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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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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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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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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하위 행정구역인 카운티별 선거지도가 나무위키에 부재한 상황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역대 선거의 지도를 볼 수 있다. 유튜브의 선거지도 영상
1. 18세기2. 19세기
2.1. 1804년2.2. 1808년2.3. 1812년2.4. 1816년2.5. 1820년2.6. 1824년2.7. 1828년2.8. 1832년2.9. 1836년2.10. 1840년2.11. 1844년2.12. 1848년2.13. 1852년2.14. 1856년2.15. 1860년2.16. 1864년2.17. 1868년2.18. 1872년2.19. 1876년2.20. 1880년2.21. 1884년2.22. 1888년2.23. 1892년2.24. 1896년2.25. 1900년
3. 20세기3.1. 1904년3.2. 1908년3.3. 1912년3.4. 1916년3.5. 1920년3.6. 1924년3.7. 1928년3.8. 1932년3.9. 1936년3.10. 1940년3.11. 1944년3.12. 1948년3.13. 1952년3.14. 1956년3.15. 1960년3.16. 1964년3.17. 1968년3.18. 1972년3.19. 1976년3.20. 1980년3.21. 1984년3.22. 1988년3.23. 1992년3.24. 1996년3.25. 2000년
4. 21세기5. 역대 지역별 결과1. 18세기
1.1. 1789년
1789년 | |
후보 | 조지 워싱턴 전 대륙육군 총사령관 |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러닝메이트 | 없음 |
선거인단 | 69 |
득표수 | - |
득표율 | - |
재석 선거인 69명이 2표씩 행사한 결과 전원 조지 워싱턴에게 1표씩 던져 만장일치 당선. 나머지 1표씩은 다양한 후보에게 갔는데, 존 애덤스가 최다 득표해 2위로 부통령 당선.[1] |
지금과 달리 모든 선거인이 직선제로 선출되지도 않았고, 각 선거인이 선출 당시 어느 후보에게 투표하기로 선서되어 있었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연방당 측 선거인 후보들의 득표수가 총 3만 9천 624표, 반연방당 측은 4,158표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선거인이 1표는 워싱턴에게 던졌으므로 일반적으로 워싱턴의 득표수를 43,782표로 표기하기도 한다.
재적 선거인 72명 중 메릴랜드 출신 2명과 버지니아 출신 1명이 투표에 불참해 69명의 선거인이 138표를 던졌다.[2] 따라서 조지 워싱턴의 득표수 69표는 총 투표수의 50%지만, 모든 선거인이 1표씩을 워싱턴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만장일치 당선이다.
여담으로 인구 대비 선거권자 수가 너무나 적은데, 당시 선거권자 조건이 30세 이상, 남자, 백인, 일정 재산 보유 등 제한이 많아 겨우 4만 남짓한 시기였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선거권 확대가 이루어졌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통선거가 완전히 정립된 때는 1920년이다.
1.2. 1792년
1792년 | |
후보 | 조지 워싱턴 대통령 |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러닝메이트 | 없음 |
선거인단 | 132 |
득표수 | 28,579 |
득표율 | 100.0% |
노스캐롤라이나, 로드 아일랜드, 버몬트, 켄터키 주 가입. 2회 연속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 대통령 당선, 나머지 표는 부통령 선출에 분배. 존 애덤스가 2위로 부통령 당선. |
4년 전 선거와 마찬가지로 1인 2표제를 시행해 132명의 선거인이 264표를 행사했다. 대통령 선출 요건은 총 투표수의 과반이 아니라 재적 선거인의 과반, 즉 67표였다. 모든 선거인이 1표는 워싱턴에게 던지면서 132표를 받은 워싱턴이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여기에 나머지 1표씩을 놓고 존 애덤스가 77표, 조지 클린턴이 50표, 토머스 제퍼슨이 4표, 에런 버가 1표를 나누어 받아 애덤스가 이번에도 2위로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워싱턴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당선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장기독재를 우려해 2선 8년까지만 하는 전통[3]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워싱턴은 오늘날까지 미국의 국부이자 가장 존경받는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3. 1796년
자세한 내용은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796년 | ||
후보 | 존 애덤스 부통령 | 토머스 제퍼슨 전 국무장관 |
당적 | [[연방당| 연방당 ]]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출신 주 | 매사추세츠(승) | 버지니아(승) |
러닝메이트 | 공식 후보 없음[4] | 공식 후보 없음[5] |
선거인단 | 71 | 68 |
득표수 | 35,726 | 31,115 |
득표율 | 53.4% | 46.6% |
테네시 주 가입. 득표수 2등이 부통령이 되는 제도에 의해 제퍼슨이 부통령으로 취임. |
부통령이었던 애덤스가 아슬아슬하게 당선, 하필 부통령이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제퍼슨이었고, 제퍼슨은 4년 내내 애덤스의 정책을 비판하고 제지를 거는 바람에 '득표수 2위는 부통령으로 임명하는 제도'는 대통령의 권위와 행정력을 방해하는 데에 이용되었다.[6]
1.4. 1800년
1800년 | ||
후보 | 토머스 제퍼슨 부통령 | 존 애덤스 대통령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연방당| 연방당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매사추세츠(승) |
러닝메이트 | 에런 버 전 상원의원 | 찰스 C. 핑크니 전 프랑스 주재 대사 |
선거인단 | 73 | 65 |
득표수 | 41,330 | 25,962 |
득표율 | 61.4% | 38.6% |
1801년 하원 결선 투표 | ||
후보 | 토머스 제퍼슨 부통령 | 에런 버 전 상원의원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출신 주 | 버지니아 | 뉴욕 |
승리 주 | 10 | 4 |
미국 최초의 정권교체. |
워싱턴의 리더십과 카리스마에 미치지 못하고[7] 제퍼슨에게 내내 견제당한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고 쓸쓸히 물러났다. 미국 역사상 첫번째로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선거였기 때문에 일명 "1800년의 혁명"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민주공화당의 선거전략 조율에 문제가 생겨 제퍼슨 대통령 후보와 버 부통령 후보의 선거인단 수가 동률이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정, 부통령 선거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고, 각 선거인단이 2표씩 행사할 수 있었으며, 선거인단 선거에서 2등을 한 사람이 부통령으로 취임했었다. 양당에서는 정, 부통령 자리를 모두 차지하기 위해 각 당의 선거인단 중 한두 명이 지정 부통령 후보가 아닌 제3자에게 투표하는 편법을 쓰고 있었다. 연방당은 애덤스 65표, 핑크니 64표, 존 제이 1표로 이 수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민주공화당 쪽에서는 누가 사표를 던지는지 확실하게 결정하지 않아 제퍼슨 73표, 에런 버 73표로 선거인단 수를 동률로 만들어 버렸다.
제퍼슨과 버의 하원 결선 투표에서 연방당의 해밀턴은 버를 극도로 혐오했기에 제퍼슨을 밀어준 결과로[8]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성공했고[9] , 이 해프닝을 계기로 정, 부통령 선거인단을 분리하는 수정 헌법 제12조가 비준되었다.
2. 19세기
2.1. 1804년
1804년 | ||
후보 |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 찰스 C. 핑크니 전 프랑스 주재 대사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연방당| 연방당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사우스캐롤라이나(패) |
러닝메이트 | 조지 클린턴 전 뉴욕 주지사 | 루퍼스 킹 전 영국 주재 대사 |
선거인단 | 162 | 14 |
득표수 | 104,110 | 38,919 |
득표율 | 72.8% | 27.2% |
오하이오 주 가입. |
루이지애나 매입[10]과 연방보다는 주의 권리를 우선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2개 주(델라웨어, 코네티컷)를 제외하고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고 제퍼슨은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각종 실책으로 지지율이 급락해 말기에는 쫓겨나다시피 했다.
2.2. 1808년
1808년 | ||
후보 |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 | 찰스 C. 핑크니 전 프랑스 주재 대사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연방당| 연방당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사우스캐롤라이나(패) |
러닝메이트 | 조지 클린턴 부통령 | 루퍼스 킹 전 영국 주재 대사 |
선거인단 | 122 | 47 |
득표수 | 124,647 | 62,341 |
득표율 | 64.7% | 32.4% |
- |
매디슨은 제퍼슨의 정책을 대부분 승계하는 입장을 취했고, 주를 우선하는 정책과 타협과 협상을 강조해 핑크니를 또 이기는 데 성공한다.
2.3. 1812년
1812년 | ||
후보 |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 드위트 클린턴 뉴욕시장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11]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뉴욕(승) |
러닝메이트 | 엘브리지 게리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 자레드 잉거솔[12] 펜실베이니아주 법무장관 |
선거인단 | 128 | 89 |
득표수 | 140,431 | 132,781 |
득표율 | 50.4% | 47.6% |
루이지애나 주 가입. |
매디슨은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제외하면 국내 정치는 무난하게 했고, 뉴욕 민주공화당원들이 남부패권에 맞서 독자출마를 선언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비교적 쉽게 이겼다. 하지만 재취임 몇달만에 미영전쟁이 발발한다.
2.4. 1816년
1816년 | ||
후보 | 제임스 먼로 국무장관 | 루퍼스 킹 상원의원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연방당| 연방당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대니얼 D. 톰킨스 뉴욕 주지사 | 공식 후보 없음[13] |
선거인단 | 183 | 34 |
득표수 | 76,592 | 34,730 |
득표율 | 68.2% | 30.9% |
인디애나 주 가입. |
제임스 먼로는 유능하고 사교성이 넘치는 적격자로 평가받아 무난히 당선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은 영국을 지지했던 터라 미영전쟁 이후 큰 타격을 입었고, 루퍼스 킹을 마지막으로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
2.5. 1820년
1820년 | |
후보 | 제임스 먼로 대통령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출신 주 | 버지니아(승) |
러닝메이트 | 대니얼 D. 톰킨스 부통령 |
선거인단 | 231[14] |
득표수 | 87,343 |
득표율 | 80.6% |
메인, 미시시피, 미주리, 앨라배마, 일리노이 주 가입. 제임스 먼로 단독 입후보. |
이 시기 연방주의는 거의 사라졌고, 연방주의자당 자체도 1824년에 완전히 소멸한다. 그리고 먼로의 지도력이 뛰어난 덕분에 워싱턴에 이어 선거인단 만장일치로 당선될 뻔했지만, 뉴햄프셔 주에서 존 퀸시 애덤스에 투표하는 반란표 1표 때문에 무산되었다.
2.6. 1824년
1824년 | ||
후보 |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 | 앤드루 잭슨 상원의원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출신 주 | 매사추세츠(승) | 테네시(승) |
러닝메이트 | 존 C. 칼훈 전쟁장관 | 존 C. 칼훈 전쟁장관 |
하원투표 | 13 | 7 |
선거인단 | 84 | 99 |
득표수 | 113,122 | 151,271 |
득표율 | 30.9% | 41.4% |
후보 | 윌리엄 크로포드 재무장관 | 헨리 클레이 하원의장 |
당적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출신 주 | 조지아(승) | 켄터키(승) |
러닝메이트 | 나다니엘 메이콘 상원의원 | 네이선 샌포드 뉴욕주 고등법원장 |
하원투표 | 4 | - |
선거인단 | 41 | 37 |
득표수 | 40,856 | 47,531 |
득표율 | 11.2% | 13.0% |
2번째 결선투표. 존 퀸시 애덤스 + 헨리 클레이 연합으로 존 퀸시 애덤스 당선. |
1824년 연방주의자당이 소멸되고, 민주공화당에서만 후보를 등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과반수 득표는 불가능한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결국 모두 과반수를 충족시키지 못해 의회로 넘어갔고, 여기서도 결판이 안나는 바람에 막판에 애덤스와 클레이가 협상을 했고, 클레이의 선거인단이 애덤스로 넘어가면서 선거인단 121명이 되어 대통령이 되었다.[15] 앤드루 잭슨은 이에 반발해 자신의 지지자와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고, 오늘날 미국 민주당의 창업주가 된다. JQA도 이에 대응하여 국민공화당을 창당했고, 이로써 토마스 제퍼슨이 만든 민주공화당은 24년만에 해체된다.
2.7. 1828년
자세한 내용은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28년 | ||
후보 | 앤드루 잭슨 전 상원의원 |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테네시(승) | 매사추세츠(승) |
러닝메이트 | 존 C. 칼훈 부통령 | 리처드 러시 재무장관 |
선거인단 | 178 | 83 |
득표수 | 642,553 | 500,987 |
득표율 | 56.0% | 43.6% |
아버지 애덤스와 아들 애덤스의 재선 실패. |
사교적이었던 먼로에 비해 아들 애덤스는 아버지와 비슷한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인기가 없었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연방주의 성격인 중앙정부 차원의 토목건설과 중앙은행 허가 정책을 추진해 실익이 별로 없었던 남부에서 지지율이 확 떨어졌고, 포퓰리즘을 추구한 앤드루 잭슨의 선거전략에 밀려 재선에 실패한다.
2.8. 1832년
자세한 내용은 18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32년 | ||
후보 | 앤드루 잭슨 대통령 |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테네시(승) | 켄터키(승) |
러닝메이트 | 마틴 밴 뷰런 전 영국 주재 대사 | 존 서전트 전 하원의원 |
선거인단 | 219 | 49 |
득표수 | 701,780 | 484,205 |
득표율 | 54.2% | 37.4% |
후보 | 존 플로이드 주지사 | 윌리엄 워트 전 법무장관 |
당적 | [16] | [17] |
출신 주 | 버지니아(불출마) | 메릴랜드(패) |
러닝메이트 | 헨리 리 경제학자 | 에이모스 엘메이커 펜실베이니아주 법무장관 |
선거인단 | 11[18] | 7 |
득표수 | 0 | 100,715 |
득표율 | 0.0% | 7.8% |
- |
엽관제[19] 적극적인 서부 개척 등으로 남부, 신규 주들의 앤드루 잭슨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고, 젊은 이미지를 내세웠던 헨리 클레이를 여유롭게 제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2.9. 1836년
자세한 내용은 18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36년 | ||||||
후보 | 마틴 밴 뷰런 부통령 | 윌리엄 H. 해리슨 전 콜롬비아 주재 대사 | ||||
당적 | | | ||||
출신 주 | 뉴욕(승) | 오하이오(승) | ||||
러닝메이트 | 리처드 M. 존슨 하원의원 | 프란시스 그레인저 하원의원 | ||||
선거인단 | 170 | 73 | ||||
득표수 | 746,176 | 550,816 | ||||
득표율 | 50.8% | 36.6% | ||||
후보 | 휴 L. 화이트 상원의원 | 대니얼 웹스터 상원의원 | 와일리 P. 맹검 상원의원 | |||
당적 | | | | |||
출신 주 | 테네시(승) | 매사추세츠(승) | 노스캐롤라이나(불출마) | |||
러닝메이트 | 존 타일러 전 상원의원 | 프란시스 그레인저 하원의원 | 존 타일러 전 상원의원 | |||
선거인단 | 26 | 14 | 11 | |||
득표수 | 146,109 | 41,201 | - | |||
득표율 | 9.7% | 2.7% | - | |||
미시간, 아칸소 주 가입. |
잭슨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으로 통합되어 있던 민주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잭슨의 후계자 밴 뷰런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지만, 반(反) 잭슨 정서 외에 별다른 구심점이 없었던 휘그당은 각 주의 당 조직이 독자적으로 그 주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각 주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 후보를 내세워 1차적으로 민주당의 선거인단 과반 득표를 막고, 이후 하원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다.
남부 주에서는 민주당 탈당파인 휴 화이트와 존 타일러를 각각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북부 주에서는 전쟁영웅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 중도보수의 신성 프란시스 그레인저를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한편, 다니엘 웹스터와 와일리 맹검이 각자 1개 주의 지지를 얻어 출마했다.
하지만 잭슨의 후광을 입은 현직 부통령 밴 뷰런이 분열된 휘그당을 가볍게 이기고 당선되었다. 이 때의 선거를 마지막으로,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선 도전까지 양당 체제가 거의 확립이 된다.
2.10. 1840년
자세한 내용은 18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40년 | ||
후보 | 윌리엄 H. 해리슨 전 콜롬비아 주재 대사 | 마틴 밴 뷰런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존 타일러 전 상원의원 | 공식 후보 없음[20] |
선거인단 | 234 | 60 |
득표수 | 1,275,390 | 1,128,854 |
득표율 | 52.9% | 46.8% |
- |
노예제 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와 서부 주들의 연방 가입 거부 등 잭슨과 달리 우유부단했던 밴 뷰런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고, 휘그당 후보 해리슨은 자기를 통나무 집에 살고 사과술을 마시는 친숙한 서민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신승을 거두었다. 상대 후보 폄하와 이미지 선전의 방식은 잭슨이 처음 만들었지만, 그걸 본격화한 것은 해리슨이다.[21] 하지만 그렇게 돈과 시간을 퍼부어 대통령이 되어놓고 취임식 때 겨울 비 오는 날에 코트도 안 입고 2시간 가까이 연설하다가 무리한 나머지 1개월 만에 병사한다. 이로 인해 부통령이었던 존 타일러가 대통령에 취임, 최초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부통령이 된다.
2.11. 1844년
자세한 내용은 184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44년 | ||
후보 | 제임스 K. 포크 전 주지사 | 헨리 클레이 전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테네시(패) | 켄터키(승) |
러닝메이트 | 조지 M. 댈러스 전 러시아 주재 대사 | 시어도어 프렐링후이슨 전 상원의원 |
선거인단 | 170 | 105 |
득표수 | 1,339,494 | 1,300,004 |
득표율 | 49.5% | 48.1% |
- |
대통령직을 승계한 타일러의 이미지가 안 좋아진 상황[22]에서 휘그당은 또 헨리 클레이를 후보로 지명했고, 민주당 후보 포크는 전쟁을 불사한 영토확장[23]을 공약으로 내세워 거물 클레이를 겨우 이겨[24] 대통령이 된다.
2.12. 18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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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재커리 테일러 육군 소장 | 루이스 카스 전 상원의원 | 마틴 밴 뷰런 전 대통령 |
당적 | | | [25] |
출신 주 | 루이지애나(승) | 미시간(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밀러드 필모어 뉴욕주 재무감사관 | 윌리엄 O. 버틀러 전 하원의원 |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시니어 전 상원의원 |
선거인단 | 163 | 127 | 0 |
득표수 | 1,361,393 | 1,223,460 | 291,501 |
득표율 | 47.3% | 42.5% | 10.2% |
아이오와, 위스콘신, 텍사스, 플로리다 주 가입. |
휘그당은 어떻게든 선거를 이기기 위해 미국-멕시코 전쟁의 전쟁영웅 재커리 테일러를 후보로 추대했다.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이 자유토지당을 창당해 대권에 도전하면서 민주당이 분열, 테일러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테일러가 1년 만에 급체로 사망하면서 휘그당은 8년 만에 임기 중 사망한 대통령을 다시 배출하게 되었다(...).
2.13. 18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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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프랭클린 피어스 전 상원의원 | 윈필드 스콧 육군 총지휘관 |
당적 | | |
출신 주 | 뉴햄프셔(승) | 뉴저지(패) |
러닝메이트 | 윌리엄 R. 킹 상원의원 | 윌리엄 A. 그레이엄 전 해군부 장관 |
선거인단 | 254 | 42 |
득표수 | 1,607,510 | 1,386,942 |
득표율 | 50.8% | 43.9% |
캘리포니아 주 가입. |
테일러의 급사 이후 승계한 필모어의 실패[26]과 더불어 또 다시 전쟁영웅 윈필드 스콧을 후보로 추대한 휘그당에 분노한 유권자들, 그리고 그 당시 꽤 젊고 잘생긴 이미지를 가진 피어스에게 표가 몰려 압승을 거둔다. 이후 테일러 이후 대통령들이 당적과는 상관없이 남부의 눈치를 보면서 노예제를 옹호하자, 휘그당 개혁파들은 이에 반발해 공화당을 창설했고, 남북전쟁 종전 이후 민주당 vs 공화당의 양당체제가 계속된다.
2.14. 18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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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제임스 뷰캐넌 전 영국 주재 대사 | 존 C. 프리몬트 전 상원의원 | 밀러드 필모어 전 대통령 |
당적 | | | [27] |
출신 주 | 펜실베이니아(승) | 캘리포니아(패)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존 C. 브레킨리지 전 하원의원 | 윌리엄 L. 데이턴 전 상원의원 | 앤드루 잭슨 도넬슨 전 프러시아 주재 대사 |
선거인단 | 174 | 114 | 8 |
득표수 | 1,838,169 | 1,341,264 | 873,053 |
득표율 | 45.3% | 33.1% | 21.6% |
- |
뷰캐넌이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 인지도가 꽤 있었을 뿐더러, 휘그당이 공화당과 13대 대통령인 필모어의 미국당으로 쪼개지면서 어부지리 승을 거두었다. 메릴랜드에서 1위를 하기도 한 필모어의 득표수가 꽤 높았기 때문에 나중에 공화당은 필모어 욕(...)을 좀 했다고 한다.
2.15. 18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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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에이브러햄 링컨 전 하원의원 | 존 C. 브레킨리지 부통령 |
당적 | | (남부)[28] |
출신 주 | 일리노이(승) | 켄터키(패) |
러닝메이트 | 해니벌 햄린 상원의원 | 조셉 레인 상원의원 |
선거인단 | 180 | 72 |
득표수 | 1,866,452 | 847,953 |
득표율 | 39.8% | 18.1% |
후보 | 존 벨 전 상원의원 | 스티븐 A. 더글러스 상원의원 |
당적 | [29] | (북부) |
출신 주 | 테네시(승) | 일리노이(패) |
러닝메이트 | 에드워드 에버렛 전 상원의원 | 허셜 V. 존슨 전 조지아 주지사 |
선거인단 | 39 | 12 |
득표수 | 592,906 | 1,382,713 |
득표율 | 12.6% | 29.5% |
미네소타, 오리건 주 가입. 역대 최저 지지율 당선. |
노예제 문제로 이미 분열될 대로 분열되어 버린 민주당[30]에서는 끝내 당을 통합시킬 후보를 찾지 못한 채 전당대회가 끝난다. 결국 2차 전당대회에서 남부 민주당원들이 대거 보이콧을 선언한 후에야 노예제에 중립적인 스티븐 더글라스가 후보로 지명된다. 전당대회를 박차고 나와버린 남부의 대의원들은 독자적인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브레킨리지 부통령을 후보로 선출했다.[31] 더글라스와 브레킨리지는 한때 서로를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추천하던 정치적 동지였지만, 노예제의 연방 합법화 이슈에 관한 의견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공화당에서는 1858년 더글라스와의 토론으로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스타가 된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내 거물들을 꺾고 후보로 지명된다. 창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권 다툼이 끝나지 않았고, 대외로는 급진적인 반노예 운동가 집단이라는 공격을 받던 공화당으로서는 정치 경험이 적고 노예제를 소극적이지만 논리적으로 반대하던 링컨이 알맞은 선택이었다. 한편, 휘그당의 와해와 공화당의 반노예적 스탠스로 인해 갈 곳을 잃은 남부 휘그당원들은 입헌연합당을 창당하여 노예제 확장에 완강히 반대하던 원로 정치인 존 벨 상원의원을 후보로 지명했다.
결국 북부 주에서는 더글라스 vs. 링컨의 양강구도로, 남부 주에서는 벨 vs. 브레킨리지의 구도에 소수의 더글라스 지지자들이 스포일러 역할을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전국적인 어필을 가진 후보는 더글라스가 유일했으며, 몇몇 남부 주들은 링컨의 후보 등록 조차 받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인해 링컨의 공화당은 40%도 안 되는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모든 주를 싹쓸이했다. 남부에서도 노예제 온건파 표를 벨과 더글라스가 나눠 가지는 바람에 브레킨리지가 거의 모든 주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남부의 선거인단만으로 북부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링컨이 대통령이 된다. 이에 남부가 반발, 사우스캐롤라이나부터 시작된 연방탈퇴를 시작으로 남북 전쟁이 시작된다.
2.16. 1864년
자세한 내용은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64년 | ||
후보 |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 조지 B. 맥클레런 전 육군 총지휘관 |
당적 | | |
출신 주 | 일리노이(승) | 뉴저지(승) |
러닝메이트 | 앤드루 존슨 테네시 군정 주지사 | 조지 H. 펜들턴 하원의원 |
선거인단 | 212 | 21 |
득표수 | 2,218,388 | 1,812,807 |
득표율 | 55.0% | 45.0% |
네바다, 웨스트버지니아, 캔자스 주 가입. 남부연합 11개 주는 불참. |
1864년 대선은 남북 전쟁 중이라 링컨이 민주당과 연합해서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하여 북부민주당(남부민주당은 아예 다른 나라로 떨어져나갔고...)이 이에 동의,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보낸다. 이 때문에 단독 후보로 링컨이 출마하여 조지 워싱턴 때처럼 무투표 당선되나 했는데... 조지 맥클레런 장군이 후보 등록 마감 30분을 앞두고 후보 등록하여 단독 후보로 출마하려던 링컨을 엿먹였다. 남북전쟁 중이라 남부 11개 주에서는 투표가 실시되지 않았다. 또 이 선거 직후 링컨이 암살되면서 대통령직은 민주당 출신인 앤드루 존슨이 맡게 된다.
2.17. 1868년
1868년 | ||
후보 | 율리시스 S. 그랜트 육군 총지휘관 | 호레이쇼 시모어 전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일리노이(승) | 뉴욕(승) |
러닝메이트 | 스카일러 콜팩스 하원의장 |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 Jr. 전 하원의원 |
선거인단 | 214 | 80 |
득표수 | 3,013,650 | 2,708,744 |
득표율 | 52.7% | 47.3% |
네브레스카 주 가입. 미시시피, 버지니아, 텍사스 주는 군정으로 인한 선거권 박탈. |
남북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링컨은 암살당했고 존슨은 상원 탄핵 직전까지 몰리는 바람에 인재가 없던 공화당은 남북전쟁 영웅 그랜트를 후보로 추대했고, 인기와 리더십 선전에 힘입어 무난히 대통령이 된다. 그래도 민주당이 꽤 높은 표를 얻었는데, 이는 상대 후보 시모어가 당시 민주당의 반강제에 가까운 권유로 마지못해 후보직을 받았지만 막상 유세전에서는 열심히 하고 다녀 어느정도 지지율을 끌어모은 것도 있다.
2.18. 1872년
1872년 | ||
후보 |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 호레이스 그릴리 <뉴욕 트리뷴> 편집장 |
당적 | | [32] |
출신 주 | 일리노이(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헨리 윌슨 상원의원 | 벤저민 G. 브라운 미주리 주지사 |
선거인단 | 286 | 66[33] |
득표수 | 3,598,235 | 2,834,761 |
득표율 | 55.6% | 43.8% |
- |
1872년 대선은 북부민주당과 남부민주당 통합 직후(1870년 통합)라 민주당 당내 내분이 심각했고, 공화당은 공화당대로 그릴리가 그랜트의 부패를 비판하며 공화당에서 탈당, 자유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자유공화당 후보이자 노예제 철폐론자 그릴리를 지지하여 대선 후보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릴리가 투표 직전 갑자기 사망해버리면서 그릴리의 지지율이 분열되었다. 그래서 그랜트가 부패 대통령이라는 오명에도 지난번 선거보다 더욱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2.19. 1876년
1876년 | ||
후보 | 러더퍼드 B. 헤이스 주지사 | 새뮤얼 J. 틸던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뉴욕(승) |
러닝메이트 | 윌리엄 A. 휠러 하원의원 | 토머스 A. 헨드릭스 인디애나 주지사 |
선거인단 | 185[34] | 184 |
득표수 | 4,036,572 | 4,284,020 |
득표율 | 47.9% | 50.9% |
콜로라도 주 가입. 새뮤얼 틸던은 전체 득표수는 이겼지만 선거인단에서 져서 낙선. |
1876년 선거는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선거였다. 그랜트 8년 집권 동안 넘쳐나는 부패 스캔들로 인해 공화당의 지지도가 확 떨어졌고, 헤이스 또한 청렴하다 외에는 도저히 선전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전체 득표율에선 틸던이 한참 앞섰고 선거인단도 184명을 확보해 1명만 더 얻었으면 되었는데, 선거인단 득표에서 185:184 단 1표 차이로 당선인이 갈렸다. 승리자 결정이 안된 3개 주 19명의 선거인단이 헤이스에게 몰표된 이유였는데, 자세한 것은 러더퍼드 B. 헤이스 문서 참조. 이 선거부터 현재까지 가끔 제3정당이 약진하기도 하나 대략적으로 공화당 대 민주당이라는 양강 구조가 성립되었다.
2.20. 1880년
1880년 | ||
후보 | 제임스 A. 가필드 하원의원 | 윈필드 스콧 핸콕 육군 소장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펜실베이니아(패) |
러닝메이트 | 체스터 A. 아서 뉴욕주 공화당 대표 | 윌리엄 H. 잉글리시 전 하원의원 |
선거인단 | 214 | 155 |
득표수 | 4,446,158 | 4,444,260 |
득표율 | 48.3% | 48.2% |
- |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 중 하나. 득표차는 1,898. 다만 선거인단 수는 꽤 차이났는데, 이는 승자독식제와 공화당이 쥐고 있던 북부의 선거인단이 많았기 때문. 선거전은 꽤 복잡했는데, 대통령 후보 가필드는 당시 뉴욕을 쥐고 있었던 부패 거물 콩글링과 협상을 했는데 콩글링 파였던 아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 콩글링 파 몇몇을 장관에 앉히는 것을 약속하고 뉴욕 주는 공화당 지지를 하는 것으로 협상했다. 만약 뉴욕 주(당시 선거인단 35명)가 민주당 승리로 끝났다면 190 vs 179로 민주당이 승리할 뻔했다. 하지만 가필드는 부패를 걱정해 아서를 제외한 콩글링 파를 배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한 콩글링 파 중 하나인 찰스 기토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2.21. 1884년
1884년 | ||
후보 | 그로버 클리블랜드 주지사 | 제임스 G. 블레인 전 국무장관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메인(승) |
러닝메이트 | 토머스 A. 헨드릭스 전 인디애나 주지사 | 존 A. 로건 상원의원 |
선거인단 | 219 | 182 |
득표수 | 4,874,621 | 4,848,936 |
득표율 | 48.5% | 48.2% |
- |
뉴욕 주지사 때의 반부패 정치로 인기를 얻은 클리블랜드는 대통령 후보로 직행을 했고, 몇만 표 차이로 블레인을 겨우 이기면서 24년 만의 공화당 독식 체제를 종결시킨다. 클리블랜드는 공화당으로부터 당시 사생아 스캔들로 공격받고 있었는데, 인정하고 양육비를 지급하겠다고 선언해 오히려 책임있는 행동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다. 또한 이 당시 분위기는 남북전쟁 참전이 정치인의 필수 이력이었지만, 클리블랜드는 돈을 내 대리인을 보내[35] 논란이 됐다. 다만 나중에 블레인도 똑같이 대리인을 보낸 것이 확인돼서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제임스 블레인이 당선되었다면 제임스 매디슨-제임스 먼로에 이어 두번째로 같은당의 제임스 대통령이 연달아 집권하는 사례가 되었을것이다.
2.22. 1888년
1888년 | ||
후보 | 벤저민 해리슨 전 상원의원 |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인디애나(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레비 P. 모턴 전 프랑스 주재 대사 | 알렌 G. 서먼 전 상원의원 |
선거인단 | 233 | 168 |
득표수 | 5,443,892 | 5,534,488 |
득표율 | 47.8% | 48.6% |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전체 득표수는 이겼지만 선거인단에서 져서 낙선. |
노동 운동과 관련해 노동자들에게 미움받았만 그래도 무난하게 국정을 수행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가 전체 투표에서는 승리했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꽤 밀려 손자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준다. 진 이유는 자신의 텃밭이던 뉴욕 주 때문이었는데, 공화당의 근거없는 친영파 선전으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대거 클리블랜드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
2.23. 1892년
자세한 내용은 18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892년 | |||
후보 | 그로버 클리블랜드 전 대통령 |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 제임스 B. 위버 전 하원의원 |
당적 | | | |
출신 주 | 뉴욕(승) | 인디애나(패) | 아이오와(패) |
러닝메이트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 전 하원의원 | 화이트로 리드 전 프랑스 주재 대사 | 제임스 G. 필드 전 버지니아주 법무장관 |
선거인단 | 277 | 145 | 22 |
득표수 | 5,556,918 | 5,176,108 | 1,041,028 |
득표율 | 46.0% | 43.0% | 8.5% |
노스다코다, 사우스다코타, 몬태나, 워싱턴, 아이다호, 와이오밍 주 가입. 유이한 연임을 하지않고 2선을 한 사례. |
매킨리 법이 초래한 물가 조절 실패와 해리슨의 좋지 않은 이미지[36] 때문에 전망이 좋지 않았던 터라 꽤 높은 격차로 민주당의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으로 복귀한다.
2024년까지는 미국 역사상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이 2선에 성공한 유일한 선거였으나,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2선에 성공하며 이 기록은 깨졌다.
2.24.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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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윌리엄 매킨리 전 주지사 | 윌리엄 J. 브라이언 전 하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네브래스카(승) |
러닝메이트 | 개릿 A. 호바트 전 뉴저지 주상원의장 | 아서 시월 메인 센트럴 철도공사 이사 |
선거인단 | 271 | 176 |
득표수 | 7,104,779 | 6,502,925 |
득표율 | 51.0% | 46.7% |
유타 주 가입. |
노동 쟁의가 극렬했던 19세기 말 클리블랜드의 실패로 윌리엄 J. 브라이언이 대안으로 떠올랐는데, 브라이언은 대놓고 '금십자가 연설'[37] 에서 친노동자 정책과 기업 증세를 공약했고, 이에 반발한 대기업들이 공화당에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을 대면서 매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2.25.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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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 윌리엄 J. 브라이언 전 하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네브래스카(패) |
러닝메이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뉴욕 주지사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 전 부통령 |
선거인단 | 292 | 155 |
득표수 | 7,228,864 | 6,370,932 |
득표율 | 51.6% | 45.5% |
- |
현직 매킨리 대통령이 미국-스페인 전쟁의 승리, 당시 서양의 대세였던 제국주의와 자유무역에 동참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의 지지를 얻어 4년 전 선거보다 격차를 벌려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매킨리는 2기 취임 얼마 뒤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무정부주의자 레온 촐고츠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승계했다.
3. 20세기
3.1.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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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 앨턴 B. 파커 전 뉴욕주 상소법원장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찰스 W. 페어뱅크스 상원의원 | 헨리 G. 데이비스 전 상원의원 |
선거인단 | 336 | 140 |
득표수 | 7,630,457 | 5,083,880 |
득표율 | 56.4% | 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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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격동의 시대에서 셔먼 독점금지법의 활용, 제국주의 합류 등 여러 업적[38]을 해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남부 골수 민주당 지지세력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고른 지지를 받았고, 최초로 30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3.2.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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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윌리엄 H. 태프트 전 전쟁장관 | 윌리엄 J. 브라이언 전 하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네브래스카(승) |
러닝메이트 | 제임스 S. 셔먼 하원의원 | 존 W. 컨 전 상원의원 |
선거인단 | 321 | 162 |
득표수 | 7,678,395 | 6,408,984 |
득표율 | 51.6% | 43.0% |
오클라호마 주 가입. |
7년의 임기를 마치고도 TR의 인기는 여전히 높아서, 한때 3선 출마도 거론됐었고 본인도 욕심이 있었지만 워싱턴부터 이어진 2선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태프트를 후임으로 지명했고, 태프트는 TR의 후광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당에서는 브라이언이 다시 한 번 후보가 되어 대권에 도전했지만, 그가 16년 전부터 주장한 진보적 과제는 이미 TR과 국무위원 시절 태프트가 어느정도 이뤘기 때문에 인기가 식었다.
3.3.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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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우드로 윌슨 주지사 |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 | 윌리엄 H. 태프트 대통령 |
당적 | | | |
출신 주 | 뉴저지(승) | 뉴욕(패) | 오하이오(패) |
러닝메이트 | 토머스 R. 마셜 인디애나 주지사 | 하이럼 존슨 상원의원 | 니콜라스 M. 버틀러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선거인단 | 435 | 88 | 8 |
득표수 | 6,293,454 | 4,119,207 | 3,483,922 |
득표율 | 42.5% | 27.8% | 23.5% |
제 3당이 양당 구도를 깬 유일한 선거. |
태프트가 TR의 기대와는 다르게 TR의 조언을 무시하고 측근마저 해고해 버린데다 독단적으로 몇몇 상원의원하고만 정무를 보자 분노한 루스벨트는 3선 도전을 선언했고, 2선 전통을 지키라는 내부 불만과 태프트에 대한 동정 덕분에 공화당 경선에서 태프트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반발한 루스벨트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공화당을 탈당해 진보당을 창당했고, 이로써 공화당이 쪼개져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손쉽게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루스벨트는 공화당을 제치고 제3당이 2위를 한 유일한 선거로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39]
3.4.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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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우드로 윌슨 대통령 | 찰스 에번스 휴즈 전 대법관 |
당적 | | |
출신 주 | 뉴저지(패) | 뉴욕(승) |
러닝메이트 | 토머스 R. 마셜 부통령 | 찰스 W. 페어뱅크스 전 부통령 |
선거인단 | 277 | 254 |
득표수 | 9,126,868 | 8,548,728 |
득표율 | 49.2% | 46.1% |
-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이 시기 미국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 윌슨 행정부는 루시타니아 호 사건 등 독일 주도의 동맹국 때문에 미국 상선과 민간인 피해가 몇 번 일어났는데도 참전하지 않았고 공화당에서는 이걸 파고들었지만, 민주당은 전쟁을 하지 않아 미국은 안전하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어렵사리 이긴다.[40][41] 하지만 대선 직후, 치머만 사건이 터지고 이를 계기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3.5.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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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워런 G. 하딩 상원의원 | 제임스 M. 콕스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오하이오(승) | 오하이오(패) |
러닝메이트 | 캘빈 쿨리지 매사추세츠 주지사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해군부 차관 |
선거인단 | 404 | 127 |
득표수 | 16,144,093 | 9,139,661 |
득표율 | 60.3% | 34.1% |
미국 전역 백인 보통선거 확립.[42] |
1차 세계대전 이후 실업 문제, 국제연맹 가입 논쟁 등 수많은 문젯거리 때문에 공화당의 우세가 눈에 보여서, 공화당 내부에서는 서로 대통령 후보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9번이나 경선을 치렀는데도 후보를 뽑지 못했고, 거물 정치인들은 타협으로 인지도 1도 없는 상원의원 워런 G. 하딩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하딩은 무명임에도 선거에서 아주 크게 이겼는데, 유권자들이 하딩이 잘 언급되지 않아서 부패 정치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 선거를 기점으로 미국 전역에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면서 잘생겼던 하딩에게 표가 많이 갔다고 한다.[43]
3.6. 19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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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캘빈 쿨리지 대통령 | 존 W. 데이비스 전 영국 주재 대사 | 로버트 M. 라폴레트 상원의원 |
당적 | | | |
출신 주 | 매사추세츠(승) | 웨스트버지니아(패) | 위스콘신(승) |
러닝메이트 | 찰스 G. 도스 전 예산국장 | 찰스 W. 브라이언 네브래스카 주지사 | 버튼 K. 휠러 상원의원 |
선거인단 | 382 | 136 | 13 |
득표수 | 15,723,789 | 8,386,242 | 4,831,706 |
득표율 | 54.0% | 28.8% | 16.6% |
- |
하딩이 1923년 8월 건강 악화로 급사하자, 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평소 짧은 사이다 발언으로 유명했던 쿨리지는 2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하딩이 방관한 부패 정치인 해리 도허티와 알버트 폴 등을 쫓아내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1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만 대통령직에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더 주자는 여론 덕분에 넉넉한 차이로 연임에 성공한다.
3.7.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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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허버트 C. 후버 전 상무장관 | 앨 스미스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캘리포니아(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찰스 커티스 상원의원 | 조지프 T. 로빈슨 상원의원 |
선거인단 | 444 | 87 |
득표수 | 21,427,123 | 15,015,464 |
득표율 | 58.2% | 40.8% |
- |
이 선거 뒤 1년도 안 돼서 대공황이 터지지만, 이 당시는 아직은 경기가 상승세라서 공화당의 인기가 여전히 강했고, 경제통으로 불렸던 허버트 후버가 "모든 차고에 차를! 모든 냄비에 치킨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압도적으로 당선한다. 반대로 앨 스미스는 가톨릭 교도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어 압도적으로 패배했지만, 대통령 후보 중 최초의 가톨릭 교도로 이름을 올렸다.[44] 처음으로 텍사스에서 공화당이 승리한 대선이기도 하다.
3.8.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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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주지사 | 허버트 C. 후버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캘리포니아(패) |
러닝메이트 | 존 N. 가너 하원의장 | 찰스 커티스 부통령 |
선거인단 | 472 | 59 |
득표수 | 22,821,277 | 15,761,254 |
득표율 | 57.4% | 39.7% |
- |
후버의 취임 9개월 만에 대공황이 터지고, 대공황의 원흉으로 찍힌 후버와 공화당은 당연히 참패할 거란 예측이 나왔다. 최종적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공화당을 손쉽게 발라버리고 당선, 12년 만에 백악관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3.9.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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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 앨프리드 M. 랜던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캔자스(패) |
러닝메이트 | 존 N. 가너 부통령 | 프랭크 녹스 <시카고 데일리 뉴스> 발행인 |
선거인단 | 523 | 8 |
득표수 | 27,747,636 | 16,679,543 |
득표율 | 60.8% | 36.5% |
역대 득표율/선거인단 최다 격차 승리. |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1937년 초까지는 꽤 효과를 보아서 실업률도 어느정도 내려가고 안정세를 찾자, 민주당과 루스벨트의 지지도는 상승했고 최다 선거인단 표차로 대승한다. 상대 후보 랜든은 버몬트 주(3명)와 메인 주(5명)만 이겼다.[45]
3.10.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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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 웬델 윌키 C&S 전력회사 회장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헨리 A. 월리스 전 농업부 장관 | 찰스 맥내리 상원의원 |
선거인단 | 449 | 82 |
득표수 | 27,313,945 | 22,347,744 |
득표율 | 54.7% | 44.8% |
최초의 3선 당선. |
루스벨트의 3선 선언에 공화당은 강력히 비판했고 민주당 내부에서도 머뭇거렸지만, 당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데다 1차 뉴딜의 부작용으로 또다시 실업률이 상승하자 뉴딜 정책 2기를 외치며 급박한 정세에 지도자를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했고, 1차대전 때의 후폭풍 재발 방지와 뉴딜 정책 유지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유권자들이 워싱턴 이래의 2선 전통을 깨고 루스벨트를 지지, 최초의 3선 대통령이 되었다.
3.11.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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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 토머스 E. 듀이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뉴욕(패) |
러닝메이트 | 해리 S. 트루먼 상원의원 | 존 W. 브리커 오하이오 주지사 |
선거인단 | 432 | 99 |
득표수 | 25,612,916 | 22,017,929 |
득표율 | 54.7% | 45.9% |
최초의 4선 당선. |
2차대전 참전으로 인해 전시 체제로 돌입한 미국, 루스벨트는 전쟁 중에 지도자를 바꿀 수 없다고 4선에 도전했고, 공화당은 영구집권하냐고 맹렬히 비판한 토마스 듀이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당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변화보다는 전시 체제 유지를 위해 루스벨트를 선택했지만[46], 몸도 안 좋았던 데다 격무에 시달렸고 4선 취임 두 달 뒤 사망한다. 종전 후 루스벨트의 4선은 온갖 비판을 받고 결국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을 8년만 하도록 바뀌었다.
3.12.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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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 토머스 E. 듀이 주지사 | 스트롬 서먼드 주지사 |
당적 | | | |
출신 주 | 미주리(승) | 뉴욕(승) | 사우스캐롤라이나(승) |
러닝메이트 | 앨번 W. 바클리 상원의원 | 얼 워런 캘리포니아 주지사 | 필딩 L. 라이트 미시시피 주지사 |
선거인단 | 303 | 189 | 39 |
득표수 | 24,105,695 | 21,969,170 | 1,169,021 |
득표율 | 49.8% | 45.3% | 2.5% |
- |
2차대전 이후에도 1차대전과 똑같이 전후 문제가 여럿 터졌다. 실업률, 국제연합, 그리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체제 하에서 트루먼의 정책은 보기에는 지지부진했고, 이때에는 민주당 장기집권으로 말이 많았을 때였다. 그리고 골수 민주당 텃밭이었던 동남부 주에서 주권민주당이 민주당에서 분리된데다 전임 부통령 헨리 월리스까지 대선 출마까지 선언하니 민주당은 1860년의 상황과 거의 똑같이 직면하게 되었다. 언론들도 트루먼의 재선보다는 듀이의 승을 예견하고 있었고, 트루먼 스스로도 질 것으로 예상하고 개표 결과도 안 보고 일찍 잠들었는데, 재선 성공소식을 다음날 들었다고 한다. 시카고 트리뷴 신문이 작성한 '듀이가 트루먼을 이기다!'라고 적혀있는 오보 1면을 들면서 활짝 웃는 모습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
3.13.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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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육군참모총장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승) | 일리노이(패) |
러닝메이트 | 리처드 M. 닉슨 상원의원 | 존 스파크맨 상원의원 |
선거인단 | 442 | 89 |
득표수 | 34,075,529 | 27,314,992 |
득표율 | 55.2% | 44.3% |
- |
한국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강했고, 공화당 후보이자 전쟁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 방문과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는데 성공한다. 무엇보다 민주당 20년 장기집권으로 인해 피로감이 만만치 않게 누적되어 있었다.
3.14.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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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전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펜실베이니아(승)[47] | 일리노이(패) |
러닝메이트 | 리처드 M. 닉슨 부통령 | 에스테스 키포버 상원의원 |
선거인단 | 457 | 73 |
득표수 | 35,579,180 | 26,028,028 |
득표율 | 57.4% | 42.0% |
- |
이 시기 미국 경제가 꽤 성장하고, 냉전 체제 속에서도 안정과 번영을 이룬 아이젠하워의 지지도는 더욱 상승했고, 카리스마까지 갖춘 그는 당연히 재선출마했고 4년 전보다 더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20세기 대통령 중 TR, 레이건과 아이젠하워를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3.15.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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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 리처드 M. 닉슨 부통령 | 해리 F. 버드 상원의원 |
당적 | | | |
출신 주 | 매사추세츠(승) | 캘리포니아(승) | 버지니아(불출마) |
러닝메이트 | 린든 B. 존슨 상원의원 | 헨리 캐벗 로지 전 유엔 주재 대사 | 공식 후보 없음[48] |
선거인단 | 303 | 219 | 15[49] |
득표수 | 34,220,984 | 34,108,157 | 0[50] |
득표율 | 49.7% | 49.6% | 0.0%[51] |
알래스카, 하와이 주 가입.[52] |
아이젠하워의 후광을 받고 경험을 쌓은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민주당에서는 '뉴 프론티어'를 내세운 젊은 후보 존 F. 케네디를 후보로 지명한다. 선거전은 엄청 치열했지만, 케네디의 젊고 활기찬 이미지가 TV 토론회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면서 닉슨을 이기는데 성공한다.[53], 이 선거부터 TV 토론회가 시작됐는데, 케네디가 이를 잘 활용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이 대다수.[54]
3.16.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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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린든 B. 존슨 대통령 |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텍사스(승) | 애리조나(승) |
러닝메이트 | 휴버트 H. 험프리 상원의원 | 윌리엄 밀러 하원의원 |
선거인단 | 486 | 52 |
득표수 | 43,127,041 | 27,175,754 |
득표율 | 61.1% | 38.5% |
워싱턴 D.C 선거인단 추가로 인한 선거인단 538명 정립. |
케네디의 암살 후 대통령을 승계받은 존슨은 위대한 사회를 내세우며 실질적 평등을 추구했고 이 시기 흑인들의 인권이 크게 개선되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역대최다 득표율을 차지한다. 재밌는 것은 50년대까지는 텃밭이었던 동남부 주들이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공화당 텃밭이 된 것. 반대로 민주당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공화당 텃밭이었던 캘리포니아와 북동부 주들을 얻는 데 성공, 양당의 텃밭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버린다.
3.17.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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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리처드 M. 닉슨 전 부통령 | 휴버트 H. 험프리 부통령 | 조지 C. 월리스 전 주지사 |
당적 | | | |
출신 주 | 캘리포니아(승) | 미네소타(승) | 앨라배마(승) |
러닝메이트 | 스피로 애그뉴 메릴랜드 주지사 |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 커티스 르메이 전 공군참모총장 |
선거인단 | 301 | 191 | 46 |
득표수 | 31,783,783 | 31,271,839 | 9,901,118 |
득표율 | 43.4% | 42.7% | 13.5% |
미국 전체 보통선거 확립. |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군의 피해가 속출하자, 반전 여론이 한국전쟁보다 더욱 심해지고 히피 문화까지 창궐한 미국 사회는 상당히 혼란스러었다. 이를 막지 못한 존슨의 책임론이 두드러졌고, 닉슨은 이를 비판하며 대권 재도전을 했고, 부통령 험프리가 민주당 후보로 나섰고 치열한 대결을 펼쳤지만 인종분리정책을 고수하던 조지 월리스가 미국 독립당 후보로 단독출마해 험프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때는 이미 남부가 보수화되어 공화당 쪽에 기울어진 것도 있지만, 당시 스윙보터였던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주를 민주당과 표를 갈라먹기해 닉슨에게 졌다. 여담으로 이 선거부터 흑인을 포함한 히스패닉, 아시아계 등 유색인종의 투표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3.18.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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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리처드 M. 닉슨 대통령 |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캘리포니아(승) | 사우스다코타(패) |
러닝메이트 |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 | 사전트 슈라이버 전 프랑스 주재 대사 |
선거인단 | 520 | 17 |
득표수 | 47,168,710 | 29,173,222 |
득표율 | 60.7% | 37.5% |
- |
베트남전 종전, 소련과의 우주 경쟁 승리, 데당트로 인한 냉전 분위기 완화 등 여러 치적을 세운 닉슨은 역대 선거 최다득표차를 기록한다. 민주당은 겨우 매사추세츠 주와 워싱턴 D.C만 승리했다. 하지만 이 선거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닉슨은 유일한 중도사임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3.19.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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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지미 카터 전 주지사 | 제럴드 R. 포드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조지아(승) | 미시간(승) |
러닝메이트 | 월터 먼데일 상원의원 | 밥 돌 상원의원 |
선거인단 | 297 | 240 |
득표수 | 40,831,881 | 39,148,634 |
득표율 | 50.1% | 48.0% |
- |
이때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인해 닉슨의 이미지가 아직 나빴던 것도 있고, 닉슨 사임 후 1달 만에 사면한 제럴드 포드에게 비판이 가해졌고, 게다가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민주당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졌고, 땅콩 농장주 출신이라는 이력을 가진 지미 카터가 동부 상당수와 마지막으로 남부 주를 석권하는데 성공해 당시 무뚝뚝한 이미지를 가진 포드를 어렵사리 이긴다.
3.20.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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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로널드 레이건 전 주지사 | 지미 카터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캘리포니아(승) | 조지아(승) |
러닝메이트 | 조지 H. W. 부시 전 CIA 국장 | 월터 먼데일 부통령 |
선거인단 | 489 | 49 |
득표수 | 43,903,230 | 35,480,115 |
득표율 | 50.7% | 41.0% |
- |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폴 볼커의 고금리 정책, 제2차 오일쇼크 등 악재만 겹친 카터 정부는 무능한 정부라고 낙인찍히고,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등장해 강대한 미국 세우기라는 슬로건으로 카터를 압도적으로 이긴다. 그리고 이 선거는 여성 유권자의 투표율이 남성 유권자를 따라 잡은 최초의 선거이기도 하다.
3.21.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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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캘리포니아(승) | 미네소타(승) |
러닝메이트 | 조지 H. W. 부시 부통령 | 제럴딘 페라로 하원의원 |
선거인단 | 525 | 13 |
득표수 | 54,455,472 | 37,577,352 |
득표율 | 58.8% | 40.6% |
역대 최다 선거인단 득표 당선. |
레이건의 외교 정책은 소련을 확실히 압도하는데 성공하고, 2차 오일 쇼크 여파를 확실히 해결하면서 80년 경제 호황을 누린 미국은 레이건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역대 최고 선거인단을 얻는데 성공한다. 먼데일은 겨우 자기 고향 미네소타와 워싱턴 D.C만 승리를 한다. 그리고 먼데일은 최초 여성 부통령 후보 제럴린 페라로와 러닝메이트를 맺었다.[55]
3.22.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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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조지 H. W. 부시 부통령 | 마이클 두카키스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텍사스(승) | 매사추세츠(승) |
러닝메이트 | 댄 퀘일 상원의원 |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 |
선거인단 | 426 | 111 |
득표수 | 48,886,597 | 41,809,074 |
득표율 | 53.4% | 45.6% |
- |
레이건의 인기는 높았지만 말년의 이미지가 안 좋았고 채무가 엄청나게 쌓여 후임 후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떠맡을게 될 숙제가 많았다. 그리고 여론도 마이클 두카키스로 기울고 있었지만 부시 캠프의 전략가 리 애트워터가 두카키스를 선동과 조작을 일삼으며 공격했고, 두카키스는 이 네거티브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는데 실패해 부정적 이미지만 쌓인 채 패하고 말았다.
3.23. 1992년
자세한 내용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992년 | |||
후보 | 빌 클린턴 주지사 | 조지 H. W. 부시 대통령 | 로스 페로 페로 시스템즈 CEO |
당적 |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출신 주 | 아칸소(승) | 텍사스(승) | 텍사스(패) |
러닝메이트 | 앨 고어 상원의원 | 댄 퀘일 부통령 | 제임스 스톡데일 전 해군 중장 |
선거인단 | 370 | 168 | 0 |
득표수 | 44,908,254 | 39,102,343 | 19,743,821 |
득표율 | 43.3% | 37.7% | 18.9% |
- |
냉전 승리, 걸프전 승리 등 부시의 지지율은 89~91%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직후 일시적인 경제 침체가 발목을 잡았고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집중공격했다. 여론은 그래도 부시가 이길 것이라고 봤지만, 갑자기 로스 페로라는 사업가가 대선 출마하면서 상황이 꼬여버린다. 로스 페로는 명목상 정치관은 중립이였지만 주요 공약 내용이 공화당과 비슷해 보수표 갈라먹기가 발생했고, 무려 19%나 잠식을 해버렸다. 그래서 미국 역사상 유일한 3자 TV 토론이 열렸다. 결국 공화당의 텃밭이라던 중부와 남부 절반을 클린턴이 뺏어가면서 민주당에게 백악관을 내주게 되었다.
3.24. 1996년
자세한 내용은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1996년 | ||
후보 | 빌 클린턴 대통령 | 밥 돌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아칸소(승) | 캔자스(승) |
러닝메이트 | 앨 고어 부통령 | 잭 켐프 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
선거인단 | 379 | 159 |
득표수 | 47,401,185 | 39,197,469 |
득표율 | 49.2% | 40.7% |
- |
1990년대 중반부터 IT 산업으로 경제 호황을 누린 미국은 투표율이 50%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빌 클린턴이 무난히 재선에 성공한다. 이 시기부터 서부-동부 민주당 텃밭과 중서부-남부의 공화당 텃밭이 공고히 유지하게 되고, 러스트 벨트와 중부, 플로리다 지역이 경합주로 바뀌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3.25. 2000년
자세한 내용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00년 | ||
후보 | 조지 W. 부시 주지사 | 앨 고어 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텍사스(승) | 테네시(패) |
러닝메이트 | 딕 체니 전 국방장관 | 조 리버만 상원의원 |
선거인단 | 271 | 266 |
득표수 | 50,456,002 | 50,999,897 |
득표율 | 47.9% | 48.4% |
앨 고어는 전체 득표수는 이겼지만 선거인단에서 져서 낙선. |
112년 만에 전체 득표는 이겼지만 선거인단, 그것도 5명차로 진 경우가 발생했다. 앨 고어와 부시 두 후보 모두 텃밭과 경합주를 반반씩 갈라 먹었지만, 마지막 경합주 플로리다에서 재검표 진행이라는 문제가 발생했다. 인구 수 4위 주 플로리다 전체 재검표에 시간이 걸리고, 일일이 따지려고 들면 클린턴 퇴임 이후에도 해결될 기미가 안보이자, 연방대법원은 재검표 중단을 선언하고 최초 우세였던 조지 W.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래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원이 멋대로 재검표를 중단시키는것은 명백히 월권이긴 하다. 앨 고어와 민주당이 세게 안 나가고 수용해서 다행인 거지, 만약 제대로 몰아붙였으면 엄청난 혼란을 불러왔을 것이다.
당연히 이 선거 이후 선거인단, 승자독식주의의 현 대통령 선거 제도를 재검토를 하자는 여론이 생겼다.
두 후보가 얻은 선거인단 숫자를 합하면 전체 선거인단 숫자에서 1명이 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건 앨 고어의 선거인단이었던 한 사람이 워싱턴 D.C.의 제한적인 연방 참정권에 항의하는 뜻에서 기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4. 21세기
4.1. 2004년
자세한 내용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04년 | ||
후보 | 조지 W. 부시 대통령 | 존 F. 케리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텍사스(승) | 매사추세츠(승) |
러닝메이트 | 딕 체니 부통령 |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 |
선거인단 | 286 | 251 |
득표수 | 62,040,610 | 59,028,444 |
득표율 | 50.7% | 48.3% |
부자(父子) 대통령 중 최초의 연임 성공.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지금 와서는 욕을 엄청 먹지만 그 당시에는 승승장구했고 진상이 드러나지 않아 꽤 평판이 좋았고 9.11 테러 당시의 공포가 아직 있었던 국민들은 안전한 미국을 선호했다. 그리고 당시 화젯거리였던 동성결혼은 부정적 여론이 많았는데, 존 케리가 지지를 하자 경합주 상당수가 동성결혼에 반대했던 부시에게 몰렸던 것이 컸다. 부시는 재선에 성공해 아버지 부시가 못한 한을 이룬다.
4.2. 2008년
자세한 내용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08년 | ||
후보 |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 존 매케인 상원의원 |
당적 | | |
출신 주 | 일리노이(승) | 애리조나(승) |
러닝메이트 | 조 바이든 상원의원 |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 |
선거인단 | 365 | 173 |
득표수 | 69,498,516 | 59,948,323 |
득표율 | 52.9% | 45.7% |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 당선. |
이라크 전쟁의 진상,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 등으로 역대 최악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받은 부시와 공화당의 패배가 눈에 보였고, 변화를 추구하며 "Yes, We can!" 슬로건을 외친 버락 오바마는 경합주 대부분을 싹쓸이하며 존 매케인을 여유롭게 이긴다. 매케인은 여성표 흡수를 위해 세라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오히려 악수가 되어 되려 텃밭 몇 곳을 민주당에 바치는 실책만 저질렀다. 그리고 오바마는 미국 최초로 유색인종 대통령이 되었다.
4.3. 2012년
자세한 내용은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12년 | ||
후보 | 버락 오바마 대통령 | 밋 롬니 전 주지사 |
당적 | | |
출신 주 | 일리노이(승) | 매사추세츠(패) |
러닝메이트 | 조 바이든 부통령 | 폴 라이언 하원의원 |
선거인단 | 332 | 206 |
득표수 | 65,915,795 | 60,933,504 |
득표율 | 51.1% | 47.2% |
유색인종 흑인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
오바마케어 논쟁, 월가 금융위기 대처 미흡 등을 놓고 다시 공화당의 지지율이 올랐으며, 여기서 확실한 신자유주의 공약을 내세운 밋 롬니가 후보가 되면서 오바마와 붙는다. 9월까지는 호각세였지만, 막판에 터진 47% 발언[56] 때문에 롬니의 지지율이 확 내려간다. 하지만 TV 토론회에서 오바마 정부의 실책들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어느정도 회복했지만, 3차 토론회에서 말한 총검과 군마 사건[57]으로 다시 열세로 회귀했다(...). 그리고 선거날 경합주 2/3이 오바마에게 넘어가서 오바마는 재선에 성공한다.
4.4. 2016년
자세한 내용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16년 | ||
후보 |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 기업 회장 |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
당적 | | |
출신 주 | 뉴욕(패) | 뉴욕(승) |
러닝메이트 |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 | 팀 케인 상원의원 |
선거인단 | 304 | 227 |
득표수 | 62,984,828 | 65,853,514 |
득표율 | 46.1% | 48.2% |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전체 득표수는 이겼지만 선거인단에서 져서 낙선. |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예능인이라고 불렸던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의 대결이었다. 트럼프는 유명한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과거 레이건 시절의 슬로건을 내세웠고, 이를 통해 보수층을 단결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자신이 원하던 대통령이 된다. 도널드 트럼프는 러스트 벨트 등지에 평소 정치혐오 성향이 있던 백인 시골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서 이들을 투표소에 나오게 한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반대로 힐러리의 각종 논란으로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소에 안 나오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민주당의 텃밭이라 불리는 러스트 벨트에서 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찌보면 선거 때는 방심을 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 선거라 할 수 있다.
4.5. 2020년
자세한 내용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20년 | ||
후보 | 조 바이든 전 부통령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델라웨어(승) | 플로리다(승)[58] |
러닝메이트 |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 | 마이크 펜스 부통령 |
선거인단 | 306 | 232 |
득표수 | 81,283,495 | 74,223,755 |
득표율 | 51.4% | 46.9% |
역대 최고의 투표율. 최초의 여성/유색인종 부통령 당선. |
미국 우선주의로 인한 외교악화, 코로나19 대처 실패,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인종 간의 갈등으로 인해 정세가 상당히 불안해진다.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은 정상적인 외교 회복, 코로나19 위기 극복, 인종갈등 해소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트럼프는 북한 문제 해결, 중국 견제, 미국 우선주의를 공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트럼프가 우편투표 부정, 참전용사 비하, 마스크 미착용 등 막말과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분노한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바이든을 지지했고, 보수층은 트럼프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에게 올인해 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갱신한다. 하지만 러스트 벨트[59]와 조지아[60], 애리조나 주[61]에서 바이든이 이겼고, 4년전 비슷한 스코어로 트럼프에게 승리를 거뒀다.
4.6. 2024년
자세한 내용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024년 | ||
후보 |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
당적 | | |
출신 주 | 플로리다(승) | 캘리포니아(승) |
러닝메이트 | J. D. 밴스 상원의원 |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 |
선거인단 | 312 | 226 |
득표수 | - | - |
득표율 | - | - |
- |
코로나19발 세계적 인플레이션,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등지에서의 국제정세 혼란 등으로 인해 현직 민주당 대통령 조 바이든의 지지율이 상당히 낮아졌다. 민주당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했지만, 토론에서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고령 리스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사퇴 했으며, 그의 후임으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긴급하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한편, 공화당에서는 성추문 입막음, 기밀문서 유출, 선거 부정 개입 등 많은 사법 리스크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철벽같은 지지기반을 자랑하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다시 후보로 지명했다. 해리스 후보는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엄청난 선거자금과 조직력을 동원하여 잘 짜여진 선거운동을 펼쳤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서민경제 악화에 크게 지친 유권자들은 경제 및 불법이민자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대안을 제시한 트럼프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바이든이 2020년에 뒤집었던 러스트 벨트를 포함한 7개의 경합주들을 트럼프가 싹쓸이했으며, 특히 저소득층이 많은 히스패닉 계통 유권자들과 보수계 인플루언서들의 영향을 받은 젊은 남성 유권자들이 대거 트럼프 진영으로 이탈했다. 공화당은 기존 지지세력 너머로 저변 확대에 성공하며 20년만에 전체 득표수에서 앞서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민주당은 핵심지지층을 빼앗기는 충격적인 결과를 남기며 많은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5. 역대 지역별 결과
1 델라웨어 | 2 펜실베이니아 | 3 뉴저지 | 4 조지아 | 5 코네티컷 | 6 매사추세츠 | 7 메릴랜드 | 8 사우스캐롤라이나 | 9 뉴햄프셔 | 10 버지니아주 | 11 뉴욕 | 12 노스캐롤라이나 | 13 로드아일랜드 | 14 버몬트 | 15 켄터키 | 16 테네시 | 17 오하이오 | 18 루이지애나 | 19 인디애나 | 20 미시시피 | 21 일리노이 | 22 앨라배마 | 23 메인 | 24 미주리 | 25 아칸소 | 26 미시간 | 27 플로리다 | 28 텍사스 | 29 아이오와 | 30 위스콘신 | 31 캘리포니아 | 32 미네소타 | 33 오리건 | 34 캔자스 | 35 웨스트버지니아 | 36 네바다 | 37 네브래스카 | 38 콜로라도 | 39 노스다코타 | 40 사우스다코타 | 41 몬태나 | 42 워싱턴 | 43 아이다호 | 44 와이오밍 | 45 유타 | 46 오클라호마 | 47 뉴멕시코 | 48 애리조나 | 49 알래스카 | 50 하와이 | 51 워싱턴 D.C. | |
1789년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선거 안함 | ||||||||||||||||||||||||||||||||||||||||
1792년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조지 워싱턴 | ||||||||||||||||||||||||||||||||||||
1796년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존 애덤스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
1800년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존 애덤스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
1804년 | 찰스 C. 핑크니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찰스 C. 핑크니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토머스 제퍼슨 | ||||||||||||||||||||||||||||||||||
1808년 | 찰스 C. 핑크니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찰스 C. 핑크니 | 찰스 C. 핑크니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찰스 C. 핑크니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찰스 C. 핑크니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
1812년 | 드위트 클린턴 | 제임스 매디슨 | 드위트 클린턴 | 제임스 매디슨 | 드위트 클린턴 | 드위트 클린턴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드위트 클린턴 | 제임스 매디슨 | 드위트 클린턴 | 제임스 매디슨 | 드위트 클린턴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매디슨 | |||||||||||||||||||||||||||||||||
1816년 | 루퍼스 킹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루퍼스 킹 | 루퍼스 킹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
1820년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제임스 먼로 | |||||||||||||||||||||||||||
1824년 | 윌리엄 크로포드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윌리엄 크로포드 | 존 퀸시 애덤스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윌리엄 크로포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존 퀸시 애덤스 | 헨리 클레이 | 앤드루 잭슨 | 헨리 클레이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헨리 클레이 | |||||||||||||||||||||||||||
1828년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
1832년 | 헨리 클레이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존 플로이드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헨리 클레이 | 윌리엄 워트 | 헨리 클레이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앤드루 잭슨 | |||||||||||||||||||||||||||
1836년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휴 L. 화이트 | 마틴 밴 뷰런 | 다니엘 웹스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와일리 P. 맹검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휴 L. 화이트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
1840년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마틴 밴 뷰런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
1844년 | 헨리 클레이 | 제임스 K. 포크 | 헨리 클레이 | 제임스 K. 포크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헨리 클레이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제임스 K. 포크 | |||||||||||||||||||||||||
1848년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재커리 테일러 | 루이스 카스 | 재커리 테일러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재커리 테일러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루이스 카스 | |||||||||||||||||||||
1852년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윈필드 스콧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윈필드 스콧 | 윈필드 스콧 | 윈필드 스콧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프랭클린 피어스 | ||||||||||||||||||||
1856년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존 C. 프리몬트 | 밀러드 필모어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존 C. 프리몬트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제임스 뷰캐넌 | 제임스 뷰캐넌 | 존 C. 프리몬트 | 존 C. 프리몬트 | 제임스 뷰캐넌 | ||||||||||||||||||||
1860년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벨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벨 | 존 벨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스티븐 A. 더글러스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존 C. 브레킨리지 | 존 C. 브레킨리지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
1864년 | 조지 B. 매클레런 | 에이브러햄 링컨 | 조지 B. 매클레런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조지 B. 매클레런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안함 | 선거 안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에이브러햄 링컨 | |||||||||||||||
1868년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쇼 시모어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선거 안함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선거 안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선거 안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쇼 시모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
1872년[62]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스 그릴리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스 그릴리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스 그릴리 | 호레이스 그릴리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스 그릴리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스 그릴리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율리시스 S. 그랜트 | ||||||||||||||
1876년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새뮤얼 J. 틸던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러더퍼드 B. 헤이스 | |||||||||||||
1880년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제임스 A. 가필드 | 제임스 A. 가필드 | 윈필드 스콧 핸콕 | 윈필드 스콧 핸콕 | 제임스 A. 가필드 | 제임스 A. 가필드 | |||||||||||||
1884년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제임스 G. 블레인 | |||||||||||||
1888년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
1892년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제임스 B. 위버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임스 B. 위버 | 밴저민 해리슨 | 제임스 B. 위버 | 제임스 B. 위버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밴저민 해리슨 | 제임스 B. 위버 | 밴저민 해리슨 | |||||||
1896년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
1900년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매킨리 | ||||||
1904년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앨턴 B. 파커 | 앨턴 B. 파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
1908년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H. 태프트 | 윌리엄 J. 브라이언 | |||||
1912년 | 우드로 윌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윌리엄 H.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우드로 윌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윌리엄 H.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
1916년 | 찰스 에번스 휴즈 | 찰스 에번스 휴즈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찰스 에번스 휴즈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우드로 윌슨 | |||
1920년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제임스 M. 콕스 | 제임스 M. 콕스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워런 G. 하딩 | |||
1924년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로버트 M. 라폴레트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존 W. 데이비스 | 캘빈 쿨리지 | 캘빈 쿨리지 | |||
1928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앨 스미스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
1932년 | 허버트 C. 후버 | 허버트 C.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허버트 C.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허버트 C.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허버트 C.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허버트 C.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1936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앨프리드 M. 랜던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앨프리드 M. 랜던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1940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웬델 윌키 | 웬델 윌키 | 웬델 윌키 | 웬델 윌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1944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토머스 E. 듀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1948년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스트롬 서먼드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스트롬 서먼드 | 토머스 E. 듀이 | 스트롬 서먼드 | 해리 S. 트루먼 | 스트롬 서먼드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토머스 E. 듀이 | 토머스 E. 듀이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해리 S. 트루먼 | |||
1952년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
1956년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
1960년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헨리 버드 | 존 F. 케네디 | 헨리 버드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존 F. 케네디 | |
1964년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배리 골드워터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배리 골드워터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배리 골드워터 | 린든 B. 존슨 | 배리 골드워터 | 린든 B. 존슨 | 배리 골드워터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배리 골드워터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린든 B. 존슨 |
1968년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조지 C. 월리스 | 휴버트 H. 험프리 | 휴버트 H. 험프리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조지 C. 월리스 | 리처드 M. 닉슨 | 조지 C. 월리스 | 리처드 M. 닉슨 | 조지 C. 월리스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조지 C. 월리스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휴버트 H. 험프리 | 휴버트 H. 험프리 |
1972년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조지 맥거빈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리처드 M. 닉슨 | 조지 맥거빈 |
1976년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제럴드 R. 포드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1980년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지미 카터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지미 카터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지미 카터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지미 카터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지미 카터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지미 카터 | 지미 카터 |
1984년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월터 먼데일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로널드 W. 레이건 | 월터 먼데일 |
1988년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마이클 두카키스 | 마이클 두카키스 |
1992년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1996년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밥 돌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밥 돌 | 밥 돌 | 밥 돌 | 밥 돌 | 빌 클린턴 | 밥 돌 | 밥 돌 | 밥 돌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밥 돌 | 빌 클린턴 | 빌 클린턴 |
2000년 | 앨 고어 | 앨 고어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앨 고어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앨 고어 | 앨 고어 | 앨 고어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앨 고어 | 앨 고어 |
2004년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조지 W. 부시 | 존 F. 케리 | 존 F. 케리 |
2008년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존 매케인 | 존 매케인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2012년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밋 롬니 | 밋 롬니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
2016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
2020년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조 바이든 |
2024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도널드 트럼프 | 도널드 트럼프 | 카멀라 해리스 | 카멀라 해리스 |
1 델라웨어 | 2 펜실베이니아 | 3 뉴저지 | 4 조지아 | 5 코네티컷 | 6 매사추세츠 | 7 메릴랜드 | 8 사우스캐롤라이나 | 9 뉴햄프셔 | 10 버지니아주 | 11 뉴욕 | 12 노스캐롤라이나 | 13 로드아일랜드 | 14 버몬트 | 15 켄터키 | 16 테네시 | 17 오하이오 | 18 루이지애나 | 19 인디애나 | 20 미시시피 | 21 일리노이 | 22 앨라배마 | 23 메인 | 24 미주리 | 25 아칸소 | 26 미시간 | 27 플로리다 | 28 텍사스 | 29 아이오와 | 30 위스콘신 | 31 캘리포니아 | 32 미네소타 | 33 오리건 | 34 캔자스 | 35 웨스트버지니아 | 36 네바다 | 37 네브래스카 | 38 콜로라도 | 39 노스다코타 | 40 사우스다코타 | 41 몬태나 | 42 워싱턴 | 43 아이다호 | 44 와이오밍 | 45 유타 | 46 오클라호마 | 47 뉴멕시코 | 48 애리조나 | 49 알래스카 | 50 하와이 | 51 워싱턴 D.C. |
[1] 존 애덤스 34표, 존 제이 9표, 존 러틀리지 6표, 로버트 해리슨 6표 등이었다.[2] 하지만 미국 헌법은 재석 과반이 아닌 재적 과반을 대통령 선출 요건으로 정하고 있는 만큼 당선 요건은 여전히 37표였을 듯하다.[3] 원래는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라는 조항만 있었고 횟수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이론상 3선, 4선 이상도 가능했었다. 오히려 임기가 끝날때 쯤 모든 사람들이 3선출마를 원했지만, 워싱턴은 '고별사'를 낭독하면서 스스로 물러났다. 2선 제한이라는 조항이 생긴 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까지 하고 난 뒤인 1951년.[4] 토머스 핑크니 59표, 올리버 엘스워스 11표[5] 에런 버 30표, 새뮤얼 애덤스 15표, 조지 클린턴 7표[6]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제퍼슨도 4년 뒤 대통령이 되는데 부통령 에런 버가 똑같이 제퍼슨에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해밀턴과의 결투로 인하여 버가 몰락하면서 길지는 않았지만...[7] 애덤스의 성격은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의 싸움을 막기에는 리더십이 형편없었고 중재를 시도했던 워싱턴과는 다르게 4년내내 나몰라라 이 문제를 방치해버린다.[8] 제퍼슨을 지지하는 대가로 해밀턴의 측근들은 해밀턴의 정책을 유지해줄 것을 부탁한다.[9] 이 때,버가 아닌 제퍼슨을 지지한 해밀턴의 선택은 이후에 버와의 결투로까지 이어진다.[10] 지금에 와서는 최대 업적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내부적으로 의회에서 비용 문제와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갈등을 증폭시킨다고 반대했고, 외부적으로는 영국이 안 그래도 제퍼슨과 사이가 나쁜데 캐나다를 고립시키려는 행위로 받아들였기 때문.[11] 연방당의 공식 후보 지명 포기로 대다수 주 연방당 조직의 개별적 지지 확보.[12] 연방당원[13] 존 E. 하워드 22표, 제임스 로스 5표, 존 마셜 4표, 로버트 G. 하퍼 3표[14] 총 232명 중 존 퀸시 애덤스에게로 간 반란표 1명 제외 모든 선거인단을 얻었다.[15] 헨리 클레이는 그 대가로 국무장관에 임명되었고, 잭슨은 더러운 거래라고 분노하면서 클레이를 '서부의 유다'라고 엄청나게 깠다.[16] 연방정부의 법안들을 주(州)정부가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 한하여 일방적으로 무효화 할 수 있다는 논지를 내세우던 정당. 반노예성 법안, 높은 관세 징수 등 때문에 연방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친남부, 친노예제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17] 말 그대로 프리메이슨들이 미국의 공화제 정치 체계를 뒤엎고 비밀스럽게 정부를 조종하려 시도한다는 논지를 내세우던 정당. 음모론에서 시작했지만 1832년 당시에는 국가 주도 인프라 구축을 장려하고 높은 관세를 지지하는 등 나름의 경제 어젠다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자 선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현대 정치에 의외의 족적을 남겼다.[18] 민주당계 반란표. 잭슨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져 무효당을 창당한 존 C. 칼훈 전 부통령의 정치적 본거지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선거인단이 친(親) 칼훈계 민주당원인 존 플로이드 버지니아 주지사에게 투표했다.[19] 지금 와서는 엽관제의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당시 엽관제는 특정 상류층이 관직을 독식하는 정실주의를 타파하는 꽤 괜찮은 정책이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괜찮은 정책을 신속히 집행하는 장점도 있다.[20] 비공식적으로 리처드 M. 존슨 부통령[21] 사실 해리슨은 상당한 부유한 엘리트 가문이었다. 자기 아버지 벤저민 해리슨 5세는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서명한 네임드 정치인이었고, 그 자신은 가정교육을 받고 의대를 입학한 당시 꽤 잘 나가는 엘리트였다. 물론 그 이후의 전쟁무공은 순수 본인 능력이었지만, 통나무 집과 사과술은 엄연한 이미지 조작이다.[22] 제2미국은행 승인 거부로 인한 내각총사퇴와 강제 출당당하는 바람에 임기 내내 무소속이 되었고, 탄핵까지 거론될 정도로 의회랑 사이가 좋지 않은 바람에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23] 대표적인게 54도 40분 요구였는데, 포크가 요구한 북위 54도 40분은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알래스카와 맞닿은 면적으로 캐나다의 태평양 진출이 불가능해졌고, 영국이 반발하자 49도 밴쿠버를 기준으로 잡아 겨우 협상을 했다.[24] 뉴욕 주에서 5106표, 1.05% 차로 승리했는데, 만약 뉴욕 주의 결과가 뒤집혔다면 134:141로 클레이가 과반(138명)을 넘겨 당선되었을 것이다.[25]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확보한 미국의 거대한 신규 영토가 노예제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야 한다는 논지를 내세우던 정당. 거대 양당이 모두 노예제 온건파 후보들을 선출한데에 실망한 노예제 철폐론자들이 양쪽에서 대거 탈당하여 함께 창당하였다.[26] 1850년 대타협과 도망노예법 제정으로 노예제 옹호론자로 찍혀 북부 주 출신임에도 북부 지지율이 박살나버렸다. 남부에서도 타협안이 자신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기준이라 상황이 똑같았다.[27] 가톨릭 이민자들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공화제 정치 체제를 약화시키고 기독교적 도덕성을 해한다는 제노포비아적인 논지를 내세우던 정당. 인건비가 싼 아일랜드계나 독일계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잃어가던 노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 영향으로 기업 규제, 사회복지 지출 인상, 노동자 및 여성 인권 개선 등 친노동자 경제 정책들을 포용했다. 한편, 개신교의 도덕적 가치관을 바로세운다는 명목으로 술, 도박, 매춘 등에 대해 지나친 규제를 펼친 바가 있다.[28] 흔히 '남부민주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적을 유지하며 남부 민주당 계파의 독자적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29] 헌법 아래 연방의 존속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내세우던 정당. 남부민주당의 강경 주권 노선을 견제했지만 북부 공화당의 반노예적 성향에 회의적이었던 남부 휘그당 출신 정치인들이 창당했다.[30] 미국 내 인구 이동과 이민자가 계속해서 공업화된 북부로 유입되어 남부는 정치적 힘을 잃어갔다. 언젠가 북부에서 의석 수로 의회에서 노예제 폐지를 통과시키면 남부 경제가 완전히 끝장나기에 남부를 장악하던 민주당 내부에선 두 가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연방에 남아 타협을 통해 노예제를 유지하던지, 탈퇴해서 자기들만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던지.[31] 이는 당시 대통령 뷰캐넌이 더글라스를 극도로 싫어해 브레킨리지를 밀었던 탓이 큰데, 민주당 대통령이 후임 후보를 지지하기는커녕 다른 후보를 지지해버리니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었다.[32] 민주당 지지 확보.[33] 선거인단 투표 직전 그릴리의 사망으로 66명 모두 타 후보들이 확보.[34] 이 중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오리건 1명 등 총 20명의 선거인단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야합으로 공화당이 확보했다.[35] 당시 미국 법에 독자나 자기 외에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으면 돈을 지불해 대리인을 전쟁에 보내면 징집령을 면제받는 조항이 있었는데, 클리블랜드와 블레인 둘 다 이 혜택을 보았다.[36] 연설과 관중 장악력은 뛰어났지만 개인적인 사교성은 엄청나게 떨어졌다.[37] "당신들(기업)은 노동자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울 수 없고, 금십자가에 못을 박을 수도 없습니다!"[38] 다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일본의 한반도 합방을 묵인했던 과오가 있다.[39] 만약 루스벨트가 후보가 되어 윌슨과 1:1로 붙었다면 윌슨이 질 확률이 높았다고 점쳐지지만, 3선을 해서 독점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일찍 헌법이 개정돼서 먼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을 못 했을 수도 있다.[40] 캘리포니아(당시 선거인단 13명)에서 3800여표차(0.38% 차)로 윌슨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다.[41] 이 시기는 아직 먼로 독트린이 미국 국민들에게 아직까지 영향이 있었던 것이 크고, 유럽에서는 참호전과 전선 유지로 인해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들은 미국인들이 안정을 추구한 면이 크다. 그리고 이 시기 몇몇 주를 제외한 상당수 주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허용했는데, 남편 또는 아들이 전쟁에 가는 걸 원치않았던 여성들이 윌슨에게 투표한 영향도 있었다.[42] 헌법으로는 이미 1865년 흑인의 선거권이 보장되었지만, 남부에서는 흑인이 투표장에 가면 대놓고 총살당하거나 입장을 거부당하는 사태가 계속 벌어지면서 유명무실해졌고,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의 선거권이 제대로 보장된 시기는 70년이 더 지난 린든 B. 존슨 대통령 때부터다.[43] 상대방 후보 콕스도 꽤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능력도 있었지만, 전임 윌슨의 막판 이미지가 워낙 안 좋아서 텃밭 지지층에게만 표를 받았다.[44] 당시 미국은 2차 대전 이전까지는 현재 생각하는 자유롭고 활기찬 나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청교도적 보수 시각이 강했고, 남부 지방에서는 KKK단이 대놓고 흑인을 무시하고 죽이는 등 비윤리적인 일들이 횡행했다. 실질적인 평등과 종교적 자유를 누린 시기는 1960년대 이후이다.[45] 최다 선거인단 득표는 레이건의 525명이지만, 그때는 선거인단 주가 3개( 알래스카, 하와이. 워싱턴 D.C.) 추가되어 9명이 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최다 득표자는 루스벨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46] 그리고 1944년 후반은 미국과 연합국이 연전연승해 나치 독일을 거의 무너뜨렸고, 일본군을 오키나와와 이오지마로 밀어붙여 승기를 확실히 잡았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지지도가 높았던 것도 있었다.[47] 대통령 임기 도중 거주지 변경[48] 스트롬 서먼드 14표, 배리 골드워터 1표[49] 민주당계 반란표. 케네디의 인종 분리 철폐 공약에 반발한 앨라배마와 미시시피의 남부 민주당원들이 특정 후보에게 투표할 의무가 없는 대체 선거인단을 선출하였으며, 이 선거인단이 남부 민주당계의 거물 중 하나였던 해리 버드에게 투표했다.[50] 남부의 대체 선거인단은 총 286,379표를 얻었다.[51] 남부의 대체 선거인단은 총 0.42%의 득표율을 얻었다.[52] 이 때부터 미국 50개 주가 정립되었다. 워싱턴 D.C는 이미 존재했지만 아직 선거인단을 받지는 못하였다.[53] 닉슨도 이 당시 47세로 젊은 축에 속했지만, TV 토론회에서 무뚝뚝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찍히면서 패배의 원인이 된다.[54] 흔히 케네디가 토론회에서 닉슨을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닉슨은 국정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면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다. 이렇게 된 거는 토론회 내용과 상관없이 잘생긴 케네디가 여성 투표층을 끌어모은 것과, 아이젠하워가 닉슨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은 게 결정적이다.[55] 여성의 정/부통령 후보 진출은 2008년 세라 페일린(부통령), 2016년 힐러리 클린턴(대통령)이 나왔으며, 2020년 카멀라 해리스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서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 되었다.[56] 롬니 왈, "오바마는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47%의 미국인에 의존하고 있다...(중략)... 나는 이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57] 롬니의 목적은 비용 절감으로 인한 함선 규모 축소를 비판하면서 군인 지지율을 모으려 했지만, 오바마는 '함선 뿐만 아니라 총검과 군마도 줄어든다. 항공모함, 원자력 잠수함으로 전투의 패러다임이 바뀐다.'로 역공, 롬니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현대 전투를 이해하지 못하는 군대무식자로 놀림받는다.[58] 대통령 임기 도중 거주지 변경[59] 원래 러스트 벨트에 있었다가 해외로 아웃소싱한 미국 기업 공장들을 모조리 돌려놓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극히 일부만 성공했고 도시 침체화는 여전히 막지 못했다.[60] 애틀랜타 등 대도시 지역의 인구증가가 원인이다. 실제로 애틀랜타와 서배너, 오거스타 등 도시 지역은 압도적으로 바이든 우세였다.[61] 거물 정치인 존 매케인의 고향이다. 원래는 공화당 텃밭이었지만, 트럼프가 매케인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애리조나 주민들이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다. 게다가, 실리콘밸리로부터 이주해 온 기업들이 피닉스에 입주하면서, 고학력, 젊은층의 인구도 늘어난 영향도 있다.[62] 호레이스 그릴리가 선거 도중 사망하여 정작 선거인단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