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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증조부 최승현 · 조부 최병규 · 아버지 최영섭 | ||
20대 대선 |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 열린캠프 | ||
사건사고 | 문재인 정부의 월성원전 경제성 조작 | ||
기타 | 비판 및 논란 · 별명 |
<colbgcolor=#000080><colcolor=#ffffff> 최영섭 崔英燮 | Choi Young-seob | |||
출생 | 1928년 4월 2일 | ||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서하리 94 (現 강원도 세포군 서하리 상옹마을) | |||
사망 | 2021년 7월 8일 (향년 93세)[1] |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제712묘역 | ||
호 | 순호(舜湖) | ||
본관 | 해주 최씨[2]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8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최병규, 어머니 전근성 | |
형제자매 | 남동생 최웅섭[3], 최호섭[4][5] | ||
배우자 | 정옥경 | ||
자녀 | 아들 최재신[6], 최재형, 최재민[7] , 최재완[8] | ||
학력 | 동경시립제2중학교 (졸업)[9] |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10] | ||
약력 | 한국냉장주식회사 영업이사 한국해양소년단 고문 | ||
군사 경력 | |||
임관 | 해군사관학교 (3기) | ||
복무 | 대한민국 해군 | ||
1948년 ~ 1970년 | |||
최종 계급 | 대령 (대한민국 해군) | ||
주요 보직 | UN 해군 동해기동전대연락장교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 국가재건최고회의 총무비서관 충무함 제2대 함장 베트남 전쟁 병참지원 전대장 51전대 사령관 | ||
상훈 | 충무무공훈장 (3회) 화랑무공훈장 (2회) 근무공로훈장 (1회) | ||
참전 | 6.25 전쟁[11] | }}}}}}}}} |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과 그의 아들 최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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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해군 예비역 대령. 6.25 전쟁 참전용사.2. 생애
1928년 4월 2일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서하리 상옹동(현 강원도 세포군 서하리 상옹마을)에서 아버지 최병규와 어머니 정선 전씨 전근성(全根成)[12]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에 해군사관학교 3기[13]로 입교하여, 1950년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6·25 전쟁 발발 직후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로 대한해협 해전에 참전하였으며, 무장병력 600명을 태우고 동해를 통해 부산으로 침투하던 1000톤급 무장수송선을 격침, 해군의 첫 승전에 공헌했다. 그 외에도 덕적도·영흥도 탈환 작전과 인천상륙작전, 대청도·소청도 탈환 작전, 2차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 3회를 포함한 6개의 훈장을 수훈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총무수석비서관으로 2년 동안 가까이서 보좌했다.#
1964년에는 해군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의 함장을 맡기도 했다.[14] 이후 대령으로 군을 떠났다.
자녀로는 네 아들을 두고 있으며, 그 중 2남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이 유명하다.
2021년 7월 8일 오전 1시 20분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들 최재형 전 감사원장에게 "대한민국을 밝혀라"라는 글과 "소신껏 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으로 대권주자를 포함한 각계 인사들이 조문했으며, 문재인 대통령 또한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고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해 조의를 표했다.[15]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될 예정이다.
3. 주요 경력
- 1948. 해군사관학교 입교
- 1950. 대한민국 해군 소위 임관,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
- 1950.6.25. 대한해협 해전 참전. 무장병력 600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침투하던 적 무장수송선을 동해상에서 격침.
- 1962. 국가재건최고회의 총무비서관
- 1964. 충무함 함장
- 1970. 예비역 해군 대령 전역
- 1994. 한국해양소년단 고문
4. 기타
- 군 생활을 마친 뒤 1994년부터 한국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활동했고 안보 교육, 승전비·추모비 건립에 힘썼다. 사망 전까지 진행한 안보 강연만 무려 300회를 넘는다.
- 해군에서 최영섭 대령의 공헌을 치하하는 기리는 의미로 <지략·용기·덕망을 겸비한 최영섭 대령>라는 제목의 평전을 출간했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있다. 박 대통령이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자 최영섭 대령이 그를 구해줬다고 한다. 최영섭 대령은 이후 박 대통령에게서 청와대 근무를 제안받았지만 사양하고 해군으로 돌아갔다. #
- 최영섭 대령은 자서전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본인의 부친인 최병규가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21년 8월 5일 동작문화연구소 소장 김학규가#, 같은 달 15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부친 최병규의 독립운동가 행적은 조작된 것이며 최병규와 조부 최승현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1] 오전 1시 20분 경 노환으로 별세.[2] 서운부정공파 35세 섭(燮) 항렬.[3] 대한민국 해병대 대령 전역.[4] 대한민국 해군 부사관 전역. 현재는 한국해군협회 미국 서부회장 직을 맡고 있다.[5] 최영섭 대령은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인 독립운동가 최병규가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때 영웅호걸 글자 중 하나에 '섭'을 붙여 지었다.[6] 崔在臣. 전 고려개발 사장[7] 崔在民. 소아청소년과 의사[8] 崔在完. 광주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9] 어린 시절 일본 도쿄로 유학을 다녀왔다.[10]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의 신촌교회 안수집사이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알려진 아들 최재형도 어린 시절부터 부친 최영섭과 모친 정옥경을 따라 교회를 다녔다.[11] 대한해협 해전, 인천 철수작전, 여수 철수작전, 진동리 정찰작전, 덕적도·영흥도 탈환작전, 군산 양동작전, 인천상륙작전, 대청도·소청도 탈환작전, 원산·함흥·성진 동해진격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등의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12] 전의창(全義昌)의 딸이다.[13] 해사 동기로 범LG가의 일원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 있다.[14] 미 해군에서 퇴역한 플레처급을 양도받은 것이었다.[15] 장관급 이상 인사(전직 포함)의 부친상에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는 내부 규정을 따른 것이며, 동시에 최 대령이 6·25 전쟁 영웅이자 무공훈장 수훈 유공자라는 점도 고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