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13:42:31

서정만

1. 서정만(徐廷萬)2. 서정만(徐貞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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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정만(徐廷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서공유(徐公有)
본관 달성 서씨
출생 1889년 6월 13일
전라북도 익산
사망 1919년 4월 4일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의 독립유공자 서정만(徐廷萬/서공유徐公有)은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의 주도자는 문용기(文鏞祺), 박도현(朴道賢), 장경춘(張京春) 등으로 알려졌다.

거사의 당일, 천여 명의 시위 군중들과 함께했던 서정만은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리 장터로 행진하던 군중들을 향해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보병부대는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으나, 시위대의 함성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그에 일본은 수백 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을 동원해 총, 창검, 곤봉, 갈고리 등을 휘두르던 끝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선두에 위치했던 서정만은 문용기 등과 순국하였다.

서정만에게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출처1:두산백과
참고출처2:공훈전자사료관

2. 서정만(徐貞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미상(未詳)
본관 미상(未詳)
출생 1880년
미상(未詳)
사망 1909년 3월 18일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독립유공자 서정만은 정용대(鄭用大)의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이다.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의 일본은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이어 고문 정치에까지 이르렀다.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륵약(乙巳勒約)」[1]에 더해 통감부를 설치하여 억압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출시킨 일본은 잇따라 군대 해산을 강제하여 한민족을 무력화하였다. 그에 반발한 의병들은 전국 각처에서 봉기하며 일본군과 친일 주구들의 처단과 국권 회복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08년부터 정용대 의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서정만은 1909년 자택으로 귀가했던 찰나에 경기도 양주군에서 일본군 제2토벌대 및 제2정찰대 연합대에 의해 붙잡혔다. 탈출을 시도했던 서정만은 결국 피살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서정만에게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항일의병기념공원
참고출처1:공훈전자사료관


[1] =을사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