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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가람(嘉藍, 任堂)[2], 가남(柯南)[3], 용화산인(龍華山人)[4] |
본관 | 연안 이씨[5] |
출생 | 1891년 3월 8일[6] |
전라도 여산도호부 천서면 진사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7] | |
사망 | 1968년 11월 29일 (향년 78세)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4 진사마을 | |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산169[8] |
가족 | 할아버지 이조흥[9] 아버지 이채(李倸), 어머니 윤병(尹炳) 배우자 김수(金洙) 숙부 이신(李信), 이정(李侹)[10] 남동생 이병석(李秉釋)[11] 장녀 이순희(李順熙)[12] 장남 이동희(李東熙)[13] 차녀 이한희(李漢熙)[14] 차남 이경희(李京熙)[15] 삼남 이종희(李宗熙)[16] |
학력 | 전주공립보통학교[17] (졸업) 관립한성사범학교[18] (졸업)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포장 공로패(한글반포 516주년 세종문화큰잔치) 문화포장 학술원공로상 |
[clearfix]
1. 개요
1920년 1월 3일(토) …… 환형(=이규영)은 나의 정든 벗 가운데 하나다. …(중략)… 그 다음으로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 글 연구도 하고 조선어 발행 계획도 꾀하여 보아, 날과 달이 가고 갈수록 정과 의가 깊어졌다.
1921년 11월 3일(목)한별(=권덕규)이 조선어사전을 짓자고 말한다. 나도 좋도록 해보자고 하였다.
1921년 11월 26일(토) 권덕규(權悳奎), 임경재(任暻宰) 들과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조선어연구회 발기회(發起會)를 열었다.
1942년 10월 22일(목) 오전 6시 함남경찰부(咸南警察部) 형사와 종로서(鐘路署) 형사가 와 수색하여 <조선말본>과 휴지 등을 뽑고, 조반을 재촉하여 먹이고 가자 하여 나섰다.
이병기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中
1921년 11월 3일(목)한별(=권덕규)이 조선어사전을 짓자고 말한다. 나도 좋도록 해보자고 하였다.
1921년 11월 26일(토) 권덕규(權悳奎), 임경재(任暻宰) 들과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조선어연구회 발기회(發起會)를 열었다.
1942년 10월 22일(목) 오전 6시 함남경찰부(咸南警察部) 형사와 종로서(鐘路署) 형사가 와 수색하여 <조선말본>과 휴지 등을 뽑고, 조반을 재촉하여 먹이고 가자 하여 나섰다.
이병기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中
그대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려하나
좁은 가슴 안에 나날히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 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이병기 시조 「시름」中
좁은 가슴 안에 나날히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 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이병기 시조 「시름」中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문학자, 국어학자, 시인, 교육자. 호는 가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문학과 음악이 혼재된 장르였던 고시조와 음악적 자질을 갖고 있지 않은 현대시조의 변별에 획을 그은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의 이론을 정립하여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구분 가능하게 한 선구자이다.[19]
오늘날 이병기 하면 시조시인의 자질을 먼저 떠올리지만, 무엇보다 우리말 강의와 수호 운동 등에 적극 참여한 동립유공자이다. 1922년 10월 13일부터 조선어 과목이 폐지된 1938년 3월 31일까지 조선어 선생으로 활동했으며 권덕규, 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하고 간사로 활동하는 등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활동했는지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작은아버지 이정(李侹)과 첫째 남동생 이병석(李秉釋)도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2. 생애
1891년 3월 5일 전라도 여산도호부 천서면 진사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 수우재(守愚齋)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아버지 이채(李倸, 1868. 4. 17 ~ 1948. 11. 4)[20]와 어머니 윤병(尹炳, 1864. 6. 11 ~ 1933. 9. 17)[21] 사이의 6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2] 1906년 3월 성년식을 치르고[23] 김수(金洙)[24]와 12월 5일 결혼했다.젊은 시절의 이병기 |
1897년~1908년 고향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12년 1월 21일부터 조선어강습원 중등과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한문으로 적던 일기를 순 국문으로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1913년 경기도 화성시 남양공립보통학교(현 남양초등학교) 훈도에 발령[25]된 것을 시작으로 1914년 4월~1917년 7월 전주제2공립보통학교(현 전주완산초등학교) 훈도, 1917년 8월~1919년 3월 여산공립보통학교 훈도 등 교사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당시 수집한 책들은 1963년 5월 24일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과거 이규영과 조선어사전 계획을 꾀하나 1920년 1월 3일 이규영이 사망하고, 이후 1921년 11월 3일 권덕규의 제안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하여, 같은해 11월 26일 휘문의숙에서 김윤경·최현배·최두선 등 16명의 유지와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그 해 12월 3일부터 1930년 1월 5일까지 간사직을 맡아 활동했다. 1922년부터는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부터 시조 연구에 주력했다.
1930년 12월 13일 조선어연구회 한글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남경찰서와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연행 구속된 후 홍원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함흥형무소에서 출감했다. 출감 이후 강도 높은 감시와 협박으로 1944년 3월 30일 계동 가옥을 매매하고 낙향했다.
1945년 11월 13일 조선어학회 회원 등과 함께 찍은 사진(앞줄 좌측 두번째 이병기) |
8.15 광복 후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1952년 9월 5일부터 전북대학교 제 1대 및 제 2대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8월 13일 정년퇴임하였다. 이후 중앙대와 서울대 대학원 강사로 활동했다.
1955년 3월 19일 국립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졸업기념 사진(앞줄 좌측 여덟번째 이병기) |
그러다가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행사 『우리말큰사전』 출간기념회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인근에서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졸도하여 1958년 3월 31일에 모든 강단직을 사임하고 생가가 있는 여산으로 귀향했으며, 이후 10여 년 간 투병생활을 지속하다가 1968년 11월 28일 새벽 3시 향년 78세로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평생을 시조 혁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으로 수필도 많이 남겼다. 그의 시조를 이수인이 가곡하여 노래로 만든 별이 있는데 현재까지도 교과서에 실리는 등 인기가 있는 가곡이다.
1969년 11월 19일 가람 이병기 서거 1주년을 기념하여 가람시비 건립이 계획되고[26], 30일 전주시 다가공원에 가람시비가 건립되었다.
1990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 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93년 6월 1일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2017년 10월 14일 가람 이병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익산시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 옆에 가람문학관[27]을 건립했다.
3. 일기
1909년 4월 13일부터 1966년 6월 18일까지 무려 57년 동안 일기를 썼다. 1917년 3월 31일까지는 한문으로, 이후 1919년 4월 14일부터 순한글로 작성하다가 1926년 5월 1일부터는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했다. 일기의 일부가 1976년 『가람일기』라는 제목으로 신구문화사에서 출판[28]되었으나 절판되었다가, 2019년 일기 전체가 전북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가람 이병기 전집』에 수록되었다.[1] 가람문학관 유물 소장품에 따르면, 과거에는 'Yi Byong gi(1950년대)'와 'Lee Pyung Kie(1955)'로 표기했었다.[2]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순우리말에 따온 것으로 무궁·진실·조화 세 가지 뜻을 붙여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1920년 7월 31일 수당(壽堂)이 이병기에게 '임당(任堂)'이라는 호를 지어주었으나, 이미 '가람'이라는 호를 마음에 두었으니 한문으로 표기할 적에는 '任堂'으로 표기하겠다는 대화를 나눈 기록이 같이 적혀있다.(그러나 가람의 낙관에는 '嘉藍'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과거에 출판된 시조집 등 대부분이 한문이 아닌 순우리말 '가람'으로 표기되어 나왔으며, 현대에 이병기의 호를 소개할 때에도 순 우리말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3] 1944년 4월 3일 서울 계동에서 이병기가 걸은 문지방 현판의 이름이 '매화옥(梅花屋) 가남(柯南)'이며, 그곳에서 거주할 때 쓰던 낙관에는 '매화옥진완(梅花屋珍玩)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호는 거의 쓰지 않았다.[4] 자신의 본가가 여산에 있는 수우재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낙관에 새긴 '용화산인장(龍華山印藏)'이 있다.[5] #.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사우당공파(四友堂公派) 25세 병(秉) 항렬. 아버지 이채(李倸, 1868. 4. 17 ~ 1948. 11. 4)는 24세 人변(외자) 항렬.[6] 음력 1월 28일[7] 해당 주소에 현재까지 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8] 생가 바로 뒤에 있으며, 위성사진으로도 잘 보인다.[9] 아호 : 동우(東愚)[10] 1884.10.26.~1925.03.24.[11] 1894~1930[12] 1908.07.10. 출생[13] 1924.04.14. 출생, 1943년 이후로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였는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병기의 장남은 1944년 8월 28일 입영통지서 수취 및 같은해 9월 6일 현역병증서가 와 10일 조선군 제12부대 치중병(나남)으로 입영했다. 같은해 9월 25일 히로시마시 서부10부대 제3반에 있다는 편지가 도착하는데, 이 소식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가람 일기에는 히로시마로 징병되었던 임경규(林炅圭)에게 1945년 11월 3일에는 이동희가 8월 전에 중국 지방으로 출정했다는 이야기를, 21일에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제10부대(이동희가 있던 곳)에도 사망자가 있었다는 진술을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이후 소식을 듣거나 찾았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14] 1926.04.16. 출생[15] 1929.08.23. 출생[16] 1932.04.21. 출생[17] 1909.04.16.~1910.04.16., 4학년으로 입학했다.[18] 1910.04.16.~1913.03.23.[19] 이와 같은 이유로 '현대시조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20]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여산 지역의 유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07년 7월 호남학회의 3차모임에서 회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09년 1월 호남학회 전북지회 여산 임원으로 찬성회에서 학회 후원 및 전북 지방 교육문제에 대한 연설회를 가졌고, 같은 해 2월 전라북도 시찰위원으로 각 학교 시찰 및 의연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19년 3월 10일 이병기의 숙부인 이정(李侹), 중부인 이신(李信), 동생 이병석(李秉釋)과 함께 익산군 여산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었다. 1922년 6월 여산금융조합(礪山金融組合) 감사에 선출되어 취임했다.[21] 파평 윤씨, 윤상훈(尹相勳)의 딸이다.[22] 인조 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이귀의 11대손이다.[23] 이 관례를 치르기 위해 조부 이조흥이 승운정자(勝雲亭子)를 지었다.[24] 충정남도 논산군 두마면 은동(隱洞)의 광산 김씨[25] 1913년 4월~1914년 4월[26] 가람선생시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개설되었으며, 신석정 시인이 위원회에 참여했다.[27] 현충시설 관리번호 51-1-62, 공립문학관 지정번호 전북-공립21-2019-6[28] 이 과정에서 일기 원본이 낙서 등으로 상당수 훼손되었고 두 권은 유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