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20 19:30:11

제2연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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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
제2연평해전
북한의 대남 도발사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KM_357_at_the_War_Memorial_of_Korea%2C_23_March_2011.jpg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참수리 357의 모형
시기 2002년 6월 29일
장소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선
원인 조선인민해군의 NLL 무력화 시도
교전국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제6공화국파일:북한 국기.pn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정병칠(제2함대사령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김찬(232 편대장)[1]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윤영하(357호 정장)[2]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최영순(358호 정장)[3]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이희완(357호 부장)[4]
파일:북한 국기.png 김윤심(해군사령관)
파일:북한 국기.png 김영식(684호 함장)
병력 포항급 초계함 2 척
참수리급 고속정 6 척
등산곶 경비정 1 척
육도 경비정 1 척
피해 참수리 357호정 침몰
전사 6 명
부상 18 명
등산곶 684호정 파손
전사 13 명
부상 25 명
결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Naval_Jack_of_South_Korea.svg.png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5]
영향 대한민국 해군의 대북 교전수칙 변경

1. 개요2. 교전 내용
2.1. 조선인민군 해군의 선제 발포2.2. 피격, 교전의 시작2.3. 대한민국 해군의 대응
3. 교전 결과
3.1. 한국 해군의 피해
3.1.1. 제2연평해전 대한민국 해군 전사자 명단
3.2. 북한 해군의 피해
4. 북한의 도발 이유와 피해에 관한 분석
4.1. 제1연평해전 패배에 대한 북한 측의 복수4.2. 대한민국 측의 교전 중 초계함 후퇴 이유4.3. 교전수칙의 불리함
5. 교전 이후 양측 해군의 변화
5.1. 대한민국5.2. 북한
6. 제2연평해전이 남긴 문제들
6.1. 사건 당시의 문제
6.1.1. 전사자 보상 처리 문제6.1.2. 부상자 및 전사자 위문 편지 문제6.1.3. 군 지휘부의 잘못된 장병 대우 문제6.1.4. 언론사들의 제2연평해전 보도 등한시6.1.5. 대통령, 국무총리 등의 추모식 불참6.1.6. 정부 태도에 대한 문제
6.2. 사건 발생 이후의 관련 이야기
6.2.1. 노무현정부 시기6.2.2. 이명박정부 시기6.2.3. 박근혜정부 시기6.2.4. 문재인정부 시기
7.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8. 기타



1. 개요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 부근 NLL(북방한계선) 북서쪽 방향 일대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8전대 7편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의 8.5cm 전차포 선제 포격 도발로 일어난 중·소규모 교전이다. 발발 시 언론사에서 '서해교전'이라고 보도했으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발표에 따라 제2연평해전으로 공식 명명되었다.

2. 교전 내용


2.1. 조선인민군 해군의 선제 발포

두 번째로 연평도 근해에서 해전이 벌어졌던 그날도 도합 2척의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6]과 등산곶(육도) 388호정[7]이 NLL을 1.1km 침범하였고 이에 해군 고속정 4척이 교전수칙대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참수리 편대는 각 편대별로 경비정 1척씩을 맡아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이 중 684를 맡은 232편대에서는 편대장 김찬 소령이 좌승했던 기함인 358호정이 선두를 맡고 357정은 300야드 정도 뒤에서 북한 경비정 쪽으로 접근[8]하였다. 이윽고 참수리들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684의 전진방향의 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684가 358을 지나친 순간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358호정의 뒤를 따르던 357호정은 갑자기 정지한 684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었고 이로 인해 357의 좌현이 그대로 684에 노출되었다. 이때, 두 함정의 거리는 450m 내외로 북한 경비정의 조악한 수동 조작식 구형 육군용 대공포 및 신형 취급받던 T-34-85의 주포 ZIS-S-53 85mm 전차포로 철갑탄을 쏘더라도 초탄 명중이 가능한 거리였다, 북한 경비정이 경고 사격없이 선수의 ZIS-S-53 85mm 전차[9]를 357호정에 사격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2.2. 피격, 교전의 시작

파일:external/d7b1977868c591c41e2533184aca0634f8b8c399da5da430743a2235717d5ea4.jpg

북한 중형 경비 초계정에서 예고없이 발포된 85mm포 기습 발사를 시발점으로 북한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격대응명령을 내린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은 초탄 명중 이후 4분 후인, 37mm 포탄이 함교에 명중해 아비규환이 된 찰나 저격수의 총탄에 등을 피격당해 몸을 떨다 눈을 감고 일자로 누운 채 전사하였다.[10] 이후 이희완 부장이 의식이 없는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조타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진)) 역시 조타실 피격으로 전사, 기타 승조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어진 사격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 기기가 파괴되어 357정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엔진이 정지하여 전력이 끊긴 상황에서 부장[11] 이희완 중위(2019년 현재 중령)이 왼쪽 다리엔 고사총 탄두 관통상, 오른쪽 다리는 37mm 2연장 고사포탄에 부상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두지휘를 감행하였으며 2cm 시 발칸포가 전기 계통이 나간 상황에서도 비상 전력을 가동하고 공기 유압 펌프나 스위치 등으로 어떻게든 포를 조작하여 수동으로 발사했다.[12]

전투가 시작되고 대응 사격을 한 지 12분 후, 22포 시 발칸 담당 병기부사관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는 적의 집중 사격 속에서 헬멧을 쓴 두부에 37mm 포탄을 맞아 두부의 3분의 1이 포탄 탄두에 함몰되어 없어진 상태로 방아쇠를 잡고 안은 채 전사하였고, 조천형 중사(당시 하사)가 21포에서 응전하던 도중 등산곶 684호정 함교 뒷편 포좌의 ZPU-4 14.5mm 4연장 고사총과 포대 37mm 2연장 기관포 등의 집중 사격을 받던 도중 포탑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신 화상을 입고 질식사한 채 방아쇠를 잡고 안고 있었다, M60 기관총을 맡고 있던 내연부사관[13]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도 교전 중에 684에 승조한 저격수에게 왼쪽 흉부를 관통당하고 전사한다.

또한 갑판에서 소병기[14] 사격을 담당하던 승조원들과 기관실, 통신실에 있던 승조원들 다수가 벽을 관통한 총포탄과 7호 발사관 등의 파편에 의해 부상을 입는다. 그 와중에 의무병 박동혁 수병[15](당시 상병)은 5군데나 총상과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조원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하나 서후원 중사가 684호에 승조한 함상저격수에게 왼쪽 가슴 심장 부분에 7.62mm 총탄[16] 한 발, 오른팔에 파편을 맞고 쓰러지자 분노하여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난사하다 적의 집중적인 소병기 사격[17]에 재기 불능 상태가 되고, 이를 보다 못해 극까지 참은 분노가 터져 버린 권기형 상병은 자신의 왼손이 고사총과 파편에 부서져 왼쪽 손가락을 못 쓰는 상태로 서 중사가 전사한 거치대 앞에 뛰쳐나가 서후원 하사와 박동혁 상병이 쏘던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오직 오른손으로만 남은 잔탄을 그대로 등산곶 684호에 전탄 발사한다.

2.3. 대한민국 해군의 대응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 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너무 가까운 거리라 사격 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북한 경비정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은 358에서의 공격은 일체 무시하고 357정만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358호정은 단 한 발도 피격되지 않고 사상자 및 함정 손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한국 해군 PCC들이 급히 북상했지만 북한이 지상 기지에서 스틱스 대함 미사일을 발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 감지되었고 북한 해안의 해안포 때문에 함포 사거리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산 공군기지에서는 F-5, F-4 편대가 출격 대기를 하고 있었다.

3. 교전 결과

3.1. 한국 해군의 피해

최초 보고는 4명 전사, 19명 부상, 실종 1명, 무사고 4명이었다.

하지만 실종된 한상국 상사가 SSU 대원들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은 357정의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18], 의무병 박동혁 수병이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6명 전사, 18명 부상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또한 참수리 357정이 침몰하였다.[19]

아군 함정들은 북측 함선이 퇴각하는 것을 레이더로 확인한 후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퇴각하였다. 하지만, 참수리 357정은 기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ZIS-S-53 85mm 전차포 5발, V-11-M 계열 2연장 37mm 함포[20] 19발, ZPU-4 234발 도합 모두 258발과 88식 보총, 73식 대대기관총, 7호 발사관, 78식 저격보총, 31식 60mm 박격포를 포함한 각종 중화기 공격을 받고 격벽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고 있었던 것. 357, 358정의 장병들은 358정의 해수 펌프까지 동원해가면서, 승조원 중 상당수가 부상당한 상황에서조차 배수작업을 했지만, 이미 너무 피해가 컸기에 침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9일 정오, 참수리 357정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21]

북한 해군 등산곶 684호정의 포탄 88%가 고속정 좌현에 집중됐다. 위치별로는 주갑판 상부에 122발, 주갑판 하부에 136발씩 피격됐다. 또 주갑판 하부중 선체에 치명적인 흘수선(바닷물과 선체가 접하는 부분)에 모두 42발의 피격 흔적이 있었고 특히 85㎜ 전차포에 의한 피격 5발중 2발이 흘수선 부근에 명중돼 축구공만한 구멍이 났다.

이에따라 아군 20mm 벌컨포 2문 관통 및 전원케이블 손상, 레이더송신단, 통신기 전원, 좌현측 추진엔진과 발전기가 각각 피격받았다. 또 조타실 화재로 인한 천장 및 장비 손실, 통신실 화재로 통신기 열 손상, 정장실, 승조원 침실 구역(6개 격실) 화재및 내부 붕괴 등의 손실이 발생했다. 국방부 조사에서 밝혀진 것으론 지휘기능을 지닌 조타실과 함교에 59발, 기관실에 60발, 흘수선에 10발의 포탄이 명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북한 경비정의 공격에 대응해 고속정 357호는 포대에 장전된 1천132발 중 중구경 40㎜ 보포스 기관포 6발과 20㎜ 시 벌컨 도합 674발을 발사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3.1.1. 제2연평해전 대한민국 해군 전사자 명단

파일:attachment/제2연평해전/chamsuri.jpg
윤영하 소령[22](해사 50기, 당시 대위) 정장 충무무공훈장 추서
故 한상국 상사[23](해군부후 155기, 당시 중사(진)) 조타 화랑무공훈장 추서
故 조천형 중사(해군신병 402기[24], 해군부후 173기[25], 당시 하사) 병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故 황도현 중사(해군부후 183기, 당시 하사) 병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故 서후원 중사(해군부후 189기, 당시 하사) 내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故 박동혁 병장(해군신병 456기, 당시 상병) 의무병 충무무공훈장 추서



우리가 지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이때 희생하신 위 여섯 분 덕분이다. 이분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셨고 북한의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우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공로를 기억하도록 하자.

3.2. 북한 해군의 피해

북한 해군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은 교전 중반인 85mm 전차포로 85mm 철갑탄 초탄 발사를 한 지 720초에서 1200초가량 지난 후에 모든 포탑이 파괴되어 포격 불능 상태가 되고 다수의 포수(서주철 등은 제외)나 고사총 사수들이 사망해 7호 발사관과 88식 보총, 73식 대대기관총 등의 소병기 공격만 주고받았다. 아군 고속정의 집중 공격을 받고 조타가 불가능한 상태로 계속 빙글빙글 돌다 북측 경비정의 예인을 받고 25분 만에 퇴각하였다.

지원을 한 3척의 대한민국 해군 측 고속정에서 관측한 자료에선 684의 갑판에 나와 있던 승조원 대부분이 피탄당하여 쓰러지는 광경이 관측되었다.

군사정보지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피해는 경비정 대파, 사망 13명(함장 김영식 대위 포함), 부상 25명 등 38명 사상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그러나 사망자의 수에 대해서는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당시 인민군 해군에 복무했던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군의 전사자는 3명(정장 포함)이라고 한다. 이 탈북자에 의하면 3명의 전사자는 모두 357정이 처음에 조타실에 명중시킨 한 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한 방에 조타실이 파괴되어 조타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탈북자들의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 면도 있다. 그의 주된 원인은 북한 측이 피해자 규모를 줄여 발표하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북한 해군 출신이라는 탈북자들이 제1연평해전 전사자에 대하여 상반된 주장을 하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측에선 적어도 1백 명 이상 북한 해군이 죽었으리라 예상했지만 10명도 안 된다는 주장에서 그쯤 된다는 주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한국 측 조사 기록이 더 정확성을 가진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한국 측의 반격을 보면, 북측에서 발표한 3명 사망자는 실제 규모보다 축소했을 게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저 탈북자의 증언은 탈북자가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할 때, 북한 내부 발표로는 3명이라는 말이거나 혹은 영웅 칭호를 받은 것이 세 명이라는 말, 혹은 현장에서 즉사한 사망자가 3명이고 나머지 인원은 퇴각하여 치료를 받던 중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한 것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26]

아래의 전문은 그 지적을 뒷받침하는 증언인데,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가 탈북해서 시인을 하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이다.[27][28]
아마도 탈북자 2만 명 중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었던 북한 서해교전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 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29]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렌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새까만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 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 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조끼입니다. 방탄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30]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 날 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31]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 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32][33] 같은 경우엔 기름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한번 북방한계선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 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일이오?"
"전번 1차 때 충돌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일을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 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 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노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조타란 기본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조타 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 말에 옆에서 히히거렸지만 나이 든 해병들만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주세요."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지도원이 정치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우세나 함선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4. 북한의 도발 이유와 피해에 관한 분석

4.1. 제1연평해전 패배에 대한 북한 측의 복수

교전 시기가 꽃게잡이 철이어서 꽃게 떼를 따라 북측의 어선[34]NLL을 월선하는 경우가 잦았다. 월선하는 어선단은 종종 북한 측 경비정을 대동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제2연평해전도 비슷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발성이 짙었던 1차 연평해전 때와는 달리 2차 연평해전은 1차 연평해전의 참패를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게 이후 조사에서 드러났다.

해전 발발 직후만 해도 언론이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북한군과 한국군의 우발적인 충돌인 듯하다고 보는 시각이었지만 후에 북한의 계획적인 도발로 밝혀졌으며, 탈북자들에 의해 김정일이 해군에서도 영웅이 나와야 한다는 지시가 있었다는 정황이 신문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일부 자료에는 북한군의 세세한 준비 과정과 그 이후 처리까지도 나와 있다. 정황 증거를 볼 때, 제2연평해전은 1999년 제1연평해전의 일방적 패배에 따른 보복이나 다름없었다.

교전 과정을 보면, 북측은 처음부터 완전한 함선 제압을 노리고 함교부터 선제 포격으로 무력화 시키는 등 당초 발표와 같은 우발적인 교전은 아니었다. 북한의 경비정 자체도, 제1연평해전의 교훈을 살려 경비정의 기동성을 포기한 채 주요 부위를 철갑으로 보강함으로서 아군 발칸에 노출되고도 침몰하지 않았다. 아군 함정에 비해 부족한 화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기 위해 해상저격여단 병력을 증원해 태웠기 때문으로 평소보다 많은 보총수와 기관총 사수 및 부사수, 저격수와 7호 발사관 사수 등의 승조원을 배치해 88식 보총과 73식 대대기관총 등 소병기로 공격을 했다는 증언도 기사화 된 적이 있다. 때문에, 제2연평해전이 제1연평해전의 복수를 하려던 북한 지도부의 계획 아래 이뤄졌다는 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4.2. 대한민국 측의 교전 중 초계함 후퇴 이유

북한 경비정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후방에 있던 해군 초계함이 지원을 위해 접근하다 퇴각한 일이 있다. 퇴각한 이유는 북한이 해안에 설치해 둔 대함 미사일인 실크웜(중국제 스틱스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 지대함 미사일 대응 무기를 적재하지 않았던 초계함은 일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후퇴 문제는 이후 국정감사에서 공중 지원의 부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고, 그 지적에 관해 대한민국 공군은 "공중 지원을 하지 않은 것은 북측의 공중 공격에 우선 대응하기 위해 공대공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공군까지 공격하면 전면전급으로 번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4.3. 교전수칙의 불리함

이 부분은 제2연평해전 당시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므로 당연히 오늘날까지도 인터넷에서 자주 논쟁이 일고 있는 부분이다[35]

하지만 중요한 점이 있는데, 이러한 교전수칙 자체가 존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한국은 북한과 휴전을 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형식적으로는 지금 전쟁을 잠깐 쉬고 있는 것뿐이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한과 북한은 워낙 좁은 땅과 바다, 하늘에서 서로의 군대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양측의 최고지도부의 지시나 허가 없이도 사소한 문제나 이유로 인해서 서로 간의 충돌과 전투가 일어나기 쉬운 상황이고 최악의 경우엔 그 때문에 전쟁이 다시 재발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라고 매뉴얼로 규정해 둔 것이 바로 "교전수칙" 이란 것이다. 교전 수칙의 디테일과 내용은 간략한 의미나 성격만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른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군사적 기밀사항이다.[36]

이 부분을 항상 전제해 두자.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해상 작전 지침은, '경고방송 → 시위기동 → 차단기동 → 경고사격 → 격파사격'[37] 의 5단계였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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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96년 교전수칙이다. 역시 보다시피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여객선 및 어선에 위협을 줄 시 "사격을 제외한 가용 수단"을 사용하라는 항목이 먼저 되어 있으며 계속 불응할 시에는 사격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즉 해상에서 북한 측 군함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왔을 시 처음 마주쳤을 때 먼저 날 공격한 경우가 아니면 우리는 경고 방송이나 시위 기동 등 사격을 제외한 가용 수단을 쓰라는 의미다. 그래도 계속 불응하면 그때는 사격을 포함한 수단도 쓸 수 있다는 소리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짐작했겠지만, 보다시피 만약 북한군이 우리가 경고나 차단기 동을 하기도 전에 선제 공격을 가할 경우엔 우리가 먼저 당할 수밖에 없는 무방비한 상황에 있다. 제2 연평해전 역시 사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문제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먼저 보고도 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을 몇몇 사람들은 제2 연평해전에만 국한된 특수한 사례라고 주장하거나 왜곡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미 위에서 본 것처럼 1996년에도 저런 방식이었고, 과거부터 한국군에게는 해상에서 북한군에 대한 선제 사격이나 공격이 금지되어 있었다.[39] 기사

1973년엔 제3보병사단북한군에게 먼저 공격당한 이후 반격을 한 사건의 경우에도 반격을 지시한 박정인 당시 사단장이 해임당하는 등 문책도 있었고, 그후 1999년 제1 연평해전 직후에도 이러한 교전수칙은 한차례 더 언급되어 있는데, "유엔사 교전수칙에 따라 완충 지역(북방한계선 안쪽 1000~15000M) 안에서는 적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먼저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 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제2연평해전 당시 적용된 교전수칙 중 논란이 크게 있었던 부분은 바로 "차단기동"이다. 제1연평해전뿐만 아니라 제2연평해전 당시에도 합동참모본부NLL을 침범하는 북한 경비정들에게 선제사격을 금지하고 근접해서 부딪혀 밀어내는 "차단기동"을 지시했는데, 차단기동은 2-3km 사이 거리를 두고 적 함정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30노트 이상의 우리 함정의 빠른 속력을 이용하여 20노트에 불과한 북한 함정의 꼬리를 물면서 위협하는 것이다.

차단기동은 과거부터 이미 문제점이 지적되었지만 1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 해군을 큰 피해 없이 가볍게 제압하고 승리한 결과 이러한 교전수칙의 변경에선 군과 정부 측이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제2연평해전 당시엔 이 부분에서 의문점이 있는데, 군사 전문가 김종대 씨가 당사자를 면담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해군 작전사령관이었던 문정일 전 해군참모총장은 "도대체 왜 그런 기동이 있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작전 교리, 지침, 예규, 교전수칙에서조차도 접적 수역에서 최저 속도(당시 6노트의 속도였다)로 적 함정에 근접 기동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지금은 작고한 정병칠 당시 제2함대 사령관이 한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은 "적 함정과 3000m 거리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는 거다. 그런데도 어째서 제2연평해전 당시엔 불과 150m 앞이라는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 그것도 최저 속도로 기동하게 된 것인지 이 부분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김대중 정부의 "4대 지침"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가 논란거리인데, 일각에선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4대 지침이 그 이후 교전수칙에 영향을 줫고 그 결과 제2연평해전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이다.

김대중 정부의 4대 지침은
첫째, 북방한계선(NLL)을 지켜라.
둘째, 우리가 먼저 발사하지 말라.
셋째, 상대가 발사하면 교전수칙에 따라 격퇴하라.
넷째,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라.
라는 내용으로 제1 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직전(혹은 이후. 신문기사에 따라 직전과 직후가 엇갈리고 있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닐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강조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가 먼저 발사하지 말라" 라는 둘째 지침 때문에 논란이 커졌는데, 일각에선 이것을 선제공격뿐만 아니라 경고사격도 발사라는 범주에 들어가므로 어떤 경우에도 사격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냐라고 보기도 한다. 그 때문에 북한 측 경비정의 포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적의 사정권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적보다 우수한 화력과 사정거리를 갖고도, 불합리하게도 먼저 맞고 대응할 수밖에 없는 지침이 화를 키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4대 지침 역시 보다시피 셋째 항목에 "상대가 발사하면 교전수칙에 따라 격퇴하라" 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제1연평해전 때도 우리 해군이 가용 수단을 쓰는 과정에서 먼저 사격을 해 온 것은 북한 해군이었다. 당시 우리 해군은 사격을 받자마자 곧바로 교전 수칙에 따라 함포 사격으로 격침시켰다.

즉, 기존의 교전규칙(가용 수단을 먼저 사용한 후 그래도 불응 시에는 사격)과 4대 지침은 본질적 차이가 없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의 4대 지침 자체도 단지 원래부터 있었던 교전규칙을 4가지로 요약해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정권 시절 국방장관국정원장을 했던 천용택 의원도, 김대중 대통령의 4대 지침 때문에 교전 규칙과 합참 예규가 바뀌었다라는 일부 비판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교전규칙은 유엔군 사령관이 만드는 것이고, 그 하위의 실천적 개념으로 합참 예규가 있습니다. 우리는 1994년 12월 1일부로 미군으로부터 작전 지휘권을 환수한 후 각 분야에 대한 작전 예규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여 1997년 3월 완성했어요. 이 내용 안에 金대통령이 (99년에) 지시한 4大 수칙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이번 진상 조사 과정에서 「혹시 대통령이 지시하여 합참 예규나 교전 규칙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하여 합참의 모든 자료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그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로 군이 합참 예규나 교전 규칙을 바꿈으로써 우리 군이 작전을 소극적으로 했다는 주장은 무식의 소치입니다."[40]

이 외에도 이준 당시 국방장관 역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같은 취지로 답변 하였다. 링크

다만 그러한 규정이 언제부터 존재했던 간에[41], 위에도 적었지만 1차 연평해전의 승리로 교전수칙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

결국 제2연평해전으로 큰 피해를 겪고 나서야, 합동참모본부는 해상 교전수칙을 간소화해서 고치기로 했다.

그래서 2002년 7월 기존의 '경고방송 → 차단기동 → 경고사격 → 위협사격 → 격파사격'의 5단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차단기동을 삭제하고 경고방송은 경고 통신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후 대청해전에서는 경고사격을 먼저 한 것으로 보아 경우에 따라선 선제 발포를 금지하는 지침 역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5. 교전 이후 양측 해군의 변화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양측 전부 대대적인 해군력의 강화, 남한은 전투함정 위주 건조, 북한은 건조용 전투함선 다양화 및 현대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5.1. 대한민국

교전 수칙을 개선하고, 함대의 구성 또한 바꾸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돼 있던 교전 수칙이 2004년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3단계로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현장 지휘관의 권한을 강화하여 즉각 대응 능력을 높였다.

또한, 한국 해군은 제2연평해전의 전훈을 반영해 기존의 참수리급 고속정에 소총수용 방호 구조물과 윤영하 소령이 저격당한 함교 옆 부분에 방호판을 설치하는 등 소폭 개량하였고, 승조원들에게 지급되던 기존 구형 방탄모케블라 재질의 신형 방탄모로 교체했다. 그리고 국방부는 그 개량안에 부족을 느끼고 보다 대형화되고 강력한 화력과 방호력을 갖추기 위하여 요구 작전 성능을 대폭 올려 신형 고속함 PKX를 개발한다.그리고 이 PKX의 네임쉽인 1번함에는 故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따 윤영하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건조되는 윤영하급 함정에는 차례대로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이름이 붙여졌다.

2009년 9월 23일 진해에 위치한 STX 조선해양에서 윤영하급 유도탄 고속함(PKG-A)과, 동급 함선인 한상국, 조천형함의 진수식을 가졌다. 이후 2010년 9월~10월 해군에 인도되며, 참수리급 고속정 교체 사업에서 윤영하함 포함 24척을 건조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이를 감축해 18척을 조달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윤영하급의 사업추진 이후에도 참수리급들의 순차퇴역으로 인하여 공백 예비단계 수준까지 가자, 차기 고속정 사업을 다시 추진하였는데, 이를 통해 개발된 것이 검독수리급 고속정. 1번함인 검독수리 211호정의 무장은 130mm 유도로켓, 76mm함포 1문, 12.7mm원격사격 통제체계 2문으로 서해 NLL 해역을 침범하는 고속정 및 공기부양정을 정밀타격하기 위해 무장이 향상되었다. 특히 12.7mm 기관포는 제2차 연평해전 당시 외부에서 직접 제어하는 20mm 기관포에서 희생이 컸음을 감안하여 원격으로 표적을 조준 및 사격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북한의 대함미사일과 신형 농어급 고속정에 장착된 대함유도탄을 방어 가능한 MASS 소프트 킬 시스템 을 탑재하여 함선을 보호하게 하였다.

5.2. 북한

대한민국 국방부는 북한의 선제 공격 행위를 '명백한 정전 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 도발'로 규정하고 북한 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국방부의 요구를 무시한 데다 우발적 충돌이라는 통지문을 보내 왔다.

아무튼, 북한에선 684 정장 김영식 대위를 포함한 해당 전투 전사자들을 전원 영웅급으로 추서하였다고 하며, 또한 문서 위의 북한군의 증언에서 언급되는 고폭탄 파편에 대응하고자, 북한 해군은 전투 시 솜으로 만든 파편 방호복을 입도록 교리를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들어서는 윤영하급 등장으로 인한 북한 전투함의 화력 부족을 보강하기 위해 이란으로부터 도입한 7.6cm 주포(윤영하급의 주포와 동일한 모델)를 장착한 신형 전투함을 배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684의 함명을 김영식 영웅호로 개명했다고 하는데, 684는 2004년에 또 다시 NLL을 넘어 도발하려다 우리 해군의 경고 사격을 받고 퇴각한 뒤로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퇴역설도 돌았으나, 2013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6. 제2연평해전이 남긴 문제들

6.1. 사건 당시의 문제

6.1.1. 전사자 보상 처리 문제

일단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군인연금법에 의해 보상을 받는다. 그런데 제2연평해전 당시까지 군인연금법에는 '전사' 규정이 없었다. 오직 공무상 순직만 존재했다. 저 법률이 생긴 지 5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전사'에 대한 별도 처리가 없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당시 전사자에 대해서는 몇 천만 원에 불과한 보상금만 지급되었다.

민간인의 경우 정부의 이와 같은 보상금 지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할 수 있으나 군인의 경우 법률도 아닌 '헌법'이 이를 가로막는다.
헌법 29조 2항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이는 박정희 정권 당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파병 과정에서 8년 간의 전쟁 중에 무려 1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들에 대한 보상금 지급도 문제지만 당시 지주에게 시세의 40~50% 토지보상금 까지 지급할 수 있던 상황으로 갈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저축만으로는 경제개발에 들어가는 택도없어 막대한 외국자본을 들이던 시절인데 여기에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으로 갈 수 있었다. 하여간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헌법 조항 29조 2항에 섭입되었는데 문제는. 헌법은 문제가 된다고 다른 하위 법들처럼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6.29 선언으로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출범할 때 1988년 2월부터 헌법의 해석이 달라진 적은 있어도 개정된 적은 없다. 헌법은 다른 모든 법의 위에 존재하기에 헌법을 무시하는 다른 법의 발의는 불가하다. 법조인들이 개헌을 하면 가장 먼저 개정해야 할 조항으로 꼽는다.

연평해전 보상 시에도 헌법 조항 29조 2항이 문제가 되어 보상액 자체는 3천만 원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연금과 국민 성금이라는 우회를 통해서 약 4억에 이르는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군인연금법 시행령 개정에 착수했다. 기사 개정되기 전인 현행 규정에 따르면 고 윤영하 소령은 5천 601만원,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는 각각 3천 48만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게 된다.

국방부는 국가를 위한 전사자의 공로에 비해 보상금이 지나치게 적다는 지적에 따라, `공무사망"으로 통합돼 있던데서 `적과의 교전에 의한 전사"를 분리, 특별 보상을 할 수 있도록 군인연급법 시행령 등 관련법령을 개정할 방침이다.

2004년 노무현 정권 때 제2연평해전, 동티모르 파병 이후 법률 시행령이 개정되어 지금과 같은 보상 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밑의 “이후” 란을 참고 바람.

6.1.2. 부상자 및 전사자 위문 편지 문제

아이러니하게도 전사한 유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한국의 정치인도, 군관계자도 아닌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미 육군 대장 라포트 장군이었다.[42] 교전 발발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한국인이 보낸 위문 편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SBS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자 그제야 정치인들의 위문 편지가 이어졌는데 자신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보좌관의 이름에 묻어가는 식의 어정쩡한 소속 불명의 편지가 많아 눈총을 샀다.

물론 이 문단에서 설명하는 것은 위문 편지에 관한 문제일 뿐 위문 편지가 아니라 실제로 국군 병원에 방문하여 위로한 정치인은 있었고 후에 장병들에게 상기 언급된 훈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 관람 후 한일정상회담과 간담회를 마치고 귀국한 다음 며칠이 지난 다음 병원에 방문했다.

6.1.3. 군 지휘부의 잘못된 장병 대우 문제

국방부가 승전을 알린다며, 회복되지도 않은 부상자들을 국군수도병원에서 데리고 나와 인터뷰를 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인양한 357호정의 청소에 회복된 생존 장병을 작업원으로 동원했다는 증언이 있다.관련 기사 PTSD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상식적으로 봐도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이 같은 문제점을 이 때 까이고 나서 인지한 해군은, 천안함 피격사건 때는 생존자들과 언론과의 접촉을 차단시키고 오로지 가족 면회만 허락한 채 국군수도병원에 격리하는 등 이들의 회복을 우선시했다.[43] 그런데, 이걸 두고 일부 언론과 대중들은 또 '정부가 숨기는 게 있어서 생존자들과의 만남을 막고 있다!' '언론 앞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철저히 교육시키는 중일 거다!'라는 식의 음모론을 열심히 설파했다(...). 그러나 인양된 배를 생존자들에게 청소시키는 문제는 천안함 때도 고쳐지지 않고 반복된다.

6.1.4. 언론사들의 제2연평해전 보도 등한시

2002 한일 월드컵 특수를 노린, 방송사들의 시청률 경쟁에 의해 교전 소식은 국민들에게 깜짝 소식이 되긴 했지만 큰 이슈를 남기지 못했다. 공중파로 대표되는 방송3사 또한 제2연평해전을 단신으로 처리하고 당일 있었던 3,4위 결정전 중계에 초점을 맞췄다.

확전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국가에서 일어나는 재해 등의 위험 사건을 가장 먼저 관심 있게 다뤄야 할 공중파가 위험한 상황을 알리지 않은 채 시청률에만 치중했다는 건 안일한 행동이었다. 이는 진짜 사나이 해군 편 제2함대 성남함&참수리 고속정 편에서도 고속정 선임 수병이 월드컵 때문에 이 큰 사건이 묻혔다며 안타까워했다.

6.1.5. 대통령, 국무총리 등의 추모식 불참

국무총리나 국방장관의 각료진 또한 당시 전사자들의 영결식에 불참한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비판이 있었으나, 당시 국방부 측의 해명총리실의 해명을 들여다 보면 추모식 주관자인 해군참모총장보다 상위의 직급이 참여하는 것은 관례상으로도, 의전으로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국무총리 쪽은 출국한 대통령의 대리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참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국방부의 해명 자료에 나타난 대로 해군참모총장의 상급자인 국방장관은 사전 조문을 갔으며, 총리를 포함한 다른 상급자들 또한 관례대로 사전 조문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전 조문으로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을 대리로 보냈다. 7월 2일 돌아온 후 국군수도병원에 있는 부상자들을 방문했고, 김 전 대통령은 조문 행사에는 위와 같은 이유로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과거부터 대통령의 추모식 불참이 관례였다고 하더라도 후술하듯 잘못된 관례를 답습하여 이전 정권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은 비판받는 게 마땅하다. 아래 이명박 정부 시기 문단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이명박 정부 때는 추모식이 해군참모총장 주관에서 정부 주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대통령까지 참석하게 변경되었고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변경되어 대우가 개선되었다.

6.1.6. 정부 태도에 대한 문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은 한일 양국의 동시 개최로 개막식은 대한민국이, 폐막식은 일본 측이 담당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채 일정대로 정상회담을 하러 가면서 폐막식에 참가한 일로 김대중 대통령은 비난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다.

정부는 사전에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을 사전 조문에 보냈으며 위에서 설명된 대로 그 동안 전례와 관례대로 처리됐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하기로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기사) 정상회담을 연기하는 것은 국가적 외교적 결례라서 부득이하게 참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폐막식에 참석함으로써 월드컵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비상 상황에서 방문 취소는 어느 국가라도 양해가 가능한 부분이었는데도 김 전 대통령은 불참을 강행했다. 이에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이므로 월드컵 폐막식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지 말고 희생 장병들을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위문해야 했다는 비판이 있다(기사). 그러나 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나중에 군병원에 직접 찾아가서 위로했으며, 영결식에는 대통령이 참여한 전례가 거의 없으므로 부당한 비판이라는 주장도 상존한다.

더해서, 2002 월드컵은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대형 이벤트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만연했고, 이런 행사의 폐막식이라는 무게감을 이유로 김대중 대통령이 예정대로 폐막식에 갔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제2연평해전이 터진 당해 10월 공무원 연금법 개정을 발의해 군인 배상문제를 해결했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국민 모금은 김대중 대통령이 주관한 것이 아니므로 국민 모금의 형식을 빌렸다는 표현은 왜곡의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공무원 연금법은 군인이 적용대상이 아니므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공무원 연금법 제3조 1항의 가.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 그 밖의 법률에 따른 공무원. 다만, 군인과 선거에 의하여 취임하는 공무원은 제외한다.)

별개로, 당일(6월 29일)에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터키 3-4위전이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렸다.[44] 기사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당일 한국 터키 3-4위전 관람을 취소하고 4시간 35분이 지나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일본 방문 취소도 검토되었으나 당시 정부는 승리한 전투이고 추가 도발 징후가 없으며 폐막식 참가를 안 하는 경우 월드컵으로 고조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시켜 대외 신임도가 하락할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한국 터키 3-4위전이 열렸던 날에 일부러 무력 도발을 한 북한의 농간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추측성 보고가 나왔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이 의견에 따랐다는 주장이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의도[45]대로 당하지 않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우리 군이 확고한 안보 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기사가 있는 반면, 당시 고 박동혁 수병을 돌보던 당시 국군수도병원 소속 육군 군의관이었던 이봉기 교수는 교전 당시 축구 관람을 두고 "나라 지키다 젊은이가 죽었는데 국군 통수권자가 축구 본다고 가서 웃고,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주장을 했다. 유가족과 부상병의 가족들도 "아들은 지금 부상을 입어 병원에 누워 있는데, 병실 TV에는 대통령이 일본 가서 박수 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라며 대통령이라면 빨리 개인적으로 병실에 와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인터뷰를 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7월 2일 방일 일정을 마친 후 직접 국군수도병원으로 가서 위문, 쾌유를 기원하였다.# 또한 박 수병이 숨지자 세상을 뜬 것에 대해서 조의를 표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으며, 박 수병을 병장으로 진급시켰고 박 수병을 윤영하 소령과 동급인 충무무공훈장에 추서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방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은 해군장으로 열린 합동 영결식엔 참석하지 않았다.기사 이한동 국무총리는 분향소에 방문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관련 행사에 대통령이 참여하게 된 건 10주기 기념식에 이명박 대통령이 참여한 것이 최초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는 자운대에 있는 국군의무학교에 그의 흉상을 세웠으며기사, 그 이후 이명박 정부 때는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 중 한 척에 박동혁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김대중 정부는 제2연평해전은 "우발적인 사고"라고 일본 정부에게 전했다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발 루머까지 나옴으로써 정부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기사 이것 때문에 대선을 앞뒀던 정계는 엄청나게 난리가 났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은 당시 정부에 대해 "최고 통수권자와 군 수뇌부가 억제력을 동원해 재발을 방지하려는 의지가 없다"다고 비판하였으며 ""김정일 지도부의 개입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대통령과 정부의 인식에 분노를 느낀다."라고도 말했다.기사 그리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상호성 등 원칙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저쪽(북측) 의지에 끌려 다니며 퍼 주기에 급급했다”며 “이럴 경우 무력 도발은 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런 햇볕정책을 더 이상 계속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기사 김영삼 당시 전 대통령도 "서해에서는 교전 사태가 발생했는데 동해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계속한다는 것 또한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처사이며, 김정일 비위를 맞추기 위한 너무나도 비굴한 짓"이라며 당시 김대중 정권을 비판했다.기사

후에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 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김연철-서보혁 옮김, 사계절 펴냄)'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 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

또한 84일 간의 사투로 결국 운명을 달리한 박동혁 수병의 사망 당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네덜란드로 향하는 기내 기자 간담회에서 ASEM 국가들의 대북진출을 요청해 논란이 되었다.기사

북한의 사과에 대한 의견도 엇갈리는데, 그나마 사과 비슷한 거라도 하나 한 것만 봐도 큰 성과 아니냐고 주장하는 측[46]과, 사과라는 표현 자체도 없거니와 소위 "아랫것들의" ‘우발적 충돌’이라면 그에 대한 처벌 의지도 담겨 있지 않고 자신들이 먼저 도발했다는 언급도 없는 유감 통지가 어딜 봐서 사과냐며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47] 실제로 교전 직후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기사 당시 준장 계급으로 777사령부 예하부대장을 지낸 예비역 육군 소장 한철용 장군은 2002년 7월 4일 개최된 한·미 정보부처 장성단의 평가 회의에서 "국방부는 북한의 도발이 ‘우발적이다, 경비정의 단독 행위다. 8전대 이상 북한 상부는 관여 안 했다’고 주장했지만 한미연합사는 ‘북한의 계획적 도발이었다’는 판단을 내려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미군 정보 관계자들은 국방부의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48] 이 같은 보고를 받은 한미연합군사령관 라포트 장군은 다음날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남재준 장군 등 참모들을 대동한 채 국방부 청사를 항의 방문했다.

보상의 경우 순직자 전원 훈장에 추서됐으며기사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되었다. 금전적 보상은, 당시 법 규정에 의해 공무상 사망자로 처리해 최대한 줄 수 있는 보상금(전사자 1인당 3천만 원)과 함께 각계각층에서 걷은 성금 등을 통해 1인당 최대 4억 원을 추가 지급했다. 이후 2002년 연금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2004년 1월 참여정부 때 통과되었다. 그 이후 참여정부는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 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군인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정작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 소급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2015년 아직도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6.2. 사건 발생 이후의 관련 이야기

이 부분 하단의 기록을 보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동안 한국이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상황 때문에 인식과 보상이 미미했다는 것과 더 나아져야 할 여지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에서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는 역사적으로 점차 나아졌다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금전적 보상은 당시 국가배상법에 따라 (군인)연금법을 통해 줬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했지만 유신헌법 때 만들어진 헌법 조항에 근거하는 국가배상법에 있는 이중배상금지 조항 때문에 더 이상의 배상은 힘들었던 바, 국민성금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최종적으로 각 유가족에게 약 3억 5천만 원씩 지급했다.

이걸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국가배상법 2조 1항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원 또는 공무를 위탁받은 사인(이하 "공무원"이라 한다)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에 따라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을 때에는 이 법에 따라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다만,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또는 향토예비군대원이 전투·훈련 등 직무 집행과 관련하여 전사(戰死)·순직(殉職)하거나 공상(公傷)을 입은 경우에 본인이나 그 유족이 다른 법령에 따라 재해보상금·유족연금·상이연금 등의 보상을 지급받을 수 있을 때에는 이 법 및 「민법」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즉 군인이 전사(戰死)·순직(殉職)하거나 공상(公傷)을 입은 경우 별도로 개정된 연금법에 따라서 법정 액수만 받았는데 당시(제2연평해전)에 군인 월급 36개월치가 보상의 전부였다.

이 국가배상법 2조 1항에 대한 근거는 1972년 유신헌법에 추가 된 헌법 조항 29조 2항.
헌법 29조 2항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여기에 국가의 불법 사항[49]에 대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으므로 상관없지 않냐고 할 수 있는데, 대법원의 판결을 보자.

대법원 1996.12.20, 선고, 96다42178, 판결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는 헌법 제29조 제2항에 근거를 둔 규정으로서, 군인, 군무원 등 위 법률 규정에 열거된 자가 전투·훈련 기타 직무집행과 관련하는 등으로 공상을 입은 데 대하여 재해보상금, 유족연금, 상이연금 등 별도의 보상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2중배상의 금지를 위하여 이들의 국가에 대한 국가배상법 또는 민법상의 손해배상청구권 자체를 절대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규정이므로 이들이 직접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이 불합리한 조항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천안함 피격사건 때도 논란이 되었다.

이 조항에 대해서 김성수 연세대학교 법대 교수는 "지금처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가능해진 여건에서는 반드시 삭제돼야 할 조항"이라고 말했다. 기사

이에 헌법을 뜯어 고치는 건 매우 힘들기에, 2002년에 발의된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군인연급법 시행령을 개정한 것이며 이것은 2004년 1월 노무현 정부 때 통과되었다.

상기 헌법 규정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7년 국가배상법을 제정해 직무 수행 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을 경우 국가에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고, 대신 개정된 연금법 법정 액수만 받았는데 당시에 군인 월급 36개월 정도 금액이 보상의 전부였다. 참고로 그 이전엔 전사 장병 유가족이나 부상 장병들은 법이 정하는 보상금을 받고, 지휘관의 잘못된 지시 등에 대해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1971년 대법원은 소위 '이중 배상금지' 조항이라고 불렸던 이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해서 위헌 판결을 내리자[50], 1972년 소위 유신헌법을 만들었을 때 아예 헌법에 이 '이중 배상금지'에 근거가 되는 조항을 삽입해 버렸다. 이 악법은 한 번 고칠 기회가 있었는데 1987년 헌법 개정당시 당시 민주당이 헌법에서 '이중 배상금지'조항의 삭제를 여당이었던 전두환민주정의당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의당이 거부하여 헌법에 남게 된다. 즉, 군장병들을 제대로된 보상을 못하게 만든 악법을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만든건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이며, '이중 배상금지'를 끝까지 고수한건 똑같이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이였다.

이렇게 시궁창이었던 군인들의 보상 문제는 군인들에 대한 인식이 좀 개선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쯤 돼서야 논의되기 시작하여, 제2 연평해전 이후 보상 문제가 대두되자 국민 성금이라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보상한 후, 2002년 연금법 개정안을 발의되어 2004년 1월 참여정부 때 통과되었다. 그 이후 참여정부는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 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신분의 군인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6.2.1. 노무현정부 시기

제2연평해전 추모식은 처음에는 '서해교전'이란 명칭으로 대한민국 해군 주관으로 해군참모총장 및 해군 관계자와 유족만이 참석하던 행사로 열렸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1주기를 앞둔 2003년 6월 25일에 유가족들과 국가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어서 2003년 6월 27일 2함대를 방문하여 안보 공원에 전시된 참수리 357호정을 방문하여 묵념하고 헌화하는 등 추모하고 이후 참수리 357호정에서 다리를 잃었지만 복귀한 이희완 중위[51]에게 위로 전화, 그 외에도 명절마다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고 한상국 상사의 부인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또한 동티모르아프가니스탄에서 순직한 장병들의 유가족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오찬을 가졌다.

이후 2002년 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2004년 1월 참여정부 때 통과되었다. 그 이후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 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간부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이 덕을 후에 천안함 피격 사태 순직자들이 받게 되었다.

한상국 상사의 부인은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계속된다고 주장하며 이민을 갔다.(한 상사의 시신은 찾았다고 한다.) 정작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한상국 상사의 부인을 청와대로 초대했으며, 한상국 상사의 부인은 김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했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는 한 상사를 화랑무공훈장으로 추서했다.기사 사실 한상국 상사 부인 같은 경우 한상국 상사가 하사에서 중사로 제2연평해전 이틀뒤인 7월 1일에 진급하게 되어 있었으나 해전 당일 실종되어 진급이 취소되었다가 결국 중사로 추서됐는데, 남편이 이틀 뒤 중사로 진급하게 되어 있었으니, 상사로 진급해 달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기사 한편 한상국 상사 부인 김씨는 최근에 국가유공자 특별전형으로 9급 공무원에 특채로 합격했다. 기사

한편 유가족 중 한 명은 초청 행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가 경찰로부터 일종의 민간인 사찰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링크

2005년부터는 해군 사관후보생(교수사관)으로 복무한 예비역 해군 장교 출신의 새정치민주연합(당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과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은 서해교전 전사상자 후원회를 만들어, 유가족들을 후원해 왔다. 서해교전 전사상자 후원회는 2007년부터 매년 후원의 밤을 열어왔고, 영화 연평해전의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으며, 중간 제작 보고회도 개최했다. 신기남과 이병석 두 국회의원은 연평해전이 잊힐 때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독려해 왔을 정도로 영화 연평해전 제작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두 정당의 정치적인 성향 차이를 생각하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2005년부터 추모식에 국방장관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심해진 북한의 NLL 침범 도발로 인하여 참수리급 후속함인 PKX 사업에 대하여 확실한 우위를 위해 작전 요구 성능을 올렸으며,[52] 연평해전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네임쉽으로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명을 따 윤영하급으로 명하게 되었다. 이후 취역할 함도 당시 교전 시 전사자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6.2.2. 이명박정부 시기

한편 이민 사기를 당해 불법체류자로 고된 일을 하고 있던 한편 한상국 상사 부인 김씨는 2008년 한국으로 귀국했다. 불법체류자로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나, "65세인 친정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 마음이 불안하고 이곳 생활이 벅찬 데다 가족들도 너무 보고 싶고,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식을 정부 주관으로 격상키로 한 것도 귀국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기사

2010년에는 연평해전 전사자에 대한 소급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되었으나 형평성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연평해전 특별법은 2010년 5월 24일 국방부에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 대해서도, 전사자 예우를 하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사자 예우를 하라며 특별법 제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방부 예비역 정책 발전 TF팀이 제2연평해전 유가족 측에 공문을 보내어 ''제2연평해전 희생자들에게 전사자 예우를 해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TF팀은 공문에서 ''각종 대침투 작전과 국지전, 북한 도발에 대한 아군 전사자에 대한 형평성 침해 논란이 예상돼 법적 안정성 등을 위해 소급 보상이 불가하다."고 말했는데, 이걸 한 마디로 바꿔 말하자면, 정부에서 전사자 예우를 해 주겠다고 해 놓고 6개월이 지난 뒤 태도를 바꾼 것이다. 즉,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전사자 대우를 소급해 주면, 이전에 받지 못했던 유사한 유공자 및 유가족들의 소급 요구가 쇄도할 것이고 형평성의 논란에 있기 때문이다.

앞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전상자들이 작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아니라는 명목 하에 전상자에 포함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급 적용 시 이들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법안의 발의라는 것이다.

이에 故 박동혁 수병의 아버지는 "대통령이 지시한 것을 국방부가 못해 주겠다는 것은 직무유기이고, 대통령은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 이라고 주장했다. 또, "명백한 전사 장병들에게 예우를 못해 준다는데 누가 군에 충성을 하고 목숨을 바치겠냐"며, "다른 유족들과 협의해 국방부에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말했다.

2012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모식 행사에 참가했다. 본래는 이번에도 국무총리국방장관만이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정부가 주관하는 마지막 기념식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참석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 기념 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6.2.3. 박근혜정부 시기

  • 2014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12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 2015년 6월 24일 연평해전 영화가 개봉되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야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故 한상국 상사에 대한 상사 추서를 검토한다고 국방부가 밝혔다.기사
  • 2015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13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 2015년 7월 10일에 한상국 상사의 전사일이 교전 당일에서 시신이 발견/인양된 날로 변경되어 중사 진급이 예정대로 진행된 걸로 처리, 상사로 1계급 특진했다. 이로 인해 한상국 상사의 유가족들은 상사 전사자의 유가족들이 받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기사
  • 2015년 9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연평해전 전사자 6명의 유골이 연평해전 전사자 합동 묘소에 이장되었다.
  • 2016년 6월 14일 안규백 의원이 군인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제2연평해전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소급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해당 법안이 발의되자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에서는 2016년 8월 22일 '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을 심재철 의원이 대표발의하였다.

6.2.4. 문재인정부 시기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2017년 12월 29일 국회를 통과하여, 2018년 1월 16일 공포되어, 7월 17일 시행된다.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군인 6명의 유족에 대한 보상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이다.

기사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 29일 추모식에는 건강 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6월 6일 현충일 행사에서 연평해전 전사자 유족에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간 팜플렛을 배포해 논란이 되었다.

2018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예우가 늦은 것에 대해 사과했으며 전사자 유족들이 추가 보상을 받도록 의결하였다.

7.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안보영화 "그날"[53]이 제2연평해전을 다루고 있다. 해군 신병들과 부사관후보생들은 기군단에서 한번쯤은 보게 되며, 일부 예비군 훈련장 등 육공군 부대에서도 전투 장면만 편집해 만든 짧은 영상을 틀어주기도 한다. 다만, 특유의 싼티가 풀풀 나는 실로 파멸적인 퀄리티를 자랑한다.
  • 다만 2017년 6월 25일 현 전쟁기념관에서 상영하는 연평해전 애니를 올렸다. 보기 퀄리티가 상당하다.
  • 2015년 6월 24일, 즉 전투 발생 후 13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여 (주)로제타시네마에서 제작한 김학순 감독의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8. 기타

  • 이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끝까지 싸우며 살아남은 박경수 상사는 이후에도 계속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딸의 출산을 계기로[54] 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정 근무를 계속 했다. 그런데 하필 재배치된 근무지가 천안함이었고,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인하여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기사
  • 이희완 중령은 종래의 군인사법에 따르면 더 이상 현역으로 복무할 수 없는 장애를 지녔으나, 해전 며칠 전 군인사법 일부가 개정되어 계속 군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장애가 장애이니만큼 승선은 불가능해졌고 그 대신 해양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해군교육사령부 리더십 교관으로 보직이 변경되어 현재 중령으로 현역 복무중이다. 2010년에 수상 시 대령까지 최단 기간 내에 진급이 사실상 보장되는 위국헌신상을 수상했는데, 현행법상 함정 승조 TO를 여럿 거치지 않으면 진급이 불가능한 항해 장교의 특성으로 인해 참전 용사가 진급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해군에서 배려한 것이다.
  • 위에서 언급된 해경 863경비함 격침 사건 및 여러 해전에서 어민들을 보호하다가 순직하신 해경들을 추모하는 충혼비는 당시 박정희 정부의 지원이 아니라 나중에 해경 주관으로 1986년에 세워졌으며, 성역화 및 조경 건립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기에 이루어졌다.
  • 2016년 05월 02일에 우정사업본부에서 제2연평해전 승전 14주년 기념 엽서가 발행되었다. 해당 엽서가 발행 당일에 전량 매진된 우체국이 한둘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2017년 6월 23일 연평해전에 참전했던 군인이 절도범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기사 더욱 안타까운 점은 같은날 다른 장교는 잠실 구장에서 시구를 하며 대비를 나타냈다. 기사 다만 후속 기사가 떠서 참전자가 아니라고...
  • 한 때 연평해전 추모뱃지, 스티커등을 판매했다. 지금은 물병과 개선된 스티커라고.링크
    전사자로 유일하게 자녀가 있었던 조천형중사의 딸은 만16살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아직도 아빠를 많이 그리워 한다고 한다. 비슷하게 전사한 천안함의 전사자들의 자녀도 갓난아기였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고 중학생 이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거나 고등학생이 될만큼 이들도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 여러모로 행실에 문제가 많아 거의 공공의 적 수준이던 윤서인이, 난데없이 2018년에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 본부회 회원 일부와 친목질을 하다 그 해의 플래툰 컨벤션에 추모 본부회 부스에 참가하겠다고 나섰다가 수많은 밀덕들에게 욕을 먹고, 결국 추모 본부회 측이 참가 취소와 별도의 장소에서 별개의 행사를 열겠다고 하는 이 벌어졌다. 적반하장으로 윤서인은 제2연평해전 추모 활동에 별다른 기여도 하지 않은 주제에 추모 본부회의 자신과 친분 있는 이들을 선동, 자신의 참가를 반대한 밀덕들을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종북주의자 등으로 몰아붙이며 SNS 상에서 각종 테러를 벌였다. 정작, 이 때 이렇게 매도당한 밀덕들은 대부분 제2연평해전 추모 기념품을 열성적으로 사들이고 현충원에 참배를 다니는 등 제2연평해전 추모 본부회 입장에선 매우 강력한 후원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추모 본부회도 결국 태극기 집회 나가는 틀딱 모임이었냐며 추모 활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도 생겼다.

[1] 당시 소령이었으며 현재는 중령.[2] 당시 대위, 추서 계급은 소령.[3] 영화에서는 '최윤정 대위'라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4] 당시 중위였으며 현재는 중령. 당시 북한군의 선제 발포로 인해 전사한 윤영하 대위를 대신하여 357 대원들을 지휘하였다.[5] NLL을 넘어서 남한 영해로 침범한 북한을 저지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다.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발표도 역시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다.[6]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8전대 산하 7편대 소속이다. S•O-1급 PCF(중소형 고속초계정) 당시 무장은 ZIS-S-53 85mm 전차포, M-1939 37mm 2연장 고사포, ZPU-4 14.5mm 4연장 고사총이다.[7]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8전대 5편대 소속이다. 상하이-2급 PCS(소형 고속경비정), 참수리보다 크기가 조금 더 작다. 그다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합세보단 인양선 역할을 해 주었다고 뉴스에서 언급했다.[8] 편대는 3척 단위이나, 평시 초계 때는 기함을 포함 2척이 작전하고 1척은 예비로 빠져 어선 대피 지도 등을 맡는다.[9] 아직도 조선인민군 육군이 후방에서 굴리고 있는 T-34-85 전차에서 주포만 떼어다 개량하고, 해군용 포탑을 따로 제작하여 경비정에 단 것이다. 함포와 전차포의 포탑 유압 구동 체계가 세부적인 설계 등에서 T-34-85 전차와는 다르기 때문에 포만 개량하여 떼어다 붙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포탑 자체를 함포로 개조하여 장착한 모습이 포착되었다.[10] 전사하기 전 "엎드려!"와 "쏘란 말이야...!"라고 명령했다고 한 수병이 2002년 뉴스에서 증언했다.[11] 해군에서는 배의 부지휘관을 부함장, 부정장 등이 아닌 부장이라고 한다. 줄임말이 아니라 공식 용어이다.[12] 시크릿파일 서해전쟁의 출처에 따르면 인양하면서 수거된 357호정의 포탄은 탑재량과 일치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뉴스와 제2연평해전 참전자들 중 이희완 중령이나 다른 언론보도 및 탄약 검사 및 수거에 참여한 증언에 따르면 357호정은 장전된 포탄들을 거의 다 소모했거나 남아 있는 실탄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각 포대에 장전된 1132발 중 4cm 보포스 중구경 단장기관포 6발, Sea-Vulcan 674발 도합 680발을 발사했다. 즉 반 이상 발사했단 얘기다. 실제로 사격은 12분에서 20여분 가량 진행되었다고 승조원 한정길 중사에 의해 밝혀졌다.[13] 사실 해군 수병 및 부사관, 장교들은 평소 주어진 직책과 병과뿐만 아니라 각자 해상 전투 및 교전 혹은 비상 상황 발생 시 각자가 부여받은 특수 직별이 있는데, 고 서후원 중사는 전투 상황시 정해진 특수 직별은 함정 갑판 62포 포방패에 거치된 M60 기관총 담당 부사수로, 병기부사관이었던 것.[14] 해군에선 개인 화기를 소병기라 부른다.[15] 해군에선 수병들의 경우 계급이 앞에 오게 부르는 경우가 아니면 "XXX 병장"이나 "000 일병님"으로 부르지 않고 "XXX 수병", "000 수병님" 등으로 부른다. 이름 없이 대명사로 부를 때도 계급이 아니라 "거기 가는 수병, 이름이 뭔가?" 하는 식이다.[16] 사실 고 서후원 중사가 전사한 62포 거치대의 좌측 우상단에 생긴 관통공은 3cm 정도로, 이 정도 크기의 관통공을 낼 수 있는 물건은 사실 78식 저격보총밖에 없다. 정장 윤영하 소령을 저격하고 추가 목표 물색 중 하필이면 철판이 굉장히 얇단 점을 포착하고 그를 포착한 저격수에 의해 철판 관통사격을 당한 것. 가슴에는 3cm짜리 구멍과 등에는 10cm 크기의 관통공이 있었던 것을 보아 저격수가 유력하다.[17] 실제로 뉴스나 회고록 등의 보도 내용에선 전투 초반 2~3분쯤에 등산곶 684호정의 포탑이 전부 파괴되고 장전 탄약 등이 폭발하거나 불량 상태가 되어 쓸 수 없게 되고, 7호 발사관과 73식 대대기관총, 88식 보총과 저격용 모신나강 같은 소병기 공격만 주고받았다고 한다.[18] SSU 대원들에 의하면, 이때 자신의 손을 조타키에 끈으로 묶어놔서 시신을 빼내는데 꽤 애먹었다고 한다.[19] 이후 인양 작업을 통해 인양되었고 복원 작업을 거쳐 평택의 해군 제2함대사령부 내부의 안보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전쟁기념관 야외 전시관에도 있는데, 이건 1:1 크기의 복제품이다. 우크라이나에 고철로 팔았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현재도 평택 2함대를 방문하면 참수리 357정과 천안함을 볼 수 있다. 특정 행사때 참수리 357정을 청소하러 가는 각각의 편대에게 애도를...[20] 소련이 보포스 40mm 포를 기반으로 설계한 것으로, 구경이 40mm보다 조금 작다.[21] 이준(李俊) 국방장관이 26일 국회 국방위에 보고한 자료.[22] 안타깝게도 포르투갈전 당시에 승리를 축하하는 뉴스 인터뷰에 참석했었다. MBC 뉴스에도 그의 생전 인터뷰가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이 장면들은 모두 영화 연평해전에서 나왔다.)[23] 2015년 7월 10일 상사 추서, 전사일은 2002년 8월 9일로 수정되었다.[24] 수병 출신으로, 진해기지사령부 의장병으로 근무하다 신분전환했다. 아내와도 수병 시절에 만났다고 한다.[25] 158기라고 나와있는 정보는 잘못된 정보이며 실제 조 중사는 1998년 8월 해군부후 173기로 임관하였다.[26] 북한의 의료 체계가 상당히 낙후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자연스럽다.[27]기사에 나온 사람과 동일 인물이다.[28] 정치장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공산권에선 시인이나 소설가라고 해서 군사 문제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다 볼 수 없다.[29] 북한 해군에선 수병을 해병이라 부른다.[30] 북한에서는 정장을 함장으로 통일하여 부른다.[31] 나진급은 사실상 북한 해군의 소형 경비정 전대의 유일한 기함이자 거의 유일한 크리박, 남포급을 제외하면 함대에서 활동중인 대형함이기에 사실상 소형 호위구축함 취급받는다.[32] 사실상 북한에선 215t급 중형 경비정도 경비 취급인 듯하다. 참고로 대한민국 해군의 함정 구별 기준은 배수량 500톤을 기준으로 하기에 해당 배수량급의 함정은 정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물론 예외적으로 500톤 미만의 함정도 함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33] 상술한 정장을 함장으로 부르는 것도 고려하면 북한군은 함정 구분이 없고 함으로 통일한 듯 하다[34] 북한 어선단 상당수는 해군이 직접 관리하는 데다가 가끔 승조원들 중 정찰국 요원들이 섞여 타기도 한다.[35]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데 오해가 없도록 먼저 확실히 말해 두지만, 교전규칙의 내용을 떠나서 1953년 정전협정을 맺은 이후로 오늘날까지도 "공식적"으로는 한국군은 육해공 어느 곳에서도 북한군에게 아무 이유 없이 혹은 경고 없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할 수도 없고 그러한 허가도 나지 않는 상황이다. 이것을 명심해두자.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그 어떤 정권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나라는 제2, 제3의 한국 전쟁을 여러 번 반복했을 것이다.[36] 그냥 우리 영토, 우리 영해, 우리 영공에서 북한군이 눈에 보이기만 해도 경고도 없이 바로 쏴 버릴 수만 있다면, 상대방이 나에게 총을 쐈다면 나는 항공기로 폭격을 할수 있다면 참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러한 교전수칙은 지상과 바다, 그리고 하늘에서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적용이 되고는 있지만 위에서 말한 수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37] 큰 차이는 없으나 자료에 따라 '경고방송 → 차단기동 → 경고사격 → 위협사격 → 격파사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38] 사실 제2연평해전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쭉 이러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는 제2연평해전 당시로만 국한될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39] 1970년 국군 방송선 피랍 사건 당시 신문 기사 내용이다. 눈앞에서 대한민국 해군 방송선을 북한해군이 잡아가고 있는데도 해군, 공군도 공격을 하지 못한 사건이다. 신문속의 "UN군사령부에 속해 있는 작전 지휘권"과 "교전규칙" 을 주목하자. 제2연평해전 이전인 1970년에도 이랬다.[40] 월간조선 2002년 8월호[41] 이 논란이 되는 선제 사격 금지 조항은 위에서도 본 것처럼 제1 연평해전 이전, 더 나아가 94년 평시 작전 지휘권 환수 이전부터 계속 존재했다. 일례로 1970년 국군 방송선 납치 사건 당시에도 우리 공군기들은 같은 이유로 인해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뉴스 검색을 해 보아도 그 수많은 북한의 NLL 침범 과정 중 우리 해군이 북한의 경비정 등 전투함에 대해 남하를 저지할 목적으로 선제 사격한 경우 또한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신원 불상(=간첩선)의 선박에 대해 지상에 있는 초소가 선제 경고 사격하거나 간첩선 내지 반잠수정 등이 북으로 도망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 경고 사격한 사례는 있다. 작전 예규, 지침 등은 기밀이므로 자세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그 이전부터 NLL을 통해 남하하는 북한 수상전투함정에 대해 남하 저지를 목적으로 선제 경고 사격을 실시한 사례가 없다.[42]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국주둔 미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고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편지)[43] 그래서 이 당시 나온 기사들을 보면 '아무개 장병이 부모 아무개 씨를 통해 ~라고 전했다'는 식으로 쓰여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기자들이 궁여지책으로 가족들을 취재했기 때문.[44] 그 이전에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8강 스페인전을 대북 심리전에 썼다고 했으며 한국 경기를 제외하고 이례적으로 월드컵 경기를 북한 주민들에게 방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북한이 3-4강전을 노렸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게 한다.[45] 북한의 월드컵 훼방으로 인해 한국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투자 불확실성으로 인한 경제 문제 유발 가능 / 국가 원수 간 약속을 깸 -> 외교 결례 등[46] 이를 주장하는 측은, 천안함 피격사건 때는 유감 통지는커녕 사과 비슷한 것도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또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서부전서 포격 사건에서 북한의 유감표명에 대해 당시 새누리당(현재 자유당)측은 이를 사과라고 인정한 바가 있다. 유감이라는 표현이 사과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근거.[47] 그러나 분단 이후 북한의 숱한 대남도발과 관련하여 명백한 사과 표명은 한 차례도 없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때도 북한의 사과는 명시적으로 '사과'란 표현을 쓰지 않고 '유감'이란 표현을 썼다. 그리고 전자는 미국이 사과라고 인정했고 후자 또한 박근혜 정부는 사과를 받았다고 인정했다. 전자의 경우 3차대전의 시발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후자의 경우 목함지뢰 사용 자체는 문제였지만 인명사고 자체는 고의로 보기 힘든 면도 있었다고 하지만 출입구에 지뢰를 심었지만 인명사고는 노리지 않았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먼저 남한 영토에 포격을 때린건 빼도박도 못하는 도발이다. 그리고 판문점 도끼만행은 중국과 소련도 북한을 도와줄 생각을 못했다.[48] 미국의 격앙된 반응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고려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9.11 테러가 발생한 지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미국인들의 테러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조지 W. 부시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으며 다음 해 1월 29일에는 이란, 이라크,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한 '악의 축' 발언을 하는 등 냉전 이후 초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제2연평해전은 '악의 축' 발언 이후 고작 4개월 지난 시점에 북한이 벌인 무력 도발이었으니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와중에 '테러와의 전쟁'과는 거리가 먼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는 미국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딱히 미국이 한국 국방을 우리 정부보다 신경 써 줘서 그런 게 아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교전상황까지 간 사건에 그런 의도가 없는 타국의 반응보다 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비판을 면할 수 없다.[49] 이는 함선 노후나 초동 대응 부실, 지휘관의 과실 등 국가의 잘못들을 포함한다.[50] 이는 후에 사법 파동이라는 대한민국 초유의 사태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유신헌법을 통해서 사법부 날려버리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박탈해 버렸다. 이게 그렇게 시작된게 유명한 사법파동이다.[51] 불편한 몸임에도 해군에 남기로 결정, 현재 중령으로 복무 중이다.[52] 이 이유로 인하여 윤영하급은 대한민국 해군에 있어서 진보적인 기술 영입도 많았으며, 이로 인한 사업적인 차질이 나타났고 체적도 상승하여 기존 예상보다 가격도 오르게 되었다.[53] 링크된 영상 전체가 안보영화 그날은 아니고, 그날의 전투 장면 부분만 잘라온 영상이다. 그날은 여기자가 편집장에게 제2연평해전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참전자들의 유가족들을 찾아보고 행적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는 걸로 시작된다.[54] 함정과 육상 근무자의 수당과 진급 점수 차이는 매우 크다. 평생 독신으로 살 사람이면 장기 선발만 통과하면 그냥 편한 육상만 전전해도 별 문제 없지만,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빠른 승진으로 인한 보다 높은 급여와 함정 승조로 인한 수당 등을 포기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