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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9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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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d164a> 선거 일시 | 11월 3일 5시 ~ 11월 4일 6시[UTC] | |||||
선거인단 | 538명[2] | |||||
투표율 | 58.1% ▲ 5.3%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 | [[민주당(미국)| 민주당 ]] | [[미국 독립당| 무소속 ]] | |||
홈스테이트 | 대통령 텍사스 부통령 인디애나 | 대통령 아칸소 부통령 테네시 | 대통령 텍사스 부통령 캘리포니아 | |||
승리 주 | 18 | 32 + D.C.[3] | 0 | |||
선거인단 | ||||||
31.23% 168명 | 68.77% 370명 | 0% 0명 | ||||
전국 득표 | ||||||
37.5% 39,104,550표 | 43.0% 44,909,889표 | 18.9% 19,743,821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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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11월 3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후보와 앨 고어 부통령 후보가 공화당의 현직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댄 퀘일 부통령의 재선을 저지하고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20년 이상 유지되었던[4] 공화당 우위 정당제를 종식시킨 선거이자, 제3지대 후보자가 10% 이상을 득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이다.
2. 배경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기존의 예상을 뒤집고 민주당의 마이클 두카키스 후보를 꺾고 압승을 거둔다. 조지 H. W. 부시는 본래 보수 온건파에 속했던 인물이지만 60%에 달하는 퇴임 지지율을 기록한 로널드 레이건의 공약을 상당수 계승해, 우클릭을 시전했다. 한편 외교에서는 기존 포드의 인사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와 인기있는 전쟁영웅 콜린 파월에게 많은 권력을 부여해줘 탈냉전 시기에 안정된 외치를 펼쳤다. 이러한 안정적인 내외치의 결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1~2년 차에 65~70%대를 기록하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이후 가장 높은 임기 초반 지지율을 기록한 공화당 대통령이 되었다.전쟁의 판도를 바꾼 걸프 전쟁 |
하지만 경제 문제가 부시의 발목을 잡았다. 1983년을 기점으로 물가가 안정세를 기록하자, 미국의 경제는 호황세에 접어들었으며 이는 레이건 임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처방전과 "쌍둥이 적자"라 불리는 감세 및 국방비 증액으로 인해 높은 적자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는 블랙 먼데이 사건으로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게 되었다.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인플레이션을 저지하기 위해 1989년~1990년 사이 통화 긴축 정책을 펼쳤고 이는 미국의 경제를 악화시켜 1990년 단기공황을 초래했다. 이 시기, 고용의 1.3%가 줄어들었고 162만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발생했다. 1990년 8월 걸프전쟁은 유가를 폭등시켜 연준의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단기 공황은 1982년 단기공황, 1970년 단기공황에 비해 훨씬 짧고, 얕게 진행되었다. 그린스펀 의장의 현명한 대응과 걸프전쟁에서의 압승으로 유가와 물가 모두 안정되며 단기공황은 1991년 들어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부시 행정부에 걸쳐 높은 성장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 경제가 석유로 인해 주춤한 것은 미국 국민들에게 1970년대 석유파동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조지 H. W. 부시의 세금 인상이 문제였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발생한 막대한 적자와 단기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조지 H. W. 부시는 세금을 상당히 증액했다. 개인 소득세 최고 세율은 28%에서 31%로 높아졌고 최저세율은 21%에서 24%로 올랐다. 급여 및 소비세를 포함한 기타 세금도 올랐다.[6] 문제는 부시의 선거 당시 슬로건이 "제 입술을 보세요. 세금 인상은 더이상 없습니다"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부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댄 퀘일 부통령과 뉴트 깅리치 하원 원내대표도 부시에게 화를 냈다.
또한, 캐나다-미국-멕시코의 삼각 무역 협정인 NAFTA는 미국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으며, 특히 중서부 노동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레이건 행정부들어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빈부격차가 빠르게 커졌고 NAFTA로 이는 정점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실제 경제 지표에 비해 미국의 경제가 더욱 나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부시의 지지율은 단숨에 80%에서 임기 3년차에 30%대로 떨어진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지나치게 급격히 떨어진 탓에 지지율이 높을적 많은 대권주자가 일찌감치 불출마를 결심한 상태였던지라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민주당에는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었으며 가장 당선 확률이 높은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마저 당선 가능성을 낮게 보아 출마를 주저했기 때문에 부시가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회복되는 경제 지표와 외교적인 이점을 타고 재선할 것이라는 관측이 다수를 차지했다.
1990년대의 시작을 알린 노래 "Smells Like Teen Spirit"(1991) |
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재선에 나서는 조지 H. W. 부시는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딪혔다. 첫번째 어려움은 그의 나이였다. 1992년, 그의 나이는 68세에 접어들었는데, 로널드 레이건에 이은 또다른 고령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인들에게 피로감을 불러일으켰고 부시가 과로로 사망하면 어쩌냐는 현실적인 우려도 나왔다. 1992년 1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를 만나던 도중 만찬장에서 구토를 한 사건이 일어나며[8] 건강우려설은 더욱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부시의 유고 시 대통령을 맡아야할 인물이 문제였다. 부통령 댄 퀘일은 "미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부통령"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었으며[9] 미국 국민들은 압도적으로 그의 대통령직 승계에 반대하고 있었다.특히 부시 대통령의 증세안은 댄 퀘일 부통령, 깅리치 원내대표에게도 질타를 받았으며 부시의 급전직하하는 지지율 때문에 아예 대통령 후보를 교체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 팻 뷰캐넌이라는 강경 보수파 정치인이 부상했다. 팻 뷰캐넌은 부시보다 15살이나 젊은 TV 진행자로, 비록 선출직 공무원은 단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으나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부터 백악관의 고위 직원을 지내면서 백악관 일에는 누구보다도 빠삭하다고 자신하는 정치가였다.
공화당의 신성, 팻 뷰캐넌 |
조지 부시는 팻 뷰캐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팻 뷰캐넌의 지지율 상승은 심상치 않았다. 뷰캐넌은 1990년부터 대선 출마를 준비하며 부시의 발언인 "제 입술을 읽으세요: 더이상의 세금은 없습니다"가 적힌 범퍼를 배포해 부시의 세금 정책을 비판했으며, 그를 무역 정책으로 미국 노동자들을 해친 "무역 겁쟁이"로 묘사했다. 동시에 뷰캐넌은 부시가 너무 사회 분란 세력에게 유약하다며 애국적 보수주의자인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가치를 위협하는 세력을 향한 문화전쟁(Culture War)을 일으킬 것을 선포했다. 뷰캐넌 외에도 데이비드 듀크(...)[10], 해럴드 스타센[11] 등이 부시에 대항해 도전표를 던졌으나 뷰캐넌을 제외한 모든 후보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망의 2월 18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의 결과는 놀라웠다. 부시가 53.2%, 92,271표를 얻어 승리했으나, 뷰캐넌 역시 37.5%, 65,106표를 얻어 크게 선전하면서 제럴드 포드 이래 부시는 현직 공화당 대통령으로서 가장 낮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의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언론사들은 팻 뷰캐넌을 1968년의 유진 매카시에 비교하며 워싱턴의 기득권 정치인에 맞서는 강경파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두명의 돌풍이 유사하다고 분석하였다.
팻 뷰캐넌은 최종적으로 그 어떠한 주에서도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선거 자금이 부족했고, 뷰캐넌의 주장은 1992년 당시로서는 너무나 보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최종 성적은 200만표 이상의 득표, 백분율 23.0%라는, 현직 대통령에 대항하는 경선 후보자의 결과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것이었다. 조지 H. W. 부시는 본선 시작 전부터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비록 팻 뷰캐넌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수십년 후 티파티 운동과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고보수주의"(Paleo Conservative)라는 이름의, 공화당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주의 사상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3.2. 민주당
3.2.1. 대선 주자의 부재
1990년 걸프 전쟁으로 현직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80%까지 올라가자, 1992년 대선은 1972년 대선, 1984년 대선급의 민주당의 참패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유력 대권 주자가 일찌감치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SNL에서는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의 "당신은 케네디가 아닙니다" 발언을 비꼬아[12] "나는 케네디가 아닙니다. 나는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멘트를 쳐 그런 민주당의 상황을 비꼬았을 정도이다.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딕 게파트, 테네시 주 상원의원 앨 고어, 텍사스 주 상원의원 로이드 벤슨,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 전 부통령 월터 먼데일, 텍사스 주지사 앤 리처즈, 웨스트버지니아 주 상원의원 제이 록펠러, 델라웨어 주 상원의원 조 바이든, 뉴저지 주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 전 사우스다코타 주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13] 등 잠재적인 잠룡으로 분류되었던 사실상 모든 후보들이 출마를 거부하였으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전에는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 3선 뉴욕주지사 마리오 쿠오모마저 후보자 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민주당 경선은 유례 없이 인지도 낮은 후보들 끼리의 경쟁이 되었다.[14]
초기 지지율 선두를 달린 제리 브라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
주요 후보자는 진보파에 제리 브라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15], 중도파에 폴 송가스 전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16]이 있었으며 그 외의 군소 후보로는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 밥 케리 네브래스카 주 상원의원, 톰 하킨 아이오와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 전 미네소타 주 상원의원, 음모론자이자 사실상 장난 후보로 여겨진 린든 라로슈[17] 등이 있었다. 1991년 9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한 것은 그나마 이 후보들 중 가장 지명도가 높았던 제리 브라운 주지사였다. 그는 지미 카터 시절부터 잠재적인 대권 주자로 여겨졌으며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의 주지사를 두번 역임했으므로 가장 유력한 대통령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역시 지지율이 21%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빌 클린턴은 6%의 지지율에 머물렀다.
3.2.2. 빌 클린턴의 부상
군소 후보 중에 두각을 드러낸 후보는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였다. 아칸소는 딥사우스 깡촌으로 전국적인 지명도가 거의 없는 지역이고, 그런만큼 클린턴의 인지도도 낮았지만, 클린턴은 다른 후보들과 달리 중도적인 정책과 화려한 언변을 가졌기에 경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당내 기득권은 클린턴의 지명을 어느정도 예상했고, 그 예상에 화답하듯 점차 다른 후보들의 지지를 잠식해나갔다. 물론 클린턴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전, 클린턴의 혼외정사 스캔들이 터지면서 클린턴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며 그 누구도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빌 클린턴을 용서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후보간의 지나친 네거티브 캠페인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민주당 지지층은 클린턴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클린턴은 이를 파악해 철저한 포지티브 캠페인으로 선거전에 임했는데, 그 결과 클린턴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25%를 득표해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폴 송가스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클린턴은 이를 두고 자신을 컴백 키드(Comeback Kid)라고 묘사하는 명연설을 해 탄력을 얻었다.
뉴욕 프라이머리 승리 후 환호하고 있는 빌 클린턴 |
뒤이은 3월 10일 슈퍼화요일에서 빌 클린턴은 남부 주를 싹쓸이하면서 최대 승자로 거듭났다. 제리 브라운 주지사와 송가스 상원의원은 뒤늦게 지지세를 규합하며 클린턴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3월 17일의 미시간 및 일리노이 주 프라이머리에서도 클린턴이 단독 과반 득표를 하며 송가스와 브라운의 발버둥을 끝장냈다. 3월 19일 사우스다코타 프라이머리 직후 송가스가 사퇴하면서 유일하게 남은 경쟁자는 제리 브라운이 되었다. 제리 브라운은 진보세가 강한 일부 뉴잉글랜드 주에서 승리했으나, 클린턴의 지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클린턴은 4월 7일 뉴욕 프라이머리에서도 승리를 거두며[18] 승리에 쐐기를 박았고,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조지 H. W. 부시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제41대 미국 대통령 | 제임스 댄포스 퀘일 제44대 미국 부통령 | }}} | |||
부시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
전당대회를 앞두고 댄 퀘일의 매우 낮은 인기를 고려해 부통령 후보를 교체해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쳤으며 두 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와 리처드 닉슨도 댄 퀘일을 내쫓으라고 압박했다. 가장 유력한 대체 후보군은 딕 체니 국방장관과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었다. 그러나 부시는 이 요구를 묵살하고 퀘일을 다시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전당대회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우선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휴스턴 오일러스의 허가를 받지 않고 두 구단의 경기 일정을 고려하지 않고 구장 밖으로 내쫓은 다음 애스트로돔을 임대해서 팬들의 원성이 극에 달했으며[20], 전당대회장은 "문화전쟁"을 주장하는 팻 뷰캐넌의 강경한 연설과 사회보수주의를 내세우는 연설자들의 망언으로 격양되었다. 많은 공화당 지지층이 1992년 전당대회의 난장판을 패배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전당대회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4.2. 민주당: 빌 클린턴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제42대 아칸소 주지사 | 앨버트 아놀드 고어 주니어 테네시 주 연방 상원의원 | }}} | |||
클린턴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 1992년 DNC의 주제가, <Don't Stop> |
1992년 7월 16일 뉴욕시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빌 클린턴은 총 투표의 79%인 3,372를 득표하여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빌 클린턴은 앨 고어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유력 정치인 앨버트 고어 시니어의 아들이자, 1988년 대선 경선에서 3위를 한 바 있는 고어 의원은 워싱턴 경력이 부족한 클린턴의 단점을 보완해줄 좋은 정치인이었다.
빌 클린턴은 민주당원으로서는 매우 보수적인 정책을 주장하였으며, 자신을 "신민주당원"으로 묘사하며 제3의 길을 받아들였다. 부통령 후보 앨 고어 역시 1988년에 낙태를 반대하는 등 "불 위빌"[22]로 출마한 전적이 있고 기술 혁신과 벤처 기업 투자가 진정한 진보를 이끌 수 있다는 "아타리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에 클린턴-고어 조합은 그로버 클리블랜드 이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대선 후보 조합으로 여겨졌다.
1992년 DNC의 주제가는 플리트우드 맥의 <Don't Stop>이었다. 원래 클린턴의 참모들은 1992년의 분위기에 맞는 최신 곡을 주제가로 쓰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자신이 좋아하는 옛 팝송을 주제가로 선택했고, "포기하지 말자"라는 메시지가 좋다고 생각해 자신의 캠페인에서 노래를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이 주제곡 선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Don't Stop이 빌 클린턴 덕에 차트를 역주행했을 뿐더러, 오늘날까지도 Don't Stop이 민주당의 준 당가 급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4.3. 무소속: 로스 페로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 헨리 로스 페로 시니어 페로 시스템스 CEO |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 전 미국 해군대학 학장 | }}} | |||
Ross for Boss
로스를 대장으로
1992 페로-스톡데일 티켓 슬로건
로스를 대장으로
1992 페로-스톡데일 티켓 슬로건
1992년 대선에서는 유례 없는 제3지대 후보자 로스 페로의 열풍이 불었다. 로스 페로는 텍사스 출신의 사업가로, 1979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억류된 2명의 직원을 구출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한 일화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텍사스 주 정계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로 공화당의 마약과의 전쟁 텍사스 지부 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당 주정 하에서는 공교육 담당자를 맡기도 했다. 로스 페로는 베트남 전쟁, 마약과의 전쟁을 지지하는 등 본래 친공화당 계열 인사였으며,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하고 그의 기념 도서관 사업에도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이란-콘트라 사건이 드러나자 레이건과 부시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후에도 부시 대통령이 증세 정책을 펴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로스 페로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를 비판하는 제3지대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로스 페로는 "중도" 성향 후보였지만, 일반적인 중도와는 달랐다. 우선 그는 무역에 관해서 강경한 보호무역 정책을 지지했으며 주요 후보중 유일하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했다.[23] 또 레이건이 연방 정부의 적자를 3배로 늘린 것을 지적하며 공화당 정부에 의해 망가진 경제를 회복하고 예산 균형을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정치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전자 민주주의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며 상하원 의원 임기 제한을 추가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정책은 NAFTA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민주당-공화당 양당제에 반대하던 대다수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잡았다.
로스 페로는 베트남 전쟁 영웅이자 미국 해군대학 학장을 지낸 제임스 스톡데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제임스 스톡데일과 로스 페로는 모두 연방 단위 선거는 물론 그 어떠한 공직 선거에도 출마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로서 페로-스톡데일 티켓은 미국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아무런 선출직 공직을 맡지 않은 후보들이 출마한 선거가 되었다.[24] 이는 페로의 "탈정치" 포퓰리즘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5. 선거 진행
5.1. 초기 부시의 우세와 로스 페로 돌풍
1992년 3월 기준,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우세를 점한 것은 조지 H. W. 부시 현직 대통령이었다. 현직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데다 민주당의 유력 주자 빌 클린턴과 제3지대 후보 로스 페로 모두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후보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갤럽의 여론조사는 부시 44%, 클린턴 25%, 페로 24%로, 클린턴과 페로 모두 부시에게 크게 밀리는 양상을 나타냈다. 리처드 닉슨은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클린턴이 페로에도 밀려 3등을 차지하고 부시가 여유롭게 재선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러나 빌 클린턴이 제리 브라운, 폴 송가스 등 경쟁 후보자들을 꺾고 점차 대세론을 얻어가고, 로스 페로가 유능한 선거운동원들을 모집하여 지지세를 불려나가자 조지 부시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3월 44%였던 부시의 지지율은 5월 35%로 9%p 가량 떨어졌고 반대로 클린턴과 페로는 각각 29%, 30%로 올랐다.
조지 부시에게 큰 타격을 입힌 1992년 5월 LA 폭동 |
1992년 5월 일어난 LA 흑인 커뮤니티와 한인 커뮤니티의 충돌 소요 사태인 LA 폭동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을 엄청나게 떨어트렸다. 흑인 로드니 킹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 및 부당한 재판으로 인해 흑인계 커뮤니티가 동요하며 일어난 LA 폭동은 LA 코리아 타운을 모두 불태웠고 라틴계 상점가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폭동에 대한 엄격한 대응을 주문하며 1968년 68혁명 이후 처음으로 주방위군을 출동시켜 LA 폭동을 진압시켰지만, 때는 늦었다. 총 2,441명 사상, 13,779명 체포라는 참사에 가까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를 단순한 범죄라고 주장했지만, 레이거노믹스와 마약과의 전쟁으로 악화된 흑인 커뮤니티의 경제 상황과 빈부격차가 주목을 받으면서 12년 공화당 정권에 대한 심판 여론이 높아졌다. 또, "범죄에 강하다"는 슬로건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 대통령이었기에, 미국 제2의 도시가 폭동에 휩쓸리는것도 못막냐는 식의 불만도 터져나왔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후보는 로스 페로였다. 로스 페로는 지미 카터의 비서실장인 해밀턴 조던과 레이건의 측근인 컨설턴트 에드 롤린스를 섭외해 유능한 캠페인을 진행했다. 로스 페로는 빌 클린턴의 여러 추문들을 공격하는 한편 조지 부시와 로널드 레이건의 경제 실책을 지적하면서 지지율을 올렸다. 로스 페로는 오리건주의 민주당과 공화당 경선에서 큰 돌풍을 일으켰다. 이 두 당의 경선에서 당연히 로스 페로는 후보가 아니었지만, 기명 투표로 로스 페로의 이름을 써서 낸 사람이 거의 15%에 육박했던 것이다. 로스 페로의 후보 선호도는 클린턴과 부시를 아득히 상회했으며, LA 폭동이 일어난 후인 1992년 6월 기준으로 로스 페로의 지지율은 최대 39%에 달해 부시와 클린턴을 크게 추월하였다.
제3지대 후보로 이례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로스 페로 |
1992년 6월 들어 공화당의 우익 대중주의자 후보인 팻 뷰캐넌과 민주당의 대중주의 후보인 제리 브라운이 모두 탈락하자, 뷰캐넌과 브라운의 지지층은 로스 페로로 결집했다. 뷰캐넌의 지지자들은 보호무역을 내세운 페로의 주장에 공감이 가 그를 지지했고 제리 브라운의 지지층은 브라운과 달리 남부 보수파였던 클린턴을 지지할 수 없다며 페로를 지지했다.
5.2. 로스 페로 탈락, 클린턴 리드
그러나 로스 페로에게 두 후보를 공격하는 것 외에 자신만의 비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동성애와 인종에 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이러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이로 인해 40%대에 근접하며 정점을 찍었던 로스 페로의 지지율은 30%대 초반으로 다시 떨어지게 된다.설상가상으로 1992년 7월 로스 페로에게 닥친 몇가지 논란들은 페로를 끝장냈다. 우선 1980년대 후반, 로스 페로가 조지 H. W. 부시를 상대로 사적 조사를 한 것이 들통났다. 또 NAACP에서 페로가 연설하던 도중, 실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당신네들"(you people)이라고 부르는 말실수를 하며 LA 폭동으로 민감해져있던 흑인의 표가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에드 롤린스를 비롯한 여러 유능한 캠페인 매니저들이 이런 논란이 반발하며 사퇴했다. 결정적으로 페로가 캠페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충성서약을 강요하고 있다는 폭로가 나오며 페로의 지지율은 급전직하, 20%대로 추락한다. 페로는 이 추세로는 자신의 지지율이 한자릿수로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 하에 더이상의 지지율 하락을 막기 위해 후보직을 일시 사퇴하는 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이것은 악수였다. 변화의 페로 - 기존의 부시의 구도였던 대선이 페로의 사퇴로 인하여 변화의 클린턴 - 기존의 부시로 변하고 만 것이다.
빌 클린턴은 1992년 7월까지만 하더라도 프라이머리에서의 승리를 제외하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닉슨의 주장처럼 페로와 부시에 밀려 3위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하지만 1992년 7월 클린턴이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그의 여러 배경들이 주목을 받자, 클린턴은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았고, 클린턴 특유의 리더십과 재치있는 행보로 지지율은 급속도로 상승했다.
경선 승리 후 환호하고 있는 클린턴 부부 |
사실 빌 클린턴은 역대 미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많은 논란이 제기된 후보 중 하나였으며, 부시 진영에게 네거티브를 할 여지를 대문처럼 활짝 열어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 당시 클린턴에게 제기된 논란은 부동산 사기 스캔들인 화이트워터 사건,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 논란, 1969년 소련 반전 집회 참여 논란[25], 영국 유학 도중 마리화나 흡연 논란, 거기다 더해 선거운동원 제니퍼 플라워스(Gennifer Flowers)와의 혼외정사 섹스 스캔들까지, 무엇 하나 정상인 것이 없었고[26] 마이클 두카키스를 침몰시킨 조지 부시 입장에서 이런 논란거리들을 떠안은 빌 클린턴은 그야말로 탈탈 털어먹기 좋은 호구였다.
하지만 클린턴은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빌 클린턴은 조지 부시가 자신의 논란을 공격할때마다 "또 시작이군요"라는 투로 "제2의 윌리 호튼"[27] 식의 공격을 시전한다고 부시에게 역공했다. 이는 리 애트워터 식의 저열한 네거티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미국인들의 정서에 잘 맞아 들어간 것이었다. 여기다 부시의 늙은 나이와 클린턴의 젊은 나이가 시너지를 이루면서, 부시는 네거티브나 시전하는 늙고 편협한 후보로, 클린턴은 젊고 총명한 차세대 리더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의 1992년 6월 Heartbreak Hotel 연주 |
클린턴은 부시, 페로와 달리 철저한 포지티브 캠페인을 벌였다. 클린턴은 역대 최고의 포지티브 광고로 꼽히는 "희망"이라는 광고를 내보냈고[28] TV 쇼에 출연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멋지게 연주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색소폰을 부는 클린턴의 모습은 즉시 화제가 되었고, 클린턴의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여주었다. 미국 남부의 가난한 마을에서 자라나 흑인 문화에 익숙했던 빌 클린턴은 이를 적극 활용했고, LA 폭동으로 부시에 실망하고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빌 클린턴에게 환호를 보냈다.
물론 클린턴이 이런 이미지 정치에만 연연한 것은 아니었다. 클린턴은 1968년~1992년 공화당의 우위 기간 동안 낙선했던 여러 후보들, 즉 휴버트 험프리, 조지 맥거번, 월터 먼데일, 마이클 두카키스의 실패요인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조지 H. W. 부시의 무능에 실망한 백인 유권자와 기존 민주당 지지층인 대도심, 여성, 유색인종의 표심을 합쳐 광범위한 반-공화당 유권자 블록을 형성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클린턴은 흑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유세에 활용하면서 유색인종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지만, 정작 정책 상으로는 전혀 유색인종에 관한 명확한 시각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백인 보수 유권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어퍼머티브 액션에 반대했을 뿐더러, KKK 사적지까지 방문하는 등 기존 민주당 후보라면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보수 행보를 보였다. 1992년, 흑인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과 회담을 가진 빌 클린턴은 "시스터 술자"[29]와 같은 극단적인 민권운동에 반대하며 흑인이 백인을 죽이는 것도 혐오라고 주장했다. 제시 잭슨은 이에 반발해 클린턴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이것으로 빌 클린턴은 "제시 잭슨에게 비판을 받은 것"으로 백인 보수표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제시 잭슨과 적극적으로 토론하며 인종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유색인종 표를 단속할 수 있었다.
또 1988년 부시가 거둔 승리의 요인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클린턴은 교정시설을 적극적으로 방문하고 아칸소 주지사로 재임하는 도중 사면을 거부한 사례를 언급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범죄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부시의 "제 입술을 읽으세요"를 비틀어 "제 입술을 읽으세요. 진짜 감세는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이 합니다"라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내, 부시를 증세의 후보로, 자신을 감세의 후보로 이미지메이킹해 기존 부시가 취했던 유리한 지점들을 뒤엎었다.
이러한 클린턴의 포지셔닝은 놀라울 정도로 보수적인 것이었다. 클린턴은 민주당의 보수 그룹인 민주당 지도자 협회(DLC) 및 신민주당과 긴밀히 연합하는 사이였으며, 기술 발전과 환경 등 일부 문제를 제외하고는 기존 남부 민주당원의 입장을 사수하는 "신남부"(New South)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클린턴은 공화당의 정책을 가져와 민주당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민주당의 유권자 이탈을 막는 동시에 부시의 LA 폭동 진압과 증세에 실망한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를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선거 전술을 취했다.[30] 빌 클린턴은 페로의 사퇴 이후 40%로 지지율이 상승하더니 곧장 56%로 지지율이 폭등해, 34%에 불과한 부시 대통령을 무려 22%p 차이로 앞질렀다.
여기에 더해, "미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던 댄 퀘일과 대조되게 댄디한 스타일에다 정치 명문가,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똑똑한 부통령 후보"라는 소리를 듣던 앨 고어와, 부시 진영의 불륜 스캔들 공격에 대항해 남편을 변호하며 자주적이면서 헌신적인 부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은 힐러리 클린턴은 클린턴 지지율 상승에 큰 공을 세웠다.
5.3. 로스 페로의 재진입
1992년 7월 일시적으로 캠페인을 그만 두었던 제3지대 후보 로스 페로는 10월 초 다시 캠페인을 재개하였다.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경제 정책을 설명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재출마 선언 시점에서 로스 페로의 지지율은 10%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으며, 클린턴과 부시의 대립으로 사실상 페로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또 로스 페로는 댈러스에 위치한 선거본부를 떠나 대중 연설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주로 자신의 사무실에 머물러 상황을 지켜 보는 것을 선호하였으므로 지지율 상승세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31]그러나 로스 페로가 내보낸 광고는 성공적이었으며, 광고는 부시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힘에 따라 페로의 지지율을 올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로스 페로의 광고는 선거 막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경제 문제를 선거의 쟁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에게 경제는 매우 불리한 주제였기 때문에 주로 외교적인 성과를 내세웠다. 이에 페로는 이러한 부시의 전략이 구시대적 냉전 사고 방식이라고 지적[32] 하며 선거 광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While the Cold War is ending another war is upon us. In this new war, the enemy is not the red flag of Communism, but the red ink of our national debt, the red tape of our government bureaucracy. The casualties of this war are counted in lost jobs and lost dreams.
냉전은 끝났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전쟁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 미국의 적은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붉은 잉크로 적힌 국가의 채무이자, 빨간 테이프에 묶인 관료주의입니다.[33] 이 전쟁의 피해는 실업과 잃어버린 꿈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냉전은 끝났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전쟁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 미국의 적은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붉은 잉크로 적힌 국가의 채무이자, 빨간 테이프에 묶인 관료주의입니다.[33] 이 전쟁의 피해는 실업과 잃어버린 꿈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로스 페로는 30분에서 1시간에 달하는 광고를 내보내는데 3,500만 달러의 기금을 투자하였다. 그의 첫번째 광고를 시청한 유권자의 수는 무려 1,500만명이 넘었다. 이 광고에서 로스 페로는 24개의 차트와 번쩍이는 금속 포인터를 사용해 부시와 레이건의 "낙수 효과"가 미국 노동자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민주당은 그런 레이거노믹스의 피해를 복구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 정쟁에만 사용한다고 양비론을 시전했다. 또 로스 페로는 Giant sucking sound라는 표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NAFTA가 체결되면 미국 대기업은 값싼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멕시코로 공장을 모두 옮겨 결국 미국의 제조업이 모두 붕괴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에서 이를 "빨려간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비록 로스 페로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를 질타했지만, 페로는 공화당의 경제 정책 전체를 비판한 반면, 민주당은 일반적인 정쟁 세력, 무능한 세력 등으로만 표현하면서 사실상 부시와 클린턴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달리 하였다. 때마침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던 클린턴은 페로의 비판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페로의 프레이밍을 그대로 가져와 부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했으니 우리가 그것을 회복시키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5.4. 3자 토론회와 빌 클린턴의 리드 굳히기
1992년 10월 11일부터 19일까지 치러진 세 번의 대통령 후보 토론회와 한 번의 부통령 후보 토론회는 빌 클린턴의 우세를 굳혔다고 평가받는다. 이 후보 토론회는 크게 주목받았는데,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3자 토론회였기 때문이다. 1980년 대선도 3파전(공화당 레이건 - 민주당 카터 - 무소속 앤더슨)으로 이루어졌지만 1차 토론회에 지미 카터가 불참하고 2차 토론회에는 존 B. 앤더슨이 자격 미달로 참여하지 못함에 따라, 3자 토론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토론회의 결과는 클린턴 승리, 부시 참패로 요약되었다. 달변가이자 쇼맨십이 뛰어난 빌 클린턴은 차분하고 대화하는듯한 자세로 진지하게 토론에 임했으며, 부시의 경제적인 실패와 페로의 경험 부족을 지적하며 안정적인 우세를 이어나갔다. 오히려 부시에 대한 유효타는 페로가 더 많이 날렸다. 부시는 토론회에서 페로가 국정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페로가 이에 대해 "맞습니다, 대통령님. 저는 국가 부채를 3배나 늘린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응수해(...) 부시는 본전도 못건졌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마이클 두카키스의 온갖 실책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본 부시였지만, 1992년 대선에서는 상대방의 눈에 띄는 실책이 없었으므로 이런 반사이익을 얻지 못했다. 평생 정보기관과 상원에서 일해온 부시는 TV에 익숙하지 않았다. 거기다 고령의 나이까지 겹쳐, 토론회에서 부시는 불안하다는 듯 자꾸 손목시계를 쳐다봤고 클린턴과 페로가 공격해올 때마다 쩔쩔맸다. 3번의 토론회에서 부시는 모두 최대의 패배자로 지목되었고 특히 7,000만명이 시청한 2차 토론회에서는 16%만이 부시를 승리자로 꼽은 반면, 58%가 클린턴을 승리자로 꼽았다.[34] 페로 역시 1차와 3차 토론에서는 선방했지만, 가장 많은 유권자가 시청한 2차 토론회에서는 유독 핵심 의제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여주면서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얻었다. 결국 안정적이면서도 유쾌하게 토론을 이어나간 빌 클린턴이 TV 토론회에서 최대의 승자로 올라섰다.
한편 5,100만명의 유권자가 시청한 부통령 토론회에서는 앨 고어와 댄 퀘일이 대등한 성적을 거두었다. 댄 퀘일은 1988년 부통령 토론회의 재앙과 같은 말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빌 클린턴과 앨 고어의 실책을 조목 조목 반복하는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현직 부통령이 상대 후보에 대해 네거티브만을 반복하는 것에 유권자들은 피로감을 느꼈고, 여론조사에서는 앨 고어가 이겼다는 반응이 더 높게 잡혔다. 한편 최대의 패자는 제임스 스톡데일이었다. 스톡데일은 불과 15일 전에서야 부통령 후보 토론 참석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토론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으며, 토론회 자기소개에서 여긴 어디죠? 왜 제가 여기 있는 것이죠?(Where am I? Why am I here?)라는 황당한 말실수를 한다. 이는 자신의 신선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멘트였지만, 정작 토론회에서 부시와 퀘일이 열띤 공방전을 이어나갈동안 혼자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한 여론조사에서는 오직 2%(...)만이 스톡데일이 토론에서 이겼다고 나왔을 정도였다.
이렇듯 토론회에서 페로-스톡데일, 부시-퀘일 조 모두 어느정도 하자가 있었던 반면, 클린턴과 고어 티켓은 안정적인 우위를 보였으며 1992년 토론회는 클린턴의 승리로 끝이 난다. 선거 막판에 로스 페로와 제임스 스톡데일의 토론회 부진으로 보수 표가 다시 부시로 결집하면서 부시의 지지율이 상승하긴 하나 빌 클린턴의 우세를 뒤집지는 못한 채로 선거날이 다가왔다.
6. 결과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rowcolor=#373a3c,#ddd> 대통령 후보 | 득표수 | 순위 | |
부통령 후보 | 득표율 | ||
<rowcolor=#373a3c,#ddd> 정당 | 선거인단 | 당락 | |
조지 H. W. 부시 (George H. W. Bush) | 39,104,550 | 2위 | |
댄 퀘일 (Dan Quayle) | 37.45% | ||
| 168명 | 낙선 | |
빌 클린턴 (Bill Clinton) | 44,909,889 | 1위 | |
앨 고어 (Al Gore) | 43.01% | ||
| 370명 | 당선 | |
<nopad> Ind | 로스 페로 (Ross Perot) | 19,743,821 | 3위 |
제임스 스톡데일 (James Stockdale) | 18.91%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0명 | 낙선 | |
앙드레 마루 (Andre Marrou) | 290,087 | 4위 | |
낸시 로드 (Nancy Lord) | 0.28% | ||
| 0명 | 낙선 | |
<nopad> PP | 보 그리츠 (Bo Gritz) | 106,152 | 5위 |
시릴 미넷 (Cyril Minett) | 0.10% | ||
0명 | 낙선 | ||
<nopad> NAP | 레노라 풀라니 (Lenora Fulani) | 73,622 | 6위 |
마리아 무뇨스 (Maria Muñoz) | 0.07% | ||
신동맹당 | 0명 | 낙선 | |
<nopad> | 하워드 필립스 (Howard Phillips) | 43,369 | 7위 |
앨비온 W. 나이트 주니어 (Albion W. Knight Jr.) | 0.04% | ||
0명 | 낙선 | ||
<rowcolor=#373a3c,#ddd> 계 | 투표 수 | 104,423,923 | 투표율 58.1% |
<rowcolor=#373a3c,#ddd> 선거인단 수 | 538 |
전국 득표 | 선거인단 | ||
부시 | 클린턴 | 부시 | 클린턴 |
<rowcolor=#000,#fff> 37.45% | 43.01% | 31.23% | 68.77% |
조지 H. W. 부시의 득표율인 37.45%는 역대 공화당 후보 중 4번째로 낮은 득표율이다.[35] 특히 재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으로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이후 가장 낮은 득표율이며, 지미 카터는 물론 허버트 후버보다도 저조한 것이다. 조지 H. W. 부시는 북동부 주에서 전패했을 뿐더러, 보수적인 정책을 내세워 남부 주에서도 크게 선방한 클린턴에게 남부 주를 8개나 빼앗기면서 완패했다.[36] 1988년 대선에서 부시가 두카키스에게 남부 주를 단 한 개만 내어줬다는 점을 감안하면 뼈아픈 부분.
빌 클린턴의 당선 득표율인 43.0% 역시 당선자 득표율로는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낮은 것이다.[37] 심지어 1988년 마이클 두카키스가 얻은 득표율보다도 낮다! 이렇게 양 후보가 저조한 성적을 거둔 것은 제3지대 후보자 로스 페로가 18.9%라는 높은 성적을 거두어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 월리스, 로버트 라폴레트 등과 달리 지역 기반이 확고하지 않았던 로스 페로는 모든 주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선거인단을 단 한 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가장 선전한 메인 주에서도 30%를 조금 더 받았을 뿐이다. 아무튼 로스 페로의 선전으로 양측 후보는 거의 모든 주에서 과반 득표를 하지도 못했다. 오직 클린턴의 기반인 아칸소와 워싱턴 D.C.에서만 클린턴이 50% 이상을 득표했을 뿐이며, 조지 H. W. 부시는 자신의 홈스테이트인 텍사스에서도 겨우 40.6%를 얻는데 그쳤다.
그러나 승자 독식제도인 미국 선거인단 특성상 선거인단 표차는 크게 났다. 부시는 168명을 얻는데 그친 반면 클린턴은 당선에 필요한 270명을 훌쩍 상회하는 370명을 얻은 것이다. 부시가 얻은 168명의 선거인단 기록은 공화당 후보로서는 배리 골드워터 이후 최악의 기록이다. 이는 1968년 이후 지속된 공화당 우위 체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민주당이 20년의 흑역사를 딛어내고 공화당과 맞장을 뜰만큼의 지역 기반을 수복했다는 뜻이 된다.
6.1. 지역별 결과
권역별 후보 득표[38] | |||||||
지역 구분 | 부시 | 클린턴 | 페로 | ||||
<rowcolor=#000,#fff> 서부[West] 21,483,738 | 7,348,812 (34.21%) | 9,159,887 (42.64%) | 4,754,870 (22.13%) | ||||
<rowcolor=#000,#fff> 중서부[Midwest] 21,808,528 | 10,234,730 (36.90%) | 11,692,017 (42.15%) | 5,668,333 (20.44%) | ||||
<rowcolor=#000,#fff> 남부[South] 33,397,455 | 13,992,892 (41.90%) | 13,925,235 (41.70%) | 5,315,471 (15.92%) | ||||
<rowcolor=#000,#fff> 동부[Northeast] 21,808,528 | 7,528,116 (34.52%) | 10,132,750 (46.46%) | 4,003,593 (18.36%) | ||||
<rowcolor=#000,#fff> 전국 81,531,584 | 39,104,550 (37.45%) | 44,909,889 (43.01%) | 19,743,821 (18.91%)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타 권역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0,#fff> 태평양[Pacific] 15,255,434 | 4,974,388 (32.61%) | 6,914,988 (45.33%) | 3,244,880 (21.27%) | |||
<rowcolor=#000,#fff> 대평원[Prairies] 8,467,456 | 3,169,713 (37.43%) | 3,324,408 (39.26%) | 1,928,131 (22.77%) | ||||
<rowcolor=#000,#fff> 딥사우스[DeepSouth] 7,983,522 | 3,598,221 (45.07%) | 3,394,789 (42.52%) | 928,742 (11.63%) | ||||
<rowcolor=#000,#fff> 뉴잉글랜드[NewEngland] 6,350,619 | 2,012,063 (31.68%) | 2,820,311 (44.41%) | 1,478,695 (23.28%) |
6.2.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 | |||
<rowcolor=#fff><colbgcolor=#f5f5f5,#222> 집단 | 부시 | 클린턴 | 페로 |
38% | 43% | 19% | |
정치 성향 | |||
보수 공화당원 | 82% | 5% | 13% |
중도 공화당원 | 63% | 16% | 21% |
진보 공화당원 | 54% | 16% | 30% |
보수 무당층 | 53% | 17% | 30% |
중도 무당층 | 28% | 40% | 32% |
진보 무당층 | 16% | 54% | 29% |
보수 민주당원 | 23% | 61% | 16% |
중도 민주당원 | 15% | 76% | 9% |
진보 민주당원 | 11% | 83% | 5% |
기혼 여부/성별 | |||
기혼/남성 | 42% | 37% | 21% |
기혼/여성 | 40% | 41% | 19% |
미혼/남성 | 29% | 44% | 22% |
미혼/여성 | 31% | 53% | 15% |
인종 | |||
백인 | 40% | 39% | 20% |
흑인 | 10% | 83% | 7% |
히스패닉 | 25% | 61% | 14% |
아시아계 | 55% | 30% | 15% |
종교 | |||
개신교 | 47% | 32% | 21% |
가톨릭 | 35% | 44% | 20% |
유대교 | 11% | 80% | 9% |
거듭난 기독교인 | 61% | 21% | 15% |
무종교/기타 | 26% | 59% | 15% |
연령대 | |||
18~29세 | 34% | 43% | 22% |
30~44세 | 38% | 41% | 21% |
45~59세 | 40% | 41% | 19% |
60세 이상 | 38% | 50% | 12% |
교육 수준 | |||
고졸 이하 | 28% | 54% | 18% |
고등학교 졸업 | 36% | 43% | 21% |
대학교 중퇴 | 37% | 41% | 21% |
대학교 졸업 | 41% | 39% | 20% |
대학원 이상 | 36% | 50% | 14% |
가정 소득 | |||
15,000 달러 이하 | 23% | 58% | 19% |
15,000~29,999 달러 | 35% | 45% | 20% |
30,000~49,999 달러 | 38% | 41% | 21% |
50,000~75,000 달러 | 42% | 41% | 17% |
75,000 달러 이상 | 48% | 36% | 16% |
7. 평가 및 탐구
7.1. 공화당 우세 구도의 종말과 민주당의 보수화
1968년 이후, 공화당은 1972년, 1980년, 1984년, 1988년 대선에서 모두 승리한 반면, 민주당은 겨우 1976년 대선을 매우 근소한 격차로 승리하는데 그쳤다. 더구나 공화당은 1968년 이후 거의 모든 대선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1972년과 1984년 대선에서는 49개 주를 휩쓸었고 1980년과 1988년에는 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400명 이상의 압도적인 선거인단을 얻었다. 비록 민주당은 이 기간동안 하원과 상원을 통제하고 있긴 했으나,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원들도 많았기 때문에 완전히 의회를 통제하던 것도 아니었다.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이름으로 백인 중산층 유권자를 광범위하게 포섭하는 유권자 블록을 구축하여 오랜 기간동안 공화당의 우세 구도가 이어지도록 했고 민주당은 이 구도를 깨는데 번번히 실패했다.정권 교체가 유력했던 1988년 대선에서도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패하고 걸프전으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90%에 육박하게 되자 민주당 내에서는 무력감이 돌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대선 4연패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진지하게 재기되었고 마리오 쿠오모 등 대다수의 대선주자들이 1992년 대선의 레이스가 시작되기도 전에 선거를 포기했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68년 이후 20년 넘게 유지되었던 공화당의 우위 구도는 깨지게 된다. 1976년 승리를 거둔 지미 카터는 남부의 지지를 통해 당선되었기에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었지만, 빌 클린턴은 북동부 주를 모조리 승리한 것은 물론, 서부의 캘리포니아와 중부의 일리노이에서도 이기고 남부에서도 8개 주나 휩쓰는 등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보였다. 실제로 클린턴의 지역별 득표수를 분석해보자면 동부, 서부, 중부를 모두 이겼고 남부 지역에서조차 부시에게 0.2%p차로 뒤쳐졌을 뿐이다.
이는 남부전략 이후 인구적으로 소수였던 소수인종과 여성, 대도시 거주자, 청년층의 약한 표심으로 언제나 선거에서 크게 패배했던 민주당이 처음으로 백인 유권자를 포용하여 공화당을 뛰어넘었음을 의미했다. 출구조사 결과에서 클린턴은 기존 민주당의 약점이라고 평가받았던 노년층에서 크게 승리했고, 무당층과 중산층 유권자 사이에서도 우세를 점했다. 이 유권자 층은 언제나 공화당에게 표를 주었지만, 클린턴은 과감하게 민주당의 우클릭을 시도함으로서 공화당에게 유리하게 편성되어있던 유권자 블록을 무너트리고 1964년 대선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 우위의 선거 블록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민주당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리고 우클릭을 감행해 일어난 결과이기도 했다. 1988년 대선에서 마이클 두카키스 역시 중도적인 정책을 내걸었지만, 클린턴은 이보다도 더 보수적인 공약을 내걸었고, 실제로 클린턴은 어퍼머티브 액션 반대, 사형제 폐지 반대, 세금 감면 등 공화당과 비슷한 정책을 대통령으로서 추진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클린턴은 공화당의 일당우위제를 끝내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민주당 역시 보수화시키면서 미국 사회 전체의 보수화를 막지 못했다.
7.2. 미국 정치의 세대 교체
1992년 미국 대선은 미국 정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선거가 되기도 하였다.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모두 1960년대부터 중앙 정치를 한 잔뼈가 굵은 인물이고 마찬가지로 민주당 역시 로이드 벤슨, 월터 먼데일 등 린든 B. 존슨의 영향을 받은 중진 정치인들을 내세워 전반적으로 1988년 대선까지 미국의 정치판이 1960년대에서 세대 교체를 이루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된 앨 고어와 빌 클린턴은 모두 1980년대 후반 민주당에서 차세대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은 정치인들이며 특히 앨 고어는 "아타리 민주당원"으로서 민주당의 당권을 20년 가까이 장악해온 "위대한 사회 민주당"에 대항한 신세대 정치인이었다.빌 클린턴은 불과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앨 고어 역시 부통령 당선 당시 나이가 겨우 44세에 불과했다. 대통령과 부통령 나이 평균이 45세였다. 이는 196~70년대부터 정치권을 장악해왔던 여러 중진 정치인들이 뒤로 사라지고, 194~50년대에 태어난 신세대 정치인들이 비로서 전면에 나서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과도 같았다.
뒤이은 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도 뉴트 깅리치가 일으킨 "공화당 혁명"으로 여러 민주당 중진 정치인이 낙선하거나 은퇴하는 등, 좌우 양당을 가리지 않고 1990년대에 미국 정치는 대대적인 세대 교체를 겪었다. 동시에 미국은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탈냉전의 시대를 맞이해 커트 코베인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의 세대교체를 겪는 등[48], 여러모로 196~80년대의 냉전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1990년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기로 나아갔다고 평가받는다.
7.3. 로스 페로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흔히 이 대선을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비교하나, 일반적으로 이인제의 독자출마가 없었다면 이회창이 김대중을 꺾고 승리했을 거라는 의견이 많은 15대 대선과 달리, 이 선거에서는 로스 페로가 없었더라도 부시의 승리는 어려웠을 것이란 의견이 상당하다. 즉 1992년 미국 대선은 대한민국의 15대 대선보다는 차라리 19대 대선에 빗대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당시 출구조사에 따르면 페로 지지자들은 만약 페로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동일한 비율(38%)로 클린턴과 부시에게 투표하겠다고 응답했기 때문이다.[49][50]설령 출구조사에 오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부시와 클린턴의 표차는 5백만 표가 넘기 때문에 페로의 표가 6:4로 부시와 클린턴에게 나누어지더라도 클린턴이 전체 득표에서 앞서기 때문에 페로가 없어도 부시의 승리는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갤럽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클린턴은 페로가 잠시 불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진 줄곧 부시에게 밀리고 있었으나 7월에 페로가 사퇴를 선언한 뒤 오히려 지지율이 치솟아 부시를 크게 앞서나가고 10월에 페로가 레이스로 복귀한 뒤에도 줄곧 우세를 유지했다.
8. 관련 문서
[UTC] [2] 선거인단 270명 이상 확보시 당선.[3] 1964년 대선 이후 민주당 후보가 처음으로 25개 주 이상에서 승리했다.[4] 1968년부터 1988년 대선까지 1976년 대선에서의 접전 승리를 제외하면 민주당은 모든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다.[5] 이 경험 때문에 스코크로프트와 파월 모두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 부시에게 "치고 빠지는" 전략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이라크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6]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시는 복지 비용을 더욱 삭감해야 했는데 그렇다면 미국인의 기초적인 생활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7] 조지 부시 대통령은 공개 연설에서 심슨 가족과 커트 코베인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공격하기도 했다.[8] 태평양 전쟁의 PTSD였다는 설도 있고 생선 요리가 상했다는 설도 있었다. 일본 언론은 이런 부시의 모습을 조롱하며 버블경제로 급성장하던 일본의 모습에 미국 대통령이 쫀 모양이라는 식으로 해석했다.[9] 댄 퀘일은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발언(...), 라틴아메리카가 라틴어를 쓴다고 한 발언, 감자(Potato)의 철자를 틀리는 등의 행보를 보여 부통령은 커녕 어떻게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도 의문인 멍청함을 드러냈다.[10] KKK 지도자이자 유명한 네오나치로, 공화당 지도부는 그의 입후보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전했으나 미시시피 경선에서 10% 이상을 득표하며 공화당 지도부에게 충격을 줬다.[11] 1944년부터 공화당 경선에 출마해왔으나 단 한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12] 1988년 대선 토론회에서 댄 퀘일이 자신의 경력 부족을 존 F. 케네디와 비교하자, 부통령 후보였던 로이드 벤슨이 "상원 의원님, 저는 케네디를 압니다. 저는 그와 알고 있었고 친구였습니다. 당신은 케네디가 아닙니다."라고 쏘아붙여 한방 먹인 것을 뜻한다.[13] 맥거번은 1972년의 실패 이후 진지하게 출마를 고려하기보다는 진보주의자들의 표를 얻어 당 주류를 압박하려는 용도로 출마를 고려했다. 2016년 초기의 버니 샌더스와 같은 이유. 물론 이를 실제로 실행한건 1984년 예비경선때 뿐이었다.[14] 정작 최종적으로 당선된 빌 클린턴은 여론조사에서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다.[15] 진보파라곤 하지만 감세와 보호무역을 주장하는등 당의 주류 진보파보다는 오히려 무소속으로 출마한 로스 페로에 더 가까운 성향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포퓰리스트 후보.[16] 송가스의 후임자가 존 케리이다. 사회적으로는 진보, 재정적으로는 보수 성향이었으며, 당시에는 브라운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다.[17] 라로슈 운동의 주도자로, 미국 대선 단골 출마자였다. 놀랍게도 일시적이지만 일리노이주 민주당을 테라포밍한 전력이 있다. 애들레이 E. 스티븐슨 3세 문서 참고. 음모론자에 장난 후보라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해서 대부분 의원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에는 라루셰주의자가 있었다. 심지어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조차 그와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18] 제리 브라운이 제시 잭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고 한 것이 치명타였다. 제시 잭슨은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유대인 커뮤니티의 영향력이 막대한 뉴욕에서 매우 인기가 없는 정치인이었다.[19] 여담이지만 이 슬로건은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선거구호였다.[20] 특히 부시 후보의 아들이 하필 텍사스 레인저스의 구단주였던지라(...) 애스트로스 팬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21] 미국 역사상 최고의 선거 구호로 꼽히는 전설적인 문구. 본래 공식 선거 구호는 아니었으나 너무 유명해져서 사실상 캠페인 중반부 부터 공식 선거구호처럼 쓰였다.[22] 딕시크랫과 청견연합의 과도기. 딕시크랫만큼 인종적 보수는 아니었고, 좀 더 공급주의 경제학에 열려있었으나 청견연합만큼 전국적이진 못했다.[23] 공화당과 민주당 내에서도 나프타에 반대하던 정치인들이 많았지만(상원 표결 기준, 민주당의 대니얼 이노우에, 로버트 버드, 제이 록펠러, 러스 페인골드, 폴 웰스턴, 하워드 메첸바움, 존 글렌 / 공화당의 알 다마토, 제시 헬름스, 스트롬 서먼드. 러스트 벨트 부근의 의원이 많다.) 공화당의 부시-퀘일과 민주당의 클린턴-고어 모두 나프타에 찬성 입장을 냈다. 여담으로 조 바이든은 찬성투표했다.[24] 그 이전의 제3지대 후보자들인 로버트 라폴레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제임스 B. 위버, 조지 월리스 등은 모두 거물급 정치인이었다.[25] 1969년 소련 방문 도중,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6] 즉 비리, 병역 기피, 마약 투약, 이적행위, 섹스 스캔들의 그랜드슬램이다. 역대 그 어느 민주당 후보도 이루지 못한 대단한(...) 기록.[27] 마이클 두카키스의 캠페인을 침몰시킨 "회전문 감옥 광고"의 주인공이다. 당시에도 너무 비열한 광고라는 의견이 많았고 심슨 가족에서도 패러디되었다.[28] 이 광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아칸소 주의 "희망"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난지 3달 뒤 아빠가 돌아가시자, 저를 업어 키우신 조부모님이 사시던 낡은 2층 집이 기억이 나요. 제가 고등학생 소년단 대표로 워싱턴 D.C.에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님을 만난 것은 1963년이었어요. 그때 저같이 가난하고 가진것 없는 학생이 대통령을 만날 기회를 받은 것에서 얼마나 미국이 위대한 나라였는지 느낀 것도 기억나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려고 꿈을 가졌죠. 전 파트 타임 일을 하면서 로스쿨에 다녔어요. 하지만 돈이나 집을 가지려는 대신 진짜 변화를 일으키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의료보험, 교육, 직업 창출, 그리고 진정한 진보... 제가 대통령이 당선되면 이런 것들을 더 잘 해내고, 모든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희망"을 다시 미국에 가져다와 아메리칸 드림의 정신을 복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29] "흑인끼리 서로를 죽이지 말고 백인을 죽이자"라는 발언을 한 민권운동가[30] 이를 두고 강준만 교수는 클린턴 이후의 미국을 "1당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하며, 클린턴의 보수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당과 보수당이 사용하는 언어만 다르지 공약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다.[31] 측근들의 증언에 의하면, 로스 페로는 자신의 선거 운동이 선거 유세라기보다는 일종의 일상적인 사업으로 착각했다고 한다.[32] 보통 같으면 네거티브 취급을 받았겠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경제 이슈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게 뭔지는 잘 모르겠고요, 우린 그저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로스 페로는 사업가답게 이 니즈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33] "Red tape"는 지나치게 번잡한 행정절차를 일컫는 관용어구이다.[34] 부시 가문은 유독 토론회에서 죽을 많이 쒔다. 아들 조지 W. 부시도 2000년과 2004년 대선 토론회에서 모두 고어와 케리에게 패했다. 2015년 공화당 경선 토론회에서 트럼프 전용 샌드백으로 신나게 얻어 맞은 젭 부시는 말할것도 없고. 다만, 2000년과 2004년 토론회에서는 오히려 고어와 케리가 한숨을 짓는 등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한 조지 W. 부시에게 미국인들이 더 호감을 느꼈다는 분석이 많다.[35] 1위는 1912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23.2%), 2위는 1856년 존 C. 프레몬트(33.1%), 3위는 1936년 알프 랜던(36.5%). 그런데 태프트는 그 당시 공화당 진보파에게 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독자 출마로 저정도 성적이 나온거고 프레몬트의 경우는 당시 공화당이 노예제 반대를 위해 급조되었던데다 밀러드 필모어가 휘그당 잔재를 갈라치기했기에 북부 일부 주에서만 입후보에 성공해 득표율이 33%에 머무른 것이다. 사실상 알프 랜던 다음으로 부진한 셈. 심지어 배리 골드워터, 웬델 윌키, 허버트 후버보다도 부진했다.[36] 득표율로도 남부 지역에서 부시는 클린턴에게 고작 0.2%p 앞섰다. 가장 보수세가 강한 딥사우스 5개 주만 따지더라도, 양 후보 격차는 45% 대 43%로 매우 가까웠다.[37] 첫번째는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39.8%), 2위는 1912년 우드로 윌슨(41.4%). 1968년 리처드 닉슨(43.4%)와 거의 비슷한 수치이긴 하다.[38] 미국 상무부 휘하 연방 인구조사국 지정 권역에 따른 구분#[West] 알래스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아이다호, 몬태나, 네바다, 뉴멕시코, 오리건, 유타, 워싱턴, 와이오밍[Midwest]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자스,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오하이오,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South] 앨라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루이지애나, 매릴랜드,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Northeast] 코네티컷, 워싱턴 D.C., 매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Pacific]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하와이[Prairies] 콜로라도, 아이오와, 캔자스, 미주리, 몬태나,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DeepSouth]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NewEngland]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47] 이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생각으로 1990년대 미국인들은 당연히 현재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클린턴이 당선되자 의회는 동성애자의 군 복무를 더 강하게 차단하려 했을 정도이다. 이러한 보수주의 민주당, 공화당, 미군, 콜린 파월 등의 반대파들의 저항을 희석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타협한 것이다. #[48] 1980년대 대중음악 씬을 장악했던 본 조비, 건즈 앤 로지스, 밴 헤일런, 스키드로우, 포이즌 등 수많은 글램메탈/팝메탈 밴드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과 같은 팝스타들마저 1990년대부터는 그 위상이 전과 같지 않아졌다.[49] 마찬가지로 19대 대선의 경우도 호남에서의 안철수 지지세를 감안하면 안철수가 불출마했다고 가정할 시 그 표가 보수 성향의 홍준표+유승민한테만 가는 게 아니라 진보 성향의 문재인+심상정한테도 약 절반은 갔을 것이다.[50] 다만 부시가 못 이긴 일부 보수 강세 주는 이겼을 확률이 높다. 대표적으로 조지아가 있다 당시 이주는 공화당 강세 주 였는데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이 이겼다 부시가 조지아에서 진 원인은 딴 지역 보다 심하게 해당 지역에 공화당층이 심하게 로스 페로로 이탈한거이 결정적인데 조지아는 88년 대선에서 공화당(부시) 59.7% 민주당(두카키스) 39.5%로 부시가 20.2%라는 수치로 압승했다 그러나 92년 대선에서 공화당(부시)가 약 60% 에서 43%로 17%가 떨어지고 민주당(클린턴)이 전 대선에서 약 40%에서 약 43%까지 증가했다. 페로에 득표율는 13%로 이뜻은 기존에 부시 지지자들중 클린턴에게 3%만 가고 페로에게 13%나 갔다는 소리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화당 강세 지역에서 심하게 나왔다. 만약 페로가 안나왔다면 일부 공화당 강세 지역은 부시가 이겼을것이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 부시가 이겼어도 그랬어도 클린턴이 이겼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