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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 / 陸軍航空士官学校). 일본 육군 내의 조종장교를 양성하던 사관학교. 일본 내의 약칭은 항사(航士)였다고 한다.
1. 개요
항공전력을 보유한 국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공군이 독립된 군종으로 탄생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1] 일본군의 경우에도 공군은 존재하지 않았고, 육군 소속의 항공대나 해군 소속의 항공대로 불렸다. 그때문에 일본군 육군항공대의 파일럿들은 육군에 속한 육군항공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일본 육군에서 항공병과가 생긴 것은 1925년이었다. 그 다음해인 육사 40기 졸업생(24명) 부터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마치고 3개월간 견습사관 과정을 마치게 한 다음 토코로자와육군비행학교(所沢陸軍飛行學校)에서 기본 비행 훈련을 받게 하였다. 교육 과정은 9개월이며 이후 다시 을종교육 4개월을 받고 항공병과장교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에서 조종 병과 출신은 고위 장성에 전무했고 포병과 보병 출신들이 상층부를 이뤘기에 장교단의 화합을 위해 조종병과는 일반 육군과 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것이 1937년에 법안이 만들어지고 1938년에 독립된 사관학교가 된다. 1941년 쇼와 덴노가 방교하여 수무대(修武台)란 부대 별칭을 내렸다. 당시 일본이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탓에 교육과정이 일률적이지 못 하고 여러 후보생 과정을 동시에 소화했다. 한마디로 개판.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인원을 받기도 했다. 기수는 이전의 육군항공장교 과정을 그대로 인수하였기에 1기부터 세진 않았다. 독립적으로 생도를 받아들여 시작한 것은 50기(1937년)부터이다. 이로 부터 7년후 일제가 패망하기 때문에 항사 출신 장성은 없다.
당시 일본의 비행장교는 4종류의 전문분야로 나눠 각각 훈련을 받았다.
정찰 - 지바현 시모시즈 비행학교
전투 - 미에현 아케노 비행학교
경폭 - 이바라키현 호코타 비행학교
중폭 - 시즈오카현 하마마쓰 비행학교
1945년에 이르면 미군의 폭격과 유류 부족으로 훈련 자체가 거의 힘들어져 59기 부터는 조종분과에 한해 만주에서 교육을 한다. 이러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후인 1945년 10월에 폐지된다. 폐교시 교육중이던 마지막 기수는 59기와 60기였다.(육사는 61기 교육중)
사관학교는 사이타마 현 내 현재의 항공자위대 이루마 기지에 있었다.
2. 기수 및 유명 졸업생
초대 및 3대 김정렬 공참총장과 제8대 박원석 총장, 제9대 장지량 총장이 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다.아래 지인태의 경우만 해도 일본 육사 본과까지 졸업 후에 육군 비행학교를 다녀 조종사가 되었다. 그러나 육군항공사관학교로 독립 후에는 육사 예과 과정만 마치고 육사 본과로 가지 않고 항공사관학교로 가게 된다. 그럼으로 기수별로 일본 육사생들은 예과에서 2년간 함께 수학하는데 이후 일본 육사 본과와 항공사관학교로 갈리게 되며 졸업시기도 서로 다르다.
조선인은 일본 육사생은 49기 부터 2명씩 입교하는데(만주에서 일본 육사 본과로 유학온 생도들은 제외) 막판에는 조금 늘어 61기 9명이 일본 육사 예과 입교 상태에서 일본 패망을 맞이 하였다.
조선인 출신 육항사 졸업생은 11명 + 재학생 3명이며, 이 중에서 5명(지인태 중위, 최명하 중위, 전원상 중위, 최정근 중위, 정상수)은 야스쿠니에 있고 재학생중 1명(홍승화 생도)은 한국군에 입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7명(박범집 소좌, 김정렬 대위, 김창규 대위, 한용현 소위, 박원석 소위, 신상철 소위(제6대 공군사관학교장(1953.12.1~1959.9.1))와 장지량 생도, 이연수 생도)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생존한 육항사 최고참은 박범집으로 소좌이지만 정비 분과이고, 조종사 중에서는 김정렬이 대위가 선임이다.
-50기-
1934년 4월 일본 육사 예과 입교. 2년 후 일본 육사 본과로 입교 해서 1년 1개월간 항공사관후보생으로 교육 받음
1937년 10월 도코로자와 육군 비행학교로 58명 입교. 이후 육군항공사관학교로 독립.
1938년 6월 53명 졸업, 전원 조종장교(정찰 16, 전투 6, 경폭 12, 중폭 19)
- 지인태 : 항공 중위(조종, 정찰) 2등 졸업. Ki-27를 몰고 노몬한 전투 중 조난 당하여 자폭. 중위로 추서.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 중 최초 전사.
- 이시카와 간시(石川貫之) : 항공자위대의 10대 항공막료장
- 니시오 사부로, 신카이 마레스케 : 전사로 2계급 추서. 항공 대위. 육항사 출신 중 최고 계급.
-51기-
1937 년 10월 90입교. 이때부터 일본 육사 예과(2년)-대부근무(반년)를 마치고 육항사로 바로 감. 50기와 동시 입교.
1939 년 4월 95명 졸업(50기 5명 포함), 통신 장교 과정 생김
이 기수만 조선인 일본 육사생 없음.
-52기-
1937 년 11월 128명 입교
1939 년 9월 127명 졸업(조종 101명, 기술 12명, 통신 14명)
- 최명하 : 항공중위(조종, 전투). 조선인 에이스(5기 이상 격추), 하야부사를 몰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팔렘방 비행장 공습 후 귀환도중 적탄을 맞고 불시착. 권총자결. 대위로 추서.
-53기-
1938년 6월 370명 입교1940년 6월 357명 졸업
-54기-
1938년 11월 409명 입교
1941년 3월 395명 졸업
- 김정렬 : 항공 대위(조종, 전투), 공군 중장, 초대/3대 공군 참모총장, 국방부장관, 국무총리
- 박범집 : 항공 소좌(정비), 일본 육사 52기로 졸업 후 포병 소위 시절 항공부대가 크게 확장됨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육항사에 들어가 정비 과정을 마침. 대한민국 초대 공군참모부장. 6.25중 비행사고로 전사. 공군 소장으로 추서.
-55기-
1939년 11월 646명 입교, 대부 근무기간 단축
1942년 3월 636명 졸업
-56기-
1941년 6월 638명 입교. 예과 사관학교 졸업 후 2달간 대부 근무를 마치고 입학함. 이때부터 만주군관학교 예과(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 약간명씩 포함
1943년 5월 618명 졸업
- 최정근 : 항공소좌(조종, 경폭) 오키나와 전투 당시 Ki-51를 이용하여 미군 선단을 향해 특공으로 전사. 2계급 추서로 일본 육사 동기 2천명 중 가장 먼저 소좌에 승진함.[2]
-57기-
1942년 7월 634명 입교. 예과 사관학교 재학중 육학사에 2개월간 파견 교육.
1943년 1월 육사 보병등 생도 120명 편입
1944년 3월 751명 졸업
1944년 7월 소위 임관
- 정상수 :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
-58기-
1943년 12월 1200명 입교, 예과 재학중 20간 대부 근무 포함 육항사에 50일간 파견 교육
1945년 3월 1176 명 졸업
1945년 7월 소위 임관, 이후 연성 훈련 과정에서 종전.
- 박원석 : 항공 소위(조종), 공군 참모총장, 국가재건최고회의의원
- 신상철 : 항공소위(조종), 공군 준장, 제6대 공군사관학교장(1953.12.1~1959.9.1)
- 한용현 : 항공소위(폭격), 공군 인사국장.
-59기-
1944년 3월 1608명 입교. 항공병과만 반년 앞당겨 예과 사관학교 졸업함
1944년 6월 대부 교육
육항사 재학중 일제 패망. 종전 후 특별 졸업자격 부여.
- 홍승화 : 광주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소식불명
-60기-
1944년 3월 일본 육사 예과 입교
1945년 3월 27일 3004명 입교(1499명은 아직 예과 사관학교 신분인 1월에 육항사로 파견옴)
일제 패망. 집으로 GoGo!
-61기-
1945년 4월 일본 육사 예과 입교
항공과로 지정된 학생만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