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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3764> 국립대전현충원 國立大田顯忠院 | Daejeon National Cemetery | |
기능 | 국립묘지 |
원장 | 황원채 |
주소 |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 |
상급 기관 | 국가보훈부 |
안장자수 | 149,483명(2024년 10월 4일 기준) |
링크 | | | | |
[clearfix]
1. 개요
국립대전현충원 |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이다. 1955년에 개장했던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 포화[1]와 영현 안장 한계 등으로 인하여 1985년에 개장하였다.[2][3] 관할 기관은 국방부가 아닌 국가보훈부.[4] 공주로 가는 길에 있으며 조금만 더 가면 계룡산이 나온다.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넓이는 3.22km²로 모나코보다 넓다.
2. 역사
본래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읍[5] 갑동리에 속했던 곳이었으나 1989년 1월 대전시가 직할시(광역시)로 승격되고 충청남도에서 분리되면서 대전광역시 유성구 관할로 편입되었다. 유성읍 자체는 1983년에 대전시에 편입되었으며, 당시엔 중구에 속했고, 뒤에 서구가 되었다가 대전이 직할시가 될 때 구 유성읍과 인근 지역을 합쳐서 유성구가 생겼다. 참고로 옛 충청남도 대덕군의 동북부는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로 편입되었다.풍문에 따르면 풍수지리적으로 계룡산 전체가 좌청룡 우백호 삼아 최고의 명당인데, 당시 전두환 정부가 자리를 잡으면서 전국의 지관들을 다 모아서 자문을 구했다는 말이 있다.
최초 안장은 1982년 8월 27일 이춘원 육군하사[6]를 시작으로 100위를 안장하면서 현충원 안장이 시작되었다.
1996년 국립묘지가 현충원으로 개칭되면서 대전국립묘지에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개칭되었다.
3. 내부 구조
기존의 서울 현충원에는 안장되지 못한 영현과 김창룡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추가로 안장되었으며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묘역, 전사(戰死) 군인 묘역, 순직 경찰관•소방관 묘역, 일반 묘역으로 분류되어 있고 현충선양관과 호국관, 봉안관 등 호국보훈 시설이 있다.2006년에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서 2007년에 의사자(義死者) 묘역이 새로 조성되었다.[7]
대전현충원 안장접수 신청하는 사무소 맞은편 주차장 공간에 매점이 있다. 사무소 옆에는 항상 불교 봉사자들이 유가족들을 위해 간단한 국수와 차를 나누어 준다. 2박 3일 간 장례식장 밥에 지쳤다면 이곳의 국수도 괜찮다. 불교다 보니 육수도 채수로 낸 국수인 듯 하다.
배수로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일부 땅에 묻힌 분골함이 비만 오면 물에 잠길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당시 메스컴에서도 여러 번 다루었다. 현충원 측은 이를 부정하지 않고 있으며, 예산이 부족해 공사가 어렵다는 소리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과 비슷하게 일부 무자격자[8]들이 안장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 특히 김창룡, 안현태 등은 논란이 큰 편이다.[9]
현충탑 앞 현충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었으나 2020년 안중근 의사의 필체를 집자해서 만든 현판으로 교체했다.
4. 안장 관련 내용
2004년 9월 21일, 8기까지 안장이 가능한 규모의 국가원수묘역이 조성되었는데, 그 이후에 사망한 대통령 중에서 2006년 사망한 최규하 전 대통령과 영부인 홍기 여사의 묘소가 유일하게 여기에 있다. 2009년 사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 따라 국립현충원이 아닌 화장을 거쳐 봉하마을에 안장되었고, 같은 해 사망한 김대중 전 대통령[10]과 2015년에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통령 참배가 용이하게 이루어지도록 해 달라는 유족들의 요청으로 인하여 대전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현재까지 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 1기만이 안장되어 있다.참고로 전현직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국립현충원 안장자격이 되지만, 국가보안법위반, 내란, 외환의 죄로 금고이상 실형이 확정된 경우, 살인, 상습상해죄·폭행, 상습체포·감금, 약취·유인 및 인신매매, 강간·추행, 상습절도, 강도, 상습사기, 상습장물, 국고손실, 군사기밀 탐지·누설 등의 죄로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이 확정된 경우, 공무원과 공무에 종사하는 직원으로 수뢰, 횡령·배임죄로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이 확정된 경우, 탄핵이나 징계처분에 따라 파면 또는 해임된 경우에는 국립현충원 안장이 불가능하다.[11]
이 점에서 구속되었거나 현재 생존 중인 전직 대통령 2명은 모두 국립현충원에 못 갈 것 같지만,[12] 법에 구멍이 있어 최종적으로 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서 안장을 의결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현재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이 사면·복권된 후 이 곳에 안장이 되어 있어서 논란이다. 2017년 10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이에 대해 "사면·복권을 했다고 하더라도 유권해석은 필요하겠지만, 국민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 제가 결정을 해서 말하기는 조금 부적절하다."며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202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내린 유권해석에서 국립묘지법 제5조 제4항 제3호는 사면받은 사람이라도 적용된다라고 본 이상,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할 것이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같은 항 제4호에 해당하기 때문에 불가할 것으로 보인다. 단, 여전히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5호, 다시 말해 심의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논란은 쉽게 종식되진 않을 것이다.
제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들은 2015년에 특별히 한 곳으로 이장해 묘역을 새로 조성했고,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전사한 46명의 천안함 승조원들은 사병 묘역 일부에 합동 안장 후 철제 울타리를 쳐두었다. 행사 등이 잦아 상대적으로 찾는 인원이 많은 점을 감안한 것으로, 양 묘역 모두 추모 상징물 등이 있으며 제2연평해전 및 연평도 포격 사건 전사자 묘역엔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간이 쉼터가 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 윤영하 해군 항해소령, 천안함 피격 사건 전사자 고 이창기 해군 갑판[13]준위는 원칙대로면 장교 묘역에 따로 안장되어야 하나, 참배를 용이케 하고 전우들과 함께 안장해야 함을 고려해 다른 사병 전사자와 함께 안장[14]되어 있다. 대령 이하 장교는 묘역만 다를 뿐 비석이나 장지 규격 등이 사병과 동일하므로 특혜 시비는 없었다. 서울현충원은 장교와 사병의 묘지 규모는 동일하나 묘비 모양에 약간 차이가 있어서 장교는 각이 져 있고 사병은 둥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전현충원은 최근들어 그런 구별을 두지 않으며 2017년 2월부터는 장교와 사병 묘역 구별을 아예 없애고 장사병묘역으로 조성 중이다. 다만, 천안함 승조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당 사건 수습 중 순직한 한주호 해군 특전준위와 3명의 링스 대잠헬기 추락 순직자들은 따로 떨어져 있어 이들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안장된 이들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적잖이 많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군 헌병 출신으로 갖은 물의를 빚은 김창룡. 자세한 것은 국립현충원 항목의 비판 문단으로. 이 밖에 김재현 기관사의 위패는 이곳에 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유해는 서울특별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2020년 백선엽 퇴역 육군 대장 사망 이후로, 일부 지지자들이 "구국의 영웅을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건 격이 낮은 대우를 하는 것이니,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전현충원 쪽이 격이 낮다는 건 근거 없는 주장인데 이 논리대로라면 역시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순국 장병들도 홀대라는 주장이 성립되는 것이다. 국방부와 국가보훈처에서는 "같은 국립묘지로서 차등은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국립묘지별 안장 대상자를 적시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에도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연천현충원은 한 항목으로 묶여 있다. 법률상으로 차등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충일 추념식도 서울, 대전에서 번갈아가며 치러지고 있다. 이렇듯 대전현충원 안장을 '홀대'로 볼 근거는 없으나, 서울현충원 안장을 바라는 쪽에서는 수도로서 서울이 갖는 상징성과 접근성을 이유로 서울 안장이 적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20년 현재 대전현충원 또한 안장묘역 포화[15]로 인하여 충혼당이 건설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도 2020년 7월에 만장되어서, 서울현충원 또한 제2충혼당 건설하여 2022년 4월 29일에 개관했다.[16] 세월호 참사 당시 순직한 교사 9명도 현충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순직하였으므로 의사자 자격으로 안장되어있다. #
유족들 중 수도권 거주자의 경우, 수도권에서 대전으로 가기까지 거리도 교통체증도 만만치 않기에[17] 일부 유족들은 국립연천현충원이 완공되면 거기로 이장을 희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를 다른 현충원에 안장할 근거는 없다. 서울에서의 거리만 놓고 보면 연천이 대전보다 가까운 것은 사실이나, 교통 여건을 감안하면 차라리 대도시인 대전이 더 나을 수도 있다.
5. 주요 행사 및 교통
매년 현충일이 되면 이 곳에서도 현충일 추념식이 열리며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지역 인사 및 각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분향 및 헌화 의식을 가진다. 이쪽은 대전시가 행사를 주관하고, 서울 국립현충원과 비슷한 규모로 행사를 진행한다. 또한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날이기 때문에 현충원 앞 도로와 구내도로에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현충원 정문에서 묘역까지 들어가는데 1시간은 기본일 정도다.이렇기 때문에 현충일만 되면 대전현충원 측에서 관광버스를 수 십 대 전세를 내어 대전복합터미널, 대전역, 서대전역을 오가는 셔틀버스와 월드컵경기장역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요금은 무료. 현충일 한정해서 버스전용차로를 운영하기 때문에 확실히 이쪽이 빠르다. 시간대는 매년 차이가 있는데, 1달 전 쯤 대전현충원 홈페이지에 버스 운영 계획표가 뜬다. 보통 각 군 참모총장은 1월 1일과 현충일, 국군의 날 등에 서울현충원 대신 이 곳을 찾는다. 육해공군본부가 위치한 계룡대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또 3군이 통합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한 것이다. 특히 해군은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전 등 21세기 들어 생긴 상징적인 사건들의 전사자들이 많아 유관 행사를 대전에서 할 일이 많다.
이 외에 설날, 추석에도 성묘를 하기 위한 참배객 때문에 명절에는 공주에서 유성으로 들어오는 나들목이 꽉 막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따라서 명절 당일에 현충원을 가야 한다면 차를 두고 가거나, 여의치 않다면 아예 늦은 오후 혹은 이른 아침에 참배하기를 추천. 그 외에 공주에서 대전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논산 방면으로 우회하는 1번 국도 계룡 2터널 방향으로 미리 빠지는 것도 방법이며, 그 역방향으로 갈 때에도 이 도로로 향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여태껏 서울현충원에서만 주로 열린 현충일 정부 추념식을 대전에서 치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데, 군인 외에도 경찰관, 소방관, 의사자 등 사회를 위해 헌신한 영령들이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18] 그 분들까지 기리기 위해서라는 의미라는 명분이기는 하나, 안 그래도 현충일 당일 대전현충원의 도로상황과 교통상황은 혼잡하기 그지없는데 VIP 임석 경호 보안 문제로 유족 및 조문객의 불편이 매년 반복되는 상황이다.
첫째로 현충원역을 경유하는 버스가 우회운행함은 물론, 둘째로 현충일 당일 현충원에서 수배해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도 대통령경호처의 요구가 있었다는 이유로 현충원 입구에서 일방적으로 봉쇄되어 타지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기 장소인 월드컵경기장역 입구 앞에서 2시간 이상 넘게 땡볕에서 아무런 안내 없이 무한정 기다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기다리다가 지친 일부 사람들은 택시나 도보로 현충원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 역시 입구가 봉쇄된 관계로 내부로 진입할 수 없어 다시 되돌아 오는 사례도 있었다.
대통령의 경호 문제로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그렇다면 현충원 참배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일정시간을 정해서 이 시간을 피해달라는 사전 안내를 한 것도 아니고, 현충원 현장에서도 일반 조문객을 위한 출입문까지 일방적으로 폐쇄하는 등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려주는 사람도 전혀 없는 이런 상황들은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운 행정 편의주의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부분인데, 앞으로도 이후에라도 대전현충원에 방문 예정인 조문객은 사전에 대통령이 중앙정부 행사 관련 대전에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생고생 하는 수가 있으니 자가용으로 오던가, 아니면 아예 현충일 당일에는 오지 말고 그 전날이나 뒤에 올 것을 권고한다.[19]
5.1. 대전 도시철도 1호선 현충원역
자세한 내용은 현충원역 문서 참고하십시오.말이 '현충원역'이지 현충원과의 거리가 꽤 멀다. 하지만 이 역 말고는 가까운 역도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20] 약 2.2km 정도로, 30분 간격으로 현충원-역 사이를 운행하는 무료 셔틀버스인 보훈모시미라는 이름의 현대 카운티를 타는 것이 좋다. 보훈모시미 기사에게 몇 묘역 가 달라 식으로 얘기하면 그리로 운행해준다.
단, 현충일에는 이 버스가 운영되지 않고, 관광버스 수 십 대를 전세내어 월드컵경기장역과 현충원 주차장을 수시로 오간다. 현충원역과 현충원 사이에 이 버스만 갈 수 있는 전용차로를 설치하여 운행한다.
국립대전현충원 정문 앞에 바로 정차하는 시내버스로는 대전 버스 107과 계룡 버스 48이 있으며, 주말이나 휴일 한정으로 대전 버스 102가 현충원 내부까지 진입한다.
6. 주요 안장자
6.1. 대통령과 대통령 배우자
6.2. 국가유공자
6.3. 애국지사
- 강근호
- 김유길
- 김준엽[23]
- 김지섭[24]
- 나운규[25]
- 민영주
- 박승유[26]
- 박재복
- 반하경
- 오기열[27]
- 장철부[28]
- 조광원[29]
- 주요섭[30]
- 홍범도[31]
- 하희옥
- 류장렬[32]
- 이인
- 이일남
- 함태영[33]
- 황기환
6.4. 군인
6.4.1. 육군
성명 | 계급 | 사망일 | 안장 사유 |
손중철 | 일병 | 1950.8~9. | 6.25 전쟁 전사자 |
이춘원[34] | 하사 | 1953.2.18. | 군 복무 중 순직 |
김진구 | 하사 | 1953.7.?? | 화살머리고지 전투 전사자 |
남궁선 | 이등중사 | 1953.7.9. | |
김기봉 | 1953.7.10. | ||
임병호 | 일등중사 | 1953.7.13. | |
장창국 | 대장 | 1996.12.27. | 전직 대장으로써 안장 |
유학성 | 대장 | 1997.4.3. | |
정승화 | 대장 | 2002.6.12. | |
김춘삼 | 상사[35] | 2006.11.26. | 6.25 전쟁 참전 |
윤장호 | 하사 | 2007.2.27. | 아프간 전쟁 참전 중 탈레반 테러로 순직 |
김재명 | 중장 | 2009.6.24. | 전직 중장으로써 안장 |
길창덕 | 하사 | 2010.1.30. | 6.25 전쟁 참전 무공으로 화랑무공훈장 수훈 |
장태완 | 소장 | 2010.7.26. | 전직 소장으로써 안장 |
안현태 | 소장 | 2011.6.25. | 전직 소장으로써 안장 |
김성도 | 병장 | 2018.10.21. | 독도지킴이 활동 및 베트남전 참전 |
전병수[36] | 준장 | 1972.1.4. | 전직 준장으로써 안장 |
백선엽 | 대장 | 2020.7.10. | 6.25 전쟁기 육군참모총장 |
류근창[37] | 중장 | 2020.10.24. | 전직 중장으로써 안장 |
윤용남 | 대장 | 2021.8.6. | 전직 대장으로써 안장 |
6.4.2. 해군
성명 | 계급 | 사망일 | 안장 사유 |
윤영하 | 소령 | 2002.6.29. | 제2연평해전 전사자[38] |
최영섭 | 대령 | 2021.7.8. | 6.25 전쟁 참전 |
박경수 | 상사 | 2010.3.26. | 천안함 피격 사건 전사자[39] |
한주호 | 준위 | 2010.3.30. | 천안함 피격 사건 구조작전 중 순직 |
6.4.3. 해병대
성명 | 계급 | 사망일 | 안장 사유 |
서정우 | 하사 | 2010.11.23. |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
문광욱 | 일병 | ||
채수근 | 상병 | 2023.7.20. | 해병대 제1사단 일병 사망 사고 순직자 |
6.4.4. 공군
성명 | 계급 | 사망일 | 안장 사유 |
이상희 | 대위 | 1991.12.13. | 직무중 순직 |
정재남 | 소령 | 1993.4.10. | 직무중 순직 |
이웅평 | 대령 | 2002.5.4. | 복무중 병사[40] |
최홍선 | 준장 | 2020.11.3 | 전직 준장으로서 안장[41] |
최필영 | 소령 | 2018.4.5. | 칠곡 F-15K 추락사고 순직자 |
박기훈 | 대위 | 2018.4.5. | 칠곡 F-15K 추락사고 순직자 |
심정민 | 소령 | 2022.1.11. | 화성 KF-5 추락사고 순직자 |
김도현 | 중령 | 2006.5.5. | 직무중 순직 |
6.5. 경찰
6.6. 소방
대부분의 순직 소방관들은 이곳에 잠들어있다. 제주특별자치도 내 사설묘지에 안장된 강수철, 국립제주호국원에 안장된 임성철 등 특수한 사유로[45] 이곳에 안장되지 못한 소방관들만 예외다.6.7. 운동선수
6.8. 의사상자
6.9. 독도의용수비대
6.10. 순직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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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장이지만 네이버 지도에 스카이뷰로 보면 묘역 곳곳에 한 곳 씩 비어있는 묘역이 있긴 하다. 비어있는 묘소는 이장된 걸로 추정.[2] 안장 자체는 1982년부터 시작되었다.[3] 장군 묘역의 경우 서울현충원에 안장 공간이 여유가 있어서 1990년대 중반까지 안장을 받았다.[4] 설립 당시에는 관할 기관이 국방부였으나 2006년에 국가보훈처로 이관되었다. 이후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5] 현재의 대전광역시 유성구.[6] (1934~1953) 1953년 양구군에서 군 복무중 순직[7] 이 의사자 묘역에 최연소 안장자인 변지찬 (향년 8세) 군이 잠들어있다.[8] 예를 들면 간도특설대에 복무 경험이 있는 김홍준의 경우 2009년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었지만 2015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부부위패 봉안당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사유는 국방경비대 복무 중 순직이다. 1946년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9] 김창룡은 말할 가치도 없으며 안현태 역시 하나회 멤버로서 12.12 군사반란에 일조한 자다. 즉 전두환 최측근 출신이다. 선자는 이승만 때 공산주의자들을 죽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자는 복권되어 군인 자격으로 묻힌 것.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인 게 김창룡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무고한 자들도 마구잡이로 학살하다 암살 당한 자이기도 하다.[10]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자기가 죽으면 살던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11]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10년 청와대 만찬에 초청받아 갔다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보고 다 들리도록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라며 노골적으로 디스한 일은 유명하다. 여담으로 그 말을 한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전두환은 장례도 가족장에다가 2021년 11월 사망 후 약 2년이 되는 24년 3월까지도 국립묘지는 커녕 장지 자체를 못찾아서 자택에 임시안치 중이다.[12]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파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형사 재판과 관계 없이 안장불가 사유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징역형이 확정되어 현충원 안장이 불가능하다.[13] 이창기 준위는 전사 당시 해군 전탐원사로, 전탐부사관은 준사관이 되면 갑판으로 직별이 합쳐진다.[14] 윤영하 소령은 처음엔 장교 묘역에 따로 떨어져 안장됐으나, 이장하며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안장됐다. 당시엔 사병 전사자들도 영현이 뒤늦게 수습된 고 한상국 해군 조타상사와 해전 당시 당한 부상으로 입원 중 사망한 고 박동혁 해군 의무병장도 다른 사병 전사자들과 떨어져 있었다.[15] 포화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적지 않게 남아 있다.[16] 2020년부터 서울현충원에 안장을 희망할 경우 제2충혼당이 완공되기전 까지 야외 봉안당에 임시로 봉안했었고 2022년 3월부터 1층을 임시사용승인을 받아서 임시로 봉안했던 영현들을 제2충혼당으로 이장했다.[17] 차가 거의 막히지 않았을 때도 2시간 반은 넘게 걸리는데 차까지 제대로 막히면 6시간 넘게 걸릴 수도 있다.[18] 서울현충원은 포화상태가 된 것이 주된 원인이다.[19] 반드시 당일에 와야 하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외부인 출입 통제 시간을 앞둔 오후 3시 이후 즈음 현충원에 도착해야 한다.[20] 월드컵경기장역에서 내려도 거리는 비슷하며, 현충원 후문쪽으로 가려면 이곳이 더 빠르다. 대신 이 역에서 현충원안까지 가는 시내버스는 없다.[21] 노무현, 노태우, 윤보선은 사립묘지에 묻혔고 김대중, 김영삼, 박정희, 이승만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전두환은 장지를 찾지 못해 자택에 보관 중이다. 따라서 대전현충원의 대통령묘역에 안장된 대통령은 최규하가 유일하다.[22]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최초 안장자.[23] 고려대학교 9대 총장. 광복군에 참전했던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24] 의열단, 1924년 황거 폭파 미수사건의 주동자.[25] 영화 감독[26] 을사오적 박제순의 친손자다. 일본군 탈영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활약한 공로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어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27] 전라북도 진안군 제헌 국회의원[28] 통칭 '마지막 기병대장' 원래는 군인신분으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 2묘역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독립유공자 공적이 인정되어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으로 이장했다.[29] 성공회 세레명: 노아 성공회 사제[30] 코리안 리퍼블릭 이사장. 코리안 리퍼블릭은 지금의 코리아 헤럴드로 변경[31] 대한독립군 총사령관[32] (1878~1960)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호 안장자. 류장렬 지사는 정미의병 당시인 1909년 전북 일대에서 수많은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했었다. 이후 1987년 4월 2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 독립유공자로는 최초로 안장되었다.[33]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34] 국립대전현충원 1호 안장자.[35] 진급과 함께 전역해서 중사로 보는 관점도 있으나, 엄연히 상사 전역이 맞다.[36] 국립대전현충원 최초 장군안장자. 1987년 11월 7일 안장.[37] 현충원 장군묘역 마지막 안장자.[38] 나머지 5명의 전사자도 함께 안장되어있다.[39] 나머지 45명의 전사자도 그와 함께 안장되어있다.[40] 최종 보직으로 공군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간이 안 좋아서 국군수도병원에 입실,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거부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41] 통합묘역 첫 안장 장군[42] 공식적으로 기록된 6.25 전쟁 최초 전사자, 6.25 전쟁 발발 1시간전인 새벽 3시에 정동진 등명해안초소에 경계근무 중 북한군이 상륙하는 것을 목격하고 초동대응을 하다가 전사했다. 여담으로 현재는 해안초소 경계근무는 병사들이 담당하지만 당시에는 경찰관들이 해안 경계를 담당하였다. 이후 순경에서 경사로 추서된 후 2017년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43] 대전현충원 경찰관 최초 안장자. 1985년 해양경찰 소속 경비함 303함에서 의무경찰대로 복무 중 순직하였다.[44] 순직 당시 성남 수정경찰서 수진지구대 소속으로, 2006년 7월 22일 저녁 10시 즈음에 여성을 폭행하고 달아나던 피의자를 검거하던 과정에서 왼쪽 허벅지를 흉기에 찔려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은 뒤 뇌사판정을 받고 한달여간 투병하다 같은 해 8월 21일 저녁 9시 45분에 순직했다. 그로부터 한달여 뒤에 둘째형 이태홍이 서울지방경찰청 경찰악대로 정식 임용되었다. #[45] 통상적으로 제주에서 순직한 공직자 중 제주 출신자라면 사후 유해 운구와 유족 성묘 등의 문제로 인해 제주도 내 묘지에 묻히게 된다. 2021년 12월에 제주시 노형동 공설충혼묘지를 국립제주호국원으로 확장하여 개장했으며, 제주 곳곳에 묻혀진 순직자들이 이 곳으로 바로 이장될 가능성이 크다.[46]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관 최초 안장자. 1994년 6월 1일 영등포 소방서 근무 중 '내쇼날 플라스틱' 공장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가 무너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3시간 후 결국 순직했다.[47] 국가사회공헌자 묘역-43호[48] 국가사회공헌자 묘역-38호[49] 국가사회공헌자 묘역-10호[50] 운동선수 중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51] 국가사회공헌자 묘역-47호[52] 레슬링 선수. 사망 당시 국군체육부대 소속이라 군무원 신분으로 장병 묘역에 안장됐다.[53] 현충원 최연소 안장자이자, 국내 최연소 의사상자(사망당시 8세) 2005년 외가인 당진에서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 함께 사망했다. 이후 2008년 의사자로 인정되어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위패안장자] [55]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실종 장병 수색 작업에 참여한 98금양호의 선원이 였으며, 수색을 돕고 난뒤 조업지로 돌아가다가 인근을 항해하던 상선과 충돌하여 침몰해서 선원9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원 2명의 시신은 인양되었으나, 정봉조 씨를 포함한 7명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후 2012년에 98금양호 선원들 전원이 의사자로 인정되었지만, 정봉조씨의 위패만 유일하게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SE]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의사상자 또는 순직자[SE] [SE] [SE] [60] 세월호 참사로 사망.[61] 이 중 고창석, 양승진 교사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나마 고 교사는 사건 3년 후 침몰 선체를 인양한 뒤 그 인근을 뒤지다가 유해 일부를 발견했으나, 양 교사는 영원히 찾지 못하였다(목격자에 의하면 그는 배가 처음 기울면서 사람들이 다들 구르고 넘어질 때 마침 열린 복도 문 근처에 있었던 관계로, 미끄러지다가 결국 난간 밖으로 튕겨나가 바다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제때 구조되거나 발견되지조차 못한 곳이다. 즉 배 안에 없으니 배를 인양해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던 것이다). 또한 당시 교감이었던 강민규는 자신의 학교에 벌어진 참사에 큰 충격을 받고 사고 발생 다음날 자살하였으나, 이쪽은 순직자로 인정되지 못해 현충원에도 없다. 결국 여행은 인솔한 교사 14명 중 12명이 세상을 떠났고, 생존한 김소형(4반 담임)과 이애련(10반 담임)도 사고 후 면직했고 이들의 근황은 파악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