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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대통령 후보 | |||
<colbgcolor=#0c2d83><colcolor=#fff> 제65·67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스탠리 두카키스[1] Michael Stanley Dukakis | |||
출생 | 1933년 11월 3일 ([age(1933-11-03)]세) | ||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 |||
재임기간 | 제65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 ||
1975년 1월 2일 ~ 1979년 1월 4일 | |||
제67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 |||
1983년 1월 6일 ~ 1991년 1월 3일 | |||
서명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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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슬하 4명 | ||
가족 | 사촌누나 올림피아 두카키스 | ||
학력 | 스와스모어 칼리지 (정치학/B.A.) 하버드 대학교 (J.D.) | ||
병역 | 미합중국 육군 상병 전역 | ||
종교 | 정교회 (그리스 교회)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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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사추세츠 제67대 주지사 취임 선서 |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 제65·67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민주당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를 지냈다. 대선 당시 당시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 측의 용의주도한 네거티브 전략에 휘말려 낙선했다.
2. 약력
- 1951. 브루클라인 고등학교 졸업
- 1955. 스와스모어 칼리지 정치학 학사
- 1957. 미합중국 육군 상병 전역
- 1960. 하버드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사
- 1963. ~ 1964. 제163대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64. ~ 1965. 제164대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65. ~ 1966. 제166대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66. 매사추세츠주 법무장관 선거 후보
- 1970. 매사추세츠 부지사 선거 민주당 후보
- 1974. 민주당 매사추세츠 주지사 경선 후보 (경선 1위)
- 1975.1.2. ~ 1979.1.4. 65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민주당)
- 1978. 민주당 매사추세츠 주지사 경선 후보 (경선 2위)
- 1979.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정책대학원 교수
- 1982. 민주당 매사추세츠 주지사 경선 후보 (경선 1위)
- 1983.1.6. ~ 1991.1.3. 67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민주당)
- 1988.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 (경선 1위)
- 1988.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3. 초기 생애
1933년 그리스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성씨인 두카키스는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두카스가 되는데 그 기원은 동로마 제국 황실 가문 중 하나인 두카스 왕조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두카스라는 성씨가 그리스에서 상당히 흔한 성씨이기 때문에, 그가 두카스 왕조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대학 졸업 후인 1955년에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 2년간 주한미군 소속으로 UN군 통신병으로 문산에서 복무했다. 최종 계급은 상병(Specialists)이었다.[2] 군 복무를 끝내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서 수학하여 1960년 졸업했다. 이후 1960년대에 민주당 소속으로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75년에 처음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당선되어 재직했지만, 그의 첫 주지사 임기는 과도한 세금 인상과 폭설 등의 재난에 대한 대처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다음 선거에서는 당내 경선조차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절치부심하여 1982년 선거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83~1987년까지의 두번째 주지사 재임 중에는 세율을 낮추고, 실업률은 3%대의 완전 고용을 기록하며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과를 거두었고, 유능한 행정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두카키스가 두번째 주지사 시절 부지사로 거느렸던 인물은 바로 2004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고, 오바마 행정부 2기 국무장관이 된 존 케리였다.
4.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4.1. 출발은 좋았다
이러한 두번째 주지사 재임 기간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앨 고어, 조 바이든 등의 당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민주당의 1988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선출되었다.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했을 당시, 두카키스는 경쟁자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조지 허버트 부시 후보를 53% 대 36%로 압도할 정도로 승기를 잡고 있었다. 이는 아래에 나오는 그의 대선 광고들이 주지사 시절의 치적, 새 시대의 희망에 가득찬 내용들을 강조하는 데서 잘 드러났다."미국의 위대한 신경제 시대를 위해, 두카키스를 대통령으로!" 두카키스의 "신 시대(New era)" 광고.
"미국의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 Best America is yet to come)!"[3]
두카키스는 경선 수락 연설에서 "이 선거는 사상을 평가하는 선거가 아닙니다. 이 선거는 능력을 평가하는 선거입니다."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공화당의 부시 후보는 레이건의 임기 말에 드러난 이란-콘트라 사건과 쌍둥이 적자, 일본의 가파른 경제성장과 수출증대로 인한 미국 경제의 심리[4]적, 실질적 타격으로 인해 논란이 인 상황이었다.[5]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상원의원인 케네디가의 테드 케네디도 찬조 연설에서 "조지 부시는 죽은 오리 꼴입니다!(George Bush is dead duck!)"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 역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부통령 출신의 후보들이 대부분 패배했던 징크스는 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곧 뒤집히기 시작했으니(...).
4.2. 공화당의 네거티브 전략
부시 캠프의 전방위적인 네거티브 전법이 시작 된 것. 당연히 리 애트워터(Lee Atwater)의 작품이었다. 자세한 내용4.2.1. "미국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부시 캠프 측은 두카키스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매사추세츠 주에서 거부하였다고 광고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 몇몇 교사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것에 대해 주의회에서 "거부하는 선생들을 잡아 가두자."라는 법을 만들자 두카키스가 연방에 "이게 합법인가요?"라고 물어보고 연방 법원에서 "그건 위법이에요."라고 해 그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던 것 뿐이다.게다가 두카키스의 아내가 성조기를 태웠다는 밑도 끝도 없는 루머를 퍼트리는데, 여기에 두카키스의 아내는 두카키스와 다르게 나올 때마다 아니라고 격렬히 주장하였고 이것이 오히려 대중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4.2.2. TV 토론과 사형제 답변
전설이 된 TV 토론
조지 허버트 부시와의 대선 TV토론
TV 대선 후보 토론에서 사회자를 맡은 CNN 앵커 버나드 쇼가 사형제 폐지가 지론인 두카키스에게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던지자 두카키스는 "사형제로 범죄의 발생이 감소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경우에도 사형제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한다.[6] 결국 이 감성적 접근은 대중들에게 잘 먹혀들어 두카키스의 지지율을 깎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안적 답변이 있을 수 있다.
1. 법철학적, 이성적 답변: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 범인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이성적일 수 없는 피해자의 가족이라서 그렇습니다. 공형벌은 그러한 사사로움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됩니다. 살인은 피해자 가족의 마음에 멍을 남기지만 무제한적인 복수는 사회 전체에 멍을 남기기 때문입니다."[7][8][9]
2. 알린스키주의적 답변: "반대로, 만약 당신의 아들이 무고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어도 계속 사형제를 찬성하시겠습니까?"[10]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2번 답변을 해 기선을 제압하고, 뒤이어 1번 답을 제시하여 이성적인 부분에서도 못을 박아 버리는 것이다.
4.2.3. 전차 광고의 타격
이 사진은 두카키스의 무능한 선거전략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한 언론사의 "세계사를 바꾼 100대 사진"에 선정되었을 정도다. 당장 두카키스의 구글 연관검색어 1위가 전차(tank), 전차 광고다(...). |
두카키스 스스로도 자충수를 많이 두었다. 대표적인 실패는 부시 진영에서 내세운 전차 광고였다. 두카키스 본인은 주한미군부대에서 육군 통신병으로 만기 전역한 군필자였지만, 아무래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선을 넘나든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 조종장교인데다 CIA 국장까지 지내 안보 분야에 정통한 부시보다 이 방면에서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자신도 국방에 대한 이해가 못지않다는 이미지 메이킹으로 육군 기갑 부대를 방문해 M1 에이브람스 전차에 직접 탑승하고 동영상을 찍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어색함 때문에 의도와 달리 바보같은 이미지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4.3. 회광반조 -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오!"
그렇다고 마냥 밀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잠깐 회광반조를 보이던 순간도 있었다. 이후 두카키스의 러닝메이트인 로이드 벤슨[11]이 공화당의 젊은 부통령 후보 댄 퀘일[12]과 후보 토론회에서 만났는데, 댄 퀘일이 존 F. 케네디를 운운하자[13] "존경하는 의원님, 저는 잭 케네디와 함께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잭 케네디를 잘 압니다. 잭 케네디는 제 친구였습니다. 의원님, 의원님은 잭 케네디에 비빌 깜냥이 아닙(no)니다. (Senator, you're no Jack Kennedy)." # 2분 15초 부터라고 일갈했던 것. 그 말 직후 댄 퀘일이 머쓱해서 "의원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That was really uncalled for, Senator)."라고 말하자 "애초에 비교랍시고 말씀을 지나치게 하신게 의원님 아닙니까? (You're the one that was making the comparison, Senator)."라고 완벽하게 박살을 내버렸다.다만 이 장면은 벤슨이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의 생애 전체에서) 유독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 장면이면서도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2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벤슨의 이런 압박이 선거전에서 의미가 없었고 심지어 선거에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만 어느 정도 지지율이 올랐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는게 중론. 사실 결정적인 것은 다른 하나인데, 벤슨이 당시 케네디의 친구였는지가 부정확하다는 점이었다(...). 벤슨은 케네디의 임기 당시 일시적으로 정계를 떠나 있던 상태였고, 케네디보다 4살이 어렸다. 물론 하원의원으로 면식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14] 그러나 평생 허튼소리 안 하던 벤슨이 이렇게 자신 있는 한방을 날린 것 역시 드문 일인데다, 흔한 반격조차 별로 없었으니 다들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받아들인 것으로 보면 되겠다. 최소한 벤슨은 케네디와 동시대를 동년배로 살았던 인물인 것은 맞고, 적어도 퀘일이 자신을 공화당의 케네디라 부르는 건 어불성설이었다는 건 확실했으니.
4.4. 죄수 주말 석방제도는 회전문이다? - 윌리 호튼 광고
그 외에도 리 애트워터의 네가티브 공세로는 윌리 호튼 광고가 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흑인 범죄인 윌리엄 호튼이 죄수 주말 석방제도를 통해 잠시 휴가를 나와 커플을 습격해 여자를 강간한 사건인데, 이걸로 부시는 두카키스를 골로 보내버렸다. 두카키스가 주지사로 있을 때 매사추세츠의 치안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살인사건의 비율은 전국 최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건만 기억해 그의 이미지는 미친듯이 떨어졌고, 이는 부시의 대선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단, 매사추세츠를 포함한 뉴잉글랜드 지역은 원래부터 미국에서 치안이 상당히 좋은 편이므로, 이를 순전히 듀카시스의 업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같은 컨셉으로, 죄수들이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다시 나오는(...) "회전문(Revolving Door)" 광고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앞서 언급한 탱크 광고와 같이 "미국은 그런 위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America can't afford that risk)"라는 모토의 광고였다. 이후에 심슨 가족에서도 패러디된다. #
하지만, 죄수 주말 석방제도로 인한 폐해는 매사추세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당시 다른 주에서는 죄수가 주말 휴가제도를 이용해 임산부를 성폭행한 후 살해한 사건도 있었고 헬리콥터를 탈취한 후 추락한 사건도 있었다.
4.5. 패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카키스는 네거티브는 할 수 없다며 자신이 잘한 점만을 꿋꿋이 내보냈다. 문제는 무당파 성향의 국민들이 "두카키스가 반박을 안 하니 저것이 사실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사실 막판에는 두카키스도 부시의 광고를 활용해서 반격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런 반격 광고는 설명충 광고였는데다가, 주력 전략이 되지도 못했다. 네거티브의 반박은 요약하기도 쉽지 않고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 (영상의 첫 광고가 해당광고다.)
정리하면, 부시 측의 교묘하고 용의주도한 전략과 두카키스 측의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적인 태도가 결국 부시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게 했던 것. 선거 전략 이외의 측면에서 보자면, 미국 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잉글랜드계 상류층 출신인 부시와 달리, 두카키스가 수적으로 보나/미국 내에서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보나 절대적 소수 그룹인 그리스계 이민 2세(+ 그리스 정교)였다는 점도 꽤나 불리하게 작용했다.[15] 이 선거에서 그는 캘리포니아는 물론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등 대형 표밭들을 부시에게 뺏겼다(...). 다만 선거인단은 426:111[16]로 부시가 압승을 거두긴 했지만 득표율은 부시 53.4%대 두카키스 45.7%로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 대략 1944년 대선(루즈벨트 53.4:듀이 45.9)과 2008년 대선 당시(오바마 52.9:매케인 45.7)의 득표율 차이와 비슷하다.
5. 선거 이후
두카키스는 이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여든살이 된 현재까지 UCLA의 경영학(리더십) 교수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특히 2009년에 미국의 UCLA 대학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 전에 신입생들의 박수갈채가 멈추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만약 부시와의 선거전에서 그 토론회 때 대답을 잘 했더라면 부시가 대통령이 되지도 않았을테고, 또한 그의 아들 놈이 지금 이렇게 미국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지 못 했겠지요.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신입생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두카키스는 중부(미주리 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지미 카터와 함께 미국 민주당의 아픈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 개략적인 후일담 미국 민주당은 "앗, (북부의) 리버럴한 이념이 문제인 갑다!" 하면서 더욱 우향우를 가속화했고, 이것이 (남부 출신) 빌 클린턴 시대의 일견 보수적인 여러 정책의 배경이 되었다. 두카키스가 특별히 좌파성향이 있어서 진게 아닌데도 말이다.(...)[17] 그러다보니 버락 오바마 역시 제2의 두카키스와 제2의 지미 카터가 되는거 아니냐는 불안감 속에서 제대로 된 진보적 정책을 펴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야말로 역대급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이야기. 결국 민주당의 좌경화는 2018년 중간선거 이후에서야 이루어지게 된다.[18]
한편 부시 당선의 최대 공신인 리 애트워터는 이 공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권력의 단맛은 짧았으니, 애트워터는 부시 취임 1년만인 1990년 3월 갑자기 쓰러졌고 2년 후 뇌종양으로 사망한다.[19] 그리고 이후 조지 부시는 재선에서 실패한다. 하지만 부시는 리 애트워터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 그의 아내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2014년 사우스캐롤라이나 교육감 선거에서 그의 아내를 성심성의껏 지원했다.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70 | 미국 부지사 선거 | 매사추세츠 | | 799,269 (42.81%) | 낙선 (2위) | |
1974 | 미국 주지사 선거 | 992,284 (53.50%) | 당선 (1위) | 초선 | ||
1982 | 미국 주지사 선거 | 1,219,109 (59.46%) | 재선 | |||
1986 | 미국 주지사 선거 | 1,157,786 (68.75%) | 3선 | |||
1988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41,809,485 (45.65%, 111명[A]) | 낙선 (2위) |
[1] '듀카키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강세가 두 번째 모음에 오기 때문에 /dʊˈkɑːkɪs/(두카키스)로 조음한다.[2] 2011년, 54년만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3] "국가로서, 우리 미국이 212년이란 것은 매우 젊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시장에서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는 대신 2, 3위로 밀려났습니다. 교육에서는 6, 7위죠.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새로운 답이 아닌 낡은 답을, 옳은 것이 아닌 쉬운 것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4년간 우리 젊은 미국이 뒷전에 쳐박혀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미국의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드라마 뉴스룸의 유명한 장면과 비슷한 대사다.[4] 1990년대 초반까지도 먼 미래에는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아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것이라는 전망이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했다.[5] 단, 레이건은 임기 말에도 50%의 지지율을 유지했다.#[6] 만약 사형을 찬성하겠다고 대답했으면 100% 확률로 "저렇게 냉정하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했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가불기나 다름없다.[7] 워낙 유명한 질문이어서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에서도 나온다. 바틀렛 대통령도 참모가 제시한 이 딜레마에 "내 딸을 죽인다면 가만 둘 수 없!!...아, 근데, 그러면 안 돼, 아 그러면 또 안 돼, 또 안 돼..." 하면서 혼동한다. 그런데 사실은 토비 지글러를 놀리기 위해 대통령 이하 모든 참모진이 짜고 만약 내가 이 질문에서 횡설수설하면 토비가 화낼까 아닐까?를 놓고 내기를 걸었던, 쉽게 말해 조작이었다. 열받은 토비가 위의 모범 답안을 외치면서 미친 듯이 화 내자 바틀렛 대통령과 참모진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내기에서 이긴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즉석에서 5달러 씩 받아드는 동안 토비가 짓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대통령 재선의 향방을 가를 단 한 번의 후보간 토론회 참석을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한 일이었다.[8] 조지 클루니 주연의 정치영화 킹 메이커에서도 비슷한 토론이 인용된다. 조지 클루니의 배역이자 유력 대권주자 마이크 모리스는 같은 질문에 "그 놈을 찾아서 죽여버리고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것"이라고 답했고, "그거야말로 당신이 직접 사형제도를 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가 그 사형을 대신 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는 반론에 대해 "국가는 개인보다 합리적이고 냉철해야 한다."고 모범답안을 내놓는다.[9] 한국의 사형제 폐지론자인 김형태 역시, "당신 딸이나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여전히 그가 존엄하다는 말이 나왔을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은 “내 개인 입장에서야 그자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겠지만 어쩌겠어요. 헌법은 착한 사람뿐 아니라 악당도 살인마도 ‘모든’ 국민이 존엄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니, 최소한 국가는 헌법을 지켜야 할 거 아니겠어요. 온 국민들이 저놈을 죽이라고 아우성쳐도, 헌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는 ‘안 됩니다’ 하고 거절할 수밖에요.” 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10] 사실 괴벨스의 말대로, 선동은 쉽고 반박은 어렵다. 심지어 이 말 자체도 괴벨스가 했다는 증거가 없지만 다들 괴벨스의 말로 알고 있다는 것만 봐도.. 형식적 조작기(언어나 기호만으로도 논리적 사고가 가능해지는 시기)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1번처럼 대답하면 저게 뭔 소리야, 잘난 척 하네, 이러고 무시할 것이다. 감성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감성밖에 없다. 세줄요약을 좋아하고 설명충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있었다.[11] 1921~2006. 텍사스 출신의 상원의원으로, 1970년 첫 선거 당시 조지 부시를 이긴 경력이 있었다. 대권에도 도전장을 던진 경력이 있는 노련한 정치인으로, 당시 만 67세. 당시 55세였던 두카키스와 케네디 - 존슨(43세-52세) 젊은 매사추세츠(북부) 출신 대통령 - 경륜 있는 텍사스(남부) 출신 부통령 조합을 되살릴 수 있는 카드로 여겨졌다. 93~94년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다.[12] 이 사람은 미국 역대 부통령 중에서 머리 나쁘기로 손 꼽히는 인물이다. 학교 수업 참관에서 초등학생이 멀쩡하게 적어놓은 감자의 철자 potato를 potatoe로 고쳐 적어주는 것이 방송을 타서 천하의 머저리로 알려진 것이 대표적이다. 부시 대통령 재임 시기 우주개발 계획 당시에는 화성이 지구와 같은 궤도 있고, 그리고 화성에 물이 있다는 사진을 봐왔으니 화성에는 물도 있고 공기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이그노벨상 1991년 교육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과학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증명해냈다라는 이유였다. 이런 사람을 부시는 재선시기에 다시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고, 이건 클린턴의 부통령 후보가 하필이면 역대 부통령 중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인물일 수도 있다고 평가받는 앨 고어였다는 것과 맞물려 큰 악재로 작용했다. 미국에서는 지도층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두고두고 까이는 인물로, 심지어 문명 5에서는 게임이 끝난 후 점수에 따라 역사상의 지도자에 견주어 플레이어의 순위를 보여주는데 댄 퀘일은 제일 끝자리에 있으며 필요 점수는 0점. 한마디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정신줄 놓고 있다가 대충 야만인한테 멸망당하면 된다. 거의 우스개 취급.[13] 대통령이 임기 중 작고할 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하므로, 4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검증된 경력이나 내세울 업적도 없는 퀘일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때문에 패널들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는데,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받자(물론 퀘일의 이전 답변들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캐네디는 내 나이 때 대선 출마함ㅇㅇ"이라고 대답해버린 것(...).[14] 케네디와 벤슨은 1948년부터 1952년까지 4년간 하원의원으로서 활동 기간이 겹쳤고, 4년 정도면 같은 하원에서 일하면서 친분을 쌓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긴 하다.[15] 보스턴의 한 공화당 성향 신문에서 두카키스 후보의 동생이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실이 있음을 밝혀낸 이후, 두카키스를 잡아내는 표정들은 더 우울하게 찍혔다. 앵글 또한 짙은 눈썹 등 그리스계의 특징을 강조하는 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16]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불충실한 선거인단 1명이 두카키스 대신 부통령 후보로 나온 벤슨을 찍었다[17] 되려 두카키스보다 진보적인 흑인 후보인 제시 잭슨을 지지했던 진보파에서는 당권파들이 지지한 두카키스의 애매한 온건함과 보수성 때문에 싸움에 각을 세울 수 없었다는 식의 해석을 하고 있다.[18]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린든 존슨 이후 가장 좌파적인 대통령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역시 바이든이 딱히 좌파적인 인물은 아님에도.[19] 사망 직전 권력의 허망함을 느꼈는 지, 네거티브 운동에 대해 후회하는 발언들을 남겼다고 한다.[A] 불충실한 웨스트버지니아주 민주당 선거인 한명이 벤슨을 대통령으로, 두카키스를 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기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