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7:15:50

북미 제네바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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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북미 제네바 합의
영어 Agreed Framework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1. 개요2. 합의문 내용3. KEDO4. 합의 이후5. 실패의 원인
5.1. 공화당의 반대5.2. 잘못된 예상5.3. 북미간의 신뢰구축 실패 및 당사국들간의 의견 불일치5.4. 부시 정권의 등장
6. 결론7. 여담8. 둘러보기

1. 개요

1994년 9월 23일에서 10월 17일 개최된 북한과 미국 간 3단계고위급회담 2차 회의에서 양국이 서명한 기본 합의문을 말한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 개발 동결 대가로 종전 및 평화협정 체결 후 북미간 통상 수교, 통상 거래,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금지 보장과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제공하고 대체에너지로 연간 중유 연 50만t을 3개월 내로 개시하여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본 합의문서후 1개월 내 흑연감속원자로 및 관련 시설의 동결, 핵비확산조약(NPT) 당사국으로 잔류하며 동 조약상의 안전조치협정 이행, 본 조약의 동결된 흑연감속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제외한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핵무기 개발의 전면 동결, 미국측이 협의를 모두 이행할 경우 기존 핵무기 개발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의 궁극적인 해체를 약속하였다.

2. 합의문 내용

1. 양측은 북한의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시설을 경수로 원자로 발전소로 대체하기 위해 협력한다.

1) 미국 대통령의 1994. 10. 20.자 보장서한에 의거하여 미국은 2003년을 목표시한으로 총발전용량 약 2,000MWe의 경수로를 북한에 제공하기 위한 조치를 주선할 책임 을 진다.

- 미국은 북한에 제공할 경수로의 재정조달 및 공급을 담당할 국제콘소시엄을 미 국의 주도하에 구성한다. 미국은 동 국제콘소시엄을 대표하여 경수로 사업을 위한 북한과의 주 접촉선 역할을 수행한다.

- 미국은 국제콘소시엄을 대표하여 본 합의문 서명 후 6개월 내에 북한과 경수로 제공을 위한 공급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계약 관련 협의는 본 합의문 서명 후 가능한 조속한 시일 내 개시한다.

- 필요한 경우 미국과 북한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 있어서의 협력을 위 한 양자협정을 체결한다.

2) 1994. 10. 20.자 대체에너지 제공 관련 미국의 보장서한에 의거 미국은 국제콘소시엄을 대표하여 북한의 흑연감속원자로 동결에 따라 상실될 에너지를 첫번째 경수로 완공시까지 보전하기 위한 조치를 주선한다.

- 대체에너지는 난방과 전력생산을 위해 중유로 공급된다.

- 중유의 공급은 본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 개시되고 양측간 합의된 공급일정에 따라 연간 50만톤 규모까지 공급된다.

3)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제공에 대한 보장서한 접수 즉시 북한은 흑연감속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해체한다.

- 북한의 흑연감속원자로 및 관련 시설의 동결은 본 합의문서후 1개월 내 완전 이행된다. 동 1개월 동안 및 전체 동결기간 중 IAEA가 이러한 동결 상태를 감시하는 것이 허용되며, 이를 위해 북한은 IAEA에 대해 전적인 협력을 제공한다.

- 북한의 흑연감속원자로 및 관련 시설의 해체는 경수로 사업이 완료될 때 완료된다.

- 미국과 북한은 5MWe 실험용 원자로에서 추출된 사용 후 연료봉을 경수로 건 설기간 동안 안전하게 보관하고 북한내에서 재처리하지 않는 안전한 방법으로 동 연료가 처리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상호 협력한다.

4) 본 합의후 가능한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국과 북한의 전문가들은 두 종류의 전문가 협의를 가진다.

- 한쪽의 협의에서 전문가들은 대체에너지와 흑연감속원자로의 경수로로의 대체 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한다.

- 다른 한쪽의 협의에서 전문가들은 사용 후 연료 보관 및 궁극적 처리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협의한다.

2. 양측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한다.

1) 합의 후 3개월 내 양측은 통신 및 금융거래에 대한 제한을 포함한 무역 및 투자 제한을 완화시켜 나아간다.

2) 양측은 전문가급 협의를 통해 영사 및 여타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 후에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

3) 미국과 북한은 상호 관심사항에 대한 진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까지 격상시켜 나아간다.

3. 양측은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와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

1)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를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

2)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일관성있게 취한다.

3) 본 합의문이 대화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 문에 북한은 남북대화에 착수한다.

4. 양측은 국제적 핵비확산 체제 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

1) 북한은 핵비확산조약(NPT) 당사국으로 잔류하며 동 조약상의 안전조치협정 이행을 허용한다.

2) 경수로 제공을 위한 계약 체결 즉시 동결 대상이 아닌 시설에 대하여 북한과 IAEA간 안전조치 협정에 따라 임시 및 일반사찰이 재개된다. 경수로 공급계약 체 결시까지 안전조치의 연속성을 위해 IAEA가 요청하는 사찰은 동결대상이 아닌 시설에서 계속된다.

3)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은 북한내 모든 핵물질에 관한 최초 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검증하는 것과 관련하여 IAEA와의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포함하여 IAEA 안전조치협정(INFCIRC/403)을 완전히 이행한다.

3. KEDO

합의 이행을 위해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가 1995년 출범하였다.

4. 합의 이후

당장 합의 후 내년인 1995년부터 합의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년도 안 되어 합의가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 당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종전 후 평화협정 체결 및 북미 수교와 통상거래 및 정권의 안전 보장등이 미국 의회(선거 이후 공화당이 다수당)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이 합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동결하기 위한 합의였으므로 북한은 핵무기 개발 동결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KEDO의 출범과 함께 북한 지역에서 원전 건설을 위한 기초 공사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1994년 중간선거로 미국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미국)이 북한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보이면서 중유 50만톤 지원과 제제완화를 모두 무산시켰고, 당연히 북한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북미대화는 다시 표류하게 된다. 서로 합의했던 무역투자 규제 완화와 연락사무소 개설 등은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석유 지원과 제제완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북한도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1]을 운영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서로 동상이몽하다가 서명 8년만인 2002년 공식적으로 파기되고, KEDO 소속으로 북에 원전 공사를 진행하던 남쪽 인력들도 모두 철수한다.

북한은 곧바로 2003년 1월 NPT 탈퇴를 공식 선언한다.

5. 실패의 원인

5.1. 공화당의 반대

제네바 합의의 핵심인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이행과제에 대해서, 미국 공화당은 북한과의 합의를 반대하여 핵심적인 경수로 발전 자금지원을 미국 의회는 불허 하였다. #

5.2. 잘못된 예상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후 북한이 경수로 프로젝트가 마쳐 지기 전에 붕괴 될 것을 예상하였다.

북한의 정권이 붕괴전까지 핵 개발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하여, 북한과 합의를 하였다고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에 제네바 합의 배경을 실토하였다. #

5.3. 북미간의 신뢰구축 실패 및 당사국들간의 의견 불일치

미국의 경수로 발전소 지원을 위한 자금 지원의 미국 의회 불허등 약속 불이행에 대해서, 북한은 5년 이후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이에 6자 회담을 고수하였으나 6자 회담 참가국들 중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통해 미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회담을 이용하여 실질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은채 회담을 위한 회담만 지속되었다.

5.4. 부시 정권의 등장

미국은 북한 핵발전소의 대체 에너지인 중유의 북한 지원은 미국 의회의 반대에 따라서, 지속적인 지연이 발생하여 북한에 심각한 경제난 중 전력난이 야기 되었으며, 한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대북 식량 지원등이 있었지만, 북한의 1990년 고난의 행군 기간동안 수만명의 북한 주민이 아사 당하는 처절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제네바 합의의 핵심 당사자인 미국의 경수로 자금및 건설 지연이 되면서, 북한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이후 시작하였으며, 결국 양측의 신뢰구축은 실패했다.

2002년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비판하던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되면서 북한에 대한 제재 일변도의 정책이 자리잡게 되었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주장하는 자체 적인 방어를 위한 핵무기와 관련된 합의이며, 북한이 이런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기 위하며 북한과 미국간의 대체 에너지 및 공식적인 북미간의 평화 협정 추진을 합의였다.

즉 제네바 합의 내용중 실제적인 이행 사항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간 군사훈련 중단등의 주장은 실제로 제네바 합의 내용에 명시적으로 기재된 것 이었다.

6. 결론

미국은 북한이 알아서 붕괴될 거라 여겨 시간만 끄는 전략적 인내 전략으로 1994 제네바합의를 적극적으로 지킬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북한은 우라늄 프로그램은 1994 제네바합의 내용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 그 허점을 이용하려고 했다.

서로의 동상이몽에 겹쳐서 미국의 선거 이후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더 적극적으로 제네바합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북한은 미국이 합의 내용을 지켜오지 않자 본인들도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으며 결국 2002년에 파토가 난다.

7. 여담

  • 공화당이 앞장서서 대북지원과 제제완화를 막아버렸지만, 사실 민주당이나 클린턴 행정부도 그렇게 제네바합의 이행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 정치권은 민주, 공화 양당 모두 북의 김정일 정권이 붕괴직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멀쩡하다... 당시 클린턴 백악관 조차도 합의문에 반발하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어차피 몇년 안가서 망할 나라다. 실제로 우리 비용이 들어가는 건 없다. 단지 대화한다는 제스쳐만 보여주면서 시간만 끌면 된다"식으로 설득했다고 한다.[2]
  • KEDO의 재정 90%를 미국 재정도 아닌 한국과 일본에 떠넘겨 핵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양국의 반발이 있었고 미국 내부에서도 북한의 합의 준수를 믿지 못하겠다며 클린턴 정부의 핵합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합의했던 무역투자 규제 완화와 연락사무소 개설 등은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석유 지원을 중반에 중단하고 북한도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 이후 지속적으로 황장엽등 북 고위층 망명자들의 증언으로 북한이 핵합의를 어기고 우라늄농축과 핵시설 가동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애당초 미·북간 제네바합의에 의해 북한 핵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초반부터 IAEA의 사찰에 대한 북한의 비협조와 남북관계의 긴장고조로 경수로 사업은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 1996년 9월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19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1999년 6월 NLL 침범에 따른 서해교전 도발이 이어진데다가 1998년 8월 미국 NYT는 “북한 금창리 지역에 대규모 지하 핵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인공위성 사진을 제시하면서 핵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후 4개월에 걸친 협상을 통해 미국은 60만톤의 식량을 지원하고 현장사찰을 실시했으나 대규모 땅파기 공사만 확인했다.
  • 2002년 6월 독일정부가 북한이 독일에서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용 고강도 알루미늄관 부품 200톤 밀수하려던걸 적발하여 압수했고#, 미국 CIA 첩보로 북한이 러시아를 거쳐 150톤에 달하는 2600개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입수한것이 드러났다. 그러자 미 정부는 2002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2002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미국 국무성 동아태차관보 제임스 켈리(James Kelly)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장비에 대한 통관서류를 제시하면서 북한의 핵활동 의혹을 제기했고, 북한은 ‘이(플루토늄 핵무기) 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있다#고 하면서 우라늄 농축계획의 존재를 시사함으로써 서명 8년만인 2002년 공식적으로 파기되고, KEDO 소속으로 북에 원전 공사를 진행하던 남쪽 인력들도 모두 철수한다. 북한은 곧바로 2003년 1월 NPT 탈퇴를 공식 선언한다.
  • 공화당이 앞장서서 핵합의를 반대했고 민주당 일각에서도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도 합의문에 반발하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어차피 몇년 안가서 망할 나라다. 실제로 우리 비용이 들어가는 건 없다. 단지 대화한다는 제스쳐만 보여주면서 시간만 끌면 된다"식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 협상의 주역이었던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와 북한 강석주 북미고위급 회담 대표는 이후에도 몇년간은 서로 연하장도 교환하면서 지냈지만, 결국 연락이 끊어졌다고 한다. 강석주는 내각 부총리와 정치국 위원까지 승진하였으나, 2016년 식도암으로 사망하였다. 로버트 갈루치는 현역에선 은퇴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북핵문제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 당시 북한 외교관이었던 김동수 박사는 수십년후 미국을 방문해서 당시 실무진과 대화에서 왜 당시 핵합의를 했는가 물었는데 "북한이 얼마나 핵을 가졌는지 사찰로 알 수 있을거라고 판단" 했다고 한다. 현재의 분석으로는 1994년 당시 북한은 핵 개발은 커녕 연구실 개발수준이었고, 1999년에서 2000년사이 핵 연구와 개발을 완료했다고 본다. 김동수 박사는 당시 외무성의 분위기를 전하며 94년 제네바 협상팀이 귀국하자 김정일이 버선발로 달려가 순안공항에서 영접했으며, 짐도 못내리고 바로 김정일 특각으로 실려가 며칠동안 광란의 파티를 벌이며 자축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시간끌기 전략이 성공한데다가 중유 지원까지 얻어냈기 때문에 기뻐했다고. 당시 평양은 고난의 행군으로 국제사회에서 지원한 연 30만~50만톤으로 평양 시민, 보위부 안전부 배급을 주고 간간히 먹여 살리고, 연료난으로 군수시설에서 극심한 정전에 시달렸는데 석탄에 중유를 뿌려 화력발전을 재개하여 전력난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고한다.
  • 북미 제네바 합의는 한국 정치 외교사에 큰 실패로 꼽히는데 북미 핵합의에 배제되어 국민세금으로 2조원을 지원금으로 날리고 결과 마저도 우려한데로 실패였기 때문이다.
  • 2024년 외교문서 따르면, 한국이 그래도 북한의 태도 때문에 불신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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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는 훗날 합의문에 우라늄프로그램 금지를 명확하게 넣지 않은게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국은 영변원자로의 플루토늄 추출을 막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우라늄 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했다는 것이다.[2] 북은 비정상 국가이기에 우리가 봉쇄하면 곧 무너진다는 북한 붕괴론은 지난 수십년간 미국정치권의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소위 북미협상을 주장하는 미국 민주당계열 온건파들도 결국 그 붕괴과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화를 주장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북미관계를 개선하자는 부류는 소수파였다. 북한이 계속 핵실험을 하고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데도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가 소위 '전략적 인내'라면서 아무 것도 안한 것도 결국 저러다 자멸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북한은 멀쩡히 핵기술, 미사일 사정거리를 발전시켜가면서 대량살상무기를 거의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