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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ch frage euch: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noch vorstellen können?
제군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하는가?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3년 2월 18일[1] 총력전 연설 中 #
總力戰 / Total War(영어) / Totaler Krieg(독일어) 제군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하는가?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3년 2월 18일[1] 총력전 연설 中 #
국가가 가용한 모든 수단들을 총동원하여 싸우는 전쟁. 가용 가능한 군 전력을 대부분 투입한 전면전(全面戰)이 더 확대된 개념으로, 전체전쟁(全體戰爭), 국가총력전이라고도 부른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국민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전쟁이다.
현대적 의미의 총력전은 미국 남북 전쟁에서부터 나타났다. 이후의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소전쟁에서 총력전이 극에 달했으나 현대에는 다시 제한전의 비율이 높아졌다.
반대의 개념으로는 제한전(limited war) 또는 국지전이 있다.
2. 유래
전략 사상으로서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가 있다.총력전이라는 말을 가장 처음으로 쓴 사람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군의 동부전선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덴도르프(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 육군 원수이다. 1차대전 종전 후인 1935년에 저술한 《총력전론(Der Totale Krieg)》이란 저서의 제목에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썼다.
3. 성립 과정
총력전이란 국가의 모든 국력을 전쟁에 투입하는 방식의 전쟁이다. 총력전이 가능하려면 국가 시스템의 모든 힘을 온전히 전쟁에 사용했는가가 중요하며 국가의 소멸 여부, 전 국민의 전쟁 참여 등은 부차적인 요소이다.3.1. 근대 이전
근대 이전의 총력전은 사실 원시 부족 사회에서 비교적 더 잘 나타난다. 부족 사회에서는 시스템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것이 추장 개인의 역량으로도 가능했으며, 이런 영향으로 인해 원시적 부족간의 전쟁은 그 규모는 작을지라도 정말 부족 공동체 전원의 역량이 총동원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 국가 체계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는, 한 공동체의 완전한 물리적인 멸절도 너무나 손쉽게 일어났다. 이는 당연하지만 원시적 부족 사회는 전체 인구수가 적었기에 행정력의 부담이 적은 편이라 가능한 일이었다.국가 단위로 접어들면 행정력의 발전에 비해 인구 수가 압도적으로 늘어나 해당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지도자라 해도 국가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없게 된다. 관료제가 발달하기 이전의 국가들 가운데에는 국가의 지도자라 해도 하위 지방들에 거의 관여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봉건제가 그러한 대표적인 체제이다. 또한 오늘날 국가들과는 달리 통치 지역에 몇 명이나 사는지 인구조사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들이 흔했다.
한편 이 시기에도 국가 이하의 단위에서는 계투와 같이 총력전과 유사한 자력구제가 종종 나타났다. 중근세 사회의 촌락 공동체에서 공동체간의 분쟁이 발생해도 당시 행정력의 한계로 공권력의 개입이 없거나 너무 늦어 직접 해결하는 식이다. 이때는 위 원시 부족과 마찬가지로 인원 수가 좀 더 적으니 개인의 역량으로 총동원이 가능하다. 촌장과 장로 등 공동체 지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어선이라든가 사냥도구 등 평소에 촌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제력마저 전부 분쟁에 쏟아붓곤 했다.
총력전에서 패배한 국가가 소멸 위기에 빠지는 것처럼 전근대 시대에 전쟁에서 패배하면 국가가 소멸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는 총력전과 별 상관이 없고,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통치력의 부족 영향이 더 크다. 전근대 국가들 중에는 중앙과 하위 지역과의 연결이 오로지 지도자와의 혈연뿐인 경우도 흔했다.[2] 이런 경우 지도자가 사망하면 중앙과 하위 지역의 연결 고리는 그대로 소멸하고 국가가 아예 멸망하고 만다. 국가로서의 응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쟁 패배로 인한 구심력 상실을 극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총력전을 펼칠 능력이 없는 국가는 전쟁으로 더 쉽게 멸망한다.[3] 그렇지 않고 국가/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이 더 강한 곳이라면 좀 더 침략 세력에 투쟁하고 민중 대다수가 전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행될 수도 있다. 또한 침략 세력이 매우 이질적이라면 국가가 지령을 내리지 않아도 민중 스스로가 저항하기 마련이므로 병력의 규모가 매우 컸다.[4] 그러나 이는 국가가 계획적으로 해당 국민들의 역량을 모두 동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총력전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특히 유럽 지역에서는 총력전이 나타나기 이전에 세계의 타 지역과 비교해보아도 극단적인 형태의 제한전이 나타났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성립된 봉건제 질서의 중세 유럽의 소왕국과 공국들은 상대 국가를 절멸하기에는 국가적인 역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굳이 절멸시키려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피지배층의 민족 의식이 옅어 누가 지배층이 되든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겨서 땅만 먹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 만큼 별로 저항하지 않을 사람들을 죽이는 일은 피하고자 했다.[5] 기독교라는 문화를 공유하는 것 역시 전쟁의 규칙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고대라면 민간인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려고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만 중세 이후 기독교 신자는 교리에 따라 서로를 노예로 삼아서 팔 수 없었다.[6][7] 그밖에 서로에게 자비도 베풀어야 하는 등 전쟁이었음에도 많은 규칙들을 지켜야 했다. 규칙을 무시할 수는 있었으나 강력한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의 권력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이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8] 때문에 중세 유럽의 전쟁은 군주와 귀족과 직업군인들의 전쟁이었지 농민이나 상인, 피지배층의 전쟁은 아니었다.
초기적인 국가간 총력전은 군현제로 대표되는 초기의 관료제를 제일 먼저 확립한 중국에서 등장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전국시대에 원시적인 형태의 총력전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이 시기 중국의 고대국가들은 타 지역보다 국력을 조직화하여 투사하는데 우월함을 보였고[9] 이들 사이에 국력을 총동원한 대규모 전쟁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총력전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장평대전으로 정확한 수치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경제활동이 가능한 성인 남성 대부분을 동원하였다가 참패하고 막대한 인적자원을 상실한 조나라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외에도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전쟁이 총력전의 양상이었다.(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수양제는 견고한 수비력을 갖춘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통일제국 수나라가 지닌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미증유의 대군을 동원해[10] 요동성 등 주 방어체계에 군력을 쏟아부어 총력전 양상의 단기결전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었으나, 예상외로 강건했던 고구려의 방위와 을지문덕과 같은 명지휘관의 활약에 막혀 엄청난 손실을 보고 패퇴하였다. 이후 두 차례 더 지속된 원정으로 수나라의 재정은 마침내 파탄났으며, 이로 인해 반란군을 막을 예비 병력과 황도의 상비군을 운영할 비용조차 모두 탕진되어 나라는 망하고 수양제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그 엄청난 병력을 상대했던 고구려 또한 수백만 인구에서 무려 30만 병력을 동원하는 등[11] 사실상 성인 청장년층 인구를 거의 모조리 갈아넣는 총력전 수행 양상을 보였다. 이런 전쟁수행을 단기간도 아닌 수십년 동안 중원의 통일국가인 수나라, 당나라를 연속으로 상대하며 지속해야 했으니, 국력의 한계를 완전히 초과한 전쟁수행이었다. 결국 국력이 고갈되며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심지어 미륵사나 황룡사 등 총력전을 치르는 와중에도 거대 사찰을 지어 백성을 단결시키는 다분히 근대국가적인 모습을 똑똑히 보였다.[12]
그러나 동아시아 왕조들은 병력을 통제하는 국가 시스템은 우수했을지 몰라도 이를 감당할 만한 생산력은 턱없이 모자랐다.[13]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거대한 중원이라 해도 간신히 자기자신을 부양할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을 모아서 통제까진 가능할지 몰라도 기간이 길어지면 생산력 고갈로 국가가 고꾸러지는 상황도 벌어졌다.[14][15] 특히나 대다수 군인은 농부였으므로 농번기를 넘기는 장기 병력 동원에는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3.2. 근대
[제1조]
지금부터 적군이 공화국의 영토에서 물러날 때까지 모든 프랑스인은 군 복무를 위해 영구 징집된다. 젊은이는 전쟁터로 갈 것이다. 기혼남성은 무기를 제조하고 식량을 운반하며, 부녀자들은 막사와 제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간호를 맡을 것이며, 아이들은 낡은 옷감으로 붕대를 만들고 노인들은 광장에 모여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군주에 대한 증오심을 북돋고 공화국의 단결을 가르칠 것이다.
프랑스 국민의회가 공포한 총동원령(levée en masse), 1793년 8월 23일
지금부터 적군이 공화국의 영토에서 물러날 때까지 모든 프랑스인은 군 복무를 위해 영구 징집된다. 젊은이는 전쟁터로 갈 것이다. 기혼남성은 무기를 제조하고 식량을 운반하며, 부녀자들은 막사와 제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간호를 맡을 것이며, 아이들은 낡은 옷감으로 붕대를 만들고 노인들은 광장에 모여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군주에 대한 증오심을 북돋고 공화국의 단결을 가르칠 것이다.
프랑스 국민의회가 공포한 총동원령(levée en masse), 1793년 8월 23일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군사력이 1793년에 나타났다.[16][17] 전쟁이 느닷없이 다시 백성이 해야 할 일이 되었으며, 그것도 스스로를 모두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3천만 백성의 일이 되었다."[18]
클라우제비츠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국민국가의 출현으로 전쟁의 규모는 전례없이 커졌다. 여기에 철도나 통신기술 등의 발달로 대규모 군대 운용술이 정립되는 19세기 후반에 진정한 의미의 총력전이 출현했다 볼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
근래에 들어와서는 19세기의 전쟁들에서 총력전의 양상을 찾아보려는 시도와 논의가 분분하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1803년~1815년)을 '최초의 현대판 총력전'으로 규정 해야한다는 주장[19]도 있고 상기한 이유들로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견해든 간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거치면서 전쟁의 양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는 데 이견은 없다. 달리 말하여 적어도 나폴레옹 전쟁을 총력전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최초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대적인 의미의 총력전은 미국의 남북 전쟁(1861년~1865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북부와 남부 모두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전쟁기간 4년동안 각각 누적 210만, 100만이라는 가공할 병력을 동원했고 산업체계는 전쟁물자 생산을 위하여 재편되었으며, 대규모의 인력과 물자를 철도를 통해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신속히 전선으로 배치했다. 이 때문에 한쪽이 큰 승리를 거두더라도 패한 쪽에서 금세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는 원래도 국력 면에서 현저히 열세였던 남부의 전쟁 수행 역량이 소진되고 나서야 결착이 지어졌다. 단순히 적의 병력을 소진하는 것을 넘어 적의 생산 기반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도 이 시기에 본격화되었다.[20]
유럽의 다른 강대국들은 1차 세계대전을 겪기 전까지는 남북전쟁의 이러한 양상을 주목하지 않았다. 물론 남북전쟁의 엄청난 인명피해와 가공할 동원규모를 접하고서는 경악하기는 했지만 유럽 열강들에게 미국의 이미지는 2류 촌놈에 불과했고 남북전쟁에서 장기간에 걸쳐 국력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인 것이 그저 '아메리카 식민지 출신 애들의 군사기술이 열등해서 짧은 시간에 결판을 내는 데 실패해서'라고 애써 무시하며 장기간의 전쟁은 매우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3.3. 제1, 2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거포들을 쉴새없이 생산하는 군수공장의 모습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캐나다 자치령의 군수공장에서 8인치 곡사포 고폭탄을 생산하는 과정을 담은 모습. |
거대한 군수공장의 소화기 생산 공정 |
두 번째 변화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이 애써 눈을 돌리고 무시한 남북 전쟁을 제외하면 이 때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총력전의 양상이 나타난다. 당대 열강 참전국은 모두 전쟁기간 내내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했다. 단일 전투에서 사상자가 수십만이 나오는 데도 그 손실들이 재깍 보충되는 것은 과거 전쟁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결정적 승전에도 불구하고 상대 국가 역시 빠르게 손실을 보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대규모 전투 좀 이긴다고 상대 국가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 역시 참전 당사국들의 국력이 소진될 때까지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초반부는 오히려 1차 대전식 총력전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시기였으며, 상술했듯 유럽 열강들이 남북전쟁의 미국을 두고 "군사기술이 부족하여 단기간에 결판을 내는 데 실패해서"라고 말했던 것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는 점을 검증해 보였다. 2차 대전에서 빛을 발한 신병기인 항공모함과 전차는 단기간에 상대의 종심에 무력을 대량으로 투사할 수 있는 무기였고,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6주 만에 멸망시키는 등[21]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대방의 총력전 체제 가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기동전을 보여주었다.[22]
그러나 이 나치 독일 특유의 기동전은 영국의 대공망과 소련의 광대한 영토 앞에 무릎을 꿇었고, 결국 1942년을 넘기며 총력전은 속도전과 무관하게 결국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소전쟁은 그야말로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총력전이 가장 극렬하게 진행된, 그리고 그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전쟁이라고 평가받는다. 특히 독소전쟁은 총력전을 초월한 절멸전쟁[23]의 형태를 띄었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전쟁은 세계사 전체로도 극히 드물다.[24] 2차 대전 이후로는 핵무기의 등장으로 총력전 개념이 희석되는 추세여서 일부에서는 독소전쟁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총력전으로서는 마지막이라고 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유럽에 비하여 총력전의 성향이 적었다. 그러나 유럽에 비하면 약했다는 뜻이지 미국도 세계대전, 특히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국민에게 일부 물자에 한해서나마 배급제를 실시하고 각종 자재를 군수산업에만 넣는 등 충분히 총력전을 치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42년 2월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동차 왕국 미국도 민수용 차량, 특히 민수용 승용차의 생산을 제한했다. 당시 고무 같은 경우 미국은 태반을 동남아시아에서 수입[25]했기 때문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한 뒤에는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나서 각종 중고 타이어, 고무호스, 심지어 고무장화까지 공출하도록 호소도 했다.[26] 대전 말기쯤엔 국가 총생산의 70 ~ 90%를 군비로 쥐어짜던 독일이나 일본 같은 추축국보다야 낮았지만, 미국 역시 전 국가 총생산의 40% 이상을 군비로 지출할 정도로 나름대로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27]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집에 있는 숟가락, 밥그릇까지 뺏어갈 정도로 국가의 생산력의 대부분을 전시 물자 생산에 쏟아부은 총력전을 결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과의 생산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고 이어 찾아오는 여러가지 실책들이 겹쳐 결국 파멸의 길을 걷고 만다.
4. 근대의 특성
4.1. 국민개병제의 등장
근대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은 큰 변화를 겪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징병제를 실시해서 군대의 규모를 폭발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는 국가가 더 이상 왕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으로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전쟁이 왕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의 전쟁이 되었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국민군이 나타났고,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보급하고 무기를 쥐어주며 훈련시키는 일 또한 중대한 산업적 과제가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후반에 프로이센 왕국에서 마침내 징병과 예비군을 결합하는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했다.여기에도 3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프로이센 군대가 당시 유럽 최강으로 꼽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격파한 이후로 영국[28]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프로이센의 징병제를 일종의 모범 사례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군대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고, 이러한 군대를 무장시키며 먹이고 입히며 재우고 치료하며 매장하는 일 또한 산업적인 과업이 되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두 국가 모두 징병제를 운용했지만, 타이틀만 징병제로 같을 뿐 실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성인 남성을 국가의 힘으로 붙잡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한 징병제를 운용했다. 하지만 징병제에서 성인 남자 전원이 징집 대상이라고 해도 정말로 전원을 군대에 보내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그만한 규모의 군대를 감당할 수도 없으므로, 실제로 군대에 있는 인원은 징집 대상 중 소수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데파르트망, 즉 징집 대상 지역의 대상 남성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정해진 숫자만큼 뽑힌 사람이 군대에 가고 일정한 기간마다 제비뽑기를 해서 교대하는 방식의 징병제를 운용했다. 웃긴 건 합법적인 병역기피가 가능했다는 건데 대한민국 국군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병역을 회피하는 상류층들이 프랑스군에서는 그냥 돈 주고 다른 사람 보내서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상류층이 저 모양이니 중산층들도 당연히 같은 짓을 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사회낙오자와 빈민층들의 군대가 되어 버렸지만 역설적으로 장기복무를 하면서 군사훈련을 수시로 받다 보니 병력과 전투력은 유지가 됐다.[29]
반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비하면 인구가 많이 적었기 때문에[30] 같은 방식으로 소수의 인원만으로 군대를 충원하면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고, 그렇다고 다수를 징집하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예비군을 두었다. 즉 프로이센식 징병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 말고도 다수의 예비군을 훈련시키는 것 또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프랑스식으로 가되 인구 규모에 맞춰서 적은 규모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전쟁이 발발할 시 짧은 기간 동안 전면징집제를 실시하여 그렇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빠진 상류층, 중산층들을 모조리 군대로 끌어다 배치하여 대규모 병력을 운용했다.
이 방식은 장기복무를 하는 프랑스군에 비교할 때 숙련도는 확실히 떨어지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장교단을 최대한 우수한 수준으로 운용했고[31] 또한 사회낙오자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에 비해 질적 수준도 높았으므로 바보짓만 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열세나 전사상자로 인한 부대 사기 저하를 감당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그리 쉽게 무너진 것도 숙련도만 높지 전선에서 밀리면 사회낙오자들로 구성되어 전의가 떨어지는 군대가 그냥 패주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4.2. 기술과 국가 체제의 발달
흔히 총력전이라면 그 나라 인구 전원이 전쟁에 나선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총력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오히려 군대 자체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이다. 농업/공업 생산력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지원하는 것이 바로 총력전이다.과학기술과 근대적인 사회조직 등의 발달로 전쟁을 위해 국가 전체의 산업 구조를 개편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 전체의 산업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 막대하게 커진 대규모의 군대와 세분화된 군내 조직들이 각기 어떤 물자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아야 할뿐더러, 향후 전황에 따라 어떤 물자가 어떤 비율로 소모될지도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전체에서 어떤 물자를 만드는지뿐만 아니라 다른 물자를 만들도록 바꾸면 어떤 물품이 나오며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일지, 새로운 물품을 개발하고 만들려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맡기고 기존의 물자 생산은 어떤 식으로 재조정할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량의 물자를 관리하고 제때 분배하며 소모량과 필요량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총력전이 필요해도 이렇게 복잡한 일을 진행할 능력이 없을 때는 당연히 총력전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근대적 관료조직의 발달 및 통신 수단의 발달 등으로 이러한 관리가 가능해졌고, 철도를 위시한 교통 수단의 발달 덕분에 수많은 물자와 인원을 필요한 곳에 분배할 수 있었다. 산업화 이후 비대해진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립된 관료제의 등장도 총력전이 나타나게 해주었다. 당장 미군이 병력을 44.5배 증강시키는 게 가능했던 건 그만한 병력을 유지, 관리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미국과는 다르지만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에 수백만 대군의 활용이 가능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 그런 시스템이 없었으나 미국의 지원으로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 경제개발과 국민교육에 열을 올린 것도 바로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인적자원과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때까지 모든 행정 작업은 컴퓨터 없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국방부는 전세계에 흩어진 대규모 병력의 군수보급체계를 관리하기 위해 다수의 경제학자, 통계학, 수학 전문가, 인간 컴퓨터들을 고용했다. 또한 무기대여법 계획에 따른 대외원조도 큰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쌓은 노하우가 경영학에서 생산관리의 출발로 여겨진다. 당시 이 분야에 종사한 다수의 전문가와 장교들은 전후 미국의 대기업에 들어가서 경영효율성을 끌어올린다. 전산 작업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컴퓨터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다뤘나 신기할 정도. 물론 이건 교육받은 사람을 마구 부어넣을 수 있는 선진국 미국이니까 가능했던 거고, 2차대전 이후에는 군대규모 자체는 그대로지만 필요한 물자와 행정소요가 더욱 폭증하면서 결국 컴퓨터를 도입하게 된다. 애초에 컴퓨터가 실용화된 계기 자체가 트랜지스터의 도입과 베트남 전쟁, 격화된 냉전으로 인한 엄청난 개량 소요였다. 지금의 미군은 이게 더 심각해서 병력은 좀 줄었지만 물자관리를 위한 행정소요는 오히려 급증했다. 당장 개별 병사에게 투자되는 금액만 베트남전 시절의 10배 이상으로 불어난 판이다.
또한 민족주의 등으로 국민들이 이러한 동원을 사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들이 갖춰진 것 또한 중요한 요소다.
4.3. 달라진 전쟁 양상
위의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전쟁은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전근대에도 전쟁이 몇 년 단위로 장기화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엔 교전 빈도 자체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애초에 인력과 물자의 동원 및 생산력이 미약하던 시절이라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회전에서 크게 패하면 당시엔 이 손실을 회복하는데 한참 걸리는 관계[32]로 그대로 전쟁도 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근현대의 관료제, 국민개병제, 철도, 산업혁명은 전근대 시대와 비교도 안 되는 동원 및 생산력을 부여해줬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회전에서 패해서 수십만의 인력과 수천 대의 중장비를 상실하고도 인력과 물자를 금세 보충해버리기 일쑤였고 결국 승전을 위해선 상대국의 인력, 물자, 산업력 등의 역량 자체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1차 세계대전에서는 슐리펜 계획을 통해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내려던 독일군의 시도가 마른 전투에서 좌절된 뒤 참호전의 양상으로 전선이 고착했고, 몇 주면 끝나리라 예상한 전쟁이 몇 년을 끌게 되었다. 문제는 각국이 채택한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시에 군대의 규모가 평상시에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팽창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의 미국 육군(육군항공대 포함)은 1939년 9월, 2차대전 개전 시점에서 18만 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1945년 시점에선 800만 명이 넘는 규모로 급팽창했다. 병력 증가수치를 퍼센트로 환산하면 6년 동안 4450%가 증가한 것이다.[33]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쟁이 빨리 끝나면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이고, 나폴레옹 전쟁[34]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그 효과를 입증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수 년 단위로 길어지자 이대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운데, 그렇다고 상대방도 징병제로 대군을 동원한 상황에서 병력 규모를 축소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렸다.[35]
전쟁에서 소모하는 물자의 양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전투가 회전 양상일 때는 포격도 길어야 몇 시간 정도였으나, 여기서 적이 무너지면 그걸로 게임 끝. 그러나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고착된 전선에서 아군의 생존률은 확실히 높아졌지만 적군을 제압하기도 훨씬 어려워졌다. 이 상황에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몇 달에서 몇 년씩 계속해서 포탄과 총알을 쏟아부어야 했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수준의 탄약을 소모하기 시작했다.[36] 또한 대포나 전함 등의 무기들도 갈수록 거대하고 복잡해져서 더 높은 수준의 산업적 능력을 요구했다. 당장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대포는 직사포 위주에 포탄도 후장식이 이제 막 보급되고 75밀리 같은 소구경포가 일반적인 단계였지만 1차대전 때 이미 현재 사용하는 105mm 포 정도는 일반적인 무기체계가 되었고 독일군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대구경 곡사포를 개발해야 했다. 물론 이게 다 돈인 만큼 결국 프랑스, 독일 등 전쟁 각국은 국가경제 자체를 전쟁에 총투입해야만 했다. 즉 국가경제의 구조 자체가 전쟁 위주로 재편되어버린 것이다.
5. 대비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총력전을 부르짖으면서도 총력전의 개념을 제대로 못 이해하고 "전 국민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 수준으로만 생각해서 오히려 스스로 전쟁 수행 능력을 막장으로 떨어뜨렸는데, 숙련공을 죄다 병사로 차출해 전선으로 내보내어 무기 생산에 치명적인 지장을 부르는 삽질을 했다.[37] 이런 숙련공들이 대본영의 한심한 삽질로 전선에 끌려나가자 오각형 너트 같은 해괴한 물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부품으로 만든 물건들 성능이 어땠느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한 물자를 아낀답시고 국민복이나 몸뻬를 입기를 강요하거나, 위문 편지를 보내지 말거나, 생산 중인 옷도 아닌 이미 만든 옷에서 소매를 짧게 자르라고 하는 등[38] 뜻 모를 명령으로 자국민만 신나게 괴롭히다가 비참하게 패망했다.[39] 그리고 공업지대와 주거지대를 뒤섞은 주먹구구식 도시계획을 하다가 공업 능력을 마비시킬 전략 폭격의 일환으로 도쿄 대공습을 얻어맞았다. 자원이고 뭐고 다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놋그릇까지 공출해가기 시작한 1944년 일본의 국가 총생산에서 군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80%에 근접할 정도였지만, 그 정도로도 미국 군비지출의 20%에 불과했다.이미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실시하기 직전, 총력전을 벌이면 그 결과가 어떤지를 알기 위해 젊은 인재들을 모아서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다. 당연히 이 연구원들이 얻은 결과는 '미국과 총력전 상태에 들어가면 일본은 반드시 패배'였다.
반면에 유럽의 군대는 전쟁 중 자동화 시설을 늘리고 숙련공을 철저하게 보호했으며, 심지어 숙련공이 모자라자 전선의 병력에서 숙련공으로 키울 만한 인력을 일부 뽑아다 공장에 보내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참호전에 필요한 단검의 수요가 급증하자 전선에 복무 중인 모든 칼 제조공을 제대 시켜 단검 제작 공장으로 보내기도 했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지, 이미 막장 상태였던 대전 최후기의 추축국은 숙련공이고 뭐고 다 전선으로 집어 던졌다.[40]
현대 대한민국도 총력전에 대비하여 국가가 지정한 기술자나 과학자 등 인재들은 징집하지 않고 대신 지정한 공장[41]에서 일하게 하며, 이공계생들은 산업기능요원 특례 등을 통해 군 복무를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42]
6. 영향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 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43]
커티스 르메이
국가의 모든 역량이 전쟁에 투입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반 시설을 파괴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군인이나 군기지가 아닌 시설, 지역(산업시설, 공업단지 등) 심지어는 심리적 효과를 위해 진짜 아무 상관 없는 민간주택까지도 공격했다. 따라서 민간인 사상자가 군인의 사상자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요즘 전면전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전쟁 때만 해도 민간인 사상자 수가 전체 사상자 중 50%를 넘었으며 베트남전 같은 경우에는 민간인의 사상자 수가 약 90% 이상이었다고 한다.[44]커티스 르메이
민간인들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는 고대건 중세건 어느 시대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군대라는 무력을 가진 집단이 적국 민간인의 물자 또는 민간인 그 자체를 마주할 때면 적에 대한 복수심이나 적개심 등의 이유로 일부러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파괴도 감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의도적으로 민간인이 사는 도시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우선 군수공장부터 파괴하고, 군수공장의 복구를 막기 위해 관련 산업을 초토화하고, 산업 초토화를 막으려는 민간인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도시에도 폭격을 가하는 식이다. 항공기 기술의 발달로 대형 폭격기가 개발되어 전략 폭격이라는 개념도 생겨났다.
국가의 온 국력이 전쟁에 소진됨에 따라서 전쟁의 피해도 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승전국(영국, 프랑스, 소련), 패전국(독일, 일본), 한국 전쟁 뒤의 대한민국, 북한처럼 말 그대로 '이겨도 초토화, 지면 끝장이나 다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력전의 끔찍함을 겪은 나라들이 전쟁을 꺼리거나, 반대로 단기간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혹은 대리전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현재 북한군이 전시에 활용할 것으로 예상하는 제파식 전술 등도 총력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르게 전쟁 목표를 이루고자 나왔다.[45]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요크셔의 피닉스 탄약공장에서 18 파운더포탄을 생산하는 여성 노동자들. |
전쟁이 이 단계까지 접어들면 여성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참전 국가들이 자국의 성인 여성들을 공장에서 탄약 갈고 전차를 만들게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여성 인력을 방공포병 및 비전투요원으로 활용한 적이 있고, 미국은 WASP라는 여성 조종사들로 이루어진 비행기 배달부대를 운영했다. 소련은 참전국 중 유일하게 여군을 공식적으로 최전선에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저격수 및 직접적인 육탄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전차병이나 파일럿으로도 훈련해 배치했다.[46] 서양에서 여성 인권이 본격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한 계기를 이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로도 본다. 여자들도 죄다 나와서 전쟁을 위해 일하는데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것.
총력전 상황에서는 국가의 모든 재원을 다 군수시설로 몰아넣어 온 국민이 배급제를 비롯한 그야말로 철저한 내핍 생활에 빠져든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감자를 뺀 모든 식량을 배급제로 분배했고, 이는 다른 국가들도 비슷했다. 의외지만 쇼미더머니로 유명한 미국도 이 당시 베이컨 등을 구운 뒤 나오는 기름을 모아다가 가져다 쓰거나 금속 재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미국 역시 당시 식량들에 대해 판매 제한을 걸고 일부 주에서는 소금이나 설탕에 대해서 배급제를 시행했다.
7. 현대의 쇠락
냉전을 거쳐 현대로 오면서 과거 세계대전 때처럼 수 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수백만 병력과 장비가 맞붙는 형태의 총력전은 점점 드물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20세기를 마지막으로 발발한 총력전으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있다. 그 외에 규모는 작지만 양국의 군사력을 대규모로 동원한 전면전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 등이 있다.
미국이 공격하거나 개입한 수많은 전쟁, 분쟁들은 전쟁의 한 쪽 당사자인 미국이 국력을 총동원하지 않으며, 미국의 개입 의도도 상대국 정권의 재편이지, 상대국의 멸망이 아니기 때문에 총력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물론 미국과 상대하는 국가들로선 자신의 총력을 동원한 것이긴 하겠지만.
러시아의 남오세티야 전쟁, 돈바스 전쟁도 상대방은 사실상 총력을 동원했지만 러시아 측이 국력을 총동원하진 않았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말하는 총력전의 개념에 부합하진 않는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은 아르메니아는 총동원을 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부분동원령을 내렸기 때문에 총력전이라 보기 어렵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선 국가의 존망이 달린 우크라이나는 총동원령을 내린 반면[47], 러시아는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동원령을 선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9월 21일, 부분동원령을 내리면서 서서히 총력전의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
7.1. 무기와 산업의 고도화
기본적으로 전쟁의 양상이 저강도 분쟁이 아닌 이상 속전속결로 끝나게 된 것도 있지만, 세계대전 당시보다 인류의 생산력이 훨씬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48] 현대의 최첨단 무기들이 요구하는 생산비용, 시간과 기술적 인플레이션의 증가폭은 인류 생산력의 증가폭을 압도해 버렸다.현대 세계는 극단적인 국제적 분업화가 이루어져 있기에 어떤 나라도 순수 국산으로 첨단 장비들을 생산하기 어려우며 강제로 국산화 비율을 올리면 생산비용이 미친 듯이 상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엔 어지간한 열강이나 중진국이라면 대부분의 무기를 라이센스 생산하건 자체 설계건 아무튼 국내에서 대부분의 부품을 조달하여 생산 가능했지만 오늘날의 최첨단 무기들은 미국조차도 상당한 비율의 외산 수입 부품이 들어가 있으며 100% 국산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결국 외국과의 무역이 지속되어야만 무기를 만들 수 있는데 급박한 상황에 상선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거니와 당연히 전면전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가 자국산 전투기를 개발하기 위해 효율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돈을 엄청나게 때려박는 것도 최소한 필수 부품이라도 국산화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다.[49] 특히 이는 20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무기가 정밀한 전자부품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안 그래도 무기들이 요구하는 기술적 난이도와 비용, 생산시간 등은 폭증했는데 전시에 이러한 최첨단 공장들을 생산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은 과거 세계대전 당시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예시를 들자면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 공장 같은 곳은 개전과 동시에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 목표가 될 것이다. 2차 대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공장들은 적군의 전략폭격에 얻어맞아도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몇 주 안에는 공장을 다시 복구하고 생산절차를 재개할 수 있었다.[50] 그러나 오늘날의 먼지 한 톨에도 난리나는 극히 민감한 초정밀 공정이 요구되는 공장들은 약간의 물리적 파손에도 모든 라인이 정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복구에만 짧아도 수 개월에서 길면 년 단위가 걸린다. 그 동안에 정밀 전자 부품의 공급이 중단되는 건 당연하고 조 단위의 복구비용은 덤이다.[51]
이렇게 최신 무기들이 요구하는 부품들을 생산해야 할 최첨단 공장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시간은 과거 대전기의 공장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폭증했는데, 반대로 적국이 그 공장들을 공격하는 것은 전략폭격기들을 적국 영공에 일일이 밀어넣어야 하던 과거와 달리 미사일이라는 장거리 투사 무기의 등장으로 인하여 훨씬 손쉬워졌다. 대규모 미사일 전력을 보유한 강대국 간의 총력전이라면 이러한 중요한 고부가가치 공장들은 개전하자마자 미사일에 얻어맞고 남아나질 않을 가능성이 크다. 몇 발 쏘고 마는 저강도 분쟁도 아니고 전면전, 총력전 상황에서 요격으로 모두 막아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북한군조차도 2차 한국전쟁이 터질 경우 한국의 주요 공단에 치명적인 미사일 공격을 가해올 수 있다. 설령 북한군이 핵탄두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삼성 반도체 공단처럼 한국을 먹여살리는 주요 공단들이 무사하기를 바라기는 매우 어렵다.
오늘날의 병기는 비용 증가의 추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에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비용 증가가 상대적으로 덜한 육상병기를 제외하고 항공병기나 해상병기는 최신 기술의 투입이 바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상승으로 돌아오는지라 천하의 미국도 최신 무기로는 기존 무기의 생산량을 1:1로 대체하기 어려워 기존 세대 무기를 다시 새롭게 도입하는가 하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겠다고 우방국들에 무기 세일즈를 하고 다니고, F-22와 F-35의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 F-22는 차기전투기 배치와 함께 퇴역시키고 F-15와 F-16을 한번 더 개량하여 사용하며, 전면전보다는 현시전력을 이용한 무력시위로 대체하고 국지전은 무인기와 블랙 옵스에 의존하는 중이다. 대군이 필요하더라도 미군을 투입하기보다는 현지 병력을 육성하고, 그마저도 수십만으로 늘면 부담이 커져서 미국이 전적으로 도와줘야 할 정도로 현지 국가가 막장이면 과감하게 발을 빼버리고 있다.[52]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테러와의 전쟁 등을 보면 현대전의 수행 비용은 굳이 총력전이 아닌 제한적인 전쟁만으로도 조금만 장기화되면 초강대국의 사회와 경제를 휘청이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현대에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 이유로 총력전이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설령 벌어지더라도 과거처럼 수 년에 걸쳐 수많은 무기와 인력을 전시경제하에 생산하고 갈아넣으며 싸우기보다는 단기간에 미리 비축해뒀던 전력을 소모하고, 여기서 한 쪽의 우위로 기울면 협상하는 형태의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대에도 전면전이 장기화될수는 있지만 이런 경우엔 십중팔구 보병과 포격 위주의 물량전이라는, 최첨단 현대전과는 거리가 먼 구닥다리 전쟁 스타일로의 회귀가 불가피하며 이렇게 구닥다리 스타일로 싸우더라도 인구 대비 병력의 수는 오히려 적어졌다. 전시경제를 구축하더라도 최첨단 무기들을 무한정 양산하고 밀어넣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병기의 생산력도 제한되고, 군인 또한 전체 국민들이 아닌 용병이나 직업군인과 같은 소수의 훈련된 전문 군인으로 한정되는 전근대 시대의 모습으로 전력의 생산성이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생산 시스템이 극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은 21세기 내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오히려 근대 ~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이 무기의 가격과 사회의 생산력이 가장 불균형했던 기형적인 시대가 아니었냐는 의견도 있다. 즉 세계대전식 총력전은 인류사의 당연한 귀결이 아닌 예외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
7.1.1. 여전히 쓰이는 재래식 병기
위의 이유로 오늘날의 전쟁들에서는 현대에 개발된 최첨단 무기보다는 양산이 편한 과거의 재래식 무기가 더 보편적으로 쓰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냉전 시대부터 이미 항공 장비나 해상 장비 위주로 이러한 한계점이 보이기 시작하였기에 당시 소련에서는 서방과의 3차 세계대전을 대비한 계획들에서 최첨단 병기들은 어차피 개전 초기에 눈 녹듯이 소모되고 총력전 와중에 느긋하게 다시 만들어 보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설계를 지극히 단순화하여 총력전 와중에도 대량 양산할 수 있는 병기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조차 어렵다고 판단되자 구형 전차를 기름칠해서 쌓아놓았는데 그게 합쳐서 냉전 말기에는 5만 대에 달했던 것. 즉 구형부터 신형까지 반 세기 가까이 만든 전차를 합쳐봐야 5만 대인 것이다. 그나마도 현대전에 쓸 수 있는 전차는 그 중에 많아봐야 2만 대가 안 된다.
세계 유일의 냉전형 전면전 전장환경에 노출된 한국군과 북한군 또한 마찬가지이다. 북한군은 전시라고 뭘 더 뽑아낼 돈도 없지만, 한국군도 전차를 재생산 하기 전에 이미 북한과의 전쟁이 끝나있을 가능성이 높다보니 M48의 가치가 이미 0이 된 지 한참 됐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전차조차 개전 직후 재생산이 어려워 군이 손해를 봐가며 억지로 운용하고 있었다.[53]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이러한 현대 총력전의 한계점이 현실화된 전쟁이라 볼 수 있는데 현대 국가 간 전면전이 과거 세계대전처럼 수 년 단위로 장기화될 경우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흔히 상상하던 총력전의 모습과는 매우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줬다. 두 나라는 산유국이고 오랜 기간 외화를 축적해왔으며 나름 지역강국으로서 근대화도 어느 정도 이룬 상태였다.[54] 즉 총력전 수행이 가능한 국가였는데도 양국의 주력 병기들은 결정적인 상황에만 대비한 채 중요한 작전에만 투입되었고 대부분의 전쟁 기간은 지지부진한 참호전으로 한정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8년이나 전쟁을 했는데 전쟁 초기 1~2년 및 전쟁 말기인 1988년을 제외하면 양측 모두 이렇다할 공세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전쟁도 장기화 되자 전통적인 포병을 동원한 대규모 면제압 포격 등 과거 전쟁 스타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첨단 장비 역시 생각보다 많이 투입되지 못하고 재래식 장비들이 주로 활약하고 있다.
7.2. 인적 자원의 변화
산업의 고도화뿐 아니라 인적 자원 역시 고도화되었다.이런 병기를 운용하려면 병력 역시 학식과 기술을 충분히 축적했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전투태세가 갖춰진 고급 인재여야 하고, 이에 필요한 자본과 시간, 관리, 전투 중 부상과 전사에 대한 대처, 보상도 또한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대전의 군인들은 소수 정예의 고급 인재들 위주로 채워지게 되었다. 물론 전면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군대도 보유하고 있지만 당장 며칠 내로 투입가능한 정예병력은 어떤 국가건 적으면 수천, 많아도 수만을 넘어가지 않는다.[55] 그러다 보니 과거처럼 함부로 병력을 낭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고도화하다 보니 사회의 인재 수요도 커지게 되었다. 이 인력의 대부분은 어느 사회건 국가 경제에 중요한 생산동력이 되는 20~30대 남성들이다.[56] 그 때문에 더더욱 인재들을 병력으로 소모하기 힘들어진 것. 자칫하면 한 방에 국력을 크게 소진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국가를 지탱할 인재들까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전쟁에서 이겨도 나라에 청년들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일해서 경제에 기여하는 것 이상으로, 결혼해서 자녀를 가져야 그 국가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마저도 현대전을 수행할 역량을 갖춘 중진국 이상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만성적인 저출산과 고령화에 시달리는 중이니 청년층 인구를 전쟁에서 소모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훨씬 커졌다. 세계대전기만 해도 평균적인 출산율도 훨씬 높았고 인구 피라미드도 젊은층이 매우 많았지만, 이젠 전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후진국이 아닌 이상 그렇지 못하다.
7.3. 핵무기의 등장
기존의 총력전은 한쪽의 전력이 훨씬 앞선다면, 최소한 최전선은 몰라도 후방의 민간 도시 지역에 대한 손실은 크게 심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과 국민여론이 충분히 호전적이라면 전쟁을 고려해볼만한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자체가 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참상을 겪은 독일이 일으킨 전쟁이다. 그래도 2차 세계대전부터는 1차 세계대전과 다르게 항공기술과 폭격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전략폭격에 의하여 후방의 도시들도 공격당하기 시작하였지만, 당시의 전략폭격은 상대국 국민과 정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크게 감소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중론이다.그러나 핵무기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존의 재래식 폭탄보다 너무나 강력한 이 무기는 상호확증파괴나 아니면 상호확증파괴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국의 대도시나 수도 한둘은 확실하게 궤멸시킬 수 있다. 덕분에 일단 총력전 단계에 들어서서 핵무기가 사용되는 순간부터 전쟁에서 이기던 지던 당사국들은 엄청난 손해를 볼 게 뻔하게 되었다. 즉 완전히 국운을 건 전면전이 되면 한쪽이 피해를 크게 보면서라도 이기는 그림이 아니라 그냥 둘 다 죽는 그림만 나오게 되었으니 이전과 달리 정치인이던 국민여론이던 총력전을 감수하더라도 무언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대규모 전면전이라도 터지면 득볼 거 하나없이 다 같이 망한다라는 공포에 의한 전쟁억지로서 실제로도 냉전 내내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선제공격할 의사가 내심 전혀 없었음에도 서로 블러핑을 치며 저쪽이 먼저 핵전쟁을 일으키며 침공해올거라는 공포에 상시 휩싸여 있었다.[57]
설령 교전 당사국간의 상호간 묵인으로 재래식 전쟁만으로 상대방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러한 묵인이 계속 지켜질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렵다. 당연히 핵무기로 공멸을 시도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또한 핵무기가 없는 국가라 해도 국제적인 수준의 긴장관계나 분쟁관계에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핵을 보유한 강대국들과의 동맹이나 이해관계로 엮여 있고, 핵우산 같은 개념까지 존재하는데다가 핵의 실전사용 자체가 어마어마한 정치적, 외교적 파급력을 낳는 큰 부담이 가는 결정이기 때문에 핵 보유국이라 하더라도 핵 미보유국을 마음놓고 때리는 건 불가능하다. 자국령에 침입한 적군에게 전술핵과 같은 제한적 핵공격을 가하는 것 역시 전략핵에 비해서는 부담이 덜할지 몰라도 전면 핵전쟁으로 가는 계단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핵무기가 비록 인류에게 막대한 파괴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최소한 강대국간의 대규모 전면전을 막아준 것도 핵무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8. 그밖의 의미
스포츠에서도 총력전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보통 토너먼트 경기, 포스트시즌이나 순위결정전 등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서 모든 주전급 선수를 전부 총동원하여 치르는 경기를 총력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히 다전제를 하는 플레이오프 상황에서 선수들의 체력안배보다 바로 코앞의 경기를 우선할 경우 총력전이란 단어가 많이 언급된다.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동물인 개미도 전쟁을 하는데 총력전도 자주 벌인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총력전은 우스울 정도로 격렬하다. 말 그대로 모든 걸 쏟아부어서 다른 집단의 개미와 싸운다. 인간들의 전쟁에서는 인구 대비 직접적으로 싸우는 군인 비율이 적지만 개미들은 여왕개미와 수개미를 제외하고는 예외는 없으며 싸우는 능력이 없는 일개미들은 육탄돌격으로 입구를 막거나 상대 병정개미에게 달라붙어서 움직임을 막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인간들의 전쟁에선 항복이나 강화 같은 전쟁을 끝낼 수단이 있지만, 개미들의 전쟁에선 항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지는 순간 여왕개미부터 일개미까지 성충들은 모조리 학살 당하고 알부터 번데기까지는 먹어버리거나 가져와서 부화시킨 다음 일개미 계급으로 편입시킨다.
9. 여담
토탈 워 시리즈는 게임의 제목을 '총력전'으로 지은 예이다. 제목과는 달리 고대, 중세 전투도 다루는 등 총력전에 해당하는 전쟁만을 주제로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현대의 총력전보단 전근대의 회전(會戰)을 다루고 있다. 다만 실제 역사와 달리 세력의 모든 경제영역을 전쟁에 소모할 수 있는 시스템이므로 중국 삼국시대나 로마 시대에도 나폴레옹식 총력전을 수행할 수 있다. 제목이 토탈 워임에도 의외로 아직 총력전의 시작인 남북전쟁을 다루는 시리즈는 아직 없다.에이스 컴뱃 시리즈 특유의 가상 세계 Strangereal은 특이한 기술이 많이 존재하지만, 3~5년에 한번 꼴로 국가간 총력전 급 전쟁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지옥이다.
10. 같이 보기
[1] 이 연설은 괴벨스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한 연설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당시의 나치는 지속되는 패전을 숨겨왔는데, 이 연설을 기점으로부터 패전을 의도적으로 입맛에 맞게 알림으로서 역으로 독일 국민들의 사기심을 돋우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연설은 1943년 2월 18일에 나치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에 패배한 이후 베를린의 슈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 스포츠 궁전)에서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이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했던 연설로, 괴벨스의 대표적 프로파간다 연설 중 하나이다.[2] 때문에 전쟁에서 장군과 같은 지도자의 암살은 전근대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현대라면 관료제를 기반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다른 인물로 대체하면 그만이지만, 전근대 국가에서는 주요 인맥을 갖춘 지도자가 암살당하면 대체할 인물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유발 하라리 - 대담한 작전).[3] 예컨대 독소전쟁 개전 당시 나치 독일은 "소련은 낡은 집과 같아서 문을 걷어차면 바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개전 4개월 만에 모스크바까지 당도하는 데 성공한다. 나치 독일의 말대로 소련이 정말 '낡은 집'이었다면 그 상태에서 소련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몇 차례의 패배로 무너질 만큼 결속력이 없는 '낡은 집'이 아니었고, 총력전을 수행할 능력이 충분했기에 4년의 기나긴 총력전 끝에 독일을 밀어낼 수 있었다.[4] 가령 지배 계층 사이의 제한전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중세 유럽 역시 전혀 다른 외세와의 전쟁이라면 지배층은 격렬히 저항했고 민간인들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에서도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운 동유럽은 총력전에 가까웠고, 서로의 병력이 10만을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예컨대 백년전쟁의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잉글랜드군 7~8천과 프랑스군 2~3만 정도가 동원되었으나 같은 시기 동유럽의 15년 전쟁에서는 기독교 국가 연합군 10만 명이 오스만군 18만 명과 싸웠다. 이는 동양의 전쟁들과 비교해도 규모 면에서 뒤지지 않는 수준이였고, 민간인들도 총동원되었다. 물론 항복해도 살아남는 경우는 거의 없이 루마니아군에 붙잡힌 오스만 포로들은 대개 꼬챙이에 꿰여서 죽거나 산 채로 난도질 당했고, 오스만군도 보복으로 기독교군 포로를 산채로 박피를 하거나 사지를 찢으며 죽이고 시체를 전시해놓는 등 서로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었다.[5] 여기에는 당시 유럽이 땅에 비해 사람이 모자란 영향도 있었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쌀의 막대한 인구 부양력 덕에 역사적으로 내내 인구가 넘쳐났고 이 때문에 학살이 비교적 흔했다. 내전이기에 각각의 세력이 비교적 동질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삼국시대에도 서주대학살이 일어났을 정도이다.[6] 단, 잉글랜드가 아일랜드 신부를 고급 지식인 노예로 매매하는 등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로마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을 한 지역이었으나, 노예 제도가 기승을 부렸던 곳이기도 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인 성 패트릭도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무척 오래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대략 서기 8세기 무렵에 점차 줄어들다가,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를 침입하면서 다시 노예 제도를 되살렸다. 바이킹들이 서기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쇠퇴하자, 노예들은 바이킹에서 토착 아일랜드인으로 대체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군대를 보내 아일랜드를 공격했던 1171년에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출처: 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저/ 김홍옥 역/ 에코리브르/ 141~142, 337쪽[7] 노예로 팔 수는 없었지만 고위층에 한하여 이들을 붙잡아 몸값을 요구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주로 1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몸값으로 요구했다고 한다.#[8] 이러한 통제가 가능했던 것은 종교적 위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 국가 행정을 교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세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난 시기인 프랑스 앙시앵 레짐 후반부에도 프랑스라는 국가의 행정의 상당 부분을 가톨릭 교회가 담당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기존에 교회가 담당하던 행정과 교육 등의 부분을 국가가 가져갔고, 이런 이유로 프랑스식 세속주의인 라이시테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가톨릭과 다소 미묘한 관계이다.[9] 때문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진나라를 가리켜 강력한 근대 국가의 원형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10]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나라가 동원한 병력은 (그 수치가 기록 그대로라면) 1300년 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에서 제일 많은 병력이 동원된 사례이다.[11] 비교를 위해서 보충하면 인구 5000만 명의 현대 대한민국의 평시 병력이 50만 명이다(...). 물론 전시이니 예비군을 모두 소집한 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 대한민국 예비군은 약 275만 명(2018년)이다.[12] 이처럼 동아시아 국가는 상대적으로 발달한 국가 체제를 통해 국력의 대부분을 통제할 수 있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농본주의를 토대로 공산주의에 가까운 경제를 종종 구축하곤 했고, 이를 "유교 공산주의"(Confucian Communism)라고 부를 때도 있다. (단, 대부분의 용례는 아시아식 공산주의 독재국가인 중국, 북한을 묘사하는 데 주로 쓰인다.) 민본주의 역시 이를 토대로 한 이념이다.[13] 물론 중국 왕조의 월등한 국가 시스템은 통일된 중원 평야의 압도적인 식량 생산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산업화 이후의 생산력과 비견할 수는 없다.[14] 대표적인 케이스가 100만 대군을 동원했다가 통일왕조가 파탄에 이른 여수전쟁이고, 천하통일 다 끝났다고 설레발치며 90만 대군을 동원했다가 헛소문에 모랄빵 나서 그대로 나라까지 망한 전진의 비수대전, 30만 대군을 동원했다가 2대도 못 가 정권이 교체된 도요토미 정권 등이 있다.[15] 참고로 유럽에서 다른 이유 없이 단지 너무나 거대한 군대를 동원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왕조 혹은 제국이 끝장나는 일은 나폴레옹 시대 러시아 원정 시기가 되어서였다. 중동과 소아시아를 합치면 페르시아가 있기는 하나, 이쪽도 단지 군대의 규모만이 문제는 아니었다.[16] 프랑스 공화국은 총동원령으로 18세에서 25세까지의 미혼남성을 징집했다. 그 결과 1793년 2월에는 20만에 불과했던 프랑스군은 이듬해 1월에는 서류상으로 100만, 최소 80만에 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말마따나 유럽 전쟁사에서 여지껏 볼 수 없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병력이 편성된 것이다. 이들을 혁명력 2년의 병사들이라 불렀다.[17] 이전까지 유럽에서 10만 단위의 병력을 편성할 수 있는 국가는 러시아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본토방위전에서도 10만을 초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럽 역사상 50만(반백만)을 넘어서는 단일 국가의 군대가 등장한 것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공한 이래 처음이었다.(로마 제국은 50만을 넘지 못했다)[18] 물론 그냥 징집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전쟁은 귀족들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의 일이었는데, 이제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국가 운영에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권리를 가진 대신 국가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제 시민들도 군대에 가라는 소리다.[19] D. Bell, The First Total War, Napoleon's Europe and the Brith of Modern Warfare(London: Bloomsbury, 2007).[20]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이 대표적인 초토화 작전이다.[21] 흔히 커뮤니티 등에서 프랑스가 6주 만에 무너진 것을 조롱하기도 하지만, 나치 독일에게 멸망한 국가 중 그 어떤 국가도 프랑스만큼 버텨내지 못했다. 덴마크는 4시간, 노르웨이는 3주, 폴란드는 4주, 네덜란드는 5일, 벨기에는 3일, 유고슬라비아는 11일 걸렸으며, 동맹국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최소 6개국 이상이 존재하는 발칸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데에도 한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야 다른 나라에는 프랑스처럼 136개 사단씩이나 있지 않았으니까[22] 이 당시의 독일 기동전을 전격전이라고도 부르나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독일군 전술에 전격전이라는 별개의 전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23] 상대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기나라 깃발을 꽂는 것으로 끝나는 멸망을 넘어서, 적국의 구성원까지 인종 단위로 완전히 멸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쟁.[24] 설령 상대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멸망전이라 해도 그렇다. 이는 도덕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그러한 거대한 전쟁일수록 상대해야 할 적 군인도 많은데 민간인 살상으로 군사력을 낭비하고 지배력을 상실하는 것은 손해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군인과 적 수뇌부만 제압하면 민간인의 상당수는 굴복할 텐데 괜히 총질을 해서 적을 늘릴 필요가 없다. 살육 충동이 풀려 종종 학살 행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적의 사기 감소나 공포 주입 등의 목적을 넘어서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지경이 된다면 오히려 학살을 하기 위해 전력을 무의미하게 낭비하게 되면서 결국 전쟁에서 지게 된다. 전근대에는 사람을 빠르게 많이 죽이기도 어려웠으니 더욱 그렇다. 물론 한쪽이 매우 강대해서 그런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정도라면 전후에 대학살이 벌어지는 등의 일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제노사이드는 민족주의라는 이념의 발달, 기관총/자동소총 등 대량살상무기의 일반화 이후에야 두드러지게 된다.[25] 당대에도 석유로 만드는 합성 고무가 많았지만, 천연고무의 기존 수요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힘들었다. 그 당시 합성고무의 가격도 천연고무의 8배 정도였기에 경제적 부담도 따랐다.[26] 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미국인에게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배급 문서에서 보듯 공급 제한 품목과 배급 현황에 대해서 정부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해야 했다.[27] 소련과 영국은 각각 1943 ~ 1944년 기준으로 GDP의 60%, 50%가량을 군비로 투입할 수 있었다.[28] 영국은 과거 수백 년 동안 특유의 유서깊은 모병제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것은 흔히 레드코트로 인식되는 소수정예 군대체제로서, 압도적인 해양전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가 국민개병제를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전쟁 중반부터는 대 프랑스 동맹의 여러 왕정국가들도 이를 모방하여 비슷하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모병제의 허점을 이용해 반강제 징집을 하였을 뿐, 공식적으론 징병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차대전이 시작되자, 폭발적으로 증가한 유례없는 병력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1916년부터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종전후엔 다시 폐지되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재도입되었다. 이는 1960년대까지 유지되다, 결과적으론 모병제로 회귀하였다.[29] 이는 조선의 대립군(代立軍)이나 현대 미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장군이 "모병제 군대는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목숨보다 월급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계층이 군인의 다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30] 지금은 독일 인구가 프랑스보다 많지만 이는 19세기 이후 프랑스의 출산율 저하로 인한 것으로 18세기 프랑스는 유럽 타 지역에 비해 인구가 두어 배는 많은 인구 대국이었다. 특히나 독일 통일 전에는 남부 독일이 프로이센이 아니었으므로 인구가 더 적었다.[31] 다만 장교단의 규모는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당대 유럽의 군대는 소대장 정도는 부사관이 맡는 식으로 가는 게 보통이었다. 중대장급 이상만 장교를 배정했다.[32] 우선 전투의 승패가 국가 지도부에 전달되는 속도부터가 매우 느렸고 이를 인지해도 당시 생산력과 통신, 행정력으론 인력을 동원하고,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고 보급하고, 훈련까지 끝마친 후 최종적으로 전방으로 병력들을 이동시키는 데엔 그야말로 한세월이었다. 당연히 그 사이에 적군이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다.[33] 다만 이건 평시 미군이 적었다는 측면도 있다. 인구가 약 2천만이던 6.25 이전 대한민국 국군이 10만 명 수준이었다.[34] 나폴레옹 전쟁 전체 기간은 길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난 개개의 전쟁 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35] 질적 우위로 무작정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게, 미군도 껍데기만 남은 이라크군 37만을 밟기 위해 30만 대군을 동원했고, 그 중에 지상군만 해도 절반에 가까웠다. 그나마도 이라크군이 수만 명의 공화국 수비대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싸우지 않을 거라는 전제를 깔고도 이 정도를 동원한 것이다. 탈레반을 상대할 때도 미군은 1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프간 정부군 제외하고 미군만으로도 탈레반과 비교해 병력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다. 대군에는 전략도 필요 없다는 나폴레옹의 격언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걸 상기하자.[36] 1차대전의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1일(or 1개월) 포병용 탄약 소모량 예측을 2만 발로 계산했고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20만 발씩 서로에게 발사했다고 하며 주요 공세의 준비에는 공세에 필요했던 탄약의 수송을 위해 항상 화차 수천량의 편성이 요구되었다고 한다.[37] 1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미래의 전쟁에 대해 여러 논의가 20년대부터 나온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저런 삽질의 결과물이 대전 중후반기 Ki-84와 치하의 부품이 공장별로 호환이 안 되어 정비에 차질이 생기는 것으로 대표되는, 전반적인 공업 역량의 저하였다.[38] 정작 일본군의 군수품 생산에 있어서 병목 자원은 니켈, 석유와 정밀 공작 기계였지, 종이나 옷에서 자른 천 쪼가리 따위가 아니었다.[39] 일본군은 전쟁 말기 옥쇄 분위기까지 나오던 시기를 빼면 일반적으로 알던 것과는 달리 인구 대비 병력은 적은 편이었다. 식량 생산을 위해 농촌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청년들을 무작정 전장에 차출하면 당장 식량이 모자라서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일단 징집하고 봤으며, 이때부터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몰렸다.[40] 독일 또한 1942년에는 약 국가 총생산의 50%, 대전기 내내 최대의 생산량을 기록했던 1944년에는 70% 이상을 군비로 쥐어 짜냈다. 반면 이탈리아는 전면전 수행 중임에도 국가 공업 및 산업체계가 총력전 체계로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기에 실질적인 군비 지출은 항복 직전 1943년 기준으로도 GDP의 20%대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이 부분에선 빨치산 활동을 포함한 반무솔리니 주의자들의 북부 공장지대 사보타지와 태업, 그리고 무솔리니 본인의 삽질로 인해 근대화에 접어들 시기에 산업 발전에 대한 투자 없이 이득도 없는 전쟁개입만 주구장창 해댄 탓에 GDP로 짜내고 짜내도 생산할 공장시설 자체가 부족하니까 생긴 예외적 상황에 가깝다.[41] 군수공장만이 아니라 경공업도 들어간다. 전쟁 중에는 상당수 물자의 자급자족도 필요한 일. 또 다른 이유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물건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총력전을 한 어느 국가에서도 모든 생산시설을 군수로 돌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생필품마저 안 만들면 국민들의 불만이 올라가면서 전쟁 수행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불만이 너무 높으면 전쟁 반대나 시위, 심지어는 반란까지 날 수 있다. 게다가 비누, 의약품 같은 물품들이 없으면 전염병 피해를 더 키울 수 있다.[42] 이들은 전쟁 중 및 전후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산업 현장에 곧바로 투입된다.[43]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44] 다만 한국전쟁은 국력이나 인구 수준보다 전쟁의 규모가 커졌고, 베트남전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베트콩 같은 게릴라들의 활동(누가 민간인이고 적군인지 구별할 수 없다)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심했던 점을 봐야 한다. 어쨌든 민간인의 피해가 급증한다.[45] 2천 년 전에 쓰인 손자병법에서도 전쟁을 일으킬 거면 확실하게 준비해서 신속하고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고 전쟁을 끝내라고 경고한다. 지금과 같은 총력전이 등장하기 힘들었던 고대에 쓰였지만 지금도 들어맞는 내용.[46] 그러나 당시 여성은 남성보다 낮게 취급되어 사상자가 나와도 군인 취급을 못 받거나 전후 참전용사 예우에서 밀리곤 했다.[47] 2023년 8월 기준으로 세수의 100%를 전비로 지출 중이라고 한다.# 기업들에게도 군용장비를 우선적으로 생산하도록 주문하였고 이 비용도 모자라서 미국과 서방의 지원금까지 쏟아부으며 버티고 있다.[48] 단적으로 쇼미더머니라 칭송받는 2차 세계대전 미국의 제철량은 21세기 기준으로는 5위권 정도에 불과하며, 2020년 기준 한국보다도 적다. 2020년 기준 세계 1위 제철국인 중국의 제철량은 제강기술의 발전을 무시하고 양적으로만 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제철량의 10배를 넘는다. 이외에도 각종 자원이나 산업재의 생산력에서 선진 산업화된 현대 국가들의 생산력은 쇼미더머니라던 1940년대 미국의 생산력을 월등히 능가한다. 80년의 시대적 간극은 결코 적지 않다.[49] 다만 미국이 자국산 전투기를 수출할 때 국내AS를 무조건 불가라고 못박은 탓도 있다. 즉 결함 하나라도 발견되면 미국산은 전부 미국에서 조치할 때까지 아웃되니 어쩔 수 없이 전력의 일부를 국산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는 것. 이 점은 유럽이나 러시아도 마찬가지. 물론 보급형은 좀 풀어주는 일도 있지만 F-15나 F-35 같은 하이급은 가차없다.[50] 물론 당시 전략폭격의 정확성 자체가 매우 떨어지던 것도 한몫했다. 융단폭격이 지나간 후 쑥대밭이 된 것 같아도 실제로 핀포인트로 정확하게 떨어지는 유효한 폭탄은 극소수였다.[51] 예시로 든 삼성 평택 반도체 공단의 경우 공사비만 완공된 1, 2공장이 총 60조원이 들어갔으며, 기타 비용을 합치면 100조원이 넘는다. 짓고 있는 3공장도 공사비만 50조 원.[52] 유일한 예외는 우크라이나지만, 이것도 상대가 러시아라서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루마니아, 발트 3국 등 동유럽 NATO 국가들을 알아서 러시아에 갖다바치는 격이라 지원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미국에서도 속으로는 우크라이나가 휴전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긴 상황이다.[53] 전부터 노후화로 도태시키는 방향으로 논의가 됐으며 최근 흑표의 추가양산이 결정되면서 점진적으로 도태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추세이다.[54] 이라크가 막장이 된 건 근대화 중간에 벌인 이 전쟁과 뒤이은 걸프전의 여파로 결국 근대화가 미완으로 끝나고 뒤이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무정부상태가 된 게 주 원인이다.[55] 2021-2022년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러시아가 10만이 넘는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시켰을 때 서방에서 크게 놀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만한 병력을 이동하는 데에는 막대한 시간이 걸리고, 이는 정말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56] 이걸 아예 실패해서 사병의 입대연한을 40대까지 늘려놓고 숫자만 채우느라 하방의 질적 약화가 심각한 집단이 일본자위대다.[57]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소 양국 사이에선 매우 강력한 말들이 오갔지만 당시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음 주면 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라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