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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기무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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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기무사령부
國軍機務司令部
Defense Security Command (DSC)
파일:attachment/국군기무사령부/DSC.png
<colbgcolor=#8b623e><colcolor=#fff> 창설일 1950년 10월 21일 (특무부대)
1960년 7월 20일 (방첩부대)
1968년 9월 23일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9월 1일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9월 1일 (국군기무사령부)
해체일 2018년 8월 30일
약칭 보안사, 기무사, DSC
소속 대한민국 국군
상급기관 국방부
초대사령관 육군 예)중장 김형일(군영 1기)
마지막 사령관 육군 예)대장 남영신(학군 23기)
위치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1. 개요2. 역사3. 편제
3.1. 직할부대3.2. 예하부대 (기무부대)
4. 출신 인물
4.1. 사령관4.2. 장교4.3. 사병
5. 기타
5.1. 지원 및 선발5.2. 병사 근무환경5.3. 기무부대가
6. 비판
6.1. 전쟁 범죄학살6.2. 민간인 사찰 문제6.3. 잘못된 지침6.4. 폭동적 시위진압6.5. 녹화사업과 군 내 의문사 개입6.6. 비리6.7. 정치적 중립 위반
6.7.1.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명령 불복종
6.8. 세월호 참사 관여 의혹6.9.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6.9.1. 위수령 문건 진실공방6.9.2. 최종본 공방
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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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koreadefence.net/1390283182-24.jpg
자유대한민국 수호 및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 지원
부대 이념

대한민국의 군내 방첩업무 및 군인과 군사기밀에 대한 보안 감시를 했던 국방부 직할부대. 사령관은 육군 중장이다.[1] 본래 국군서울지구병원과 함께 종로구 소격동에 있었으나 2008년 경기도 과천시로 이전했다.[2]

이전 명칭이었던 국군보안사령부에서 1991년에 국군기무사령부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전혀 관련이 없지만 이전에 국방부에는 제3국과 제4국이라는 수사기관이 있었으나 훗날 해체되었다. 북한에는 대한민국의 기무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조직인 보위국이 있다. 정보기관의 일종이므로 보안 문제에 민감하다. 군인사법 시행령 제25조의2 제1항 제1호와 별표 1에는 사령관과 사령부 참모장임기제 진급 자리로 규정되어 있고, 육군의 몫으로 지정되어 있다. 더해서 몇 개 기무부대의 장 직위도 임기제 진급 보직으로 규정되어 있고 각군별로 자리가 할당되어 있다.[3] 1337(방첩신고) 전화는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다.(일과시간 이후 당직실로 연결됨)

2018년 9월 1일에 문재인 정부에 의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격하되었다가 4년만인 2022년 11월 1일 기무사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국군방첩사령부가 창설되었다.

2. 역사

국군기무사령부 변천사
1940년 ~ 1950년 1950년 ~ 1960년 1960년 ~ 1968년
조선 경비대 정보처 특별조사과(1948년 5월)
→특별조사대(1948년 11월)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1949년 10월)
육군 특무부대(1950년 10월)
Special Investigation Service
육군 방첩부대(1960년 7월)
Counter-Intelligence Corp
해군 방첩대 (1953년)
National Security Unit
공군 특수수사대 (1954년)
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1968년 ~ 1977년 1977년 ~ 1991년 1991년 ~ 2018년 9월 1일
육군 보안사령부(1968년 9월)
Security Command
국군 보안사령부(1977년 9월)
(육군·해군·공군 방첩부대 통합)
Security Command
국군 기무사령부(1991년 1월)
Defense Security Command
해군 방첩대
National Security Unit
공군 특수수사대
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파일:국군기무사령부 과거깃발.png
육군의 방첩부대는 6.25 전쟁 당시 육군특무부대란 명칭으로 창설되어 이후 육군방첩부대육군보안사령부 순으로 명칭이 바뀌었다.[4] 해군의 방첩부대는 해군방첩부대로 창설되어 해군보안부대로 변경되었고, 1973년 해병대의 해병보안부대를 흡수하였다. 공군의 방첩부대는 제20특무전대 예하의 대공수사부대인 26특수수사대였고 1977년 육·해·공군의 방첩부대를 통합해 국군보안사령부를 창설하였지만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으로 인해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미군정 시절의 미합중국 육군 제24군단 CIC를 모델로 하였다. 일본 관동군 헌병 소속으로서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5]을 적발해 죽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주도한 악질 김창룡이 역대 기무사령관에 들어가 있다. 김창룡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정보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창설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국군 내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1960년대~80년대로 이어지는 군사정부 시기에는 군 외부에 대한 영향력도 상당했다. 이는 본래 군 내부 및 군 관련 사항에 엄격히 제한되어야 할 수사권을 포괄적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군사정부 시절 보안사령관은 정기적으로 대통령과 독대 직접 보고를 하였다. 국방부 직할부대임에도 국방장관도 못 건드리는 위치였다. 정보기관 중 권력 1위에 속하는 중앙정보부만이 보안사령부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직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하면서 국내의 모든 정보를 통제하게 된다.[6] 결국 전두환과 하나회를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은 그 영향력을 활용하여 권력을 탈취하게 된다. 당시 보안사령부의 정보력과 수사, 연행권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이들이 상황을 주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해직(K-공작계획), 야당인사 정치활동규제, 민정당 창당 심지어 국회의원선거 공천까지 보안사령부에서 주도했다. 1980년대 이후에도 야당 정치인사, 재야인사,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에 대한 민간인 사찰을 계속해 왔다. 녹화사업 역시 보안사령부의 작품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공작을 이어가던 중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언론에 폭로되는데, 이것이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다. 당시 폭로된 사찰 대상 명단이 무려 1,300여 명이다. 심지어 당시 집권당 대표였던 김영삼도 있었다.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을 바꾼 것도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실 '기무(機務)'라는 명칭이 기존 이름인 '보안(保安)'보다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라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이 당최 무슨 부대인지 알 수가 없다. 사전적으로 '기무(機務)'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근본이 되는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와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미가 있다. 기무사령부의 '기무'는 후자, 즉 '기밀 임무'의 줄임말이다.[7] 그러나 기무학교에서는 고종황제의 특별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의 '기무'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가르친다.

군 내부를 대상으로 상당히 많은 기밀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만큼 기무사 소속 장교와 부사관은 계급이 낮더라도 절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특히 기무부대 상사라면 대대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상사의 경우 대령까지 독자적으로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무사령부 상사에게 밉보였다가 마음 먹고 조사에 들어가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꼬투리 잡혀서 불이익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계급이 높더라도 기무사령부 소속 군인들은 병사조차도 웬만해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이후 더불어민주당참여연대 등 진영에서 대대적인 개혁 혹은 해체 의견이 높아졌고 2018년 8월 3일 계엄 문건과 관련된 인사들의 원대 복귀 명령[8]이 떨어지고 남영신 기무사령관이 임명되어 해편 임무를 맡았다. 해편 후에는 신설부대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업무가 이관되었다.[9]

2022년 정권이 교체되자 이번에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해편 격하 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관련 2급 기밀 문건을 유출하고 문건 내용을 실제와 다르게 의도적으로 왜곡해 증언한 혐의 등으로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 이석구 전 기무사령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3명이 대검찰청에 고발되었다. 2018년 8월 문 전 대통령 지시로 출범한 민군 합동수사단에서 3개월간 참고인 287명을 조사하고, 90여곳을 압수수색했으나 쿠데타 모의 혐의와 관련된 증거를 찾지 못했고 이에 따라 정치적인 이유로 해체된 거 아니냐는 의견이 점차 올라오는 중이다. #

3. 편제

3.1. 직할부대

3.2. 예하부대 (기무부대)

예하부대로 사단급 이상 제대(諸隊)에 기무부대가 배치되어 있다.[10] 보통 해당 제대 사령부 영내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사령부는 불편한 동거를 하는 셈. 강력한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에 큰소리를 칠 수 있고 사령부도 어찌할 수 없어 병폐가 일어나기도 한다.[11]

일단 해당 부대 소속이 아닌 기무부대 소속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도 없거니와 기무부대도 해당 부대에 소속감이 없기 때문에 부대 막사를 제외한 시설관리가 소홀하다. 그러면서도 큰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사령부 시설을 쓰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러한 면들 때문에 기무부대 장병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정보/보안계열 처부의 경우 기무부대와 가깝고도 먼 관계가 된다. 신원조회, 대간첩업무, 보안감사 등 적지 않은 업무에서 기무부대와 협력해야 하기 때문. 그 외의 다른 처부에서도 기무부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묘한 거리감이 자리잡기도 한다. 엮이자니 좋은 일은 없고, 멀리하자니 그렇고(...) 그래서 기무부대와 친한 곳은 간부식당뿐이란 말도 있다.

그래서 관련 간부들은 기무부대를 두고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업무관련 접촉 외에 간부들이 기무부대를 가장 많이 찾을 때는 '장성급 진급 및 인사' 때다. 장성급 장교의 경우 진급과 인사가 대외비로 되어 있고 이쪽이 가장 소식이 빠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반부대 병사의 경우 행정병 보직을, 그것도 정보분야 보직을 받았을 경우 매우 피곤하게 되는 존재가 된다. 보통 보안감사는 하루 이틀전에 통보를 하고 오지만 만약 당일 아침에 통보해서 10시쯤 온다면, 결과가 어떻든 피 보는 건 정보병이다. 실제로 08:30에 통보를 받고 한 시간 동안 50여 대의 PC를 싹 점검하는 경우도 있는 듯.

일반 초병군사경찰들도 그닥 기무부대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수의 기무부대 간부들이 정장을 입고 다니는데다가 다른 군인들처럼 출입증을 목에 걸거나 가슴에 패용하고 다니는 경우가 적다. 당연히 전투복 차림도 아니고 출입증도 안 보이니 출입문에서 검문을 하면 "나 기무부대 ※※인데~" 하면서 트러블이 발생하게 된다. 대개 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안면식이 생기면 그냥 경례하고 통과 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안면식이 있음에도 초병과 헌병에게 있는 권한을 십분 활용하여 끝까지 기무부대 간부에게 출입증을 제시하게 만드는 병사들도 있다.[12] 초병, 헌병 입장에서 기무부대원이라고 해서 꿀릴 필요가 없는데 정석적인 검문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

기무부대 보안담당 간부들은 그동안의 다경험으로 인해 보안감사능력이 탁월하여, 모르쇠로 일관하여 컴퓨터 내 기록을 삭제하거나, USB를 허가없이 무단 사용한 경우에도 모두 기록을 복구해 혐의를 입증시킬 수 있다. 주로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잡혀온 경우 하사와 같이 군 초년생이 많다. 보통 간부들은 잡혀오면 대체로 혐의를 인정하는 편. 보통 이곳에 혐의를 받고 들어오면 다음 계급으로의 진급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기무부대는 위장 명칭을 사용한다. 주로 '안보상담소' 혹은 민간기업 위장부대 혹은 행정기관처럼 'XX공사', 'XX물산', 'XX기업사' 같은 명칭을 쓴다. 예를 들면 대구 지역의 경우 태백공사라고 한다.#

4. 출신 인물

4.1.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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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장교

  • 김진태
    전 자유한국당 의원. 1989년 사법연수원 18기로 수료 후 임관하여 1992년까지 공군 소속으로 국군기무사에서 공안담당 법무관으로 복무했다.
  • 오세훈
    1988년 5월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하여 보안사 정보처로 발령받아 약 30개월간(89년 7월~91년 1월) 근무했고, 1991년 2월 중위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정훈장교(군사교육정책분석장교)로 주로 '문무대전방입소'(80년대 대학생 입소훈련)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 이학봉
    하나회 회원으로 12.12 군사정변 때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의 대공과장이었다. 반란 성공에 선두주자로서 정승화 총장 감금에 가담했다. 전두환 정부 당시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 최재철 - 주프랑스 대사
    1982년 7월 24일 해군 함정 소위 임관,, 1985년 7월 31일 중위 전역.
  • 허삼수(육사 17기)
    하나회 회원으로 12.12 군사정변 때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의 인사처장이었다. 반란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후 준장으로 예편, 청와대로 들어가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냈다.
  • 허화평(육사 17기)
    하나회 회원으로 12.12 군사반란 때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의 비서실장이었다. 반란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후 준장으로 예편, 청와대로 들어가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 보좌관과 정무1수석비서관을 지냈다.

4.3. 사병

  • 강명구
    1998년 5월 21일 입대, 2000년 7월 20일 전역. 구난차량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 권영진
    1982년 10월 11일 입대, 1985년 1월 4일 전역.
  • 신상현
    6.25 당시 기무사의 전신인 특무대에서 복무하였으며, 정전협정이 있던 1953년에 일등상사로 전역했다. 이 덕분에 얻은 별명이 신상사다.
  • 육동한
    1983년 7월 29일 입대하여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1985년 8월 1일 전역.
  • 윤석양
    1990년 10월 4일 육군 이등병 신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때 불법 사찰 내용을 양심 선언하여 그해 가을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인물이며, 부대 이름도 보안사에서 기무사로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
  • 이기철
    1978년 7월 21일 입대, 1981년 2월 26일 전역.
  • 이동관
    1983년 6월 1일 입대, 1985년 12월 12일 전역. 2처(정보처) 2과 외신계에서 외신을 번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이서진(배우)
    대학교 졸업 후 1990년대 중반에 사병으로 복무했다. 이서진이 방송에서 자신의 복무 경험담을 거의 꺼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13] 기무사의 특성상 기밀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 이성윤
    1987년 8월 14일 입대, 1989년 11월 9일 전역.
  • 임광현
    1990년 2월 15일 입대, 1992년 6월 25일 전역.
  • 전영태
    1976년 3월 17일 입대하여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1978년 12월 26일 전역.

5. 기타

5.1. 지원 및 선발

장교
육군 해군 / 해병 공군
임관 후 4~6년차 장기복무자
전투병과장교(항공포함)
임관 후 4~5년차 장기복무자 임관 후 4~5년차 장기복무자
교육성적 및 근무평정 우수자
- 임관 또는 고군반 30% 이내자
부사관
임관 후 2~5년차 하사 또는 중사로서 장기복무자 또는 장기복무 희망자
양성 또는 초급과정 교육성적 상위 30% 이내자
인성 및 근무경력 우수자
구분 행정병 특기병
선발대상 육군교육사령부 육군훈련소 입영자
해군교육사령부 해군기초군사교육단 입영자
해병대교육훈련단 입영자
공군교육사령부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영자
육군교육사령부 육군훈련소 입영자
- 후반기교육
해군교육사령부 해군기초군사교육단 입영자
- 후반기교육
해병대교육훈련단 입영자
- 후반기교육
공군교육사령부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영자
- 후반기교육
자격조건 대학4년제 재학 이상 학력 소지자
신체 2급 이상
대학 4년제 재학 이상 학력 및 기술특기 소지자
(2010년이후로 행정병과 특기병의 모집 학력이 동등하게 변경됨)
신체 2급 이상

5.2. 병사 근무환경

이곳에서 근무하는 병은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신병훈련 중 면담/신원조회를 거쳐 선발한다. 육군(특기번호 1541)의 경우 논산 육군훈련소에서만 선발된다. 행정병의 경우 논산에 입영한 징집병(일반병) 사이에서만 선발하며, 모집병(특기병)은 선발대상에서 제외된다. 선발된 인원은 국군기무학교에서 2주간 교육을 받은 뒤 전국의 기무부대로 배치된다. 해군 같은 경우는 병과에 따라 1~2명이 걸려서 간다고 하며, 보통 후보는 5배수이다. 후반기 교육 최종 평가 당시 시험을 본 후 배치 판정을 받을 때 걸린다. 뽑는 인원은 매번 다르고 필요할 때만 뽑기 때문에 육군의 경우 보통 논산훈련소 전체에서 5주 동안 20명 이내 정도가 선발된다(운전병 제외). 국방부 직할부대 특성상 고급 인력을 먼저 유치할 수 있는 '차출'의 개념을 사용하며, 최초 5배수 선발 당시에는 훈련소 입소 2주차가 지난 시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훈련이 다 끝나야 어디를 배치 받을지 아는 병들로서는 대다수가 당황하게 된다.

배치 부대와 업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타 공인 환상의 보직이다. 따로 유격이나 혹한기 훈련 같은 것은 받지 않지만[14] 그만큼 매월 15일 민방위 훈련은 칼 같이 받기도 한다. 간혹 해병대 장병들은 훈련이 없다는 것에 실망해서 강도 높은 유격훈련을 받고 싶다는 소원수리를 제출하기도 하지만 가볍게 무시당한다. 하지만 최근 해병사단을 지원하는 예하기무부대(물론 간부와 병 모두 해병)에서는 부대장의 배려로 부대 해병들이 사단 해병들과 함께 각각 1주와 3주간의 유격훈련과 기습특공 훈련을 받고 수료하였다. 2011년도부터는 국방부 지침이 내려오면서 2박 3일 유격이 실시되었는데 해군, 공군도 예외없이 실시한다. 원칙적으로는 유격훈련을 훈련단 이후로 받을 일이 없는 해공군 출신들은 기무사령부로 오면 인상이 찌그러질 수 있다.

하지만 해공군 출신들이 진심으로 인상이 찌그러질 일은 따로 있으니, 다름 아닌 육/해/공/해병의 각기 다른 복무기간과 부대별 일괄로 적용되는 외박제도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다. 일반적으로 육군과 해병의 근무일수가 가장 짧고 그 뒤로 해군, 공군순으로 복무일수가 길어지는데 같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제대 날짜는 내가 입대한 군별 적용된다. 또한, 외박 정책의 경우 제일 좋은 공군의 외박제도가 부대에 도입이 되기 때문에 육군 입대자의 경우에도 1박 2일/4주, 2박 3일/6주 등으로 외박을 실시하게 된다.

사령부 본부에서 근무하게 되면 간부 대비 병의 비율이 낮기(병사 수<<<<장교 수<<<부사관 수)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타 부대보다 편할지 모르나, 오히려 예하부대만 못한 경우가 많으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 병사가 각 부서에 배치되어 근무하는 시스템인데, 부서별로 사무실이 굉장히 많고 병사 수는 적어서 병사는 홀로 다수의 간부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즉 짬밥을 먹어도 만년 막내 신세이다.

가끔가다 모든 기무부대 소속 병사들이 사복 입고 핸드폰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기무부대에 따라서 케바케인 듯하다. 특정 군부대 내에 위치한 기무부대의 경우 당연히 기본적인 근무는 근무복[15] 혹은 전투복[16]. 휴가를 나갈 때의 경우 사복을 입기도 했지만 그것도 2009년 2월 공문이 내려와 폐지되어 이젠 전투복이나 근무복, 정복을 입고 나간다. 아니면 가지고 있던 사복을 출타 때 승인받고 입고 가는 경우도 많다. 업무 특성상 사복을 입는 병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당연히 업무 때문에 허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출이나 외부행사 때문에 관물대에 사복을 가지고 있는 병사가 대다수이다. 사복을 착용해야 하는 보직들은 피복비가 1회 지급되지만 워낙 액수가 작아 세트를 구매하지 못하거나 아주 저렴한 것으로 맞추는 경우가 많다.

한편 XX공사와 같은 이름을 내걸고 철저히 민간기업으로 위장한 채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기무부대는 부대 내에서 근무하는 병사는 물론 경계근무를 서는 초병들도 사복을 입고 가스총을 착용한 채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기무부대는 부대를 방문한 시장과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간부가 부대 내에서 사복을 착용하고 있다.

휴대폰의 경우 당연히 일반병은 가지고 다닐 수 없고 간부를 모시고 다니는 운전병에 한해서 지급된다. 그리고 지급되는 휴대폰도 피처폰이 지급된다.

총기의 경우 후방 국방부 직할 부대라고는 하나 기무사의 업무 특성상 침입자들에게 털리게 되면 매우 난감해지기 때문에 후방임에도 K2 소총, K3 경기관총, M60 기관총 등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아래에 나와 있듯이 그들이 깨끗하지 못한 부분을 알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다.

일부의 경우 기무사령부가 나오면 나중에 취직이 안 된다면서 일부러 1차 과정에 선발되어도 생까는 경우도 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 외려 기무사 출신 전역자는 국가가 사실상 신원보증을 했다고 할 수 있기에 기업 입장에서 이들을 꺼릴 이유가 없다. 장교 출신들을 기업이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육체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려 자원한 해병대에서 기무사령부에 차출될 경우 슬퍼한다는 이야기는 있다. 대신 간부의 경우 기무사령부 소속이었다가 출신 군의 일반 부대로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물의를 빚어 원복당하는 경우), 이 경우 몇 년 동안 감시를 당한다고 한다.

5.3. 기무부대가


조국과 자유는 우리의 생명
멸공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쳤다
악마의 붉은 무리 무찌르고서 영광의 통일전선 앞장을 서리
굴복을 모르는 화랑의 후예 국민의 힘이 되는 기무부대
미덥다 든든하다 정의의 후예
살아있는 성벽이다 기무부대

겨레와 국토수호 우리의 사명
청춘의 몸과 마음 모두 바쳤다
역사가 우리를 명령하는 날 범같이 사자같이 달려나가리
굴복을 모르는 화랑의 후예 국민의 힘이 되는 기무부대
미덥다 든든하다 정의의 후예
살아있는 성벽이다 기무부대
기무부대가

6. 비판

국군기무사령부는 군인의 본분을 저버린 여러 가지 일탈행위를 저질렀고[17] 결국 이게 빌미가 되어 적폐청산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 시기에 아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 국군보안사령부 시절부터 온갖 정치공작에 개입했으며 1979년과 1980년에 연이어 두 차례의 내란을 일으켰다. 군사정권 시기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방첩 기관이 아니라 권력의 수족이 되어 각종 군 내 의문사 사건 은폐에 앞장섰으며 군 내부는 물론 대민 인권 침해 사건까지 여럿 유발했다. 이로 인해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고 결국 오랜 역사를 지닌 정보 기관이었음에도 씁쓸하게 해체되었다.

다만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시로 발족했던 군·검 합동수사단은 무려 104일 동안 국방부와 육군본부, 대통령 기록관 등 90여 곳과 전·현직 장성 204명을 조사했으나 내란음모나 쿠데타 모의 등 어떤 증거나 진술도 확보하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했다고 전해져 무리한 군 내부 탄압이 아니었냐는 시각도 있다. #

이로 인해 강제 해체된 거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으며, 급기야 정권이 교체된 2022년에는 당시 해체 작업 관계자들이 직권 남용으로 고발되었다.[18]

6.1. 전쟁 범죄학살

기무사의 전신인 특무대는 건군기에 벌어진 대규모 숙군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 사건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의 주된 주체이다.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무한한 비호를 받고 있던 김창룡이 그 사령관이었다.

숙군 사건 당시 특무대는 군 내 좌익 의심자들에 대한 강경한 숙청을 주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군인들 역시 여럿 살해당하였다. 피해자는 총 4천 명을 상회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 국군은 기존의 정치적 중립을 벗어버리고 정치군대화되기 시작하였다.

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개전 이틀 후인 6월 27일부터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좌익 의심자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이 국군 명령계통을 타고 하달되었다. 특무대는 이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실제 학살은 국군 개별 사단의 헌병대대한민국 경찰이 주로 수행하였으며 특무대는 그들이 살해할 대상자를 선별했다. 그들의 학살로 인해 살해된 이들은 최소 30만 명에 달한다. 절대다수의 피학살자들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6.2. 민간인 사찰 문제

기무사령부의 고유 임무는 군 내 방첩 업무 및 군인과 군사기밀에 대한 보안 감시이며, 치명적인 군사 보안 범죄나 군사기밀 유출 범죄, 군내 간첩활동에 연루되지 않는 한 민간인은 기무사의 영역 밖이다.[19]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다.

게다가 21세기에도 민간인 사찰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참여정부 시기 폐지된, 기무사령관의 정기적인 대통령 독대가 부활하였고 2009년 여름 기무사 수사관의 민간인 사찰이 폭로되었다. 사찰내용이 기록된 캠코더와 수첩 등 증거자료까지 나왔는데도 어물쩡 넘어가려다가 소송 크리(...) 결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 결과 2011년 1월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하도록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 ‘기무사령부 민간인 사찰’ 국가 책임 인정. 거기다 2011년 10월에 와서도 조선대학교 교수의 이메일을 해킹하다 걸렸고(...) 이 때문에 기무사령부의 불법행각이 또 문제가 되었다.

2018년 7월,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기무사에서 조직적으로 관여하여 유가족들을 성향별로 분류하고 사찰하였으며 극우 단체에게 맞불집회 정보까지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기사1) (해당 기사2) 게다가 유병언 체포조를 만들어 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군 수사정보기관이 왜 비공식적으로 민간인을 체포하려고 한 것인지 의문. 해당 기사

유가족들을 성향별로 분류하고 사찰한 것뿐만이 아니라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대, 그 군대의 기관이자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관인 기무사가 어떻게 해야 국민인 유가족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생각해 본 걸로 보이는 문서들까지 나오면서 이곳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더 강해졌다. 해당 기사

그리고 기무사 요원들이 세월호 참사 당일 청해진해운과 전화,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해당 기사

추가로 2018년 7월 기무사가 군 면회객 수십만 명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민간인 사찰에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해당 기사 간단히 요약하면 군에 면회오면서 적혀진 면회객의 이름과 주민번호 등 기본적인 개인정보들을 대공수사부처에 이관했는데 이 부서는 수사협조명목으로 받은 경찰망을 이용해 면회객들의 주소, 출국정보, 범죄이력 등 수많은 개인정보들을 추가적으로 열람하여 진보 성향 이력이 있는 인물들을 대공수사대상으로 삼고 각종 사찰을 벌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을 다녀오면 적성국가방문을, 집회 및 시위를 하다 잡힌 이력이 있으면 범법행위자 등을 명목으로 사찰을 마구잡이로 진행했다고 한다. 추가로 국방부장관의 전화를 도, 감청하여 과거 노무현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국정토의 내용까지 감청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021년 뉴스타파에 의해 입대 예정자에 대한 사찰도 이뤄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보지원사령부는 과거 국군기무사령부에서 2013년 말에서 2014년 초 입대예정자에 대한 정보 수집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6.3. 잘못된 지침

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이적표현물이라면서 압수해 갔다. # 아마도 공산주의자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과 헷갈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이적도서 기준을 만든 건 경찰 공안문제연구소인데 공안문제연구소는 2005년에 이미 이적표현물 감정 문제로 폐지된 후 치안정책연구소로 통합된 지 오래였으며[20] 해당 사건은 2012년에 일어났으며 1년 전인 2011년에는 해당 도서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21] 변호인(영화)에 등장한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겹쳐보인다.

6.4. 폭동적 시위진압

과거의 국군보안사령부 시절에는 군 내 불법 파벌형 사조직인 하나회의 수장이자 10.26 사건 이후 사실상의 실권자였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휘하에서 군사반란 방지를 위해서 박정희 정부 시절 설립된 슬로건이 무색하게 쿠데타를 막아야만 할 부대가 되려 그 명령을 어기고 기관장의 명령에 따라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또다시 내란을 일으켜 국가까지 장악하는 초법적인 군사 준동을 한 것도 모자라서 국민을 보호해야만 할 국군의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고 오직 그들을 이끌던 당대의 실권자와 그의 휘하 사조직의 명령에 따라서 폭동적 시위진압의 방식으로 국민들을 학살하고 고문하며 의무를 저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참고.

6.5. 녹화사업과 군 내 의문사 개입

또 보안사령부가 저지른 흑역사 중에서도 녹화사업은 녹화사업을 담당했던 서의남(보안사령부 3처5과장, 중령)은 2002년 국가기관(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범죄증거일 수도 있는 자료를 다수 불태워 버리고 잠적하여 수배되기도 했다. #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는 국민대생 김정환이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에게 생매장 협박을 받으며 프락치공작을 강요당한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오명을 쌓아온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이른바 청명계획이 1990년 폭로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이 사건으로 인해 국군보안사령부는 위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이듬해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를 없애고 국방장관과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해 정상적으로 국방장관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사령관 직급도 소장으로 한 계급 내렸으나 1년 만에 다시 중장으로 환원되었다.[22][23] 기무사령관은 중장 보직이며 기무사 부사령관과 참모장이 소장, 그 아래 수뇌부로 준장 7명이 편제되어 있다.# 기무사령관은 군 의전 서열에 있어 중장인 3성 장군/제독들 중 2번째 서열의 보직이며 따라서 이는 전체 현역 군인들 중 10위에 해당된다.[24] 국방일보 기사.

2001년 벌어진 염순덕 상사 피살사건에도 기무사령부가 배후에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무려 현직 기무사령부 인물이 2명이나 개입된 전대미문한 사건. 심지어 현직 기무사령부 소속원이자 사건의 용의자였던 이 중사가 2018년 2월에 자살해 버리면서 뒤집어져 버렸다.

6.6. 비리

  • 2015년 5월 13일, 기무사령부 전현직 간부가 탄창 4만 6천 개를 레바논 테러 조직[25]에 팔아넘겼다는 게 밝혀졌다(기사). 이 정도면 방산비리를 넘어서서 한국의 우호국인 이스라엘[26]에 대한 적대행위다. 이스라엘에서 알았다면[27] 엄청난 외교적 타격이 생길 행위를 군사정보기관이 저지른 것이다. 국군기무사령부의 극우 성향을 감안하면 극우세력들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아니 극우 세력들의 입장에서 더더욱 실드칠 수 없는 행위다.[28] 대한민국 우파 세력이 대체로 친미 성향이고 이스라엘은 대한민국과 같은 친미 국가이며 위의 각주에 나온 것처럼 대한민국과도 사이가 좋은 나라인데 이런 상황에 대한민국 군사조직의 전현직 간부가 이스라엘의 적대국가인 레바논에, 그것도 레바논의 정규군이 아닌 테러 조직에 탄창을 팔아넘겼다는 건 좌우파 양쪽을 모두 국군기무사령부의 적으로 만드는 꼴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군인들이 우호국의 적대국의 테러조직에 무기를 밀수한 셈이다. 저 정도 일이 얼마 안 가 조용해졌다는 게 미스터리할 정도. 정작 기무사는 여론을 깡그리 무시로 일관.
  • 2015년 7월 10일, 해군 출신 기무사령부 소령이 중국에 돈을 받고 해군 구축함 관련 군사 3급 비밀(Confidential) 정보를 팔았다고 한다. 사건의 내막 요약하자면 중국인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던 해당 해군 소령이 폭력시비에 휘말렸는데 이 사건의 해결사 역할을 해 줬던 중국인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이 중국인은 이 친분관계를 이용해[29] 해당 소령에게 군사자료 및 기밀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6.7. 정치적 중립 위반

2017년 9월, 이명박 정부 당시 여론조작 활동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군 검찰에게 압수수색을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문제는 군 사이버사 댓글공작을 자체조사한 국방부 TF를 감청해 수사기밀을 이미 알아낸 사실이 들통났다는 것이다. SBS

2018년 1월 15일,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전국 기무부대원들이 동시에 참여한 가운데 정치적 중립 준수를 결의하는 정치중립선포식을 하였다. 일단은.[30] 이석구 사령관(육군 중장, 육사 41기)을 비롯한 기무사령부 장성들이 차례대로 서울 청계산에서 떠온 물에 손을 씻은 뒤 흰 장갑을 꼈다. #

2018년 2월, KBS가 군 내부 문건을 단독 입수하여 보도한 결과에 의하면 이명박 정부 당시 기무사령부가 청와대와 결탁하여 무차별 여론조작을 하고, 굉장히 편향적인 정치관을 드러내며 선거 개입 의지까지 적극적으로 드러난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 #

심지어 참여정부 시기에 열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당시 여당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였던 정동영도 아닌 야당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명박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노골적으로 보수 집권을 위해 활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31] #

군인권센터에서는 기무사가 보수단체의 활동을 조성했고 명백한 정치 개입이고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

6.7.1.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명령 불복종

국군기무사령부는 자신들의 정치적&권력적 입지가 문민통제에 의해 위협받을 경우 단순히 해당 정권을 불신하는 것을 넘어 이들을 모욕하거나, 무력화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불법 도청 같은 범죄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국군 통수권자인 노무현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과의 통화를 도청했고[32]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 이후에는 기무사 요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으며 # 2012년에는 노무현 자서전을 소지한 기무학교 학생에게 기무학교 교관이 "이런 불온서적을 읽어도 괜찮은가"라고 따지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

6.8. 세월호 참사 관여 의혹

기무사가 만약 세월호가 인양되면 정부에 대한 비판과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으므로 청와대에 세월호를 인양하지 말고 수장시키자는 보고를 한 것이 확인되었다. '인양하는데 돈이 든다', '해외에서도 해상 추모공원[33]을 세웠다'는 등 여론을 조작하여 세월호의 인양을 무산시킬 방법을 짜낸 것이다. KBS 보도. 한겨레 보도. 또한 참사 닷새 뒤 대국민담화에서 박 대통령이 눈물 흘리던 모습도 기무사가 제안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일보 보도(출처 KBS)

유병언 검거작전에 간첩 수사에 국한되어 사용하도록 허락된 단파감청까지 민간인에게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

기무사가 단파감청도 모자라 사고 직후 시민들의 대화를 대규모로 불법감청하고 이를 위해 국가 공공기관인 전파관리소를 이용하려 했다는 정황이 밝혀졌다. #

기무사가 세월호 참사 보름 뒤인 2014년 5월초에 반정부 시위가 순식간에 악화될 수 있으니 계엄령을 조기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2

결국 이들 중 사찰과 연루된 인원들은 기소됐으나, 2023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전원 석방됐다.#

또한 기무사는 참사 직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단체를 종북세력으로 규정해 대응책을 마련한 것으로 정권 교체후 드러났다.#

6.9.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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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지역작전군투입도.png
파일:계엄령작전군투입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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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엔 공수부대" 탄핵 전 '계엄 대비' 작전 짠 기무사(해당 기사)

이철희 의원실이 공개한 기무사의 계엄령 실행계획 문건을 읽어보면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단순히 대규모 과격 집회가 일어나면 군대를 움직여야 한다가 전부가 아니라, 보도검열단을 만들어 언론을 통제하고 방송통신위원회 '유언비어 대응반'을 움직여서 소위 "선동(이 경우 선동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기무사로 추정)"을 저지른다는 SNS 계정을 차단하려 했다. 즉, 계엄령을 했을 경우 단순히 군대를 움직여서 집회를 제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국가 기관들을 총동원해서 언론과 인터넷, SNS까지 장악하려 했다.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문서 참조.

그 외에도 24개의 정부부처를 전부 장악하려한 정황이 드러났다. 기무사가 전남 지역에 파견하려고 했던 계엄군 부대는 1980년에 광주에서 학살을 벌였던 그때 그 부대이다.

SBSJTBC에서는 이 보고서가 국방부의 자체적 판단, 혹은 군 최고통수권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는지, 혹은 이철희 의원의 제도 검토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놓고 치열한 보도전을 펼쳤다. 이것에 대해선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이에 기무사 해체 청원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방부도 자체 조사에 나서 대대적인 기무사 개편을 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다. 또한 7월 9일 추가 문건이 공개되면서 이들이 탄핵 심판 시기뿐이 아닌, 일이 터질 경우 기호지세의 각오로 진즉부터 계엄령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관련 보도

6.9.1. 위수령 문건 진실공방

송영무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 위수령 문건을 입수하고도 선거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지방선거 이전까지 문건을 보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야권을 비롯한 국회에서 송 장관이 왜 중요한 문건을 보고받고도 청와대에 즉시 보고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나왔다.

2018년 7월 24일 국회 국방위에서 100기무부대장[34]인 민병삼 대령(육사 43기)이 송영무 장관에게 위수령 문건을 보고할 때 송 장관이 "위수령은 내가 법률 자문팀에게 물어보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송 장관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기무사에서는 25일 장관 발언을 자필 메모한 후 PC로 작성 했다는 보고서를 증거로 내밀었으며, # 국방부에서는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닐뿐더러 사실이 아닌 것을 첩보사항인 것처럼 보고하는 행태는 개혁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하는 증거가 될 뿐 #이라며 반박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선 군의 공식 절차를 통해서 만들어진 공문서가 아니라 국방부에 소속돼 있는 기무부대장이 회의에 들어가서 들은 얘기를 자기가 나름대로 요약해서 적어놓은 보고서이기 때문에 객관성, 공정성, 제대로 마련된 보고서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

6.9.2. 최종본 공방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11월 5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입수했다는 계엄령 최종본 문건 목차를 공개하였다. # 이로써 최종본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청와대가 박근혜 탄핵 국면 당시 기무사가 검토했던 법령 위반적 내용이 빠져버린 가짜 최종본을 공개했다고 주장했다. 하 의원이 제시한 계엄령 문건 최종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청와대가 최종본이라며 공개한 문서의 목차 21개 중 9개가 빠졌다. 제외된 항목들은 ▲사태별 대응개념 ▲단계별 조치사항 ▲위수령·계엄 선포 사례 ▲위수령 시행 관련 제한사항 및 해소방안 ▲서울지역 위수령 적용방안 ▲국회에 의한 계엄 해제 시도 시 조치사항 ▲국민 기본권 제한 요소 검토 ▲경비계엄 시 정부부처 통제 범위 ▲주한 무관단·외신기자 대상 외교활동 강화 등 9가지다. 최종본에 남아 있는 12가지 항목은 국방부에서 발간한 계엄실무편람과 전시계엄시행계획(3급 비밀문서)에 나온 계획과 같아 평시와 전시에 군이 정례적으로 관리하는 매뉴얼이다.

하 의원은 "정부는 1%의 가능성이 있어도 미리 대비를 하고 매뉴얼을 갖춰 놔야 하는 것"이라며 "100년 동안 불이 안 났다고 불이 안 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가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당시 촛불정국에서 국방부가 대비 차원의 탁상공론을 하며 과거 군사정권 시절 자료까지 모두 모아 초안을 만든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책상머리 검토 문서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마치 쿠데타를 모의한 것처럼 괴담을 유포한 민주당도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청와대가 자신들이 공개한 문건이 최종본이 아님을 알면서도 고의로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더 심각한 것은 청와대가 최종본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 이를 은폐하고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최종본 문건의 존재를 묻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즉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국가적 혼란을 부추길 수 있는 예민한 문제를 가지고 장난친 국가혼란세력을 일망타진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직접 보고받은 사안이기 때문에 청와대가 사과하고 진짜 최종본을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군인권센터는 기자회견을 열고 하태경의 최종본은 기무사가 위법적 내용이 빠지도록 고친 것이니 그것을 최종본이라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 또한 “이 문건은 최종본이 아니고 19대 대통령 선거 다음 날에 태스크포스(TF) 관련자들이 서둘러 문건을 훈련 ‘2급 비밀’로 둔갑시키고자 세탁한 문서”라며 “문건 상 우리 군의 작전 계획에 위배되고 초법적인 내용에 해당하며 실제 실행계획으로 간주될 만한 내용을 기무사가 고의로 삭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하 의원도 군인권센터의 반박에 재반박 기자회견을 열고 맞섰다. 그는 "최종본은 2017년 3월 3일에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보고된 문건이다. 제가 가진 문서가 (기밀 문건으로) 등재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면 최종 등재된 문건이 제가 가진 문서여야 하는데 2017년 5월 10일 최종 등재 문건은 작년에 청와대가 공개한 문건과 일치한다"며 "군인권센터의 말대로라면 청와대가 공개한 자료가 최종본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현재 최종본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청와대가 진짜 최종본을 공개해야 한다. 혼란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청와대의 책임"이라며 청와대의 계엄령 최종본 공개를 재차 요구했다. #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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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까지의 국군기무사령관 부착물
지휘관 휘장을 패용했다.[35]
2018년부터 바뀐 국군기무사령관 부착물[36]
2017년 12월까지는 사령관이라 지휘관 휘장은 패용하는데, 지휘자 견장은 착용하지 않는 다소 이상한 부착물 패용을 해 왔다. 그러나 지난 2018년 1월, 국군기무사령관용 흉장이 새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기무사가 해편된 이후 안보지원사령관은 일반 지휘관 휘장을 패용한다. 견장은 착용하지 않는다.

제37대 사령관인 허평환 중장까지는 기무사령관 재직시절 지휘관 휘장을 패용하지 않았으나, 제38대 사령관인 김종태 중장시절부터 기무사령관이 지휘관 휘장을 패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후 취임하는 사령관들은 모두 지휘관 휘장을 패용하다가 2018년에 새로 바뀐 기무사령관 휘장을 패용했는데 기무사가 해체되어 안보지원사로 개편된 이후에는 다시 지휘관 휘장을 패용. 기무사령관 전용 휘장은 1년도 못 가 폐지되었다.

군 내 정보기관이라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보니 근대 이전까지 한국군의 역사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37] 애초에 창설 당시에도 일본군 방첩대나 헌병대, 미8군 방첩대 등을 모델로 했었고 정보기관 업무는 부대규모가 커지면서 하나 둘씩 맡게 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굳이 한국사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자면 정조가 화성에 창설했던 장용영을 들 수 있겠다.[38]

8. 관련 문서


[1] 해편된 이후로는 국직부대답게 해공군도 사령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2] 동아일보, 경기일보. 2008년 이곳으로 이전 후 옛 건물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사용 중이다. 국군기무사령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현대미술관 일부 건물을 만들었다.[3] 육군: 제100부대, 제101부대
해군: 제102부대
공군: 제103부대
[4] 방첩부에서 보안사로 바뀐 결정적 계기는 같은 해에 있었던 1.21 사태 때문이다.[5] 여기에는 공산당과 연계된 조직이 많았으나 문제는 김창룡이 죽였던 사람들 중에 공산당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이다.[6]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한 초유의 사태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물론 김재규의 끄나풀이 중앙정보부 내부에 어떻게 분포하고 있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다른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임명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기관 간 견제와 균형을 간과하고 다른 정보기관의 장에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긴 것은 당시 정부의 분명한 실책이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꾸고 보안사령부의 하위기관같이 전락했다가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이 부장으로 부임하고 나서야 예전의 위세를 회복했다.[7] 1894년 1차 갑오개혁 당시 설치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따왔다는 견해도 있는데, 여기서의 '기무'는 전자의 의미에 가깝다. 실제 군국기무처는 폐정 개혁을 위한 초정부적 기구로서 정보 통제나 감시와는 무관한 '입법 기관'이었다.[8] 기무사에 차출된 인원들은 진급에 필요한 보직을 밟기 어려우므로 사실상 진급도 못한 채 버티거나 퇴역하는 두가지 선택만 남은 셈이다.[9] 기무사의 간부들은 본래 다른 부대 소속이었다가 기무사로 파견을 나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 인사권을 쥔 문재인 대통령이 이들에게 원대 복귀 지시를 내린 것이다. 누리꾼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조치는 문 대통령이 이들의 경력을 사실상 끝장낸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진급을 하려면 소대장→중대장→대대장→연대장/여단장 같은 필수 보직들을 거쳐야 상위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기무사나 정보사처럼 일찍이 이쪽으로 파견을 나와 근무했던 사람들은 일선 부대의 지휘관이나 그 밑에서 일하는 작전참모, 정보참모 같은 필수 보직들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무사를 통해 진급을 해온 만큼 '기무사 메리트'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런 필수 코스를 밟아본 적도 없으니 상위 계급으로 진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무부대 장교에서 일반부대 장교로 전락한 이들은 사실상 진급 문이 닫혀 버린 것과 다름 없다.[10] 90년대 이전까지는 보안부대라고 불렀다.[11] 흔히들 기무대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해당 사단 소속이 아닌 기무사령부에서 파견한 부대이므로 기무부대가 정식명칭이다. 즉, 미토콘드리아처럼 한 울타리 두 집 살림이 공식적 대접이라는 것이다.[12] 사실 안면이 있더라도 검문(피아식별 불가능 시 수하)은 해야 한다. 어제 출입 가능한 인원이었다 해도 오늘 출입 불가능한 인원이 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직 변경, 부대 전출, 파면과 해임 등으로 신분이 바뀌는 경우가 대표적.[13] 이 때문에 이서진이 현역 출신이 아니라는 오해가 퍼지기도 해서 이서진이 우스갯소리로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14] 기무사령부 예하부대가 워낙 많다 보니 각 기무 부대장이나 사령관의 재량에 따라 달라진다. 사령부와 국방부 기무부대, 210기무부대, 서울권 파견부대 등 서울권 기무부대는 수방사예하부대로 가서 수방사장병들과 유격을 받는다. 전방사단 기무부대의 경우 혹한기 훈련을 받는 경우도 있다. 특전사 기무부대의 경우에는 특전장병들과 함께 공수기본 훈련도 수료한다.[15] 해병, 공군은 근무복이 전병력보급이지만 육군은 없기 때문에 해병, 공군과 같이 근무하는 국직부대나 수방사의 경우에는 육군 근무복이 보급 구두와 함께 지급된다.[16] 해군의 경우 전역할 때 전투복이 보급되기 때문에 육군 공군 전역자가 놔두고간 피복을 사용하거나 사시사철 정복을 입고 다녀야 한다.[17] 강제 해편 논란과는 별개로 기무사가 그동안 여러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적법한 수사와 재판을 거쳐 공인된 사실이다.[18] 다만 기무사의 다른 논란과 달리 이 부분은 수사 및 재판을 통해 사실로 공인되지 않았음을 유념할 필요는 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꼬리 자르기 용도로 전 정권의 관계자들을 묻어버리려 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이기 때문. 해당 고발은 아무런 후속 보도 없이 유야무야되었다.[19] 저것 이외의 사유로 정보기관에서 민간인을 수사해야 할 경우 국가정보원이 일한다.[20] #, 폐지되기 직전인 2004년에 이미 이적표현물에 대한 감정서 발급 업무를 중단했으며 치안정책연구소로 통합된 이후로는 순수 치안 관련 학술연구만 수행하는 기관이 되었다.[21] #, 사회과학 131번째 행.[22] 하나회 출신 기무사령관을 숙청 후 후임 사령관이 소장이어서 소장이 사령관이었다가 후임 사령관부터 다시 중장이 보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나회 문서를 참조.[23] 또 이 무렵부터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도 다시 부활했다. 실제로 2003년 참여정부 시작으로부터 거의 직후 노무현이 기무사로부터 독대 보고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 이는 2004~2008년 폐지되었다가 후술하듯 이명박 정부 시기에 다시 부활했다.[24] 위로는 대장 8명+해병대사령관(중장 1위)이 있다.[25] 헤즈볼라인지는 불명.[26]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지원 외에도, 미국에 대한 우호를 바탕으로 친한 행보를 보이는 국가다.[27] 모사드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모를 리가 없다.[28] 실제로 태극기 부대 중에서도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시위에 참여한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한국의 극우세력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이다.[29] 애초에 폭력시비 및 해결 과정 자체가 중국 정보기관에서 짜둔 시나리오에 걸려든 것으로 보인다.[30] 물론 이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서 말로만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31]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여당 후보인 정동영을 지원하던, 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원하던 간에 선거에 개입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아래에 나오는 참여정부 시기의 대통령 통화 감청 건과 연관지어 본다면 기무사가 대놓고 국민이 선출한 정권을 무시하였으며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계획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지게 된다.[32] 게다가 이 당시 통화 내용은 군사적 안보 사항과 전혀 관련 없는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에 관한 내용이었다.[33] 해상 추모공원의 예시로 든 게 진주만 공습 당시 침몰한 전함인 애리조나가 침몰한 자리에 세운 USS 애리조나 기념관이였는데, 애리조나는 생존자를 건질 틈도 없이 폭격으로 침몰했지만 세월호는 충분히 생존자들을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의 미온적인 구조 활동으로 인해 생존자들이 사망한 것이라 절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34] 국방부 담당 기무부대다.[35] 사진속의 인물은 조현천 前 사령관이다.[36] 사진속의 인물은 이석구 前 사령관이다.[37] 조선시대까지는 외국이 중국 역대 왕조나 일본 등이 아니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다고 볼정도로 교류가 적어서 방첩업무가 필요하지 않았다.[38] 하지만 장용영은 기무사처럼 방첩부대가 아니라 조선 국왕을 경호하던 친위대라서 일대일 비교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