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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도부
- 가나다순으로 정리한다.
-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을 표시한다.
- 사형을 받은 사람은 ★로 표시한다
1.1. 태평양 전쟁 주도자
- 도조 히데키☆★
전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사실상 통수권자,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켰으며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며 최종계급은 육군 대장이다.
- 히로히토 천황(쇼와 덴노)
일본 제국 국가 원수, 명목상 통수권자,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2인자인 도조 히데키였기 때문에 그에 비해 묻히는 감이 있지만, 개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1.2. 관료와 정치인, 외교관
- 나가타 테츠잔
도조 히데키와 함께 통제파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로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대신으로 거론되는 거물급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 육군대신이자 후에 조선 총독이 되는 미나미 지로와 함께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의 근원인 국가 총 동원령을 발령한 인물이다. 그러나 육군성 군무국장 재직 중 파벌 사건으로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게 1935년 살해된 인물이다. 그가 살해된 후에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 스에츠구 노부마사(末次信正, 1880.06.30~1944.12.29)
일본 해군 잠수함의 실력을 상향 평준화한 인물. 전술가. 군무에는 화려한 업적을 보여주었으나 정치계로 개입하여 군이 정치에 간섭하는 문제에 도화선을 당긴 주범. 군령부 부총장시절 군축조약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격한 논지를 펴다가 경질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함대파가 일어서긴 했지만 그의 사상 자체는 함대파를 능가하는 과격함 때문에 과격파 내부에서조차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 얼마나 과격했으면 히로히토 천황조차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 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나 새로 총리가 된 고노에 후미마로의 비호를 받고 군령부 부총장으로 복직 후 다시 정치에 날뛰었다. 고노에는 처음 스에츠구를 내가 똘마니로 삼을 수 있다고 속으로 흐뭇해하고 그의 비호세력이 되었으나 실패. 되려 그에게 휘둘렸다고 한다.
그는 중일전쟁이 악화된 원인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소련과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고립 될 것을 주장하고 "남방이 확보된다면 자급자족 체제를 강화시켜 장기에 걸쳐 일본의 체제를 강화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심지어 그의 직속상관이나 다름없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조차도 "그 놈은 글렀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주변의 빈축을 산 상태였다. 고노에 내각 해산 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총리 후보로 올랐으나 결국 패배. 또 군령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총장 직위에 앉고 싶어서 안달하였으나 히로히토 천황의 미움을 살 대로 산 터라 결국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쓸쓸히 자택에서 사망.
-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1877.05.26~1966.11.02)
황도파의 거두로 황군이라는 말을 공식석상에서 자주 사용한 인물이다. 이게 기행으로 보일 여지가 있는 게, 공식 석상이나 언론에서는 대일본제국 육군, 해군 또는 제국 육, 해군이라 불리었지 황군이라는 명칭은 잘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도파는 2.26 사건으로 몰락했지만, 1938년 제1차 고노에 내각 집권 당시 문부대신으로 발탁되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시 세뇌교육을 주도하였다. 또한 "국민정신 총동원 위원회"의 위원장도 겸임하여 사상면에서 전시체제의 선전작업을 추진했다. 전쟁수행 내부책임자라는 이유로 A급 전범으로 심문받았고, 결국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복역한다. 복역 중 1955년 병으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여 전국을 돌며 강연활동을 하였는데, 1966년 강연 활동을 하던 중 심장병으로 90세에 사망했다.
- 아나미 고레치카
패전 직전 당시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육군대신. 인품이 후하다고 알려졌지만 중일전쟁 당시 저지른 사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정신론에 유난히 경도된 전형적인 일본군 장성이었다. 일본이 패망해 나갈 무렵 아나미는 군부를 대변하여 무조건 항복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참전 이후에도, 그는 유리한 항복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본토 결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히로히토가 종전에 동의하자 그제서야 본토 결전의 주장을 굽혔다. 그러나 그 직후 할복을 했는데 이 점이 유일한 그의 업적이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아나미 고레치카가 할복하지 않고 살아서 궁성사건에 적극 개입했다면 정말 옥음방송은 연기되었거나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나름 업적은 맞긴 하다. 그가 자살할 때 입었던 제복과 유언장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이다.
- 쿠사가리 에이지(草刈英治, 1891년 6월 1일 ~ 1930년 5월 20일)
해군의 팽창을 구속하는 군축조약의 극렬 반대자. 자신의 뜻과 반대로 조약이 체결되자 크게 실망하여 1930년, 런던 해군 군축회의 전권대표 중 한 명[1]인 해군대신 다카라베 다케시가 승차했던 차 안에서 지니고 있던 단도로 자결했다. 쿠사가리는 단도가 복부에 박힌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던 그는 "손대지 마라! 칼은 무사의 혼이다!"를 외치며 단도를 빼내길 거부했다. 그 상태로 얼마 뒤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군축조약에 대한 죽음의 항의"로서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이는 이후 통수권의 간섭문제로 발전해 당시 육해군 할거없이 퍼져있던 과격파 청년장교들과 국가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간사한 기만책에 휘둘리지 않은 쿠사가리의 우국충정을 보라!"라며 영웅으로 추앙하기도 했다.
- 도고 시게노리
일본 외무대신으로 특히 태평양전쟁기에는 대외에 유명했었다. 항목 참조.
- 가세 도시카즈
일본 제국은 물론 전쟁 이후 일본국에서도 외교관을 역임하였다. 인지도는 별로 없지만, 진주만 공습 당시 이른바 '대미각서'라 불리는 선전포고문 작성에 관여한 외교관들중 한명이였으며, 종전 당일 미주리(전함) 선상의 일제 항복 조인식에 참여한 시게미쓰 마모루 이하 일본 측 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전후에서는 초대 유엔 대표부 특명전권대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20세기말 일본 우익논객의 새 거두로 서게되는 가세 히데아키가 되겠다. 그에 대해서는 일본 우익사관/학자 참조.
2. 황족
-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 1865년 11월 10일 ~ 1945년 5월 20일)
황족으로 일본 육군의 원수를 역임했다.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王, 1874.03.09~1951.01.01)
영친왕의 장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부친이며 유일하게 황족 신분으로 전범 처벌을 받은 사람. 전범 재판당시 학살 등 반 인륜 범죄는 혐의가 없었지만 이세 신궁의 신주였다는 이유로 "국가신토의 우두머리"이라는 혐의로 A급 전범 판정을 받고 스가모에 수감되었지만 6개월 뒤 출소하였다. 당시 일본이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쉽게 띨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이비 종교인 국가신토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 뒤 강도떼가 들어 재산을 대부분 도둑맞는 수난을 겪었고 황적에서 이탈한 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완전히 잊혀진 채 1951년 자택에서 쓸쓸히 죽었다.
- 고마쓰 데루히사☆
구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입건[2], 감옥살이를 한 인물. 물론 해당인은 21세 때 신적강하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황족은 아니다. 석방 후 헤이안 신궁의 궁사로 여생을 보냈다.
-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 1905.01.03~1987.02.03)
다이쇼 덴노의 3남으로, 히로히토 4형제 중 셋째이며,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의 바로 윗 형. 그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 평화론을 주장했다. 동생 다카히토가 쿠데타를 거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것을 뛰어넘어, 다카기 소기치 등과 함께 도조 히데키의 암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큰형인 히로히토와 갈등을 많이 일으켰으며, 패전 후에는 히로히토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 황실 내에서는 황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평민 출신의 조카며느리 미치코 황후와 그 친정아버지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척 무시했다. 본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 황실의 전통 같은 것.
- 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 (竹田宮恒徳, 1909년 3월 4일 ~ 1992년 5월 11일)
메이지 천황의 외손자. 즉 황족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좌. 731 부대에 복무한 적이 있으며, 이시이 시로와 달리 최고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역사학자 핼 골드(Hal Gold)에 따르면 생화학 병기 개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 崇仁, 1915년 12월 2일 ~ 2016년 10월 27일)
위는 2013년 장남 도모히토 친왕의 사망 1주기 추도식, 아래는 2014년 6월 8일 차남 요시히토 친왕의 조문을 마치고 차로 이동 중인 미카사노미야.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막내아들, 히로히토 4형제 중의 막내,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해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전쟁 전부터 일본군의 만행을 잘 알고 열띤 비판을 했으며, 전후에는 일본군의 악행, 특히 난징 대학살을 솔직히 인정한다.
어느 청년 장교들이 그에게 쿠데타를 종용했으나, 겁을 먹었는지 이를 거절했고 이를 알렸다.
그러나 다카히토는 자신이 쿠데타를 벌였더라면 수많은 인명을 살렸으리라 생각했다. 정말 그가 덴노를 했더라면, 일본군이 일으켰던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등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담이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이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교수형을 내리려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했다.
전후 도쿄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했는데, "진무 덴노는 신화이며 역사가 아니다"라고 강변해 빨갱이 왕자님(赤い宮様)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915년생인데 2016년 최근까지 살아있었던 일본 황실의 최연장자.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난징 대학살 당시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황족이라 처벌은 못했지만 이후 황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물어 거의 전 재산이 몰수되었다. 죠 이사무 등과 더불어 난징 대학살의 실질적인 최종 책임자 후보로 거론된다.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황족 군인. 육군 소장으로, 1940년부터 결핵으로 요양중이었기에 전쟁과는 연관이 없다. 일본 내에서는 스포츠와 등산을 애호하여 마터호른을 등반하고 럭비장, 스키장 등을 건립한 체육인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젊었을 적의 황도파 지지와 일-독 동맹을 고려하여 삼국동맹을 지지한 것이 흠으로 꼽힌다.
- 칸인노미야 하루히토
황족 군인. 히로히토의 친척.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일본 황족으로 괴짜로 유명한 사람. 히로히토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시아버지이다. 조카 노부히토, 다카히토와 함께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던 몇 안 되는 황족이다. 전후에는 연합국의 허수아비 총리이긴 했지만 일본 역사상 유일무이한 황족 출신 총리를 지냈으며 무려 102세까지 장수하여 일본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총리라는 타이틀을 남겄다.
-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伏見宮博恭王, 1875.10.16~1946.08.16)
황족 군인. 일본 해군 대장 겸 원수, 군령부총장. 왕의 작호를 가지고 있다. 군축조약 탈퇴와 군함 건조, 증설 등 전쟁 준비를 지령하여 해군을 태평양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인물 중 하나. 당시 그가 황족이어서 해군성 내에서는 입김이 굉장히 세었다고 해군반성회가 증언했다. 그러나 황족이라는 이유로 그가 전쟁을 주도했다고 들통나면 커다란 문제로 번질 우려 때문인지 해군반성회가 이 정도까지만 밝히고 나머지 여러 정황은 생략했다.
3. 식민지 총독
- 고이소 구니아키
일본 제국의 제 41대 내각총리대신이자 태평양 전쟁 당시의 조선 총독. 전임 총독의 정책을 이어 받아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서 한글 학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또 지원병 제도를 학도병 제도 및 강제 징병제로 강화 개편하여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소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 총독. 문화 말살정책의 선봉장. 역대 조선 총독 가운데 가장 강경하고 과격한 통치를 했으며 조선에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고 지원병 제도를 제창하여 조선 청년들을 징집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1954년 건강 악화로 가석방을 받았고, 1955년에 죽었다.
-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 1844년 11월 19일 ~ 1915년 8월 5일)
타이완 총독, 도쿄 위수 총독, 근위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던 인물로 아타얄족과 부눈족을 학살한 자. 이것이 훗날 우서 사건이 일어난 빌미가 되었다.
4. 장성급 장교
4.1. 일본 제국 육군
- 가사하라 유키오(笠原 幸雄, 1889.11.06~1988.01.02)
창사-구이저우-장시 방면군 사령관. 사령관 재직 중 군을 제대로 단속하여 주둔부터 패전까지 소속 부대가 전범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귀환하게 했다.
- 고마쓰바라 미치타로☆ (小松原道太郎, 1886.07.28~1940.10.06)
중장, 할힌골 전투의 패전 주범 중 하나. 패전 후 강제 예편되었으며, 암에 걸려 1940년에 사망한다.
- 나가하마 아키라☆★
필리핀 지역 헌병 사령관. 고문의 천재이자 고문의 황제로 수 많은 필리핀 인들을 학살과 고문으로 죽인 전범. 사이타마 현 출신으로 1917년에 육군사관학교 제 29기를 졸업한 뒤 소위가 되었다. 1928년에는 헌병대위가 되어 이후 헌병계로 일하여 1933년에 헌병사령부 제 3과장이 되었고, 1942년 8월에 헌병대좌가 되어 9월에 필리핀 제14군의 헌병대장이 되었다. 1944년 7월에 조직개편으로 인해 제14방면군 헌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1945년에는 쿠레지구 헌병대장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945년 9월에 연합국에게 전범으로 체포되어 A급 전범으로 투옥되었다. 그는 필리핀으로 연행되어 헌병사령관 시절에 필리핀에서 포로들의 학살행위와 관련 B급 전범으로서 마닐라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47년 3월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 나카지마 게사고
난징 대학살의 진범이자 병영부조리의 화신. 난징대학살 당시 16사단장이었는데 학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단 모든 포로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말은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증거가 부족하다. 이외에도 장제스의 재산을 빼돌리기도 했으며 심각한 수준의 병영부조리까지 저질렀다. 이후 난징 약탈 혐의로 예편되었고 1945년 10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고 사망했다.
- 다니 히사오☆★ (谷 寿夫,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난징 대학살 당시 마쓰이 이와네 휘하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제 6사단의 사단장.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인 무카이와 노다 쓰요시도 그의 휘하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이며 밑의 죠 이사무와 함께 학살 행위를 직접 주도한 실질적인 주동자이기도 하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정부는 전범재판을 위해 다니 히사오의 신병을 요구했다. 이에 종전 후 중국에 남아 중국내의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다니는 1946년 2월에 GHQ에 의해 중국으로 소환되어 상하이와 난징에서 부하들의 민간인과 포로 학살, 강간 등을 유발시킨 범죄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1947년 4월 26일 총살형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 다이고 다다시게☆★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
중장,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폰티아낙에서 민간인 2만 명이 살해된 '폰티아낙 사건'의 장본인이다. 폰티아낙 사건이란 일본군에 협조를 거부한 인도네시아 현지주민과 일본군에 원래부터 협조하지 않으려던 인도네시아 거주 화교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사건으로 무려 2만명이 학살당했던 사건이다. 그리하여 훗날 네덜란드군이 긴급체포해 재판 후 3시간 뒤 총살되었다. 다이고의 유품 중 군모가 현재 야스쿠니 신사 우슈칸에 전시되고 있다.
- 다치바나 요시오☆★
해당 항목 참조.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주동자로 희생자 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범행 동기 및 수법이 같은 일본군들조차도 아연실색할 정도로 잔혹하여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 데라우치 히사이치 (寺内寿一, 1879.08.08~1946.06.12)
육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 민주주의 정치가였던 하마다 쿠니마츠와의 할복 문답으로 유명하다. 1936년 히로타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취임한 후 북지나방면군 사령관, 1941년 남방군 사령관이 된 후 원수칭호를 받았고, 황족 이외에 육해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부모자식이 2대로 원수가 되었고 또 도조 히데키 내각 해임 후 차기 수상으로 지목되었지만 남방군 총사령관이었던 그가 움직이지 않아 2대째 총리 배출은 이뤄지지 않았다. 1945년 5월 10일, 버마에서 항복했는데 싱가포르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중 1946년 6월 12일 병으로 사망했다.
- 사사키 도이치☆ (佐々木到一, 1886년 1월 27일 ~ 1955년 5월 30일)
다니 히사오랑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살의 주범. 만주국 창설에 크게 기여를 했으며 전후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엄청난 혹사와 구타를 당했고 그 후 다시 중국으로 넘겨진 사사키는 1955년에 푸순의 공산당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스즈키 요리미치([ruby(鈴木, ruby=すずき)]・[ruby(率道, ruby=よりみち)], 영목솔도, 1890년 2월 18일~1943년 8월 5일, 일본 육군 중장)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장군이다.
- 아키야마 요시후루
대장,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전인 1930년에 사망한 일본 육군 장군. 일본군 기병의 아버지로 불리며, 기병포와 기관총을 최초로 도입한 지휘관이었다. 전쟁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꼈으며 군인이 정치에 손대는 것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1885.01.21~1948.12.23)☆★
조선군 총사령관.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만주 사변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역시 군국주의자로 악명이 높았으며 또한 노몬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무능의 대명사로도 악명이 높았다. 물론 작전을 입안한 건 츠지 마사노부지만, 그는 노몬한을 결정할 때 월권으로 사령관 대리서명을 했다. 싱가포르에서 영국군 동남아시아 사령관에게 항복하였다. 전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재판을 받고 전범의 사헝 방식인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의 제 3대 총리, 일본군의 기틀을 닦았으며, 동시에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로 만드는 일에 기여하였다. 최종계급은 육군 원수.
- 오스지마 쓰즈미☆
산다칸 행진의 주범. 이것 때문에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죽었다.
- 우에다 겐키치 (植田謙吉, 1875.03.08~1962.09.11)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을 때, 폭탄을 맞고 한 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사람으로 이 전투의 총 책임자. 그는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관동군 사령관을 관둬야 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기 전인 1939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자신이 지휘하는 신병으로 구성된 사단 대신 정예 사단이 전투에 투입되려는 것을 "내 부대가 이런 굴욕을 겪었는데 다른 부대를 투입하면 나는 굴욕감에 자결하겠다."라고 말하면서 거부하는 바람에 할힌골 전투에서 대패하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 심지어 전범재판에서도 소련군 승리에 다대한 공을 끼친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 우시지마 미츠루 (牛島満, 1887.07.31~1945.06.23)
오키나와 전투를 총지휘한 장군. 오키나와에서 패전 후 할복 자살했다.
- 우츠노미야 타로☆ (宇都宮太郞, 186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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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주둔 사령관. 제암리 학살사건, 간도 참변 등을 주도하였다. 1922년 사망했다.
- 이시이 시로☆
'''731 부대장. 미국에게 연구자료를 넘기는 대가로 풀려났다. 2005년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이시이는 면죄뿐만 아니라 당시에 현재 시가 4000만 엔에 해당하는 거액과 향응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3]
중장, 임팔 작전에서 후퇴하면서도 영국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인물. 임팔 작전에서 부하들의 옥쇄를 금지하였다.
-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1878.07.27~1948.12.23)★
난징 대학살 총 책임자로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다만 이 사람은 난징 전투는 지휘했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엔 폐결핵을 앓아 병가를 냈기에, 학살 당시엔 군대를 지휘한 건 아니며 실제 학살을 주도한 건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였다. 그래서 병이 안정되어 돌아 왔을 때 학살 이후에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다!"
이런 점이 반영되었는지, 그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BC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았다. 마쓰이는 난징 대학살 외에 다른 학살극에도 연루되어 있었으나, 학살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병중이라 실제 지휘를 맡지 못했다. 실제로 범행은 대부분 다니 히사오 등 수하들이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게 전적으로 학살 책임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일본군이 난징에서만 학살을 한 것도 아니고 항목 참고 난징으로 진군하는 와중에도 숱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바 역시 좋게 보기는 뭣하다. 그리고 A급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B, C급 전범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 바바 마사오☆★ (馬場正郎, 1892년 1월 7일 ~ 1947년 8월 7일)
산다칸 행진의 주범이자 총책임자. 심지어 포로들이 기진맥진하고 죽기 직전의 상태임에도 계속 걸으라고 해서 수많은 포로들을 죽게 만들었다.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 사쿠라이 쇼조
제28군 사령관으로, 하나야 타다시나 이치키 기요나오 수준으로 소심한 겁쟁이였다. "자멸이나 항복하지 말고 고생하더라도 꼭 적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라"라고 하다가 "안 되면 그냥 항복해."라고 견해를 바꿔 버리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병사들이나 부하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거나.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옥쇄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었다.
-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육군대신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처단된 일본군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인물. 윤봉길 의사가 그를 처단하자 장제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유명하다.우리 군사 백만 명이 못해낸 일을 한 명의 조선인이 이루어냈다! - 아베 이치오☆★
산다칸 행진의 행동 대장. 총살형에 처해졌다.
- 이시와라 간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만주사변의 주범이자 만주국 건국에 기여한 자. 세계최종전론(世界最終戰論)[4]을 주장하며 "결국 동아시아 민족과 미국이 대결하게 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인종주의를 추종한 아시아주의자. 관동군 시절부터 도조 히데키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총리이던 도조와 대립한 끝에 1941년 예편되었다. 도조와 매우 사이가 나빴고, 전범재판에 출석해서 도조에 불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에 만주사변의 주범임에도 전범재판을 피해갈 수 있었다. 특이한 건 고급 장교들에겐 하나야 타다시 수준의 악명을 떨쳤지만 병사들과 부사관들에겐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고 한다.
-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 싱가포르 전투의 지휘관으로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인물. 포로 관리를 허술하게 하는 바람에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츠지 마사노부가 싱가포르에서 저지른 대학살과 해군 육전대가 필리핀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다.
- 오카무라 야스지☆
일본군 위안부의 창시자. 상하이 사변때 일본군 병사들이 계속해서 강간범죄를 일으키고 성병에 걸리자, 성병을 방지한다는 미명아래 만들어내었다.전후 중국에 남아있을 때 장제스와의 친분을 써서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고 넘어갔다. 참고로 그 악명높은 신멸작전의 실행자로 알려져있는데 제대로 된 기록이 없는 탓에 아직까지 파악이 안되고 있다.
- 오카베 나오사부로☆ (岡部直三郎, 1887년 9월 30일 ~ 1946년 11월 23일)
'''오카무라 야스지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의 공동 창시자. 일본군의 강간 사건이 중국인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자 서둘러 성적 위안시설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한커우에 주둔중 종전을 맞아 중화민국에 신병이 인도되어 상하이에 수감 중 1946년 그곳에서 병사했다.
-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 美治郎, 1882년 1월 4일 ~ 1949년 1월 8일)
극동 군사 재판 당시의 우메즈.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우메즈.
별명은 무언의 장군. 일본의 육군차관이었던 자로 비록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위안부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전후 열린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1978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여담으로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와 함께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 스즈키 게이쿠☆
5000여 명을 학살한 전범. 증언에 의하면 그는 (지시·명령 등을 통해) 5천 470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1만 8천 229채의 주택을 파괴했다. 아마도 실제 숫자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 증언이나 "마을에 콜레라균을 퍼트렸다" "'공기주입 살인'을 실험했다" "생매장 등을 통해 집단학살했다" 등의 증언들이 있다. 참조바람
- 죠 이사무☆ (長 勇,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난징 대학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 중 하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전 후 우시지마 미쓰루와 같이 할복 자살했다.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이오지마 전투를 총 지휘한 일본군 장군.
- 카마타 야히코☆
일본 육군 중장으로 대만 우서 사건의 장본인.
- 카타쿠라 타다시
육군 장성으로 최장수한 인물. 향년 103세.
- 타다 하야오
화북 주둔군 사령관, 이마이 다케오와 함께 친중파였으며 인도주의자. 노구교 사건을 협상으로 종결하려고 하였다. 이후 고노에 내각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화평공작은 절대 철회할 수 없으며, 정부에서 안 된다고 한다면 나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통첩을 정부에 올렸으나 묵살당하고 예비역으로 쫓겨난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어 심문, 수감중에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죽었지만 극동 재판 측에서 '이 사람은 수사 결과 무혐의로 석방 예정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육군대학 교두시절, "중국군 1만을 포로로 잡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냈다, 그 답안은 바로 "전원 무장해제 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각자 생업에 종사토록 함"이었다. - 하나야 타다시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동자 일당 중 한 명. 부하들을 미치거나 자살할 정도로 괴롭혀 그 일본군 안에서조차 평가가 좋지 못했다. 얼마나 심했으면 무타구치 렌야나 도미나가 교지처럼 그의 장례식에 단 1명의 부하도 찾아가지 않았을 정도. 공습을 어찌나 두려워했는지 부대가 행군 중 잠시 쉴 때도 자신만을 위한 방공호를 파라고 명령할 정도로 겁쟁이였다.
- 히라바야시 모리토(平林 盛人, 1887.11.10 ~ 1969.05.21)
제17사단장. 자신의 부대에 일본군 위안부를 전면 금지시킨 인물이다. 헌병사령관으로 재직 시 다카히토 친왕이 쓰노다 도모시게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쓸어버리려 한다는 것을 이 사람에게 알렸는데, 친분도 있고 마음도 맞아서 은밀하게 쓰노다와 협조 중이던 히라바야시는 쓰노다를 면직처분으로 끝냈다. 후일 도조 히데키 사후 기시 노부스케가 이 사실을 알고 히라바야시 또한 역모죄로 교수대에 올리려고 했으나. 쓰노다에게 조롱만 들을 뿐이었다.
중일전쟁에 회의적이었으며 주둔지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소식을 듣자 장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한탄했다.중일전쟁도 수렁에 빠져 있는데 영미와 전쟁을 할 여유가 있는가?태평양 전쟁 개전을 하면 1년간은 우세하지만 그 이상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노후화된 우리 장비로 최첨단화된 장비로 무장한 영미를 꺾을 수 없음은 이미 노몬한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 하타 슌로쿠(畑俊六, 1879.07.26 ~ 1962.05.10)
일본 육군 원수. 아베 노부유키 내각과 요나이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한 인물로, 난징 대학살 때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를 경질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마쓰이를 대신하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한 전투를 지휘하였다. 1945년 4월에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히로시마에 사령부를 둔 제2총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으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14일에 히로히토가 스기야마 하지메와 나가노 오사미 그리고 하타 슌로쿠를 불러 "본토 결전이 가능하겠냐?"고 물었을 때 오직 하타만이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패전 후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6년을 복역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1962년 후쿠시마에서 82세로 사망했다.
4.1.1. 삼대오물
- 도미나가 교지
베트남 전투시절부터 진군시각을 알리는 전단이 유출되어 18,000명의 97%가 전사하였고, 적극적으로 적전 도주(敵前逃走)를 하여 필리핀 공방전을 패전으로 이끌었다. 그런 주제에 위궤양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위스키를 챙기는 행태를 보이며 기생을 끼고 온천이나 다니는 등, 사병들도 그에게는 경례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끝내 일본군 수뇌부조차도 그를 용납할 수 없었는지, 예편된 그를 강제로 현역 복귀시켜 전쟁 말기에 죽으라고 관동군 사단장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소련군이 공격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포로로 잡혀 포로 수용소에서 살다가 10년 뒤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설에 따르면 유일하게 전투 중 항복한 장성이라 포로 수용소에서 대접이 좋았다고 한다. 반면 그의 장남은 가미카제 특공으로 산화했다. 포로 학대나 민간인 학살 같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으며 거꾸로 필리핀 마닐라 대학살 당시, 휘하 부대를 시켜 주둔 지역에서 학살을 막게 했으며 다른 부대가 필리핀 민간인을 죽이러 오자 우리랑 싸워보자는 투로 엄포를 놓아 물러나게 하였고, 참모본부 참모 시절에는 이시이 시로에게 "세균전이라니, 민간인들은 사람도 아니냐?"라며 비난을 가한 적도 있다.
- 무타구치 렌야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인물.임팔 작전으로 9만 명이나 팀킬을 제대로 해 준 덕분에 영국군과 미군이 인도차이나에서 훨씬 쉽게 전쟁에 임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불려나갔으나, 그의 행적이 공개되자 재판관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너무 고맙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처분은 그가 반 인륜적인 전쟁 범죄 등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저 바보 짓만 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이후 싱가포르 재판에 송치되어 2년 동안 복역한 후 석방되는데,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에 살이 더 쪄서 돌아왔다. 다만, 무능함으로 비웃음을 사긴 해도, 도미나가 교지와 같이 적어도 민간인 학살 및 포로 학대를 금지하였고 상부의 학살 명령을 무시하거나 부하의 포로 석방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 스기야마 하지메
일본 육군 원수.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신, 육군교육총감이라는 3대 요직인 육군3장관을 모두 거쳤다. 그는 "중국은 1개월이면 전역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중일전쟁을 개시했으나 패퇴한다. 태평양 전쟁 개시 당시에는 "진주만 공습 후 미국은 3개월이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하다가 히로히토에게 호통을 들었다. 한편 임팔 작전을 검토도 해보지 않고 개인적 친분을 이유로 승인하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4.1.2. 삼간사우
4.1.2.1. 삼간
- 가토 하쿠지로(加藤泊治郎, 1887.06.08 ~ 1951.02.19)
일본 육군 중장. 만주군 정예부대로 편성된 철석부대를 관할한 ‘북지(北支)특별경비대’의 북지파견군 헌병대 사령관으로 활약한 인물. 도조 히데키의 측근이었다. 그가 지휘하던 철석부대 내에는 간도특설대가 있었다.
- 스즈키 데이이치☆
일본 육군 중장. 통칭 "신사복을 입은 군인". 실전 부대에서의 경험은 별로 없고, 주로 대외적·관료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었다. 1931년 삼월 사건(三月事件)에 가담하였다. 국제 연맹 탈퇴론을 주장했고, 군부에서 국제 연맹 탈퇴 추진파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4일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1955년에 가석방 되었고, 1958년에는 사면되었다. 1959년에 자유민주당으로부터 참의원 선거 출마 요청을 받았지만 강하게 거부하였고, 이후 공직에 오르지 않았다. 1989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A급 전범으로선 유일하게 헤이세이 시대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다.
- 시카타 료지(四方諒二, 1896.04.28 ~ 1977.12.13)
일본 육군 소장. 한반도의 함흥, 일본의 오구라 등지에서 헌병 분대장으로 복무한 뒤, 육군 파견학생으로써 도쿄대학에서 법학을 공부. 이후, 관동 헌병사령부에 배속, 이때 도조 히데키의 부관으로 임명되면서 친분을 쌓아 그의 측근이 되었다. 패전 후 BC급 전범용의로 체포되었지만 1948년 2월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된 후 조용히 은거하며 살았다.
4.1.2.2. 사우
- 기무라 헤이타로☆★
버마에서의 학살을 주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버마 전선의 일본군이 임팔에서 뻘짓하고 다 말아먹은 뒤에 부임했기 때문에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육군 차관 재임 시절 도조 히데키를 도와 태평양 전쟁을 개전시킨 혐의를 받았으며, 심지어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있을 적에 영국군이 근접하자 태국으로 탈영하여 무려 7만 5천명 정도의 일본군을 죽음으로 몰고가기까지 했다.
- 사나다 조이치로
대본영 작전과장을 지낸 인물. 작전과장으로 재직 중 무타구치의 임팔 작전 계획안을 엉망이라며 욕하고, 육군의 철천지 원수인 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고 강력히 반발했던 경력이 있다.
- 사토 겐료☆
일본 육군 중장.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했을 때에는 미드웨이 해전의 실패를 거론하며, "국장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패전 후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아 복역하였다. A급 전범 중 가장 늦게까지 갇혀있었고, 1956년 석방되었다. 자기 나름대로 사회 활동을 하다가 1975년에 사망했다.
- 아카마쓰 사다오
4.2. 일본 제국 해군
- 기무라 마사토미
해군 제독, 북태평양에 위치한 키스카 섬에서 고립된 일본군 수비대 5천여 명을 전원 구출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를 "키스카 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 공로로 그는 히로히토를 독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일화는 훗날 영화화되었다.
- 다나카 라이조(田中 頼三, 1892.04.27 ~ 1969.07.09)
타사파롱가 해전의 일본군 지휘관. 구축함 8척으로 구성된 수송선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의 아군에게 보급물자를 전달하러 가던 중에 중순양함 5척과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미 함대의 기습을 당한다. 이때 일본군 구축함은 드럼통에 물자를 싣고 견인 중이라 전투가 어려웠는데, 그는 드럼통을 떼어낸 후 어뢰 공격을 실시하여 미 해군의 중순양함 3척을 대파시키고 1척을 침몰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구축함 1척만 잃었음에도 "수송 임무가 실패했다", "왜 후퇴했느냐"는 이유로 해임당하고 한직을 맴돌았다. 79세로 사망.
- 고토 아리토모
제6전대의 사령관을 지냈으며, 괌 전투에서 과달카날 전투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공을 올렸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사보섬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고토 휘하의 제6전대는 일본군 제8함대의 주력으로 참전, 미군 중순양함 4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중파시켰으며 구축함 2척을 대파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해전은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해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제8함대의 사령관은 미카와 군이치이지만, 기함 초카이를 제외하면 제8함대의 전력이 제6전대밖에 없었으므로 고토의 전공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작전을 끝내고 귀항하던 중, 이제 일본군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잠수함 회피 기동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가 미군 잠수함에게 중순양함 카코를 헌납했다. 다만 이 건에 대해서는 카코의 함장조차도 "적이 너무 멀리서부터 쫓아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며 고토 아리토모의 판단을 탓하지 않았고, 고토 소장은 나중에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이후 과달카날에서 활발하게 작전을 벌였지만,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미군의 기습을 당해 그 자신은 전사했고 중순양함 후루타카와 구축함 후부키가 격침당했으며, 기함 아오바도 침몰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덤으로 후루타카의 수병들을 구조하던 구축함 2척도 추가로 침몰하고, 이 해전에서 그가 호위하던 수송함대의 사령관인 조지마 소장은 "이 해역에 미군은 없다"고 고토 소장에게 알렸는데, 그 무전을 때린 직후에 미군기가 조지마 소장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고토 소장은 이딴 무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경계를 열심히 했지만, 미군은 막강한 SG레이더를 갖고 있었고 일본군은 눈으로 야간감시를 해야 했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사람의 눈으로 레이더를 이길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지만, 일본군은 제6전대의 경계실패가 패인이라며 기술력 열세를 무시했고 이후 일본군은 야간전에서 연전연패하게 된다.
-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1880.06.15 ~ 1947.01.05)
☆
러일전쟁 때부터 활약한 일본 해군 원수. 1935년 12월부터 런던 군축회의에 전권으로 참석해 연합국의 일방적인 전함 감축안에 반대해 일본의 탈퇴를 통보하였다. 1936년 히로타 내각의 해군대신으로 취임한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해군차관으로 발탁하였다. 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군령부총장으로 복귀해 야마모토의 진주만 공습 계획을 승인하였다. 그는 일본제국 해군의 3장관인 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장관, 군령부총장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로 명실상부한 일본 제국의 엘리트였다. 패전 후에 A급 전범 판결을 받았으나, 수감 중이었던 1947년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판결을 면제받았다.
- 나구모 주이치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켰으나, 3차 공격을 인가하지 않았다든가, 혹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판단 실수 때문에 일본 내에서 비판을 심하게 받았다. 다만 그의 실수는 미카와 군이치처럼 다른 일본군 장성도 했던 실수거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처럼 다른 사람의 책임을 떠맡은 것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평가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서 역적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그가 실수를 저지른 전투가 다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였기 때문이고, 그 때 나구모가 없었고 다른 사람이 지휘했더라면... 이라는 희망사항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공전기 같은 곳에서는 다른 일본군 제독과는 달리 초기에 혼자서 사망한다든지 하는 좋지 않은 대접을 받는다.
-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 장성으로 최장수한 인물. 향년 106세.
- 미카와 군이치(三川 軍一, 1888.08.29 ~ 1981.02.25)
진주만 공습 당시 야마구치 다몬과 함께 3차 공습을 주장한 바 있으며 1942년 7월에는 제8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고 사보섬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이끌고 연합군 함대를 기습, 중순양함 4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대파, 구축함 2척을 중파시켰지만 미 해군의 항공모함 와스프의 함재기들이 공습해올 것을 우려하여 철수한다.
이러한 대전과에도 불구하고 "적 함대를 괴멸시켜놓고 왜 적의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았나?"라는 비난을 받으며 상부에 찍혔고, 과달카날 전투가 일본의 패배로 끝난 이후 제8함대 사령장관직에서 물러나 한직을 맴돌다가 1945년 5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郎, 1883.09.24 ~ 1976.06.07)☆
일본 해군 제독. 상하이 사변 때에는 제3함대 참모장으로 상하이에 출동한 바가 있다. 요코스카 사령관으로 재직 중 도조 히데키의 해군 대신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정중히 거절하다가 마지 못해 승낙한 뒤 태평양 전쟁에 적극 개입했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서의 패배로 인해 도조와 아울러 큰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해군대신, 군령부총장을 사임하였고, 후에 군사 참의관을 거쳐 1945년 예비역이 되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지명돼, 헌병이 신병 구속을 위해 자택에 방문했을 때는 자신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연행되어 갔다. 사형을 각오했지만,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1955년, 가석방 후에 사면돼 1976년에 사망하였다.
-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郎, 1891.06.02~1945.08.16)
중장. 그 카미카제 특공대를 만든 인물. 종전 다음날 할복 자살했다.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할복하면서도 '영령들에 대한 사죄로 고통스럽게 죽을 테니까 절대로 뒤에서 목을 쳐서 편하게 죽도록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할복 항목을 알겠지만, 할복을 한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이 아니므로 목을 쳐주지 않으면 죽는 동안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남방작전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 제독. 제독으로서의 능력도 그럭저럭 있었고, 연줄도 있었으며 부하들을 상당히 신뢰했다. 필리핀 해전에서 중순양함 초카이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영국 해군 장병들의 80%를 구해내기도 하였다.
-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 成美, 1889.12.09 ~ 1975.12.15)
해군 제독. 일명 '일본군 최후의 해군 대장'·'침묵의 제독'.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과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차관과 같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을 반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달리, 그는 처음부터 거함거포주의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또 일본이 미국을 이길 수 없는 6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등, 태평양 전쟁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패전 후에는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 사콘조 나오마사★
16전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잠시 합류했던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가 일으킨 베허호 사건의 용의자로 사형.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쓰 시로 대장이 종전 이전 병사하여 그 대타로 걸려들었다. 토네가 원래 7전대 소속이고 인도양 출격 임무는 3월 15일에 종료되었으며, 이후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고 사건이 일어난 건 3월 18일이므로 무혐의 처분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는 형식적인 재판 뒤, 본보기로 교수형을 집행했다. 포로를 살해했다면 사형이 마땅하지만 이 사람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음에도 대타로 걸려들어 이 항목에 집어넣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혐의를 완전히 입증하지 않고 대타로 교수형을 당했을 뿐이지, 학살 명령을 딱히 이의없이 받아들인 점이나 토네에 수용 능력이 없음을 이유로 학살을 명령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기에 완전히 억울하게 죽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구두로 명령이 하달된 탓에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의견이 분분한 편. 또한 1947년 진술서에서 미군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학살하고 병원선에 폭격을 가해 사상자를 냈으며, 이에 일본군은 미군이 자군의 인(人)력을 상실시키려 한다며 보복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참고로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엄, 청결하고 전형적인 군인다운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근거로 학살 명령을 내릴 사람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 쿠사카 진이치
중장,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물, 부하들이 전범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부대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5. 영관급 장교
5.1. 육군 장교
-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1883.01.24 ~ 1955.08.25)
일본 육군 대좌.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된 황고둔 사건의 배후 인물. 황고둔 사건 후 그가 도쿄에 사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장쭤린 한 명이나 두 사람이 죽어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내용을 언급한 것이 밝혀져 의혹이 거세졌다. 당시 장쭤린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대립을 완충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그 때문에 장쭤린과 일본 제국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의 군벌과의 관계는 깨졌다. 또한 고모토 다이사쿠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 제국에 알리지 않은 독단 행위였으므로 히로히토는 분노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서는 내각이 총 사퇴하는 등 내분이 일어났다.
일본 육군은 고모토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1929년 4월 예비역에 편입시키는 아주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무마시켰는데, 이에 일본 제국 육군대장 마쓰이 이와네가 이런 가벼운 처분에 대하여 끝까지 강력 반발한 바가 있다. 고모토는 1932년 군에서 물러나 산서산업 회장이 되었다가 국민당에 의해 볼모가 되다가 산서성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가자 그 때 타이위안에 억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중국잔류 일본인 문제의 원흉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 니시무라 다쿠마★☆ (西村琢磨, 1889.09.01 ~ 1951.06.11)
제25군으로 싱가포르 공략전에 참가한 후 싱가포르 주변의 잔병소탕을 했는데 이 때 싱가포르의 화교들을 전쟁협력자로 몰아 대량학살했다. 다만 싱가포르 학살의 경우는 혐의가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츠지 마사노부가 주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느 정도는 개입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전후 그가 전범 재판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42년 7월 15일에 예비역이 되어 군에서 물러난 니시무라는 1943년 4월 15일에 다시 육군 사정관에 임명되어 6월 20일부터 버마의 샨 주정부 장관, 1944년에 수마트라 지사로 일했다. 1945년 종전 후 니시무라는 영국관할인 싱가포르의 재판정에 세워졌지만 극형을 면했다. 하지만 호주정부는 마누스 재판에서 포로살해 혐의로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려 1951년 6월 11일에 니시무라는 마누스 섬에서 처형되었다.
- 다카하시 다카아쓰☆ (高橋 隆篤, 1888년~1952년)
관동군 수의부장이자 100부대 사령관이었던 사람으로 731 부대에서도 일했으며 일본군 마루타를 창시했다. 결국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포로들과 달리 마구 두들겨 맞으며 혹사받아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모리 구니조☆★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을 다치바나 요시오와 함께 주도하였다. 치치시마 일로 인해 종신형을 받고 있었는데, 조금 뒤 남방전선 당시에 자신의 죄를 부하 호리우치 도모야키 대좌에게 뒤집어 씌웠던 일[5]이 발각되어서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 오카다 게이지☆★ (岡田慶治)
일본 육군 소령으로 네덜란드인 강간사건 스마랑 강간 사건의 주범이자 다나카 군키치의 300인 참수의 경쟁자. 위안부 사업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며 스미랑 강간 사건 당시 네덜란드인 여성 35명을 강제 연행한 뒤 스마랑에 있던 위안소에 감금하고 강제로 매춘을 시키고 강간했다. 총살형을 선고 받고 총살당했다.
- 츠노다 도모시게(津野田 知重, 1917.02.01 ~ 1987.07.26)
일본 육군 소령으로 도조 히데키 암살 작전의 주모자. 뿐만 아니라 도조를 암살한 후에 훗날 수상을 역임하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미카사노미야 친왕과 이시하라 간지가 연루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두 사람에게는 처벌이 없었다고 한다.출처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있다.
- 츠지 마사노부☆
싱가포르 화교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바탄 죽음의 행진에 관여했다. 한편으론 식인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전범재판에 회부될 경우 사형감이지만 종전 후 장제스와의 친분을 이용해 잠적하고 공소시효를 넘겨 기소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모략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일본 정계에 진출하는 등 성공을 했다는 점은 그가 교활한 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 삼대오물이 그냥 멍청하고 무능해서 일본군에 악영향을 끼친 반면에, 츠지 마사노부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간악한 술수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5.2. 해군 장교
- 구도 슌사쿠(工藤 俊作, 1901.01.07 ~ 1979.01.12)
구축함 이나즈마(구축함) 함장. 자바 해전 당시 자신이 격침한 영국군 중순양함 익세터의 승조원들을 자매함 이카즈치와 함께 전부 구조하여 신병 확보 후, 다음날에도 영국군 구축함 승조원들을 바다에서 건져 올린 뒤 이들을 하나로 모아, 반자르마신에 정박 중이던 네덜란드 병원선 옵텐노르트에 자신이 확보한 포로를 전부 인도했다.
그 뒤 지병 악화로 군에서 물러나며 조용히 지내다 세상을 떠나지만 쿠웨이트·스웨덴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인 샘 폴이 당시 중위였던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 그를 수소문하여 결국 2008년 그의 묘소에 주일 영국 대사와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 마유즈미 하루오☆ (黛治夫, 1899년 10월 2일 ~ 1992년 10월 29일)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의 함장(당시 대령)이었으며, 1944년 3월에 베허호 사건을 일으켜 80명의 민간인 포로들을 참수했지만, 전범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왜 사형이 아니라 7년형을 선고받았냐면, 이 사람은 적극 가담이 아닌 소극적 가담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판결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홍콩 전범재판에서 영국군 심문관에게 '군기와 문장을 숨기고[6] 포로 학살을 저지른 건 사실이나, 작전 중에 포로를 잡거든 신속히 처리하라는 상부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다."라는 진술을 하는 바람에 사콘조 나오마사 중장의 신병이 인도되어 함께 홍콩에서 재판을 받고, 본인은 7년형, 사콘조 중장은 교수형이라는 엇갈린 운명을 만들어냈다.
- 사베 쓰루요시☆ (佐部鶴吉)
구축함 아키카제의 함장. 라바울로 포로를 호송하던 도중 민간인 포로들을 바다로 떠밀어 죽였다. 자기네 동맹국 독일과 헝가리 거류민들까지 전부 다. 아키카제가 침몰할 때 자기 혼자 몰래 구명보트에 올라 도망치려다 연합군 폭격을 맞고 구명보트와 함께 침몰했다.
- 아리이즈미 다쓰노스케☆
중좌, 당시 잠수함 이-8의 함장으로 재직중에 저지른 인도양 학살사건을 현장에서 주도한 인물. 1944년 1월 25일 네덜란드 국적의 화물선 티살락을 격침하고 바다에 표류하던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하거나 일부를 건져올려 몽둥이와 군도로 살해했던 사건으로 그 배경에는 제 8 잠수함대 사령관인 이치오카 히사시(市岡寿)소장이 도쿄의 군령부 수뇌로부터 "독일의 립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일본에게 연합국의 상선의 격침할 경우 승무원을 모두 몰살시키라는 요청을 해서 해군도 동의했다. 귀관도 이에 따라 적국 승무원의 처분에 철저히 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를 충실히 시행했던 인물이다. 훗날 이-401의 함장으로 전직했는데 이 상태로 종전을 맞이하고 미군에게 함을 인계한 후 사령실에서 자살했다.
- 요시이 시즈오☆★
일본 해군 대좌.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식인을 주도하였다.
- 하시모토 모치츠라
잠수함 이58의 함장. 미군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한 주인공. 훗날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티모시 맥베이를 변호하는 데 힘써 결국 결실을 맺었다. 전후 미군의 심문 당시 난징 대학살의 경위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증언한 기록이 방위성 역사자료로 남아 있으나, 방위성 측에서는 이를 비공개 처리하고 있다.
5.3. 항공대 장교
- 미노베 다다시(美濃部 正, 1915-04-22 ~ 1997-06-12
비행대 지휘관. 로테이션 제도를 통해 휴식·훈련·재편부대를 보유하여 베테랑은 후방 기지에서 신병을 교육하게 하고, 정비병을 통한 교육을 통해 우수한 파일럿들을 대거 투입하여 높은 전과를 올렸다.[7]
또한 자신의 부대에서 단 1명의 카미카제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 다만 부하에게 카미카제 명령을 내린 적은 있다. 야간에 정찰기를 출격시켜 '적의 항모를 발견하면 위치를 부대에 보고한 뒤 그대로 항모에 들이받아 전투능력을 빼앗아라. 그러면 해가 뜨는대로 본대가 출격하여 항모를 공격하겠다'는 작전이었는데, 정찰기가 출격하고 보니 정작 카미카제로 들이받을 배를 찾지 못해서 명령을 받은 대원은 무사히 귀환.
그는 정확히는 카미카제 자체가 아니라 '연습기로 사용되는 복엽기를 이용한 카미카제'를 거부했다. 쉽게 말해 '미군 방공망을 연습기로 뚫으라고? 장난해?'라는 의미. 당시 연습기로 사용되던 기체는 일명 '고추잠자리(赤とんぼ)'라 불리던 구삼식 중급 연습기. 최고속도가 제로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속 200km 정도였다. 하도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정말 연습기까지 사용하여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기 계신 분들이 먼저 그걸 타고 공격해 보면 좋을 겁니다. 소관이 제로센 1기로 전부 격추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소리까지 하기도.
- 사사이 준이치(笹井 醇一, 1918.02.13 ~ 1942.08.26)
사카이 사부로가 소속된 부대의 비행대장.
- 스가하라 미치오
육군 항공대의 카미카제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재직당시 출격후 부득이 귀환했던 대원들에게 거칠게 굴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심지어 이때문에 자살한 대원도 있다. 나중에 비참하게 시골에서 숨어 살다시피 했으며 특공 희생자 유족들이 수소문 끝에 찾아냈을 당시 울며 도게자를 하며 말하길 "저를 귀축이라 욕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죽은 부하들은 모욕하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빌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살특공을 미화하고 자기 책임을 숨기려는 기고문을 쓰기도 해서 그의 밑에서 일했던 특공대원들은 위선자라고 욕했다.
- 시가 요시오
항공모함 카가의 비행대장이었으나 부하들의 편의를 봐주다가 함장의 눈 밖에 나 준요의 비행대장으로 사실상 좌천. 이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대파시켰으며,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해군 신형전투기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임명. 그리고 시나노의 비행대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지만, 시나노가 완성 직전에 격침되며 허사가 되고, 결국 해군 최정예 파일럿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을 담당하게 된다. 인격자로서 상관과 부하 모두에게 신뢰를 받았으며, 특히 카미카제를 거부한 일화가 유명
5.3.1. 파일럿
- 니시자와 히로요시(西沢 広義, 1920.01.27 ~ 1944.10.26)
베스트 파일럿. 공식 기록 상 87기 격추. 25세로 요절했다.
- 사카이 사부로
"대공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일본군의 에이스 파일럿. 전투 실력도 굉장했지만, 카미카제를 반대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전시중의 행보와 전과에 오류가 많고, 인물평에 대해서도 대단히 엇갈리는 부분이 많다. 카미카제를 실제로 반대하던 인물이었는지도 애매.
- 스기노 가즈오
가혹행위를 자제한 사람이다. 파일럿이 되기 전 구축함 쿠로시오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구타당한 경험 때문에 오히려 가혹행위를 극도로 꺼렸다. 보통 가혹행위의 특성상 당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후임에게 자기가 당한 그대로 저지르기 마련인데 이 점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 덕분이었는지 이륙 사고로 척추 골절로 자살을 시도하려 했지만 사고를 수습하려던 정비원들이 권총을 빼앗는 바람에 실패, 3일 뒤 다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패전까지 카미카제 대원들을 호송하는 호위 임무를 맡았지만, 자살 특공에 대하여는 비판적이었다.
- 스기타 쇼이치
사카이 사부로, 니시자와 히로요시와 함께 해군 파일럿의 삼족오라 불린 인물.
- 세키 유키오
최초 카미카제 특공 시행자. 일본군의 에이스였으며, 카미카제로 미국의 호위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 카미카제 명령을 받았을 당시 일본을 대차게 욕하는 글을 남기고 사망했다.
- 아라키 유키오
최연소 카미카제 특공 대원. 향년 16세.
- 아카마쓰 사다아키
해군 파일럿으로 제로센과 라이덴을 주로 다루었다. 격추수는 명확하지 않으나 75대의 머스탱 사이로 파고 들어 한 대를 격추 시키고 이탈했다고 할 정도로 걸출한 파일럿. 굉장한 술고래로 패전 후에 동료들이 밥벌이라도 하라고 비행기 1대를 줬더니 그걸 팔아 술을 마셨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 우에하라 료지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으로 카미카제로 산화. 유서인 소감이 현존하며, 내용은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실패하며 진정한 애국자는 일본이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일본제국에 대한 아주 통렬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다.
- 쿠노 고후
세키 유키오와 함께 최초의 특공 시행자. 그러나 전과 불분명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 쿠로에 야스히코
파일럿으로 일본군답지 않게 에너지 파이팅을 선호한 인물.
5.4. 참모
- 구사카 류노스케(草鹿龍之介, 1892.09.25 ~ 1971.11.23)
일본 해군 중장.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적극적 주전론자로서, 시종일관 공격만을 강조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 사람도 카미카제 특공대를 적극 추진한 사람이었다. 패전 후에도 살아 남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을 카미카제로 죽게 만든 점에 대해서 비난을 받았고, 그의 군사적 능력도 "입만 앞세우는 참모"로 평가절하되었다. 비슷한 상황에 있던 오니시 다키지로가 할복 자살한 것과는 대조된다.
- 겐다 미노루
해군 대좌,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진행될 때 거함거포주의에 반대하여 스스로 항공주병론자가 된 인물. 진주만 공습 이후 항공 참모로 활약했다. 나중에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뒤로는 본토에 항공 기지를 만든 후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패전 후에는 항공자위대 막료장을 지내고 전역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을 종잇장으로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인데, 장차 전투기의 무장은 20mm 기관포가 주가 될 것이고 전투기가 20mm 기관포를 맞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장갑은 무의미하다는 이론이었다. 최소한의 생존성은 갖춘 육군과는 반대되는 방향.
- 무토 아키라(武藤章, 1892.12.15 ~ 1948.12.23)☆★
난징대학살 당시 참모부장을 맡았고 필리핀 전선에도 파견된 인물이다. 일각에서 두 학살을 주도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선 난징대학살의 경우 학살에 가담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나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편이고, 필리핀 마닐라에서의 학살은 잔류 해군육전대와 육군 병력이 멋대로 저지른 것이고 이 시점에 무토는 이미 사령부를 북부로 빼냈기 때문에 관계가 없었다. 다만 A급 전범으로 분류된 점에서 보듯이 그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침략 전쟁 수행에 임한 것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야하라 히로미치(八原 博通, 1902.10.02 ~ 1981.05.07)
오키나와 전투 당시 고급 작전참모. 지구전을 제안해 미군을 괴롭히는 전술을 제안했지만 참모장인 죠 이사무와 대본영이 이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1주일간 반격을 행하여 군에 커다란 피해를 입자 그제서야 그의 작전대로 지구전을 행하여 미군의 최선임 야전사령관인 10군 사령관 윌리엄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게 되었다. 미군은 '그의 전략은 일본군의 보증 수표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이후 우시지마 중장에게 오키나와에서 탈출해 대본영에 상황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죠 이사무 참모장은 야하라 대좌에게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지시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명령대로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군의 투항 권유를 받고 민간인으로 위장해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원래는 장교 신분을 숨겼으나 오키나와 현청 간부에게 군인 신분이 들통났다.
- 세지마 류조
관동군 참모로 재직하였으며 여러 작전에 개입했다. 태평양 전쟁의 또 다른 흑막. 전범 재판 때에는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대가로 포로수용소의 사무를 돌보는 직위에 있으면서 편히 지냈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아들이 장교로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공산주의 선전 활동에 참여한 경력을 두고 귀국선에서 세지마에게 네놈이 한 짓은 본토에서 반드시 심판당한다"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한국 거물들과 인연이 많은 지한파였다. 한국 전경련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된 적도 있다. 2007년에 사망했다.
- 우가키 마토메
중장,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뒷수습을 잘했고, 패전 원인을 잘 분석하였다는 점을 보면 참모로서의 능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정작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지휘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게다가 카미카제 특공을 신봉하였고, 자신도 카미카제로 죽었다는 점을 보면 그다지 능력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 쿠로시마 카메토(黒島亀人, 1893.10.10 ~ 1965.10.20)
일본 해군 군령부 제3부장으로 재직하였다. 진주만 공격을 최종 검토하였다. 진주만 공격은 꽤 성과를 올렸고 쿠로시마는 반복공격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주이치 사령관의 거부로 이 제안은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아후 섬의 군사시설과 연료탱크가 보존되었고 미군항모인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이 가까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뼈아픈 후회이기도 했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작전을 입안하지만 미군이 암호를 해독해 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범인(凡人)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발한 발상을 내놓는다며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가장 아끼던 참모였지만, 구상하는 작전이 쓰잘데없이 세밀하고 허황된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전. 여러모로 이소로쿠를 제외한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는 영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박을 즐기는 이소로쿠의 성격이 이 인간과 잘 맞아 떨어졌던 것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카미카제, 신요, 오카, 가이텐, 카이류, 후쿠류 등의 일명 특공병기등의 개발을 주도하고 이들의 실전배치를 극구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 호리에 요시타카
109사단의 소령으로 작전 참모였다.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때 웨렌 본 중위를 구해주려다 들켜서 본 중위는 잡아먹히고 자신은 병사들에게 5~6개월 동안 구타당했다. 이 점을 참작하여 종전 후 전범재판에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 사람이 이오지마 측과 연락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덕분에 이오지마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남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부록에 치치시마 식인 사건이 오가사와라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 핫토리 다쿠시로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할힌골 전투의 패배로 좌천당한 행적이 있다. 츠지 마사노부와 유사하게 작전 참모로 활약한 인물. 전후 GHQ 산하 제1복원성[8]의 중요 구성원으로 육상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 창설에도 관여했다.
- 후쿠도메 시게루 (福留繁, 1891.02.01 ~ 1971.02.06)
해군 중장.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해군 연합 함대의 참모장으로 활약한 인물. 그러나 필리핀 탈환 때 작전 계획이 미군 손에 넘어갔는데 이를 알면서도 작전 계획 그대로 속행, 결전 지역에서 미군이 미리 보내놓은 잠수함에게 역습을 겪어 항공모함 3척이 격침 당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암살 사건인 해군 갑 사건에 이은 해군 을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수공기 타고 가다가 추락해서 필리핀 게릴라한테 넘어갔다가 인질 교환돼서 본토로 돌아갔는데 이 아저씨 타고 있던 비행기에 Z작전 문서가 있었고 이게 여차저차 미군한테 넘어갔다가 정보 쏙 빼놓고 다시 재포장해서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돌려놓고 이걸 일본군이 찾아내고 휴, 안 넘어갔구나 하고 안심했다가 이후 호된 꼴을 당하게 된다.# 이 당시 일본군 풍토인 포로는 수치다! 에 얄짤없이 해당되는 인물이지만 전투 중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는등 우기고 내부적인 여차저차를 통해 큰 탈은 없었다나.
5.5. 기타
-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 1893.07.09 ~ 197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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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전범 재판에서 앙숙인 무토 아키라 중장이 개전의 책임이 있다고 폭로한 인물.
- 다카기 가네히로(高木兼寛, 1849.10.30 ~ 1920.04.13)
각기병의 원인을 찾아낸 해군 군의총감. 영국에 의학 유학을 다녀온 군의관. 당시 일본군의 큰 골칫거리였던 각기병의 원인을 쌀밥 위주의 식사에서 찾았고, 1884년 해군 연습함의 원양항해 때 승조원들의 식단에 빵과 양식을 포함한 식단 개선 실험을 하여 장기간의 원양항해에서도 사망자가 1명도 발생하지 않은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각기병 예방을 위해 해군장병 들의 식단을 쌀밥에서 혼분식, 양식으로 바꾸는 등 식단을 개선하였다. 이 양반 덕에, 육군이 20세기 초까지 각기병으로 장병들이 죽어가는 동안 해군에선 19세기 말에 각기병 환자가 아예 소멸했다. 다만 보리밥이 싫은 장병들로부터 '보리밥 남작’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특히 이 해군 식단 개선에 영국 해군이 인도 음식으로 부터 도입한 카레 스튜 식단을 유학시절에 보고 빵 대신 일본식으로 쌀밥에 카레를 얹은 카레라이스로 바꾸어 일본 해군 식단에 도입하였다. 일본 해군의 금요일 카레라이스 식단의 전통은 이 때부터 생겼고 이것이 일반에 널리 퍼져 오늘날 카레라이스가 일본의 국민음식이 되었다.
- 마키노 아키라 - 일본군 군의관으로 필리핀 생체 해부 사건의 가담자. 그러나 그는 당시 자신이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떨었지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험을 거부할 경우에는 구타와 함께 본인 또는 가족이 살해 위협을 받았고, 심지어는 실험을 거부하는 동료가 눈 앞에서 일본도에 찔려 살해당하는 것까지 목격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실험 대기자 일부를 몰래 구해주다 들켜서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할 때까지 일본군에게 구타 당했다. 그 때문에 종전 후에도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2006년에 이 실험의 실체를 폭로하였다. 그는 "우리는 역사에서 다시는 그러한 끔찍한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한 사람 아니 두 사람이 될지라도 전쟁 중 있었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 모리 린타로
일본의 군의관이자 작가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근대 일본 소설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인물. 19세에 도쿄대학 의학부를 8등으로 졸업한 후 육군성에 들어가 군의관이 된다. 대만 총독부 육군국 군의부장, 제12사단 군의부장, 육군 군의총감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군의관으로서 큰 실책을 저지른 바 있다. 그는 각기병의 원인을 병균 때문이라고 죽을 때까지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경험적으로 보리밥이 각기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실을 무시하고 병영식에 보리밥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일본 육군 한 사단에 해당하는 인원들이 전사도 아닌 병사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한편, 민간인 및 포로 강간, 학살, 약탈 그리고 생체실험과 같은 행위는 극도로 혐오하였으며,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6. 위관급 장교 및 부사관, 일반병사
- 코다이라 요시오 (小平義雄, 1905.01.28 ~ 1949.10.05)★
중국 전선에서 병사로 종군하며 최소 여섯 명의 중국군 포로를 살해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중국인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했으며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찌르기까지 하였다. 귀국 후 패전 후의 혼란을 틈타 장을 보러 나온 일본인 여성들의 물건을 빼앗고 수십 명을 강간했으며, 이 중 저항한 여성 7명은 살해하고 심지어 시간까지 저질렀다. 경찰에 체포된 뒤 "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라고 진술해 전 일본을 경악에 빠뜨리고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를 소재로 사카구치 안고가 쓴 소설 '전쟁과 한 여자'가 있으며, 201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2013년에 개봉되었다.
- 나카지마 노보루☆★
치치시마 식인사건의 공범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식인사건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포로학대로 포로 2명을 살해한 죄가 있다. 사형에 처해졌다.
- 노다 쓰요시★☆ (野田毅, 1912.06.11 ~ 1948.01.28)
사진의 오른쪽 인물.
난징 대학살 때 같은 소위인 무카이 도시아키와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인 일본군 소위. 무카이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 일본도 들고 저항하는 적군을 참수해 가며 벌인 게 아니라 살려 달라고 투항한 포로나 민간인 끌고 와서 한 짓이었다. 당연히 전후 전범으로 분류되었고, 재판에서 당시의 사건 기사화를 근거로 사형되었다.
- 다나카 군키치☆★
난징 대학살 때 300명 목베기를 달성한 인물. 전후 재판에서 당시 사건이 기사화된 것을 근거로 사형. 더 기가 막히게도, 전범재판 때 '난 무죄'라고 떠들어 댔고 살려 달라며 애걸복걸도 했다. 노다 쓰요시와 무카이 도시아키가 처음에는 무죄라고 떠들었지만 사형 직전에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짓을 뒤늦게나마 순순히 받아들이고 책임을 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 마토바 스에이사무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다치바나 요시오의 부관으로, 이 사건의 행동대장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건 아예 그 죄를 호리에 요시타카 소령과 다마무라 조장(상사)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했다. 이놈은 아예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헌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사형수라도 사형 집행 전까지는 제대로 대우해 주는 게 원칙이라는 점에서 미군 헌병들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가 저지른 죄가 워낙 악질이고 마지막까지 참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정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 무카이 도시아키★☆ (向井敏明, 1912년 6월 3일 ~ 1948년 1월 28일)
사진의 왼쪽 인물.
난징 대학살 때 같은 소위인 노다 쓰요시와 100인 참수경쟁을 벌인 일본군 소위. 전후재판에서 당시의 사건 기사화를 근거로 사형.#
- 이다 스스무☆
뉴브리튼 섬 주둔군의 일원으로 일본군에 저항하던 현지인 여럿을 상관의 명령에 따라 군도로 참수한 경력이 있었던 전범이었으며, 이로인해 극동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 이것이 마음의 커다란 짐이 되어 한평생을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요코하마의 사회복지법인 파랑새(青い鳥)를 설립하여 장애 아동을 적극 후원하고 전쟁의 비참함을 강조하는 반전운동가로 여생을 보내며 한평생을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대동아공영권의 진상에 대한 강연을 계속하며 살아갔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안보법제에 의해 일본이 전쟁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내 등을 떠밀었다."라며 일본의 현실을 우려했으며, 자신의 강연을 감명깊게 듣던 중고생들이 반전운동에 투신하자 "젊은 세대에게 내 마음은 전해지고 있다. 내가 심은 나무에는 언젠가 커다란 열매가 열릴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016년 10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 사카마키 가즈오
진주만공습 때 잠수함 대파로 표류하다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됨. 최초의 일본군 포로.
- 오노다 히로
필리핀 잔류 일본군으로 유명한 인물. 육군 정보병과 소위로 필리핀 주둔 육군 8사단 정보참모부 소속. 전쟁 이후에도 자기만의 전쟁을 지속하며 수많은 필리핀 민간인을 살해했다. 참고로 필리핀 정부는 그를 사살하기 위해 수차례 토벌군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해, 1974년 끝내 일본에서 데려갔다.[9] 근 30년을 정글에서 숨어 살던 오노다는 격변한 전후 일본 사회에 적응을 못해[10] 친척이 있던 브라질로 이민갔다가 귀국, 이후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극우활동을 하다 2014년에 사망.
- 오바 사카에
사이판 전투 당시, 남은 병사들과 함께 종전후에도 저항을 하였던 인물. 이 문서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 요코이 쇼이치
괌에서 발견된 잔존 일본군으로 전쟁 전 직업은 양복 재단사였으며 원래 1935년에 군 입대하여 병역을 마쳤다가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재소집된 예비역이었다. 제38 보병연대 오장(하사)였을 때 괌이 미군에 점령되며 본대와 떨어져 고립되었다가 1972년에 발견되어 귀국 후 조용히 일본에서 여생을 보냈다. 항복을 거부했지만 망상 속에서 혼자 전쟁하던 오노다와 달리 현지인을 최대한 피하며 동굴에서 살고 수렵채집을 하며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개천에 낚시하러 갔다가 우연히 현지인과 만나[11] 그의 존재가 알려져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공항에서 귀국 인터뷰 때 한 첫마디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恥ずかしながら帰って参りました)."는 그 해의 유행어이자 그를 대표하는 한 마디였다.[12] 오노다와는 달리 무난하게 사회에 적응해[13] 자신의 힘들었던 정글 생존기를 강연하며 살다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노다 히로가 당시 자행한 행동과 대조되는 점이 많은 인물. 이것은 오노다는 악명높은 나카노 학교 출신 장교였던 데 반해 요코이는 서민 출신의 징집병이었다는 출신의 차이가 가장 큰 차이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TV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에도 이름을 바꾸어 등장했다.
- 케네스 유노네
연합군 부사관을 참수하는 사진의 주인공.[14] 후일 전범으로 처형되었는데 사실 이 참수 사진만으로는 전쟁 범죄자가 아니라 처벌이 불가능했으므로 다른 학살 혐의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 이런 사진의 주인공들은 스파이만 처형한 게 아니라 조종사 포로의 참수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관련 혐의가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사진의 참수당한 사람은 그냥 포로나 탈출한 조종사, 민간인이 아니라 스파이라 즉결처분도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자를 처형한 것만으로 전범으로 처벌하긴 힘들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군 스파이들을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한 전적이 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똑같은 짓을 했다고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말 무고한 포로를 죽였는가를 추가로 추궁했고 탈출한 뒤 포로가 된 조종사까지 죽인 게 사실로 확인된 경우에만 사형에 처했다.
- 하야시 미노루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요시이 시즈오의 부하로 해군사관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인재였고 전쟁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다치바나 요시오와 모리 구니조의 무자비한 구타와 폭행으로 결국 포로를 처형했다. 그 일 때문에 이 사람도 죽을 때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 후나사카 히로시
육군 하사관, 초인적인 전과로 유명하다. 전후에는 서점을 경영하였고, 일본군 위안소의 존재를 알리는 증언을 담은 책을 썼으며, 수익금으로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웠다.
6.1. 징집으로 군복무한 인물
- 무라야마 도미이치
정치인, 메이지대학에 입학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조선소로 동원되었다가 징병검사를 받고 바로 일본 육군 이등병으로 징집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해에 간부후보생으로 편입되어 중사계급으로 종전을 맞이했다.
- 마루야 사이이치(丸谷 才一, 1925.08.27 ~ 2012.10.13)
소설가, 일본이 패전한 해에 입대했다 종전을 맞이했다. 1967년에는 1940년부터 일본이 패전한 해인 1945년까지 일본 각지를 방랑하면서 징집을 피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인 조릿대 베개라는 소설을 써서 내놓기도 했다.
- 미즈키 시게루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당시 징집병이었고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전원 옥쇄하라!'가 일본군 위안부의 참혹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야나세 타카시
역시 날아라 호빵맨, 난다 난다 니얀다 등으로 잘 알려진 만화가로, 중일전쟁 중에 징집되어 야전 중포병으로 복무했다. 전쟁 도중 남동생을 잃은 후 반전 사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기무라 이사오(木村功, 1923.06.22 ~ 1981.07.04)
배우. 1942년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에 첫 데뷔를 하다 1944년 해군으로 입대했으나 그가 군에 있는 동안 히로시마에 있는 가족들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
7. 조선인 출신 일본군
- 김석원
창씨개명한 이름은 가네야마 사쿠겐(金山錫源). 장교(중좌)로 복무했던데다 일본군 입대 강연회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빼도박도못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어 있다. 6.25 당시까지 국군 측 장성으로 현역 복무하면서 일본군 군도를 빼들고 전선돌격을 감행하여 미군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군 복무 경력을 거듭 반성하였고 회고록에서도 이를 언급했다. 퇴역 후인 4.19 혁명 당시에는 성남고등학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당시 시국 때문에 경찰에게 학생들 관리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듣자 오히려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라는 말도 남겼다. - 이응준 - 일본 육군 대좌.
- 영친왕 - 일본 육군 중장. 당시 일본 황족과 조선 왕공족은 자동으로 일본군 군문에 입회하여 장교 코스를 밟았다. 황족 및 왕공족은 관례상으로 해당 기수 육군대학 수석 졸업을 주었으나 영친왕의 경우는 실제로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에는 "영친왕이 곧 귀국해서 국방부장관을 맡을 것이다"라는 뜬소문이 돌았다.[15]
- 신상묵
조선인 출신 군인으로 일본 헌병으로서 진해의 일본 해군 군용기 공장에서 근무하며, 오장(伍長, 일본군 하사)을 거쳐 조장 (曹長, 일본군 상사)에 올랐다.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항일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를 직접 고문한 민족 반역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 이종찬
일본군 출신이었으나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가 갖고 있단 조선귀족 작위의 습작을 받지 않았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하였고 부산정치파동,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의 숱한 사건에서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며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켰다. 후에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 탁경현
조선인 카미카제 특공 대원.
- 홍사익★ - 일본 육군 중장. 일본군 중에 전범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16] 유일한 조선인 장성. 다만 애초에 조선인 장성이 홍사익과 영친왕 단 둘 밖에 없었으며 영친왕이 왕공족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유일하게 장성급까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다만 장성이 아닌 일본군 전체로 봤을 때에 전범행위로 처형된 조선인 출신 일본군은 몇명 더 있다.
8. 반전주의자
- 엔도 사부로(遠藤三郞)
포병 대위로 재직당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인에 대한 린치를 막기 위해 경찰, 헌병대에 도움을 청하고 자기 부대에 그들을 보호할 것을 명했으며 살인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 재판을 상부에 요구했으나 상부가 이를 오히려 은폐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불복했다 결국 프랑스로 떠났다. 귀국 후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에 만연한 타락을 지켜보고 이를 안타깝게 여겼으며 항공병과로 옮겨 장성으로 진급한 뒤 할힌골 전투 후 '소련과 싸울 수 없으니 일단 전선을 유지하는데 주력하자'고 했다가 대본영으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중경 대공습에도 극도로 부정적이었는데 전쟁에 있어서 불필요한 생명의 희생은 극구 반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말기 오니시 다키지로와 함께 공군의 창설에 노력했지만 결실을 맺기 직전에 패전하였고 극동 전범 재판에 출두하여 1년 동안 수감, 심문을 받고 석방되어 예전에 근무한 사이타마 육군비행학교 부지로 돌아와 농민이 되었다.
전쟁 후에는 반전운동가가 되어 일본군에 대한 여러 증언을 할 뿐만 아니라 평화헌법 준수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헌법옹호 국민연합 등 시민단체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말년을 보냈으며 1956, 57년 마오쩌둥과 중일 회담당시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 면담하기도 했다. 그 뒤 1961년 중일우호 전직군인회를 조직하여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당사자의 강연 등을 전국적으로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호리 데이키치(堀 悌吉, 1883.08.16 ~ 1959.05.12)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 그 자체는 악이다.[17]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호리는 당연히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에 속했다.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에서 보조함의 비율은 미국 및 영국과 비교해 7할은 필요하다는 함대파의 의견이 해군 내부에 강경했을 당시 군무국장이던 호리 데이키치는 '영미와 전쟁보다는 타협한다'라는 견해를 보이는 조약파의 일원이었다. 결국 타협에 성공하여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공로로 호리는 중장으로 승진되지만 이듬해 함대파가 해군성을 장악한 상태의 인선에 휩쓸려 결국 압박을 받고 예비역으로 강제 편입되어 버렸다. 이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펄쩍 뛰었을 정도. 하지만 호리는 날뛰는 그를 말리고 난 뒤 예비역으로 편입조치를 받아들이고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9. 인도주의자
- 이마이 다케오(今井 武夫, 1898-02-23 ~ 1982-06-12)
중일전쟁을 빨리 협상으로 끝낼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삼국동맹 체결 때문에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제14군으로 배속되어 당시 바탄에서 미군과 사투를 벌여 승리했으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에 의구심을 품고 자기가 잡은 미군 포로들을 무장만 해제한 뒤 석방했다. 참고로 이 명령은 대본영에서 내려온 포로 감시를 엄중히 하라는 명령을 츠지 마사노부가 왜곡한 것이였다. 한마디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대본영의 명령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니, 사실상 최고 통수 기관의 명령을 거스르고 포로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 그 뒤 마닐라 방위 사령관으로 루손 섬을 안정시키고 대동아성에 배속되어 난징 괴뢰 정부에서 재직하였다. 국부군과 협상하여 휴전 협상을 국부군 측 대표인 허잉친과 만나 단번에 성사시켰다.
패전 후에는 허잉친에게 억류되었지만 허잉친이 그를 전범 대하지 않고 훈방한 뒤 적극적으로 그와 함께 중국 거주 일본인 귀환을 주도하여 소련으로 끌려가거나 중공에서 남아 혹독한 삶을 보낸 만주국 거주 일본인과는 달리 200만의 일본인을 귀환시키고 본토로 복귀했다. 1982년 85세로 사망했다.중일화평공작의 기록 - 쓰치야 고겐(土屋 公献, 1923-04-03 ~ 2009-09-25)
일본 육군 소위, 전 일본 변호사회 회장,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의 창시자. 치치지마 식인 사건 당시 검도 2단이라는 이유로 워런 본을 참수시키도록 명령받았지만, 학도병 출신 중 검도 4단이 있다는 걸 알고 역할을 떠넘겼다. 사실 어찌보면 이 행위 자체는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인육은 끝까지 먹지 않았는데 육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이다.[18] 결국 이 일이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육지에서 나는 고기는 입도 대질 않았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전후 731부대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했으며, 위안부 수요집회를 창시하였다.
- 하나이 젠키치 (花井善吉, 1863 - 1929)
일본의 군의관 대령이자 소록도 병원의 2대 원장, 그가 소록도에 오자마자 한센병 환자들에게 한국식 솜옷을 입게하고 가족 면회도 허락해 주었고, 3년제 학교를 세워주었다. 하나이 원장은 부임 그 다음 해 1922년 10월 8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던 일본 성결교회 목사인 다나카 신사부로(田中道三郞) 목사를 초청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했고, 그 열매로 소록도교회를 창립하도록 했다. 병실에서 예배를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하나이 원장은 신사를 예배 처소로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이어 1928년에 북쪽 병사(구북리)에 지금의 북성교회를 세웠고, 남쪽 병사(남생리)에는 지금의 남성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원의 수용 능력이 엄청나게 불어나고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자 결국 과로로 인해 소록도 병원에서 죽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과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를 세웠다. 그에 관한 이야기하나이(花井善吉)원장 창덕비 건립(1930. 9.)
그러나 그의 사후, 4대 원장인 스오 마사스에 시기부터 소록도 병원의 운영은 악화되어 해방 이후의 군사독재정권기까지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갖가지 잔혹한 인권탄압의 온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4대 원장인 스오 마사스에 시기부터 소록도 병원의 운영은 악화되어 해방 이후의 군사독재정권기까지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갖가지 잔혹한 인권탄압의 온상이 되었다.
9.1. 전시에 인명을 구출한 사람
- 야스에 노리히로(安江 仙弘, 1888-01-12 ~ 1950-08-14)
일본 육군 군인. 다만 군인으로서는 무능했다. 이 사람이 바로 할힌골 전투의 기획자였기 때문이다.
복어계획의 관여자 중 한 명으로, 수많은 유대인과 조선인의 인명을 구했다. 유대인 2만 명을 구했으며 싱가포르 화교 학살 당시 출장 중이었던 야스에가 학살 담당자에게 뇌물을 건네주고는 300명의 사람들을 구출해낸다. 그 덕분에 훗날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로 인정받았다. "이스라엘 만주에 세워질뻔 했다" 中 언론 비사 공개 타이토의 창업주도 이 사람의 은덕을 봤다.
자신의 부대에 일본군 위안부 금지는 물론이고 조선인 징용자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10. 관련 문서
[1] 나머지 한 명은 와카쓰키 레이지로 전 내각총리대신이다.[2] 인도양 학살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됨.[3] 이 사람은 전범으로 처벌받은 게 아니라, 그냥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있었을 뿐이다. 딱히 전범 행위를 한 일은 없이, 부하들을 한 명이라도 더 무사히 후퇴시키려고 고군분투했을 뿐이라서, 수용되어있던 2년 동안 단순한 전쟁 포로로 대우받았다.[4] 말 그대로 세계 최종 전쟁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개발되면 이 무기를 통한 최종 전쟁을 거쳐 인류는 통일된다는 주장으로 일본 내에서는 핵무기와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예언했다고 엄청 떠받들고 있다.[5] 호리우치 대좌는 그 죄로 인해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다만 의례 소총 4발로 사형당했다.[6] 전시 국제법 위반사항이다[7] 特攻せず 夜襲部隊, 2015/7/11 静岡新聞[8] 일본 육군의 해체 절차를 위해 육군성을 최소한으로만 남겨 축소 편성한 과도 기구. 해군 역시 같은 역할의 제2복원성이 있었다.[9] 독재자로 유명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오노다를 사면시켰다.[10] 헬기만 지나가면 정글에서 쫓기던 생각이 나서 덜덜 떨었다.[11] 일설에 따르면 어망에서 자꾸 가재, 생선 등이 사라지자 도둑을 잡으려고 잠복중이던 현지인에게 잡혔다고도 한다.[12] 부끄럽지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등 여러 버전이 있으나 실제로 한 말은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恥ずかしながら帰って参りました) 이것뿐이었다. 호사가나 언론에 의해 살을 덧붙인 것이 퍼져 나갔던 것.[13] 그러나 80년대의 인터뷰에서 "저는 제국시절 세대라서 현재의 일본에 적응하기는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며 전후 사회에 적응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14]
그 사진에서 이 자에게 참수당한 연합군 부사관이 레오나르도 시플릿 호주군 하사이다.[15] 재밌는 것은 김일성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는데, 이 경우는 아예 '누가 내각을 맡으면 좋겠는가?'란 당대의 설문조사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다.[16] 홍사익이 직접 전범행위를 지시하거나 실행한 적은 없었으나 학살을 저지른 부대의 최종책임자였고 사실상 묵인하였기였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17] 그러나 이 주장의 시초는 가토 도모사부로였다. 호리 본인도 가토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18] 다만 쓰치야가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그 사진에서 이 자에게 참수당한 연합군 부사관이 레오나르도 시플릿 호주군 하사이다.[15] 재밌는 것은 김일성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는데, 이 경우는 아예 '누가 내각을 맡으면 좋겠는가?'란 당대의 설문조사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다.[16] 홍사익이 직접 전범행위를 지시하거나 실행한 적은 없었으나 학살을 저지른 부대의 최종책임자였고 사실상 묵인하였기였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17] 그러나 이 주장의 시초는 가토 도모사부로였다. 호리 본인도 가토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18] 다만 쓰치야가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