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0 23:43:14

이란-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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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도.

파일:Chemical_weapon1.jpg

방독면을 쓰고 화학전을 치르는 이란군 병사.

1. 개요2. 배경3. 경과
3.1. 개전 (1980년 9월), 이라크의 기습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4.1.1. 이라크4.1.2. 이란
4.2. 국제적 여파4.3. 한국에 미친 영향4.4. 대중 문화

1. 개요

이란-이라크 전쟁, 혹은 이라크-이란 전쟁이라고 한다.

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80년대를 관통하며 8년여에 걸쳐[1] 이란이라크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1980년 9월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이란의 반격으로 장기화 되었고, UN의 중재로 휴전이라는 형태로 끝났다. 이후 걸프 전쟁이라크 전쟁을 거쳐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영향은 중동권의 불씨로 남아있다.

세계 역사상 국가 단위로 벌어진 마지막 총력전이기도 하다. (2019년 기준)

2. 배경

이란과 이라크는 비록 오랜 앙숙으로써 군사정치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나[2] 모두 소규모 국경분쟁에 지나지 않았고 70년대 후반에는 사트 알 아랍 수로를 비롯한 국경문제에 합의를 도출하고 군사정치적 충돌을 일단락함으로써 (1975년 조약) 우호적인 관계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었다.

그러나 이란에서 1979년 민중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시아파 신정 체제가 등장하자 상황이 일변하였다.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은 사담 후세인의 경제발전과 이라크 국가주의 교육의 실시로 종파별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는데 호메이니가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에게 반란을 촉구하며 아랍 전체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고자 하는 공작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아파 소수국민과 순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유혈사태가 발발하고,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지역에서도 소요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란은 사트 알 아랍 강을 비롯한 군사정치적 합의를 모조리 깨고 일방적인 주장을 계속하였다.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아파 준동을 극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배경에는 이란이 있다고 보았고 이란을 격파하면 시아파의 준동을 막고 군사정치적 위협을 배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3] 특히 사담 후세인은 근대국가 이라크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쿠르드족, 수니파, 시아파라는 국내 갈등을 통합해 이라크 국민으로써 의식을 재편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4] 오랜 숙원을 망가뜨리는 호메이니의 준동을 간과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또한 후세인은 사트 알 아랍 강 국경 분쟁이랑 더불어 바르드 알딘 하산, 시트 알 후슨 섬과 범아랍주의의 영향으로 이란의 아랍인 거주구역인 후제스탄을 '아라비스탄', 호람샤르를 '모하마라'라 탐내면서 이라크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이란 내부의 문제도 전쟁 발발에 한몫을 하였는데, 이란은 팔라비 왕조 시절 친미, 친서방 국가로써 중동 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부는 국내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모조리 숙청함과 동시에 군부 내의 미국 유학장교, 서방제 무기 조종사들을 모두 친미세력으로 보고 숙청했다. 프랑스 혁명이냐 그 공백을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혁명수비대로 채우면서 자연히 이란의 군사력은 심각한 질적 저하를 겪게 되었다.

더불어 사담 후세인은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속전속결로 크게 이긴 이스라엘군의 전략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이라크의 국력이 이란보다 뒤떨어지지만, 이러한 이란의 군사적 문제점과 전성기를 달리던 당시 이라크의 군사 수준을 고려하면 전격전을 통해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면서 이란이 자연히 협상 테이블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시아파 준동의 배경인 이란의 위협을 소멸시키고 이란과의 장기전이라는 위험요소를 떠안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사담 후세인은 비슷한 입장이며 시아파 이란과 친하지 않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의 아랍 국가들에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으며, 이러한 배경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란-이라크전의 개전을 결정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왕조 하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UAE 등 걸프만 주변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라크를 지원하였다. 특히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아예 무기를 사다가 이라크에 대여해 주면서까지 이란을 박살내려고 노력했다.[5] 당시 이라크가 아랍연맹 가맹국들에 빌린 돈만 당시 돈으로도 무려 1,000억 달러를 넘었다.

3. 경과

3.1. 개전 (1980년 9월), 이라크의 기습

전쟁은 이라크 측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11일 전까지만 해도 "이란의 파괴나 점령을 바라지 않는다." 고 했다가 1980년 9월 17일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고 9월 22일부터는 바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표면적 목적은 1950년대부터 영유권 분쟁을 계속해온 샤트알아랍 강의 회복, 여기에 시아파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등 걸프만 연안의 수니파 아랍 왕정국가들의 지원이 더해졌다.

전쟁 초반, 이슬람 혁명 이후 구 팔라비 왕조에 충성하던 군부에 대한 대규모 숙청[6]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던 이란군[7]은 패배를 거듭했고 이라크군의 대규모 공세가 있을 때마다 수천 단위로 전사자가 발생했다. 따라서 전쟁은 일방적으로 끝나리라 예상되었다. 특히 이란은 알토란 같은 항공전력을 조종사가 없어서 놀릴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순식간에 호람샤르와 아바단을 비롯해서 이란의 주요 공업도시들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

그러나 이라크군 또한 이란군의 약화만을 믿고 즉흥적으로 시작한 싸움이었기에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도 1980년 말부터 바로 말이다. 후세인은 애초에 "히트 앤드 런"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전쟁 발발 직후 이루어진 유엔 안보리의 중재를 바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개전 당시부터 침략을 받는 입장이고 애시당초 이란의 인구와 국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8] 휴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전쟁에서 승리해 이라크를 굴복시키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상황이었다. 후세인은 전쟁이 1년 이상 길어지는건 생각도 안해봤는데 말이다.

심지어 전쟁 발발 한달만인 1980년 10월, 전략요충지이자 석유산업의 중심지인 아바단을 둘러싼 아바단 공방전에서 이라크군은 전차 600대, 병력 2만을 동원하고도 5천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반격에 패주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당하는 걸 후세인이 꺼렸기 때문인데, 도리어 그 때문에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함락하지 못했다. 발목만 안 잡혔을 뿐.

호메이니는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이라크를 보고 11월부터 바로 반격에 나섰다. 호메이니는 금지되었던 팔라비 왕조국가(國歌)까지 다시 허용하면서 애국심과 단결을 고취시켰고 여기에 사상문제로 수감되거나 퇴출당했던 구 왕조시대 군인들을 사면하여 이란군에 복귀시키면서 팔라비 왕조 시대에 쌓아 두었던 서방제 무기들이 제 성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이라크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이란은 서방과 소련, 아랍 국가들의 경제 제재로 가동률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렇다 해도 팔라비 왕조가 쌓아왔던 견실한 국력과 인구구조, 기술력, 경제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결국 팔라비 왕조를 타도했던 혁명세력의 광신적 투지와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던 국력의 차이가 전쟁을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다. 특히 국가를 다시 허용하고 구 왕조의 군인들을 사면한 것이 의외의 전과를 올렸는데 호메이니의 정부보단 차라리 사담 후세인이 낫다며 감옥에 있길 고집하던 공군 조종사들이 사면받자마자 대거 군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후 전쟁은 이란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1982년 5월에는 대반격 속에 이란군이 1만 명이나 되는 이라크군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이라크군에 비해 열세인 지상전에 비해 제공권은 이란 공군이 확고하게 잡아서 개전 초기에는 이라크 공군이 이란 영공으로 침투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이란 공군이 바그다드를 포함하여 이라크를 공습하였고 1981년 4월 3일에는 747 조기경보통제기, 707 공중급유기, F-4, F-14를 총망라한 "스트라이크 패키지"[9]를 구성하여 이라크 국경을 돌아 시리아 국경과 인접한 이라크 공군의 H-3 비행장을 공습하여 30~50기의 전투기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1981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스라엘 공군이라크 오시라크의 타무즈 원자로 폭격사건에 놀란 후세인이 공군 주력을 빼서 이스라엘 국경 방어에 돌리는 바람에 이라크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여하튼 전황은 이라크군이 이란군의 주요 루트를 점거하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빠진다.

호람샤르 시는 이란과 이라크가 몇번이나 번갈아 점령하는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 네번째로 호람샤르 시를 점령했다가 다시 빼앗긴 이라크는 평화회담을 제안했고 이라크의 물주인 사우디아라비아도 파괴된 호람샤르 시를 비롯한 이란의 폐허를 재건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구슬렸지만 이란은 완강했다. 이란은 소위 시아파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카르발라'를 비롯한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들을 죄다 점령하기 전까진 '거짓된 평화'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한마디로 이라크의 남동부 절반 시아파 지역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참다 못한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사브라 샤틸라 학살 사건을 일으키자 같은 무슬림들끼리 싸워서 되겠냐면서 전쟁을 멈추고 이스라엘을 치자고 제안했으나 호메이니는 너네를 먼저 친 다음에 우리가 이스라엘까지 진군하겠다고 후세인의 종전 제안을 거부해버렸다.

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그러나 팔라비 왕조의 서방제 무기들도 지속적인 관리가 힘들어지고 잦은 전투로 파괴되자 갈수록 도태되기 시작했다. 서방제 치프틴 전차의 업그레이드형이었던 전차가 소련제 T-62와 각각 250대씩 펼친 대규모 기갑전에서 무참하게 참패하거나, F-14 톰캣 10대가 MiG-21미라주에 의해 손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그 밖에도 이 전쟁에선 이란의 AH-1J 코브라 헬기가 이라크의 MiG-21한대를 격추시켰다거나, 이라크의 Mi-24 하인드 헬기가 이란의 F-4E 팬텀을 격추시켰다거나 하는 괴이한 기록들이 많다. 심지어 이란군이 피닉스 미사일 한 발로 이라크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경제 사정이 나쁘다 보니 항공전력과 해상전력까지 총동원한 총력전을 장기간 수행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공군과 해군은 꼭 필요할 때만 출격시키고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심지어 지상전력조차 전차를 함부로 놀리지 못해서 보병 위주로만 굴리면서 전쟁은 전장에서 전차와 비행기를 찾아보기 힘든 그저 소총만 게베어1898에서 AKM으로 바뀐, 마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케케묵은 인해전술까지 동원되는 상황이 되었다.[10] 본래대로라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 이란이 쉽게 이라크를 제압해야 정상이지만 호메이니 정권을 싫어하는 미국과 아랍권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했기에[11] 이라크는 대등하게 싸우며 이란의 공세에도 꺾이지 않았고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을 반복하는 교착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란의 반격으로 이라크는 점령지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강을 건너 이라크 본토까지 쳐들어온 이란에게 누르 알 딘 알리 및 아니스 알 쟈리스 섬과도 같은 자국 영토까지 뺏기는 수모를 겪었으며 기세등등해진 이란은 후세인 정권 축출을 외치며 이라크의 석유 파이프 라인과 항구를 봉쇄했다.

다급해진 이라크는 이란군에게 독가스를 사용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스커드 미사일로 이란군과 이란의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빡친 이란도 그 보복으로 중국북한제 스커드를 수입해 이라크를 향해 쏴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이란과 비밀리에 군사관계를 맺고 이란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라크군이 날린 미사일의 잔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에 그토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스커드 C형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전쟁은 이에는 이, 에는 피를 부르는 보복전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유전들이 우선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러다 상대방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공격을 받았고 1984년에 들어서는 공격은 주변국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기뢰까지 닥치는대로 뿌려대는 통에 페르시아 만은 물반 기뢰반이 되어갔다. 이에 미 해군 함대가 해로 수호를 명목으로 페르시아 만에 고정 배치되게 되었고 이는 결국 USS 빈센스 함 사건 같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

이라크는 이란 내 반이슬람 정권 인사들에게 선전활동을 펼쳐 팔라비 왕조 출신 이란 파일럿들을 항공기 8대와 함께 투항시킨다. 그러자 이란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라크내 쿠르드족들에게 독립을 제안하여 이라크에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12] 격분한 후세인은 1987년 사촌 알리 하산 알 마지드[13]를 시켜 화학무기로 수천명의 쿠르드족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50만명을 강제로 수용소에 수감시켜 쿠르드인들을 진압했다.[14]

다시 이라크군은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각종 잡다한(EE9, PT-76[15]) 기갑장비들을 모아 초유의 반격을 성공시키며 여러 영토를 탈환하고 다시 이란의 주요 요충지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때 활약한 군이 후에 이라크의 공화국 수비대가 되어 후세인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라크나 이란이나 이득 본 것은 하나도 없고 국력만 피폐해졌다. 게다가 이라크의 천문학적인 전비를 감당 못해 이라크 측 스폰서인 사우디와 쿠웨이트마저 발을 빼는 상황이 오게된다. 국력이 압도적이던 이란 측은 이제 승리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씨구나 하며 좋아했지만 쪽박을 차게 된 후세인은 약이 오른 나머지 사우디와 외교 단절까지 해버렸다.

하지만 1988년 2월부터 이라크 측이 "도시전쟁작전"으로 반격을 시작했는데 스커드B 미사일 폭격(2개월 동안 150회)을 감행해 이란 수도 테헤란을 쑥밭으로 만들고[16] 1988년 5월 이란에 다시 쳐들어가는 등 마지막 발악으로 이란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벌인 공세가 바로 알파우 반도 및 마즈눈 군도에서의 작전인데, 여기서 이라크군은 이란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다. 이라크군의 역량을 우습게 본 이란군은 다시금 큰 피해를 입고 이라크 영토 전역에서 쫓겨나게 된다. 여기에 국제적 고립 상황에서 막심한 피해만 보았던 이란은 결국 이라크와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가는 정전협정을 통해 전쟁을 끝냈다.

8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 실종자 수는 정규군, 시민군, 민간인을 합쳐 이란 측이 30만~80만, 이라크 측이 20만~50만 정도로 추정된다. 군병력만 따져도 이란 25만. 이라크 10만이 희생되었다. 부상자는 최소 100만 이상, 최대 200여 만 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것이다. 이라크군의 정예는 1차로 이 전쟁에서 갈려나갔고, 남은 정예병력은 걸프전에서 소멸한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 각각 5,000억$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어 한동안 경제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는 이후 쿠웨이트 침공에 따른 걸프전과 이라크전, 그리고 IS와의 내전 속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했고 이란 역시 전쟁 피해를 복구하긴 했으나 정권의 한계로 인해 국제 제재에 시달리며 중진국에 머물고 있다.

특히 이란은 최근에 경제난과 물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전쟁 전 국경에서 하필이면 티그리스 강 상류를 이라크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호메이니는 티그리스 강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각오였지만 전쟁 전 국경으로 돌아가면서 티그리스 강은 이라크가 영유하게 된다. 이라크는 의 중요성을 알고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티그리스 강 일대에 저수지를 대량 확충하고 한국, 영국 등에서 해수 담수화 설비를 대량으로 사들여서 설치했다. 그리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의 양을 이라크가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이란은 물부족으로 골치를 썩는 중이다. 이란석유를 판 돈으로 을 사 오고 있다. 식수건 수돗물이건 이란은 수원지 자체가 극히 부족하기때문에 예전부터 골치를 앓았다.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4.1.1. 이라크

이 전쟁에서 막대한 돈을 전비로 낭비한 사담 후세인은 막판에 전비를 끊고 이라크에 꾸준히 딴지를 놓던 쿠웨이트를 침공하게 되어 걸프전의 계기가 되었다. 한때 사담의 비공식 후원자였던 미국이 걸프전과 이라크전으로 이라크를 무너뜨리고 후세인을 처형한 것이 지금 보면 아이러니.

4.1.2. 이란

한편 이란은 이후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채 전쟁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으나 정권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하지 않은데다 핵개발까지 추진하면서[17] 이웃 나라들의 욕과 국제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진국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쟁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광신주의와 소년병 문제도 국제사회에 충격을 준 논란거리였다. 이란에서 동원된 소년병들은 9살에서 12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많았고, 대부분 이란의 가난한 시아파 시골 지역 출신으로 처음엔 가족들이 광신적인 신앙심으로 자원시키거나 스스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쟁 말기가 되어갈수록 이란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이란 정부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었다. 심지어 도망 못가도록 줄에 묶인 채로 전방으로 내몰렸고, 순교자를 상징하는 흰옷과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목에는 천국의 열쇠를 걸고 다니기도 했다. 소년병들은 거의 무장조차도 하지 못했고 그들의 용도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혁명수비대 진격 전에 앞장서서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돌진하면서 인간 지뢰제거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18] 때문에 전투가 끝난 곳마다 전장은 이란 아이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이 모습을 보고 경악한 이라크군 장교들도 많았다. 이란 이슬람 정권의 이런 악랄한 인권탄압과 소년병 동원은 페르세폴리스 등의 고발만화에도 나와있다.

이란은 당시 이란 내 아르메니아인 부유층들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군비로 썼기에 아르메니아계는 이후에 이란에서 더 큰 신앙의 자유 및 여러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이전과 달리 자국 내 소수 종교인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19] 어느 정도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완화하여 국민여론을 달래는 등 최소한의 개혁도 수행하였다.[20]

승리를 자신하던 호메이니는 예상이 빗나가 막대한 피해만 입고 이라크 점령도 실패한 탓에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게다가 반대파와 정적들의 공세에 지병까지 악화되어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실의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전쟁 끝난지 얼마 안되어 1989년에 사망했다. 물론 상술한 전쟁 중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허용한 통제의 완화와는 별개로 1988년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음을 직감하며, 안그래도 팔레비 왕정 시절 같이 콩밥먹다 혁명의 과도기 중 주로 대학가, 도시 노동자 사회 중심으로 넘버 원 정적으로 싸우며 감옥에 처넣었던 인민 무자헤딘, 투데 당, 인민 페다인 등의 각종 좌파, 마르크스주의 정치범 3만명 가량을 비밀리에 처형하고 암매장하는건 잊지 않았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 언급되는 이슬람 율법상 미혼 처녀는 사형에 처할 수 없으니 강제 결혼이란 명목으로 간수, 병사에게 강간당한 뒤 처형당한 여성 좌파 정치범들은 이때 여기서 나온 대목이다. 여러모로 총력전의 비인간화와 교조주의적 신정 독재자의 권력욕, 혁명과 전쟁기의 집단적 광기가 빚어낸 참혹한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원리주의의 사상적 이론은 실제 권력은 쥐뿔도 없었던 백면 서생이었던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사이드 쿠트브가 깔았다면, 중동 국가들이 그나마 립서비스로서라도 추구했던 세속주의적 보편 민족 국가의 건설이란 명제에 실제 정치적 세력으로 시아파, 수니파, 알레비, 기독교도 마론파, 정교회, 쿠르드 하는 식으로 잘개 쪼개진 종교-민족 집단들이 근대 국가를 해체하는 새로운 정치 단위가 될 가능성을 구현한 호메이니와 이란의 이슬람 혁명, 그리고 이 전쟁의 그림자는 2010년대 후반에 와서도 충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이다.

4.2. 국제적 여파

전쟁이 장기화되자 전세계의 온갖 국가들이 갖가지 이유로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대리전 양상으로 번져갔다.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에 놀란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이 이라크의 후원자로 나선 것은 위에도 설명했지만, 그 외에도 이 전쟁에 끼어든 나라가 한두군데가 아니다.

우선 중동에서 가장 강력했던 친미동맹 팔레비 왕조를 상실한 미국은 당연히 이라크 편에 섰다. 하지만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

여기에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던 소련도 이라크의 편에 섰다. 그리고 소련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던 중국은 이란에 붙어서 스커드 미사일과 각종 군수품을 팔았다. 그러나 중국도 실제로는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21]

1977년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로 아랍연맹 국가들과 관계가 멀어졌던 이집트는 아랍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위해서 이라크를 지지했다. 중동에 새로운 맹주 그것도 뼛속 깊이 반미, 반서방, 반터키, 반이스라엘을 외치는 이슬람 근본주의 특히 시아파 세력이 나타나자 불안해진 이스라엘과 터키도 전쟁에 끼어들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위상이 실추되자, 이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광분하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들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라크에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서 돈을 두둑히 챙겼다.

이러자 그냥 돈이 벌고 싶었던(...) 브라질,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같은 국가들도 끼어들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카네이션 혁명을 겪으며 민주 정권이 들어선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에서의 식민지 독립 전쟁 종전 이후 남아도는 무기와 군수품들을 이란에 수출하면서 경제에 보탬이 되었다.

여기에 반미, 반서방 정권의 탄생에 북한리비아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이란을 지원했고, 토건회사들이 철수하여 블루오션이 생성되자 한국까지 전쟁에 끼어들었다.

그야말로 동네방네 다 끼어들면서 전쟁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노골적으로 충돌하는 국제적인 대리전이 되었다.

사실 국제적인 대리전이라고 해도 한국, 북한, 시리아, 리비아, 포르투갈을 빼곤 이란 편이 없었다. 미국, 소련, 유럽, 터키, 중국, 이집트, 사우디, 기타 아랍국가들이 한마음으로 이라크를 지원했기 때문에 다만 미국, 중국, 한국은 양다리 반극단주의로 대동단결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집권한 이슬람 정권이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반미/반소 노선을 걸으면서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결과였다. 혁명과 동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미국 및 서방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이슬람 극단주의를 내세워서 이란의 문화와 제도를 중세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시아파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이슬람 혁명 수출을 공공연히 떠벌이니 여타 수니파 국가들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또한 외세는 다 필요없다는 영감님의 막장 외교술도 한몫하였다.[22]

때문에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이라크의 민간인 학살과 화학무기 사용도 묵인하다가 나중에 후세인이 몰락한 뒤에야 갑자기 불쌍한 시아파 쿠르드족 운운하며 자기들이 묵인한 건 입 싹 닫고 후세인만 죄를 짊어지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후세인도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이라크는 이란 민간인을 상대로 사린, 타분, VX 등을 사용하여 최소 5,000여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약 7,000~10,000여 명의 중독자를 내어 영구적인 장애를 야기했다. 사린, 타분 가스는 화학 구조만 다를 뿐 물리적 화학적 성상이 비슷하며 이 세 화학무기는 모두 신호 전달 매개(아세틸콜린)의 억제 효소인 아세틸콜린 에스테라제의 활성을 억제하며 최종적으로 호흡근육 마비에 의한 사망을 야기한다. 또한 이라크는 쿠르드족에게도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약 30,000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서방은 당시 이란의 이미지 때문에 이 모두를 묵인했다.[23] 이놈이나 저놈이나 10살짜리 아이들이 인간 지뢰제거기로 '순교'하는 중 돈계산이나 하고 있었다는 전형적인 전쟁사의 파파괴스런 일면이다.

이 전쟁으로 가장 많은 득을 본 건 미국, 한국, 유럽과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몇몇 아랍 부국들 및 수출국가 등 외세였다. 이들은 피묻은 돈이란 돈은 모두 벌어제껴 배를 불렸음에도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다.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라크에 원자로를 시작으로 전투기, 헬리콥터, 미사일, 자주포 등 소련 다음으로 많은 양의 무기를 팔아먹어[24] 피묻은 돈과 석유로 배를 불렸으면서도 나중에 악역은 미국에게 떠맡길 수 있었기에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 손꼽힌다. 당장 이탈리아만 봐도 돈도 받았으면서 전쟁을 핑계로 이라크에서 주문한 호위함 5대를 인도하지 않고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독일(서독동독 둘 다)과 이집트, 스위스H&K MP5나 잉여 Mi-8같은 자국 총기와 헬기를 엄청 팔아먹었고, 덴마크터키도 이라크에 의약품과 무기류를 팔았다. 아르헨티나는 이란측에 우라늄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가장 큰 스폰서였던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는 말할 것도 없다. 소련중국, 브라질도 무기를 팔아서 두둑하게 챙겼다.

영국페니실린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는데, 이라크의 부정부패로 유통기한이 지난 페니실린을 수입해 수십명이나 죽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격분한 후세인은 1982년 3월 각료회의 도중 보건장관 리야드 이브라힘을 옆방으로 불러내어 직접 총살하였다.

포르투갈 또한 카네이션 혁명으로 해외 식민지가 대폭 줄어들자 남아도는 잉여 물자들을 이란에 갖다 팔아먹었다.

그러다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압박으로 소련의 원조가 줄어들자 후세인은 미국에 러브콜을 보냈고 때마침 이란-콘트라 사건이 뽀록나 눈에 뵈는 것이 없던 레이건 행정부는 옳다구나 싶어서 이란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 지원을 시작하게 된다.

이 당시 이란을 크게 지원한 국가 중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이라크를 가장 큰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고[25] 이에 따라 이츠하크 라빈의 동의하에 F-4E와 호크 미사일의 부품과 관련 기술고문단을 비롯하여 토우와 사이드와인더등의 유도무기들을 은밀히 제공하였다. 더불어 이스라엘 업자들이 이란 공군의 F-14의 부품 밀수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보통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가가 폭등하기 마련인데, 이 전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초기에는 이란과 이라크의 원유공급 중단으로 석유시장이 요동쳤으나, 다른 OPEC 국가들의 공급여력이 충분하여 금새 안정세로 돌아섰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석유를 헐값에 팔아 유가가 오히려 하락하였다. 이는 두 나라 재정 악화에 더욱 영향을 미쳤고 특히 상대적으로 국력이 견실했던 이란보다는 이라크의 타격이 더 컸다. 또한 상대 국가의 유전을 전략적으로 파괴함에 따라 해양 석유 오염도 심각했다.

한편 OPEC의 유가 합의가 무너지고 저유가가 계속되자 이것이 대한민국 경제에 큰 호재로 작용하였다. 당시 저유가에 저달러, 저금리까지 맞물리면서 단군 이래 최고라던 대한민국의 3저호황이 시작된 것이다.

4.3. 한국에 미친 영향

대한민국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이라크에선 건설공사를 하면서, 이란에는 전투기 부품, 차량, KH-179 곡사포 등의 무기 부품을 팔았다.[26] 중동 석유에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에 산유국인 두 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란군은 팔라비 왕조 시절 미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반미노선을 타면서 무기 유지 부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미, 반서방 외교를 표방하니 미국과 대부분의 친미국가들은 대이란 무기금수조치를 취했는데, 유일하게 한국만이 '이란의 석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란과 무역을 계속한 것이다. 특히 전쟁기간 내내 미제 무기 부품의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이득을 취했으며, 미국도 특별히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27] 동시에 이라크에서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모두 철수하는 와중에 끝까지 버티면서 건설공사를 진행했다. 물론 당대에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국내 건설업체와 석유업체에서는 당장의 돈과 석유앞에서는 물불가리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당장의 돈 때문에 그냥 쉬쉬했고, 언론도 마찬가지로 건설일을 끝까지 진행하는 근로자들의 미담(?)만을 전할 뿐이었다. 이것이 이란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고, 덕분에 반미적인 이슬람 정부의 설립 이후에도 한국과 이란은 경제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있다. 이란과 북한이 우호관계를 맺고있음에도. 당시 안기부국군정보사령부에서 이 둘을 이용 북한의 장사정포와 각종 무기를 비밀리에 입수하여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분석했다.

한국이 이란을 지원한 것은 미국1984년까지 사실상 이란-이라크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레바논에서 쌍코피가 터진 판(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폭파사건)에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이란에 약점 잡힌 상태이기도 한 탓에 겨우 애꿏은 그레나다에나 화풀이할 정도였고, 레이건은 호메이니보다는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더욱 미워했다.

전쟁 당시 한국은 교전 지역에서 아래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
  • 1982년 8월 9일 이란 호메이니 항에서 화물을 내려놓고 출항하던 삼보 베너 호가 이라크군의 포격과 함포사격에 침몰, 9명의 선원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다.
  • 1984년 7월 1일 같은 장소에서 입항하던 원진 호가 이라크군 공습을 받아 침몰하였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같은 해 9월 16일에는 쿠웨이트를 출발한 유조선 로열 콜롬보 호가 스틱스 대함 미사일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불발이라 선교에 미그기 만한 불발탄이 박힌 채로 국내 귀환하였다.
  • 1988년 7월 1일에는 이란 캉간에서 가스정유소를 건설하던 한국 대림산업 공사현장이 이라크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한국인 근로자 1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의 대책을 펼쳤지만 애시당초 전쟁중인 국가에서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라는 결론만 얻었을 뿐이다.

당시 한국은 친미국가 중 군수용품을 이란에 판매한 유일한 국가였기에, 이 전쟁으로 인해 이란과 한국간의 관계는 오히려 돈독해졌다.

당시 김포국제공항민항기인 이란 항공 보잉 747 카고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부품(주로 F-4 팬텀 부품)을 담고 이란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때아닌 중계 무역으로 나름 짭짤하게 돈도 만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아무래도 이란이나 이라크 모두 손 대기 껄끄러운 미국의 방조 탓도 있었겠지만, 가장 확실한 배경은 북한이 이란에 무기 판매를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가로막기 위해 청와대가 나선 것이었다.[28] 당시 판 무기가 꽤 많았는데 2011년에는 이란이 KH179 155mm 곡사포로 차륜형 자주포를 만든 것까지 확인되었다.

전쟁 중 다른 국가의 건설회사들은 안전에 대한 우려로 모조리 철수하는 상황에서 국내 건설회사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텼으며, 그 결과 1988년 위에 기록한 공습에 의해 인명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완료했다. 폭탄 맞아가며 버티는 한국 건설회사들을 보며 이란 지도부가 감동받아 이후로도 거래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5공 초기의 경제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1979년 일어난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은 커다란 경제 위기에 봉착했고, 1979년~1981년의 커다란 정치적 변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이러한 상황을 건설과 상품수출을 통한[29] 경제발전으로의 극복(?)과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란-이라크전으로 잡을 수 있었다. 전쟁 당시의 우호적 관계 덕분에 이란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좋은 편이어서, 호메이니가 치를 떠는 왕조 시대에 명명된 테헤란의 서울로는 이슬람 공화국인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라크에게 적대적 입장을 취했냐면 그것도 아닌 게, 전쟁 와중에도 한국과 이라크 간의 교역은 정상적으로 지속해 나갔다. 전쟁 와중인 1982년에 방콕, 쿠웨이트를 경유하는 바그다드-김포 노선을 대한항공에서 취항했고[30], 바스라에서 현대건설 직원들이 말 그대로 공사 현장에 포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가 대피한 사례까지 있었다. 다만 이후로 이라크가 황폐화되면서 현대건설이 건설자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결국 부도까지 갔다는 후문도 있었다.

북한은 이 전쟁 때 이란천마호, 곡산 자주포를 판매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서 북한 - 이란관계가 긴밀해지게 된 계기가 된 반면 1968년부터 북한과 단독수교를 맺어왔던 이라크는 북한이 적대국인 이란을 지원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1980년 북한과 단교하였다. 양다리를 타려면 잘해야

4.4. 대중 문화

축구판에서 이란-이라크 더비 매치는 과거 1980년대에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다.[31] 물론, 더비 매치가 대부분 그렇겠지만 실제로 이란 VS 이라크의 A매치는 서아시아권을 대표하는 더비 매치로도 유명하다. 바빌론 VS 페르시아 구도로 5000년 넘게 해묵었을 정도로 갈등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일전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고 우습게 보일 정도로 늘상 치열한 난투극같은 혈투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32]

팝 메탈 밴드인 화이트 라이온은 이 전쟁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When the Children Cry라는 곡을 발표하여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기도 했다. 팝 메탈 및 LA 메탈이 항상 놀자판이고 사회적인 성찰이 없다는 의견에 반론으로 제시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1] 말이야 좋아 8년일 뿐이다. 실제로는, "8년동안 소강상태도 없이 계속해서 전쟁이 전면적으로 지속되었다."같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다만, 상대편의 전쟁 수행 기반에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중한 지휘관들이 주도하는 전선 공방전이 장기화되고, 양측이 모두 어느 정도의 경제 규모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렇게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당장에 한국전쟁도 초반 11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2년 2개월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실제로, 이란과 이라크는 한일관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정말 해묵은 관계라서 사이도 매우 좋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이라크 사람이 이라크 영토에서 이란 사람을 죽여도 무죄 나올 것이라는 농담까지 있다.[2] 시아파-수니파 문제도 있고, 이슬람 이전부터 이 두나라는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바빌론-페르시아라는 경쟁 관계인 셈.[3] 그때나 지금이나 이라크의 다수파는 시아파다. 국민투표하니 바로 시아파 정권이 설 정도로. 이 반대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계열의 알라위파지만 다수는 수니파다. 그래서 IS는 물론이고 반군 대부분이 수니파.[4] 이것이 중동 세속주의 군사독재정부들의 공통점이었고, 은근히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기도 하다. 샤리아에 기반한 신정이나 왕정보다는 군사독재라도 정치체제로서는 일보 전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5] 이때 이라크군은 중동에서 10위권 내에 들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6] 설상가상으로 고위장성들이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들통이 나면서, 호메이니는 장군들뿐만 아니라 장교, 서방제 무기를 점검하던 엔지니어들까지 이단이라며 모조리 감옥에 처넣었다.[7] 호메이니가 주도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소령부터 대령까지 고급 장교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000명이 살해되거나 감옥에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란 전력의 상당수는 혁명수비대 및 이슬람 광신에 가득찼지만 전투 능력은 매우 떨어지는 자원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8] 이란 영토는 이라크의 4배이고 1980년 개전 당시 인구는 3배였다 (3900만 vs 1300만).[9] 이란 공군이 이런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통해서 장거리 폭격을 성사시킨 것은 미국이 훈련시켜 준 팔라비 왕조 시절의 이란 공군의 장교, 조종사, 지원인력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이다.[10] 심지어 이란은 고아들이나 정치범 수용자, 그 식구들까지 지뢰 제거에 썼다. 물론 이라크도 쿠르드족 포로들이나 정치범을 똑같이 써먹었기에 둘 다 국제적으로 욕 먹었다.[11]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 지원에 필사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팔라비 왕조 전복으로 미국은 이란을 증오하고는 있었지만, 모를 리 없었던 미국의 우방 각국과 이란간 무역을 막지 않은 것과 이란-콘트라 사건 등.. 2010년대의 중동 전쟁판을 보아도 종교와 정치와 민족주의가 다 버무려져 있지만 직접 피흘리고 싸우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들을 편들고 자금지원하는 쪽들은 그렇게 '필사적'이지는 않고 각자 주판알을 굴리는 모양새다.[12] 물론 이란내 쿠르드인의 독립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탄압했다. 물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2017년에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IS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어가자 이라크의 쿠르드족이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의 주도 아래 주민투표를 실시, 이라크로부터 분리독립을 시도하려 하자 이라크를 비롯하여 이란, 터키,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모로코 등 중동 국가들 대부분이 중동 지역내 안정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쿠르드족의 독립에 반대하여 국경 봉쇄와 이라크내 쿠르드 지역에 대한 항공기 단항, 물품 수출 금지 등의 제재 조치를 단행하며 이라크 쿠르드 자치 정부를 공적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이 독립하겠다는 움직임을 철회하지 않자 분노한 이라크는 같은해인 2017년 10월 자국 영내의 쿠르드족들을 공격해 키르쿠크 등 과거 이라크내 쿠르드 자치정부가 통치하던 이라크 영토와 석유 유전 지대 일부를 빼앗아 이라크내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밑 독립국가 수립 시도를 무력으로 저지했다.[13] 그 유명한 케미컬 알리.[14] 사담 후세인 정권을 다룬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종전 이후에 이 사건을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타리크 아지즈가 "국제연합에서 우리가 쿠르드족을 학살한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고 넌지시 경고하자 알리 하산 알 마지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전쟁 중에 뭘 바란 거요? 우리가 놈들에게 꽃이라도 보내줄 줄 알았나?" 라고 코웃음을 친다. 물론 안 보내준 대가로 20여년 뒤 그 중 둘은 교수대로 끌려갔다. 다만 타리크 아지즈는 저 중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평안한 죽음을 맞기는 했다. 사담과 케미컬 알리는 진짜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아지즈는 사형 선고를 받고 재판이 끝났을 때 70세가 넘어버리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무기수로 살다가 2015년에 복역 중 옥사해버렸다.(아랍권에서는 죄수가 60대를 지나면 사형시키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있다.) 게다가 알리는 한 수 더 떠서 중간에 교수형 과정이 심각하게 잘못되서 목이 잘려나가버렸다.[15] 심지어 2차 대전 유물급 전차로 몇몇 국가에 치장물자로 남아있었던 M36 잭슨, T-34-85, M4 셔먼, 처칠 전차 이탈리아제 소형 전차 L3 탱캣 등까지 이 당시 사모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굴러갈 수 있는 기갑장비는 다 사들여!? 어떻게 전쟁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옛날 무기가 텨나오나? 이 판국에 박물관에서 쉬게 생겼냐 2003년 이라크 전쟁 중 티크리트 인근에서 버려진 이들 구형전차들이 미군에게 발견되었다. 이런 잡다한 장비들은 대부분 돈 없이 신용거래로 사온 것이라 전후 이라크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라크가 나중에 쿠웨이트를 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6] 이란이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때 당시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7] 다만 북한처럼 핵 선제타격 권리니 핵탄두 소형화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이용을 내세운다. 괜히 드러내놓고 추진해봐야 미국이 전면 개입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18] 조셉 커민스, <The War Chronicles> 2권, 409P.[19] 하지만 100% 관대한 것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와 이란 내 기독교는 의회에서 지분 보장 같은 공식적 차원의 보여주기용 관용을 넘어 실제 사회에선 은연중에서나 공개적으로나 주로 이들을 박해하는 무슬림들을 굳이 제지하지 않는 식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 한술 더떠서 아예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의 모르몬급 이슬람 내 이단으로 인식하는 바하이교와 1988년 정치범 대학살의 주된 피해자였던 좌파 무신론자들은 아예 집중적이고 공개적인 투옥과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20] 이란의 산아제한 정책도 시행된 것도 이 시기였는데 1970년대 이란의 출산율은 6명대 수준을 기록하였고, 이슬람 혁명 성공 이후에 출산율이 더욱 높아졌고 자연히 엄청난 속도로 인구가 폭증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세속화된 이라크나 요르단 같은 국가들도 사정이 다른건 아니긴 하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병원이 부족해지자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이란 정부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고, 그 덕택에 빠른 속도로 출산율이 하락하여서 1980년대 초반에 6명대였던 출산율이 2000년대 들어서 1명대로 진입했으며, 그 결과 2010년대 들어서는 산아제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출산장려정책을 펴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래도 출산율이 1.8명대[21] 이라크는 중국제 69식 전차만도 2천대나 구매했다. 그중 상당수는 몇년후 걸프전에서 다국적군(이라 쓰고 미군이라 읽는다.) 기갑부대에게 거의 사격표적에 가깝게 박살나서 중국군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69식과 그 개량형 전차들이 당시 중국기갑세력의 대부분인데 서방측 3세대 전차(M1 에이람스와 챌린저1)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렸으니...[22] 당시 혁명구호가 종파가 다른 주변국들에게는 기존 정권 전복, 자국내 시아파가 주도권을 잡은 신정부 수립, 이란의 위성국화로 이해된 게 자명했다. 2010년대 극단 수니파를 표방하는 IS를 사우디가 지원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이라크에 시아파 정부가 서고, 시리아 내전에서 시아파 정부가 수성에 성공하면서 이란이 주변국에 혁명수비대를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워 지역 맹주로 인식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23] 출처 : John Pitchel, Terrorism and WMD, p.46[24] 대표적으로 쉬페르 에탕다르 전폭기와 엑조세 대함 미사일. 후세인은 중동전쟁 경험으로 소련제 항공기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 이전부터 비행기들만큼은 유럽제를 사들였다. 분노한 이란은 프랑스가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할 경우 서방국가 원유 수송로의 중추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라크는 이란의 항만 지역에 기뢰를 부설했다고 발표했다. 위에서 언급된 기뢰가 이때 나온 이야기다.[25] 실제로 전쟁중에 이스라엘 공군은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을 실시하였다.[26] 당시 한국이 이란에 제공한 호크 지대공 미사일 일부는 공대공 미사일로 개조되어 F-14에 탑재되기도 하였다[27] 나중에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드러나지만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도 이란과 이런저런 뒷거래를 하고 있었다.[28]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은 제 3세계에 대한 외교 경쟁 또한 치열하게 전개했다.[29] 당시 대중동 방산 수출이 크게 늘긴 했어도 방산수출만으로는 한국 경제발전에 영향을 줄 만큼은 못 되었다. 당시 한국 경제규모에 비하면 새발의 피. 80년대의 주력은 건설과 일반 상품 수출이었다.[30] 그 유명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바그다드-방콕-서울(김포) 노선에서 일어났다.[31] 8년 가까이 총력전을 벌였을 정도로 박터지게 싸웠다.[32] 2015년 아시안컵 8강전 경기처럼 집단적으로 모여서 크게 언쟁을 하면서 강하게 서로 밀치기도 하는 정도면 심하다. A매치 중에서도 꽤 권위있는 아시안컵에서 이 정도 수준의 벤치클리어링이라면 정말 보기 힘든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