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1:29:31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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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7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제럴드 포드 240명
297명 지미 카터
{{{#!wiki style="margin: -7px -12px" 1972년 11월 7일
1972 대선
1976년 11월 2일
1976 대선
1980년 11월 4일
1980 대선
}}} ||
<colbgcolor=#f0f0f0> 선거 일시 11월 2일 5시 ~ 11월 3일 6시 (UTC)
투표율 54.8% ▼ 1.4%p
선거인단 538명[1]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제럴드 포드
부통령 밥 돌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지미 카터
부통령 월터 먼데일
홈스테이트 대통령 미시간
부통령 캔자스
대통령 조지아
부통령 미네소타
승리 주 27 23 + D.C.
선거인단
44.61%
240명[2]
55.20%
297명
전국 득표
48.0%
39,148,634표
50.1%
40,831,881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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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N-OW998_barone_M_20160713121833.jpg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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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선
3.1. 공화당3.2. 민주당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제럴드 포드4.2. 민주당: 지미 카터
5. 본선6. 선거 결과
6.1. 접전지6.2. 출구조사 결과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제38대[3] 내지 제39대[4]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76년 11월 2일 ~ 11월 3일까지 실시된 선거.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공화당리처드 닉슨에게 지난 대선에서 굴욕적으로 당한 대패를 그 후계자에게 앙갚음한 승리로 민주당이 8년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2020년을 기준으로 텍사스와 딥 사우스인 앨라배마,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승리했던 대선이었다.

2. 배경

지난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1960년의 아픔을 송두리째 갚아버린 리처드 닉슨이었지만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및 사법 절차 방해로 탄핵의 위기로 몰리자 결국 하야를 선택했다. 미국사상 초유의 대통령 사임으로 인해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지만 베트남 전쟁 후유증과 오일 쇼크로 인해 경제 위기가 다가왔고 포드 행정부는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거기에 국민들의 닉슨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도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나중엔 사면까지 결정하면서 포드 행정부는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당연히 지지율은 악화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었으며 반대급부로 70년대 어려움에 빠져있었던 민주당은 정권 교체의 호기를 잡게 된다.

3. 경선

1976년에 이르러 민주당이나 공화당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50개 주 전체에서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치르게 됐다. 현재의 미국 대선 시스템은 이 해에 뿌리내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1. 공화당

파일:1976_Republican_National_Convention.jpg
전당 대회에서 손을 맞잡은 제럴드 포드와 로널드 레이건

보통의 경우라면 재선에 나서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형식적으로 대통령 후보 자격을 추인받는 경선이 진행됐겠지만, 리처드 닉슨의 사임으로 큰 정치적, 도덕적 타격을 입은 공화당은 거기에 더해 심각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는 선거를 통해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어서[5] 당으로부터 정치적 정통성을 완전히 인정 받지는 못하고 있었다.[6] 거기에 자신의 대통령직 승계로 공석이 된 부통령직 자리에 당내 온건파를 대표하는 넬슨 록펠러를 지명하면서 당내 강경 보수파가 강하게 반발하여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결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신보수주의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본격적으로 경선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당내 온건파 및 주류를 대변하는 포드와 신보수주의 강경파를 대변하는 레이건의 맞대결로 진행되었다. 경선 직전에 진행된 1975년 12월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두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45%로 동률을 이룰만큼 치열했는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포드가 2.74%p 차로 겨우 승리한 데 이어 뉴햄프셔에서도 두 후보간 혈전이 벌어졌다. 주로 북동부 주에서는 포드가, 남부주에서는 레이건이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꼭 다 그런 것은 아닌게 보수성이 강한 북부 주인 인디애나에서는 레이건이, 반대로 남부 주지만 스윙 스테이트 성향이 강한 플로리다에서는 포드가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적으로는 포드의 우세가 지속되었지만 서부와 남부의 강한 지지를 받은 레이건도 우세를 잡기도 하면서 마지막까지 경선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6월 1일에 이르러서야 포드가 뉴저지, 오하이오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해 대의원 125명을 추가 확보하면서 경선을 앞선 채로 마무리하였다. 전체 득표율로는 7.4%p 차이, 대의원 수로는 43명 차이로 겨우 승리하였으며 결국 마지막까지 승리 확정을 위한 과반의 대의원(1,130명)은 확보할 수 없었다. 참고로 이 경선이 20세기에 열린 경선 중 유일하게 추정 후보 없이 끝까지 치러진 경선이다.

결국 절차는 마지막 전당 대회에서의 표결로 가리게 되었는데 포드는 에어포스원을 활용하는 등 현직 대통령 프리미엄을 앞세워 대의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전당대회 당일에서야 일부 레이건의 배반표를 추가 획득해 1,187표를 확보해 후보 자격을 확정짓게 되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마지막 5분 동안의 양보 연설에서조차도 전당대회에 참여한 공화당원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것이 다음 대선 도전의 에너지가 되었다.[7]

3.2. 민주당

파일:카터 먼데일 1976.jpg
후보 지명을 받고 손을 맞잡은 지미 카터와 월터 먼데일

닉슨의 사임으로 치명타를 맞은 공화당을 앞에 두고 민주당은 정권 교체의 호기를 맞았다. 하지만, 스피로 애그뉴의 부패 스캔들을 시작으로 연이은 정치권 스캔들로 인한 미국 국민들의 정치 불신은 민주당에도 그 손길을 뻗히고 있었다. 민주당의 슈퍼 스타인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의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연방 상원의원이 여론조사에서는 줄곧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차파퀴딕 사건'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상태라 출마를 포기했다. 그 뒤로 1위를 달렸던 휴버트 험프리 역시 건강 문제로[8] 출마 뜻을 접었다.[9]

결국 캘리포니아 주의 현직 주지사였던 제리 브라운워싱턴주의 연방 상원의원인 스쿱 잭슨 등이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혔으나 남부 출신으로 경선 초반까지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10] 조지아 주 주지사 지미 카터가 2월 24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깜짝 승리를 거두며 주목을 받게 된다. 3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 경선에서 조지 월리스[11]를 누르면서 유일한 남부 출신 경쟁자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지미 카터의 상승세가 계속되자 당 기득권 세력은 이른바 '카터를 빼고 아무나(Anybody But Carter; ABC)' 운동을 전개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이라이트는 5월이었는데, 텍사스와 조지아 경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갤럽 경선 여론조사 1위 자리를 탈환한 것. 특히 민주당이 노리던 남부 탈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지미 카터가 76년부터 정치 개혁을 위해 바뀐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의 가장 큰 수혜를 본 케이스인데, 기존까지는 당 내 주류라고 보기도 어려웠고 전국 단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 점이 정치 혐오가 극심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인물'이라는 장점이 되었다. 결국 돌풍이 이어져 30개 주에서 승리, 대의원의 74%를 확보하며 승자가 되었고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되었다.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제럴드 포드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1976_Republican_National_Convention.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
제38대 미국 대통령
로버트 조셉 돌
캔자스 주 연방 상원의원
}}}
파일:Ford_Dole_1976_campaign_logo.svg

4.2. 민주당: 지미 카터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카터 먼데일 1976.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제76대 조지아 주지사
월터 프레데릭 먼데일
미네소타 주 연방 상원의원
}}}
파일:Carter_Mondale_1976_campaign_logo_2.svg

5. 본선

파일:Gerald-Ford-Jimmy-Carter-first-meeting-campaign-1976.jpg
토론회에서 맞붙은 지미 카터와 제럴드 포드

양당 후보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선거 캠페인이 시작되기에 앞서, 공화당 후보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역대급 호재를 잡게 되는데 바로 미국 건국 200주년 행사를 현직 대통령으로서 주관하게 된 것. 200주년 행사가 이어지면서 애국심과 향수의 물결이 일어나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70년대 초반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고 포드는 그 과정에서 현직 대통령으로서 프리미엄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 지미 카터가 포드에게 무려 33%p나 앞서는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로 상당 부분 승부가 기울어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포드가 리처드 닉슨을 사면하면서 워터게이트에 연루되어있다는 의혹을 벗어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 실제로 워터게이트 사건과는 큰 연관이 없었던 포드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카터가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성차별적인 발언[12]을 하면서 여성과 바이블 벨트의 복음주의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면서 두 사람의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로 좁혀졌고 토론회에서도 포드가 선전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을 시작으로 동유럽 혁명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포드가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두번째 토론회에서 "폴란드소련이 자신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최악의 발언을 남기면서 카터가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자폭 더비?? 부통령 토론회에서 월터 먼데일이 밥 돌을 상대로 베트남 전쟁 관련하여 공세를 이어가면서 맹활약했고 선거일 직전 카터가 대략 1%p 차로 소폭 리드를 잡은 채 선거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6. 선거 결과

최종 선거 결과
투표 시간
1976년 11월 2일(UTC +9}
투표 결과
후보자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선거인단 수 297 / 538명 241 / 538명
전국 득표 수 40,831,881표 (50.1%) 39,148,634표 (48.0%)
당선인
파일:JimmyCarterPortrait2.jpg
지미 카터

결국 조지아 주 주지사였던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가 현역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으로서는 8년 만의 정권 교체로 리처드 닉슨에게 잃었던 딥 사우스 5개 주, 테네시, 켄터키 등 전통적인 남부 지역을 오롯이 수복한 중요한 선거였다.[13] 더불어 민주당이 상하원을 모두 수성하면서 그야말로 슈퍼 여당과 함께 정권을 시작하게 됐다.

동서 전략을 완전히 성공시킨 카터는 결과적으로 민주당 당선자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는데,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일리노이, 미시간, 네바다, 뉴햄프셔, 뉴멕시코, 오리건, 메인, 버몬트, 워싱턴 중 어느 한 주를 승리하지 않고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명기한 주들이 1992년을 시점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주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재밌는 점. 또한 민주당 후보가 300명 미만의 선거인단을 확보하고 승리한 가장 마지막 선거. 동시에 공화당 제럴드 포드는 승자보다 더많은 27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면서 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되었다.

거기에 여담으로 이번 선거에 출마했던 양당의 대통령·부통령 후보가 모두 역사상 대선에서 2위를 기록해 본 유일한 선거다.(1976년 제럴드 포드(카터에게 패배), 1980년 지미 카터(레이건에게 패배), 1984년 월터 먼데일(레이건에게 패배), 1996년 밥 돌(클린턴에게 패배))

6.1. 접전지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접전지
주 이름 선거인단수 승자 득표율 패자 득표율 득표율 차이 지난 승리자 이번 승리자 결과
오리건 6명 47.78% 47.62% 0.16%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오하이오 25명 48.92% 48.65% 0.27%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메인 4명 48.91% 48.07% 0.84%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아이오와 4명 49.47% 48.46% 1.01%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오클라호마 8명 49.96% 48.75% 1.21%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버지니아 12명 49.29% 47.96% 1.33%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사우스다코타 4명 50.39% 48.91% 1.48%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위스콘신 11명 49.50% 47.83% 1.67%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캘리포니아 45명 49.35% 47.57% 1.78%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미시시피 7명 49.56% 47.68% 1.88%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일리노이 26명 50.10% 48.13% 1.97%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뉴저지 17명 50.08% 47.92% 2.16%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뉴멕시코 4명 50.75% 48.28% 2.47%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하와이 4명 50.59% 48.06% 2.53%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펜실베이니아 27명 50.40% 47.73% 2.67%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텍사스 26명 51.14% 47.97% 3.17%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미주리 12명 51.10% 47.47% 3.63%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워싱턴 9명 50.00% 46.11% 3.89%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네바다 3명 50.17% 45.81% 4.36%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뉴욕 41명 51.95% 47.52% 4.43%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코네티컷 8명 52.06% 46.90% 5.16%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플로리다 17명 51.93% 46.64% 5.29%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미시간 21명 51.83% 46.44% 5.39%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델라웨어 3명 51.98% 46.57% 5.41%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루이지애나 10명 51.73% 45.95% 5.78%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노스다코타 3명 51.66% 45.80% 5.86%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메릴랜드 10명 53.04% 46.96% 6.08%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켄터키 9명 52.75% 45.57% 7.18%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탈환
몬태나 4명 52.84% 45.40% 7.44%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캔자스 7명 52.49% 44.94% 7.55%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인디애나 13명 53.32% 45.70% 7.62% 리처드 닉슨&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밥 돌
공화당 수성
1960년 대선 이후 가장 치열한 승부가 된 터라, 양 후보간 득표율 차이가 8%p 이내에 들어온 주만 전체의 절반을 넘는 31개 주나 되었다. 민주당이 조지아 주지사 출신인 지미 카터를 앞세워 조지아, 텍사스 등 남부를 탈환하고, 포드가 캘리포니아 등 서부를 수성하는 사이 승부처는 미국 독립 200주년 직후를 기념하듯 미국의 발흥지인 북동부와 전성기의 중심에 서있던 중서부가 되었다.

포드가 미시간, 인디애나, 일리노이를 어렵게 지켜냈지만 결국 지미 카터가 접전 끝에 위스콘신(11명), 오하이오(25명), 펜실베이니아(27명), 뉴욕(41명)을 모두 획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특히 위스콘신을 얻으면서 카터가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승리를 확정지으면서, 위스콘신이 이번 대선의 Tipping point state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이 지미 카터를 앞세워 1960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동부를 확보하는 전략을 극적으로 성공시켰는데 바로 다음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출현 이후 인종주의와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가 공화당으로 완전히 기울면서 이 전략은 두 번 다시 성공하지 못했고 민주당은 이후 다른 방식의 전략을 찾게 된다.[14]

6.2. 출구조사 결과[15]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
집단
투표자 대비 비중
지미 카터제럴드 포드
인종
백인
89%
47% 51%
흑인
9%
82% 16%
히스패닉
1%
74% 24%
연 소득
~7,999달러
17%
62% 38%
8,000~12,000달러
24%
57% 43%
12,001~20,000달러
35%
50% 50%
20,001달러~
24%
38% 62%
노조원 내지 노조원 가족 여부

29%
62% 38%
아니오
71%
48% 52%
성별
남성
51%
51% 49%
여성
49%
51% 49%
연령
18 - 21
9%
49% 51%
22 - 29
23%
56% 44%
30 - 44
29%
52% 48%
45 - 59
26%
48% 52%
60 -
14%
48% 52%
권역별
동부
28%
54% 46%
중서부
30%
49% 51%
남부
23%
54% 46%
서부
18%
50% 50%
소속 정당(Party ID)
민주당
37%
80% 20%
공화당
22%
11% 89%
무당파
41%
48% 52%
이념
자유주의(리버럴)
20%
74% 26%
중도
49%
53% 47%
보수주의
31%
30% 70%

7. 관련 문서


[1] 선거인단 270명 이상 확보시 당선.[2] 제럴드 포드가 확보한 선거인단 241명 중 1명이 본투표일에 로널드 레이건에게 투표하며 1명을 잃었다.[3]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 승리 시[4] 도전자인 지미 카터 승리 시[5] 부통령직은 스피로 애그뉴가 부패 혐의로 사임하면서 닉슨의 지명을 받아 올랐고, 대통령직은 탄핵 위기에 몰린 닉슨이 사임을 선택하며 승계했다.[6]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지니는 이유는 국민 다수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라는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7] 만약 레이건이 경선에 승리했다면 펜실베이니아의 온건파 성향 리처드 슈바이커 상원의원(뒷날 레이건 정부에서 보건장관을 지낸다)을 부통령 후보로 삼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게 실책이 되어서 제시 헬름스를 비롯한 극보수 정치인들은 레이건 지지를 철회하고 제임스 버클리 추대 운동을 했다.[8] 실제로 그는 대선 2년 후인 1978년 사망했다.[9] 하지만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닌지라, 후술할 'ABC' 운동을 통해 전당대회에서 추대받을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물론 완전한 프라이머리 체제로 전환된 민주당 경선에서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10] 조지 갤럽이 민주당 후보 32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카터의 이름은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셈.[11]앨라배마 주지사로 1968년, 경선에 불복하고 민주당을 탈당해 독자 출마해 대선 패배를 만들었던 원흉이기도 하다.[12] 아내가 아닌 여성에게도 욕망을 갖고 있다는, 플레이보이는 좋아할만 하지만 대선 후보로서는 부적절한 인터뷰를 남겼다.[13] 다만 버지니아는 포드에게 내줬다.[14] 1962년까지만 해도 열렬한 민주당원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으로 당을 옮겨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이 현상을 가장 잘 묘사한 말을 남겼다. "내가 민주당을 떠난 것이 아니다. 민주당이 날 떠났다." 이는 레이건 뿐만 아니라 남부의 유권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