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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에 뒤떨어진 군사 교리
우선 일본군의 군사교리 자체가 시대적으로 뒤떨어졌다. 외국의 경험을 이상한 결론으로 받아들이거나, 기존 교리를 발전, 향상시키지 않은 경우가 다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의 전차전 교리이다. 일본군의 전차는 1920 - 1930년대만 해도 중국대륙에서 전차도 대전차화기도 없는 국민혁명군이나 군벌들을 상대로 나름 활약하였다. 이 활약에 만족한 일본군은 전차는 소구경 대보병 화기를 탑재해서 보병지원용으로만 굴리면 된다는 수준에 머물렀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동 시기 다른 국가에도 이런 구식 사상에 찌든 군인이나 정치인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까지 일본은 제대로 된 전차전을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말이다.문제는 이 다음이다. 이런 구시대적인 일본군은 결국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전차전을 교리로 한 소련군 전차부대에 대패하였다. 전투의 막바지에는 사단 규모 제대가 전멸하는 수준의 참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를 감추려고만 했을 뿐, 패전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전차전 교리의 수정, 신형 전차의 개발, 지휘 능력 향상을 위한 간부 교육, 군수 보급 체계의 개선 등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장교들은 한직으로 좌천돼 버렸다. 소를 잃었다고 외양간을 스스로 헐어버린 것이다. 결국 일본군의 전차 운용 교리와 전차 수준은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1920, 1930년대 1차 세계대전의 수준에서 정체되고 만다.
게다가 시대의 변화를 알아채고 새로운 능력을 추가하기 위해 기술자가 노력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면, 기존에는 중시되었으나 해당 시점에서는 이미 쓸모가 없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의 성능이 안 나온다고 타박하여 결과적으로 물건을 더욱 개악하게 만드는 뻘짓도 자주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말아먹은 대표적인 사례가 A6M, 즉 제로의 후계기가 될 예정으로 나온 A7M 렛푸. 실제로 미군은 1942년부터 고성능의 통신장비에 힘입은 타치 위브와 함께 붐앤줌이 새로운 전투 전술 교리로 채택되면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데, A7M 렛푸의 경우 개발 자체는 붐앤줌에 맞춰서 개발했으나, 해군이 선회전도 할 수 있게 익면하중을 낮추라고 개발진에게 강요한 게 렛푸의 속도 성능이 개판이 된 주 원인이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도 한몫을 거하게 했다. 일본 해군이 A7M 렛푸에서 위와 같은 삽질을 하는 동안 일본 육군은 이런 낡은 교리에서 비교적 빠르게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육군항공대가 1942년부터 운용한 Ki-44는 익면하중이 200kg/m²을 넘기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늦게 나온 Ki-61도 익면하중이 173.5 kg/m² 로 가벼운 기체는 아니다. 그리고 Ki-84의 익면하중도 171.47 kg/m² 으로 크게 차이가 없다.
뿐만 아니라 야기-우다 안테나와 관련된 전파탐신 문제에 관해서도 적에게 전파를 쏜다는 것은 자기 위치를 적에게 알리는 꼴이며 견시병으로 적을 감지하게 하면 된다는, 봉화나 올리던 중세시대 시절의 논리를 들고 나와 전파탐신기의 채용조차 몇 년을 막았을 정도니.... 이로 인해 둘리틀 특공대의 보복을 겸해서 행해진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운명의 5분,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VT신관을 채택한 미군의 함상 대공포의 화망 앞에 칠면조 사냥을 당하는 등의 끔찍한 부수적 피해의 결과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2. 기술 및 자원의 높은 해외 의존도
불안정한 일본의 산업체계는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된다. 우선 미국과 영국 등 외국에서의 수입이 끊겼다.그나마 대전 초기에는 일본의 군수 생산과 물자 공급이 정상적으로 돌아간 편이지만, 이건 모두 전쟁 전에 구미, 특히 미국으로부터 기술이나 기계 등을 지원받았던 것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었다. 일본군이 그렇게 자랑하던 A6M을 예로 들면 '영국의 비행기 설계'를 베끼고 '미국의 공작기계'를 이용해, '미국의 철'과 '영국의 보크사이트, 희소금속'으로 만들어, '미국의 윤활유, 항공기용 가솔린'으로 가동시키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그뿐 아니라 제로의 프로펠러는 미국의 해밀턴사 라이선스 판을 그대로 쓰다가 나중에는 무단복제까지 한다. 그래서 나중에 A6M을 노획한 미군이 "뭐야 이거? 프로펠러가 해밀턴사 카피잖아?" 하고 황당해했을 정도니...
결국 전쟁이 지속될수록 그동안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산업의 각 분야가 마비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한 후에는 수입선을 독일로 돌리고자 했지만, 일본과 독일의 거리가 지나치게 먼 데다 독일 해군은 상당히 푸대접받고 있었고 전력 자체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고 서쪽에는 영국 해군이 틀어막고 있고 동쪽으로는 북극해의 빙하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극동의 일본까지 수송선을 보낼 수도 없었다. 거기에 독일은 이미 자국이 쓸 물자의 양도 빠듯했고 일본에게 모자란 물자를 퍼줘서 얻을 수 있을 만한 이득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어도 퍼주진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유럽 일대의 제공권, 제해권을 연합군이 꽉 잡고 있던 탓에 실제 미국에서의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는 거의 없었다.
결국 나중에 와서는 품질까지 대폭 하락하여 전쟁 초반만 해도 정상적이었던 A6M의 엔진같은데 사용하는 볼 베어링의 정밀도가 현대 일본의 파칭코 구슬 이하의 정밀도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3.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육군에서 잠수함을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굴렸다. 이유는 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궤멸된것을 거짓말하고 숨겨서 보급이 점점 힘들어져서 머리를 굴리다가 + 해군 꼴보기 싫어서, 못믿겠지만 진짜다.당시 일본군 육해군은 뿌리부터 달랐다. 그런데 이건 다른 나라 군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 뭐라고 하기 그렇지만, 일본군의 경우는 육군과 해군의 뿌리부터가 원수지간이라 싸워대기 일쑤인 사츠마 번(해군)과 초슈 번(육군)에서 비롯됐다. 이러다 보니, 육군에서 세운 작전을 해군이 공식적으로 알 수 있는 루트가 막혀 있었다. 반대로 돌려도 마찬가지. 대본영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현대의 합동참모본부 같은 군의 중심 개념이 아니라 덴노 앞에서 보고만 하는 것에 불과하다.[1]
그랬기에 서로가 상대방의 작전계획 수립, 진행이나, 무기 개발에 전혀 간섭을 받지 않는다. 전투 결과를 알아낼 때도 임팔 작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보듯이 상대방에 심은 스파이를 통해서 알아낼 정도였고, 가장 기본적인 무기인 총조차 같은 이름을 가진 총임에도 구경이 다른 탄을 쓴다. 이러면 무기 개발 노선부터가 육군용 무기, 해군용 무기로 이분화되면서 신무기의 개발이나, 기존 무기를 개량하기가 더더욱 까다로워진다.
항공기의 경우, 무작정 비판만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지상기지에서 운용하는 항공기와 함재기에 요구되는 성능이 다르므로 별도로 개발할 필요가 있고 이는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육상기를 함재기로 개수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 경우 함재기는 육상기에 필요없는 장비들이 추가적으로 장비되므로 육상기에 비해서 성능이 떨어지게 된다. 가령 영국이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개수한 슈퍼마린 시파이어를 스핏파이어와 비교할 경우 스핏파이어 V형은 최고속력이 595 km/h에 상승률이 16.5 m/s 이지만 이를 개수한 시파이어 II형은 최고속력이 550km/h에 상승률이 12.0 m/s에 그쳤다.[2] 게다가 영국 해군이 육상기를 함재기로 개수한 것은 자신들이 개발한 함재기가 하나같이 괴작이었기(페어리 풀머라던가...) 때문이지 그걸로 충분해서가 아니다. 이 때문에 미제 함재기 또한 대량으로 사용하였으며 나중에 영국 태평양 함대에서는 미국 함재기를 운용하는 비행대대가 영국 함재기를 운용하는 비행대대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3]
따라서 육상기와 동등한 성능을 얻고자 한다면, 단순히 개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니까 하야부사랑 제로의 카탈로그상 성능 차이가 별로 없었다는 건, 실제 전투하는 환경을 감안할 때 두 기체의 실성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쪽도 적어도 괜찮은 엔진이 만들어지면 공유하는 것 정도는 했다. 가령 나카지마 호마레같은 고출력 엔진의 경우에는 Ki-84 하야테와 N1K-J 시덴에서 모두 사용했다.[4] 뭐 시덴의 경우 설계는 카와니시에서 하고 생산은 나카지마와 카와니시에서 같이 했으므로 하야테나 시덴이나 사실상 같은 나카지마 생산품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했음에도 엔진마저 이름을 다르게 붙였다는 병크를 저지른다. 해군에서는 호마레 혹은 NK9라는 명칭으로 불렀고 육군에서는 하-45(ハ45)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문제는 지상기지에서만 운용할 수 있었던 항공기들의 경우이다. 해군은 지상기지에서만 운용할 수 있는 중형 폭격기들을 다수 운용하여 지상 및 대함 임무에 투입하였다. 물론 미 해군도 B-24 중(重)폭격기를 해군 사양으로 고친 PB4Y-2와 같은 기체를 운용하였고 냉전기 소련 해군 또한 대함 임무를 목적으로 다수의 중형폭격기를 지상기지에서 운용하였다.[5] 해군 입장에서는 주력함[6]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기에 항공기를 이용해서 적의 전력을 소모시킨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고 육군은 중(中) 혹은 중(重) 폭격기의 개발에 관심이 적은 상태였기에 해군에서 발주해서 이용하는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폭격기들이 활약하자 이를 시샘한 육군이 독자적으로 폭격기를 개발해버린다. 어차피 둘 다 지상기지에서 운용하는 만큼 그대로 가져다가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기체인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미 육군항공대가 1944년에야 실전 배치한 전략 폭격기 B-29조차 능가하는 수준의 폭격기를 해군에서 독자적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만 봐도 육해군의 대립이 어느 정도로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설령 기체를 완전히 만들고 실전 배치를 했다 쳐도 끝나지 않는데, 일본군 해군이 그런 체급의 폭격기를 실제로 만들었다고 해도 유지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부터 문제다. 당장 미 육군항공대의 B-29만 해도 엔진의 내구 수명이 워낙 짧아서 75시간마다 엔진 교환이라는 강수를 썼던 마당인데 말이다.
일본 육군 | Ki-21 97식 폭격기, Ki-49 100식 폭격기, Ki-67 4식 폭격기 |
일본 해군 | G2H 95식 폭격기, G3M 96식 폭격기, G4M, G5N 신잔, G6M, G7M 타이잔, G8N 렌잔, |
이러니 이 항공기들의 무장에 대해서도 말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탄환부터 시작한 모든 것을 육군과 해군이 따로 만들고 있었다는 거. 그것도 탄환 구경부터가 달라서 서로 호환도 안 된다! 당장 일본 육군의 Ki-43 하야부사의 7.7mm 기관총은 7.7x58mm 아리사카 탄을 사용하고 일본 해군의 A6M 레이센은 영국제 .303(7.7x56mm)탄을 쓴다. 심지어 이 둘의 기관총은 완전 다른 물건이다. 즉 육군용 탄환은 해군 총에 쓸 수 없다는 것이고 반대상황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쪽은 이미 극에 달한 대립으로 서로 다른 탄약을 쓰는 상황이라 별 수 없이 자기들 탄약에 맞게 호환되게 만들 수밖에 없기는 했다. 항공기용 무장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같은 나라 군대가 탄약 호환부터 안 된다는 게 막장인 것이다.
4. 호환성의 부재
일본의 당시 산업능력을 살펴보면 광학, 조선 등은 그나마 잘 나간 축이었고 항공 분야는 의외로 2차대전 참전국 중 대체로 중간은 했다. 그 외에 저기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중화학 공업 분야 상당수는 발전이 더뎠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차량 분야는 1930년대에 와서 겨우 다른 나라에 수출할 정도인 물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철강 기술력도 꽤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일본은 1930년대에 와서 중공업 위주 산업구조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그 수출 지역은 주로 중국, 만주 등 같은 동아시아권이었다.결국 자국의 중공업 기술력이 떨어지는 관계로 꽤 다양한 장비들을 외국에서 사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얘들 역시 보급이 혼선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중일전쟁으로 국부군 노획장비를 이용하면서 쓸데없이 병기 사용 폭이 다양해지고 태평양전쟁으로 미제도 써보게 되면서 호환성은 바닥이 되었다.
문제는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9일의 도쿄 대공습까지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의 효과가 미약해서 그 때까지 산업시설과 인력을 제대로 보전하면서 싸울 수 있었다는 엄청난 이점에서도 불구하고 수입하거나 노획한 기술력을 제대로 일본의 기술력 안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산업능력만 유지함으로서 파국이 닥쳤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문제를 일본이 제대로 된 규격 하나 없었다던가 숙련공을 징병해서 품질이 개판이 되었다는 식의 단편적인 이유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더 심각했다.
- 1. 이미 산업화와 더불어 규격화 이야기는 20세기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고 따라서 국제적으로나 선진 구미 국가들 상당수는 다들 나름대로의 규격 제도 정도는 갖춰놓고는 있었다.예시 이미 일본에서는 1919년에 일본표준규격(JES)를 제정한 바 있었다.예시예시
- 2. 숙련공 문제의 경우 사실 평소에는 일본도 숙련공 정도는 징병에서 유예를 하는 규정을 둔 바 있다. 오히려 품질 저하 문제는 첫째로, 원료가 저질이 된 것,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듬에 따라 공원들 중 미숙련공들의 비중이 훨씬 증가함에 따라 품질을 컨트롤하기 어려운 폐해가 커진 점 등에 기인한 점이 훨씬 크다. 또한 일본도 이런 쪽에서 경험자들은 주로 공병 분야에 배치했다.
- 3. 사실 대전 말에는 진짜로 숙련공, 고학력자도 병력이 부족해서 마구잡이로 징집했는데, 일본은 행정이 그리 철저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병력을 모으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빠져나가려면 구멍은 충분했고, 그러므로 숙련공을 마구잡이로 징집했다던가 아니면 그 폐해가 크다던가라는 말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
문제는 차라리 위에 언급한 제대로 된 규격이 없다거나 숙련공을 마구 징집했다던지 하는 소문이 사실인게 일본 제국에게는 더 나았다는 것이다. 소문대로라면 일본 산업계는 정상적이므로 규격이 없으면 규격을 만들면 되고 숙련공을 징집하지 않거나 산업현장으로 되돌려주면 바로 정상화되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래봤자 소용이 없는 일본 산업계의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더 사태가 심각하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패전 6개월 전에나 본격적으로 공습의 효과를 제대로 당하게 되므로 그 전까지는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할 일본 산업계가 전시 생산 좀 했다고 이상한 소문이 돌 지경이라는 소리는 애초부터 주먹구구식으로 대강 만들어서 최종 처리시에 숙련공이 감으로 대강 움직이게 최종 마무리만 직접 하고 물건을 납품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이래서는 규격이 있건 없건 의미가 없어지며 공장에 숙련자들이 모두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숙련자가 늘었다고 갑자기 생산품 품질이 하락하는 사태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례로 나카지마의 경우 대략 8배 이상 공원 수가 증가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미숙련공들 중에는 부상을 당했다든가 하는 이유로 여튼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예시, 예시. 하지만 이런 정도의 일은 2차대전 주요 참전국에서 모조리 벌어진 일인데 일본만 이런 상황이 생긴게 특이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2차대전 이전의 품질관리는 미국이건 어디건 검사자가 대량생산되는 작품 중 일부를 골라 표본으로 삼아 체크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나마도 그 영미권도 걸음마 단계에 있거나 아니면 품질 관리에 대한 인식이 그리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고 하고 그 사례로 어뢰 스캔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번지수가 틀린 이야기다.
어뢰 스캔들의 경우에는 품질관리가 문제가 아니라 설계문제이며 전간기에 개판같은 어뢰를 만든 기술개발부서와 관계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 안하고 똥고집을 부려서 일이 커진 것이며 진짜로 품질관리가 문제였다면 개선된 어뢰도 모조리 일본 수준으로 불량품 투성이라서 미국 잠수함이고 미국 뇌격기고 간에 어뢰를 사용하지 않아야 정상인 것이며 공적도 종전까지 못세워야 정상인데 실제는 전혀 달랐다. 애초에 미국이 그렇게 품질관리가 안되는 국가였으면 M4 셔먼이나 M1911이 다른 회사가 생산한 부품도 호환되는 게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치하의 경우만 봐도 전쟁 말기로 가면 미쓰비시와 히다치의 부품이 같은 치하인데도 불구하고 호환되지 않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였다. Ki-84 하야테는 한술 더 떠서 생산한 기체마다 날개 길이가 서로 미묘하게 다를 정도로 조악해서 현지 부대의 정비병들이 이런 조악한 하야테 여러 대를 분해해서 그나마 좋은 부속을 골라서 그나마 멀쩡한 1대의 하야테를 만들거나 다른 기체를 정비하는 계 일과였을 실정이었다.
사실 이러한 기술적 문제는 일본 자체가 타 공업국보다 산업화가 늦었음은 물론이고 상술했듯 중공업 분야의 발전이 상당히 느렸던 탓에 충분한 숫자의 숙련공과 기술자를 양성할 인프라의 형성이 늦었을 뿐더러 그 규모도 부족했기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여성 등의 비숙련 인원을 공장 등에 투입한건 다른 국가들도 비슷했으나 미국의 경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경험에서도 볼 수 있듯 고장난 자동차를 젊은 여성이 수리해낼 정도의 기본적인 정비능력을 가질 정도로 차량 등의 기계 보급률이 높고 기술 교육에 대한 인프라가 잘 짜여져 있던만큼 공장에 투입되더라도 숙련공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느정도 1인분은 해내는데 반해 일본의 경우 비숙련공이란 그야말로 살면서 렌치나 스패너 한번 잡을 일 없었던 인원들이었다.[8]
이게 더 큰 문제가 된 이유는 숙련공이 비숙련공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최소한 중간급으로 육성하는 시스템이 없다시피 하고 도입할 여건도 안된다는 것에 있다. 타국도 무자격자가 비숙련공으로 들어오는 사례는 다수 있지만 이들을 어떻게든 훈련시켜서 중간이라도 가게 만드는 데 일본은 수입한 기계가 낡아가면서 기존 라인에서 나오는 생산품이 숙련공이 수정하기에도 벅찰 수준으로 문제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비숙련공을 가르칠 시간도 없고 가르쳐봤자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숙련공도 약간은 엉뚱한 곳으로 징집당하긴 했다.
따라서 호환성이 부족하다는 문제는 소문처럼 단순한 몇가지 요인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산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5. 기술적 스펙과 다른 실전 성능
기술 부족과 공업능력 부족은 일본군 무기의 스펙과 실제 성능의 차이를 불렀다. 애초에 개발 당시부터 일본의 상황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선진국 수준의 무기 스펙을 강요하던 높으신 분 때문에 기술자들이 쓰지 말아야 할 꼼수를 써서 실제 성능은 한참 아래지만 높으신 분이 요구한 스펙만 맞추는 경우가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공업능력 부족으로 인해 기술자가 공들여서 만든 시제품과 양산품의 차이가 커진 것이다.대표적인 예로 치하의 방어력은 스펙상으로는 분명히 37mm 대전차포의 포탄을 막아내는 수준이었지만, 현실에선 미군 경전차의 37mm 전차포는 물론 12.7mm M2 중기관총으로도 개박살나는 일이 속출했다. 덕분에 일본군은 자신들이 쓰는 37mm 대전차포의 관통력이 스펙과 달리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속 선회전과 기동력만을 믿고 속도, 공격력, 방어력, 내구성 등의 모든 면을 포기한 희대의 날아다니는 관짝 A6M을 비롯해 전쟁 말기에 생산된 Ki-84 하야테 같은 물건은 더더욱 골때리게도 맨 처음 제작된 시제기(프로토타입)가 정식 양산형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는 괴상한 결과를 내며 절정에 다다랐다. 그래서 에이스 파일럿들은 정 타고 싶으면 그나마 성능이 보장되는 초기 생산형을 타거나 아예 하야부사같은 구식 기종을 타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초기형조차 실패였던 기종도 없지 않다. 저 제로의 직계 후속기로 나온 A7M 렛푸가 그것.
이런 사태는 개선되기 보다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전쟁 말기의 일본군 무기들은 자원 수급 문제, 숙련공 부족 문제, 미군의 폭격 등으로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없었기에 스펙과 실제 성능에 차이가 점점 늘어나기만 했던 것이다.
6. 프로토타입과 양산형의 괴리
일본 애니에서 흔히 보이는 프로토타입에 대한 미화도 이 당시의 영향이라는 설도 있다. 프로토타입은 실력이 좋은 기술자들이 수제로 정밀하게 시간 들여서 만드니 어찌어찌 해서 쓸만하게 만들었는데 정작 양산에 들어가면 빈약한 공업 생산력 때문에 영 못 쓸 물건이 튀어 나오니까. 실제로 그런 예가 바로 일본 육군의 Ki-84 하야테다. 물론 일본 해군기인 N1K-J 시덴도 거기서 거기였다. 하야테는 양산 과정에서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비행중 엔진이 멈춰버리는 등의 일이 많아 전장에서는 구형인 하야부사만도 못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제대로 만들어져서 정상적으로 관리만 받는다면 공랭식 기체 중에서는 우수한 축에 들어가는 물건이다. 적어도 항공 기술에 있어서는 독, 미, 영 같은 국가들보다는 다소 처지더라도 동시기 소련은 확실하게 앞섰다. 하지만 대전 후반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인한 공업능력 상실은 그 얄구진 빛마저 바래게 만들었다.예시그럼 애니메이션처럼 프로토타입을 실전에 투입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실력 있는 숙련 기술자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만 가지고 병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대로 전황을 뒤집는 것은 엔터프라이즈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이 경우도 대량 생산이 안되는 함선인데다, 항공모함이어서 공격력도 공격력이지만, 교전을 치르더라도 포격전처럼 이기더라도 아군도 손상을 입는 경우가 아니고 카미카제라든지, 어뢰 같은 배 자체를 노린 공격이 아니고는 어지간하면 함재기 피해만 있지 본체인 항모는 방어라인이 뚫려서 적 항공기에게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직접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한 척으로 전황을 뒤집는 것이 가능했지만 전투기처럼 몇십 ~ 몇백 기가 쏟아져 나오는 종류라면 몇 대로 전황을 뒤집는 건 슈팅 게임 주인공 급 기체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파일럿이 적기 5대만 격추해도 에이스 소리를 듣듯, 전투기도 교전비가 5:1이면 이미 넘사벽이다.
게다가 일본의 적인 미국은 끝판왕이라서 함선마저 대량 생산하는 것이 가능했다. 앞서 말한 엔터프라이즈도 실은 당시 미 해군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의 2번함인 양산형이고, 호위항공모함은 분명히 군함인데도 100척 넘게 찍어냈다. 그리고 그 100척 넘는 호위항공모함 중 무려 50척(!)이 한 함급에서 나왔다. 심지어 엔터프라이즈가 속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의 후속 함급인 에식스급 항공모함은 분명히 정규 항공모함인데도 일본군의 항공모함이란 항공모함을 다 털어도 성능, 숫자 모두 압도해버린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개전 초부터 항복할 때까지 보유한 경항공모함, 개조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체 항공모함 척 수가 26척인데, 대전기의 미국이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의 후속 함급으로 급조한 에식스급 항공모함만 따진 척 수가 24척이며 원래 에식스급 항공모함은 계획 당시 32척 규모로 건조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오로지 물자 수송을 위해 닥치는대로 마구 만들어서 마구 띄워보낸 리버티쉽에 이르러선...
설상가상으로 미군의 양산형 모델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야라레메카 양산형과 천지 차이가 났다. 일본군의 막강한 프로토타입보다 미군의 양산 모델이 더 강하니 버틸 수가 없다! 대표적인 예는 일본군의 최신예 프로토타입 구축함 시마카제로, 동시기에 미군이 58척을 찍어낸 알렌 M. 섬너급 구축함보다 속도와 뇌격전 능력은 앞서지만 대잠/대공 성능이 크게 뒤쳐졌다. 그런데 2차 대전에서 구축함에게 요구된 건 우수한 대잠/대공 성능이고, 뇌격전에서도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인 태평양의 특성상 속력보다는 항속거리가 조금 더 중요하므로 시마카제 정도로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빠를 필요는 없었다. 전장이 지중해, 발트해, 흑해같이 상대적으로 작고 거칠며 주변에 항구가 많은 바다에서는 속력이 빠르면 항구에 정박하고 있더라도 빠르게 전장으로 갈 수 있으므로 유용했겠지만 시마카제는 태평양에서 싸워야 할 불운까지 겹쳤다. 결국 시마카제는 일본군의 멍청한 운용까지 더해지면서 크게 활약하지도 못하고 전투로 함체가 상당부분 파손된 상태로 무리하다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보일러가 폭발하면서 폭침했다.
7. 기술 실증력의 부재
기술력 부재 때문에 우수한 설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서구 국가의 최신기술을 도입해서 설계도에 반영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현장에서 해당 기술을 살릴 능력이 없으므로 설계도를 제대로 그려도 있으나 마나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이를 불쌍히 여긴 독일군이 자국의 우수한 무기 설계도를 보내주었지만, 당시 일본의 열악한 공업 생산 능력으로 인해 그렇게 카피한 무기조차 원본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군이 흡착지뢰의 설계도를 보내줬더니, 자석과 성형작약탄, 심지어 수류탄에 들어가는 지연신관도 제대로 못 만드는 바람에 나온 자돌폭뢰가 있다. 물론 2차 세계대전때 독일군 화기가 마냥 우수한 건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돌격소총 StG44이나 전기톱 소리를 들은 MG42, 명작 기관단총 MP40, MP38, 루거/발터 P38, 발터 PP계열 권총 같은 역작들도 많았지만 기관총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반자동 소총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거나 하는 나사빠진 면도 있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건함 기술이 크게 뒤떨어지게 된 관계로 해상무기 분야에선 확실하게 실력이 더 뛰어났던 일본에게 기술 제휴를 받아오기도 했다.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참조
이건 미군 무기를 베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설계도는 없어도 노획품은 있으니까 맨땅에 헤딩할 일은 없지만, M1 개런드조차 제대로 카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복잡한 병기를 베낄 수는 없다. 독일군의 반자동 화기인 G43도 미국의 M1 개런드보다 훨씬 복잡하고 성능도 영 좋지 않았으나, 독일군은 넘사벽 StG44를 만들었고 일본군엔 그런 거 없다.
심지어 MG 151은 그냥 손도 못댔다. 히엔에 달아보고 일본제 기관포와는 차원이 다른 그 화력과 신뢰성에 감탄하여 복제하고자 했으나 손도 댈 수 없었다. 물론 MG 151은 미국 역시 복제하려다 그놈의 미국 단위계를 사용하는 덕분에 인치로 수치 변경하는 등의 삽질로 작동 불량이 빈발해서 골머리를 앓은 복잡한 물건이긴 하지만 손조차도 댈 수 없던 것보다야 훨씬 사정이 나았던 편. 결국 초기에 입수한 800정을 400대에 장착했다. 주로 Ki-61에 주로 사용했는데 추락한 기체에 달린 기관포까지 회수해서 쓸 정도로 애지중지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수량이 모자라므로 이후 생산 분량은 자국산의 열악한 12.7mm 기관총으로 때우거나 그나마 쓸만한 Ho-5 기관포를 달아줬다.
8. 과도한 기능추가
일본의 생산력이 다른 열강에 비해 딸림에도 불구하고 생산품에 과도한 기능추가를 해서 생산성을 더 많이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99식 소총
일본군의 주력 소총. 극초기형에는 일각대와 대공용 조준기가 붙어있었는데, 일본군도 그게 쓸데없이 고퀄리티임을 알았기에 중기형부터는 모두 사라졌다.
- 96/99식 경기관총
이 기관총에 쓰는 30발짜리 탄창에는 잔탄 카운터가 붙어 있었다. 탄약 아껴쓰라고 넣은 기능 같은데, 이러면 탄창 가격이 비싸진다. 그보다 기관총용 30발짜리 탄창에 그런 기능이 굳이 필요한가? 기관총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면 이건 완벽한 바보 짓이다. 이게 왜 바보 짓인지 알기 쉽게 해설하면, 소총(자동/반자동/볼트액션같은 작동방식 구분 없이.)이나 저격총 같은 총은 격발할 때마다 한 발씩 나가는 총이므로 탄창이 있는 총이라도 잔탄 카운터가 붙는 게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관총은 목표부터가 소총과는 달라서 연발로 제압사격을 하면서 일정 범위를 화력으로 갈아버리는 것을 주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잔탄을 신경 쓸 여유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래에 있는 100식 기관단총의 장거리 조준기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 기관총에는 착검장치가 있어서, 51cm짜리 군도를 총검이랍시고 달아놨다. 최소 10kg에 달하는 기관총으로 총검술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기관총 운용 병력에게 기관총으로 총검술 훈련을 시켰다.
게다가 중일전쟁때 이 기관총에 옵션으로 이동형 추가 방탄장갑도 딸려 나왔는데 문제는 전차 대용으로 1인용으로 만들었다는 게 가장 가벼운 게 122kg, 심하면 153kg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자랑했다. 그래서 중일전쟁때에도 많이 사용하지 않았고 결국 태평양 전쟁이 개전된 이후에는 사용을 중지했다.
- 98식 전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채용된 장교용의 일본군도인데,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생산해서 칼날의 질은 떨어졌는데, 금도금된 도장구, 칼집 장식 등은 쓸데없이 화려했다. 반면에 내구력은 크게 떨어져서, 화려한 장식이 부서지거나 칼날이 손잡이로부터 분리되어 날아가거나 칼날이 휘어지는 등의 문제도 있었다. 나중에는 공장에서 만들어져 생산성과 품질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양산형 칼날로 바뀌지만, 하몬 같은 쓸데없는 장식을 좋아하는 일본군 장교들은 만철도 같은 공장제 칼날을 하품 취급했다.
- 100식 기관단총
기관단총 주제에 ZK-383처럼 양각대와 장거리 조준기가 붙어있다. 기관단총의 짧은 유효사거리를 감안하면 이런 물건들을 활용할 일이 전혀 없다. 이런 거 붙이느라 생산성만 떨어졌다.
- 특 2식 내화정 카미
일본군 해군의 수륙양용전차인 카미는 45cm 경어뢰 2발을 장착할 수 있지만, 당연히 수륙양용전차가 실전에서 어뢰를 발사할 일은 없었고 양산 계획에 차질만 초래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기에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같은 대규모 상륙 작전에서 운용한 상륙지원용 상륙장갑차들도 무장은 보병지원용 기관총이나 소구경 포 정도였지 어뢰 같은 걸 달지는 않았다. 상륙장갑차 항목과 LVT항목을 참고할 것.
- 남부 권총
이 권총이 시제품으로 나올 때는 권총이면서 군도로도 쓸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권총의 시제품에는 칼날을 달 수 있었다고.
물론 이런 것에 대해 일본에서도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99식 소총의 대공조준기에 대해서 소총만으로 항공기를 상대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던지, 적이 항공세력이 막강한 미국이라던지, 볼트액션 소총으로 대공사격하는 것은 거의 모든 나라의 군대교리에 있다던지, 일본은 대공포가 부족하다던지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수백만 정을 양산해서 보병 1명마다 1정씩 지급하는 것도 모자라서 예비품을 가득 만들어놓고 전장에서 손실이 생길때마다 새로 지급해줘야 하는 제식 소총에다가 겉으로는 쇠막대기 같아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밀한 가공이 필요한 대공조준기 같은 것을 추가로 다는 것 자체가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생산시간과 비용을 많이 늘리는 뻘짓에 불과하다. 당시의 일본도 그걸 알아서 99식 소총의 중기형부터 그런 부차적인 장비들을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볼트액션 소총 따위로 대공사격을 하는 것 자체가 교리에만 있을 뿐 실제로는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이나 유리한 상황에서 대공화기를 보조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런 경우라도 육상용 기계식 조준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대공포가 없으면 대공화기를 늘려야지 소총에다가 대공조준기 같은 걸 달아서 대처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고 당시의 일본도 그런 바보같은 생각은 중간에 포기한다.
결론적으로 쓸데없이 고퀄리티를 추구해서 개발했음에도, 완성품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저퀄리티인 물건들이 나온 것이다.
9. 복잡한 운용법
예를 들어 A6M은 조종실력이 뛰어난 천재 조종사만 그 성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었다. 다른 나라 기술자들이 AK-47이나 DP-28과 같이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반면, 일본 기술자들은 천재들만 쓸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데 열중한 것이다. 오늘날 일본 애니 등지에서 흔히 나오곤 하는 특정 인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쓸 수 없는 무기[9]라는 클리셰는 이런 역사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이런 취지의 발언을 독일의 항공기 기술자가 일본군 에이스 파일럿과의 인터뷰에서 한 적이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게다가 실제 일본군의 무기는 일본 애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세계 최고 성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성능을 뽑아내기 위해 천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 기술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성능도 시원찮은 녀석이 조종마저 어렵다라는 최악의 조건인 것. 천재 운운도 대단한 게 아니라 단순히 사용자가 천재쯤은 되어야 떨어지는 무기 성능을 그나마 간신히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뿐이다(...).
실제로 사카이 사부로가 자서전에서 일본이 제로의 후계기로 만든 시덴, 하야테 등에 대해 평가하면서 '성능은 좋다. 근데 조종성이 나쁘다. 그것 때문에 죽은 파일럿들이 꽤 있다'고 악평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로의 진짜 후계기로 만들어진 A7M 렛푸의 경우에는 테스트 파일럿으로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대파시켰던 바 있고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 출신이었던 시가 요시오가 참여하고 나서 "이따위 물건을 만들려는 놈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는 전술했듯이 군부가 익면하중을 제로처럼(!) 낮추라고 해서 무리하게 낮췄기 때문이다. 즉, 렛푸도 제로마냥 제1차 세계대전기의 항공전 교리를 깔고 제작한 것.
인간을 무시하는 설계도 난이도 증가에 한몫했는데, 초창기 57mm 포 치하는 바주카포도 아니고 포수가 직접 무거운 대포가 실린 포가를 한쪽 어깨로 받친 상태에서 인력으로만 밀고 당겨야 조준이 된다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이러한 기반에는 결국 유럽이나 미국 등의 전차를 널리 쓰는 해외 국가와의 교류가 부재했기 때문에 결국 구시대적인 설계를 계속 고집하는 것이었다. 결국 치하의 신포탑형에서 고저 장치가 추가되며 그나마 나아졌다.
일본군의 군함 역시 야마토급 전함을 포함한 일부 전함을 제외하고는 죄다 편의시설이 매우 부족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우리가 타는 건 호텔쉽이군"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것은 만들다가 개장되면서 함종이 바뀐 군함 역시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아마기급 순양전함이었던 아카기와 카가급 전함이었다가 항공모함으로 개장된 카가. 이걸 감안하면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이었다가 항공모함으로 개장된 시나노도 급조하느라고 공식적으로 전투에 당장 필요없는 것을 모조리 빼라고 해서 시설이 열악했다. 참고로 영국 해군의 군함들도 거주성이 좋다고는 못하는 배들인데 그 영국 해군이 거주성으로 비웃을 정도면 얼마나 열악한 거주환경이었겠는가.
신뢰성 부족도 난이도 상승에 한몫 단단히 했다. 예를 들어 94식 권총은 구조상 문제로 인해 옆구리를 치면 저절로 발포된다. 10식 파쇄 수류탄을 던지려면 안전핀을 뺀 후에 신관부를 철모에 때리고 던져야 하는 골때리는 사용법을 따라야 하며, 그나마도 신관이 불량품이면 수류탄을 철모에 때리는 순간 자폭한다.
10. 복잡한 사용/정비 설명서
일본군의 총기 사용 설명서. 8발 들이 탄창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남부 권총의 설명서로 보인다. |
한자가 참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명치유신 이래 행해진 의무적 초등교육의 초점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하고 이들을 필요에 따라 곧바로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사용자가 충분히 한자와 가나를 읽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까닭이다.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1930년대 말부터 황국 신민화 교육이 실시되었다고 나와 있지만, 일본에는 이미 명치유신기부터 자국의 국민과 군인을 언제든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세뇌하는 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단지 그 강도가 1930년대 말에 비해서는 훨씬 약했을 뿐이다. 명치유신 당시에는 일본의 국민들에게만 세뇌를 하면 됐지만, 1910년 이후 한반도가 식민지가 되기 때문이다. 한반도 사람들을 일본의 노예로 삼기 위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인 창씨개명도 그 와중에 나온 것이다. 일본사를 전공하거나, 관련 내용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 하고 떠오를 만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육칙어와 군인칙유.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한자가 일본의 국자라고 해도 당시의 초등교육 이수자가 한자 혼용문을 술술 읽을 거라는 발상 자체가 크나큰 착오다. 상기의 의무 시행했다는 초등교육은 지금의 초등학교 과정을 말한다. 그 기간동안 자주 쓰이는 몇 백 자라면 모를까, 그 많은 수천 자의 한자를 다 외울 수는 없다. 당시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교육을 받은 현대 일본 성인들조차도 간혹 어떤 한자를 보고 뜻이 생각이 안 나거나 무슨 글자인지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이건 문필을 업으로 삼는 작가조차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이 당시의 조악한 초등교육을 받은 당시의 사병들이 한자가 잔뜩 섞인 저 저 설명서를 과연 얼마나 술술 읽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자국민의 문해력을 알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간과한 채, '학교 나온 놈들이 이것도 못 읽어?'라는 심보로 저렇게 한자를 잔뜩 섞어놨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어리석다.
한술 더 떠서 저 설명서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쓰여 있다. 일본인이라 해도 구어체는 잘 구사하면서, 문어체는 아예 읽는 방법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가 라디오로 발표한 항복선언, 일명 옥음방송도 일본어 문어체자로 구성된 항복선언서다 보니 일반인들이 이해를 못할까 싶어서 방송사에서 구어체로 통역을 했을 정도다.
이러한 문제를 일본도 모르는 게 아니라는게 더 큰 문제다. 패전시 항복 선언문을 작성할 때에는 원래 전쟁을 끝내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뜻으로 '의명'(依命)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육군 측에서 이런 어려운 단어를 국민들이 어떻게 아냐며 그냥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는 뜻의 '시운'(時云)으로 바꾸자고 박박 우겼다. 그리고 조만간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접한 해군 측의 통 큰 결단으로 수용한 것을 보면 어렵게 글을 쓰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일본 수뇌부가 다 아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령 저걸 기똥차게 다 읽는다고 해도 문제인 것이, 이 문서를 보시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그림도 없이 오로지 글자로만 어려운 내용만 빼곡하게 채워넣으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간단한 예시로 옛날 MS-DOS의 프로그램 실행시킬 때마다 일일이 CD명령어로 디렉토리를 옮겨다니며 명령어를 때려넣는 방식이 쉬울까, 오늘날 Windows의 간단한 아이콘 클릭이 쉬울까를 생각하면 된다. 안 그래도 일본군 무기는 사용하기 힘든 걸로 악명이 높은데, 설명서까지 어렵게 써 놨으니 결과적으로 숙달되지 못한 병사들이 많이 생기고 이와 연계되어 조종 난이도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한편 일본군의 적이었던 미군의 설명서에는 반대로 글자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었고 대신 그림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당시 노획한 미군의 무기 사용 설명서를 들여다 본 일본군은 '미군들은 죄다 바보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던 것. 일본군이 생각했던대로 미군이 죄다 바보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바보도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서 그 바보들이 전쟁을 이길 수 있게 했다는 점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미 2차대전 때 영국군은 스텐 기관단총 매뉴얼을 만화로 작성했고, 미군도 1960년대 베트남 전쟁때 M16을 사용하는 병사를 위해서 만화로 매뉴얼을 만들었다. 만화 본 영상은 2차대전당시 미군이 병사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영상중 하나인 PRIVATE SNAFU(situation normal all fucked up)라는 만화영화다. 여담으로 위 영상은 편지를 쓸 때는 반드시 자체 검열을 하고 검열관에게 보여준 다음 부치라는 내용. 그 외에도 재미있고 유익한 영상이 많이 있으니 유튜브에서 private snafu 라고 검색해보자.
이건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티거에 모에선을 쐬서 만든 엘비라 티거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이 여성과 친해지는 방법을 통해 티거 전차병들이 티거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티거 조종 지침서 '티거 피벨'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보는 입장에서는 만화 쪽이 전공서적보다 보기 편하지 않겠는가.
소련도 경직된 사회분위기 상 만화 매뉴얼까지는 힘들었지만 바보도 쓸 수 있는 무기 콘셉트에 맞게 삽화가 상당량 들어간 매뉴얼을 사용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됐듯이 적국인 독일인들도 놀랄 정도로 단순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바보들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고려한 결과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은 경우 풍부한 삽화를 곁들인 병사용 현지 민사 대응법 책자 같은 걸 지급했다.
소련의 군사학은 마르크스적 유물론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향을 받아 반드시 물량 우위를 갖추도록 노력할 것을 모든 전략 전술에 전제하고 있다. 특히 공산주의에서 잠재적 아군으로 가정하는 대상은 못 배운 노동자들과 소작농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신속히 혁명의 전위대로 무장시킬 수 있도록 무기 체계 설계시 성능은 좀 낮더라도 생산성과 신뢰성, 교육 용이성을 중점에 둔다. 그래서 공산권 개인 장비는 사실 교범까지도 필요없이 3시간을 넘기지 못하는 구두교육만으로도 어지간히 다룰 수 있는 편이다.
이 설명서만 봐도 일본이 우월한 민족이라서 복잡한 무기와 설명서를 터득할 수 있으며 적군은 멍청해서 얻어봤자 사용할 수 없다는 망상을 가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앞서 언급했다시피 요즘 나오는 일본 애니의 클리셰인 '너무 우월해서 천재 정도 아니면 다루지도 못하는 무기' 또한 괜히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무기 메뉴얼은 시험에 나올 책이 아니다. 포레스트 검프도 충분히 자기 무기는 다룰 수 있을 만큼 쉽고 간편하게 설명한 덕분에 무기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한 미군과 글을 너무 어렵게 쓴 나머지 설명서 해독조차 힘든 일본군. 실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한 것이다. 사회 구성원을 닥치는 대로 징집한 군대에서는 아무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똑똑한 놈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상당히 어리어리한 인간도 끼어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넌 이런 것도 못 읽지? 읽고도 모르냐!"하는 부심을 충족시키는 것 보다는, "그 어떤 바보도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이건 평시의 부대 안에서도 말할 필요가 없는 문제인데, 전시의 전쟁터 한가운데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1500년대 사람인 척계광도 원앙진을 병사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림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알수 있듯, 이러한 알아듣기 쉬운 간단한 설명서는 과거의 사람들도 중요성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과거 사람들도 저지르지 않았던 실책을 저질렀던 셈이니 이는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마브러브 얼터너티브에서 총기 분해 조립의 제한시간이 15분으로 과장된 것도 이러한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현 우리나라 국군에서 K2 분해 조립을 하는 데 주는 시간은 최대 1분 20초에서 1분 30초 정도고 손에 익으면 1분내에서 1분대도 가능하다.
11. 정비병과 부족
무기는 만들었다고 전부가 아니다. 유지 보수 역시 중요하다. 무기로서의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량이라든가, 후계기 개발 및 선정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정비다. 미국은 미국에 방문한 일본의 한 무관이 몰다 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평범한 소녀가 뚝딱 고쳐내던 것을 보고 놀라워했을 정도였다.그런데 일본군은 이걸 게을리 했다. 일례로 일본군 항공대에서 항공기 정비요원은 조종사 교육 도중 조종사 후보생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시켰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양성되는 인원의 숫자는 매우 한정되었고 잘 늘어나지도 않은데다가 애초에 이런 사람들은 개전 직전에 다시 조종사 교육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전시에 파일럿 손실이 얼마나 심한지는 이미 알려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일본군은 그냥 전쟁을 시작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과 함께 대량의 정비병을 상실하고, 전황의 악화로 육상 기지를 포기하면서 조종사만 자기 항공기를 몰고 탈출하고 정비병들은 현지에서 알보병으로 징집해서 전투하다가 전사하게 만들면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숙련된 정비병이 매우 부족하게 된다. 결국 미군의 진격으로 전투없이 고립된 지역에서 수십명 정도의 정비병을 잠수함으로 다시 일본 본토로 빼내온게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보충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정비병 공급도 문제가 되는데 앞서 언급한 전시 생산품의 질적 하락으로 인한 추가적인 업무 부담이 가해진 것도 큰 문제다. 정상적이라면 납품된 항공기를 분해해서 쓸만한 부속을 골라서 다시 재조립해서 그나마 쓸만한 항공기로 만드는 삽질을 하면 안되는데, 워낙 납품된 항공기 품질이 개판이라서 이렇게 안하면 안되므로 정비병들이 개고생을 했다.
부품의 호환성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점점 개판으로 돌아가서 같은 기종이라도 타사의 부품은 호환되지 않으므로 정비병이 해당 회사와 긴밀하게 연락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부품 부족으로 정비를 못하는 사태가 터진다. D4Y 스이세이의 경우 제131항공대(통칭 '후요 부대')는 미노베 타다시 소좌의 지휘아래 제조사와의 협력으로 가동률을 80% 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사실 이게 정상적인 게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제조사가 알아서 잘 납품하고 부품공급 잘해야 할 사항을 부대 지휘관이 직접 제조사와 협력관계를 맺어야만 된다는 거 자체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일반 부대는 부품이고 가동률이고 개판이라는 소리가 된다는 것이니까.
조종사와 정비병간에 정비측면에서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한 것도 큰 문제다. 조종사 훈련을 받으며 보통 장교로 임관시키는 것이 타국의 공통적인 상황인데 일본만 조종사의 계급은 조종사 지원 전의 계급으로 묶고 진급에도 소태같이 군다. 그에 반해 정비병들은 계급이 차차 오르니, 나중에는 조종사 후보생에서 탈락해서 정비병이 된 사람이 같은 비행학교 출신인 조종사보다 계급이 더 높아지는 사태도 나온다. 즉 같은 비행학교에서 공부했고 조종사 탈락한 한쪽에게 조종사가 자기 항공기를 정비해달라고 할 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도 터지는 것이다.
결국 정비분야에서도 여러가지 각종 난관을 만들어놓아서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지 않으니 그나마 있는 성능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게 된다.
12. 동맹국의 무기 사용
자국 무기가 엉망이고 적군 무기를 노획하기도 힘들다면 동맹국의 무기를 지원받아서 쓴다는 방법이 있다. 이탈리아군의 무기야 일본군보다 전체적으로 나을 것도 없지만, 독일군의 무기는 매우 성능이 좋으니까 수입할 만한 가치가 있다.그런데 이탈리아든 독일이든 간에 이 나라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다. 거기까지 가려면 인도양이나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대서양의 제해권은 연합군에게 있다. 당연히 보통 수송선을 타고 가면 죽으니까 크고 아름다운 잠수함을 타고 가야 하는데, 그런 대형 수송 잠수함은 연합군에 비해 비교적 잠수함이 대형함이었던 일본에도 몇 척밖에 없다. 육로도 마찬가지로, 독일과 일본 사이에는 소련이 버티고 있다. 중국 쪽으로 가도 소련의 남쪽 영토(현 키르기스스탄 및 타지키스탄)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 가로막힌다. 이래서는 수입해오는 무기의 양이 극단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으며, 예비 부품을 조달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독일에서 잠수함을 통해서 수백 개 정도인 대량으로 입수한 무기들은 따로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소중한 취급을 받고 정성 들여서 손질하면서 오랫동안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런 무기를 지급받은 부대는 정예부대로 평가받기 때문에 나중에 가면 독일제 무기 = 일본 정예병의 무기라는 요상한 법칙까지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후세의 소설에서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데, 일례로 가공전기에 등장하는 "마우저포"라는 물건은 MG 151 20mm 기관포로 독일에서 생산하여 잠수함을 이용해 들여온 무기라서, 설계부터 생산까지 일본의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미화물에 당당히 등장시키는 구상 자체가 웃긴 일인데, 그걸 작가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러나 일본의 기술력으로는 부품 생산/수급 자체가 힘드니 전황에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오래 쓸 수도 없었다. 그나마 이런 독일제 무기도 사용하기 아깝다며 일본 본토에서 썩히다가(또는 미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나중에 일본이 패망한 뒤 진주한 미 군정에서 득템했다며 다 가져가버렸다.덤으로 큰 무기를 수송하기도 어렵다. 티거 전차를 구입해놓고도 수송이 안 돼서 못 가져온 적이 있을 지경이다. 게다가 이미 대금까지 지불해버린 걸 또 환불해달라고 하기도 뭐한지라 독일에게 양도했고, 이 일본군 소속 티거는 독일군이 사용하다 소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독일군은 자기들이 쓸 무기도 모자라는 상태였다.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벌인 시기에는 이미 독소전이 한창이었고, 일본군이 무기가 절실히 필요해졌던 태평양전쟁 후반부에는 이미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과 싸우는 법을 익힌 소련군의 진격에 나날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즉, 일본에 무기를 보내줄 정도로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 만성적인 무기 부족으로 인해 생긴 촌극도 있을 지경. 그럼에도 독일은 동맹국을 챙겨주기 위해 '알아서 베끼라고' 여러가지 기계류 모델 및 샘플, 설계도를 잠수함으로 보내주었는데, 일본군엔 그걸 복제할 기술력이 없었다. 그에 반해 연합군 측의 미군은 M4 셔먼을 어마어마하게 만들어서 동맹국 군에 증여도 할 정도였다. 심지어 대전기의 소련도 셔먼을 랜드리스 해서 쓸 정도였다!
13. 가격
위와 같은 병크는 당연히 가격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가격대 성능비가 진짜로 좋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인해 안 그래도 성능도 안 좋은 물건을 소량만 보유하게 되는 막장사태가 일어났다. 이렇게 되니 규모의 경제가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가격도 덩달아 폭등하게 된다.예를 들어 일본군의 94식 이스즈 6륜 트럭은 똑같은 성능의 민간용에 비해 3배 비쌌다. 게다가 해당 트럭의 성능은 일본군 스스로도 욕이 나올 정도로 폐급이었다. 이는 일본군의 후예인 일본 자위대에도 고스란히 전승된다. 실제로 일본 자위대에서 운영하는 73식 시리즈 중형, 대형 트럭들의 평가는 엄청나게 안 좋은데도 가격은 비슷한 체급의 민수 트럭보다 더 비싸서 자위관들 사이에서 이걸 퇴역시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업체-자위대간의 유착이라고 할 정도. 참고로 중형 트럭은 도요타와 히노가 생산하며 대형 트럭은 94식을 만든 이스즈에서 만들었다.
위에서도 언급된 상륙 전차 특 2식 내화정 카미는 상륙전 시에 포격지원을 우선으로 해야 할 상륙전차에 상륙 지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뢰 운용을 위한 부품들을 덕지덕지 붙이느라 차량 성능과 가격에 악영향을 준 경우다. 상륙전차가 배를 격침시킬 일이 있나 보다.
14. 후계기 부재
A6M이나 치하 등의 일본 무기들이 위키 내에서 대차게 까이고 우주쓰레기의 대명사 취급 받지만 만들어진 직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중간은 가거나, 꽤 괜찮은 무기 축에 드는 경우도 많다. 그 악명 높은 제로만 봐도 등장할 당시엔 "저 새끼들이 2000마력짜리를 만들었어!!"라고 평가되었을 정도이다. 심지어 그 치하도 신포탑으로 개량된 이후에는 근접거리에서 셔먼을 격파할 수 있었기에 미 해병대에서도 "위협적인 병기" 취급을 했다.다만 제로의 기동성은 기체를 만든 재료부터 내구도를 무시한 터무니없는 감량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결과 방어력은 이름답게 제로... 그리고 기체 강도 역시 제로여서 기동성이라 해봐야 (실속에 빠지기 쉬운) 저속에서의 선회전 위주 기동성이니 고속에서 해야 하는, 연합군 기체가 툭하면 700km/h, 800km/h, 900km/h 대를 찍으면서 해대는 붐 엔 줌 같은 급강하 기동을 따라 하면 기체가 가속도를 버틸 수가 없어서 산산조각날 수도 있는 건 덤. 일례로 F4F 와일드캣이 붐 엔 줌 기동을 해도 A6M은 그걸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다. 오히려 따라잡으려 했다가 산산조각나기 십상. 2000마력 소리도 이를 몰랐기에 나온 말이다. 자세한 사항은 A6M의 스펙 표를 보자.
일본측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인지 자체는 하였고, Ki-84 하야테같은 전투기를 보면 미군 전투기 못지않은 상당히 우수한 전투기를 만들 기술력 또한 있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압도적인 물량의 미군 앞에서 미국의 15%이하의 공업력을 가진 일본이 안 그래도 전략폭격까지 얻어맞는 와중에 공장 생산 라인을 신형 무기로 갈아엎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툭하면 새로운 무기랍시고 기존 무기의 공장 생산 라인을 갈아엎으며 생산하고 배치하던 당시 독일의 공업력 대비 생산 효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F6F 헬캣의 경우는 바로 전 함재기인 F4F 와일드캣과 모양이 비슷해서 똑같은 걸로 착각하고 스에다 토시유키 같이 와일드캣을 상대하던 방법으로 헬캣을 상대하다가 역으로 털려버린 경우가 자주 있었다.
물론 일본군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어서 나름대로 개량은 했다. 하지만 연합군이나 독일군 장비의 개량에 비하면 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성능 향상이 미미했으며, 일부는 차라리 개량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할 정도로 개악된 점도 있었다.
같은 추축군인 독일에서 전쟁기간 내내 쓰인 4호 전차의 경우 첫 실전에 투입된 형태인 D형은 치하와 마찬가지로 보병지원용 전차였던만큼 부실하기 그지없는 카탈로그 스펙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동 체급 전차들 중에서는 굉장히 우수한 축에 속하는 전차로 업그레이드 되어 전쟁 후반기까지 꾸준하게 활약했으며 전투기인 Bf109 역시 계속된 개량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 활약을 펼쳤다. 덕분에 4호전차나 Bf109는 적국의 동 체급 장비들과 비교해서 전쟁 내내 거의 비슷한 성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예 저 둘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부 국가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제로의 라이벌 F4F 와일드캣 역시 날개를 접을 수 있도록 개량하고, 기관총의 숫자를 늘리고, 엔진의 출력을 강화하는 등 지속적인 개량을 거쳤으며 전쟁 중기에 가면 아예 후계기인 F6F 헬캣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호위항모용으로 용도가 전환되어 최전선 주력 병기에서 물러났다. 이때 호위항모용이 된 와일드캣을 FM-1, FM-2 라 부르는데 이거 원래의 F4F 와일드캣 개발사인 그루먼에서 제작한 게 아니라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에서 제작한 거다.(물론 FM-1, FM-2의 기본적인 설계는 F4F-4가 아닌 F4F-3와 비슷하다. 엔진이 기존의 1200마력에서 1300마력대로 업그레이드 된 것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게다가 대전기 최강의 함재기라 불리는 F4U 콜세어의 경우 타이어 제조 회사인 굳이어(goodyear) 사에서 제작한 것도 있다. 콜세어 시리즈 중 FG로 네이밍 된 것이 굳이어 사 생산 버전. 그리고 서부전선의 잡졸 취급받는 그 M4 셔먼도 실제로는 포방패, 궤도, 주포 등 여러 부분을 지속적으로 개량한 덕분에 서부전선이나 랜드리스를 통해 지원한 동부전선에서도 의외로 괜찮은 전적을 쌓았다. 이후의 한국전쟁에서도 이러한 업그레이드에 힘입어 공산군의 T-34 전차를 능가하거나 최소한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반면 A6M은 후계기인 렛푸부터 전쟁 끝날 때까지 제대로 생산되지 못했으며, 전쟁 말기 즈음엔 파일럿들의 요청과 엔진의 강화 등으로 일격이탈은 수행할 정도까지 내구성은 끌어올려져 있었으나 끊임없는 개량에도 불구하고 적 폭격기조차 제대로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으며 무장 역시 적기를 제대로 막아낼만큼의 화력이라고 보기엔 부족했다. 전쟁 종료까지 살아남은 에이스 파일럿 아카마츠 사다아키의 인터뷰에선 그 A6M으로 활약한 베테랑이 '적기에 비해 A6M은 상승 성능, 하강 성능 무엇하나 뛰어난 것이 없다.'라는 말까지 했다. 저 사람은 단신으로 머스탱 수십기 사이에 뛰어들어 한 기를 격추하고 귀환한 레전드급 파일럿인데도 말이다.
치하 전차 역시 나올 당시엔 보병지원용 차량이었기에 대전차전을 상정하지 않았고, 어쨌든 일단은 전차기에 대전차화기가 부족했던 당시에는 보병 지원 방면으로는 활약할 수 있었다. 대전차 능력이 형편없던 중국군 상대로는 이걸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점차 대전차전이 중시되고 전차의 성능이 급속도로 올라가는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개량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한 개량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후계기인 치헤와 치누도 전황에 영향을 끼치기엔 너무 늦게 뽑혀 나왔으며 설사 제때 배치되었다고 해도 미군의 주력 전차인 셔먼과 과연 대등히 맞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전차들이었다. 치누를 테스트 해본 미군의 평가에 따르면 '셔먼으론 안 붙는 게 좋을 듯.'이라는 평가가 내려졌지만 이게 '셔먼만큼은 되니 퍼싱으로 밀어버리자.'인지 '이거 셔먼보다 훨씬 세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게다가 치누의 성능은 카탈로그상으로는 초기형 셔먼보다 약간 열세한 수준이지만 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 품질은 카탈로그보다 훨씬 저질일 건 뻔한 만큼 치하보다 조금 더 나을 뿐이지 강화된 셔먼에게 털릴 건 뻔하였다. 이걸로 미뤄볼 때 저 '셔먼으로는 안 붙는 게 좋을 듯'이라는 언급은 단순한 엄살로 보인다.
결국 전쟁기간 내내 일본군 전차병들은 시대의 흐름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양철관이 돼 버린 하고나 치하 같은 전차를 타며 고통받아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군은 치하 전차의 후속 전차를 생산하긴 했다. 다만, 치누는 만들어놓고 본토 방어 때문에 써먹지도 못했고, 치토는 프로토타입만 만들어 놓고 종전, 치리는 미완성으로 종전을 맞이했다. 그런데다가 초중전차인 100식 전차 역시... 게다가 제로의 후속기인 A7M 렛푸는 엔진이 문제라서 제대로 생산도 못했다. 왜 엔진이 문제였는지 하면, 엔진 생산 설비 자체부터 제로의 엔진에만 고착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토 타입용 엔진 몇 기만 생산하고 끝. 그리고 A7M 렛푸의 엔진은 설계상 2000마력을 넘는 엔진을 달 예정이었다. 그런데 기술이 따라가야지...렛푸가 시제기만 몇 기 만들어지고 끝난 건 바로 이 때문. 그래서 프로토타입 몇 기 생산하고 끝.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렛푸는 시제기, 즉 프로토타입부터 실패였다. 오죽하면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을 지낸 시가 요시오가 테스트 파일럿으로 렛푸를 테스트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 "이따위 물건을 만들려는 놈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였겠나? 이것도 이유가 멍청한 군부가 익면하중을 제로 수준까지(...) 낮추라고해서 무리하게 낮추다 이리되었다.
15. 유류를 비롯한 자원 부족
가도쿠라 소지: 연합함대는 아직 무츠도 있고, 나가토도 있으며, 세계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야마토도 있다! 그렇다면! 대함거포를 지금 말고 언제 쓴단 말인가?
우가키 마토메: 하지만, 가도쿠라...
가도쿠라: 전함을 동원해 최후의 총공격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닌가?
구로시마 가메토: 가도쿠라 사령관,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그러고 싶습니다.
가도쿠라: 왜 하지 않는가?
구로시마: 하지만...
가도쿠라: 하지만 뭔가!?
우가키: 실은... 기름이 없다...
가도쿠라: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2011년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태평양 전쟁 70년의 진실-(聯合艦隊司令長官 山本五十六 -太平洋戦争70年目の真実-)> 中
유류 부족은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애초에 일본군 해군이 미국에 진주만 공습을 때리며 태평양 전쟁을 개전한 이유 중 하나가 연료 부족일 정도였다.우가키 마토메: 하지만, 가도쿠라...
가도쿠라: 전함을 동원해 최후의 총공격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닌가?
구로시마 가메토: 가도쿠라 사령관,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그러고 싶습니다.
가도쿠라: 왜 하지 않는가?
구로시마: 하지만...
가도쿠라: 하지만 뭔가!?
우가키: 실은... 기름이 없다...
가도쿠라: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2011년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태평양 전쟁 70년의 진실-(聯合艦隊司令長官 山本五十六 -太平洋戦争70年目の真実-)> 中
유류 뿐만 아니라 다른 자원도 부족했다. 거기에다 개전과 동시에 무역이 단절되면서 기존 공급원들을 상실하면서 자원 부족 문제는 심화되었다. 그나마 남방작전으로 침공을 개시해서 간신히 일부 전략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확보한 자원을 운송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고, 그마저도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 잠수함의 통상파괴전에 제대로 걸려 수송력을 상실하자 자원 부족으로 인해 생산품의 품질이 더욱 하락하는 부작용이 터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문서의 상위항목인 일본군/무기체계의 '부실한 군수지원' 문단 참조.
[1] 대본영 내에서도 육군 쪽과 해군 쪽의 명령 라인이 별도로 존재했다.[2] 해당 자료. Seafire IIc performance PDF. 스핏파이어는 같은 형식번호라도 엔진을 비롯해서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한 출력의 엔진을 가진 기체끼리 비교함.[3] NAVAL AIR SQUADRON INDEX (700-1800)[4] http://pwencycl.kgbudge.com/H/o/Homare_aircraft_engine.htm[5] Naval Air Force. 보면 알겠지만 1985년에 지상 기지에서 운용하는 폭격기 160대가 해군 항공대에 소속되어 있었다.[6] 일본의 국력 자체가 미국같은 강대국에 비해서 열세인 상황이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같은 조약으로 주력함의 비율이 영국:미국:일본=5:5:3으로 제한되었으니 일본군이 아무리 바보라도 주력함의 숫자로는 못 이긴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 수적 열세를 압도할 질적 우세를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일본의 건함 노하우가 타국보다 좋다고 보기도 어려운데다가 타국이 3연장포를 탑재할 때 2연장포로 버티다가 뒤늦게 야마토급 전함에 가서야 3연장포를 탑재했다. 그나마도 성능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말이 많은 물건이기도 하다. 야마토급 전함 항목 참조.[7] 엔진 몇개를 제외하면 계획상으로만 존재하는 물건이다. 덕분에 G10N 후가쿠 문서에 들어가서 보면 나오는 건 죄다 상상도다.[8] 오늘날 대한민국 공교육 과정에서 굳이 실과나 기술가정 과목을 집어넣는 것도 이런 이유다. 모든 국민을 기술인력으로 육성하겠다는 게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술 부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갖추라는 것이다.[9] 특히 건그레이브에서 케르베로스는 "파괴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단 한 사람 빼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