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09:01:30

회전(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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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키가하라 전투(1600)의 부대 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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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워털루 전투(1815)의 기록화

1. 개요2. 역사
2.1. 발생2.2. 발전2.3. 소멸
3. 영향력4. 관련 표현5. 여담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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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Pitched Battle
  1. 쌍방의 군대가 어울려 싸움.
  2. 특정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임. 또는 그 전투.

위는 사전의 뜻 풀이인데, 1번은 모든 전투가 다 그렇고[1] 군사적으로는 주로 2번 의미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공성전 등의 예를 제외하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큰 전투의 양상은 양측의 군대가 집결하여 평야나 구릉 등의 한정된 접전지에서 서로 맞부딪치는 것이었고, 이로써 전황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부대가 대형을 짜고 한정된 특정 지역에서 부대끼리 모여서 접전을 벌였다."라는 의미에서 회전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pitched battle" 또는 "set-piece battle"이라 부르며, 일본어에서는 "pitched battle"을 "会戦"(카이센)이라 번역했다. 한국어 "회전"은 앞의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대체로 야전과도 의미가 어느정도 겹치는데, 회전이 벌어지려면 그만큼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하고, 가장 적합한 공간은 넓은 평야이기 때문이다.

2. 역사

2.1. 발생

회전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판가름하는 싸움에 최적화된 전투 양상이다. 즉, 결전(Decisive Battle) 개념에 입각한 전투이다. 이는 단기적이고 총력적으로 진행되며, 설령 몇 번 전투가 더 남아있더라도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으로 작용한다.

언뜻 생각하기에 모든 국가는 침략에 대비해 적절하게 을 건설하기 마련이니 대부분의 전투는 공성전일 것 같고,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평야에서 맞닥뜨리는 회전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특히나 공격 측이라면 야전을 선호하겠지만 방어 측이 굳이 성에서 싸우지 않고 개활지에서 싸운다는 것은 일기토와 비슷한 맥락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회전은 꽤 자주 일어났다.

일단 제일 큰 이유는 공성전이라는 것이 방어자에게도 매우 소모적이라는 사실이다. 방어자로서는 자기 영역이 전장이 되므로 경제활동이 위축되며, 직접적으로 적에게 노출되고 충돌하는 지역에서는 적의 약탈이나 초토화 전술, 혹은 아군의 징발청야 전술로 말미암아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더 큰 손해를 야기한다.

또한, 공성전의 수행 자체도 애로사항이 많다. 공격자가 문자 그대로 물 샐 틈도 없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차단할만큼 충분한 병력을 동원하지는 못하였더라도, 성 외부와의 왕래를 충분히 차단할 수 있는 상황일 때 공격자가 공성전을 시도한다. 이때 성 바깥보다는 안쪽의 공간이 더 협소하고 가용자원도 한정되기 마련이니, 보급과 증원, 재배치가 용이한 공격자에 비해 방어자의 배치 전력이 열세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공격자에게는 주도권이 있고 여러 요충지에 묶여 전력이 분산되는 방어자보다 유연하게 선택과 집중으로써 취약점을 노릴 수 있다. 이는 수비군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설령 공격자가 직접 공격해오지 않더라도, 인구의 일시적 밀집에 따른 전염병 문제도 있고 식수, 식량 등의 보급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방어시설이란 아무리 난공불락이어도 근본적 한계가 있어서 만사형통은 아니다. 방어시설은 물자로써 병력을 대신하는 것이고, 그만큼 값비싼 군사설비이다. 방어자는 경제적 이유에서 지켜야 할 모든 곳에 방어시설을 둘 수 없으며, 정치적·군사적·경제적 효용과 효율을 따져서 우선순위가 높은 요충지를 우선 강화하게 된다. 즉, 아무리 성을 절묘한 곳에 지어놨다고 해도 그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취약점이나 무방비지대가 되므로 우회가 가능하다.[2] 물론 우회 시도는 보급선이 끊어질 위협을 수반하므로 공격자도 성 사이를 무작정 휘젓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대규모 병력이 성을 우회하여 국가 중심부로 진입한다는 것은 방어자에게 매우 부담이다. 그러니 국가 핵심부의 방어 시설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지나갈 만한 곳을 선점하여 적을 섬멸하려는 동인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방어 측에서도 수동적인 방어를 수행하기보다는 여건이 맞는 한 공격적인 전술을 시도하게 된다. 수성전 상황에서도 적에게 기습을 가해 큰 타격을 주고 포위를 풀게 할 수 있다면 성문을 열고 나와서 싸우기도 하며, 만약에 야전에서 단기결전으로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그쪽을 선호하게 된다. 설령 방어자가 공격자보다 전력이 열세하더라도 수동적이고 분산적인 방어일변도 전략에서는 결국 국력이 축차소모될 뿐이므로, 밀릴 대로 밀리다가 국가 핵심 지역 인근에서 회전을 강요당한 사례도 많다.

적이 공성전까지 각오하고 대량의 병력을 준비했다 해도 방어자에게 야전의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적이라고 게임처럼 대량의 병력을 한꺼번에 훅 하고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며[3] 그 병력을 모두 일제히 투입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방어자 측으로서도 더 유리한 전장과 상황을 조성하여 국지적 우세를 유지하여 각개격파강습에 의한 충격 효과를 노리게 된다. 방어 측은 전장이 더 가깝고 지리를 더 잘 알기에 시간적으로 더 유리한 고지를 충분히 차지할 수 있다. 아래 문단에서 다루는 것처럼 병력 전체 규모가 적더라도 병력을 잘 모으기만 한다면 각각의 전장에서 수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두 진영이 조우할만한 평야,[4] 그리고 대군이 지나갈만한 도로는 한정되어있다. 삼국지에는 길도 없는 검각 절벽을 등애가 모포를 말고 뒹굴기까지 하면서 돌파한 예가 있지만 이런 것은 당연히 아주 드문 일이고 보통은 도로가 있는 곳으로 가기 마련이다. 전쟁 중에는 승리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으니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그런 곳은 많은 사람이 빠르게 지나갈 수 없기에 승리를 거두기에는 불리한 요소가 많으며,[5] 특히 시간이 생명인 회전에서는 피해야 한다. 따라서 회전을 할 만한 장소는 뻔하고 양측이 사전에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 "서로 여기서 만나서 싸우기로 합시다." 같은 신사적인 약속이 없어도 회전은 성립할 수 있다. 야습에서 다루듯 야간 전투는 피아식별의 문제로 대체로 피하기 마련이라 전투시간도 어느 정도 제한된다. 그렇게 해서 늦게 모인 쪽은 불리하기 마련이니 너나 할 것 없이 일찍 도착해서 말 그대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고 노력하게 된다.[6]

이러한 환경적 요인이 극단화한 경우가 유목민족과의 전쟁으로, 이들을 제압하려고 하는 경우 거의 늘 회전이 일어났다. 유목민족들은 애초에 정주하지 않으므로 성채를 쌓지 않으며[7] 농경민족 측에서 토벌을 하려고 해도 목표물을 잡기가 쉽지 않다. 농경민은 병력화되면 생산 활동을 할 수 없지만, 유목민들은 애초에 이동 생활을 하니 주민 수가 거의 곧 병력이 되고 병력을 섬멸하지 않으면 또 쳐들어오기 일쑤이다. 이런 기세를 꺾으려면 오로지 야전에서 맞닥뜨려 문자 그대로 병력을 섬멸하는 것뿐이니 회전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물론 회전 성립도 쉽지는 않았는데, 유목민족 측에서는 처음부터 궁기병의 우수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회전을 회피하려는 경우도 많았고, 따라서 회전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포위 전술을 병행해야 했다.

이러한 형태의 전장에서 최대의 변수는 병력의 규모이고, 많이 모으면 많이 모을수록 유리하다. 그러므로 되도록 1번의 회전에서 모든 것을 걸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8] 그러나 아주 이상적인 경우의 일이고, 앞서 언급했듯 시간 및 공간의 한계로 회전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고 수 차례 회전을 거듭해도[9] 며칠이 지나고도 결판이 나지 않는 일도 적지 않았다.

2.2. 발전

회전의 병력 규모가 제한되는 요인 중 몇 가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개선되었다. 사회경제적 발달 덕에 습지와 삼림이 개간되고 거주지와 교통망이 형성되어 병력을 운용할 인프라가 개선되기도 하였으며, 병력을 조직하고 운용하는 행정적 발전도 일어났다.

지형이야 도 겪는 문제이지만, 집결 계획, 병력 투입을 위한 도로철도 등은 국가가 나서서 발달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고대 로마가 진격로마다 길을 깐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물론 이러한 교통 수단은 아군도 쓸 수 있지만 적도 쓸 수 있다는 불이익이 있었으므로[10] 군사적으로 강성한 곳에서는 거리낌없이 도로를 구축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도로 증설을 주저하기도 했고,[11] 혹은 군사적 이유에서 궤간을 달리하거나 유사시 신속하게 봉쇄할 수 있도록 조치할 때도 종종 있었다. 반면, 해로는 선박으로써 훨씬 더 많은 물자를 쉽게 수송할 수 있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적절한 선박이 있어야만 갈 수 있고, 하역과 적재를 위해 적정 수준의 인프라라 있어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군 조직이 고도화되고 행정력이 강화되면서 용병술 수준에서 더 나아가 군사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기 군사학에서는 기동전 특성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여러 도로로 흩어져서 진군하여 동일한 시각에 집결하여 회전을 벌이는 능력"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특히 이 문제는 국민국가 탄생과 함께 순식간에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민 전체에 대한 징병제(국민개병제)와 예비군 체제가 마련되면서 군대 규모가 급증하자 심각하게 고려되었다.[12]

예컨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존 처칠은 철저한 기만 기동과 라인강 수운을 활용한 보급, 계산된 경로로써 북프랑스 방면군을 따돌리고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였고, 그 결과 블레넘 전투에서 프랑스-바이에른군을 격파하였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여러 장군들은 계속 지도를 보면서 군대가 이동할 곳을 찾고 시간에 맞춰서 집결할 최적지를 연구했다. 특히 이는 나폴레옹이 승리를 거듭하는 중요한 원인이었는데, 그는 이 방면에서 꽤나 탁월한 능력이 있었으므로, 전체 전역에서는 숫자가 적더라도 정교하게 합을 맞춘 병력들이 오고가며 접전지역에서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밖에도 대승을 얻은 전투 중에 흩어져 진군, 진형정비 중인 각 부대를 각개격파한 예도 흔하기에 상대가 각개격파의 가능성을 가지고, 아군은 집결해서 공세를 펼 만한 지역을 끊임없이 찾아야 했다. 이런 문제는 굽시니스트의 만화에 잘 나타나 있다. 만화 링크 프로이센 역시 이러한 병력 동원력에 집중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잘 짜맞춰진 계획이 필요했고, 취소나 변경이 어려웠다. 그렇기에 종종 오히려 화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빌헬름 2세가 "협상의 여지가 있다!"라고 긴급히 찾아왔을 때 소 몰트케가 "이미 출발했으니 되돌릴 수 없다."라고 반응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프랑스를 단숨에 제압하려는 슐리펜 계획은 1914년 9월 제1차 마른 전투의 패배로 좌절되었고, 양국은 4년에 걸친 기나긴 참호전에 돌입한다.

2.3. 소멸

이러한 군사학의 발전과 국민국가 출현은 총력전 개념을 낳았으며, 과학기술 발전은 화력의 발달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은 회전 개념의 소멸로 이어졌다. 이전 시대보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현격히 증가했기에 그 모두를 투입하는 결전적인 회전이 벌어질 수가 없었고, 또한 그렇게 집중하였더라도 적들의 압도적인 화력에 집중적으로 노출되어 매우 비효율적으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총력전의 초기 형태는 일반적으로 미국 남북 전쟁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간주되는데,[13] 양 진영은 몇 차례의 회전을 거쳤으나 회전에서 국력 전체를 쏟은 것도 아니었거니와 계속 동원되는 병력들이 철도에 힘입어 끊임없이 투입되면서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이 시기에도 보병과 포병의 화력이 매우 강해졌기에 방호 수단 없이 화력에 노출되는 경우 일방적으로 아주 심각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프레더릭스버그에서의 북군의 돌격과 그 다음 해에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 3일차의 "피켓의 돌격"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 줄다리기의 형태가 극단화된 것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각국은 최대한 빨리 병력을 모아 적을 단기간에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탄탄한 관료제와 촘촘한 철도로 무장한 프랑스독일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병력을 밀어넣으면서 밀릴 기세가 보이지 않는 참호전의 양상을 보였다. 한편 이런 중에도 동부전선동유럽의 광활함, 각국의 다소 미진한 동원력[14] 등으로 회전이 종종 벌어졌지만,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는 총력전이라는 점이나 고화력 앞에서 병력 밀집이 자살행위라는 점은 동일했다.

깃발을 들고 북과 나팔소리에 맞춰 전열을 유지하며 행진하는 고전적인 회전이 소멸하는 데에는 화력의 증가가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적군을 원거리 화력만으로 분쇄할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적군이 아군의 화력투사를 무릅쓰고 돌격을 감행 해온다면 마찬가지로 접근전으로 맞서야만 했다.[15]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화력의 발전은 절정에 달했다. 일개 보병의 소화기마저도 후장식 강선총과 볼트액션이 도입 되어 수백 미터의 거리에서 분당 수십발을 쏟아 부을 수 있었고 여기에 후장 장전식과 주퇴복좌기의 도입으로 대포 역시 분당 수십발을 발사 했다. 결정적으로 기관총의 등장으로 기관총반 하나가 과거의 수백명의 화력 이상으로 탄을 흩뿌렸다. 이제는 뭉치면 죽었다. 과거처럼 전열을 짠 채 행진하는 군대는 적군에게 접근 해보기도 전에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되는 화력을 뒤집어 쓰고 몰살 당했다. 전쟁 초기 국경 전투는 최후의 고전적 회전이었고 양측에서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되는 화력을 쏟아부었다. 10만 단위의 병력이 순식간에 삭제 되었고 이후 3년여의 기간보다 이 때의 4개월 동안 더 많은 숫자가 죽었다. 이렇게 되자 과거처럼 중대 이상 단위에서 뭉쳐서 화력을 투사하는 것이 아닌 중대 이하 분·소대 규모의 복잡하고 능동적인 전술 행동이 요구 되었다. 참호를 파서 개개인의 방어력을 향상 시키지 않는다면 총포탄이 날아들어 걸레짝이 되었다. 메타의 변화의 따라 회전이 사라지고 남은 전장에는 선 형태의 전장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선(戰線)의 형태로 변모하였다.

3. 영향력

회전은 국가 대 국가가 싸울 때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제외한 가용병력을 모조리 끌여들여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패배한 쪽이 멸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사 전쟁에 이겼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전력차로 이긴 게 아닐 경우에는 회전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전쟁을 질질 끄는 방식으로 하게 되고 결국 피로스의 승리만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경우 이기는 쪽의 경우는 그 기세를 몰아서 승리를 거머쥔다. 다만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진군을 하다가 공세종말점에 이르러서 군대가 돈좌되거나 궤멸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너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나머지 그가 가진 전략적 안목이 점점 하락하는 원인이 되어, 결국 러시아 원정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다만 근대 이전의 회전이라 해서 국가의 명운이 그것으로만 바로 결정나고 끝나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도시국가와 같은 작은 국가들간의 전쟁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어느 정도의 역량이 있는 국가들도 한 번의 뼈아픈 패전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도 하지만 일정 이상의 체급이나 국력을 가진 국가들은 곧바로 예비대를 동원해 간극을 다시 메꾸기도 하거나 승자가 정치적 이유로 추가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거나, 격퇴만 했을 뿐 결국 근대 이전에도 전쟁과 전투는 다른 영역이라 대대적인 반격이나 적국의 영토를 향해 보복전쟁을 가할 역량이 없거나 부담이 있다거나 그것을 들어 정치 외교적인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거나 한다면 정치외교적인 흔적은 남으나 전쟁 당사자간의 국체나 운명엔 영향이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조선군은 그야말로 야전에서 대패했고 요동의 야전군들이 모두 소멸하면서 명은 요동의 영향력을 상실해버렸지만 그렇다 해서 명나라가 바로 멸망한 것도, 조선이 곧바로 보복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큰 틀에서 생각하면 역사의 연장선에는 있지만 우루루 몰려가 회전 하나만으로 국가의 운명이 곧바로 결정되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고려사의 손꼽히는 회전인 귀주대첩도 거란군이 큰 타격을 입고 여요전쟁이 종결되지만 요나라가 멸망하진 않았다. 요나라가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에는 무리한 침공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수나라살수대첩 패전의 결과로 6년 만에 멸망하긴 했지만, 문서에서 보듯 살수대첩은 그 자체로 세계사에 손꼽힐 대규모 전투이니[16] 충분히 그럴 만하다.

4. 관련 표현

  • 반대로 각 병사들이 제각기 흩어져 싸우는 것은 산전(散戰, skirmish)이라고 하며, 이를 수행하는 병력은 산병(散兵; skirmisher)이라고 한다. 산전 자체는 회전이 우세하던 시기에도 전초전으로 존재했으나[17] 회전의 시대가 저문 이후에 좀 더 비중이 커졌다. 주로 이러한 전투는 경보병, 경기병이 담당했다.
  • 현대전에서 특정 전역을 설명할 때 동음이의어로 '회전'(回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주로 '차'()를 써서 표현한다. 예컨대 1차·2차 진주성 전투라든가 1차·2차 아편전쟁 같은 예가 있다. 팔루자 전투 문서에서 보듯, 꼭 같은 전쟁 내에서 벌어진 전투가 아니어도 시간적 격차가 그리 크지 않고 연관된 경우 함께 계산하기도 한다.
  • 한국 게임 분야에서는 회전과 유사하게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싸우는 방식의 전투를 한타라고 한다.
  • 일본에서는 유사한 의미로 '합전'(合戦)이라는 말도 자주 쓴다. 일본사에서는 겐페이 합전이 유명하다. 다만 겐페이 합전의 예를 보면 전투의 유형보다는 전쟁 자체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쓰인 것 같다. 아래 비유적 의미로는 '회전'과 유사하게 종종 쓰이곤 한다.
  • 함대결전해상전 분야의 결전이다. 해양은 매우 광활하고 지형적 차이가 적기 때문에 근대에까지 좀 더 오래 회전이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함대결전 역시 (회전과는 사뭇 다른 이유로) 쇠퇴하였다.

5. 여담

  •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각 전쟁마다 회전의 비중은 차이를 보인다. 한국사는 회전이 그렇게까지 잦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이는 한국사의 전쟁이 주로 북방 유목민족이나 중국과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유목민족들은 기동성이 뛰어나 농경계 민족인 한국계 국가에서 야전을 걸기가 불리하며, 대체로 한국에서 유목민들을 공격하기보단 유목민들이 쳐들어오는 입장이었으므로 적절한 길목에 성채를 쌓아놓고 수성전을 하는 것이 유리했다. 한족계 중국 국가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한국계 국가에 비해 인구가 월등히 많기 때문에 한국계 국가가 야전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고구려-당 전쟁안시성 전투에서 보듯 한족계 중국 국가는 한국에 공성전을 수행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임진왜란 역시 회전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인데 대체로 조선 측에서 과 같은 사격 무기를 선호하고 일본군과의 백병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던 영향이다.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회전으로는 제3차 여요전쟁귀주 대첩이 거론된다.[18]
  • 회전은 평야에 모여서 말 그대로 한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끌지는 않는다.[19]역사 문단에서 보듯 애초에 장기적으로 소모전을 벌이는 대신 빠르게 결판을 짓기 위한 전투 형태이므로 오랜 시간이 걸릴 수가 없었다. 대치하는 형태도 공성전이나[20] 유격전 등의 형태로 나타났지 벌판에서 양 군대가 대치만 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때문에 총력전이 본격화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한두번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 소멸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세계대전 시대의 사람들은 "단기간의 결전으로 승패를 가린다"라는 그간의 상식을 깨뜨려야 했다. 반대로 총력전이 상식이 된 시대에 태어난 현대인들은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 길어야 며칠 동안 한두번의 전투로 끝났다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최상단의 이미지로 나온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도 이후 일본의 200~300년의 역사를 바꿨지만 전투 자체는 3시간도 안 걸렸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는 수많은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고 크게는 수십만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쟁의 향방은 바뀌지 않았다. 몇번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닌 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총체적으로 파괴 하고서야 비로소 끝낼 수 있었다.

6. 대중매체에서

일본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이름을 따서 "xxx (대)회전"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창작물에서도 쓰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나카 요시키은하영웅전설인데, 은하영웅전설/역사 문서에 나오는 대다수의 전투에는 "~성역 회전(星域会戦)"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아무래도 그 큰 규모의 함대와 비교해도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싸우다보니 고작 행성이나 항성 하나의 이름 정도로는 명명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붙인 듯.

비유적으로도 '~회전', '~합전' 식의 표현을 쓰곤 한다. NHK 홍백가합전이 그런 예이다.


[1] 비슷한 구성의 한자어로 교전(交戰)이 있다. 이 역시 "만나서 싸운다"는 뜻으로, 전투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2] 광범한 지역을 장벽으로 틀어막더라도, 이는 말 그대로 막기만 했을 뿐 정작 방어 진지가 없기에 생각보다 쉽게 돌파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벽인 만리장성도 고작 시간을 좀 버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무용지물이었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짓는 데 든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동력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매우 떨어졌다.[3] 반대로 게임은 그게 가능하기 때문에 방어자는 어지간해서는 타워 같은 걸 끼고 본진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4] 전 국토가 산악 지형인 몇몇 국가들은 회전할만한 평야 자체가 부족하여 대다수 전쟁이 공성전이나 유격전 중심이었고 이런 회전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5] 특히나 앞서 서술한 등애의 루트는 매우 극단적인 예로, 자칫하면 사망자까지 발생해 비전투 손실이 일어날 가능성도 존재한다.[6] 그래서 회전에서는 1분 1초를 다투는 상황이 종종 나타난다. 한국사의 대표적 회전인 귀주 대첩에서도 전투 중 기병대의 등장이 전황을 바꾸어놓았다. 전투 중에 나타났으니 망정이지, 다음 날 전장에 도착했다면 승패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가까운 예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에마뉘엘 그루시가 길을 잃고 헤맨 것이 결국에 워털루 전투의 패전으로 이어진 사례가 유명하다.[7]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이동 생활에 따른 불이익과 한계도 있기 때문이다(유목제국 참조). 어쨌거나 정주민족에 대항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였으므로, 튀르크 장수 아사덕돈욕곡은 "성을 쌓는 자는 몰락한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8] 이 역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언제든지 병력을 보충할 수 있으므로 예비대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나, 교통 수단이 열악한 과거에는 어지간해서 한 번에 싸울 수 있을 만큼 많이 모으는 것이 유리하지 애매하게 병력을 남겨봤자 각개격파될 뿐이었다.[9] 꼭 새로운 병력이 없더라도 들이받은 후에 양측 다 병력이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전근대 냉병기 전투에서는 서로 전투를 벌여도 사상자가 적을 때가 많았으며, 대다수가 사망하는 경우는 후퇴에 실패하거나 포위당해 퇴로가 막힌 경우 등이었다.[10] 그런 이유로 경제성과 군사적 방어력은 다소 상충된다. 길이 잘 뚫려있으면 교역이 편리해지지만 적의 침략도 편리해진다. 그래서 평시 경제활동을 하는 도시와 방어용 성채가 분리되는 현상도 종종 일어났다(성(건축) 참조).[11] 가령 조선 같은 나라는 이 문제에 하도 시달려서 평시 교통으로는 배를 더 선호했을 정도이다. 교통의 개선이 강국에게 유리한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데, 티베트 독립운동칭짱 철도 완공으로 인한 접근성 개선으로 크게 위협받고 있다.[12] 징병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민군이 창설된 프랑스에서, 예비군은 프랑스의 대규모 병력에 맞서야하면서도 프랑스 측의 강요로 상비군 규모가 제한되었던 프로이센에서 각각 탄생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대체로 프랑스와 독일의 군사 경쟁 속에서 크게 발달하였으며, 오늘날의 징병제와 예비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아시아는 '병농일치제'라는 말에서 보듯 전근대 시절부터 기본적으로 일종의 징병제가 주류이긴 했으나, 군사과학의 유무로 말미암아 근대 징병제와는 그 방식과 운용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한편 영프독으로 묶이는 유럽의 유구한 강대국인 영국은 양차 대전 시기를 제외하면 징병제를 도입한 적이 없다.[13] 견해에 따라서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이미 총력전이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이 당시에는 더 빨리 총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가 명확했기에 과거처럼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던 것이고, 전쟁당사국 양쪽 다 비슷한 수준이 되자 줄다리기 같은 소모전으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기관총을 처음 만든 리처드 조던 개틀링이 "적을 더 빨리 죽이는 무기를 만들면 전쟁도 더 빨리 끝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논리라고 할 수 있다.[14]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등으로 철도의 밀도부터 프랑스나 독일보다는 한참 밀렸다. 독일은 이 분야에서 매우 선진적이었긴 했지만 양면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동원력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15] 이미 전열보병시대에도 화력의 발전 탓에 보병 간 전투나 포병전 위주인 상황에서는 심각한 소모전 양상 탓에 양패구상이 되기 쉬웠다. 그래서 기병이 수행하는 기동전과 측면전투가 전술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가령 루이 14세는 "보병전에 참여하지 말고 짐의 기병을 활용하라, 보병전은 손실만 많고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한다."라는 말을 남겼고, 나폴레옹은 "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유용하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6] 이 뒤로 1000년 동안의 전투를 보아도 이 전투와 비견될 정도의 규모의 전투는 그리 많지 않다.[17] 이러한 형태의 산전은 회전을 주 컨텐츠로 하는 토탈워 시리즈에서 종종 등장한다.[18] 그런 이유로 귀주 대첩을 두고 "더 많은 수를 동원해서 이긴 건 당연한 것 아니냐"하고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전략전술의 기본은 "싸우는 순간 상대방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이며 그 병력을 동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 그리고 요나라 군대는 기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숫자의 우세가 절대적인 우세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적절한 비판이다. 한국사의 상당수 전투가 디펜스에 가까운 공성전이었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이다.[19] 물론 그렇다고 정말 순식간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 수가 많으니 한 차례 전투도 몇 시간은 걸리고, 며칠 정도 대치를 이어나갈 때도 많았다. 다만 현대인이 생각하는 총력전만큼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20] 전근대 시기에도 공성전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위 언급한 안시성 전투도 1~2달 가량 지속됐으며, 유럽의 역사의 분기점이 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도 비슷한 기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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