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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물이 발명한 무기에 대한 내용은 개틀링 기관총 문서 참고하십시오. 리처드 조던 개틀링 Richard Jordan Gatling | |
출생 | 1818년 9월 12일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하트퍼드 카운티 | |
사망 | 1903년 2월 26일 (향년 84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직업 | 의사, 발명가 |
배우자 | 제미마 샌더슨 (1854년 – 1903년) |
자녀 | 4명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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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의사 겸 발명가로, 개틀링 기관총의 발명자다.2. 생애
1818년 9월 12일, 노스캐롤라이나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수많은 노예를 보유한 부유한 농장주였다.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았고 형의 영향으로 공학과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1]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청소년기부터 이런저런 기계 제작을 시작했으며 21세에 첫 발명품으로 증기선용 프로펠러를 완성했다.[2]이후 서기나 시간강사, 상인 등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꾸준히 아마추어 발명가로 활동했다.[3] 30세에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해 잡화점을 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나게 되는 사건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의학에 관심이 생긴 개틀링은 1850년 32세의 만학도로 오하이오 의과 대학에 입학, 수년간의 공부 끝에 미국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며 M.D.가 되었다.[4] 막상 의사 면허를 딴 후에도 평생동안 진료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공학적 재능을 살려 각종 의료기기를 발명했으며 의공학자로서 의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한편 개틀링은 잡화점 경영 도중 농기계 개발에 흥미를 느꼈고, 수년간의 연구 끝에 36세에 이앙기를 발명하게 된다. 이 발명은 당대 낙후되었던 미국 농업 시스템에 혁신을 일으켰으며, 개틀링은 발명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이후 아예 잡화점을 때려치우고 전업 발명가가 되어 여러 발명품을 개발해냈으며, 개인 사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무려 19살 연하의 여성 제미마 샌더스(Jemima Sanders)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정회원이 되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전화를 피해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했으며 종전 뒤에도 인디애나폴리스에 정착해 살았다. 이후 개인 사업의 성공과 자신이 만들어낸 발명품들의 특허료로 부유하게 살았으며 1891년에는 미국 발명가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해 6년간 재임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 주로 농기구 개발에 열중했으며 1903년 2월 딸을 만나러 뉴욕으로 향했다가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어 26일 딸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개틀링이 발명가로서 남긴 주요 업적으로는 각종 농업용 기기들이 유명하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이앙기를 비롯해 삼 분쇄기, 증기 트랙터와 모터 트랙터 등을 발명해 당대 농업계에 큰 기여를 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의학 지식을 살려 여러 의료 도구를 발명했으며 공기압축기, 변기, 자전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명품을 남겼다. 발명가로서의 재능에 의사 면허 보유자, 성공한 사업가까지 여러모로 성공적인 삶을 산 인생의 승리자였다.
2.1. 개틀링 건의 발명
그러나 이 사람이 발명한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개틀링 기관총. 하도 유명한 나머지 이제는 이 '개틀링'이라는 단어는 그 본인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화기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더 잘 쓰인다. 심지어 개틀링이 사람 이름인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정작 본인은 의사였던데다 그의 발명품들 중 무기는 이것밖에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의 극치. 이 기관총 이전까지 개틀링 박사가 발명한 물건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의뢰가 들어와서 그런 것도 아닌 자발적으로 만든 거다. 하지만 이걸 만든 이유를 알고 나면 이런 무기를 만든 동기도 나름 타당성은 있었다.1861년, 그가 한창 발명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시기에 미국은 남북 전쟁이 발발해 혼란한 상황에 빠졌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하던 개틀링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해 철도를 따라 전선으로 향하고, 얼마 안가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되거나 아예 전사하여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전쟁으로 인하여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그 중 대다수의 피해가 전투에서가 아니라 폐렴이나 저체온증 등의 각종 질병과 사고 등에 의한 비전투손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개틀링은[5] 서둘러 신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개발했던 종자 파종기의 구조에 영감을 얻어 여러 개의 총열이 달려있고, 손잡이를 돌리면 각 총열에서 교대로 총탄을 발사해 분당 200발의 빠른 연발 사격이 가능한 신병기를 발명했다. 이런 구조의 목적은 "이게 있으면 기관총 사수 한 명이 소총수 수십명 분의 몫을 할테니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겠지."라는 의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개틀링은 이러한 무기로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의 수를 줄이면 비전투손실로 희생되는 젊은이들 역시 크게 줄어들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압도적인 화력에 국가들이 대량의 희생자를 우려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발명자의 이름을 따 "개틀링 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총기는 1862년 시제품이 테스트되었고, 1865년 공식적인 특허를 받고 세간에 공개되었다.[6]
이에 개틀링이 대해서는 콜트 사[7]의 창업자 새뮤얼 콜트의 부인 엘리자베스 자비스 콜트의 질녀 엘리자베스 자비스(Elizabeth Jarvis)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나와있다.[8]
'친애하는 자비스 양에게.
내 이름을 딴 총을 발명한 것에 대한 너의 흥미에 답하마.
1861년, 전쟁이 시작됐을 때(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 중일 때란다.) 나는 거의 매일 전선으로 출발하는 부대와 부상당했고 죽은 자들이 귀환하는 걸 목격했었지.
나중에 그들 대부분이 전투가 아닌 질병과 각종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단다.
이 일로 인해 나는 기계, 그러니까 빠르게 발사되는 총을 만들어 1명이 100명처럼 싸울 수 있게 하려 했어.
이러면 대군의 필요성이 줄어들 거고 그 결과는 전투를 해야 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일이 대폭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 거지.
그래서 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개틀링 건을 발명했단다.
1877년 6월 15일, 하트퍼드
R. J. 개틀링'
자비스가 이웃집인 개틀링 가에 방문했을 때, 개틀링이 총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설명한 편지.[9]
내 이름을 딴 총을 발명한 것에 대한 너의 흥미에 답하마.
1861년, 전쟁이 시작됐을 때(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 중일 때란다.) 나는 거의 매일 전선으로 출발하는 부대와 부상당했고 죽은 자들이 귀환하는 걸 목격했었지.
나중에 그들 대부분이 전투가 아닌 질병과 각종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단다.
이 일로 인해 나는 기계, 그러니까 빠르게 발사되는 총을 만들어 1명이 100명처럼 싸울 수 있게 하려 했어.
이러면 대군의 필요성이 줄어들 거고 그 결과는 전투를 해야 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일이 대폭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 거지.
그래서 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개틀링 건을 발명했단다.
1877년 6월 15일, 하트퍼드
R. J. 개틀링'
자비스가 이웃집인 개틀링 가에 방문했을 때, 개틀링이 총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설명한 편지.[9]
그러나 이걸 받아든 미 육군은 단편적인 반응만 보였다. 개틀링이 기대한 것은 같은 화력을 더 적은 병력으로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정작 군인들이 기대한 것은 같은 병력을 투입하고도 훨씬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전시의 효율을 따지는 군대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압도적인 화력의 무기는 물론 전투와 전쟁에서 빠르게 전력을 쏟아부어 점령해나가며 이기는 것이지만, 참호전과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황이 바뀌어가는 세태에서 수비병력의 수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개틀링 기관총은 각광받았을지언정, 공격할 때는 기관총 포대를 일일이 설치해가며 전황을 압도하기란 쉽지 않은 데다가, 결국 전투승리를 통한 적지점령은 소총수들이 깃발을 꽂아야했다는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게다가 얼마 동안은 지휘관들이 라이플이나 개틀링을 비롯한 신개념 무기의 압도적인 위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라인배틀 형식의 구시대적 전술로 보병들을 잘 보호된 기관총 진지에 무작정 돌격시키고, 보병들은 기관총의 화력 앞에 무의미하게 녹아내리는 전투가 크림 전쟁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사람의 인식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 생긴 지체 현상인 셈이다. 덕분에 개틀링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기관총이 생기자 더 많은 인해전술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무모한 전술은 기관총의 구체적인 위력이 수천, 수만의 사람이라는 존재가 단 한 대의 기관총 앞에서 벌레처럼 무의미하게 갈려나갈 정도라는 것이 실증된 뒤 산개 및 엄폐가 기본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장되었으나, 그럼에도 기관총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체계였다.
개틀링의 이 인도주의적 무기는 제작자의 의도처럼 전쟁의 참화를 줄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무기로서 성능은 끝내줬기에 수없이 팔려나갔으며 이로 인해 그는 떼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개틀링이 없었어도 비슷한 무기체계는 결국 개발되었을 것이니, 개틀링에게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3. 강력한 무기로 인한 평화에 대한 담론
개틀링의 노력과 그 발상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1차대전에서 지리한 참호전의 반복과 기관총으로 인해 이전까지의 전쟁과 차원이 다른 많은 피를 보고 난 이후에야 유럽 - 북미 사회에서 드디어 시민들이 전쟁은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 아닌 인간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참혹한 재앙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진 일반 시민들은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는 전쟁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현장에 가보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기사도 비스무리한 구시대적인 신념 탓에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특히나 기껏해야 소총으로나 싸우던 이전 시절의 전쟁만을 경험한 부모 세대들이 이런 자부심이 강하여 자식들을 어느 정도 전쟁으로 내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런 잔혹한 무기의 도입으로 피가 강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이런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그제서야 시민들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게 되었고 권력자들이 함부로 전쟁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뒷처리도 어설프고 뭔가 일이 꼬이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대대적으로 터지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후에야 초대규모 전면전이 사라졌다.그리고 일선의 지휘관들 역시 기관총에 대판 깨지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면서 각종 전술교범을 대대적으로 수정, 이전처럼 무식하게 기관총 화망을 향해 병력을 밀어넣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휘관들은 1차 대전 이후로도 계속해서 적을 전면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오랫동안 고수했을 것이고 그러면 보병들의 피해가 계속해서 더 누적되어 늘어났을 것이다. 물론 개틀링의 바람대로 그의 신무기의 도입으로 전쟁이 짠! 하고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무기가 만들어낸 참혹함이 이후 사람들이 피를 덜 보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투입한 병력 대비 사상자 수는 개틀링의 시대였던 남북전쟁보다 1차대전이 더 낮고, 1차대전보다 2차대전이 더 낮다. 엄청나게 늘어나는 사상자 수만 보면 2차대전이 셋 중 제일 참혹해 보이지만 투입 병력은 더 어마무시하게 많아졌고, 1차대전 때처럼 특정 세대가 통으로 증발하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10] 사실 개틀링 기관총 이전에도 이미 화력이 꾸준히 우상향되며 군대의 진형도 점점 얇고 넓게 분산되는 추세였다. 밀집대형에서 선형진으로 바뀐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강력한 무기에 의한 평화라는 것은 일견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무기 덕분에 드디어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현대에 과거와 같이 여러 국가들이 휘말리는 규모의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 것 역시 원자폭탄과 대량살상무기라는 강력한 무기가 쌍방의 완전한 파멸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누가 터트릴지 모를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러한 폭탄더미의 위력과 폭발하면 일어날 피해를 사람들 역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 밑에 쌓인 폭탄더미에 함부로 불을 붙이려는 도발이나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말 수많은 희생 끝에 인류는 전쟁이라는 행위가 명예로운 사나이들의 고귀한 전투가 아닌, 자신과 가족, 친척, 동네 이웃, 도시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이 벌레만도 못하게 픽픽 죽어나가고 온 지역이 초토화되며 일상이 파괴되는 생지옥이라는 것을 똑똑히 깨우치게 되었고, 이는 사람들 간의 의견충돌로 인한 사소한 칼부림이나 총격전은 일어날지언정, 과거처럼 온 세상을 홀랑 태워먹을 불장난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4. 창작물에서
2019년 11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이 다뤄졌다.[1] 그의 형 제임스 헨리 개틀링(James Henry Gatling) 역시 발명가였으며 1870년대에 자체 제작한 글라이더로 하늘을 활공하기도 했다.[2] 그러나 이 프로펠러는 불과 몇 달 전에 이미 비슷한 구조의 제품이 먼저 발표된 상태여서 특허를 받지 못했다.[3] 당시엔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이 사람처럼 부업으로 발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4] 학위는 따지 않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그를 '개틀링 박사'라 호칭하는 건 틀린 말이다.[5] 당시 그의 계산에 따르면 비전투 상황에서 손실되는 병력과 실제 전투에서 손실되는 병력의 비율은 약 6:1이었다.[6] 사실 이런 생각은 개틀링 뿐 아니라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알프레드 노벨이나 맥심 기관총을 개발한 하이럼 맥심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틀린 생각, 정확히는 너무 이른 발상이었음은 양차 대전을 통해 잘 드러났다. 이를 실현한 무기는 20세기 중반의 핵무기였으니,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7] 당시 콜트 사에서도 개틀링 기관총을 생산 및 판매하고 있었다.[8] 출처[9] 이에 그의 손녀는 '할아버지는 평화로운 감성을 가지셨고 내가 기억하기론 저 흉기를 만드신 건 전쟁을 끔찍하게 만들어서 끝내버리기 위하기 때문이었지.'라고 회고했다.[10] 여기에는 전술 자체의 발전에 더해 의료지원이나 보급 행정 등 제반 지원기술도 발달한 영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