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 | |
일시 | |
1968년 1월 21일 새벽 | |
장소 |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
목적 | |
박정희 대통령 및 청와대 관계자 암살[1] | |
교전 세력 |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124부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제25보병사단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서울특별시 치안국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제1보병사단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제2보병사단 |
결과 | |
청와대 기습 및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실패 | |
영향 | |
향토예비군, 방위병 창설 고등학교 교련 과목 실시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설악개발단, UDU, 684부대 등의 보복부대 창설 유격 훈련 실시 5분 대기조 실시 휴전선 철책 설치[2] 천리행군 훈련 실시 이순신 장군 동상 설치 북악스카이웨이 준공 반공 웅변대회 탄생 육군3사관학교, 육군과 해군 2사관학교 창설[3] 공군기술고등학교 창설 전투경찰대 창설 인왕산과 북악산 또는 청와대 근처 통행금지[4] 대통령 경호 강화 및 보안 강화 군복무 기간 연장[5] | |
피해 | |
• 29명 사망[6] • 1명 도주 • 1명 생포 | • 군경 23명 전사 • 민간인 7명 사망 • 군경 및 민간인 52명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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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B6A3A3,#000> 생포된 김신조의 모습 |
사건 당시 김신조 기자회견 |
<colbgcolor=#B6A3A3,#000> 124 부대 복장 재현 |
대한뉴스 <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 보도 |
<대한뉴스 제 863호> |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10]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11]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이다.
총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12], 미확인 1명[13], 투항 1명(김신조 소위)[14]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 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 암살, 교도소 공격 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조선 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모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9일 뒤인 1월 30일에 베트남에서 일어난 테트 대공세와 같은 작전을 노린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 30여 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난 것이다. 침투·습격·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누어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고작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2. 발단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한, 미, 일 동맹체제가 구축되었고 북한은 고립되는 형국이었다.[16] 특히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가운데 파병된 한국군의 전투력에 고전하던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김일성에게도 파병을 요청했지만 앞서 언급한 상황 때문에 김일성은 거절했고 남한이 더 이상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못하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17] 그 약속에 따라 196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일성이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한국을 향한 강도 높은 안보도발을 시작했고 그 시작으로 청와대 침투 계획, 즉 1.21 사태를 주도했다.3. 대한민국의 사전대비
1968. 1. 13 대한뉴스 제 657호<비상치안 회의> |
대한민국 정부도 바보는 아니어서 북한의 침투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여러 정보루트를 통해서 북한의 침투 정황들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며 곧 북한이 남파간첩을 대규모로 남하시킬 것이라고 1967년 10월부터 청와대에 정식으로 수차례 보고[18]했다. 그리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무장공비가 침투하기 불과 2주 전인 1968년 1월 6일 강원도 원주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전군경지휘관 200여명이 참여하는 대간첩 작전회의인 비상치안 회의를 개최했는데 목적은 남파간첩 시도를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상치안회의의 결과 전 군경에 대간첩작전을 위한 비상경계태세를 내려서 출동명령이 내려오면 즉시 대간첩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19]를 유지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월 13일 대한뉴스 방송으로 대규모 남파간첩 침투의 징조가 있으며 이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음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알리고 적대 집단인 북한에도 공개적으로 천명한 상태[20]였다. 바로 그날 실제로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4. 김신조 루트
<colbgcolor=#B6A3A3,#000> 김신조 루트 |
전체 진격로
<colbgcolor=#B6A3A3,#000> 김신조 루트 |
약식 진격로
1월 13일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했다. 당시 1월 21일은 일요일로서 6.25 전쟁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주기 위해 날짜를 계산하고 투입한 것이다. 겨울에 투입한 이유도 국군과 주한미군이 겨울에는 훈련도 잘 안 하고 추위로 인해 근무도 대충 선다는 이유에 날짜를 겨울로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
- 17일
- 18일
- 00:00 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
- 02:00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 임진강 북쪽에서 1숙영지를 편성.
- 21:00 1숙영지 출발
- 22:00 임진강 빙판위를 걸어서 도섭[22]
- 19일
- 05:00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삼봉산(파평산 부근) 능선에 2숙영지 편성
- 14:00 즈음 124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고[23] 이에 북에 무전을 쳐서 어떻게 할지를 물어봤으나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해[24] 다음의 이유를 들며 투표를 통해 살려 주기로 결정했다.
-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25]는 이유
- 형제들이 나무꾼이었기에 죄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보였기에 동정심을 느꼈다[26]는 이유
- 우씨 형제 중 한 명이 거짓으로 김신조 일당을 인민해방을 위해 북에서 내려온 전사들이라며 환영하는 척했는데 이에 넘어갔다는 이유[27]
- 어차피 작전은 금방 끝난다는 이유
- 20일
- 02:00 국군 25사단 파평산 포위[30], 공비들은 국군의 대응을 예상하고 속도를 높임
- 09:00 진관사를 우회하여[31] 앵무봉을 통과해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탐. 비봉 북방 도착, 3숙영지 편성
- 21:00 3숙영지 출발
- 21일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살려주기로 하되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에서 큰 포상을 받게 해 주겠다"며 행로를 북으로 알려주고 풀어주었다.[28]
집에 온 나무꾼 형제들은 가족들의 왜이리 늦었냐는 말에 너구리를 쫓다가 늦었다고 둘러댔지만 저녁식사를 하며 덜덜 떠니 이상함을 느낀 가족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바로 이실직고를 하고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공비들을 신고하였고 파출소에서 경찰서를 거쳐 미군과 국군에 통보되어 즉각적인 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국군은 유류품과 비트 잔여물을 확인함으로서 발언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하여 공비들의 행로를 추적해 이들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미군 경계지역에 대한 작전권까지 이양받아 신속하게 북한산과 서울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했다. 또 철도, 군 인사에 대한 암살 등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서울시 외곽과 경복궁 등 요충지에 병력들을 긴급히 배정&증파하고 있었다. 즉 당시 대한민국의 대응은 결코 늑장대응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동속도가 국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빨라 공비들은 차단선을 빠져나왔다. 산악 지형에서 무려 시간당 10km의 속도로 질주했던 것.[29]
이들은 낮에는 쉬고 밤에 이동하는 등 산으로 침투하면서 이목 자체를 최대한 피하다가 침투용이었던 26사단 마크가 달린 국군 군복을 입고서도 마주친 나무꾼 4형제에게는 방첩대나 국군이라고 속이지 않고 오히려 연이은 침투성공에 기고만장하여 자신들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선봉대라고 알려주었다. 이후 21일 시내 돌입 전 사복으로 환복하고 코트 아래 기관단총 등의 장비를 갖추어 19:00 경에 서울 시내에 진입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군, 경 검문시 방첩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시간이 21일 19:00 경 부터인데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목적이 대통령 암살인 것은 예측하지 못했기에 청와대 자체 경계는 오히려 소홀한 편이었다.[33] 그러다가 제2방어선이었던 경찰이 공비 침투에 대비하여 서울 시내를 순찰/검문하고 있다가 천만다행으로 탐지한 것이다. 공비에 대비하여 순찰하다가 복귀하던 서대문경찰서 이각현 서장이 직접[34] 21:55 경에 2열종대로 둘 셋씩 붙어가던 이들을 발견하였다.[35] 이 서장은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즉시 시 경찰망에 무장공비 의심 전파하면서 관계기관에 훈련이 있는지 확인, 헌병 3명 포함 병력 14명을 소집하여 짚차 2대, 트럭 1대에 태워서 차량 추적을 명령하고 30사단 작전참모에 동원병력을 소집할 것을 요구하여 이에 따라 22:00부로 해당 구역에 병력 배치가 시작되었다. 무장공비들이 이 추적을 따돌리고 마주친 최초의 검문소가 바로 후술할 두 형사가 있었던 곳이다. 22:05분에 본인들은 CIC 소속으로 훈련 복귀 중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나 형사들은 뭔가 수상하다고 낌새를 눈치채고 시간을 끌다가 코트 속 총기를 식별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침투 과정에서 CIC라면서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5. 자하문 초소 전투
<colbgcolor=#B6A3A3,#000> 자하문 초소 전투 당시 사망한 최규식의 동상 |
9시 50분, 124 부대원 31명은 청와대에서 불과 300m 남은 지점인 자하문 초소에서 이곳을 지키던 종로경찰서 소속 정종수 순경과 박태안 순경에게 첫 검문을 받게 되었다. 부대원들은 "우리는 CIC (당시 육군 방첩부대)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고 다그쳤지만 형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36] 시간이 지체됐고 그 사이 무전으로 연락을 받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출동했다.[37] 이때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이를 군의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하여 벌인 일이라는데 사실은 민간인들이 타고 있던 원효여객 소속 1813번 시내버스였다. 시간도 야간이라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도 않으니 패닉에 빠져 무작정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장공비 중 김춘식 소위는 위의 형사들이 계속 말을 걸어대는 통에 혼자 대열과 떨어져 있다가 총성이 울리는 순간 형사들에게 짱돌을 맞고 제압되어 곧바로 생포되었는데 치안국으로 압송되어 무장해제를 받던 도중 실수로 수류탄 핀이 뽑히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 폭사했다. 결국 사살로 치게 된다. 실수가 아니라 자폭이라는 설도 있으며 그나마 이때 직접 무장해제를 시키던 채원식 치안국장이 공비를 복도 쪽으로 밀어서 아군 측은 다행히도 부상자 없이 전원 생존했다.
인왕산과 비봉산, 의정부시 등지로 도주한 공비들은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대부분 죽었다. 최종적으로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다. 대한민국 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39]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 과정에서 공비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 건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40]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등학교)의 수위[41] 등 일반인, 심지어 참관 및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까지 사망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의도가 있었든 아니었든 무고한 민간인들도 희생당했다.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6. 진행
사건 직후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 통금령이 떨어졌고, 이는 1월 23일까지 이어졌다.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바위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했다.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니 결국 무장공비 1명이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도 있었지만 수류탄을 그냥 떨어뜨리고 손 들고 나왔다.[42] 그가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때문에 국방부 공식기록은 '생포'였고 세월이 흐른 후 책이나 언론에서는 '투항'이나 '자수'라는 용어도 쓰인다. 정황상 어느 쪽이나 맞는 말인 듯. 김신조는 아예 독립가옥에서 전투가 없었고 자신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들고 있었으니 자수라고 한다.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마자 '무기는 어디에 숨겨뒀냐?'고 물었다. 특공대원 25명은 김신조에게 직접 안내받아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 시의 일부 장비를 회수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016년 6월 28일 출판된 당시 방첩부대 특공대장이었던 이진삼 대위[43]의 '별처럼 또 별처럼' 참조.
당시는 공비들이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때의 무장 공비 사건으로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 후 자신과 함께 산악지대를 누볐던 남한 특공대원들이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자신과 실력이 똑같았다고 한다. 김신조가 산에서 죽어라 뛰었는데도 특공대원들이 옆에 딱 달라붙어 뛰었다고 한다.[44] 게다가 대한민국 국군과 교전이 시작되니 모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부대가 완전히 와해되고, 끝내 전멸의 길을 걸은 점도 이들이 민간인에게 발각되거나 남한 군경과의 교전 가능성을 인지하거나 이에 대비한 훈련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련한 침투 전문가가 작전을 세웠다면 이런 돌발 급변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에 대처하는 준비나 훈련을 시켰을 텐데, 북한의 124부대에는 이런 치밀한 작전 수립체계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7. 결말
-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 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됐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상태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성은 당시 국방부장관이 장관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 한국의 경우 한동안 추가 파병보다 내부 단속에 들어갔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 구정 공세에 이어 원산에서 일어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해 가뜩이나 국내에 번지던 반전 여론이 더 거세지는 역풍을 맞았고 하필 그해 대통령 선거까지 걸려 난감해진 미국이 해결과정 중에 전투부대를 증파할 것을 한국 정부에게 요청했지만 북한에게서 1.21 사태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어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의 해결 때문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한미외교 역사상 최초의 통미봉남을 당해 뒤통수를 세게 두드려맞고 한미관계가 급경색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선갑도 부대, 장봉도 부대, 실미도 부대, 마니산 까치부대를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 북한의 경우 최종 작전까지는 못 했지만 한국과 미국을 깜짝 놀래키며 존재감을 인식시키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이어졌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후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들은 1.21 사태만큼 파급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패의 책임을 내부의 정적들에게 덮어씌워 제거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이용했고 박정희 역시 한미관계의 급속한 냉각을 기회삼아 자기 권력을 다지는 차원에서 반공주의를 강력하게 강화하여 하술할 여파 문단의 내용처럼 대한민국을 사실상 병영화하는 수준의 강력한 통국민통제정책을 실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의 정치적인 입장에서 라이벌들보다 유리한 쪽으로 전개해 나감으로써 독재 체재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 있고 7.4 남북 공동 성명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 북베트남은 1.21 사태와 연이어 벌어진 푸에블로호 사건에 격노하였다. 북베트남은 구정 공세를 터트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미국의 반전여론을 높인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 북한의 모험주의로 인하여 베트남에 올 스포트라이트가 한반도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 이 사건으로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길은 41년의 세월이 지난 2010년 2월 27일에야 민간에 개방되었다. 2020년 상반기 북악산 성곽로에서 북악스카이웨이 북측면을 추가로 개방했다. 현재 서울 북악산에 있는 김신조 루트가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어 북악하늘길의 제2산책로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45] 또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둘레길의 한 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완전 개방은 아니다. 이곳을 가려면 인터넷이나 전화[46]를 통해 탐방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약해 놓고 본인확인이 안 돼서 입장이 거절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하루 입장 가능 인원도 송추 방향에서 5백 명, 우이동에서 5백 명으로 하루 1천 명의 인원 제한을 두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고 오후 4시까지 하산하여야 한다. 예약을 했는데 입장하지 않을 경우 추후 예약이 제한될 수 있다. 현재도 이 코스는 군부대 훈련장이 있고,행군코스로 사용되고 있어 군부대 훈련 일정이 있는 날엔 예약이 불가능할 수 있다. 평상시에도 우이령길을 이용하면 몇몇 군인들이 이동하거나 훈련장 시설물 등을 정비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관련 사이트. 이곳에서 예약도 가능하다.
- 자하문 초소 전투에서 전사한 최규식 총경은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창의문 남쪽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있다. 그런데 정작 최규식 경무관이 순직한 곳은 그 곳이 아니다. 또 총격이 벌어졌던 주변 지역에는 당시 총격전 중에 15개의 탄을 맞아 지금까지도 그 당시 흔적을 남긴 나무, 일명 '총알소나무'가 남아 있으며 1박 2일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47]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 그 탄흔에 손가락을 넣자 수지로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 부상 경찰관 중 정종수 경사는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창의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왼편에 순직비가 있다. 당시 소속이었던 서울종로경찰서 현관에는 흉상이 건립되었다.
- 처음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쪽이 육군 방첩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신조에 대한 공작을 철저히 해서 그가 북한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자회견을 하도록 교육 및 연출하여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급하게 기자회견에 내보내는 바람에 위에 나온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전 국민이 기절초풍했다. 사건 직후 육군 방첩대장 윤필용 준장은 20사단장으로 좌천되었고 후임 육군 방첩대장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육군 방첩대의 위세가 꺾이고 중앙정보부가 득세하게 되었다. 육군 방첩대는 몇 달 후 육군보안사령부로 전면 개편되었다.
- 이 사건을 진압한 부대 중 하나가 당시 서울지역 향토예비보병사단이었던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이 일로 제1땅굴을 발견한 제25보병사단과 함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동원된 장갑차의 사격으로 동료들이 사살당하면서 공비들이 패닉에 빠져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48]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무수한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공비들의 모습과 위치를 환히 비춰 준 것도 진압에 도움이 되었다. 전두환은 1967년에 30대대장에 임명된 상태였는데, 공비가 나타날 때에 대비하여 청와대 뒷산에 박격포를 조준해놓고 조명탄을 쏘아올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히 청와대에 박격포를 겨누자는 그의 주장에 수경사 윗선에선 불충한 발상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미 박정희, 박종규의 총애를 받고 있던 그는 이를 강하게 밀어붙혀 관철시켰고 불과 몇달 후에 김신조 일당이 나타났을 때 큰공을 세우게 됐다. 육영수가 직접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치하해주었으며, 박정희도 직접 30대대를 불시에 방문하여 특별비로 30대대 생활관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주고 새로 목욕탕까지 지어주었다. 1.21 사태 당일에 전두환은 부하들을 위문하기 위한 회식을 열고 있던 참이었다고 한다.
- 4년 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본심은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청와대 습격은 우리 공화국 내부의 김창봉, 허봉학 같은 극렬 분자들이 임의로 일으킨 사건이오.[49] 우리가 박정희를 죽인다고 남조선이 없어지겠소? 나를 죽인다고 우리 공화국이 없어지겠소?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란 말이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뒤 관련자들을 모두 철직(해임)시켰소. 남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박정희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었다고 꼭 전해주시오." 라고 말했다.
- 당시 이 사건을 계획한 북측 인물로는 김창봉, 허봉학, 김정태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남사업으로 업적을 쌓아 김일성에게 신임을 얻은 뒤 김일성의 동생이자 권력 서열 2인자인 당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끌어내리고 군과 당권을 장악하여 김일성의 뒤를 이으려는 욕심으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내막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 이후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군부의 힘이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북한이 청와대의 세부 구조를 알았던 것은 남한 내의 간첩의 도움이었다고 술회했다. 정확하게는 청와대 근무 직원의 부인이 간첩이었는데 그녀가 음부에 청와대 배치도를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심문 도중 어디선가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수색해 보니 종이가 음부에 들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것을 자신이 손수 적발하긴 했는데 윗선들이 뭐라고 해서 풀어주었고 그래서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 구조를 알 수 있었다는 건데 이 사람의 회고록의 신빙성은 말이 많으므로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자.
- 당시 침투조가 사용했던 장비들(PPS-43 기관단총, TT-33 권총, F-1 세열수류탄, RPG-43 대전차 수류탄, 절단기, 단검 등)은 용산 전쟁기념관과 경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인왕산에 숨었을 때 이들은 등산이라는 걸 몰랐는지, 등산객들이 올라와 "야호!" 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우리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판단하면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김신조는 이때부터 탈출각을 세웠다고 한다.
- 사살된 무장공비들의 유해는 반환되지 않고 파주 적군묘지에 묻혀 있다.[50] 이 중 8명은 무명용사로 남아있다. 김신조가 시체를 확인하고 신원을 증언하긴 했으나, 아무리 동료라도 머리가 으스러지거나 M2 화염방사기에 구워진 꼴을 당한 경우 알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식별이 쉬웠던 시신이 총조장 김종웅 상위로, 부대원들 중 가장 키가 컸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8.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
위의 결말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이야기는 나왔지만 그 밖에 이 사건이 후세에 크게 남긴 영향이 몇가지 있다.- 예비군과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3사관학교가 이 사건 때문에 창설되었다. 향토예비군은 고작 3개월여 만인 4월 1일, 육군3사관학교는 9개월여 만인 10월 15일에 창설됐다. 그리고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매년 실시하고 있다. 유격 훈련이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다고 한다
- 병사 복무기간이 연장되었으며 기존 병사들의 전역일도 미뤄졌다. 당시 복무기간이 단축되고 있었는데 이 일로 현역병들은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3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39개월)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었다. 당시 제대할 날짜만 세고 있던 말년병장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병장들은 일반하사로 진급해 6개월을 더 복무했다. 복무기간뿐 아니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 강도가 세졌고 군기가 대대적으로 확립되었다.[53] 이때 늘어난 복무 기간은 십수년이 흐른 뒤인 1977년(육군), 1979년(해/공군)이 되어서야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었다(육군 33개월, 해/공군 35개월). 다만 이외에도 복무기간 연장과 예비군, 방위병 제도는 주한 미 7사단 철수와 베트남 파병의 영향을 받았다. 비슷하게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 민방위대가 창설되었다.
- 경찰 차원에서 유사시 대간첩작전 등에 동원할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청이 전투경찰순경을 창설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전투경찰이라는 조직은 존재했다. 6.25 전쟁 당시 활동한 전투경찰도 있었고, 1962년 서울경찰국에 1개 기동중대가 창설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현역 입영자원을 빌려쓰는 전환복무가 아니라 경찰관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당시 평균 연령 30세였고 전투현장에 투입이 안 된 것이 아니라 경험 부족으로 인해 고전을 겪었음이 경찰 내부 교육용 자료에서 언급된다. 이 제도가 정착되어 대한민국 육군과 대한민국 해군(→해양경찰청 의무경찰)의 입영자원으로 구성된 전환복무 제도가 속속 나왔는데, 현실은 하루하루 시위 진압하는 부대였다.[54] 물론 그 빈도가 없다시피 했을 뿐 의경으로 구성된 기동대와 달리 내륙전경대와 112타격대의 임무 중엔 대간첩작전이 엄연히 있었으며, 해안경계부대 역시 전경으로 구성되었다. 이 사건을 의식해서 그런지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우이령길 서울 측 입구엔 서울경찰청 802의경대가 설치되었다.
- 경계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두 개 부대의 담당 구역이 맞닿는 부분을 노렸다. 이런 부분은 서로에게 떠넘기는 심리에서 허술할 것이라 판단하고 침투 지점으로 선택한 것으로 실제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는 담당 구역이 서로 겹치도록 하여 개선했다.[55]
- 침투 당시 휴전선의 철책을 통과할 때 지지대 기둥이 세워진 뒤쪽은 철조망이 잘려 있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 그 부분을 잘라내고 망을 걷어 올리고 들어온 뒤 다시 내려놓는 식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경계 시 철책을 일일이 흔들어서 확인하고 지지대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절차가 생겨났다.
- 방첩대는 그해 9월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했다.
-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4개 부대가 바로 선갑도 부대(육군), 장봉도 부대(해군), 684부대(공군), 마니산 까치부대(해병대). 실미도 초반부에 나오는 북한 공비들과의 교전이 이 1.21 사태다.
-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 전 집필한 <혁명전쟁과 대남전략>이 사건 발생 후 이북의 대남전략을 연구하는 육사, 군, 경찰, 중앙정보부 교육기관의 교재로 채택되어 유명세를 탔다. 이후 율곡사업의 실무진[56]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 이 사건 때문에 북대문(숙정문)이 2006년 4월 민간에 개방될 때까지 38년간 폐쇄되었다.
- 우이령 도로가 폐쇄되어 군용 작전차량을 제외한 차량들은 구파발을 경유하여 빙 돌아가야 한다. 현재는 부분 개방되었지만 환경 단체의 반발로 인해 차량 통행은 할 수 없다.
- 1970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 사태로 인해 북한의 테러 위협에 대비한 보안 경비비용으로 막중한 금액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 결국 개최권을 반납하였다. 그리고 태국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이 연속 2회 개최되는 유례없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당시는 국내 발전에 필요한 재정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으며 특히 아파트, 지하철, 고가도로 등이 활발하게 건설, 계획되었고 여기에 개최 비용과 북한의 군사도발도 많이 일어나는 편이었기에 재정 부담 등으로 개최가 어렵게 됐다. 이 사태는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큰 행사를 앞둘 때마다 북한은 테러 등을 자행했다.[58]
- 당시 (주)미원에서 추석 선물세트를 출시할 때 세계 각국의 우표로 포장을 꾸몄는데 그 중 11개의 공산국가 우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덕택에 추석 선물세트를 회수해야 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 광화문광장 앞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충무공을 존경했으며 호국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방책으로 세우기로 결정, 3개월여 만인 1968년 4월 28일 건립되어 현재까지 광화문을 지키고 있다.
- 서울특별시청이 뜬금없이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당시 화양면 범곡동) 청도군청 북쪽에 문서고를 두었던 것도 이 사건의 여파다. 1971년에 청도문서고를 만들었으며, 2019년 5월 15일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 개원한 서울기록원으로 문서들을 모두 이전할 때까지 이용했다. 자연히 서울특별시청 산하 기관들 중에서는 시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 북한에서도 려행증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탈북기자 김길선의 증언에 따르면 1.21 사태 이후 북한이 제 발이 서렸는지 김일성 제거를 위해 북파된 공작원, 첩보원 등을 색출하기 위한 명목으로 1968년 말 평양시, 그 다음 군사분계선 지역에 려행증 제도를 적용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 북한 전 지역으로 확대한 것이라 한다.# 이후 북한 주민들은 평양 시민을 제외하면 본인이 사는 도[59] 밖의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고 려행증을 발급받아야만 갈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9. 생존자
추정 인원이나 생사 불명 인원에 대해서는 말이 상당히 많았다. 80년대 자료에는 생사불명 1인은 북한에 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실은 32명이었는데 하나는 살고 하나는 북에 올라가서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 중에는 3명이 살아서 도주했는데 박재경 외의 2명은 숙청되었다는 자료도 있다.관련기사200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신조 목사는 2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그 중 한 명은 이후 2000년에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 땅을 밟은 박재경 대장이라고 주장했다.[60] 당시 김씨를 직접 조사했던 백동림 전 보안사 수사과장(당시 방첩부대 수사계장·대위)은 3인의 시체를 끝내 찾지 못했으며, 후에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한 군인의 이름과 그를 영웅시하는 내용을 북한 방송에서 확인했고 여러 정황상 한 사람만 살아서 갔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3인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2명이 도주했다는 증언과도 일치한다.
<colbgcolor=#B6A3A3,#000> 김신조 사건 이후[61] |
2000년 9월 11일 서울신라호텔 에메랄드 룸에서 열린 칠보산 송이버섯 선물 전달 행사. 가장 좌측은 임동원 대통령 특보, 우측 끝은 박재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박재경 대장은 당시 송이버섯을 전달하러 방문한 김용순 특사의 수행원이었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개성 CIQ에서 박재경(좌측) 인민무력부 부부장에게 송이버섯 선물을 받고 있다. 그런데, 2015년 7월 박재경이 현영철에 이어 다음 숙청 타겟이 된 것을 알고 해외로 망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인생무상이겠지만, 2022년, 2023년 북한 열병식에서 은퇴 장령으로 대접받는 모습이 북한 TV를 통해 보도되어 망명설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10. 기타
- 김신조의 자서전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동아출판사, 1994)에 의하면 침투 당시 수신했으나 암호담당자가 없어서 해독하지 못했던 암호를 훗날 중앙정보부에서 해독해 보니 내용이 원대 복귀였다고 한다.[62] 이는 TV조선의 방송과 2014년 11월 30일 자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도 소개되었다. 이후 채널 A의 '이제 만나라 갑니다'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나무꾼에게 발각된 후 향후 지침을 요청했고 이때 수신한 내용이 '원대복귀'였으나 수신한 난수방송을 해석할 수 없었고 이때 배신감을 느껴서 전향을 고려했다고 한다. 한편, 해석이 안 되었던 이유는 난수표를 잘못 가져와서였다.
- 마찬가지로 김신조의 자서전에 의하면 124부대는 청와대로 침투하기 전 마지막 훈련으로 청와대 공격 임무 전 청와대와 비슷하게 생긴 황해도 사리원의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건물을 타격하는 훈련을 했는데 1968년 1월 9일 18시 40분에 청와대 모의 타격 작전을 시작하여 타격 완료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15분 이내, 5개 조가 6명씩 각각 정문과 1층, 2층, 부속건물, 차량 및 엄호를 맡기로 계획, 침투 중 사회안전원에게 들켜서 제지당하자 격투기로 급소를 타격해 쓰러뜨리고 노농적위대 7~8명이 58식 보총을 겨누면서 소속을 밝히라고 하자 "민족보위성의 정찰병이다!" 라고 해도 믿지 않자 바로 사살해버렸다,[63] 그리고 김신조가 속한 2조는 인민위원회 건물 1층으로 돌입해 방마다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인민위원회를 경계하던 노농적위대원들도 필사적으로 응사했지만 김신조와 대원들에게 사살당했다.[64] 그리고 김신조 부대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트럭을 탈취해 인민위원회 건물 정문을 통과해 사리원에서 퇴출하였다.
- 김만철 일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귀화를 고민할 때 김신조는 김만철 일가의 귀순을 설득하기 위해서 직접 대만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김신조는 김만철과 동향인 청진 출신에 동네까지 같았다고 하며 김만철을 보자 "만철이 형 아니오! 나 신조요. 정미소 집 아들."이라고 반가워했다고 한다. 당시 대표단에는 귀순용사 이웅평 대위와 같이 동행했다고 하는데 김신조는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을 보여주고 이웅평은 자동차키 여러 개를 보여주면서 "나는 부모형제를 두고 홀로 내려와 이렇게 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는데, 댁들은 부모형제를 다 모시고 계시면서 왜 자유로운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저도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까 꼭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세요." 라면서 무려 5시간이나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김만철은 5시간이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귀가 솔깃했고 듣다가 질린 김만철의 처남이 "죽을 거면 서울로 가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 당시 무장공비들은 진지하게 자신들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월남했고 남조선 인민들이 적화통일을 바란다고 진심으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침투 중 마주친 나무꾼 형제들을 살려줬던 부분도 나무꾼 형제들이 무산계급이기에 자신들을 신고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컸다. 북에서 아무런 제지 없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고. 소탕 작전 중 총상을 입은 한 무장공비는 민가에 숨어들어 "이북에서 왔는데 총에 맞아 다쳤으니 사흘만 먹여주고 재워달라."고 하자 집주인 노인이 밥을 챙겨주고 방을 내어주는 등 안심시키는 사이 아들이 군경에게 신고했다고 한다. 노인이 밥도 챙겨 주고 잠자리도 내 주자 감동한 무장공비는 '내가 통일이 되면 당에 잘 말해서 꼭 보상을 해드리도록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공비는 잠을 자던 중에 신고를 받은 국군이 들이닥치자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 공비들은 전원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에 있는 '도발사령부' 소속인데 도발사령부에서는 여기 투입할 공비를 육성하기 위해 124부대를 창설하고 이재형 대좌가 124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 공비들 대부분은 원래 부사관으로 하사~중사였는데 이 작전에 투입되는 조건으로 전부 소위로 특진해서 공비 전원이 장교였다. 단 중위 이상은 원래부터 장교였던 인원이다. 또 공비 전원이 함경도 출신이다.
- 어떤 공비는 남방한계선 바로 코앞까지 가서 사살당했는데 시신을 확인해 보니 손과 발이 전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고 무기조차 없었다고 한다.
- 총조장이었던 김종웅 상위는 첫 교전이 붙자마자 '국방군 출동이다! 청와대 앞으로 돌격하라'라고 외쳤지만 공비들은 삽시간에 아연실색하여 각자 도주하여, 김종웅도 어쩔 수 없이 도주하였다. 무려 나흘동안 도주하다가 1월 26일 0시 25분경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애기수바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월남전 영웅인 천 하사의 부대에 발각되었다. 김종웅은 당시 홀로 도주하고 있었는데, 천 하사의 저격에 가슴에 2방을 맞고 쓰러지고, 오른팔 하나가 수류탄에 날아가는 상당한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상위는 남은 한팔로 수류탄을 까들고 홀로 적진부대에 돌격하다가 다시 천 하사 부대원들의 무차별적인 사격에 최후를 맞았다. 당시 새벽이라 어두운 탓에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 천 하사의 부대가 시체를 수색하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김종웅 상위의 시신은 총탄을 가슴에 세 발, 머리에 두 발을 맞고 한 팔은 수류탄 폭탄으로 날아간데다 몸 자체가 벌집이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죽어서도 남은 한팔로 수류탄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그 모습에 천 하사 부대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출처: 회고록)
- 당시 무장공비가 31명이 아니라 33명이었고 2명은 남한에 의해 간첩으로 포섭되어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고 상좌(대령)급 탈북자 홍은택(가명)이 증언했다. 북으로 돌아간 사람은 우명훈과 8대대 대대장인 임태영인데 인민군 영웅이 되었지만 1998년 간첩 혐의로 사형되었다고 한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주장이며 애초에 일원이었던 김신조의 말과도 틀린 부분이 많다.#
- 이 사건에 관해 행정법학계에서 행정개입청구권과 관련한 중요한 판례가 생기는 이용선 피살 사건이 발생했는데 민간인 희생자 중 하나로 당시 체신부 공무원 이용선 씨는 자신의 집에 들어온 이들을 혼자 대적하였고 그동안 가족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파출소로 가서 출동을 요청했으나 소장이라는 작자가 군경이 출동하고 안 하고는 자신들 재량에 달려 있다며 개입을 거부하다가 무려 15분이나 지난 뒤에야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씨는 용감하게 격투를 벌이다가 결국 살해당했고 늑장대응한 파출소장은 며칠 뒤 파면당했다. 가족들은 당연히 국가손해배상 재판을 걸었는데 많은 이들이 군경의 늦장대응에 의문을 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이용선 씨의 유족들이 재판에서 승리했다. 당시 판결에 따라 '아무리 경찰이 출동하고 마는 일이 재량에 달려 있을지라도, 위급·긴급한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재량이 0으로 수축되면 즉시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이 확정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 판결문 일부를 발췌하자면 이렇다.무장공비 색출체포를 위한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출소 소장, 순경 및 육군 장교 수명 등이 파출소에서 합동대기하고 있던 중 그로부터 불과 60-70미터 거리에서 약 15분간에 걸쳐 주민들이 무장간첩과 격투하던 주민 중 1인이 무장간첩의 발사 권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면 위 군경공무원들의 직무유기행위와 위 사망인의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대판 1971. 4. 6, 71 다124)
- 칠궁은 본래 청와대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김신조 사건 이후 보안상의 이유로 통제되었고 옆에 도로를 만들면서 사당도 다소 축소되었다. 2022년에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여 칠궁이 청와대와 같이 개방되었다.
- 영화 실미도 오프닝에서 잠시 묘사된다.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 도중 한국군과 교전하고 김신조가 쫓기는 장면과 강인찬(설경구)이 다른 조폭 보스를 살해하고 경찰에게 쫓기는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이 장면에서 김신조를 연기한 사람은 연극배우 신덕호다.
- 이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전체가 6.25 전쟁 휴전 후 재건기의 막바지였던지라 당시 서울시의 미개발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동작구 일대에는 부동산 붐이 일었고 (당시 기준으로) 200만원짜리 건물이 500만원 선에서 팔리는 경우까지 있었으나 이 사건 이후 동작구 일대를 포함한 서울시의 상당수 지역에서 부동산 거래가 금지되었고 2~3여년 뒤 금지 조치가 풀렸을 때는 이미 붐이 끝나 거품이 상당히 걷혀서 관악산 일대의 험준함이라는 단점이 크게 부각되어 버려 노량진 2동 일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전부 폭락해버렸다고 한다.[67]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처분도 힘든 거, 그냥 여기서 정착하자!'면서 동작구 여기저기에 눌러앉은 후 지금까지 해당 지역에서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꽤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어르신들 가운데 김신조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다.
- 노원구의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전시한 자료 중에는 이 당시 상황에 얼떨결에 휘말린 신혼부부의 이야기가 있다. 이 신혼부부는 결혼식을 올린 뒤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신혼여행을 했는데 한강다리를 건널 때 한 무리의 헌병들이 차를 세우고 검문했다. 군인들은 택시에 장식된 꽃과 뒤에 매달린 깡통을 보고 신혼부부가 탄 차임을 깨닫고 손을 흔들며 통과시켰다. 이 신혼부부는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했다가 나중에 이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 원래는 청와대를 비롯한 국방부, 미 대사관 등을 목표로 하였으나 계획이 축소되었다.[2] 6.25 전쟁 이후 1965년에 설치된 미군 지역만 철책선이지만 다른 지역은 나무로 되었던 경계선이었다. 김신조 사건 이후 군사분계선 전체에 철책이 설치되었다.[3] 육군과 해군에서 2사관학교도 창설되었으나 육군은 3사관학교에 통합, 해군은 폐지하였다.[4] 인왕산은 1993년, 북악산은 2006년, 우이령은 2009년, 청와대는 2022년에 민간인에게 개방되었다.[5] 새로운 입대자부터 서서히 늘린 게 아니라 소급적용하여 의무복무중인 모든 장병의 복무기간이 일괄적으로 연장되었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였기에 가능했지 오늘날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평이 많다. 또한 이후로 군복무 기간이 줄어들고 있으니 현재까지 군복무 기간이 연장된 유일한 상황이 되었다.[6] 31명 중 29명 사망(조장 김종웅 포함)[7] 기자회견 당시의 모습이 체포 당시의 얼굴과 약간 다르다. 지금은 종영된 예능인 MBN의 황금알에 출연하여 한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생포당해서 가뜩이나 분노했는데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 채 수갑 채우고 의자에 앉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8] 1.21 사태의 관련 기록들 중 대다수가 이 복장을 "국군 복장", "국방색 국군 군복" 등으로 칭하는 이유는 1950년대~1960년대 한국군 군복 중에 저 복장과 같은 카키색 군복이 실존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군사지식에 관심이 없는 많은 일반인들은 올리브색뿐만 아니라 카키색도 그냥 국방색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생각해 보면 왜 저 군복이 "국방색" 군복이라고 불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9] 나중에 채널 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김신조가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해당 무장은 전원이 소지하지 않았으며 이 방망이를 소지한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한다. 즉, 맨 선두에 선 2명의 공비가 갖고 보초 병력을 때려눕히기 위해 손목의 고리에 미리부터 휴대하고 있었다.[10]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성[11]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즈음에 있던 고개. 현재의 자하문 고개로 사건을 언급한 비석과 사망자의 동상이 있다.[12] 김춘식이라는 공비 1명도 생포되었으나 치안국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 도중 수류탄 핀이 뽑혀 폭발하여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측 피해는 없었고 사살로 포함한다.[13] 박재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하고 나서 북한으로 도망쳤다. 이후 인민무력부 부부장을 역임하다가 은퇴 후 명예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4] 대한민국 국군에 투항해 협조했다. 총을 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져 풀려났고 김재현으로 개명했다. 서울성락교회 목사로 일하다가 목회직에서 은퇴했다.[15] 실제로 동년 10월에 후방에 유격전 근거지(해방구)를 만든답시고 울진, 삼척 지역에 100여 명 규모의 대규모 게릴라를 침투시켰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서 참조.[16] 당시 흐루쇼프의 소련이 서방과 화해를 모색하는 평화공존론을 주장하자 중국과 북한이 소련을 비판하고 이후 중국과 소련은 1962년 중소결렬로 인해 서로 틀어진 데다 얼마 뒤 중국은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북한 체제를 비판했고 이에 따라 북한도 중국에게 반발을 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쪽 사회주의 삼국의 동맹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상황이었다.[17] 후일 기밀문서를 통해 북한이 직접 파병은 하지 않았지만 공군 조종사들을 비밀리에 보내 베트남 군복을 입혀 작전에 내보냈다는 것이 드러났다.[18] 1967년 말에 한국에 침투한 3인조 간첩의 남한 주민증 습득임무, 남한 침투목적 특수부대의 존재파악, 예상 침투 경로의 항공사진 자료를 수집해 보고했다.[19] 전군경에 대간첩작전 경계태세가 발령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공비들의 서울 침투가 확인되자 부대들이 즉시 빠르게 동원되어 공비들을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서대문, 종로경찰서장 같은 경찰고위관료들이 밤 늦은 시간까지 관할구역에 남아 직접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게 바로 이 경계령 덕분이었다. 이는 평시에는 불가능할 일이다.[20] 북한 입장에서 대한민국이 철저히 침투를 사전대비하고 있다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1월 17일 대한민국 영토로 침투한 무장공비 일당에게 마지막으로 전송한 암호메시지인 전원 원대복귀를 명령한 데에는 이러한 사전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원대복귀 명령을 수신하지 못한 무장공비들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21] 당시 남방한계선은 대부분 지역이 나무로 만든 삼발이 정도밖에 설치되어 있지 않는 등 방비가 허술했다. 남방한계선이 완전히 철책으로 둘러진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특히 미군과 한국군의 담당 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침투하여 더욱 손쉽게 돌파 가능했다고 한다.[22] 渡涉, 물을 건넘[23] 이만갑에 출연한 김신조는 이 때부터 어렴풋이 "아, 이건 실패다"라고 느꼈다고 한다.[24] 후술하지만 복귀하라는 명령으로 밝혀졌다. 북한 입장에서는 공비 한 명 키우는 데 오랜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에 침투 사실을 들킨 이상 차라리 복귀시키는 편이 합리적이었던 것. 하지만 이때부터 해석을 할 수 없어 복귀 명령임을 몰랐던 공비들은 아예 침투기간 내내 무선침묵을 해 버렸다. 이때 김신조는 "아 당국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암호를 풀지 못한 이유는 본인들에게 있었는데 난수방송을 통해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방송을 듣는 데는 성공했으나 해석하기 위한 난수표를 잘못된 것으로 들고왔으며 정작 가져와야 할 난수표는 놔 두고 왔기 때문이다.[25] 후일 김신조의 인터뷰에 의하면 작전 도중 만나는 민간인은 모두 죽이라고 지침을 받았는데 시체를 숨기기 위해 한겨울에 꽁꽁 언 땅을 파기 귀찮아서 혹은 이들의 행색을 보고 불쌍해서 땅 파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그냥 살려줬다고 한다. 동료들 중에는 죽이자는 사람도 있었는데 김신조는 말렸다고 한다. 훗날 모 종편방송 인터뷰에선 4형제 중 2명은 죽고 나머지 형제들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26] 공비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 아래에서 해방시키려고 대남공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27] 김신조 “北선 비겁자, 南선 공비 손가락질…‘꿋꿋이 살라’ 백선엽 격려 큰 힘”, 2020-08-21, 문화일보에 의하면 김신조 일당들은 자신들이 환영받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우씨 형제들을 죽일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28]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적에게 아군의 존재를 누설할 것이 뻔한 이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석방해야 하는가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한다는 전제 하에 매우 복잡한 딜레마가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영화 론 서바이버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오는 소재. 영화 론 서바이버의 배경이 된 실제 레드 윙스 작전에서는 4명의 네이비 씰 대원들이 자신들을 발견한 양치기 3명을 죽일지, 살릴지 의견이 서로 갈렸는데 결국 지휘관인 마이클 머피 대위가 풀어주라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풀려난 양치기 소년이 탈레반에 누설하는 바람에 네이비씰 대원 중 3명이 사망했고 그들을 구원하러 온 치누크 헬기도 격추되어 탑승자 20명이 몽땅 사망했다는 처참한 결말. 당시의 유일한 생존자가 론 서바이버의 저자 마커스 러트렐이다.[29]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2회에 나오는 정보에 따르면 이 속도를 무려 30kg 완전군장을 하고 맨발로 주파했다고 한다. 이미 남파 전에 최종 인원을 정하고 산악지대에서 맨발로 완전군장을 한 상태로 신속하게 목표 지점까지 주파하는 반복 훈련을 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완전군장 후 산악행군 속도는 평균 시속 4km로 김성은 당시 국방부 장관은 "파주시에서 북한산비봉까지 행군을 한다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완전군장한 채로 그렇게 빠른 속도로 행군한다는 것은 내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 발언했다고 한다.[30] 공비 출발 시간과 5시간 정도 차이난다. 다만 국군의 대응은 상기 서술과 같이 당연히 이게 전부는 아니다. 해당 지역 담당 사단인 25사단의 즉각적 대응을 기준으로 공비 위치와의 간격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한 것뿐이며 실제로는 지역 위아래로 전부 차단선이 펼쳐지는 것은 물론 국가 단위로 긴급대응 중이었다.[31] 이들은 나무꾼들을 풀어 주고 난 후 북한산 계곡을 따라 이동하던 도중, 북한에서 받은 지도에는 없던 이 절이 나타나 당혹스러워했다 한다. 진관사는 6.25 때 파괴된 절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부터 마침 재건 중이었다. 북한에서는 이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으니 6.25 당시를 기준으로 지도를 만들었을 테고, 이로 인해 그들의 지도에는 누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던 데다가 절의 개까지 짖어대 위치가 노출될까 봐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김신조, 진관사 앞에서 멘붕, 2020-11-14, 중앙선데이[32] 예정에 없던 숙영이다. 길이 험해서 많이 못 간 것.[33] 국군에게는 심리적 기습에 가까웠는데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무려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것은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회고록과 보고서에도 일관되게 '청와대 경비를 놓쳤고 그때 공비들이 습격했다면 그대로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다는 점에서 국군에게 다대한 충격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34] 서장이 순찰을 돌고 있다가 직접 발견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결코 정부 차원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2시간이 넘도록 성인 남성 30여 명이 코트를 입고 무리지어 다니는 걸 아무도 묻거나 검문하지 않았다는 점(적지 않은 통행인 및 군경들을 지나쳤다)이 더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35] 여기서 이각현 서장이 검문을 시도했으나 공비들이 CIC라고 주장하였기에 더 물어보지는 못하고 후술할 조치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많다. 다만 이 경우에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추적감시하는 걸 방첩대라 무조건 열어 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6] 저 두 형사들도 직감적으로 공비라고 예상을 했지만 머릿수로도 밀리고 총도 없던 터라 쓸데없는 잡담을 해 가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당시 공비들이 시내버스 한 대를 세운 뒤 서울 시내로 진입하려던 참이었다.[37] 최규식은 청와대를 관할 구역에 두고 있는 종로경찰서장이었고 군 복무 시절 박정희의 부관으로 일한 측근으로 전역 후에도 중용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이들이 자기들을 방첩부대 소속이라고 주장해도 물러서지 않고 수하를 한 것.[38] 1935년 7월 17일 경북 상주 출생. 전사할 당시에는 순경이었으며 전사 후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경사로 1계급 추서(당시에는 경장 계급이 없었다). 2017년 6월 5일엔 전사한 지 무려 50년 만에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고개 현충시설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당시 함께 전사한 최규식 총경은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1969년 청와대 인근에 동상이 건립되었지만 정종수 형사는 하위 직급이었던 탓에 그동안 순직비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39]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박재경이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당시 군에선 '일개 병사도 아니고 연대장이 전사할 정도면 이건 명백한 작전 실패'라며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임무 수행 중 전사했는데 응분의 포상을 하지 않는다면 군의 사기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이익수 대령에게도 훈장 및 계급 추서와 같은 예우를 해 주었다. 출처는 이재전 회고록.[40] 당시 22세의 여성 윤정순 씨.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약혼자와 같이 차를 기다리던 중 총소리에 놀라 근처 가게로 뛰어들어가다 가슴과 배에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41] 무장간첩 중 5, 6명은 무리지어 경복중·고교장 자택을 뛰어넘고 달아났다. 경찰이 집중사격했으나 이들은 달아나면서 수류탄을 집 뒷마당에 던져 변소와 유리창 등을 파손했다(집주인 가족들은 안방에 몰려 이불을 뒤집어쓴 채 긴장된 하루 밤을 새워야 했다). 공비들은 학교 담으로 엄폐하며 계속 응사했고 그러던 중 수위 정사영 씨가 놀라 뛰어나왔다가 이들이 던진 수류탄 폭발에 사망했다.[42]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때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43]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전역. 국회의원 당시 국회에 출두한 현역 장성들에게 군번줄 착용 여부를 물어 화제를 모았다.[44] 단 이때 김신조는 이전에 있던 산악고속행군으로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음을 감안해야 한다.[45]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사실 김신조는 당시 이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거기에 있었던 적도 없다고 이만갑에서 밝혔다. 김신조 루트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그저 자신이 살아남았으니까'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이용한 루트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세검정 쪽이다.[46] 인터넷 이용이 어려운 노인들에 한하여 전화 신청이 가능하며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신청을 받고 있다.[47] 당일치기 서울특집에 이수근의 북악산 성곽길 미션에서 나온다.[48] 후일 현 수방사 제1경비단의 두 전신 중 하나인 제30경비단으로 승격되었다.[49] 사실 북한은 꼬리를 잘라야겠다 싶으면 극렬 분자 운운한다.[50] 북한이 이들의 유해 인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51] 간첩식별 위한 제도가 43년간 존속…번호 자체에 개인 고유정보 다 담겨, 2011-11-28, 한국경제[52] 당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6자리였다. 현재의 뒷자리는 개정을 통해 6자리에서 7자리로 개정된 것으로 뒷번호 두 번째와 세 번째 숫자는 출신 지역으로 변경된 것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인 즉, 박정희가 지금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을 경우 100001이 아니라 1710001이 되었을 것이다.[53] 당시 말년병장이었던 사람의 회고를 들어 보면 제대 날짜 세면서 매일 개울 가서 천렵하고 낚시하는데 갑자기 간첩이 넘어왔다고 하더니 3kg짜리 모래 주머니를 발에 채우고 매일 뛰게 시켜서 지옥 같았다고 한다. 이 때 군복무 기간이 늘어나면서 피해를 봤던 어느 사람은 전역 후 김신조와 우연히 마주치자 "네놈 때문에 군대에서 더 고생했다" 라며 멱살을 잡고 욕을 했다고 한다.[54] 물론 지금은 전투경찰순경은 물론 의무경찰 제도까지 모두 폐지되었다.[55] 예를 들어 가, 나 부대 사이에 초소 A, B, C, D가 있으면 가 부대가 A, C초소를, 나 부대가 B, D 초소를 담당한다.[56] 실무진의 책임자 격이었던 이재전 장군이 쓴 회고록이 국방일보에 연재되었으니 참고 바람.[57] 과목 자체는 2011년에야 폐지되었다.[58]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불과 1주일 앞두고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일으켰고, 1988 서울 올림픽 때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켰으며,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제2연평해전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전쟁 중인 국가이자 안전하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며 개최를 방해하는 작전을 펼쳤다.[59] 심지어 김일성 시기에는 군이었고, 려행증 제도는 평양 주민들에게도 적용되었다.[60]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2004-01-29, 신동아[61] 위의 사건여파 문단 참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평안도 출신.[62] 북한 입장에서도 공비는 훈련에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에 쓸데없는 인력 낭비를 자제하기 위해 복귀하라고 한 모양이다.[63] 김신조 부대에 훈련내용을 하달한 124부대장 이재형과 우명훈은 인민위원회 건물을 진짜 청와대로 간주하고 거기 있는 인원들은 모조리 실탄으로 사살해도 된다는 지시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훈련 중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조선로동당이 전부 책임진다고 했다.[64] 김신조는 훗날 그 실전적이기 그지없던, 아니 실전 그 자체였던 훈련 당시 사회안전원과 노농적위대원 12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65] 김신조 역할은 배우 성동일이 맡았으며 조장 김종웅(극중에선 김시웅이라는 이름으로 각색됨)의 역할은 야인시대에서 부산 도끼파의 두목 역을 담당한 황진영이 맡았다.[66] 코리아게이트와 영웅시대 두 드라마 모두 박정희 대통령 역할은 배우 독고영재가 맡았다.[67] 노량진 학원가 일대도 타격을 입기는 했으나 원래 노량진수산시장이 근처에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여서 타격이 덜했고 나중에 일대가 학원가가 되면서 대박을 쳤다.[68] 후일 유명한 탤런트가 됐다곤 하지만 누구인진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