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규상(朴奎相)[1] |
생몰 | 1893년 1월 21일 ~ 1921년 2월 23일 |
출생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사망지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강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규상은 1893년 1월 21일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영암보통학교 교사 조극환은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3월 1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 했지만 사전에 일본 헌병대에게 발각되어 제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 못한 채 체포되었다.이후 당국의 감시가 심해졌지만, 박규상은 영암군에서 만세시위를 제대로 벌이기로 결심하고 최한오(崔漢五), 조병식(曺秉植) 등과 의기투합한 뒤 영암읍내의 유지 정학순·최민섭(崔旻燮) 등과 연락을 취해 영암읍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해 구림리와 영암읍내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박규상은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본부로 정했고, 당시 군서면 면서기로 근무하던 김재홍(金在洪)과 최민섭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활용해 태극기 50매, 독립선언서 600매, 독립신문 500매, 독립가 1000매를 등사하여 영암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이를 널리 배포하게 했다. 이후 4월 10일 오전 9시, 박규상은 태극기와 유인물을 회사정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나눠주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는 1,000명으로 불어난 군중과 함께 영암읍내 중심가로 행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에 걸려 병보석 처리된 뒤 귀향하다가 1921년 2월 23일 서호강을 건너던 중 배 안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규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함양박씨 문원공파의 상자 돌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