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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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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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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2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鄭昇和 | Jeong Seung-hwa
파일:정승화 장군.png
아명 정팔만(鄭八萬)[1]
송산(松山)·벽옹(碧翁)·벽송(碧松)[2]·벽룡(碧龍)
본관 연일 정씨[3]
출생 1929년 2월 27일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4]
사망 2002년 6월 12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원적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신동 봉계마을
(現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13호
재임기간 제13대 방첩부대장[5]
1962년 7월 12일 ~ 1964년 1월 8일
제22대 육군참모총장
1979년 2월 1일 ~ 1979년 12월 12일
계엄사령관[6]
1979년 10월 27일 ~ 1979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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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배우자 신유경[7]
자녀 슬하 3남 1녀
학력 봉계공립보통학교[8] (졸업)
협성실업학교 (졸업)
종교 불교천주교 (세례명: 베드로)
군사 경력
임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5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9]
1948년 ~ 1979년
최종 계급 대장[10]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주요 보직 제7보병사단
제3군단
제1야전군사령관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대장 진급과 격변기의 한복판2.3. 수모의 시간들2.4. 민주화 이후
3. 소속 정당4. 저서5. 대중매체에서6.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22대 육군참모총장.

2. 생애

2.1. 초기 이력

1929년 2월 27일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의 외가에서 아버지 정시영(鄭時永, 1908. 7. 2 ~ 1964. 6. 27)과 어머니 인천 이씨(1905. 4. 28 ~ 1972. 12. 9)[11]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정팔만(鄭八萬)이며, 2살 되던 1930년 본가인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신동(現 김천시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로 돌아와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향의 봉계공립보통학교(現 김천 봉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1947년 3월 광신상업고등학교졸업했다. 1947년 10월 23일 육군사관학교에 5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간의 교육을 수료한 뒤 1948년 4월 6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임관했다.

군 생활 초기에는 상관 복이 정말로 없었다. 임관 후 처음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던 곳이 당시 강원도 춘천부(現 춘천시)에 주둔하던 제8보병연대 제2대대였는데, 중대장 재임 시절이던 1949년 5월, 제2대대장이었던 강태무 소령과 옆 대대인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함께 월북해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정승화는 이때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의 중대도 작전에 참가하겠다고 자청했는데, 강태무는 "전 중대가 다 나가면 대대는 누가 지키나? 자네 중대는 남아있게" 라고 지시하여 월북을 피할 수 있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제3보병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는데 당시 군단장유재흥 장군이었고 바로 현리 전투였다. 이때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으며 탈출할 때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1953년 휴전 후 1956년 대령으로 진급해 제22보병사단 제69보병연대장에 취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방첩부대장(현재의 국군방첩사령관)을 역임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에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노태우에게 '너무 그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 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8월 11일에 준장으로 진급했는데 이 때 나이가 32살이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2군단 작전과장, 방첩부대장, 7사단 참모장,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1군단 참모장, 7사단 부사단장, 1군단 부군단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 3군단 참모장, 3군단 부군단장을 거쳐 1964년 제7보병사단장을 지냈다. 1966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7보병사단장, 국방부 인사국장, 대한체육회 이사, 문교부 체육심의위원, 육군본부 인사참모차장, 1968년 육군종합행정학교장, 1군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육군본부 정책기획부장 등을 지냈다. 1973년 3월 6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3군단장에 취임했고, 1975년 제24대 육군사관학교장을 거쳐 1977년 12월 24일 제1야전군사령관에 전보되었다. 김재규가 육사 교장이라는 한직에 있던 그를 박정희에게 천거해 참모총장으로 승진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을 주었다. 허나 김재규가 자신의 라인으로 이용하려기 보다는, 그저 참모로서 인사조언을 한 것에 가깝다.

2.2. 대장 진급과 격변기의 한복판

1978년 5월 1일 대장으로 진급했고, 1979년 2월 1일 제22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김대중이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12]

1979년 50세인 정승화의 인생에서 큰 사건, 12.12 군사반란이 터지는데 10.26 사태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10.26 사태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하다가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신군부 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 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10.26 사태 당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과의 연회가 있으면서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앙정보부 2차장보 김정섭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13]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박정희가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박정희가 죽었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경호실장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경비사령부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14] 김재규의 정권 장악 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15] 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박정희를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16]해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를 변호하였다.

사실 정승화도 김재규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재규와의 관계에 대한 전두환의 의심이 깊어졌는데, 그 이유는 264일의 쿠데타 1권 192-193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김재규는 압송된 후 "정승화는 내 심복이다. 왜 그날 저녁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갔겠느냐? 당장 내일 아침이면 계엄사령관이 너희들 대장인 전두환을 적절히 조치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자신과 정승화의 연관 관계를 계속 들먹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사를 계속하던 중 김계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로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이 지시에 대해 전두환은 이 지시가 김재규와 정승화가 사실상의 공모 관계였다는 근거라고 주장[17]하나 정승화는 1990년대 무죄 판결 당시에 이 지시를 김재규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다며 반박했다.# 다만 전두환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김재규와 비교적 가깝고, 군권이 없던 다른 각료들과 달리 통제권을 행사한 정승화를 의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 싸움에 이를 이용한 전두환은 뚜렷한 혐의점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동의 없이 총장을 납치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2.3. 수모의 시간들

10.26 사태 이후 실질적 최고 권력자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1월 24일 계엄 확대회의에서 정승화는 “박정희 체제는 잘못되었고 시정되어야 한다“라는 발언을 해, 군 주요인사들로부터 정회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합수부는 정승화를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에 당해 이튿날인 12월 13일 해임되었고[18], 강제 예편당해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함과 동시에 국군보안사령부로 납치당하면서 전두환 측에 강제 압송되었다.

모진 고문 후 결국은 석방되었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간 뒤였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를 하고 신군부를 제압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들만으로 신군부 세력들을 막을 수 없었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마저 믿었던 부하들에게 잡히고 만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모욕적으로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았다.

그리고 1980년 3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재판장 정원민 해군 중장, 심판관 최갑석 육군 소장·김재봉 해군 소장·김인기 공군 소장, 법무사 심한준 육군 중령)의 판결에 의해 1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최고 계급인 대장에서 최하 계급인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8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강제 예편)해야 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으며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등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19]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었다. 수감 기간 중 한미연합 사령관 존 위컴 장군이 생일 케이크와 축하 카드를 보내 준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19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는 야당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재야 진보 진영에서 백기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이 유력하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영입되어 정계에 전격 등장했다. 공식 선거 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일어나면서 북풍이 불었고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여당인 민주정의당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2.4. 민주화 이후

노태우가 당선되자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났으며 그 후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 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됐던 급여와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는 12.12 군사반란 당시의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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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승화 대장(좌)과 장태완 소장(우)
1993년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본부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 반란 혐의로 고발했으나 1년 4개월 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되려 군사 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이 1987년 제정된 헌법 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전두환이 1심에서 사형 선고 2,3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으면서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면 복권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1999년 70세 때인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제6대 회장에 당선되어 쿠데타 피해자 출신 예비역들의 권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임기 중이던 2002년 6월 12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사후 2002년 6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되었다. 같은 해 회고록이 나오기도 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7 - 1990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0 - 2002 탈당[20]
정계 은퇴
작고

4. 저서

  • 정승화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2002)
    : 생전 집필한 유일한 회고록으로, 6.25 전쟁 시기부터 12.12 군사반란에 휘말려 강제 예편 당한 뒤 그 이후의 삶까지 여러 에피소드가 적혀있다. 대한민국 현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1차사료로 여겨진다.

5. 대중매체에서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이 연기했다. 1987년 대선 국면에서 김영삼의 제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후배 고명승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하자 "전두환이가 보내서 왔나? 가서 전하게. 그렇잖아도 고민 중이었는데 결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만 가보게."라고 말하는 간지나는 장면이 나왔으며 해당 대사로 인해 평소 서민들의 아버지 역할로 자주 출연했던 박인환의 연기력이 재평가되기도 하였다.[23]
  • 대체역사 판타지 소설 <리턴 1979>에서는 최규하의 둘도 없는 군부 파트너로 군부 내 2인자 장태완과 함께 유신 체제를 이용한 국정 개혁의 한 축이 된다.
  • 대체역사 판타지 소설 <리턴 1212>에서는 장정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시작 배경이 12.12 군사반란이기도 하고 이름도 저작권명예훼손 관련 문제 때문에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누가 봐도 정승화 및 그 아들이다.
  • 2020년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배우 김민상이 연기했다. 장승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김재규 부장이 준 사탕을 바닥에 버린다거나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는 장면은 나름 고증이 잘 된 편.
  • 2024년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는 이원종이 연기한다. 극중에서는 '정진후' 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6. 기타

  • 세간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사건(12.12 사태)과 관련지어 정승화 장군을 기억하지만, 원래 군부에서 기억하는 정승화는, 휘하 장병들의 사격술 향상에 매우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이 거쳐간 부대는 사격자세와, 격발 등 사격 기본이 탄탄하게 갖춰졌다고 한다.
  • 1960년대 당시 우리 군 일선에서 사용되던 M1 개런드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헐거워져, 장전이 잘 안 되고 명중률도 잘해야 50% 수준인 것을 많은 부대 지휘관들이 이런저런 편법으로 60 ~ 70% 수준으로 사격 기록을 끌어올린 반면, 정승화는 평균 30%가 나오면 보고서에도 30%라 쓰고, 50%가 나오면 50% 그대로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깜짝 놀란 상급 부대에서 감찰단을 파견해, 자칫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얼마 후 대통령이 참관한 사격대회에서, 정승화 장군의 부대에서 출전한 병사들이 제일 높은 점수(50%)를 기록하고, 평소 60 ~ 70% 명중률을 보였다던 타 부대 출전자들은 그보다 못한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사격 대회 후 군 내부에서 논란이 이는 와중에, 정승화는 오히려 우직하게 내실(內實)을 다지는 모습을 대통령에게 각인시키며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후문이었다.
  • 10.26 당시 자신을 몰라보는 육군본부의 초병에게 "나 참모총장이야!!" 하니 그 초병이 대답하기를 "뭔 총장?? 대학교 총장 말인가요?"라고 한 일화는 정승화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24] 궁정동 안가의 연회에 참석할 때 정승화 대장은 군복이 아닌 사복, 즉 정장 차림이었고, 자신의 관용차가 아닌 김재규의 차를 타고 온 상황이었다. 육본의 초병도 "한밤 중에 갑자기 민간 차량을 타고 나타난 사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설마 육군참모총장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곧 다른 장교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알아보고 무사통과시켰다고 한다.[25]
  • 가족으로는 아내인 신유경[26],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셋째 아들 정이열(鄭易烈, 1959. 9. 18 ~ )은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38기)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하다가 육군 대령으로 예편 및 전역했다. 또한 12.12 당시 공관병이었던 병장 김영진(金永振)[27]은 정승화의 첫째 여동생과 결혼하여 첫째 매제(妹弟)가 되었다.
  • 제40대 공군참모총장정상화와 같은 연일 정씨 생원공파(生員公派)-교리공파(校理公派)-군수공계(郡守公系) 30대손에 항렬자도 화(和)로 같고, 같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출신이다.[28] 그러나 두 사람은 족보상으로 28촌 지간으로, 14대조가 정내신(鄭鼐臣, 1536. 6. 20 ~ 1580. 10. 19)[29]으로 같다. 정승화 장군은 정내신의 장남 유옹(窳翁) 정유번(鄭維藩, 1562. 1. 16 ~ 1639. 5. 6)[30]의 13대손이고, 정상화 장군은 정내신의 셋째 아들 천방재(天放齋)[31] 정유성(鄭維城, 1569. 11. 11 ~ 1645. 8. 27)[32]의 13대손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36대 총무원장을 지낸 승려 원행이 쓴 논픽션 <탄허 대선사 시봉 이야기>나 <10.27 법난>에 따르면 정승화 참모총장이 불자였던 당시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무르고 있던 탄허를 종종 찾아뵙고는 했는데, 탄허는 평소 정 총장이 자신을 찾아올 때면 "당신은 너무 우유부단하니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나와 그렇게 약속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10.26 사태가 벌어진 다음날 탄허는 제자인 원행을 시켜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 좀 걸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원행을 직접 서울로 보내 정 참모총장을 만나서 "오대산에 한 번 다녀가던지 전화를 한 통만 해 달라"고 전하고 오게 했고, 원행은 참모총장 공관 앞에서 군인들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으므로 끝내 정 총장은 탄허를 만날 수 없었다. 12.12 반란으로 전두환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군법사 한 명을 월정사로 보내 "감옥에서 공부하고 싶으니 탄허가 강의한 화엄경을 보내 달라"고 탄허에게 부탁했지만, 탄허는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가서 그 사람더러 '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내가 묻더라고 전하라. 그는 이미 실기(失機)[33]했다."고 거절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후 10.27 법난이 벌어졌고, 정승화 전 총장은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1] #[2] #[3] 생원공파(生員公派)-교리공파(校理公派)-군수공계(郡守公系) 30대 화(和) 항렬.[4] 2015년 8월 4일 매일신문 기사 [김천의 문중이야기] 영일 정씨-한국사 빛낸 정완영·정승화에 따르면, 정승화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의 외가에서 태어나 첫 돌이 지난 후에 본가인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신동(現 김천시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로 다시 돌아온 것이라 한다.[5]국군방첩사령관. 즉, 전두환이 역임했던 국군보안사령관의 옛 명칭이다.[6]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겸임.[7] 1928년 5월 27일생. 아주 신씨로, 신기철(申基喆)의 딸이다.[8] 현 봉계초등학교[9] 군번 11030[10] 전두환에 의해 이등병으로 17계급 강등 및 예편되었다가 대장으로 복권되었다. 따라서 현역 최종계급은 공식적으로 대장.[11] 이상규(李相奎)의 딸이다.[12] 사실 이때는 박정희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던 시절이라 대놓고 정적이었던 김대중을 용인한다는 발언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13]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텐데 이거라도 좀 드십시오."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14] 단, 김재규에 대한 의심과는 별도로 차지철이 시해하였을 가능성도 있기에 있기에 해당 조치의 필요성은 있었다.[15]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다.[16] 실제 사건 직후 육본 B2벙커에서 열린 긴급국무회의에 참여한 각료들은 모두 김재규가 아닌 차지철이 박정희를 쏴죽였다고 오판하고 있었다.[17] 그런데 12.12 이전 합동수사를 브리핑 하던 중에 전두환 스스로 공모 관련을 부정하였다.[18] 1980년 3월 5일 매일경제신문에 올라온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 공소상전문[19] 2024년 현재도 이등병 월급은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돈 수준인데, 과거 병사들 월급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환에서 원화로 변경해 지급하기 시작한 1953년 월급은 125원, 정 총장이 강제 전역당하던 1980년에는 2,700원에 불과했는데, 이때 9급 8호봉 월급이 10만원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애들 용돈 수준 밖에 안되는 푼돈이다.[20] 3당 합당 반발로 인한 탈당[21] 아이러니하게도 10년 뒤인 2005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공군참모총장 출신이자 12.12 군사반란 직후 전두환하나회의 지지로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5.17 내란에 동조한, 신군부 측 인물인 주영복 국방부장관 역할을 맡는다.[22]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전두환 역.[23] 정승화에게 욕을 하고 고문을 했던 준사관 '신동기' 역은 배우 윤용현이 맡았는데,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지만 배우 본인은 여러모로 마음에 걸렸던 듯 드라마가 끝난 뒤 소주 1병과 담배 1갑을 들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정승화의 묘소에 찾아가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사과하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24] 이에 대해 정승화는 대통령 저격이라는 비상사태가 일어났으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25]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나온다. 당시 초병역할은 홍록기가 맡았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입구에서 홍록기가 참모총장이라는데요? 라고 선임에게 말하자 그 선임이 참모총장한테도 들리게 "까는 소리하지말고 빨리 가라 그래!" 라고 외친다. 이들 장면이 실제 상황이었다면, 해당 초병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짐작에 맡긴다. 극중에서도 정승화는 니들 나중에 죽는다! 라고 분노를 참지 못했으니 대학교 총장 발언은 김재규의 부하로 분한 김상호(배우)의 대사로 바뀌었다.[26] 남동생이 중앙고속 대표이사를 지낸 신대진 예비역 소장(육사 15기)이다. 12.12 사태가 벌어진 당일 그날은 신대진 대령의 준장 진급 발표날이었는데 처가에 직접 소식을 전하러 가기 전 공관에 들러 환복하려다 허삼수와 우경윤의 보고를 받게 됐다. 우경윤이 '이번에 진급시켜 주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서운합니다'라는 말을 대놓고 한 건 덤.#[27] 광산 김씨로 김경현(金炅鉉)의 아들이다.[28] 정승화는 봉산면 신리, 정상화는 봉산면 인의리 출신이다.[29] 자는 자섭(子燮).[30] 자는 덕보(德輔).[31] 수옹(睡翁)이라는 호도 있다.[32] 자는 중재(仲載).[33] 기회를 놓쳤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