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8:22:26

정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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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문환
2대
조천성
3대
정병주
4대
정호용
5대
박희도
6대
최웅
7대
육완식
8대
민병돈
9대
이문석
10대
서완수
11대
김형선
12대
장창규
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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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4대 : 소장 / 5대~현재 :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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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A5034> 출생 1926년 5월 11일[1]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용상1리 배해마을
사망 1989년 3월 4일[추정] (향년 62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64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168호
학력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안동공립농림학교 (졸업)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아킴)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0년 ~ 1980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9기)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1. 개요2. 생애
2.1. 12.12 군사반란 당시 행적
2.1.1. 박희도의 배신2.1.2. 최세창의 배신2.1.3. 장기오의 배신2.1.4. 윤흥기 준장, 김오랑 소령의 충성
2.2. 죽음과 의혹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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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최종 계급은 소장. 본관은 봉화(奉化). 삼봉 정도전의 방계 후손이다.

장태완, 김진기, 하소곤 장군과 더불어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끝까지 저항한 장군 중 1명이다.

2. 생애

1926년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용상1리 배해마을[3]에서 태어났다.

영주공립보통학교,[4] 안동공립농림학교 졸업 후 1949년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해서[5] 6.25 전쟁 당시 1연대 소대장으로서 참전하였다.

이후 고향이 가까운 박정희 - 김계원[6] - 김재규[7]와 인연이 통해 일종의 라인에 속해[8] 1968년에 준장으로 진급하고 1971~1974년에 제5보병사단장을 거쳤다. 1967년 제1공수특전단장이 된 후에는 '공수맨' 출신인 차지철과도 친해졌는데[9], 차지철이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된 1974년에는 차지철이 직접 경호차장으로 선택하여 소장 진급과 동시에 대통령경호실에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 육군특수전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1979년까지 쭉 특전사령관을 지냈다.

197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특전사대부격인 인물이었다.

파일:attachment/thirdofficer2.jpg

드라마 제5공화국을 열심히 본 사람이라면 여단장 및 참모 목록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10] 여기에 나온 참모장 신우식 준장, 11공수특전여단장인 최웅 준장은 5.18 민주화운동에서 진압부대로 투입되었던 7,1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관이며, 이 외에도 작전참모인 장세동 대령은 전두환의 최측근이었다. 참고로 특전교육대장인 김형선 중령은 훗날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때 경질당한 특전사령관이다.

2.1. 12.12 군사반란 당시 행적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3명의 장성 중 1명이었다.[11] 이때 반란을 준비하던 보안사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12.12가 일어나기 1주일 전부터 계획을 짰는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체포할 시 친 정승화 혹은 비 하나회 계열의 군인들 중, [12] 저항하면 골치 아픈 주요 지휘관 정병주, 김진기 그리고 장태완 등 3인을 술자리에 초대,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13],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14]을 동석시켜 그들의 발을 묶어놓는 모략을 꾸몄다.[15]

대망의 1979년 12월 12일, 정병주는 김진기, 장태완 등과 술자리를 같이 하다 전두환이 안 와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정승화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수도방위사령부, 육군본부 그리고 특전사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했는데, 이미 휘하 부대 중 하나회와 연관이 있는 다수 부대가 상관을 배신하고 전두환의 보안사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정병주 역시 특전사령부 소속 중 자기가 가장 아꼈던 직속부하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그리고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이 반란을 일으킨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16] 그러나 그는 마음을 잡고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을 시켜 1공수의 출동을 막으려 했다.[17] 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병력 출동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믿을 수 있는 병력이 현재 없다."라고 전화하자 정병주는 "나에게는 9공수가 있다. 9공수 윤흥기 준장하고 참모장은 갑종 출신이라서 그들하고 연줄이 하나도 없다. 9공수라도 빨리 출동을 시키겠네."라고 하고 곧바로 9공수 윤흥기 준장에게 보안사경복궁에 있는 30경비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실제 정병주의 예측은 맞아떨어져 9공수는 출동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군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던 보안사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고, 하나회는 그냥 놔두면 자신들의 반란이 성공하지 못 할거라는 걸 직감했다. 이에 그들은 제3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최세창은 그래도 자기 상관인 정병주를 어떻게든 회유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10분 후, 예하부대 대대장[18]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박종규도 상관을 체포하라니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명령에 따르고 만다. 특전사령부 사령관실이 3공수내에 있었고 특전사령관 직속 전투병력이 없어서 박종규 대대장과 15대대 체포조는 아주 쉽게 사령관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때 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은 하나회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신으로[19]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령관실로 정병주를 피신시켰다. 그리고 반란군들이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한 후 김오랑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교전 중 전사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 역시 팔에 총상을 입은 채 반란군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참고로 그때 9공수는 자기들의 사령관이 피격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보안사와 경복궁 30경비단을 공격하기 위해 서울로 진격하다가 진압군과 반란군이 서로 유혈 사태는 피하자며 맺은 신사협정에 의해 진압군 육군본부 측의 명령으로 돌아가게 된다. 허나 그것은 반란군의 기만술이자 진압군 최대 실수였고, 하나회 병력들이 서울로 들이닥치면서 반란은 성공하게 된다.

반란이 끝난 후 정병주는 강제 예편 당하게 된다. 보안사로 끌려간 직후 험한 취급을 당했으며 정병주는 그때 생각만 하면 피가 역류한다고 회고했다. 조사 중 과다출혈로 쇼크 현상을 보여 국군통합 서울 지구 병원에 이송됐고, 거기서 수술을 받고 치료받던 중 80년 1월 예편되고 3월 초 퇴원했다. 또 당시엔 두서가 없어서 부하 장교들의 생사도 정확히 몰라 김오랑 소령이 사망한 것도 아내가 갔다온 김오랑의 안장식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정작 본인이 총상 입어 다쳤다고 오해한 부관 장모 대위는 당일 자기를 놔두고 피신한 상태라 허망했다고.[20] 예편 당한 이후엔 80년 6월까지 신군부가 요원을 보내 감시하면서 전화도 대신 받는 등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2.1.1. 박희도의 배신

그가 자식처럼 돌봐주었고 진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1여단장에 처음 부임한[21] 1978년 11월에 3명의 무장공비가 1여단 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복귀에 성공한 사건이 발생해서 이 때문에 보직해임을 당하게 생겼는데, 이 때 정병주 본인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직접 이세호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겨우 보직해임을 모면했었다.[22] 허나 군대에서 이런 은인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박희도는 정병주를 배신하고 육군사관학교 1기수 선배인 전두환의 편으로 가담했다. 은혜를 갚기는커녕 12.12 당일 무단으로 여단 병력을 동원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핵심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 정병주도 박희도의 배신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비유하면 '자식(박희도)'이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준 '부친(정병주)'에게 패륜을 저지른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병주를 배신한 박희도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진급을 거듭하여 6년 후인 1985년에는 2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의 군맥 제거 차원에서 바로 보직해임 후 전역했다.

2.1.2. 최세창의 배신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준장의 경우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부하인 박종규 중령을 시켜 직속 상관인 정병주 소장을 직접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23]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특전사령부(본부)는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으며, 사령관이 있는 사령부 본부 건물엔 사령부 직속의 무장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 후 특전사령관이 된 박희도는 자기도 똑같이 당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제707특수임무대대를 창설했다.[24] 그 역시 쿠데타 성공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합동참모의장과 노태우 정부 시절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사실 정병주는 12.12 군사반란 이후 그래도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던 정호용 당시 육군참모총장(1983.12~1985.12)이 마련한 예비역 장성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우연히 최세창과 마주쳤다고 한다. 다만 정병주는 이때 일을 웃음으로 넘겨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2.1.3. 장기오의 배신

제5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준장의 경우 육사 12기 중에 막차로 별을 달았고, 이에 도움을 준 정병주 장군에게 충성 맹세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배신하고 쿠데타에 가담했는데, 실제 전투엔 동원되지 않고 효창운동장에서 대기만 하다 끝났다.

2.1.4. 윤흥기 준장, 김오랑 소령의 충성

정병주는 3명의 공수특전여단장들 뿐 아니라 자신이 아끼던 육사 후배인 전두환과 노태우 등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고, 그 인간적 아픔이 어땠을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런 와중 수도권 인근 직속 여단장 중 유일하게 육본 측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가 육본 명령에 의해 회군했던 제9공수특전여단의 윤흥기 준장은 갑종 출신인데다 하나회와 연이 없어서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반란군이 윤흥기 준장을 포섭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정규 육사가 아닌 갑종 출신인데다가[25][26] 신수종 참모장 역시 갑종 출신이라 연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27] 정치군인들인 하나회와 달리 우직한 군인 성격도 한 몫 했다. 실제로 9공수 출동은 반란군이 마음을 가장 졸였던 요소였고 그대로 놔두면 쿠데타 실패와 아군 특전부대끼리의 유혈 충돌도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란군은 진압군과 서로 유혈 사태는 피하자며 신사협정을 맺는 잔꾀를 부렸고, 이에 속은 육본은 윤흥기 준장에게 회군을 명령했다. 그리고 약속을 어긴 반란군측 특전부대는 서울에 진입하며 쿠데타는 성공한다. 윤흥기 준장은 12.12 사태 종료 이후 곧 경질되었고, 진압군의 주력 지휘관이었지만 회군한 덕인지 예편은 피해 소장까지는 진급, 허나 소장이라면 한번쯤은 지휘하는 사단장은 해보지도 못한 채 전역했다.[28]

한편, 특전사령부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29] 홀로 사령관 곁을 지키며 반란군의 총격에 응사하던 도중, 그의 육사 2기수 선배이자 한 부대에서 함께 근무한 경험도 있으며 같은 군인아파트 위아랫집에 살아 부인들과 함께 얼마 전에도 같이 밥을 먹은, 한마디로 친우인 박종규 중령의 흉탄에 사살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고#, 정병주 소장 본인도 총상을 입은 채 연행되어 강제 예편당하고 말았다.

2.2. 죽음과 의혹

강제예편된 이후 1983년부터 명동성당을 나가며 당시 첫째 아들 내외가 믿던 천주교를 본인도 믿게 되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믿어 1984년 2월에 영세, 그 해 10월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정 요아김'이었다고. 1987년 6월 항쟁이 한창이던 6월 15일 저녁에도 명동 성당에서 열린 민주화 미사에 참석해 소나기를 흠뻑 맞으면서 군정 종식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1987년 11월에는 김진기 전 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대선 직후엔 노태우가 되어 실망하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생활하는 둘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장남 집에서 기거하며 관광을 다니는 등 해외에서 몇달 동안 나름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1988년 4월 말에 귀국했는데, 문제는 1988년 10월 16일 매제 집에서 담소를 나눈 후 여동생이 정병주 집까지 배웅을 해줬는데 이때가 밤 10시 무렵이었고 이후 헤어진 정병주는 집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이후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30]

당대에도 그의 죽음은 나름 큰 이슈였기 때문에 부검을 했고 그 결과, 우측 목 부분에 집중적으로 색흔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정병주가 목을 맨 나일론 끈 매듭에 우측 목 부분이 눌린 것을 직접 사인으로 보았다. 이외에도 조카를 위해 물상보증을 서줬다가 해당 업체가 부도나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기에 수사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보고 사건을 결론지었다. 하지만 당시 정병주는 물상보증을 선 집 말고도 다른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등 생계에 큰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정병주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 정병주가 생존했던 시점까지 군부대가 주둔해서 출입통제지역으로 분류되었던 곳이라 논란에 불을 지폈다.# 굳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는데 철조망을 파헤쳐가며 출입통제지역으로 들어가 자살하는 것은 선뜻 이해가진 않는 행동이다.

때문에 당시 그가 타살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상당했는데, 12.12 이후 정병주 소장과 수시로 연락하며 지낸 장태완 소장 역시 그가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31], 지금이나 그 때나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큰 죄 중 하나다.[32]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소장에게 '12ㆍ12의 진상규명에 조력,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닌 것이 그 이유.

민주화 이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분류하기에는 의문점이 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없어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만약 타살일 경우 일반 범죄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살해당했을 확률보다는 아무래도 권력 집단에게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더 커보이는데, 마침 당시 대통령도 하나회 출신 노태우였다보니 더 그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노태우 정부엔 하나회 출신 인사들도 많았기에, 당시에도 언론과 인터뷰하며 하나회를 디스하던 정병주는 그들에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결국 과거 전력이 있으니 국군보안사령부국가안전기획부 같은 정보기관 소행이 의심될 수 밖에 없다.

김오랑 중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는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33], 남편의 죽음으로 충격이 심해져 아예 실명하고 고생이 많을 때 정병주는 손수 찾아가 위로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89년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백영옥 여사는 뜻을 이어받겠다고 90년 하나회 관련 소송도 거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그녀도 1991년 6월 28일 평소 봉사 활동을 하던 시설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고 만다. 당시 경찰은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슬쩍 실족사로 수정했다고 하는데, 사실 실족사도 떨어진 높이가 그리 높지도 않았기에 의문이 남았다.

정병주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고인의 무덤 묘비명백비. 즉, 비석의 내용이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무명 용사들도 공적을 기리는 한 줄의 비문이 항상 적혀 있게 마련인 무덤에서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이는 유족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는 뜻이라고 한다.

3. 기타

  • 자식들의 말에 따르면 말버릇처럼 자신이 죽은 후에도 김오랑의 묘소에 참배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평생 군인으로 남고 싶어했다. '스마일 장군'이란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군 생활 자체를 즐겼던 모양. 부인에게도 군복을 벗으면 국영 기업 같은 데 가서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군인이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라는 소신을 말했다고 한다.
  • 군의 정치적 중립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군인 출신 정치인에 대해서도 반대한 이유가 "군인은 명령에 거의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된, 사고방식이 아주 단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끌고 나갈 수가 없어요. 저도 아내로부터는, 당신은 가정도 군대식으로 다스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직업 군인은 옷을 벗고 정치를 해도 절대로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지요. 군대는 상관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돼 있는 사회인데, 그런 사고방식을 정치와 경제에 적용해 보십시오. 법치국가에서 명령과 법을 구별하지 못하고 명령에다가 법을 갖다 붙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였다.
  • 1979년 10월 16일 시작된 부마항쟁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이기도 했다. 항쟁 초만 해도 그는 휴가 중이었는데,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지자 급하게 부대로 돌아와 김재규 중정부장과 같은 비행기편으로 부산에 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안가 10.26 사건이 터지고 대통령이 피살된다. 고작 2달 간격 동안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연달아 맞은 인물인 셈.
  • 하나회에 이를 갈던 그였지만, 정호용은 그래도 의리 있다고 호평했다. 정호용은 12.12 당시 후방 50사단장에 있어 반란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고, 전두환, 노태우와 절친했다. 그래서 부담이 덜했던지 김오랑 장례식도 가족장으로 하라는 보안사 지시를 무시하고 부대장으로 나름 예우를 해줬다. 그래서인지 정병주는 정호용을 '동기생 중에서도 정치에 비교적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고, 지휘 체계를 통해서 일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군의 정치 중립화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는데, 이후 정치인이 된 정호용을 보면 묘하긴 하다. 하여튼 고인이 살아있던 80년대까진 본인을 그래도 나름 챙겨주려 한 정호용을 좋게 봐서인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도 당시 군 공식 지휘 체계상 정호용 육군특전사령관이 아닌 계엄분소장이 공수특전여단을 지휘한다며 정호용의 공식적 책임은 없을거라고 추측했다.[34] 이와 별개로 "공수 부대란 것은 집권자가 써먹기 좋은 간편한 부대"라면서 "교육을 잘못 시킨 나의 책임도 크다."며 이미 예편당한 이후긴 하나 군의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해서도 유감 의사를 표시했다.

4. 대중매체에서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 1993년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김영인이 연기했다.
  • 1996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성우 황일청이 연기했다. 직속 부하인 최세창에게 욕설과 함께 호통을 친다. 체포당한 후 서빙고 조사실에 연행되었을 때는 팔에 입은 총상으로 신음하며 조사관들에게 "나를 쏴!? 애비를 쏘는 자식도 있나? 에~라이[35]예~라이로 들린다] 이 후X자식들아!!!"라고 또 한 번 분노의 일갈을 날린다. 장태완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는 장면에 이어 야밤에 목 매달아 죽은 시체로 최후가 처리된다.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민욱이 연기했다. 직속 부하인 최세창에게 "서로 좋은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면서 한탄한다. 그리고 반란군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특전사령부로 진격해오자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에 의해 사령관 집무실 안의 다른 방으로 피신한다. 김오랑이 반란군 체포조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한 뒤 집무실에 진입한 병사들이 마구 쏘아댄 총탄에 본인도 총상을 입었고, 체포조를 이끌고 온 박종규 중령의 지시에 체포된 뒤 보안사로 끌려간다. 믿었던 이들의 배은망덕한 하극상 짓거리에 단단히 분노했는지, 팔에 총상을 입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고함을 지르며 울분을 토한다. 석방된 후 김오랑의 묘소 앞에 술을 뿌리며 "자네가 살고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내가 비굴하게 산다."고 통음하다가 갑자기 CG 처리가 되며 증발(?)한 뒤, 다음 장면에서 내레이션과 함께 의문사 당한 시체가 나오면서 최후가 처리된다. 제4공화국과는 달리 낮 시간대로 나온다.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공수혁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정만식이 연기했다. 첫 등장 시점에서는 전두광의 계략으로 김준엽, 이태신과 함께 고급 요정에 전두광의 생일축하 명목으로 붙잡혀 있었을 때 수상쩍게 여긴 이태신이 나가려는걸 상황 파악 못하고 계속 기다리자고 하여 대응이 지체되는 원인을 제공한다.[36] 그러나 정상호 총장이 납치되었음을 알고 부대로 긴급히 복귀한 후에는 진압군의 편에서 적극 반란을 진압하려 하고, 마지막에는 특전사령부로 쳐들어온 제4공수특전여단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총상을 입고 실려나가면서 함께 싸우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오진호 소령을 걱정하는 등 참군인의 모습을 보이며 페이크 발암캐였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총에 맞아 팔에 붕대를 감고 입원한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출연을 마친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본명과 연관이 없는데 특전사의 공수훈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1] 음력 1926년 3월 30일[추정] 시신이 발견된 날로, 생전 고인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때는 1988년 10월 16일이었다. 즉, 실제 사망일은 이 사이로 정확하지 않다. 문서 본문 참고.[3] 봉화 정씨 집성촌이다. 유수호 전 국회의원은 용상2리 출신이다.[4] 현 영주초등학교[5] 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육사 6기로 잘못 나왔다.[6] 같은 경북 영주 출신이다.[7] 정병주가 김재규의 안동 농림학교 1년 후배다.[8] 1964년 김계원이 1군사령관 할 때, 김재규 준장은 6사단장이었다. 이때 박정희는 종종 6사단에 술짝을 싣고 방문해 육사동기생인 김재규와 밤새 통음을 했는데, 김재규와 친하던 6사단 참모장인 정병주 대령도 가끔 끼며 안면을 튼 것이다. 다만 정병주가 딱히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중령 시절 5.16 쿠데타도 비협조적이다 쿠데타 세력 장교들에게 붙들려 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훗날 인터뷰에선 일부 정치 군인의 득세에 박대통령뿐 아니라 박종규, 윤필용, 차지철 같은 측근들의 과오도 많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9] 때문에 이후 10.26 사태 때, 자기와 친하던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차지철이 한방에 싹 갈려나가자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전역 신청했다가 반려되기도 했다. 이때 전역이 받아들여졌다면 역설적으로 몸고생, 마음고생은 덜 했을듯.[10] 정병주는 정규 육사 출신들을 아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고마움이나 알기나 하냐."고 말을 했지만 "유능한 부하 키우면 그걸로 된거지."라고 했다고 한다. 허나 가장 아낀 사람이 1여단장 박희도와 3여단장 최세창이었음에도 12.12때 정병주는 둘한테 다 배신당했고, 특히 최세창 부대에겐 총상을 입고 체포까지 당했다. 배신감에 치를 떨만하다.[11] 다른 2명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그리고 김진기 헌병감이다. 실제로는 3명 외에도 꽤 많은 장성들이 반란군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작전참모 등 휘하 전투병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정보 부재, 안보 우려 등으로 병력 투입을 주저해서 12.12 당시 실병력을 실제 동원했던 지휘관은 3명이 사실상 전부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정예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이었다.[12] 훗날 정병주는 '본인은 정승화 장군 편이 아니라 정당한 명령의 편에 섰던 것'이라고 말하였다.[13] 당시 계급은 준장이다. 다만 이 사람은 비 육사 통역장교 출신으로 하나회와는 학연, 지연이 없었던지라 전두환의 반란 음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순히 장군들의 정모인 줄로 알았다고 한다. 이 덕분(?)에 훗날 김영삼 정부의 12.12 군사반란 재수사 때도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검찰에 출석해 신군부 측에 불리한 증언으로 일관했다.[14] 당시 계급은 대령이고, 12월 정기 군인사에서 준장 진급이 내정되었다.[15] 이른바 작전명 생일집 잔치. 이때 이들의 임무는 3명을 만취시켜 지휘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김진기가 술자리 참석 전 부하들에게 술집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총장이 납치되자 얼마 안가 연락을 해 결과적으론 실패했다.[16] 다른 특전 부대들도 더 있지만, 수도권에 있는 부대는 당시 1,3,5,9특전여단이 전부였는데, 비육사/비하나회 여단장, 참모장이 맡고 있던 9특전여단 빼곤 죄다 배신을 때린 것.[17] 이순길 준장 역시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에게 미운털이 박혀 강제예편 처리됐다.[18] 제15특전대대장.[19] 다른 사람들은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모조리 도망쳤다.[20] 이는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할 것을 지시한 최세창 준장이 12월 13일 새벽 2시쯤 특전사령부 공격개시 전에 사령부 소속 참모들에게 귀띔해 피신하도록 한 것이었다.[21] 이때 1공수여단장 자리를 놓고 같은 하나회이자 육사 선배인 백운택과 경쟁하였다고 한다.[22] 실제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세호 대장은 당시 이 사태에 크게 노해서 박희도를 문책하고 군복까지 벗겨버리라고 길길이 날뛰었다.[23] 정병주 장군은 최세창이 중령 시절부터 진급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24] 쿠데타 세력이 군을 완전히 장악해 역쿠데타 우려가 거의 사라진 이후엔 707특임대는 본연의 대테러부대 임무에 전념하는 부대가 된다.[25] 물론 하나회 입장에선 행동개시 후 9공수의 행보에 따라 성공 유무가 갈렸기 때문에 갑종 출신이라곤 해도 포섭 시도는 했었다. 포섭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대주둔지에 죽치고 중립만 지켜달라는 약속만 받아도 잔치는 성공하기 때문. 쿠데타 당일 하나회는 보유한 모든 연락망을 돌려 진압군을 회유하려 했으니 9공수 참모들은 물론 윤흥기 준장도 회유시도를 받았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윤흥기 준장이 부대를 전개했을 때는 주둔지가 서울 근방인 특전여단 4개 중 1, 3, 5 공수 3개가 반란에 가담하여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함을 인지한 시점이었다. 진압 명령을 씹고 드러눕는 것도 가능했고 일신을 보전하는데는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었음에도 부대를 전개한 것은 우직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육사 출신이었어도 쿠데타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낮다. 단순히 갑종 출신이라 회유되지 않았다거나, 포섭 시도를 안했기에 반란 가담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평가절하 할 수는 없다.[26] 실제로 마찬가지로 갑종출신인 30보병사단장 박희모 소장은 원래 육본과 장태완 소장의 부탁을 받고 행주대교 통제를 하려고 했으나, 반란군의 회유에 따라 이를 철회하고 이후 제1군단장 황영시의 지시에 따라 오히려 3군단 예하 병력의 서울 진입을 막으러 병력을 움직이는 등 반란군에 합류했다. 그는 이 공으로 중장 진급에 성공했다. 실제로 전두환은 반란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던 장태완 소장 역시 체포 후 "장 선배"라고 예의를 갖추며 포섭시도를 했었고, 주요 장성들을 계속 포섭하려고 했던 만큼 윤흥기 준장이 배신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딴 대수작에 넘어가지 않는 참군인이었기 때문이 맞다. 다만 정 소장이 도움을 요청한 장 소장에게 윤 준장을 추천할 때 갑종 출신이란 이유를 댄 것은 맞는데, 윤 중장의 성향에 대해 잘 모를 장 소장에게는 급박한 상황에서 '갑종 출신이라 하나회가 아닐 것이다'란 의미로 짧게 설명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정 소장 본인이야 부하에 대해 잘 알겠지만 그와 연이 없는 장 소장은 자세히 모를테니까.[27] 노태우와는 인연이 어느 정돈 있다. 노태우의 후임으로 9공수여단에 왔다.[28] 그 자리를 채운 게 신군부측 인사인 이진삼이었다. 이후 이진삼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참고로 이진삼은 민간인이 되고 2010년 천안함 침몰 당시 군번줄 발언 경례 불량 발언과 함께 짬밥을 내세워서 국방부장관과 현역 장성들에게 호통을 쳤던 인물이다. 현역에서나 전역해서나 군기를 빙자한 횡포를 부리기로 유명한 양반인데 2011년 지역구 행사 때 육군에 연락해 육군 헬기를 타고 나타난 양반이다. 더 기가 막힌 사건은 2011년 국방위원회 국감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참석했던 XXX 준장은 과거 이진삼의 부관이었던 사람이었다. 근데 이진삼은 하라는 국정질의는 안 하고 그 사람에게 공격 준칙을 외우게 시켜 더듬거리자 이게 우리나라 육군의 현실이라고 비아냥거리며 국회의원 및 기자(라고 해봤자 몇 명 없었지만)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정작 이진삼도 YTN 돌발영상을 통해 육군참모총장 시절 개판경례하던 장면이 공개되면서 역효과만 냈다. 결국 다음 총선에서 육사 후배인 김근태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빼앗겼다.[29] 훗날 공적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추서된다.[30] 심지어 시계는 1988년 10월 19일에서 멈춰있었다. 만일 자살이 아닌 타살로 인한 사망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고인의 몸에 충격이 가해진 탓에 10월 19일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31] 장태완 역시 가톨릭 신자였다.[32] 과거에는 '장례 미사도 못 올릴 만큼 사죄(死罪)'로 취급하였다. 때문에 당시 천주교 내에서 정병주를 위해 장례 미사를 치르는 것이 맞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명동성당 주임사제였던 조순창 신부는 원인 미상이라는 것과, 고인의 열심했던 신앙생활로 볼 때 자살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단 이유로 장례미사를 집전했다.[33] 김오랑이 소령을 단 뒤 야전부대 대신 특전사령부에 남아있었던 이유도 아내의 병 치료 목적이 있었다. 치료를 위해선 자대가 서울 인근에 있는 것이 당연히 나았기 때문.[34] 물론 정호용 항목에도 있지만 공식 체계와 무관하게 정호용이 실세로 군림한 흔적도 보여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긴 하다.[35] 자세히 들어보면[36] 그러나 당시 상황을 생각했을때 쿠데타를 일으킬거라는 생각을 하는게 더 이상하고 일이 있어 늦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평시'였던 그 당시엔 기다려보자는 말이 마냥 틀린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