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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4년 8월 20일 |
경기도 인천부 제물포 (現 인천광역시 중구) | |
사망 | 1990년 11월 2일 (향년 66세) |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 현대2차아파트 자택 | |
본관 | 반남 박씨[1] |
가족 | 조부 박제순 아버지 박부양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36호 |
서훈 | 대통령표창 수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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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박승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성악가. 그리고 을사오적 중 하나인 박제순의 손자이자 박부양의 아들이다.[2] 본관은 반남(潘南).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박승유
2. 생애
1924년 8월 20일 경기도 인천부 제물포(現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조선귀족 자작이던 아버지 박부양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사직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41-3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3]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중화민국 절강성 의오현(義烏縣)에 주둔 중이던 요코이(橫井)부대에 배속되었으나 그해 10월 부대를 탈영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뒤 10월 29일 제2지대 강남분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강소성 남경시(南京市)·무석현(無錫縣), 안휘성 무호현(蕪湖縣) 지역에서 광복군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했고 평소 음악에 소질이 있어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조선인 동포로서 징집된 일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광복군 입대를 권고하고 염전(厭戰) 가곡을 방송하는 한편 광복군의 사기를 고취하는 등 여러 선전활동 및 심리전에서 활약해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절 그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고 자책하면서 가명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로 일하면서 성악가로 활동했고 6.25 전쟁 당시에는 자원입대해 국방부 정훈부 합창단원으로서 전국의 야전 부대를 순회하며 위문공연을 했다.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원광대학교 교육학과 강사, 휘경여자중학교·휘경여자고등학교 교사 등으로 근무했는데 이 사이인 1963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기도 했다. 1970년 UCLA에 유학을 간 뒤 1975년 강원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에 부임해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1989년 정년퇴임했다.
1990년 11월 2일 강원도 춘천시 후평2동 현대2차아파트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1990년 11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99년 8월 13일 연합뉴스의 <8.15특별기획> 을사오적 박제순손자 광복군 활동, 1999년 8월 27일 경향신문의 여적 - 조상의 죄라는 기사를 통해 그가 늦게나마 재조명된 바 있다. 조상의 과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은둔하며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사실을 숨기고 살았기 때문에 을사오적 박제순의 후손인 면이 더욱 부각되어 알려진 건 안타까운 부분이다. 과거에는 '친일파 후손이 해방 후에도 부귀영화를 누린 사례'로 왜곡되어 알려졌지만 오늘날에는 유튜브, 인터넷을 통해 그의 독립운동이 재조명되며 네티즌들에게 '진정한 독립운동가', '견부호자' 같은 찬사를 받으며 억울한 누명은 완전히 벗었다. 기술 발전 등을 고려하면 21세기 들어서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누명을 완전히 벗었던 것이다.[4]
그의 생전 사진을 찾는 건 쉽지 않지만 하단의 링크에서 1975년 3월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진을 통해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천방지축 조선귀족, 청년자작 박부양
3. 가족 관계
- 아내: 김춘선(金春仙, 1934~)[5]
- 장녀: 박주원(朴珠媛, 1960~)
- 차녀: 박시원(朴詩媛, 1970~)
[1] 참봉공파 24세 승(勝)○ 항렬.[2] 친일반민족행위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며 상술된 말처럼 저 두 명은 박승유 본인에게 크나 큰 굴욕이었다.[3]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고등고시 응시는 거부했다고 한다.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실무 부역자라고 해도 어쨌든 일제에 부역하게 되기 때문이다. #[4] 21세기 들어서도 김가진 등 몇몇 애국지사의 누명을 풀거나 상훈을 추서할 것이 네티즌들로부터 건의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 조선귀족 출신에 작위를 활용하여 공작활동을 벌였거나 일본군 출신으로 탈영 후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이다.[5] 김해 김씨로 아버지는 김달수(金達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