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2:51:52

함대결전

<colcolor=#FFF><colbgcolor=#2743d2> 해군 전략
해군의 목표 제해권
해군력의 운용 현존 함대 | 통상 파괴 | 함대결전 | 기지 타격
상세 사례 진입차단·지역거부 | 점감 요격 | 해상 봉쇄

1. 개요2. 역사
2.1. 태동2.2. 발전2.3. 절정2.4. 쇠퇴2.5. 결말2.6. 미래예측
3. 함대결전사상과 그 허점4. 오해5. 일본의 함대결전사상
5.1. 이론5.2. 실전
6. 결과

1. 개요

Decisive Battle

함대결전은 결정적 전투를 통해 해군의 목표인 제해권 통제를 영구적으로 달성하는 해군력의 운용 방안, 혹은 그것을 중시하는 해군 교리이다.

제해권 통제의 제 1 방해 요소는 매우 당연하게도 현존하는 적의 함대이다. 적의 함대가 없으면 제해권을 방해 받을 일이 없다. 함대결전은 적의 함대를 직접적으로 격파해 전쟁에서 제거하여 영구적인 제해권 확보를 하자는 매우 간단한 발상이다.

군함이라는 물건은, 물론 배라는 물건이 다 그렇지만 매우 비싸며, 건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도크를 포함한 건조시설과 이를 뒷받침할 중공업 및 경제능력이 필요하며 이를 모두 갖추었다고 해도 군함 건조 자체에 소모되는 시간 자체가 엄청나고 이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군 자산 중에서 가장 비싼 자산에 속한다. 한번 함대가 박살나면 그것을 복구하는 것은 해당 전쟁 중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다음 전쟁에서도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전기 미국은 무지막지한 숫자의 군함을 찍어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그만큼의 경제적 부담을 그대로 떠안았고, 그 유명한 엔터프라이즈조차 재정 문제 때문에 박물관함으로 살리지 못하고 스크랩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미국 정도나 되어야 버틸 만하지 어지간한 중대국 정도는 매주 구축함 하나를 찍어내는 짓을 하면 경제가 남아나지 못하며, 그 미국조차 총 건조수를 시간으로 나누어 주간 구축함, 월간 항모 같은 농담을 하는 것이지 이는 여러 개의 조선소에서 동시에 함선들을 건조한 것이기에[1] 진주만에서 타격을 입은 후 태평양함대가 전력을 보충받을 때까지 엔터프라이즈 한 척으로 고군분투 해야 했다.

이러한 골때리는 군 자산이 활약하는 해전의 환경은 넓디 넓은 바다, 사람이 마음대로 다닐 수 없고 하늘로 날아가는 게 아닌 이상 배라는 물건에 의지해 둥둥 떠 다녀야하는 심히 골치아픈 환경이다. 이는 연안함대조차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EEZ는 영토의 4배가 넘을 정도로 좁아봐야 어지간해선 육상보다 훨씬 광활하다. 제해권을 노릴 만한 대함대가 작전을 펼칠 넓은 바다로 하면 5대양에 들어가지도 않는 지중해조차 이베리아와 서유럽, 중부유럽을 전부 합친 것보다 넓고, 대서양은 유라시아를 전부 합친 것의 두 배이다. 부속해를 제외해도 유라시아보다 넓다. 끝판왕인 태평양의 경우 육대륙이 다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넓다. 그나마 서로 위치를 알고 본격적인 함대결전을 치르려 하면 해역이 국한되지만 그것조차 넓어서, 미드웨이 해전의 작전영역은 한반도의 3배에 달했다.

이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육상이나 공중 장비들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는데, 그럼에도 움직임 하나하나에 지휘관의 순발력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적 함대의 진형을 보고 어떻게 공략할지, 손상된 함이 있으면 어떻게 내뺄지 등을 그 자리에서 빠르게 계획하지 못하면 굼뜬 군함은 어느 순간 침몰의 길로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 즉, 바다에서의 기동은 육상이나 공중에서의 기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육상과 공중과 달리 개개의 자산이 곧 엄청난 가치를 가진 하나의 군사 설비이며 이 설비 자체가 움직이며 싸우는 싸움이 곧 해전이다. 물론 물 속으로 다니는 싸움배도 있지만 어쨌든 이것도 물에서 다니기는 마찬가지.

결국 바다에서의 싸움은 리스크가 다른 전장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싸움이며, 이런 위험을 가지고 제해권이라는 중대한 전쟁 이점을 쟁취해야 하는 해군은 매 전투 한번에 전쟁의 진행 양상을 뒤바꿀 수 있다는 엄청난 부담을 진다. 작은 호위함이나 구축함 하나를 잃는 것만으로도 그 함이 제공하던 방대한 교전영역을 다른 함이 메꿔주어야 해서 부담이 커지고, 전함이나 현대 해군의 중추인 항공모함과 순양함 따위는 하나만 잃어도 엄청난 손실로 역사에 대서특필될 해전이 된다. 즉 해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전투의 비중이 지상전이나 항공전에 비해 훨씬 크다.

해군력 운용에 있어 "함대결전"은 가뜩이나 고위험인 해전의 위험이란 위험을 응축시킨 결정체이지만, 여기서 승리한 측은 영구적인 제해권 확보를 보장 받을 수 있다. 함선의 손실 위험도 어마어마하지만, 제해권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면서 심해로 가라앉는 어마어마한 비용은 국가를 결딴내고도 남으며, 함대 자체가 소모하는 비용과 별개로 적의 함대가 아측의 해운을 공격하여 제해권 통제의 결과물을 쟁취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전장 환경을 바다가 아닌 육지(!) 따위로 옮기는 기지 타격을 당해 그 귀한 함대를 날려먹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그 반대로 적 해군을 섬멸함으로써 제해권을 영구적으로 잡는데 성공하게 되면 그 전쟁은 승리가 보장된 것과 다름이 없으며, 운이 따르지 않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최소한 패배만큼은 면할 수 있게 해준다. 나폴레옹 전쟁 초중반, 유럽이 온통 나폴레옹 손아귀에 들어갔음에도 대영제국 해군이 대서양 제해권을 꽉 잡고 있었기에 영국은 패배하지 않고 훗날을 기약하여 끝끝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가공할 만한 국가적 이득인데 거기에 제해권 확보를 통해 얻어낸 해상패권은 전후 국제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감히 가늠키 힘든 수준의 유무형의 이익을 국가에게 영구적으로 안겨다 줄 수 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한 영국은 이후 400년간 대영제국으로써 군림했으며, 대영제국의 유산 덕분에 지금도 강대국으로써 대접받고 있다.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를 격파한 일본은 태평양 전쟁 패전까지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인정받았으며, 미국은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장악한 전 세계 제해권을 바탕으로 막대한 자국의 생산력에 힘입어 달러의 기축통화화를 이끌어냈으며, 이를 통해 자타공인 세계초강대국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오히려 위험천만한 함대결전에 집중하여, 유리하면서 결정적인 전투 기회를 잡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해군 교리/전략 또한 매우 당연하게 성립하며, 그 대표적인 예시가 함대결전사상이다.

2. 역사

군함이라는 물건이 전쟁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함대결전은 언제나 유효한 개념이었다. 물론, 각각의 결정적 전투가 준 영향의 충격은 해군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2.1. 태동

갤리선이 주류였으며 아직 군함을 위한 화포가 등장하지 않았던 고전적 해전에서는 기동력의 한계 못지 않게 화력의 한계도 심각했다. 고전적인 해전은 승선 전투가 필수적이었고, 승선 전투는 상대를 격퇴하거나 배를 나포 당하는 것으로만 마무리될 수 있기에, 패배한 측이 무사히 함대를 추려 퇴각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함대 전투 하나하나가 패배한 측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고 피해를 본다면 잘해봐야 잃은 배가 침몰해 누구도 쓸 수 없게 되고 나포된다면 나는 배를 잃고 적은 배를 얻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당대 노잡이 방식 특성상 숙련된 노잡이가 필수적인 것은 물론, 승선 전투원 자체도 육성하기 까다로운 숙련된 인력이라, 어떤 식으로든 대규모로 승조원을 잃는 것은 대체로 영구적인 제해권 손실로 직결되었다. 하지만, 당대 패권 국가들의 해군력은 그 이후의 해군들에 비하면 훨씬 빈약한 규모였고, 노잡이들 봉급이 비싸다지만 후대의 화포 유지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배를 직접 용궁으로 보낼 방법이라곤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역사와 전통의 충각으로 부숴버리는 것 뿐이었기에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되는 전투도 잦았다. 그래서 진형과 사기가 붕괴되면서 너무 빨리 패주해 버리면 오히려 승선 전투를 오래 하지 못해 나포되는 선박 수가 줄어들어 해전의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 물론 패닉에 빠져 자침(...)을 시전하는 경우는 당연히 예외지만 그런 길을 택하는 군함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또한, 해군 강국과 맞붙어 패배하는 일을 겪을 만한 경쟁 패권국이란 것이 죄다 자국 내의 경제 만으로 패권을 주장할 수 있는 국가들이었기에, 제해권을 빼앗기더라도 결국 자국 본토가 공격받지 않는다면 충분히 그냥 배를 더 많이 찍어내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현대에 와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즉, 결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 영향도 막대한 편이었지만, 그 어떤 시대보다도 해군 외적인 요소로 결정적 패배를 뒤늦게나마 회복하는 것이 가능은 했던 시대인 셈이다. 물론, 해군 외적 요소가 함대결전에서의 패배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결정적 전투에서의 패배는 곧 전쟁 자체에서의 패배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화포를 장비한 군함의 등장은 전투의 양상을 근접 충격/사격 전이나 승선 전투에서 사격전으로 조금씩 변화 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갤리선이 주류였던 시절에는 더이상 숙련 노잡이를 대규모로 요구하지 않고 그냥 노예(...)를 써도 되는 신식 노잡이 방식이 등장함에 따라 화포로 인한 군함 값 폭증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고, 아직 제대로 함대를 운용하는 거대 패권국 자체가 없었기에, 매 전투가 대규모 함대전인 경우가 많았음에도 패전 한방에 아예 해군 자체가 영구적으로 결딴나는 일은 드물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함대결전인 레판토 해전에서 참패한 오스만 제국은 한동안 서유럽 세력 상대로 제해권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서유럽 세력들이 워낙 미약했던 탓에 결국 오스만 제국의 해상 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즉, 이 시절에는 함대결전에서의 승리로 얻은 결정적 제해권 이점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국가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매 해전이 높은 확률로 결전이 되기 쉬웠음에도 그 영향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2.2. 발전

하지만 화포의 성능이 초월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상황이 많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일단, 당장 해군을 운용하는 국가들의 역량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젔다. 게다가 범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원양 항해가 가능한 거대 선박들이 설계되고 건조됨에 따라,[2] 군함들은 점점 화포를 많이 보유하며 거대해지는 방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 특히 전열함, 곧, 그야말로 바다에 떠다니는 요새와 같은 초고급 주력 함선 개념의 도입은 매 함대 전투의 위험 부담의 초월적 증가 신호탄이 되었다. 전열함을 상대하려면 같은 규모의 전열함이 필요한데, 이 전열함은 또 너무 무겁고 비싸기 때문에 멀리 장기간 항해하기 부적절해서, 일꾼으로 일할 소형 선박들의 수요도 폭증하는 이중고가 발생하였고, 아직 동력기관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화력 요소를 기동 요소로 극복할 방법도 없어지자, 이 시대의 해전에서 승리하려면 그냥 더 크고 아름다운 전열함을 확보하면서, 이 비싼 자산들을 어이없게 날리지 않을 우수한 숙련도를 갖춰, 아주 엄청난 규모의 함대전에서 한판 붙어서 이기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전열함들은 후대의 전함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항구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함선들이었고, 결국 배가 영원히 바다에 떠있을 수는 없다는 한계는 전략 규모에서 기동 요소가 화력 요소를 압도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국가 전략 자체에서 밀릴 경우, 이전 시대처럼 해군력을 운용할 국가 자체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함대결전의 성과를 굳히지 못하거나, 혹은 상대의 함대를 일거에 파탄내는 초대규모 결전 자체를 벌이지 못하고, 비교적 작은 성과, 즉 해당 전쟁 하나에서만 적 해군을 몰아내는 수준의 결전으로 그치는 경우도 잦았다.

물론, 상대가 섬나라거나 해서 반드시 적 함대를 제거해야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함대결전을 노려 이기는 것 말고는 해군력으로 이익을 볼 방법이 없었고[3], 결국 함대결전을 적극적으로 노리지 못하는 함대는 결론적으론 제해권을 잡지 못하므로 쓸모가 없었다. 통상파괴 또한 당시에는 사략선이라는 비교적(?) 소극적인 방식이 사용되었다 보니, 정규 해군의 범주로 포함할 수는 없었다. 상대 함대를 박살낸 후 항구를 막아버리는게 통상에 타격을 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시대였으니, 제해권 때문에 꼬우면 전열함이나 더 만들어라로 귀결되는 셈이었다.

2.3. 절정

이후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증기선이란 혁신이 해전에 도입되고, 이것이 철갑선이라는 중대한 변화를 불러오자, 해군이 소모하는 비용은 또 한번 하늘을 뚫고 승천함과 함께, 발달한 해군 기술에 걸맞은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선박들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결정적으로 현대적 군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드레드노트급 설계가 등장하면서, 모든 종류의 군함이 체급을 따지지 않고 드레드노트 설계로 수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all-big-gun 등, 가능한 모든 자금과 시간을 동원해 가능한 더 큰 화포를 더 많이 욱여넣은 더 큰 배라는 해군의 팽창을 기존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시켰다. 중간에 어뢰라는 혁신적인 변화가 도입되기도 하였지만, 이 어뢰에 두들겨 맞지 않도록 보조함 전력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므로,[4] 결국 전함은 전함만이 상대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거함거포주의가 대두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결정적인 전투 한번에 해당 전쟁에서 상대의 해군을 영구적으로 파탄내는 것은 물론, 아예 이후 재기가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 가능성을 열었다. 당연히,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 등 많은 전략가들은 이런 결정적인 전투가 제해권 장악의 핵심이 되리라 예측하였고, 그에 따라 대함대전을 대비하고 그에 집중하는 함대결전사상이 대두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은 명백히 사실이었다.

열강간의 여러 충돌에서 거대한 선박들의 거대한 결전에서 이기냐 마냐가 전쟁의 양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여러 전쟁에서 입증되었는데, 후발 주자로 열강에 진입한 일본 제국 또한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을 통해 함대결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전훈을 얻었다. 당연히 해군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있어왔던 건함 경쟁 또한 엄청나게 과열되기 시작했으며, 강대국들이 인식하는 함대결전의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그 정점에 달했다.

2.4. 쇠퇴

그러나 20세기 전반 전투함의 대형화와 가격 상승 추세를 따라잡으며 급속히 증대되는 근대국가의 산업생산능력과 체계적 동원능력은 또다른 가능성을 열었는데, 전략적 종심과 생산능력이 충분하다면 해전에서 커다란 패배를 겪는다고 해도 시간을 들여 이를 보충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비전이었다. 요컨대, 해상에서의 소모전이 재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 제국은 이러한 해상 소모전이 충분히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형함에 대해 소형함들이 저항할 수 있게 하는 죽창으로만 거론되었던 어뢰잠수함이, 통상파괴전이라는 혁신을 통해 함대결전 없이 영국의 숨통을 조이는 수단으로서 더없이 효과적임을 과시한 것이다. 물론 독일 제국의 카이저마리네대영제국 해군에 비해 훨씬 열세인 배수량을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였고, 이는 독일 제국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카이저마리네는 장엄한 자침으로 영원히 소멸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서 당시에 생각하던 것과 달리 함대결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독일 제국의 카이저마리네는 패전으로 인해 소멸하긴 하였으나, 결코 대함대전에서 박살나서 용궁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카이저마리네는 제해권 장악이란 목표 달성에 실패함에 따라,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전쟁 자체에서 인적, 물적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독일제국이란 국가 전체가 먼저 나자빠져 패전한 "결과"로서 일시에 모두 자침하는 결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요컨대 1차대전에서 카이저마리네가 맞은 최후는 산업시대의 강대국간 전면전에서는 단일한 결전이 수많은 전투들의 집합인 소모전으로 대체되어 더이상 함대결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훈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2.5. 결말

그러나 그 뒤로도 이러한 전쟁 양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함대결전을 중시한 국가들이 있고, 개중 대표적 실패 사례를 꼽는다면 역시 일본 제국 해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해군은 점감요격작전이라는, 아군 방어망 내에서 적 주력 함대와의 대규모 결전을 통해 적의 전의를 꺾고 전쟁 승리를 달성한다는 구상을 갖고 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함대결전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전역, 라바울 항공전, 필리핀 해 해전, 대만 항공전, 레이테 만 해전 등 수많은 대규모 해전과 해상항공전이 벌어졌지만 단 하나도 한 국가의 전체 해군 전력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전"은 아니었다.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이 모두가 단지 길고 긴 소모전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산업 시대의 소모전에 대응할 국가적 역량이 부족했고, 일본 해군의 잘못된 전략 구상, 즉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은 이러한 열세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당장 일본 함선 중 수훈함으로 꼽히는 아오바급 중순양함, 그 중에서도 특히 1번함인 아오바, 또 공고급 순양전함, 쇼카쿠급 항공모함의 공통점은, 모두 함대결전에 끼지 못하는 2선급[5]으로 분류되어 전쟁 내내 이곳저곳에서 굴렀다는 것이다. 저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일본이 자신들의 패망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나가토나 진짜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 민간에 공개하지도 않고 꽁쳐놓은 야마토급 전함 등 소위 1선급 함선들도 어김없이 굴려야 했다. 수훈함들의 함장과 수병들이 태어날 때부터 일본 해군의 평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인들이라서 저런 공훈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형 함선보다는 신형 함선을 굴리는 쪽이 효율이 더 좋았을 것임은 누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한 예로 위에서 언급된 아오바를 보자면 일선에서 끝없이 구르며 전투 경험을 쌓은 덕에, 그렇게 숱한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전쟁 중 승조원의 1/4가량만 전사하는 결과를 냈다. 전투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 일본군 치고는 함내 부조리가 적은 편이었다는 증언도 있으며, 포로 학살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되지도 않았다. 군인이 군인으로서 기능하려면 경험은 필수인데, 케케묵은 함대결전 사상은 1선급 함선 승조원들이 경험을 쌓지 못하게 방해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선에서 구르다 보면 결국 각개격파를 당해서 '한타 싸움'을 벌이지는 못했겠지만 역사에 전공 한 줄이라도 더 남길 수 있었을 것이고 태평양 전쟁 역시 적어도 몇 개월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즉, 일본군이 신봉하던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은 그들의 멸망을 앞당겼을 뿐이다.[6]

2.6. 미래예측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의 해전에서 함대결전은 존재할 수 있을까? 무기체계가 고도로 정교화되고 상대적으로 고가/소수의, 생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함정 및 항공기가 2차대전까지의 대량생산 가능한 함정과 항공기를 대체하는 흐름을 비춰볼 때 분명 양차대전 당시의 상황보다 함대결전의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이러한 함대 전력 대부분을 파괴할 수 있다면 복구가 무척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대중들이 흔히 상상하는 대포를 빵빵 쏴대는 대규모 함대전의 모습은 아닐 테지만. 그러나 전략적 종심이 충분히 깊고 막대한 산업생산능력을 갖춘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이라면 현대 해전이라 해도 양차대전과 유사한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결전"과 "기동전"의 대표 사례인 프랑스 침공과 "소모전"의 대표 사례인 독소전쟁 간 차이를 가른 것은 프랑스와 소련의 종심, 그리고 생산력의 문제였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기존의 모든 군 자신을 재래식 무기로 만들어버린 핵무기 덕분에 완전파괴가 가능하게 된 현대의 상황에서는 함대결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영토 혹은 영해 장악이라는 관점을 탈피하여 의미가 살짝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제는 함선의 개념을 '배'라는 병기에 국한하지 않고, '대륙'이나 '나라'라는 개념으로 치환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공격을 받거나 해서 본국의 모든 시설이 불바다가 되어버리는게 가능한 현 현대 전면전에서, 무기부터 먹을거, 입을거 까지 모든 것을 보급받아야 하는 함선들간의 전투가 과연 예전처럼 결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총력전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핵무기를 빼고 보더라도 첫 대전쟁 이례 전면전 상황에서 함대 따위만 터지는 게 아니라 국민은 물론이요, 모든 국가의 기반 시설이 불바다가 되는 게 상식이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우주기술의 발전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상대를 20여분만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단두대 매치 양식의 총력적 전면전을 보기 드물어진, 현재 상황에서는 과연 무엇이 주력 해상 자산이고 그 자산들의 어떠한 교전이 결정적 전투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기술이 발전하고 군함이 값비싸지기 시작하면서 함대결전은 극과 극은 통하듯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항공기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바다라는 거대한 지형이 존재하는 한, 항공기가 선박처럼 오랫동안 날 수 있는게 아니라면 현대의 경제무역의 핵심인 바다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다를 통제하는 것은 군함이며 군함이 없으면 수에즈 운하와 가까이 접한 인도양에서 판을 치고 있는 해적이나 군함을 소유한 국가에게 경제의 통제 및 유실을 당할 수가 있다.

거기에 가장 많은 식량을 자급자족으로 충족하고, 동시에 염분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다는 바다에 접한 국가에게 있어서 가장 최중요한 안보에 속하기에 국력이 강한 국가일수록 해군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설령 국력이 약한 국가, 심지어 내륙이면서 호수와 접한 국가조차 최소한 해안경비대만큼은 꼭 갖추고 있다.

다시 본제로 돌아가서 군함이 값비싸지기 시작한 군함은 현재 경제 문제로 재료비와 인건비 등의 문제로 건조비가 크게 오르고 있는 상황이며 그 미국조차 신형 군함의 건조가 점점 느려지고, 노후화에 의한 유지비 상승이 덩달아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국가들은 건조하거나 구매한 군함을 마르고 닳도록 운영하고 있는 판이며 설령 신형 군함을 만들더라도 대량으로 건조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의 경우 대량으로 건조하는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 현재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맞부딪치고 있는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진주만 공습처럼 한 번 잃어버린 함대의 주력함대를 재건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서 복구하는데 들인 기간이 1년 이내이지만 이건 전시 상황에서 진주만 공습이라는 상황까지 겹쳐서 모든 역량을 전쟁물자 생산에 돌리는데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게 현대인 경우 첨단기술과 고급소재로 건조된 군함 특성상 1년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미국 내의 정치적, 외교적 문제까지 겹쳐 이전과 같은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힘든 상황이라는 점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될 경우 함대결전이라는 개념이 다른 의미로 성립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만 세계화로 탄생된 국제사회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함대결전의 성립 조건은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편이며 만약 함대결전의 성립 조건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제3차 세계대전이 터졌거나 국제사회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 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처럼 전쟁이 아닌 다른 명분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3. 함대결전사상과 그 허점

함대결전사상은 "결정적인 전투(Decisive Battle)"을 제대로 고찰 하지 않고, 결정적 전투를 전근대적인 '회전(會戰)' 개념으로 국한시킨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런 회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쟁 당사자들이 모두 회전을 원해야 하는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쪽은 당연히 회전을 기피하게 된다. 전력을 다 모아도 상대방을 이길 수 없거나 불리하다면 상대방이 한 방에 잡기 쉽게 일부러 전력을 모아서 던져주지 않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측은 전력을 모으더라도 적의 주력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적의 전력을 깎아 먹는 길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한쪽이 원하지 않는 전투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외교나 정치, 전략적으로 한 쪽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는 어려운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대함대전을 유도하는 것 또한 함대결전사상의 일부분이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 구시대적인 실책이라는 평을 듣는 것. 무엇보다 전쟁은 '최후의 외교수단'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외교나 정치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하는 건데, 스스로의 힘으로 외교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외교에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군대 전술이라면 그건 이미 전쟁에 쓰기에는 실격인 셈이다. 유틀란트 해전의 예에서 보듯 전력상 불리한 독일 해군영국 해군의 주력에게 공격받자 이전에 짜놓았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야간을 틈타 도망갔다.

설상가상으로 함대결전사상의 이론의 일부는 회전(會戰)보다도 더 뒤떨어졌다. 회전이 전근대적 사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개별 군주/국가의 권력과 대민 통제력이 약하고 농업생산량이 부족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장기간 유지할 수 없었던 봉건사회에서는 전력이 뒤쳐지는 쪽도 마지못해 회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런 전근대적 시대라고 해도 회전이 단 1번 벌어지고 그걸로 대세가 결정되며 모든 것이 끝난다는 식의 웃기는 이야기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장 가장 성공적인 회전 승리 및 속전속결 사례로 적용되는 알렉산드로스 3세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하는 전쟁에서도 그라니코스 전투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이라는 2차례의 거대한 회전을 치르고 나서야 가우가멜라 전투라는 마무리 회전을 벌일 수 있었고 그 후에도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는 추격전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까지 가는 대전진 끝에야 전쟁이 끝났다.

그나마 이것도 매우 성공적인 경우였고 한니발 바르카같은 경우에는 상대가 로마 공화국이라서 회전을 여러번 벌여서 승리한 끝에 칸나이 전투라는 끝판왕급 회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모전에 제대로 걸리고 카르타고 본국이 제대로 못싸우는 바람에 결국 자마 전투에서 패함으로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패배로 종결되었다.

또한 전쟁의 흐름이 총력전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1차례의 결전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육상에서는 결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곧, 해군이 설령 진짜 크고 아름다운 대규모 함대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제해권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차지한다 하더라도, 승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한번 제대로 패전을 겪으면 영원히 복구가 안되는 위험을 지는 판에, 진짜로 제대로 함대결전을 잡아 이겨 제해권을 진짜로 영구히 장악해도, 총력전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즉, 이익 자체는 엄청나긴 한데 그 무시무시한 이점을 확보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안 되는게 총력전이고, 이는 그 귀한 함대들이 결전에서 삐끗해 일시에 몰살 당할 위험을 그 누구도 지고 싶어하지 않게 만든다. (이 또한 고전시대에서 부터 이어저오는 해군사의 전통이다! 승선전투가 핵심이던 시절에도 국가의 총체적 역량에서 밀리면 결국 이겨도 이긴게 아니었다.)

결정적 전투에서 패배해서 제해권을 해당 전쟁에서 영구적으로 상실하는 전훈들이 실제로 많이 있어왔긴 하나, 러일전쟁에서 발트 함대가 한 차례의 해전으로 궤멸된 것과 같은 '대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의 러시아 해군은 러시아의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로 원정을 가야하는 특수한 상황에 있었고[7], 함대 전체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에 끌려들어가 결정적 패배를 당해 '소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가 결정적 패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교전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것이 매우 흔했고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함대결전을 갈구하게 만들기도 한 것인데, 일본 제국은 이런 본질을 대부분 무시하였다. 게다가 발트 함대가 소멸해버리긴 했어도 러시아 제국은 여전히 추가적인 해군력 동원이 가능했었다. 단지,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국내 정세가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 졌기 때문에 발을 뺀 것이다.

오히려 한 번의 결전으로 한 나라의 해군력이 와해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애초에 함대결전사상의 기반이 된 쓰시마 해전부터가 서양에서는 근대 해전사에서 트라팔가 이후 최악의 참사로 유명하다. 제해권에서의 열세는 결국 이러한 참사, 곧 피할 수 없는 결정적 패배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나, 그것이 쓰시마 해전 마냥 아주 깔끔하고 크고 아름다운 대규모 함대전 형식으로 실현된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즉, 대규모 함대전을 통한 결정적 승리는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례인 셈이다.

결국 함대결전이라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야 정상인 문제를, 그걸 노릴 역량도 안 되는 판에 다른 가능한 대안 마저 모조리 배제하고, 쓰시마 해전 같은 특수한 사례 재현에만 목을 매달았으니 문제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더군다나, 설령 이게 잘 풀렸다 해도, 상술 했듯 총력전에서 해군이 결정적으로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 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역으로만 한정해봐도,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자원과 공업생산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대규모 해전에서 한두번 패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걸로 전쟁을 끝낼 가능성은 없었다. 실제로도 진주만 공습에서 기습 공격을 제대로 먹은 미 해군은 전투력 면에서는 반쯤 소멸했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상실한 제해권 하나 만으로 전쟁에서 질 나라가 절대로 아니었다. 당연히 최종적 결과는 미국의 승리였다.

일본 제국의 발상은, 상술했듯 함선의 기나긴 건조기간과 초월적인 비용 문제에 입각해서 "여기저기서 깨작깨작 싸우면서 복잡하게 하지 말고 한타 싸움에서 크게 한 번 이기면[8] 그 다음부턴 전쟁 끝날 때까지 부담없이 쟤네들 바다 휘젓고 다닐 수 있겠다"는, 맞는 말이면서도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발상이었다. 미국과 맞붙어 이길 가능성이 절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하면 미군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고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제대로 된 한타 싸움 이전에 잠수함과 같은 비대칭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군의 전력을 갉아먹어 외교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이래도 듣지 않는다면 피폐화된 미군을 자신들의 준비된 주력전력으로 상대하여 격멸시키겠다는 점감요격작전이다.

하지만 이 점감요격작전은 근본적으로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쟁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결전 사상"을 전제로 한 구상이었고, 국가의 산업생산력과 동원력 증대로 인해 그 단 한 번의 결전이 존재치 않는 소모전 양상으로 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수많은 점감요격이 있을 뿐 함대결전은 존재치 않는다면 생산력에서 극히 열세한 일본이 미국에게 이길 방법이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 들이닥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 제국은 "산업 시대의 강대국간 총력전에 함대결전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웅변하는 살아있는 교보재가 되었다.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단 하루만에 격침당한 해전, 정규 항공모함 3척에다가 500기에 가까운 항공기를 상실한 함대항공전, 역사상 최대규모의 해전이자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이 침몰하는 대해전을 치렀으며, 그 결과 전쟁 내내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결코 전쟁수행의지를 꺾지 않았다. 자신들이 갈고닦은 함대결전 사상에 따르면 이러한 결전에서 패배한 국가는 항복하거나 강화를 요청하였어야 하나, 막상 스스로 그 처지가 되어버린 일본은 항복 따위는 전쟁 말기까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결국 일본이 최종적으로 전쟁수행의지를 꺾은건 결국 원폭을 2발이나 얻어맞고, 천황제의 유지도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한 후였다. 어찌 보면 결전은 결전이었다. 다만 전통적인 함대결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새로운 시대의 결전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4. 오해

함대결전사상은 주력함들을 모아서 회전을 하는 개념이 맞다. 다만, 일본으로서는 자신보다 물량이 많은 미국과 회전을 했다가는 승리할 가능성이 0%였고 애당초 전쟁 초기 목적부터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기 위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비대칭전력인 잠수함, 어뢰정 등을 사용하여 미국의 전력을 줄여 보고자 하는 구상을 했고, 그것의 결과물이 바로 점감요격작전이기도 하다. 다만 점감요격작전 문서에서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패했다고 해서 이러한 구상을 과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 해군 소장이었고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무엘 모리슨도 저서에서 당시 일본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었다고 평했다. 다만, 이는 전력이 떨어지는 쪽에서 전쟁을 피하면 된다는 상식을 제외한 나머지 중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답이라는 뜻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또한 전쟁이 터지면 바로 항공모함으로 바꿀 수 있게 수상기모함, 상선, 잠수모함 등을 건조해내기도 했다. 히요, 준요, 치토세, 치요다, 쇼호, 즈이호, 류호 등이 그 예. 이들 중 준요와 즈이호는 나름대로 성과를 올렸지만 치토세와 치요다의 개장은 너무 늦었고, 쇼호는 출전하자마자 격침되었으며, 히요는 계속 고장난 상태였다가 겨우 출전한 첫 싸움에서 침몰했다. 그걸 따지기 전에 숙련병, 숙련 조종사, 기름과 함재기가 부족하다는 문제 탓에 노력에 비해서 결과는 보잘 것 없었다.

결국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 자기 주제를 알고 어떻게 하면 미국과 더 잘 싸울 수 있을까 고민해봤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술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수십 년 간 타국의 기술적, 전략적 발전을 자신과 제대로 비교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이 전략으로 다 통한다" 라는 마인드셋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 마음대로 군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된 군축조약 탈퇴시기부터 거함거포주의에 치중한 건함계획이나 돌리고 서전에서 승리하자 그나마 건함 계획에서 약방의 감초식으로 들어가 있던 정규항공모함 건조계획을 더 축소시키는 등의 뻘짓을 한 점이다.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승기가 없긴 했다만

5. 일본의 함대결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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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론

공격적인 함대결전사상은 나폴레옹식의 기동을 통한 부분적 수적/화력적 우위를 얻어 란체스터 법칙을 이용, 아군에게 적은 피해로 적을 격멸하는게 된다. 그러므로 공격자의 함대결전 사상이라면 주력함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적을 제거해야 한다. 아군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군이 입는 피해가 적어지기 때문에 주력함이 주로 투입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손해를 아까워 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 해군의 전력이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였어도 적에게 선빵을 때렸으면 어느 정도 무리가 있더라도 절대 멈추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방어의 함대결전 사상이라면 반대로 이쪽은 꾹 눌러참고 있다가 단 한방에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주력은 최후의 최후까지 움직여서는 안 되며 주력을 한 곳에 모으고 모을수록 좋다. 이 때는 최후의 일전 이전에 발생하는 주력의 피해를 누구보다 아까워 해야 한다.

일본 제국러일전쟁 당시 방어적인 함대결전으로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문제는 이 승리에만 눈이 돌아간 나머지 방어적 함대결전의 전략을 이용하여 공세적 작전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게 운이 좋게 진주만 기습은 성공했고, 일본은 잘못된 전략을 지니고도 순간의 반짝임으로 이득을 얻었다. 사실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잘 해봐야 정말 버티고 버티다가 제2의 쓰시마 해전을 찍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백번 봐줘서 일본 해군이 제 2의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둬서 미군 주력함을 다 박살냈다 해도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러일전쟁 역시 종전한 이유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이 주력함을 잃고, 일본군이 막강하고 계속 러시아군을 이겨서가 아니라(203고지같은 실책도 많았다)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이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악화되었기에 러시아가 정전 협상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국내 정치 사정이 좋았다면 애초에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혀 달랐을 수도 있었으며,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공업생산량 같은 기초 생산력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도 군대육성에 중점을 둔 상황이었다. 즉 제2차 세계 대전 시점에서 세계 공업생산량 1위를 찍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 만일 함대를 잃었어도 미국은 실제 역사에서 보여줬었던 대로 함대를 찍고 찍고 또 찍어내고 그냥 많이 만들어내서 소모전과 물량전을 걸었을 것이고, 이미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태평양 전쟁을 함께 치르던 일본이 이를 이겨냈을 리가 만무하다. 다만 이렇게 되면 유럽 전선은 조금이나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총력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국력이 딸리는 국가가 자신보다 국력이 높은 국가와 싸울 때는 처음부터 장기적인 총력전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모든 군사력을 높혀서 단번에 승부를 보는 단기결전을 노리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무조건 이쪽에서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이미 망상이었다. 같은 추축국나치 독일도 단기 결전을 노렸지만, 이와는 별개로 미흡하나마 장기전을 예상한 각종 개발 계획과 동원 계획을 만들고 사회간접자본 투자까지 진행했는데, 일본은 단기결전만 생각하고 장기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원 축적 면에서 보더라도 나치 독일은 석탄을 액화해서 석유로 만드는 시설을 국내에 대량으로 건설해서 가동한 후에야 전쟁을 벌였지만, 일본은 석유 수입선이 다 끊어지고, 비축한 석유도 잘 해봐야 1년 버틸 수준의 양만 가지고 전쟁을 했다.

이는 함대결전사상면에서만 봐도 답이 없는 짓이었다. 함대결전을 일본이 원하는 대로 대승리를 해서 성공적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외교적 수습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제해권 유지를 위해 함대 전력을 다시 유지 및 보수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위에서 설명했듯이 함대결전급 해전이 단 1차례만 벌어진다는 것도 넌센스다. 미국이 일본 입맛에 맞게 해전을 벌인다고 해도 미국 태평양 함대 격멸의 제 1 회전, 태평양으로 온 미국 대서양 함대를 격멸시키는 제 2 회전, 미국 본토 앞까지 일본이 진격하자 미국이 잔여 함대와 신규 건조 함선까지 총동원한 미국 최후의 함대를 격멸시키는 제 3 회전을 벌여야 하며 여기서 모조리 일본이 대승리해야 하고 그 후에도 함대 전력을 유지해야 답이 나온다. 그나마 이것도 일본 의향대로 미국이 움직인 것이라서 실제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소모전이 심하게 걸리게 되므로 그것까지 준비한다고 하면 이미 총력전에 준한 준비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노린 단기결전의 첫 단추가 성공한 시점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승부를 결정 짓든지 혹은 외교적 수습을 하든지, 아니면 얻어진 이득과 시간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뒤를 보는 총력전의 개념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그냥 운 좋게 얻어진 그 상황에 대한 현상 유지만을 꾀했으므로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길을 걷고 만다.

다만 외교적 수습은 절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전포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놓고 상대국을 폭격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함선들을 파괴했는데 저쪽에서 외교적인 시도를 받아줄 리가 만무하다.[9] 무조건 항복이라면 모를까... 만일 미국의 함대 전체규모가 태평양 함대였고 함대 생산능력도 미흡해서 태평양 함대를 잃는 순간 해군력이 증발하고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하는데 몇 년씩 걸리는 상황이었다면, 미국으로서도 일본 함대가 미 본토를 타격하기 전에 적당히 끝맺고 후일을 도모하는게 합리적이었을 테니 외교적 수습이 가능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태평양 함대 정도의 전력은 미국에게 복구에 시간은 좀 걸리지만 비용은 감당할만한 수준이었고, 열받은 미국은 역으로 쇼미더머니를 갈겨서 바다 수평선을 군함으로 가득 매웠다.

그렇다면 일본이 할 일은 공격 뿐이다. 전쟁을 피하면 된다는 상책을 택하지 않았다면, 외교적 수습도 안 된다면, 총력전의 개념을 생각하지도 못했다면 남는 길은 공격 밖에 더 있는가. 공격적인 함대결전을 하기로 했으면 그냥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력 전함들이 놀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망했어요.

5.2. 실전

주력함을 미끼로 던진 어리석은 전술이다.

원래 함대결전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영국의 경우 유틀란트 해전 당시 독일 주력함대를 섬멸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함대 지휘관 존 젤리코가 강하게 비판받았는데 이는 영국 또한 이 시기까지는 함대결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젤리코의 함대 운용을 고려하면 모든 지휘관들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그러나 유틀란트 해전으로 그런 망상은 끝났다. 특히 미국이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 이런 전략을 구상했었으나, 유틀란트 해전을 참관한 뒤에는 건함사상을 바꿔가면서까지 전략을 바꾸었다.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는 최대속도가 느리더라도 언제든지 전장으로 갈 수 있게 순항속도와 연비를 늘렸고, 적의 공격을 잘 받아내기 위해 집중방어같은 방어력에 치중했다고 하면. 유틀란트 해전 이후 한번의 해전으로 전멸시키기도 당하기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되자, 순양전함의 빠른속도와 표준전함의 강력한 공격력과 집중방어를 가진 고속전함을 요구하게 되었다. 다만, 이런 변화는 단지 전훈에 따른 것은 아니고 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도 컸다. 고속전함은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도 있었고 이는 연료를 석탄에서 중유로 바꾸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유틀란트 해전으로 생겨난 건함사상의 가장 큰 변화는 일명 포스트-유틀란트 구조라고 부르는 방어구조의 변화로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갑판 방어력이 강화된 것이 특징이다.

애초에 일본 해군이 멀쩡한 배를 미끼로 던진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 산호해 해전 같은 경우에도 경항공모함을 미끼로 일부러 떨어뜨리는 작전을 전개해서 무의미한 항공모함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았었다.###
  •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전함 부대의 방패로 생각해서 상식적으로 보면 전함 부대가 탱킹을 하고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아웃레인지를 해야 하는데,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탱킹을 한 병크 of 병크도 저질렀다. 이런 짓을 하다가 일본 해군의 대들보인 항모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4척이 전멸했다.
  •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는 아예 대놓고 정규항공모함인 류조를 미끼로 사용했다. 배 크기도 작고 게임에서 경항모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오해받고 있지만, 일본군은 류조를 정규항공모함으로 간주했다. 덤으로 이때 일본군이 가진 정규항모는 쇼카쿠, 즈이카쿠, 류조 3척 뿐이었다. ###
  •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일본군도 나름대로 반성을 했기에 전함을 포함한 부대가 선두에 서고 항모가 포함된 본대는 살짝 뒤에서 움직이며 목표 분산을 노렸고, 실제로 미군 항모에서 발진한 공격대는 대부분 전함부대만 깔짝대고 돌아갔다. 문제는 이런 진형은 안 그래도 부실한 대잠전력을 더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정규항모인 쇼카쿠다이호를 잠수함에게 말아먹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사실 전함의 경우 대공사격보다는 적 전함에 대한 대응역할이 강조되는 편이라 적에게 전함이 없으면 전함을 배치하는 게 필수는 아니지만 대공방어를 해줄 호위함은 충분히 붙여줘야 했다. 그러나 상대인 미국의 경우 전함의 주요 임무에 대공화망 구성이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즉, 전함이라는 막강한 무장 플랫폼을 단순히 함대함 포격전용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최대한도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은 것이다. 그 편이 여러모로 합리적이기도 하고.

그리고 위의 예시에는 포함이 안 되었지만 진주만 공습 자체도 전함을 아끼기 위해 잃어도 되는 항공모함 위주로 작전을 짜서 그게 대박을 친 것에 가까웠다. 이런 막가파식 운영은 군함에만 적용된 게 아니었다. 항공대의 경우도 연합국은 어느 정도 베테랑이 된 조종사는 후방으로 돌려 교육에 투입, 신임 파일럿들의 기량을 높이는데 활용한 반면 일본은 매 전투마다 출격하던 놈을 그대로 다 투입했고 결국 한 줌도 안되는 에이스[10]들이 소모되자 대전 후반기엔 새파란 신병만 남아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앞 문단에서 항모를 미끼로 썼다고 했는데, 전쟁 후기 일본 해군이 그렇게 한 것은 배는 있어도 쓸만한 파일럿이 없는 상황이 된 탓도 있다.

그 외에도 순양함이나 구축함 역시 전함간의 결전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순양함이나 구축함들은 서로 포화를 주고받는 전함 사이로 돌진해서 어뢰로 상대방의 전함을 격침시키는 이른바 '수뢰전'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대공-대잠 기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특히 도쿄제국대학 총장이기도 했던 히라가 유즈루 중장이 1930년대 초에 구축함의 주포를 대공-대수상 양용포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낸 것이 결정타였다. 일본의 함대형 구축함들이 사용한 5인치 포들은 앙각이 75도로 높긴 했지만 주퇴기의 거리가 긴 평사포(캐논)인 탓에 방공전에 필요한 대량의 포탄을 고속으로 사격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게다가 이 보고서가 나온 얼마 후에 5인치 대공포를 전함과 항공모함의 대공포로 장착하게 되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주된 상대가 전함이 아니라 함재기와 잠수함이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상당한 삽질이었다.

여기서 구경은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해군이 미군에게 받아 타던 구형함들의 주포가 바로 2차대전 때부터 사용하던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로 명포 반열에 들어간다. 그 외 일본 해군의 대공기관포, 기관총도 구경이나 바탕 모델 자체는 평이 좋은 서구 모델에 기반한 게 많았다. 그런데 구경만 같거나 비슷했지 성능이 떨어졌고, 베이스 모델이 있는 경우는 일본화시켜 양산할 때 잘못 만들기도 했고, 실전에서 운용할 때 후진적으로 사용하는 등 미군만큼 성능을 뽑아내지 못했다.

덕분에 태평양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미국의 잠수함이 오히려 일본군의 구축함을 사냥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다만 이건 함대결전사상만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소나' 기술이 상당히 뒤떨어진 것이 더 문제였다. 물론 함대결전사상의 영향으로 소나 관련 기술을 등한시했던 것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뒤떨어진 기술 덕분에 나름대로 구축함 본래의 역할에 신경써서 만들었다는 구축함들도 소나의 성능 부족으로 제 역할을 못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다른 나라라면 통상파괴전이나 다른 방식으로 교리를 선회했겠지만, 유연성이 부족했던 일본 수뇌부는 '그래도 꾸역꾸역 모으다보면 언젠간 역전의 날이 오겠지'라는 판단으로 역량 부족을 드러냈다. 현실은 미국이 우월한 공업력으로 더 열심히 꾸역꾸역 모아서 적절하게 사용했기에 역전의 날은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꾸역꾸역 모아서 역전하려면 우선 생산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미국만큼 많이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물량이 받쳐준다면 버틸 수는 있다. 당연히 소모전에서도 우세를 점해서 더 많이 남겨야 한다. 꾸역꾸역 모아서 역전하기 위해서는 아군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군 피해는 최대화한다는 원칙을 칼같이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일본군은 이렇게 자명한 이치를 따르지 않았다. 생산력도 부족한 주제에 멀쩡한 배를 미끼로 내던지면 안 그래도 모자란 물량이 더 모자라게 된다. 소모전에서의 피해를 감수한다는 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방향착오였던 것이다.

결국 함대결전만 보다가 소모전을 보지 못한 일본군은 함대결전은 항공모함과 숙련된 파일럿 등 인적 자원 부족으로 밀리는데 다른 방향은 신경조차 안 쓴 덕분에 어디로 가나 답이 없다. 구축함에 대잠장비가 부족하고, 항모에 이착함할 실력이 있는 파일럿도 모자라고, 연료도 모자라서 원유생산지 부근에 머물러야 하는 등의 총체적 난국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같은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왔으며,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정말로 함대결전급 규모의 함대(구리다 함대)를 끌고 와서도 대함대전이 아니라 '적진돌파 후 수송선단 격파'를 목표로 잡아야 했고, 그나마도 미군의 2선급 함대인 태피3에게 패배하는 창피를 겪게 된다. 특히 결전병력의 주력인 전함은 구리다 함대에 무려 4척이나 있었지만,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 한 척도 제압하지 못하고 쫓겨나면서 굴욕의 정점을 기록했다. 일본 최강의 전함인 야마토와 나가토가 히어만이 발사한 어뢰에 쫓겨서 도망가버린 것.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는 히어만의 어뢰공격을 피했지만 그 이후에 전과를 기록하지 못했고,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미군 구축함들을 격파하며 활약했지만 일본군 중순양함 초카이를 팀킬하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결국 전함들이 제 몫을 하지 못한 데다 중순양함들이 태피 3의 저항으로 줄줄이 격침된 탓에 일본 함대는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못하고 후퇴했고, 히어만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는 급기야 일본의 패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함대결전교리에 가장 열성적이던 일본 해군로서는 치욕적인 침몰이었다.

요약하면 일본군의 교리는 태평양으로 진격해오는 미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등으로 최대한 소모시킨 뒤 전함 한타로 모두 격멸한다는 식이었고, 야마토급 등의 전함은 '최후의 한타 페이즈'에 써먹을 용도로 설계된 전함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초반 승리에 취해 처음 짜놓은 계획은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소모전만 했고, 야마토를 비롯한 일본 전함들도 함대결전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소모되선 안된다는 핑계로 항구에서 놀기만 했다. 반대로 미국은 따끈따끈한 새삥 전함들도 과달카날 같은 최전선에서 쉴새없이 전투를 치를 정도로 절박했고, 전함 대신 전선을 지탱하던 항공모함과 중순양함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항공모함의 항공전력이 모조리 소모된 후에야 무거운 엉덩이를 뗀 일본 전함들은 그토록 바라던 전함끼리의 한타 한번 못하고 격침된다. 만약 함대결전으로 승리하고 싶었으면 진주만 공습 때 전투기만 보내는게 아니라 함대를 다 끌고 들어가서 포격으로 아예 초토화를 시켜야 했다, 점령은 무리지만 완전 인프라를 박살내 놓으면 복구에 배로 시간이 걸렸을터이니.

설령 미국이 함대결전에 동의한다 쳐도 문제인 것이, 미국이 함대결전을 위해 전함들을 몽땅 긁어모으면 공고급, 후소/이세급과 같은 14인치 주포가 104문, 나가토급과 같은 16인치 주포가 90~150문이 나온다. 그리고 대형 순양함의 구경으로 분류되는 12인치는 최소 66문이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너무 열세다. 야마토급 전함의 18.1인치 포 18문이 위력적이라고 해도 사격통제장치와 레이더 등,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능력에서 차이가 너무 크다. 미국 전함들의 방어력이 높고 일본 전함들의 방어력이 부실함을 감안하면 차이가 더 크다. 대응방어가 불가능한 후소급은 말할 것도 없고, 항공전함인 이세급도 함재기 격납고의 존재를 감안하면 위험하다. 공고급은 처음부터 결전전력에서 제외되었기에 넣지 않았지만, 굳이 집어넣더라도 공고급의 주포는 14인치인데다 방어력이 너무 낮아서 전함간의 포격전을 벌일 수 없다. 공고급 2번함 히에이가 중순양함의 포격으로 옆구리가 뚫리고, 공고급 4번함 키리시마가 워싱턴에게 순식간에 박살난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결국 야마토급 2척과 나가토급 2척만이 남게 되는데, 미군의 16인치포 탑재 전함은 몬태나급을 제외해도 13척이다. 이래서는 감당이 안 된다. 애초에 일본은 함대결전으로도 미국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함대결전으로도 미국을 이기기엔 수적 열세였다는 점은 일본군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군사정보 획득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국가별로 각자 능력에 따라 각급 함선의 소유량과 함대의 최대 규모를 정할 때 미일 간의 비율을 5 대 3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해군 내부에선 함대결전을 위해 군축조약을 쌩까고(최대 조약 파기까지 감수하고) 함대를 무조건 미국의 함대 이상으로 늘리자는 '함대파'와 조약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의 함대 수를 그나마 그 정도로 묶어 놓은 거라는 '조약파'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도 생각없이 들이받는 게 아니라 점감요격작전을 통해 미군의 힘을 빼놓고 나서 싸운다는 구상을 했었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의 의도대로 순순히 속아줄 리가 없으니 이 작전도 결국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함대결전이라는 단 한 번의 큰 전투로 승패를 가를 생각이었기 때문에, 장기전을 염두에 두는 지원세력에 대해서는 생각도 없었던 것도 약점이다. 예비포신이 없어서 훈련 및 실전에 써먹기 힘들었던 야마토급 전함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전함들의 전투력이 약하다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일본군이 전함들을 본격적으로 출동시켜서 포격전을 벌인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전함들은 일방적으로 깨져나갔다. 실전을 통해 다져진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최소한 싸우기라도 했지만, 다른 떨거지들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후소급 전함 2척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군 구식 전함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쳤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이세급 전함들은 오자와 함대에 소속되어 미끼 노릇을 했으므로 포격전을 벌일 기회가 없었으니 넘어간다. 그러나 최신 전함인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는 전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탱커 역할을 하다가 침몰한 무사시는 논외로 치더라도, 야마토와 나가토는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 도망가는 추태를 보여줬다. 백주대낮에 구축함한테 지는 전함이 어디 있냐! 이런 걸로 미군과 함대결전을 해봤자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6. 결과

일본 해군필리핀 해 해전레이테 만 해전으로 두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구레 군항 공습 등으로 해군이 사실상 사라지건 말건 패전시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함대결전에 버금가는 타격인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도 끝까지 전쟁을 했지 절대로 항복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독일 또한 1943년 중반 이후 연합군의 호위항공모함이 바다를 뒤덮으면서 해전의 승패가 결정났지만 유보트의 저항이 종식된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이며, 일본도 그 허접한 잠수함대가 전투를 종료한 것이 전쟁에서 패전한 후다. 애초에 많은 반례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이라는 단 1개의 예외를 가지고 다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물론 의지가 있건 없건 배가 없는 해군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고 확실하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기는 한다. 그게 한 번의 전투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점감요격작전 문서에서 언급되는 나카무라 료조 중장처럼 대충 본 사상의 약점을 알고 있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러일전쟁의 전훈을 과도하게 신격화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에 대한 반론을 쉬이 제기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경직된 군사문화 때문에 이를 대놓고 반박할 수 없었을 뿐. 이런 상황은 일본 육군도 다르지 않아서 이들 역시 사실상 러일전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전략전술을 사용했다.

결정적으로 대규모의 전력전이 곧 상호확증파괴가 될 수 있는 현대에서 국가와 국가 간의 전력전이 나올 가능성은 제로라 봐도 된다. 한국에서의 북한 도발사나 미군이 개입하는 여러 분쟁지역 등은 전부 소규모 교전(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이다. 미사일 위주의 해전이 주류가 되는 지금에 와서는 함대결전은 (주력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하는 방법의 하나로 남아있을 뿐으로[11] '모든 해군을 동원한 한타 싸움으로 승리한다'는 교리는 결국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일본과 미국은 함대결전을 계속해서 치러온 것일수도 있다. 점감요격작전으로 적의 주력을 깎아오겠다고 벌여온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이 하나같이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들 뿐이었다. 일본이 생각하던대로 한타 싸움에서 크게 이겨서 활개치고 다닐수 있게 된 것까지 그대로다. 단, 승자가 미국이었을 뿐.

그리고 함대결전사상이 통하려면 함대결전으로 함대를 잃은 측이 함대복구까지 막대한 시간이 들어 전쟁기간동안 재기불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세계 공업력 1위던 미국의 생산력에 일본의 생산력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함대결전으로 양측이 전함들을 다 잃었다고 쳤을 때 일본은 연단위로 해야 겨우 1~2척 복구할 수 있었다면 미국은 월단위로 함선을 뽑아내 복구하고도 남았다. 이러니 소모전 양상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일본의 다양한 서브컬처에서 등장하는 '결전'은 모두 이 함대결전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규모 그룹이 여러 번 등장해 지루한 소모전을 펼치다가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로서 불리하므로, 전투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보장하려는 애니들은 대부분 언젠가 벌어지는 그 '결전'에서 판도를 뒤엎을 무기들을 등장시키거나 수적, 질적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주인공 등을 통해 개연성을 맞추려고 든다.


[1] 하루 단위로 나왔다는 폭격기나 시간마다 뽑아낸 전차도 마찬가지다.[2] 1400년대 말부터 이미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다.[3] 즉, 제해권을 우회할 수단이 없었다.[4] 이렇게 탄생한 것이 현대 군함의 시조인 구축함이다. 많은 언어에서 이 함급은 무언가를 (주로 잠수함) 쫓아내거나 파괴하는 용도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예로 영어로는 어뢰정 구축함인 torpedo boat destroyer와 잠수함 구축함인 submarine destroyer라고 불리던 것들이 사실상 같은 용도로 다양한 위협에 대응하게 되자 destroyer로 축약되었고, 네덜란드어에서는 어뢰정이 사실상 소멸한 지금도 통상 구축함을 지칭할 때 torpedobootjager를 사용하며, 잠수함 구축함인 onderzeebootjager 또한 분리하고 있다.[5] 아오바급 중순양함은 중순양함들 중에서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다음으로 낡은 배였고(참고로 아오바급보다도 성능이 떨어지는 후루타카급 역시 수훈함으로 분류된다), 공고급 순양전함은 전함들 중 말석 취급, 쇼카쿠급 항공모함은 비행사들의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취급받는 5항전 소속이라 일본 내에서 2선으로 취급 받았던 항공모함들 사이에서도 대접받지 못했다.[6] 사실 현대인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전함에 꽂혀있지 말고 항공모함을 한 척이라도 더 건조하고 함재기 비행사들의 목숨을 카미카제 같은 헛짓으로 날려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더불어 본래 구축함이 아닌 '직위함'이라는 함종으로 개발되던 아키즈키급 같은 방공 능력이 괜찮은 물건도 원래 계획대로 대량생산하고 어뢰 같은 걸 달아서 결함품으로 만드는 대신 대공포를 하나라도 더 달았으면 나았을 것이다. 결국 나가토든 야마토든 일본 특유의 떨어지는 방공 능력으로는 미국의 함재기들에게 시달릴 것이니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물론 나가토, 야마토보다 방공 능력이 떨어지는 공고급 순양전함이나 아오바급 중순양함도 함재기들의 공격을 무릅쓰고 전공을 올렸으니 나가토, 야마토를 꽁쳐놓은 일본 해군 수뇌부들의 무능함만 더 부각될 뿐이다.[7] 애초에 두 개 이상의 대륙에 걸쳐 서로 분리된 바다를 다스려야 하는 나라 자체가 드물다. 여러 대륙에 걸쳐 성공적으로 해상을 지배한 나라는 대영제국 외에는 없었고, 그 영국 역시 일본에게 한 대 제대로 맞고 나자 태평양 전쟁의 들러리로 전락했다. 즉, 일본의 함대전략은 수 개 이상의 대륙에 걸쳐 영토를 가진 제국과 전쟁을 하는 대단히 특수한 상황에서라면 확실히 유효했다.[8] 실제로는 진주만 공습조차 크게 이긴게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경제력을 심각하게 낮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함대가 유류저장시설과 수리도크를 공격대상에서 제외했고, 그 덕분에 살아남은 미 태평양 함대의 잔존전력은 그대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의 수심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미 해군은 애리조나를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전부 건져내서 수리할 수 있었다. 즉 일본 해군이 역사적인 대승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진주만 공습의 효과는 고작 6개월 아무리 잘봐줘야 1년이었고, 도리어 미국이 전후 경제에 대한 생각은 뒷전으로 미루고 복수에 눈뜨게 하는 전개를 맞이한다.[9]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사람 대 사람으로 설명하자면, 가만 서 있는 사람의 뒤통수를 깨 바닥에 뉘어 놓고는 "야, 싸우자" 라고 하는 격이다.[10] 이걸 뽑을 때 우수한 재원을 선발한다며, 벌거벗겨 체조시켜 균형감각을 보기도 했다는 사진이 남아 있다. 사카이 사부로는 나중에, 전쟁 말기 파일럿 부족에 시달릴 때, 전쟁 전에 너무 소수정예로 뽑는 바람에 문제가 없음에도 탈락한 사람들이 아쉬웠다고 회고했다.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쓰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미 그들이 징병되어 허구헌날 터져나가는 배의 수병들이나 반자이 돌격을 하는 알보병들이 되어 소모되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11] 제해권을 장악하려면 좋든 싫든 적 주력함대가 바다로 기어나오지 못하게 해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