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1:11:42

남만주철도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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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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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1906년 11월 26일
해체일 1945년
업종명 철도 운송업 · 중공업[1] · 호텔업 · 건설업[2]
기업 분류 주식회사
운영 구간 안포선, 북선선 등 여러 만주 지역철도
본사 소재지 일본 제국 관동주 대련(1906년~1911년)
만주국 봉천(1933년~1943년)
만주국 신경(1943년~1945년)
<colbgcolor=white,#191919> 파일:300px-Super_Express_Asia.jpg
남만주철도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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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철도의 파시 7형[3] 스트림라이너 기관차

1. 개요2. 예하조직 및 계열사
2.1. 만철조사부2.2. 만선역사지리조사실2.3. 야마토 호텔2.4. 쇼와제철소2.5. 만주항공
3. 만철도(刀)

[clearfix]

1. 개요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줄여서 만철([ruby(滿鐵, ruby=まんてつ)])은 남만주의 철도를 경영하던 일본 제국철도 회사다. 처음에는 일본 제국 정부가 주식 50%를, 민간이 나머지를 가졌으나, 이후 정부가 지분 전체를 보유하며 공기업처럼 변한다.

1906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랴오둥반도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넘겨받게 된다. 이 때 할양받은 철도[4]남만주철도부속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의 민정장관으로 식민지 정책을 총지휘했던 문관 출신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였다.[5] 만철의 설립 자체가 러일전쟁 중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고토 신페이의 영향을 받아 헌책한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요지는 철도 경영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대륙에서의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만철은 철도를 기반으로 광산, 항만, 정유, 유통, 제조, 출판,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 만주국의 경제를 장악하였다.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닌 관동군과 더불어 만주를 지배한 한 축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라도 철도회사가 여러 분야에 손을 대는 경우는 많다. 일본의 수많은 사철기업을 모태로 한 기업집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기업인 일본국유철도 또한 버스나 해운업, 통신과 병원 운영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정리된 편인데, 유럽에서도 철도 공기업들이 다른 분야의 산업에 관여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적지 않았다. 한국의 철도청도 저런 식으로 운영되던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한때 버스 사업, 요식업과 호텔 사업에서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외국과 달리 철도에 전업할 것을 계속 요구받으며 타 사업분야는 계속 민간에 불하돼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굳어졌다. 오히려 한국철도공사 출범 후의 코레일 유통 등의 설립으로 여러 산업에 손을 대는 기업집단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이렇게 되는 데에는 산업화 초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는 당연 산업단지로의 도시 집중화, 물류의 대량 수송이 필연적인데 이 당시에는 자동차가 가격이 비싸서 부유층의 산물이었고, 물류비 역시 철도가 쌌기때문에 철도가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 됨과 동시에 철도를 놓는 토지의 확보 또한 중요했다. 주요 철도역 인근은 소위 역세권으로 도시화의 핵심이 되어, 당연 철도회사는 철도부지와 역세권을 관리하는 부동산 회사로의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며, 이게 더 발전하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급 토지를 싼 값에 매입한 후 자사의 철도와 연결시킨 후 역세권으로 개발해 비싸게 파는, 즉 부동산 개발회사의 역할까지 하고 여기서 더 나가면 개발된 역세권 토지를 단순히 매각해서 시세차액만 보는 것이 아닌, 해당 토지에 호텔이나 백화점 등 상업 업무시설까지 직접 건설 및 경영까지 하게 된다. 당시의 철도회사가 여러 분야에 손을 댔던 배경이다.

그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직접 운영한 철도노선은 의외로 짧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굵직한 노선들을 운영했다. 창춘시(신경) ~ 다롄시 구간의 701km가 주 간선이었고, 그 다음으로 굵직한 노선이 쑤자툰 ~ 신의주 노선이었다. 함북선 남양 ~ 나진 구간의 전신이 되는 북조선선도 단독 선구로서 운영했다. 그 외 창춘시 ~ 하얼빈시 구간을 포함한 광대한 만주 철도망은 만주국 국유철도가 직접 운영했다. 다롄시에서 창춘시를 넘어 만주국 국유철도가 운영하는 하얼빈시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아시아의 최고속으로 유명한 특급열차 '아시아'가 운영되기도 했다(1932~1943).

1920년대에는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연간수익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실제로 만철은 1923년 부터 일본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 사이에 일본제국 내의 모든 법인 중 자본금 규모 1위 법인이다. 민간기업과 직접 비교는 무리겠지만 당시 일본의 3대 재벌이었던 미쓰비시그룹,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못지않게 당시 일본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던 회사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한반도 내 철도를 위탁경영하기도 하였고[6],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업으로 만주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다나카 상주문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언급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한 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가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 간의 암투가 촉매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 챈 일본이 바로 전쟁을 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 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강제병합을 공고화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이 당시에는 만주 주재 일본인들이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냐면 만주 주재 일본인 학생들이 일본 본토로 수학여행 가는 과정에서 험하게 일하는 도시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국인이나 조선인들과 같은 험한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이 중국을 제압하고, 조선과 대만을 병합시킬 정도로 잘 나갔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내실은 부실해서 토지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납품팔이와 소작농으로 겨우내 먹고살던 빈민층들이 여전히 많았고, 1920~30년대에는 실업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본토의 경제적 낙후가 오히려 제국주의롤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 일본 당국에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해서 부를 재분배하는 대신에 이들 빈민층들을 조선과 대만, 만주국, 남양군도로 이주시켜서 현지 자산을 불하시키거나 아예 미국과 브라질로 이민을 보내는 방식으로 자국민의 빈곤을 해소시키려 했고, 이것이 애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토지를 빼앗기거나 수탈을 당하는 고통을 받았던 이유였다.

196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만철이 생산한 화차(철도)객차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의외로 그 흔적은 끈질겼다. 심지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지에선 1980년에도 만철제 화차가 현역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 경악할 만한 사실은 북한에서는 만철에서 쓰던 푸러형 증기기관차[7]21세기까지 운용되고 있었다.

2. 예하조직 및 계열사

2.1. 만철조사부

파일:81Q3-sl+XUL._SL1500_.jpg
만철조사부원들의 모습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조사연구기관. 러일 전쟁 후 1906년에 창설된 만철의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는 식민지 경영을 합리적 기초 위에 두기 위한 종합적 조사 연구 기관의 필요를 인정해, 동아 경제 조사국, 지질 연구소, 중앙 시험소와 함께 07년 본사에 조사부(다음 해 조사과라고 개칭)를 설치했다. 조사과는 당초 주로 만주(현, 중국 동북부)·몽골 지방의 정치, 경제, 구관 등의 기초적 조사를 실시했지만, 23년의 기구 개혁과 함께 조사 사항이 확대되어 소비에트·러시아나 중국 본토에 관한 연구가 개시되었고, 그 중에서 반드시 사업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편, 만철 업무의 복잡화에 대응해 경영에 밀착한 철도·교통등에 관한 사항도 조사 대상으로 해, 조사과의 역할은 증대했다. 만주사변 발발 후의 32년 1월, 새로운 만주 지배를 위한 종합적 조사 입안 기관을 필요로 한 관동군의 요구에 근거해, 조사과는 총재에게 직속하는 경제 조사회로 개편되어, 군과의 밀접한 협력 하에 만주 경제 건설 계획의 조사·입안, 경제 개발 제1기 계획의 입안 등에 임했다. 또 35년 이후, 일본의 화북침략에 대응해 경제 조사회의 조사 범위는 화북 일대로 확대되어, 그 활동은 한층 더 국책적 성격을 강하게 했다.

그 후 1936년 10월, 경제조사회는 산업부로 개편되지만, 다음 해 12월, 닛산 콘체른의 만주 이주에 의해서 만주 중공업 개발 주식회사가 발족하면, 38년 4월에 산업부는 조사부라고 개칭되고, 또한 다음 39년 4월의 기구 개혁에 의해서 이른바 대조사부가 성립한다. 대조사부에는 종래의 만철의 모든 조사 연구기관, 재외 사무소·조사소가 망라되어, 그 스탭은 2000명을 넘고, 예산도 1000만엔으로 증액되었다. 대조사부는 중국대륙에 있어서의 일본군의 힘을 배경으로 전 기구가 함께 종합조사에 임해, 그 성과는, 〈일만지 전시 경제조사〉 〈일만지 인플레이션 조사〉 〈지나항 전력조사〉 등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조사에는 일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방법론이 취해져 조사부의 활동에 하나의 특색을 부여했다. 또 조사부에 의한 방대한 수집 자료와 조사 연구 중에는 오늘날에도 학문적 가치를 가지는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 종합 조사는 중국, 동남아시아, 소비에트에 대한 침략을 목표로 하는 당시의 일본 국책의 틀을 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개전 후, 전국의 악화에 따라 조사 그 자체의 유효성이 점차 상실되고, 게다가 42년 9월과 43년 7월의 두 번에 걸친 헌병대에 의한 좌익 그룹 조사부원 검거(만철 사건)에 의해 조사부는 사실상 해체된다. 그 사이 1943년 5월에 조사부는 조사국으로 개편 축소되지만, 45년 8월 일본의 패전과 함께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다.
일본 인터넷 백과사전 코토반크의 ‘만철조사부’ 설명.
満鉄調査部(まんてつちょうさぶ)

중국이나 러시아와 인접한 만주에서 사업을 벌이는 만큼 산업이나 경제, 시장, 자원탐사 등의 분야는 물론 국제정세와 안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많은 신경을 썼고, 이를 위해 '조사부'를 설치해서 우수한 인력들을 대거 고용하여 연간 6천 건이 넘는 보고서를 생산해내었다. 이 만철 조사부는 1930년대 이후로는 사실상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처우와 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당대의 엘리트들이 만철 조사부에 모여들었다.

만철조사부는 정보 획득을 위해 뉴욕이나 파리 등에도 지부를 설립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지식을 얻기 위해서 각고로 많은 노력들을 기울였다. 또한 만철에는 일본의 신진 학자들이 많이 참가, 참여하였으며, 동아시아의 많은 젊은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만철은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젊고 다양한 시각을 모두 수용하는 유일한 기업이었다.[8] 그래서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창시한 동주 이용희(1917) 교수도 만철 조사부에서 근무했던 이력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들은 이제 산업개발이 이루어지려 하는 만주에서 첨단도시계획이나 정책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맡았다.

물론 이 계획들은 중일전쟁과 맞물려서 무기한 연기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들은 만주국이 패망하고 일본열도로 귀환한 후에 일본 경제 정책에 관여하면서 6.25 전쟁기부터 1980년대 버블경제기까지 이어져온 일본 경제성장에 기여하였고,[9] 한국과 대만, 중국의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10] 만주국과 전후 한국 개발독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동아대 사회학과의 한석정 교수가 저서 《만주 모던》을 통해 심도 있게 연구한 바 있다.

2.2. 만선역사지리조사실

한편에서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일본 제국의 침략이 아닌 한국사의 역사적 귀결이라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바로 만선사관(滿鮮史觀), 타율성론(他律性論), 정체성론(停滯性論), 당파성론(黨派性論)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의 승리로 만주일대의 철도 부설권과 넓은 부속지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이를 수행하기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08년에는 그 산하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을 두어 만주와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연구에 착수하며, 이른바 ‘만선사’(滿鮮史)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동양사학의 창시자로서 거론되는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을 설득하여 설치한 이 만철역사지리조사실은 대표적인 만선사학자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를 비롯한 당시 일본학계에서 촉망받는 수재들을 모아 『만주역사지리(滿洲歷史地理)』,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를 발간했으며, 이후 1915년에는 기구를 도쿄제국대학으로 이관하여 연구를 지속하며 『만선역사지리연구보고(滿鮮歷史地理硏究報告)』라는 이름의 책을 16권 간행하였다. 이들에 의해 구축된 만선사는 조선과 일본의 인종적·역사적 관련성을 강조했던 일선동조론적인 시각과 그 입론은 다르지만 조선의 식민지화는 조선의 역사적 전개상 당연하다는 시각에 입각해 있다. 만선사관은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역사단위로 뭉뚱그려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조선을 구성한 민족의 대부분은 만주 지방에서 연원하며, 이후 역사적 전개를 살펴볼 때 조선의 역사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만주와 따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한국사의 특징을 정체와 타율에 두고 있다. 즉 한국의 역사는 정체되어 스스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변화하였으며, 그 자극은 대부분 대륙인 만주에서 연원한다는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
쓰다는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고려 시대 서희이다. 따라서 <고려사> '지리지'를 비롯한 한국 사서는 신뢰할 수 없다"는 기본 전제 위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조선역사지리>에서 확정된 조선사의 시공간적 범위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첫째, 조선사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의 영향 아래 위만이 지금의 평안도 평양에서 처음 나라를 세운 것부터 시작하며, 이 평양이 역사지리의 표준점이라는 것. 둘째, 조선사의 범위는 어느 시대이든 절대로 지금의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 셋째,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하여 고대부터 일본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국사의 무대를 현재의 압록강 동쪽과 두만강 이남으로 한정하는 이른바 반도사관이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만철의 역사조사부 출범 직후 체결된 간도 협약에서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국경선이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의 북부 지역도 중국의 역사 무대로 생각하고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아가서는 한반도 북부 지역과 만주 지역을 '만주사' 또는 '요동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점점 중원과 만주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제국이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과 함께 진행되며 만주사 편찬 작업도 추진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지역은 일본의 속령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지배를 받았다는 구도에 이르면 사실상 한국사를 없애는 작업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복기대, <조선 역사 지리> 역자 해설에서

滿鮮歷史地理調査室

1908년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주도 하에 설립되었다. 회사 운영에 불필요하다 판단되어 6년 뒤인 1914년에 해산되었으나, 이후 만철의 후원 하에 도쿄제국대학에서 관련 연구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만주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근대적 연구를 최초로 시작한 집단이다. 과학적 한국사 연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조선 역사 지리》 2권과 만주사 연구의 시초인 《만주 역사 지리》2권, 그리고 《임진왜란》역시 만선역사지리조사실에서 펴냈다. 이 연구를 통해 이들은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 내로 국한했으며, 반도는 대륙과 해양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결과를 통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이 작업은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이끌었다.

이들의 연구는 식민사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현대 중국의 동북공정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전후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의 연구결과를 적극 인용하여 고구려와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분리하였다.

2.3. 야마토 호텔

파일:Yamato_Hotel_Mukden.jpg
묵던(현 선양시)의 야마토호텔 전경. 오늘날에는 중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랴오닝호텔(辽宁宾馆)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중이다.

만철이 운영하던 최고급 호텔 브랜드. 만철의 선로가 지나는 주요 도시에 하나씩 분포하여 일본군 및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운영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인 오늘날에도 일부는 이름을 바꾸고 운영 중이다.

야마토급 전함의 별명인 야마토 호텔이 이곳에서 따왔다는 추측이 있다.

2.4. 쇼와제철소

파일:쇼와제철소.jpg
쇼와제철소 전경

1939년 일제가 안산시의 철광맥 및 푸순시의 탄광을 바탕으로 건립한 '쇼와 제철소(昭和製鋼所)'는 당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제철소였다. 만철에서 안산시 일대에 1918년에 세운 안산제철소를[11] 기반으로 독일 크루프의 기술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거대 일관제철소로 재탄생시킨 것인데,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제철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본토 기타큐슈야하타 제철소 바로 다음의 생산량을 자랑했다.

일본 패망 이후에는 내전을 거쳐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소유권이 넘어가 오늘날까지도 중국 정부 소유의 '안산강철집단(안강)'으로 남아 있다. 안강은 2021년 기준으로도 세계 제철업계에서 3위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12]

2.5. 만주항공

만주국의 교통은 거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국의 유일한 항공사로는 만철의 자회사로 설립된 만주항공이 있었다. 회사 설립 목적도 관동군이 만주 내를 연결하는 정기항로 개설에 대한 작용으로 1931년 9월 26일 일본항공수송(일본항공이 아니다.)과 합작해서 세운 "관동군 군용 정기항공 사무소"가 기원이다.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지고 이름이 만주항공으로 변경되었다.

단순한 영리목적 민간항공사가 아닌 민간여객이나 화물정기수송과 군사정기수송, 우편 수송, 전세편 운항과 항공측량 조사, 항공기 정비부터 항공기 제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즉 항공수송 외에 항공기 제조, 수리, 공중사진 , 측도 등 만주국의 항공 또는 항공기관계 업무를 독점적으로 경영하며 철도건설경비연락, 자원조사, 환자 및 물건수송, 공중사진촬영 , 상용 연락 등에 임했다. 1936년 ( 강덕 3년) 말 시점의 정기항로 총연장은 9,000㎞로 , 이 가운데 정치경제의 중심지는 거의 망라했다. 원래 자본금은 385만엔이었지만, 1936년 10월 800만엔으로 증액했다. 본점 소재지는 만주국 봉천(선양시)상장지 5경로 구위로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연합국과의 개전 후에도, 만주 국내가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 운항을 계속했다.

덧붙여 1941년 7월부터 만주항공 주식회사법 제정에 의해 특수법인이 되었으며 1945년 8월 만주국으로의 소련군 침공과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로 만주국은 소멸하고 이에 따라 만주항공도 소멸했다.

운항노선에는 만주국 국내 노선 및 왕징웨이 하의 중화민국 노선(펑톈, 신징, 자무쓰(하얼빈), 톈진)과 일본 도쿄, 후쿠오카, 오사카 노선, 조선의 서울, 울산, 평양 노선을 운행하였고, 주로 운행하던 항공기는 자사가 직접 개발한 MT-1 항공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융커스나 메서슈미트 같은 추축국 독일 회사나 미쓰비시, 나카지마 제작소에서 만든 기존 일본항공에서 운행하던 것을 양도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3. 만철도(刀)

쇼와 10년대부터 1945년 패전까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생산한 일본 군도를 말한다. 만철도라는 단어는 속칭이고, 정식 명칭은 흥아일심. 철도회사에서 칼을 만든다는게 언뜻 이상하게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6호 전차 티거를 생산한 헨쉘사는 중장비와 철도설비를 만드는 회사였고, 러시아의 전차 계보 중 중요한 1곳이 우랄바곤자보드임을 생각해본다면 군수품에 대한 철도계열회사의 참여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13] 본디 철도회사란 강철에 대한 이해와 기술, 공작기계와 열처리와 같은 쇠의 근본에 통달하여야만 가능한 것으로, 도검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업종파생이며 걸맞은 회사가 걸맞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철도회사가 칼을 만들게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급속하게 불어난 일본군 규모에 의해 장교용 군도의 수요가 폭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골동품 칼날이나 장인에게서 조달하고 만들던 기존의 방식대로는 도저히 장교용 군도의 수요에 다 맞출 수가 없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관동군의 요청에 따라 기계를 이용한 생산 체계를 갖춘다면 군도 부족 사태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쇼와 12년(1937년) 5월에 일본도제작부를 신설, 차후에 남만주철도공사 대련공장에 독립된 작업장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장인이네 어쩌네 해도 본질적으로 대장간의 사람이 뚱땅거려서 만드는 수제 칼보다 철도용 강재로 만든 칼이 질이 좋았다고 한다.


[1] 만주에 여러 중공업 공장을 지어 자회사를 통해 운영했다[2] 실제적으로는 거의 식민지경영회사처럼 운영되어 도시계획, 하수도 등 거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3] 일본 패망 이후에는 중국철도 승리 7형으로도 불렸다. 참고로 한국의 파시형 증기기관차와는 이름만 같지 해당 차량은 도입된 적이 없다. 해당 열차는 "탄환열차 계획"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나서, 훗날 1964년에 등장할 신칸센의 모태가 되었다.[4] 중동철도 창춘 - 뤼순구간으로 이 구간을 남만철도(南滿鐵路)로 이름을 바꾼다.[5] 그는 일찍이 대만의 식민체제를 완성시킨 바가 있다.[6] 지금 우리가 보는 구 서울역의 역사가 만들어진 시기도 요 시기.[7]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푸레나 형(해방이후 푸러 7형)과 동일기종이다. 다만 이 기종은 일본본토의 철도차량 제조사와 경성공장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만철제는 아니다.[8] 그래서 만철 조사부는 유독 취업길이 막힌 공산주의자, 좌파들이 많이 영입되었고, 이 때문에 국가의 공기업이면서도 관동군들에게 2번이나 털린 적이 있다. 사실 이미 만주의 경제를 장악했던 만철은 관동군이 만주에서 난리를 칠 때마다 적당히 하라며 제지하곤 했으니 관동군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9]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고도성장을 주도한 경제산업성(약칭:MITI). 일본의 경제정책에 소련의 국가주도형 개발계획의 영향이 짙게 배인 것도 모두 전부가 이들의 공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한국의 경제관료들이 모방해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다.[10] 이 부분은 5개년 계획 문서와 테크노크라트 문서를 참조할 것.[11] 현 중국 영토 내에 세워진 최초의 제철시설이었다.[12] 2021년 1위는 중국바오우강철집단, 2위는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미탈. 4위는 일본제철, 그리고 5위는 역시 중국의 사강제철이었다. 한국의 포스코는 6위, 현대제철은 17위였다.# 그리고 2022년에는 바오우가 또다시 대규모 인수합병을 진행하여 2위와의 격차를 훨씬 늘렸다.[13] 한국만 해도 대표적인 예로 현대로템이 있는데, 현대로템은 K-1 전차, K-2 흑표 전차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체지만 주력분야는 철도차량생산이다. 애초에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차원에서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사업부를 통합한게 로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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