는 고려태왕이라는 표현도 이를 뒷받침한다.
4.1. 신라에 대한 관점
신라 왕 눌지 마립간을 동이 매금이라고 칭한 것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오는데, 일단 매금은 마립간을 일컫는 단어다. 고로 비하어가 된다는 건 무리한 독법이다. 우선 신라 측 기록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신라 자신이 스스로를 매금으로 칭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비에서 고구려왕에게 평양까지 가서 조공하는 고구려왕의 신하 신라 마립간이, 여기서는 제3의 장소에서 만나 친목을 다지는 형제로 설정되어 있다. 때문에 해당 단어가 일방적인 비하 표현이라고 보긴 어렵다. 물론 동이라는 명칭은 사전적으로는 오랑캐에 가까운 표현이긴 하다. 다만 이는 당시 고구려 세계관에서 고구려를 중화로 보고 신라를 중화 주변인 동이의 위치로 본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14]가까운 시대의 또다른 고구려비인 광개토대왕릉비와 비교하면, 그 때는 신라를 '속민'이라 주장한 반면 여기서는 형제관계로 설정했다. 또한 신라토, 신라매금토라는, 신라 마립간의 독자적 위상과 신라의 영토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관계 변화가 나타난다. 이 단계의 신라는 꽤 국력이 성장한 단계로, 물론 고구려와 대등한 수준까지는 아니었긴 하나 가야 소국들마냥 완전히 무시할 만한 약소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아직 백제를 완전히 꺾지 못한 상황이었고 캐스팅보트인 신라의 위상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고 어떻게든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신라를 자기네들의 천하에 묶어두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토'를 강조한 건, 엄연히 신라 땅인 봉화-영주 일대가 거의 반 세기가 되어가는 오랜 고구려군의 주둔 기간 동안 신라의 주권 행사가 상당히 제약되어 이에 고조되어 가던 신라의 불만을 반영해 다독인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편 정통 중국식 한문체에 가까운 광개토대왕릉비에 비해, 이 비석에서는 신라 지역에서 더 활발히 쓰인 이두가 많이 쓰여서 이 비석이 신라인을 주 독자로 감안하고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기타
<colbgcolor=#315288> 충주 일대 유적 분포 |
- 충주가 고대부터 한반도의 중요지역이자 요충지였던 것을 보여주듯, 충주 고구려비 주변으로 선사유적과 장미산성, 누암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여러 고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고구려비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국보 제6호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기도 하다.
6.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충주 고구려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충주 고구려비
- 고고학사전: 중원고구려비
- 문화원형백과 - 건국설화 이야기: 중원 고구려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중원 고구려비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중원고구려비
- 두산백과: 충주 고구려비
7. 문화재청 소개: 국보 제205호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8. 참고 문헌
- 金昌鎬,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제13권 제2호, 일지사, 1987, pp. 136-150.
- 徐吉洙, 「중원고구려비 신석문 국제워크샵과 국제학술대회」, 『고구려발해연구』 10, 고구려발해학회, 2000, pp. 129-165.
-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2019), 충주고구려비 발견 4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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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초에는 모임 이름도 없었으나, 이들의 활동이 지역 언론에 알려지면서 고려사 중 충렬왕 3년(1277)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에 연꽃을 조각했다 해서 꽃술 예(蘂) 자를 써서 '충주를 예성(蘂城)으로 일컬었다.'는 대목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1996년에 예성문화연구회로 명칭 변경.[2] 이쪽은 오독의 가능성도 있다는 듯.[3] 12월 23일의 일간지가 갑인일임.[4] 신유년임.[5] 사실 삼국사기 391년에 이미 신라의 왕족인 실성 이사금을 고구려에게 볼모로 보냈으므로 그 이전부터 종속관계에 놓였음은 알 수 있다.[6] 원래는 대왕, 태왕 판독이 엇갈렸다. 2000년 2월에 있었던 중원 고구려비 신석문 국제 워크샵에서는 정밀조사를 통해 태왕으로 판독하였고,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도 태왕으로 반영되었다.
[7]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의 공동판독안에서는 여호규 교수가 ‘丶’획 부분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크랙으로 보아야 한다며 大 판독을 제시하기도 했다.[8] 相王으로도 판독되어 의견이 분분하다.[9] 장수왕 이후, 5세기 건립이 맞다는 가정 하에 이 시기 신라의 국왕을 보면 눌지 마립간(417년~458년), 자비 마립간(458년~479년), 소지 마립간(479년~500년) 중 한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10] 이 부분은 해석이 분분한데, 동사로 볼경우 매금이 고려와의 회맹을 "꺼리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명사로 볼 경우 매금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학계에서도 분분하기에 정확히 어떤 의미로 기록된 것인지는 정확히 집어내기 힘들다.[11] 일반적으로 당시 장수왕의 태자인 고조다로 본다. 그러나 공(共)은 이미 죽은 태자를 칭하는 용례로 춘추에서 사용된 적이 있으므로, 고조다가 태자가 아니고 다른 장자가 태자 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12] 이를 개로왕으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에서 백제왕을 잔주(殘主)로 비하시켜 표현하거나 충주고구려비 내에서 ‘동이매금토(東夷寐錦土)’ 등 신라를 낮추려는 서술태도를 감안할 때 백제왕명을 그대로 썼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충주고구려비에서 백제 개로왕의 출현은 어색하며, 개로왕 재위기 고구려와 신라가 비문에서처럼 형제관계를 천명할만큼 우호적이지 못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김창호는 개로 앞 부분의 생략된 ▨▨▨▨ 부분이 부명, 관등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개로는 개로왕이 아닌 고구려 관리로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인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개로 자체가 꽤 흔한 이름이다.[13] 장수왕 때(413~491)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꿨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중국 사서에서도 장수왕 재위 시기를 기점으로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뀐다.[14] 여담으로 동이라는 표현은 현대 기준으로는 동일한 민족 사이에서도 종종 쓰이기도 했는데, 한국의 삼국의 예시 이외에도 일본의 간사이(관서) 지방이 간토(관동) 지방을 부를 때 동이라고 한자를 쓰고 아즈마에비스로 읽었던 사례가 있다.
[7]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의 공동판독안에서는 여호규 교수가 ‘丶’획 부분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크랙으로 보아야 한다며 大 판독을 제시하기도 했다.[8] 相王으로도 판독되어 의견이 분분하다.[9] 장수왕 이후, 5세기 건립이 맞다는 가정 하에 이 시기 신라의 국왕을 보면 눌지 마립간(417년~458년), 자비 마립간(458년~479년), 소지 마립간(479년~500년) 중 한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10] 이 부분은 해석이 분분한데, 동사로 볼경우 매금이 고려와의 회맹을 "꺼리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명사로 볼 경우 매금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학계에서도 분분하기에 정확히 어떤 의미로 기록된 것인지는 정확히 집어내기 힘들다.[11] 일반적으로 당시 장수왕의 태자인 고조다로 본다. 그러나 공(共)은 이미 죽은 태자를 칭하는 용례로 춘추에서 사용된 적이 있으므로, 고조다가 태자가 아니고 다른 장자가 태자 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12] 이를 개로왕으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에서 백제왕을 잔주(殘主)로 비하시켜 표현하거나 충주고구려비 내에서 ‘동이매금토(東夷寐錦土)’ 등 신라를 낮추려는 서술태도를 감안할 때 백제왕명을 그대로 썼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충주고구려비에서 백제 개로왕의 출현은 어색하며, 개로왕 재위기 고구려와 신라가 비문에서처럼 형제관계를 천명할만큼 우호적이지 못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김창호는 개로 앞 부분의 생략된 ▨▨▨▨ 부분이 부명, 관등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개로는 개로왕이 아닌 고구려 관리로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인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개로 자체가 꽤 흔한 이름이다.[13] 장수왕 때(413~491)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꿨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중국 사서에서도 장수왕 재위 시기를 기점으로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뀐다.[14] 여담으로 동이라는 표현은 현대 기준으로는 동일한 민족 사이에서도 종종 쓰이기도 했는데, 한국의 삼국의 예시 이외에도 일본의 간사이(관서) 지방이 간토(관동) 지방을 부를 때 동이라고 한자를 쓰고 아즈마에비스로 읽었던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