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팔 학살/재판
이라크 특별 재판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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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 이란-이라크 전쟁 · 걸프 전쟁 · 이라크 전쟁 | ||
가족 | 장남 우다이 후세인 · 차남 쿠사이 후세인 · 이부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 사촌동생 알리 하산 알 마지드 · 사위 후세인 카멜 | ||
기타 | 하우스 오브 사담 · 바트당 · 아랍사회주의 · 바트주의 이라크 |
1. 개요2. 배경3. 재판부
3.1. 판사
4. 피고4.1. 사담 후세인4.2.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4.3.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4.4. 타하 야신 라마단4.5. 압둘라 카젬 루이드4.6.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4.7. 알리 대엠 알리4.8.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5. 과정6. 판결7. 사형 집행과 그 여파8. 비판 및 사건사고1. 개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며 후세인 정권이 무너졌고, 2003년에는 사담 후세인이 체포당하며 이는 바트당 정권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5년 10월 19일, 사담 후세인 외 7인의 공동 피고인들[1]이 이라크 정부에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에게는 알-두자일 지역에서 벌인 시아파 대량 학살의 혐의가 적용됐다.
2. 배경
두자일은 과거부터 시아파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사담 후세인과 바트당 정부를 전복시키려 시도한 전력이 있고, 거기다 이란-이라크 전쟁 도중 이란을 지원한 이슬람 다와당의 본거지였다. 1982년 7월 8일, 두자일에서 10여명 가량의 무장 괴한들이 사담 후세인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고, 이들 중 몇몇이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사담 후세인은 두자일 지역의 시아파들을 탄압하며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몇백 명을 체포했고, 후세인 암살 시도에 관련이 있다며 사형 선고를 내리며 대규모 사법살인을 일으켜 몇백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강제로 이주당하게 된다.그리고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과 바트당 정부는 철저하게 몰락하게 되었고 새롭게 세워진 이라크 연합 임시 당국과 미국은 사담 후세인과 그의 측근들을 체포해 재판에 올리게 된다.
3. 재판부
리즈가르 모하메드 아민 | 라오프 압둘 라흐만 |
리즈가르 모하메드 아민 판사와 라오프 압둘 라흐만 판사를 제외한 판사들은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clearfix]
3.1. 판사
- 수석 판사
- 리즈가르 모하메드 아민(رزكار محمد أمين; Rizgar Mohammed Amin, 1957년 ~ ): 2006년 1월 14일 사임.
- 라오프 압둘 라흐만(رؤوف رشيد عبد الرحمن; Rauf Rashid Abd al-Rahman, 1941년 ~ ): 한때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게 살해됐다고 알려졌으나, 이후 생존이 확인됐다.
- 4인의 이라크 특별재판소 판사: 수석 판사 외의 판사 4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4. 피고
- 피고들은 바트당의 고위 간부였거나 혹은 두자일 지역의 관계자로 이 학살에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판단된 8인(사담 후세인 ·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 타하 야신 라마단 ·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 압둘라 카젬 루이드 ·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 알리 대엠 알리 ·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이 기소되었다.
<rowcolor=#FFF> 이름 | 경력 | 죄목 | 판결 |
사담 후세인 | 이라크 대통령 혁명사령부 위원장 | 반인륜적 범죄 | 사형 (교수형) |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 이라크 정보국장 | ||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 두자일 혁명재판소장 | ||
타하 야신 라마단 | 이라크 부통령 | | |
압둘라 카젬 루이드 | 두자일 바트당 관계자 | 15년형 | |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 |||
알리 대엠 알리 | |||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 무죄 |
4.1. 사담 후세인
자세한 내용은 사담 후세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사담 후세인[2]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37년 4월 28일 |
이라크 왕국 티크리트 | |
사망 | 2006년 12월 30일 (향년 69세) |
이라크 바그다드 |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사형 (교수형)[3] |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이라크의 제5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이라크 전쟁 발발 후에는 알리 하산 알 마지드와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타하 야신 라마단 등 그의 측근들이 줄줄이 체포되는 상황 속에서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러던 2003년 12월 13일, 레드 던 작전을 통해 미군은 사담 후세인을 생포하는데 성공했고, 이어 2005년 10월 19일 그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2006년 8월 21일에는 안팔에서의 반인륜적 범죄로 두자일 학살 재판과는 별도로 기소되었다. 후세인은 세속주의자이면서도, 정작 재판정에는 코란을 들고 나와서 신앙인임을 강조하면서, 판사와의 싸움이 격해지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몰고 나아갔고 때문에 사담을 재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자기가 항상 잘했거나, 아니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지 멋대로 굴었다는 식이었고, 또 이러한 논리가 완전 허위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피고를 굴복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재판을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등 재판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라크 내부의 여론도 극과 극으로 나뉘었는데 재판이 시작되고 얼마 뒤 사담 후세인의 변호사가 시아파 괴한에 의해 암살당한 채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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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자세한 내용은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문서 참고하십시오.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4] برزان إبراهيمالتكريتي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51년 2월 17일 |
이라크 왕국 티크리트 | |
사망 | 2007년 1월 15일 (향년 55세) |
이라크 바그다드 |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사형 (교수형)[7] |
برزان إبراهيمالتكريتي
사담 후세인의 이복동생으로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정보국장을 역임했으나 사담 후세인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인물.
이라크 전쟁 때 미군에게 체포되었고, 그의 재판은 2005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압드 알 셈드 알 후세이니'라는 인물이 그의 변호인이었다. 그는 1982년 7월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35마일 떨어진 마을인 두자일 출신의 시아파 남성 140여명을 살해하도록 지시하고 감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두자일 출신의 마을 여성과 어린이 수백 명이 수년간 수감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혐의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하게 분노하며 재판에서의 분노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재판에서 강제로 퇴거 당하기도 했다.
첫 공판이 있은 지 36시간 후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바그다드 동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변호사들 중 한 명을 끌고 나와 암살했고, 며칠 뒤 두 번째 변호사가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세 번째 변호사는 공격으로 부상을 입기까지 하면서 그와 그의 변호인단에 대한 보안 문제가 지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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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عواد حمد بندر السعدون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45년 1월 2일 |
이라크 왕국 바스라 | |
사망 | 2007년 1월 15일 (향년 62세) |
이라크 바그다드 |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사형 (교수형) |
عواد حمد بندر السعدون
이라크 알-두자일 지역의 혁명재판소장으로 소속 정당은 바트당. 두자일에서 사담 후세인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발생하자 143명의 두자일 주민들에게 사형을 선고해 이들을 사법살인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라크 전쟁 발발 후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며 이라크 정부에게 넘겨졌고, 이후 두자일 학살 당시의 반인륜적인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두자일 학살 당시 사담 후세인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무려 144명의 두자일 주민들을 사법살인했고, 몇백 명의 두자일 주민들을 감금했으며 이들 중 40여명 가량은 옥사하기도 했으며 거기다 많은 두자일 주민들을 두자일에서 추방하고 이들을 탄압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그는 두자일 혁명재판소장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에 이란에게 지원했다는 명목으로 100여명의 두자일 주민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96명의 주민들을 사법살인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혐의를 부인했다. 알 반다르의 변호인단은 바데르 아와드 하메드 알사둔과 사둔 수하이이어 알 자나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둔 수하이이어 알 자나비는 2005년 10월 20일 바그다드 자택에서 납치된 후 암살되었다.
결국 사담 후세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와 함께 사형이 선고되어 2007년 1월 15일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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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타하 야신 라마단
자세한 내용은 타하 야신 라마단 문서 참고하십시오. 타하 야신 라마단 طه ياسين رمضان الجزراوي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38년 2월 22일 |
이라크 왕국 모술 | |
사망 | 2007년 3월 20일 (향년 69세) |
이라크 바그다드 |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징역형 (종신형)[1심] → 사형 (교수형)[2심][8] |
طه ياسين رمضان الجزراوي
이라크의 부통령.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후, 미군에 의해 수배되었으며, 도주하던 중 2003년 8월 19일 모술에서 쿠르드 애국 연합(PUK)에게 붙잡혀 미군에 넘겨졌다. 이후 이라크 임시 정부에 의해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2005년 10월 19일부터 재판을 받았다. 2006년 11월 15일 그는 1982년부터 이라크의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처형시키는데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죄질에 비해 형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검사들이 항소해 12월 26일 항소심이 열리게 되었다. 결국 2007년 2월 12일 반인륜적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는 쿠르드족이었는데도 쿠르드족들을 탄압한 사담 후세인의 세력에 합류해 부통령까지 지냈고, 이라크 전쟁 직후 그를 체포한 이들은 같은 쿠르드족인 쿠르드 애국 동맹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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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압둘라 카젬 루이드
오른쪽의 인물. 왼쪽은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 |
압둘라 카젬 루이드 عبد الله كاظم رويد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25년 1월 1일 |
이라크 왕국 두자일 | |
사망 | 2011년 1월 2일(?) (향년 86세)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징역형 (15년형)[9] |
عبد الله كاظم رويد فندي المشايخي الموسوي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농부. 과거 바트당의 고위 관계자였다.
이라크 알 두자일 지역의 바트당 간부로,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알 무셰이키의 아버지이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지 2년 만인 2005년 두자일에서 미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부대는 위스콘신 육군 국가 방위군의 A/1-128 보병이었다. 2005년 10월 19일 알 두자일 재판이 시작되었고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혐의를 부인했으며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148명의 두자일의 주민들을 살해하는데 협조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2011년 1월 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어 현재의 생사는 불명이다.
특이 사항은 압둘라 카젬 루이드와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부자는 두자일에서 태어나고 거주한 두자일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특히 체포되기 직전까지 두자일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clearfix]
4.6.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مزهر عبد الله رويد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53년 ([age(1953-01-01)]세) |
이라크 왕국 두자일 |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징역형 (15년형) |
مزهر عبد الله كاظم رويد فندي المشايخي الموسوي
이라크의 전직 정치인.
과거 이라크 알 두자일 지역의 바트당 고위 관계자로 압둘라 카젬 루이드의 아들이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뒤 2005년 두자일에 거주하던 중 미합중국 육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부대는 위스콘신 주방위군 육군의 제128보병연대 1대대 A중대 병력이었다. 그는 알 두자일 재판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결국 148명의 시아파 무슬림들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일정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2022년 내로 풀려날 예정이다.
특이 사항은 압둘라 카젬 루이드와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부자는 두자일에서 태어나고 거주한 두자일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특히 체포되기 직전까지 두자일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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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알리 대엠 알리
알리 대엠 알리[10] علي دايح علي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40년 |
이라크 | |
사망 | 2015년(?) (향년 75세) |
혐의 | 반인륜적 범죄 (학살) |
판결 | 징역형 (15년형)[14] |
علي دايح علي
이라크의 전직 정치인. 소속 정당은 바트당이다.
1982년,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두자일 지역의 바트당 고위 관계자였으며 두자일 학살에서 두자일 지역의 고위 관계자로써 학살에 협조했다는 알려져 있다.
이라크 전쟁 때 미군에게 체포되었고, 알 두자일 재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제기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혐의가 인정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에 감옥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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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자세한 내용은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12] محمد عزاوي علي محمد المرسومي | |
<colbgcolor=#c3c3c3> 출생 | 1943년 |
이라크 | |
사망 | 2017년 3월 11일 (향년 74세) |
혐의 | |
판결 | 불기소 처분 (증거불충분) |
محمد عزاوي علي محمد المرسومي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농부. 과거 이라크 바트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2년,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두자일 지역의 바트당 고위 관계자로 두자일 학살에서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로 인해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7인의 피고인들과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두자일에서의 사담 후세인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두자일 지역에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을 단순한 문맹인 농부일 뿐이라며 자신에 대한 혐의를 부인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친척이 바트당 치하에서 금지된 당인 이슬람 다와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학살 당일에는 자신의 재산이 동결되었다고 진술했다. 더군다나 그는 체포까지 됐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대한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결국 그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증거 불충분으로 이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난 인물이 되었다. 12월 26일, 이라크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고 건강 검진을 받은 후 석방되었으며 알리 알다바그가 이라크 당국이 그와 그의 일가의 안전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고 덧붙혔다. 그러나 석방 이후 건강이 악화되더니 결국 병으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그는 시아파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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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과정
이라크 당국은 2005년 10월 15일 새 이라크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진행된지 나흘 후인 10월 19일, 사담 후세인과 다른 7명의 전직 이라크 관리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특히 재판소는 1982년 7월 8일에 사담 후세인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두자일 출신의 시아파 148명을 살해한 혐의로 피고인들을 기소했다. 그러자 사담 후세인의 지지자들은 티크리트에서의 재판에 항의하며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공소사실이 그들에게 전달된 후, 8명의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었지만, 2006년 3월 15일, 재판은 사담 후세인이 증언대에 서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그와 재판장 사이의 논쟁이 시작된 후, 비공개로 전환되었다.과거 청문회에서의 모습처럼 10월 19일 재판 시작 직후부터 사담 후세인은 재판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 재판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점령으로부터의 독립을 거부했다. 또한 그는 "나는 국민에 대한 모든 경의를 표하며 이 재판소에 응답하지 않겠으며 이라크 대통령으로서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선언했다. 재판 중 리즈가르 모하메드 아민 수석판사가 형식적인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이라크 대통령'이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이어 아민 판사가 그를 '전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을 때, 사담 후세인은 자신이 여전히 이라크 공화국의 대통령이며 퇴위되지 않았다며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담 후세인의 첫 재판은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던 와중 재판소는 2005년 11월 28일까지 재판을 연기했는데, 그 이유는 일부 증인들이 너무 겁을 먹어서 출석할 수 없었고, 양측에게 증거를 조사할 시건을 더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판 개시 후 아랍 통신사 알 아라비야와의 인터뷰에서, 사담의 장녀 라가드 후세인은 법정을 '가짜'로 낙인찍었고, "그는 감옥에 갇혀도 사자가 될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을 아는 모든 정직한 사람은 사담 후세인이 확고하고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라며 그녀의 아버지가 재판 과정에서 '사자'처럼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사담 후세인은 재판 내내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하며 재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 도중 사담 후세인의 변호인단은 재판부의 정당성을 추궁하고 미군이 압수한 국방 서류의 반납과 국방 보호에 관한 보안 문제에 대해 질문한 후 법정을 박차고 나온 일이 있었다. 또한 사담 후세인과 공동 피고인들이 아민 부장 판사와 재판부를 상대로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는데, 그 다음 날 자신에 대한 증언을 듣고 나서는 판사들을 맹렬히 비난했고, "지옥에 가겠다."라며 재판으로의 복귀를 거부했다. 그 후 2005년 12월 7일, 사담 후세인은 또다시 자신이 수감된 조건과 재판에 대해 불평하며 법정에 서기를 거부하는 등 재판에 매우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불만에는 무엇보다도 그가 4일 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5일 후에는 "저는 제 몸 구석구석 매를 맞았고, 그 징후들이 제 온 몸에 있습니다."라며 미국의 납치범들이 자신을 고문했다고 주장했다.
2006년 1월 29일, 두자일 재판에서 사담 후세인의 이복동생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가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나가고, 변호인단이 퇴장당했으며, 사담 후세인도 리즈가르 모하메드 아민, 라오프 압둘 라흐만 부장 판사와의 말싸움 끝에 퇴장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재판 과정에서 후세인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자신을 굉장히 잘 변호했다. 그의 말만 들으면, 서방(西方)과 특히 미국, 영국은 아랍의 독립을 두고 못 보는 제국주의자였다.[13]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이러한 자들의 방해공작에 맞서 이라크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희생된 불우한 처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죽인 사람들의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거나, "그들은 반역자이고 이란인들"[14]이라고 주장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나는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억울한 피해자를 피하라고 항상 강조하였다."라고 하거나, "당신들 중 누가 도둑이자 반역자들인 이란인들에게 물어보았는가?"라며 책임소재에서 벗어나려 들거나, 증언 자체가 허위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후세인은 세속주의자이면서도, 정작 재판정에는 코란을 들고 나와서 신앙인임을 강조하면서, 판사와의 싸움이 격해지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몰고 나아갔고[15] 때문에 사담을 재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자기가 항상 잘했거나, 아니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지 멋대로 굴었다는 식이었고, 또 이러한 논리가 완전 허위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피고를 굴복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정도였다. 또한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등과 난동을 부리며 재판을 방해했으며 더군다나 시아파들은 피고인들의 변호사들을 암살하기까지 했으니 재판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이 변호인단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단 한 명뿐인 이라크 대통령이며, 지금의 대통령은 가짜이고 이라크 정책의 모든 책임자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재판부는 후세인 유죄 입증의 가닥을 잡았고, 결국 사형이 구형되었다.
자파르 알 무사위 검사는 사담 후세인과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전 정보국장, 타하 야신 라마단 전 이라크 부통령,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혁명재판소 재판관인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등 4명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다. 이어 압둘라 카젬 루이드와 미자르 압둘라 루이드, 알리 대엠 알리에게는 각각 징역 15년형이 구형되었다.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는 증거불충분으로 형이 구형되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 검사 측의 사형 구형이 낭독되는 때에는 이복동생인 바르잔과 함께 썩소를 지으며 같잖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대는 모습을 보였다.
6. 판결
2006년 11월 5일, 사담 후세인은 1982년 7월 8일 암살 시도에 대한 보복으로 두자일 출신의 시아파인 148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판사가 평결을 발표하자 사담 후세인은 "아랍 국가 만세! 신은 위대하다!"라며 소리쳤다. 칼릴 알둘라이미 변호사는 나중에 헌재가 판결을 내리기 직전에 사담 후세인의 성명을 인용했다. " 그는 사담 후세인이 "종파 분쟁에 직면하여 통일하라"고 그의 동포들에게 촉구했다고 말했다. 알둘라이미는 사담 후세인이 국민에게 보낸 메시지는 "침략한 국가, 그 민간인에 대한 복수를 용서하고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라크 사법제도에 의해 강제된 항소가 뒤따랐다. 항소가 그의 실제 집행을 연기하면서 몇 년 동안 계속될 수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12월 26일, 사담 후세인의 항소는 기각되었고 사형선고가 내려졌다.그들은 1년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받았는데, 주된 공판 내용은 두자일 학살을 비롯하여 이라크인에게 저지른 학살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시아파 정부는 그의 모든 혐의를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이슬람의 율법이 문제였다. 70세 이상인 범죄자에게는 사형집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인의 나이가 70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사형을 시키려면, 단기간 내에 사형이 가능한 혐의를 유죄로 입증해야 했으므로, 일단 두자일 학살 등 몇 가지로 국한시켜 기소했고,[16]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감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의 나약한 독재자들의 최후와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사형을 당할 때도 용수[17]를 거부[18]를 하는 등, 비교적 의젓한 자세로 최후를 맞았다. 사실 사담 후세인은 군 통수권자이자 군인이라면서 군인의 전통적 사형 방법인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군 지휘관 처형에는 총살형이 적절한 방법이며 군인답게 의젓한 최후를 맞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기각되었고 불명예 사형 방법인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19]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에도 사담 후세인은 종교적 구호를 외치고, 재판정과 부시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큰소리를 치며,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포섭하여 이후 체포되지 않은 바트당의 사무총장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를 필두로 한 후세인 지지세력의 저항을 예방하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를 보내서 후세인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후세인은 럼즈펠드를 비웃으며, "죽은 국민들 목숨을 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라고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럼즈펠드에게 "대량살상무기는 찾았냐?"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복동생이자 두자일 학살 당시 이라크 정보국장이었던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와 두자일 주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부장 판사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타하 야신 라마단 전 이라크 부통령은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7년 2월 12일, 형량이 죄질에 비해 너무 적다는 이유로 검사들이 항소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자일 지역의 바트당 간부였던 압둘라 카젬 루이드와 그의 아들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알리 대엠 알리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두자일 지역의 바트당 간사인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는 증거불충분으로 이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7. 사형 집행과 그 여파
처형당하는 후세인 |
또한 사형 판결을 받은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와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는 2007년 1월 15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어 사망했는데, 바르잔 이브라힘은 사형 집행 도중 목이 잘려 참혹하게 사망했다. 2007년 3월 20일에는 항소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타하 야신 라마단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렇듯 무리하며 급히 사형 집행을 한 이유는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후세인이 밀어주던 수니파의 철천지 원수 시아파.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초강경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안 그래도 폭정에 엄청나게 시달렸었기에 후세인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데다,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해서 빨리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 법 때문에 못 죽이기 때문에 저질러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일이 12월 30일이었고, 이틀 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31일에 집행하는 건 시아파 입장에서 봐도 지나치게 가혹한 데다 꼼수 쓰는 게 눈에 보이니, 확실히 그 당시에 후세인을 죽일 수 있던 시간은 30일. 그것도 30일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사형을 시키지 않고 쿠르드족 학살 같은 다른 재판으로 넘어가면, 후세인에게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은 무기징역까지였고[20], 게다가 후세인이 사형을 받지 않게 되어 버리면, 수괴가 사형이 아닌데, 그 수하들이었던 그의 측근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니, 측근들도 죽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형할 놈들 다 처형하고 싶으면 후세인부터 일단 처형해야 했다. 아니면 그들을 모두 다 살려줘야 했으니까. 시아파는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시아파 정부가 감정만 앞세워서 망쳐버린 일이 한두개가 아니며 이라크 군대와 정보부의 해산도 시아파 망명자들의 바람잡이로 이뤄졌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라크인들이 치르고 있다.
심지어 후세인의 처형 동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사실 후세인의 사형 집행 과정은 그들의 법률을 준수했다. 실상은 사형 집행인들이 멋대로 한 것으로, 원래 집행리(執行吏)들이 후세인을 데리고 나와 교수대에 세우고 유언도 물어보고 용수를 씌우는 것까지는 공개되었다. 하지만 곧 용수를 도로 벗기고[21] 처형한 후, 사망한 후세인 얼굴까지 나오는 충격적인 동영상이 나돌았고, 이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수사결과 당시 처형 감독관의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고, 관련자들은 무더기로 처벌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서 후세인의 처형 목적을 정의라기보다는 복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는 후세인의 죽음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선전하고 또 활용하려는 세력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시아파가 다수인 도시에선 주민들이 축포를 쏘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차분하게, 그리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후세인의 고향인 티그리트에서 후세인은 순교자 취급을 받으며 티그리트 전체가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8년 후, ISIL에 가담함으로써 시아파 정부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물론 그 IS가 시아파 정부보다 더 미쳤다는 건 그땐 몰랐지만. 이 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막 취임한 후였는데, 이 일을 크게 비판했다.
그리고 사형당하기 전 후세인이 마지막으로 한 경고대로, 이라크는 각종 반군 단체 및 과격파 종교 단체들의 무장 봉기 및 테러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최악의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후세인은 평소 체제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빠지는 상황을 극히 경계했는데 결국 권력의 구심점이었던 후세인이 제거되면서 이라크 전체가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 셈이 되었다.[22]
8. 비판 및 사건사고
사둔 수가이어 알 자나비 변호사 | 카미스 알 오베이디 변호사 |
2006년 6월 21일에는 사담 후세인의 수석 변호사 카미스 알 오베이디가 사드르 시의 시아파 지구 근처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는 사태까지 발생하며 피고인들과 그들의 변호사들은 재판에 불참하고 단식 투쟁 등으로 이에 강력하게 대책을 요구했고 아예 해외에서 재판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나 별다른 대응은 없었고 단식을 이어나가던 사담 후세인도 곧 단식을 멈추고 재판에 복귀했다.
[1]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타하 야신 라마단,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압둘라 카젬 루이드, 미자르 압둘라 루에이드, 알리 대엠 알리, 그리고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2] 풀네임은 사담 후사인 압드 알 마지드 알 티크리티.[3] 2006년 12월 30일, 사형 집행.[4] 풀네임은 바르잔 이브라힘 하산 알 티크리티.[7] 2007년 1월 15일, 사형 집행.[1심] [2심] [8] 2007년 3월 20일, 사형 집행.[9] 복역 중 사망 추정.[10] 풀네임은 알리 데예 알리 마흐무드 알 주바이디[14] [12] 풀네임은 모하메드 아자위 알리 모하메드 알 마스리.[13] 후세인이라는 인간의 잔혹성과는 별개로 이라크 전쟁만 놓고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쿠웨이트를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자행한 시점에서 아랍의 독립 운운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라크전 이후 알아낸 대량살상무기 부재가 이라크전쟁의 정당성을 훼손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부터 화학무기와 탄도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해 왔던 전과자가 다름 아닌 후세인이다. 게다가 전후 알아낸 사실은 후세인이 착해서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90년대에 지속되었던 UN의 경제제재가 생각 외로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후세인의 많은 무기개발 계획들이 페이퍼플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4] 단 두자일 학살이 아닌,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벌어진 쿠르드족 학살은 이란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5] 판사든 검사든 어차피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 그에 대놓고 일침을 놓거나 반대하기가 곤란해지는 정서가 있다. 사실 법정 소란이 일어나거나 하면, 판사들이 쿠란의 구절을 인용하거나 해서 피고들을 진정시키는 방법도 자주 쓰이던 거라 사담 후세인만 탓할 수는 없다. 특히 쿠르드 판사 라우프 압델 라흐만은 이 방식으로 소란을 막아보려다, 사담이 오히려 신은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쳐 조용히 수긍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16] 나머지 학살극은 나중에 다른 측근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증거로 사용되었다.[17] 교수형 집행 때 사형수 머리에 씌우는 일종의 두건이다.[18] 대신 목에 천을 감았다고 한다.[19] 그러나 후세인 변호사는 후세인은 제네바 협정의 보호를 받았어야 했다며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을 집행했어야 한다고 했으며 유엔에 조사를 촉구했다.링크 왜냐면 후세인이 죽기 전까지는 전쟁 포로로 간주됐다며 이에 따라 그는 1949년 제네바 협약의 보호 혜택을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후세인은 교수형이 아닌 군인의 사형 방법인 총살형을 받았어야 했다고 했다.[20] 이 때문에 사형 판결을 받은 압둘 바키 알 사둔이 사형 집행이 되지 않은 채로 감옥에 갇혀 있고, 타리크 아지즈 역시도 사형이 선고되기만 했지 실제로 집행되는 일은 없었다.[21] 다만 사형집행인들이 처음부터 용수를 씌우지 않고 멋대로 집행한 것은 아니다. 후세인 본인이 용수를 쓰는 것을 거부하여 그냥 안 씌운 채로 했다고 한다.[22] 다만 이는 후세인 자신도 하등의 도움을 준 바가 없었던 부분으로 후세인은 바로 그 세속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세속적으로 수니파를 우대하고 세속적으로 출신부족을 우대하면서 종교갈등에 더해 부족갈등을 오히려 더 부추긴 장본인이다. 즉 후세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 자신의 권좌유지를 부족과 종파에 우선시한다는 의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지 부족과 종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세속주의가 아니었다는 것. 애초에 후세인이 종파와 부족화합에 힘쓰는 지도자 였다면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침략주의에 의해 자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