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8:49:46

존 C. 브레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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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미합중국 제14대 부통령
존 캐벌 브레킨리지
John Cabell Breckinridge
파일:John_C_Breckinridge-04775-restored.jpg
출생 1821년 1월 16일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
사망 1875년 5월 17일 (향년 54세)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
재임기간 제14대 부통령
1857년 3월 4일 ~ 1861년 3월 4일
서명
파일:존 C. 브레킨리지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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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부모 아버지 조지프 브레킨리지
어머니 클레이 브레킨리지
배우자 메리 브레킨리지
자녀 아들 클리프턴 R. 브레킨리지 포함 7명
학력 센터 칼리지 (B.A.)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
트란실바니아 대학교 (졸업)
의원 선수 1 (상원)
2 (하원)
의원 대수 32, 33 (하원)
37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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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약력3. 생애
3.1. 부통령 재임3.2.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3.3. 남북전쟁
3.3.1. 장교로서3.3.2. 전쟁장관으로서
3.4. 말년
4. 사후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14대 부통령.

미국 최연소 부통령(당선 당시 만 35세)이자 자신이 부통령으로 재임했던 나라에 반역을 저지른 이력을 가진 부통령이다. 부통령 임기 후 아메리카 연합국의 전쟁장관이 되었기 때문.

남북전쟁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끝까지 미국 연방에 충성을 거부하여 국적 회복을 하지 못하고 무국적자로 사망했다.

2. 약력

  • 1851. 제32대 연방 하원의원 (켄터키 제8선거구 / 민주당)
  • 1853. 제33대 연방 하원의원 (켄터키 제8선거구 / 민주당)
  • 1857.3. 제14대 미국 부통령
  • 1860.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입헌민주당 / 낙선)
  • 1861. 제37대 연방 상원의원 (켄터키 제3부 / 민주당)
  • 1865.2. 미연합국 제5대 전쟁부 장관 (1865.2.6. ~ 1865.5.10.)

3. 생애

1821년 켄터키렉싱턴의 가족 농장에서 태어났다. 농장에서 노예를 사용했지만 브레킨리지 본인은 성인이 된 이후로는 노예를 사용하지 않았다. 노예제 결사 찬성론자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노예를 부리지 않았던 특이한 케이스.

켄터키 주에 있는 센터 칼리지(Centre College)를 졸업하고 1844년 제임스 포크의 선거 캠페인단에 들어가[1] 켄터키 주의 선대위원장으로 포크의 대선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포크가 대통령이 되면서 벌어진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 사단 작전참모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1849년 민주당에 입당, 미멕전쟁으로 얻은 새 영토를 모두 노예주로 편입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내세워[2] 순식간에 민주당의 거물이 된다. 1850년 중간선거에서 켄터키 주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3]된 후 1852년에도 재선된다.

이후 1854년 중간선거에서는 건강을 사유로 불출마한다. 표면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실제 이유는 켄터키 주지사인 래저러스 P. 파월(Lazarus W. Powell)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파월은 노예 지지성향이긴 했지만 브레킨리지만큼의 강경파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파월 주지사와 브레킨리지 의원은 주 정치 내에서 정적으로 변했고, 파월 주지사는 1854년 하원의원 선거구 게리맨더링으로 브레킨리지의 선거구를 마구잡이로 재편성한다. 브레킨리지는 파월 주지사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3.1. 부통령 재임

1856년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제임스 뷰캐넌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다. 당시 민주당의 주 지지기반이 남부였기에 북부 출신인 뷰캐넌은 민주당 내에서 왕따에 가까웠으나, 그가 후보로 선출된 이유는 당시 경선 후보 중에서 가장 노예제에 유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노예제 반대론자였으며, 루이스 카스는 노예제가 주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새로 생겨나는 주들 대부분의 주민들이 노예제에 반대했으므로 남부에 적대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랭클린 피어스도 노예제에 유화적이었지만 그는 대통령 임기 중 실책으로 남부와 북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뷰캐넌도 민주당 주류가 보기에 만족스러운 후보는 아니었으므로, 민주당에서는 차세대 주자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브레킨리지를 워싱턴 D.C.로 소환, 뷰캐넌의 러닝메이트로 붙인다. 그래서 미국 헌법에 규정(대통령 만 35세 이상, 부통령 만 32세 이상)된 최연소 부통령 후보가 탄생한다. 결국 56년 대선에서 뷰캐넌이 승리하면서 브레킨리지도 30대의 나이에 부통령이 된다. 2021년 지금까지 브레킨리지의 최연소 미국 부통령 타이틀은 깨지지 않고 있다. 미국 대통령을 합쳐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선 당시에 30대였던 인물은 존 C. 브레킨리지와 1896년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유일하다.

민주당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1856년에 민주당 뷰캐넌 - 브레킨리지 조가 당선은 됐지만 고작 45.3%만 득표했다. [4] 선거인단 역시 뷰캐넌 174표 - 프레몬트 114표 - 필모어 8표로 경합주에서 표가 갈려먹힌 것이 뷰캐넌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몬트는 원래 민주당에 있다가 노예제에 반대하여 공화당에 입당한 인사로, 공화당은 당시 급조된 정당이라 당시 미국 전체 주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인 18개 주밖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프레몬트는 강경한 노예제 반대 입장으로 표를 쓸어담아서 전체 주에 출마했던 밀러드 필모어를 따돌렸던 것.

하여간 민주당 주류의 지지를 받는 것은 브레킨리지였기에 백악관 내에서 실세 부통령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뷰캐넌은 노예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브레킨리지와 민주당 주류한테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러자 민주당 내에서는 북부 출신의 스티븐 A. 더글러스가 신주류 정치인으로 떠올랐고, 기존의 민주당 주류였던 남부와 갈등을 빚는다.

3.2.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선 캠프는 엉망진창이었다.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다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더글러스는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만큼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노예제 반대 인사였다. 당연히 민주당 구 주류인 남부에서는 더글러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안 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남부에서는 무려 63회나 대선 경선 선거인단 투표를 하는 등 조직적으로 더글러스를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자행했으나 결국 더글러스가 후보로 뽑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아예 남부는 집단 탈당을 결의, 남부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분당을 감행했다. 뷰캐넌 대통령은 북부민주당에 잔류했지만 혈기왕성한 브레킨리지 부통령은 남부민주당에 입당한다. 남부민주당에서는 만으로 39살밖에 안 되는 브레킨리지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며, 부통령 후보로는 오리건 주 상원의원인 조지프 레인(Joseph Lane)[5]을 내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주당 내 중도파 세력과 공화당에서 탈당하고 남은 구 휘그당 세력이 만나서 헌정연합당(Constitutional Union)을 창당하고 여기서는 존 벨(John Bell)을 대통령 후보로,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다.

구 민주당 세력이 북부민주당, 남부민주당, 헌정연합당 세개로 쪼개지니 에이브러햄 링컨은 고작 39.8%로 40%도 얻지 못했지만 선거인단을 180명이나 쓸어담는 압승을 하고 만다. 존 C. 브레킨리지 남부민주당 후보는 18.1%에 그쳤지만 남부 주를 싹쓸이해 72명 선거인단으로 2위를 했고, 존 벨은 테네시, 켄터키, 버지니아 주에서 승리하여 12.6%를 얻고 39석을 차지했다.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북부에서는 표 분산으로 링컨한테 털리고, 남부에서는 브레킨리지한테 털렸으니 29.5%나 받고도 선거인단 12석에 그쳐서 꼴찌(...)로 전락했다. 민주당 표가 분산되지 않고 더글러스로 단일화되었다면 링컨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선에서 낙선한 브레킨리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미국 부통령직을 사퇴하고[6], 남부연합에 가담한다. 본격적인 반역자의 인생이 시작된다.

3.3. 남북전쟁

3.3.1. 장교로서

브레킨리지는 아메리카 연합국에서 정보참모로 참전했다. 부통령을 지냈으니만큼 전쟁 초기에는 연방의 정보를 잘 알아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이 소모전으로 흘러가자 브레킨리지의 정보도 낡아갔고, 결국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 1862년 10월 서부전선의 미시시피군에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 하에 복무하였지만, 브래그와의 불화로[7] 동부전선의 범앨러게니-웨스트버지니아 군관구로 배속된다.

1864년 5월 15일 뉴 마켓 전투에서 프란츠 시겔 휘하 약 6,300명의 연방군을 버지니아 군사 학교 학생 261명을 포함한 급조 남군 약 4,100명으로 물리쳐 남군 군량을 지키는 등 꽤 괜찮은 전공을 세웠다. 또, 셰넌도어 계곡 지역을 습격하는 주발 얼리를 지원하기도 했다.

3.3.2. 전쟁장관으로서

남부연합의 멸망이 확실시되는 1865년 2월 브레킨리지는 남부연합의 전쟁장관에 오른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기에 전황을 바꿀만한 것은 할 수 없었다. 다만 로버트 E. 리를 남군 총사령관으로 승진시키고 병참상황을 조금 개선시켰다.

같은 달 말, 브레킨리지는 이미 전쟁에서 확실하게 졌음을 깨달았고, 리치먼드가 점령당할 것이 확실해지자 내각을 먼저 버지니아주 댄빌로 보내놓고 리치먼드에 남아 군수물자를 파괴하고 남군 전쟁기록의 보존을 명했다. 이후 리치먼드를 탈출하여 댄빌에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소식은 리의 항복과 내각이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로 도망쳤다는 소식뿐이었다.

결국 4월 13일 그린즈버러에 도착해서 남군의 항복을 권했으며,[8] 조지프 E. 존스턴의 항복협상에도 도움을 줬다. 4월 18일 링컨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신사숙녀 여러분, 남부는 가장 좋은 친구를 잃었습니다."라며 탄식했다.[9]

3.4. 말년

1865년 5월 5일 데이비스가 조지아주 워싱턴에서 공식적으로 남부 연방 정부를 해산하자, 브레킨리지는 데이비스를 보호하고자 탈출소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듣고서는 플로리다로 가 작은 배를 구해서 여러 번 연방군을 따돌리면서 해안선을 따라 도주하다가 결국 배를 타고 1865년 6월 11일 쿠바에 도착한다. 쿠바에 살던 켄터키 출신 미국인이 브레킨리지를 알아보고 도움을 준 덕에 브레킨리지는 7월쯤 영국으로, 거기서 캐나다로 도주한 부인과 가족과 연락하여 9월에 토론토에 도착하여 가족과 상봉한다.

1868년 크리스마스에 앤드루 존슨이 모든 남부 연방 관계자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자 미국으로 돌아와 생명보험 사업, 변호사 생활, 철도회사 고문 등의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의외로 사업에 수완이 있었는지 보험회사에 있을 때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주로 구 남부 군인들한테 보험을 팔았는데, 특히 구 남부군의 자녀들을 돌보는 보험을 팔았다고…[10] 1873년부터 간경화 등 건강문제를 겪다가 1875년 5월 17일 사망한다.

브레킨리지는 사면은 받았지만 여전히 국적 회복은 하지 못했다. 국적을 회복하려면 미합중국에 대한 충성 서명을 해야 했는데 브레킨리지는 충성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레킨리지가 죽었을 때 브레킨리지의 장례식 역시 직계 가족 및 사전 초청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참석할 수 없도록 율리시즈 그랜트 대통령이 막았다. 그러나 남부인들은 그랜트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브레킨리지의 장례 행렬(리치먼드에서 렉싱턴까지 갔다[11])에 동참하여 연방 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브레킨리지는 켄터키에 있는 본인의 농장에 묻혔는데... 1887년 켄터키 주에서 렉싱턴 시내 Fayette County Courthouse에 브레킨리지 기념관을 세우면서 브레킨리지의 국적을 회복시키고 브레킨리지의 묘소도 브레킨리지 기념관으로 이장하였다.

4. 사후

  • 브레킨리지 생가는 2021년 기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원래 브레킨리지의 생가는 거대한 농장이었는데, 2021년 지금은 농장의 대부분은 매각됐고 생가 건물(기념관으로 활용중)과 약간의 마당만 남아 있는 상태. 브레킨리지의 후손이 남아 있어서 후손(여성이다)이 해당 생가를 보존하여 관리 중이다.
  •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에 따라 남부 인사에 대한 기념관을 제거하라는 여론이 불붙었다. 결국 2018년 말 브레킨리지 기념관은 렉싱턴 외곽지역에 있는 브레킨리지 생가로 옮겨졌고, 브레킨리지의 묘소는 렉싱턴 시내 국립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이곳에도 브레킨리지 기념실이 있다. 2018년 기념관 이전 및 묘지 이장에 대한 비용은 개인 기부금으로만 충당했으며 켄터키 주나 미국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은 단돈 1센트도 받지 못했다. 의외로 개인 기부금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는지 브레킨리지의 묘지는 상당히 크게 조성됐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


[1] 민주당 입당 전이다.[2] 이게 얼마나 강경한 주장이냐면 멕시코는 이미 노예제 폐지한 국가라서 저 지역에는 이미 법률로 노역제가 없는 지역이었다.[3] 1850년 중간선거 당시 켄터키에서 당선된 하원의원 10석 중 민주당이 4명, 휘그당이 6명으로 휘그당이 더 많았다.[4] 당시 휘그당에서 공화당이 분당하면서 전직 미국 대통령이던 밀러드 필모어가 휘그당 후보로 재선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1860년 선거의 링컨보다 4년 빠른 1856년에 공화당에서 정권교체를 했을 것이다. 1856년 공화당 후보는 존 C. 프리몬트(John C. Frémont)로 33.1%의 득표를 올렸고, 밀러드 필모어 휘그당 후보는 21.5%의 득표를 올렸다.[5] 대선에서 패배하고 남북전쟁이 터지자, 조지프 레인은 오리건 주를 아메리카 연합국에 넣으려는 정치 공작을 하다가 발각되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반역죄로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사형감인데 링컨이 봐줬다.[6] 뷰캐넌 대통령이 브레킨리지 부통령의 사직서를 반려하는 바람에 공식적인 사퇴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브레킨리지는 이미 남부연합에 가담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때문에 브레킨리지의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았음에도, 브레킨리지는 백악관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덕분에 브레킨리지의 부통령 임기는 정상적인 만료일인 1861년 3월 4일까지로 되어 있다. 브레킨리지가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부통령직을 태업한 기간에는 국무장관인 제러마이아 S. 블랙(Jeremiah S. Black)이 부통령직을 대행했다.[7] 브레킨리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브래그는 성품 때문에 부하 장군과 갈등이 많은 편이었다.[8] 이 상황까지 와서 항복을 반대할 사람이 어딨냐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대통령과 국무장관 주다 P. 벤저민은 반대했다.[9] 실제로 링컨 대통령은 4년간의 내전의 결가로 남부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는 북부와 공화당의 복수심을 억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링컨이 다름 아닌 남부 출신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암살당한만큼 브레킨리지로서는 내전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최고의 협상 대상자를 잃어버린 셈이 됐다.[10] 구 북부군은 정부에서 유공자로 지정해서 연금이 나왔지만 구 남부군은 미국 입장에서 반역자이므로 유공자로 지정될 턱이 없다.[11] 490마일 이상(약 800km)의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