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45:05

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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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군주의 칭호
1.1. 고구려 군주의 칭호
1.1.1. 개요1.1.2. 배경1.1.3. 여러가지 태왕호1.1.4. 사용 시기
1.1.4.1. 광개토대왕 전용 칭호설1.1.4.2. 4~5세기 한정 사용설1.1.4.3. 6세기 이후 사용설
1.1.5. 기존의 미칭과 다른 점1.1.6. 기타
1.2. 신라 군주의 칭호1.3. 고려 군주의 칭호1.4.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 목록
2. 백제의 자칭왕 부여태3. 태상왕의 칭호
3.1. 개요
4. 대구광역시의 건설회사

1. 군주의 칭호

한국사 군주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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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구려 군주의 칭호

1.1.1. 개요



삼국시대 고구려 중기부터 사용했던 군주의 칭호.

광개토대왕릉비의 정체가 막 드러난[1] 구한말~일제강점기 때는 광개토대왕 한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의 일부로 인식된 것이 시작이었으나 이후 서봉총, 충주 고구려비, 태왕릉, 모두루묘 등이 연구되어 고고학적 성과가 나타나자 고구려의 여러 군주들을 가리키는 칭호로 주목받았다.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고 양기석, 노태돈 등으로 인해 고구려의 천하관 연구가 시작되면서 해당 분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단어 중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 외에도 태왕릉, 고구려 금석문 관련 연구에서도 그 주인공을 밝히기 위한 단서로써 해당 용어의 성격을 다루기도 한다.

이와 별개로 직접적으로 태왕호가 연구의 대상이 된 사례는 70~80년대에 일본 학자들이 천황 이전에 일본에서 통용하던 대왕호 연구에 대해 주변국 사례로서 부속적으로 다룬 경우가 있었다.

1.1.2. 배경

기존 천손사상 발전+중앙 집권화+중화사상 독자적 현지화 수용+5호 16국 벤치마킹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5호 16국 시대를 연 북방 민족들은 천왕호를 칭하여 중화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제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적인 위상을 도모했다. 고구려도 이에 자극받아 대외적으로는 요동, 요서, 만주, 연해주, 한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입지를 갖추고, 대내적으로는 제종족을 거느리며 왕권과 군주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기존의 천손의식과 결합하여 고구려식 천하관을 정비하고 태왕호가 등장했으리라 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왕중왕을 가리키는 칭호가 '황제'뿐이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기에 잘 모르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태왕'이라는 칭호에 대해서 '황제라기에는 부족하고, 그냥 이라기엔 허전해서 붙인 칭호'라고 마치 황제와 왕의 중간 단계쯤으로 으레 짐작하는 인식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일본의 태왕호 연구 초창기에서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제 관계를 상정하여 이를 이해하는 범위에서 생긴 칭호라거나, 천황 같은 황제호 파생 단어가 아니라 왕호 파생 단어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국제적인 마찰 문제도 비켜 날 수 있다는 계산 등도 가능성으로 제기되었기에 아주 없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연구에서는 대왕, 태왕의 혼용이 많았을 뿐[2] 태왕호 자체가 동아시아 조공책봉 체제에서 통용되는 왕작과는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종래의 왕의 위상을 초월한, 내지는 왕중왕의 위상을 지닌 용어로 이해되며 이것이 제도적인 기반이 있는 칭호인지 여부가 더 크게 갈리는 듯 하다.

왕(왕검)이란 용어 자체가 고조선 때 '천자(天子)'라는 뜻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용어이며,[3] 고대에는 황제를 단순히 보다 더 높은 칭호가 아닌, 중화권에서나 통용되는 이질적인 칭호로 받아들인 정황에 주목하여 태왕이란 왕에서 파생된 단어이되 중화권에서 황제, 북방에서 가한(카간)이 통용되듯 최고 지도자의 칭호로서 의의를 찾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 또는 한반도 국가에서 왕중왕을 '황제'라고 칭하는 것은 민족구성이나 신화적 맥락에서 연관성이 없다. 위에서 언급한 '천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왕(王)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황제의 위상을 담지 못하거나 격이 낮은 칭호가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당장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왕'보다 더 높은 칭호를 만들 때 중국의 '황제'처럼 기존의 칭호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칭호를 굳이 별도로 만들지 않고도 왕중왕이니 지고왕이니 상급왕이니 하는 것처럼 기존의 '왕'에 해당하는 칭호에 수식어를 붙여 '왕'보다 더 높은 군주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를 만드는 일은 매우 흔했다.

예를 들어 샤한샤(왕중왕), 아르드리(지고왕), 카간(대칸) 등등. '태왕'도 마찬가지로 태왕이란 칭호에서 '왕'이 들어가 있다고 하여 '황제'보다 격이 낮다고는 절대 볼 수 없고, 거서간이나 마립간처럼 고구려에서도 고유의 칭호가 있었으며 태왕은 단순히 그것을 번역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4] 그랬다면 고유의 군주 칭호를 가진 고구려가 보기에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에서나 사용하는 이질적인 칭호일 뿐' 그것이 자신들의 칭호보다 더 높다고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북방민족의 '카간'이라는 칭호가 한족의 '황제'라는 칭호보다 뒤떨어지는 칭호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한국에서 '황제라는 칭호가 다른 군주 칭호들 보다 우위'라는 식으로 교통정리가 되는 시기는 빠르게 잡아도 고구려 멸망 이후인 남북국시대쯤부터이다.

1.1.3. 여러가지 태왕호

대한민국에서 가장 익숙한 태왕호 사용 사례는 광개토대왕비의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다. 그리고 충주 고구려비의 '고려태왕'. 이 두 사례만 보아도 태왕호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순히 '태왕'에서 여러 미칭이 추가된 태왕호도 있다.
  • 태왕(太王)[5]
  • 호태왕(好太王)[6]
  • 호태성왕(好太聖王)[7]
  • 성태왕(聖太王)[8]

삼국사기에서는 '태'자가 빠지고 '호'자, '상'자만 붙은 태왕호도 보인다. 이는 태왕호의 단편적인 일종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단편적 태왕호가 보이는 광개토대왕 시기부터 태왕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 호왕(好王)[9]
  • 상호왕(上好王)[10]
  • 상왕(上王)[11]

1.1.4. 사용 시기

광개토대왕비, 모두루 묘지명 등을 보면 고구려 초기 임금들을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으로 이름을 기재(휘호)하는 걸로 보아 초창기에 태왕호를 제정했을 확률은 낮다.

4세기 후반 고국원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국강상성태왕'이라는 사례가 가장 이른데, 태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는 미천왕~고국양왕까지 설이 갈린다.
1.1.4.1. 광개토대왕 전용 칭호설
우선 태왕이라는 칭호를 발견한 것이 광개토대왕릉비이기 때문에 가장 처음 퍼진 익숙한 설이다. 이미 학설로선 거의 설득력이 없지만 태왕비, 호태왕 등의 용어나 태왕사신기 같은 대중문화에서의 작명센스 등도 어찌보면 그런 흔적이랄 수 있다.
1.1.4.2. 4~5세기 한정 사용설
현재 금석문 상으론 4세기 말, 5세기 중에서 사례가 확인된다. 다만 남아있는 고구려인의 태왕호 기록이 해당 시기 밖에 없기 때문에 5세기까지만 사용했다 하고 선을 긋기엔 애매한 부분.
1.1.4.3. 6세기 이후 사용설
광개토대왕 때 '~호태왕'이라는 칭호가 비문에서 등장한 이후의 시기. 삼국사기에서는 '~호왕'이라는 칭호가 고구려 임금의 이명으로서 많이 남아있다.

태왕호를 5세기에서도 사용한 것은 확실하고, 또한 특별히 칭호를 낮출 이유는 없는 점과 삼국사기에서 남은 왕호는 당대 쓰인 풀네임이 아니라 그 파편이고 그 와중에 태왕 칭호가 생략된 것 등에서 착안하여 삼국사기에 기록된 '호왕[12]'이라는 단어를 'ㅇㅇ호태왕'의 약칭으로 이해하여 6세기 말 이후까지 사용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 유민 고을덕 묘지명에서도 7세기에 영류왕을 '건무태왕'이라 지칭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당시 우리 삼국에서 피휘 관습이 약했다는 점, 이미 '고려태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던 기록을 들어 영류왕이 자신의 이름을 덧붙인 태왕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1.1.5. 기존의 미칭과 다른 점

이 외에 고구려 왕의 미칭으로 언급되는 용어들은 성왕(聖王), 신왕(神王), 명왕(明王), 대왕(大王) 등이 있다.

다만 아래에서 언급한 점 등에서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단순한 왕의 존칭을 넘어 제도적인 군주호로 제기되기도 한다.
  • 시호나 관용적인 어구에 국한되지 않고 생시의 호칭으로 이용된다는 점.
  • 고구려인들의 자체 기록에서 주로 등장하는 칭호라는 점.
  • 유일하게 완전하게 남은 고구려 군주의 시호에서 보이는 칭호라는 점.

예를 들어 호왕의 경우에는 호태왕이라는 존호의 파편일 가능성이 있으며 시호로 보이는 부분 외의 용례가 없다. 성, 신, 명 등은 나라 가리지 않고 관용적인 수식어구로 흔하게 쓰이는 칭호이며 대왕의 경우에는 시대나 국가를 가리지 않고 으레 을 높여부르는 경칭으로 쓰이는 단어이다.[13][14]

그 때문에 단순히 선대왕의 존칭이나 시호가 아닌, 생전의 호칭으로도 사용된 것이 당대 기록으로 남아있는 태왕은 좀 다르게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1.1.6. 기타

오늘날은 태왕이든 뭐든 '왕'이라고 표기하면서 또 그 왕 가운데 특정한 인물은 존경하는 뜻을 담아 임의로 높여 '대왕'이라 칭한다. 또 옛날의 대왕은 왕의 존칭인 경우가 많지만서도 동시에 왕중왕이란 개념으로도 간주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정리하면 대왕=왕<태왕=황제=왕<대왕 같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상황도 더러 발생한다.
  • '태왕'하면 광개토대왕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상술했듯 현재 학설로선 위력이 없지만 광개토대왕=호태왕으로 인식하는 학설이 남아있거나 태왕사신기와 같은 대중문화의 작명센스 등에서는 여전히 비슷한 식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지칭하는 사례가 '왕'이 4~6번, '태왕'이 8~12번 등장한다. 이외에 모두루 묘지명, 호우총, 서봉총 등에서도 등장한다. 따라서 광개토왕 때는 '태왕'과 '왕'의 칭호가 제대로 분화되지 않았거나 태왕=왕의 미칭으로 한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황제'의 약칭을 단순히 '제'라 하듯 태왕의 약칭으로서의 표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태왕호를 미는 특정 학자는 책을 낼 때마다 출판사와 한번 이상은 꼭 싸운다고 한다. 대왕이 더 익숙한데 굳이 태왕이라 해야겠냐고...
  • 앞서 언급했듯 한국사에서 천하관 관련 연구는 고구려의 사례에서부터 시작한 것이고 우리 역사에서 국력 면에서 월등한 성과를 남긴 고구려가 주목받는 경향이 강하긴 하다. 하지만 고구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국력 신장과 더불어 천하관을 정비하면서 비슷한 경우가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천왕 칭호를 사용한 정복왕조나 백제, 신라, 등에서도 황왕, 제왕, 천왕, 천황 칭호와 더불어 독자적인 천하관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너무 지나친 의의 부여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 한국사와는 별개로 중국에서 개오가 북위의 태무제에게 봉기하면서 천태왕을 자칭했다.
  • 황제와는 다르면서도 자주성이 드러나는 칭호라 그런지 각종 대체역사물에서 본격적으로 칭제하기 전 외왕내제용 칭호로 사용되고는 한다.

1.2. 신라 군주의 칭호

신라에서도 6세기부터 태왕 칭호를 사용했던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울주 천전리 각석에서 모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태왕(聖法興太王)이라는 기록이 있고[15]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는 진흥태왕(眞興太王), 김천 갈항사 석탑기의 경신태왕(敬信太王) 등의 기록이 있다.

대체로 신라의 태왕 칭호 사용은 좀 더 앞 시대에 태왕 칭호를 사용했던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왕호를 사용하며 동시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는 것을 통해서 과거 고구려의 반속국[16]이었던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고구려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듯이 고구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자국이 천하의 중심에 있음을 선포하려 했다.

또한 진흥왕은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불교 신들의 이름을 따서 짓고, 진평왕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사용하는 등 고구려[17]와 중국[18]의 천하관과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 강화로 사용하였다.

마운령비창녕 척경비에서는 태왕 말고도 제왕(帝王)이나 (朕) 같은 용어도 사용하고 있어서 신라가 6세기부터 천자국의 체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3. 고려 군주의 칭호

성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사후 성종이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묘호는 대종(戴宗), 시호는 고려사절요 기준으로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이며 고려사 종실 열전에는 '대왕(大王)'이 '태왕(太王)'으로 되어 있다.

다만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사례가 꾸준히 나오는 게 아니고 단발성이라 이 경우는 그냥 잘못 쓴 오탈자일 가능성도 높다. 클 대 자와 클 태 자는 겨우 점 하나 차이이고 애초부터 뜻이 비슷해 혼용되는 한자이기도 했다. 현대에도 대통령(大統領)에 점 하나 더 찍어서 견통령(犬統領)이라 잘못 써서 경을 친 사건이 있었듯이 말이다(...).

원 간섭기 이후 관제가 격하되어 묘호를 쓸 수 없게 되자 태조라는 묘호도 낮추어 태왕으로 썼다.

1.4.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 목록

2. 백제의 자칭왕 부여태

이름 태를 따 태왕(泰王)으로도 불린다.

3. 태상왕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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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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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가의 종주와 그 배우자만 표기
왕족
창덕궁 이왕(왕공족 수장)
창덕궁 이왕 척(순종) 창덕궁 이왕 은(의민황태자 영왕)
창덕궁 이왕비
이왕비 윤씨(순정효황후) 이왕비 마사코 여왕(자행황태자비)
덕수궁 이태왕
덕수궁 이태왕 형(고종)
공족
운현궁 종주
이희(흥친왕) 이준(영선군) 이우(흥영군) 이청(운현궁 종주)
운현궁 공비
이희공비 이씨(흥친왕비) 이준공비 김씨 이우공비 박찬주
사동궁 종주
이강(의친왕) 이건
사동궁 공비
이강공비 김씨(의친왕비) 이건공비 이성자(마츠다이라 요시코) }}}}}}}}}

3.1. 개요

太王

경술국치대한제국이 병탄당한 뒤 일본 제국왕공족조선귀족 제도를 만들어 구 황실과 제후들을 일본 제국의 귀족편제로 편입시켰는데 황제친왕으로 만들고 친왕으로 만들어 왕공족으로 삼았고 조선귀족으로 봉하는 식으로 한 단계식 급을 낮추었다. 그래서 순종황제는 ''(王)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상황인 고종황제태상왕에 해당하는 작위로 '태왕(太王)'을 수여받았다.

고종이 봉작된 정식 칭호는 거처+성씨+신분 방식으로 구성된 '덕수궁 이 태왕(德壽宮 李 太王: 도쿠주큐 리 타이오오)'이다.[20]

왕공족의 성립 당시에는 일본의 황실 전범을 준용하는 방식이었으나 1926년 왕공가 궤범이 만들어지고 그 위계가 왕 - 왕비 - 태왕 - 태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비 - 왕세손 - 왕세손비 - 공 - 공비의 순서로 명문화 되었다.

4. 대구광역시의 건설회사

태왕이앤씨 참고.


[1] 비석의 존재 자체는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고구려 왕릉비라는 것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구한말에서야 재발견했다.[2] 대왕이라는 단어에 익숙했던 시기가 긴 데다가 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시기가 긴 것도 이에 일조했다.[3] 진나라전국시대를 통일하기 전까지는 중화권에서도 왕호가 그냥 평범하게 천자급의 칭호였다.[4] 세계사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 번역가들을 매우 골때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인데, 예를 들자면 술탄이나 차르 같은 칭호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위상의 변천이 있었기 때문에 왕과 황제 모두로 번역될 수 있다. 대체로 근대에 들어서는 고유 칭호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느냐를 평가할 때 외교세계의 표준어로 자리잡은 영어 번역을 기준으로 삼곤 한다.[5] 충주 고구려비[6] 광개토대왕릉비[7] 모두루 묘지명[8] 모두루 묘지명[9] 미천왕(?), 문자명왕 본기[10] 양원왕, 평원왕 본기[11] 고국원왕 본기[12] 상술한 단편적 태왕호[13] 당장 이성계만 하더라도 공식 존호에 성, 신, 명, 대왕 등의 수식어가 한꺼번에 다 들어간다.[14] 우리나라에선 대왕은 단순한 경칭 뿐만 아니라 정식 왕호였다. 대왕 문서 참조.[15] 천전리 각석보다 15년 전에 만든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는 법흥왕을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으로 되어있다. 이 시기 신라에서 태왕과 매금왕(마립간) 두 호칭을 어느 정도 혼용했거나, 짧은 시기 사이에 호칭이 바뀔 만한 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6] 광개토~장수왕 초기에 고구려가 신라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인 뒤 가야와 왜군을 격퇴하고 신라를 속국화했다. 이후 신라가 백제와의 나제동맹을 굳히고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적대하면서 벗어나게 된다.[17] 임금을 '태왕'이라 칭하는 것[18] 황제만 정할 수 있는 '연호'를 제정한 것[19] 진성여왕 대에 세워진 월광사 원랑선사 탑비에서는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에게 '황왕(皇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20] 참고로 순종은 '창덕궁 이 왕(昌德宮 李 王: 쇼토쿠큐 리 오오)'였다. 이태왕, 이왕의 칭호 앞에 붙은 덕수궁, 창덕궁은 당시에도 분가의 명칭을 나타내는 일본 황실의 미야고와는 다른 것으로 인식하고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