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2:13:49

산타크루즈 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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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해전
파일:A_Japanese_Aichi_D3A_is_shot_down_between_USS_Enterprise_(CV-6)_and_USS_South_Dakota_(BB-57)_on_26_October_1942.jpg
의 공격을 받는 엔터프라이즈사우스다코타
날짜
1942년 10월 25일 ~ 1942년 10월 27일
장소
솔로몬 제도 산타크루즈 제도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일본|]][[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토마스 킨케이드 파일:일본 국기.svg 나구모 주이치
전력 정규항공모함 2척[1]
전함 1척[2]
중순양함 3척[3]
경순양함 3척[4]
구축함 14척
항공기 136기
정규항공모함 2척[5]
개조항공모함 2척[6]
전함 4척[7]
중순양함 8척 [8]
경순양함 2척[9]
구축함 22척
항공기 약 199기
피해규모 정규항공모함 1척 격침[10]
정규항공모함 1척 중파[11]
구축함 1척 침몰[12]
항공기 81기 손실
266명 전사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13]
개조항공모함 1척 중파[14]
항공기 92기 손실
400~500명 전사
결과
일본의 전술적 승리, 미국의 전략적 승리
기타
일본 정예병력 손실
1. 개요2. 배경3. 전초전4. 전투
4.1. 공격대의 이함4.2. 즈이호 영전대의 반전4.3. 양측의 1, 2차 공습4.4. 일본의 후속공격4.5. 호넷의 침몰
5. 결과6. 기타

[clearfix]

1. 개요

1942년 10월 26일 과달카날 전역에서 있었던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의 해전이다. 일본의 수상함대가 치렀던 전투 중엔 마지막으로 베테랑 항공기 탑승원들과 아직 미군에게 밀리지 않는 성능의 함재기들로 미국의 함대원형진과 첫 실전에 참가한 40mm 보포스에게 맞서 싸웠던 전투로 일본군 해군과 미 해군이 각자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로 맞붙은 전투이다.

2. 배경

일본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저번엔 실패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미군 항모부대를 박살낸다!!"라는 생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손실된 1 항공전대의 항공기 탑승원들을 채워넣은 항공모함 쇼카쿠, 즈이카쿠, 준요, 즈이호 네 척과 전함 두 척을 투입해 미군 항모부대와의 전투를 준비한다. 윌리엄 홀시 제독도 이를 알고 엔터프라이즈가 소속된 16기동부대와 호넷이 소속된 17기동부대를 내보내 이들에게 맞설 준비를 한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과달카날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파악한 두 국가는 이 섬의 확보에 집중했다. 당시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은 서둘러 항공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지만 도중 미국의 공격으로 해당 비행장이 피탈되었으며 미국은 이 비행장을 헨더슨 비행장으로 명명한다.

헨더슨 비행장은 양국 모두에게 중요한 위치였다. 일본이 이곳을 차지할 경우 미 항공세력 및 수송을 차단하여 호주를 고립시킬 수 있었으며, 반대로 미국이 차지할 경우 헨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한 항공세력과 호주에서 이륙한 항공세력을 동원하여 일본의 항공기지세력을 견제 및 차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미국은 또 한 차례의 함대항공전인 동부 솔로몬 해전을 치러가며 헨더슨 비행장을 방어했으나 당시 과달카날 해역의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갔다. 주간에는 제공권을 확보한 미국이 우세를 점하였고 야간에는 수상세력을 이용한 일본이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설욕하려던 일본은 다시 한번 미 항모기동부대를 끌어내 격파할 의도로 헨더슨 비행장 공략을 준비했다. 1942년 10월 하순, 당시 일본 해군의 최정예 파일럿을 선발하여 배치한 정규항모인 쇼카쿠와 즈이카쿠, 경항모 즈이호, 개조항모 준요히요가 과달카날 해역으로 출정한다. 쇼카쿠와 즈이카쿠, 즈이호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공격부대(제3함대) 본대를 구성했고, 제2항공전대의 준요와 히요는 곤도 노부타케 제독 휘하의 전진부대(제2함대)와 동행하여 항공엄호를 제공했다. 전함 두 척을 중심으로 한 전진부대의 임무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통한 과달카날의 일본 육군 3차 공세 지원이었으나, 아베 히로아키 제독의 공격부대 전위함대와 함께 본대 전방으로 100km 이상 돌출되어 미군의 공습을 흡수하고 여차하면 미 기동부대에 대수상 교전을 시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0월 22일 히요가 기관 문제로 회항하면서 일본 함대의 전력은 약간 감소한 상태였다.

일본의 움직임을 눈치챈 미국도 TF16의 엔터프라이즈와 TF17의 호넷을 합류시켜 61기동부대를 형성, 이들을 요격하도록 하면서 산타크루즈 해전의 막이 올랐다.

3. 전초전

10월 24일, 산타크루즈 제도 북서쪽에 매복한 윌리엄 홀시 제독 휘하 TF61은 일본이 과달카날을 공격할 때 측면에서 기습, 미드웨이 해전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

10월 25일, 일본 연합함대가 과달카날 인근까지 접근하여 곧바로 정찰기를 투입한다. 이때 시간차를 두고 정찰기를 발진시켜 2단 정찰을 하도록 했는데, 이는 정찰기 숫자가 부족해 선제공격을 허용한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을 받아들인 것이였다.

한편 하와이 표준시 오전 9시, 함대 전위의 준요에서 제로센 12기, 폭격기 12기가 발함하여 핸더슨 비행장을 폭격하였다. 이는 핸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미 해군의 관심을 끌어냈다.

하외이 표준시 오전 10시, 전위함대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미항모를 발견했다.
"26일, 적 함대는 과달카날 섬 남동해면에 있을 가능성 큼, 연합함대는 적 함대를 포착 격멸할 것"
-전위함대 정찰기의 보고

그러나 상대 항모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것은 미군이었다. 하와이 표준시로 정오를 막 넘긴 시점, 카탈리나 비행정이 TF16으로부터 서쪽으로 580km 떨어진 지점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내 나구모 주이치제독은 북쪽으로 변침, 스콜의 영향으로 추가적인 탐지는 불가능해진다. 미군은 일본 항모가 근해에 있음을 파악하고 대규모의 함대항공전을 준비하게 된다.

카탈리나 비행정이 일본 항모를 발견한 시점에서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은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12대로 구성된 정찰 폭격대를 투입했다. 하지만 정찰폭격대는 결국 변침한 항공모함을 찾는데 실패하고 귀환한다. 게다가 착함 시점이 해가 저문 이후였기에 야간착함을 진행하는 와중에 1기가 갑판에 추락, 6기의 함재기가 불시착하여 총 7기의 함재기를 손실한다.

하와이 표준시 10월 26일 오전 3시 10분, 미군 소속의 PBY 카탈리나 수상기가 일본 함대를 두 번이나 발견했으나 통신 상태 불량으로 두 시간 뒤에나 소식이 전달된다. 이윽고 5시 12분경,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에게 홀시 제독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Attack-Repeat-Attack!"
"공격하라, 반복한다. 공격하라!"
-윌리엄 홀시

4. 전투

4.1. 공격대의 이함

홀시의 전문을 수신하기 직전인 오전 5시, 킨케이드 제독은 엔터프라이즈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로 이루어진 16기에게 정찰폭격임무를 주어 발진시킨다. 이들 중 제임스 리 소령-윌리엄 존슨 소위의 정찰팀이 오전 6시 50분 미함대로부터 서북쪽 320km에서 나구모의 기동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했으나 제로센의 공격으로 폭격은 포기한다.

오전 7시 40분, 리 소령-존슨 소위의 보고를 듣고 나타난 스트롱 대위-어빈 소위의 돈틀리스로 구성된 정찰팀이 일본 기동부대를 발견했다. 마침 항모부대의 상공에 호위하는 제로센이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급강하 폭격을 가해 즈이호에 500파운드 폭탄 두 발을 명중시킨다. 갑판과 격납고는 비어있었고 다른 가연성 물질도 정리한 이후라 유폭은 발생하지 않았다. 중파된 즈이호는 트럭 환초로 회항했다.[15]

하지만 즈이호가 비어있던 이유, 그리고 호위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일본 항모부대가 함재기들을 출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다시 되돌려 하와이 표준시 오전 4시 50분, 쇼카쿠 소속의 정찰기가 호넷을 발견했다. 이때 양측의 거리는 388km. 6시 30분경 위치를 전달받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곧장 공격을 지시했다.

오전 7시 10분부터 7시 25분 사이 쇼카쿠에서 뇌격기 대대 및 호위기 24기, 즈이카쿠에서 폭격기 대대 및 호위기 29기, 즈이호에서 폭격기 1기와 호위기 9기 등 총 63기의 1차 공격대가 발함했다. 직후 즈이호가 피탄되어 전열에서 탈락했지만 쇼카쿠와 즈이카쿠에서 2차 공격대의 발진이 계속되어 8시 45분까지 도합 105기의 공격대가 미 항모기동부대를 향했다. 준요 또한 공격대를 준비한다.

거의 같은 시각인 7시 30분, 리 소령-존슨 소위의 정찰팀 보고로 일본 항모의 위치를 파악한 미 기동부대에서도 공격대가 발진했다. 호넷에서 와일드캣 8기, 톤틀리스 15기, 어벤저 6기를 엔터프라이즈에서 와일드캣 8기, 돈틀리스 3기, 어벤저 8기를 출격시켰다. 또한 호넷에서 와일드캣 7기, 톤틀리스 7기, 어벤저 9기를 추가 발진하여 8시 15분까지 총합 73기의 함재기가 일 기동함대를 향해 이함한다.

4.2. 즈이호 영전대의 반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는 미/일 공격대가 거의 비슷한 시점에 서로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만큼 중간지점에서 양측이 마주치는 드문 상황이 발생했다. 1차 공격대는 서로를 그냥 지나쳤지만, 엔터프라이즈의 2차 공격대는 즈이호에서 이륙한 제로센 편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로센 편대는 본래 임무인 뇌격기 호위를 포기하고 방향을 돌려 태양을 등진 채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를 덮쳤다.

엔터프라이즈의 편대는 총 19기 중 와일드캣 3기 격추, 1기 손상, 뇌격기 2기 격추, 1기 불시착, 1기 손상의 피해를 입었고 즈이호의 편대는 총 12기 중 제로센 2기가 격추되었다. 변경된 작전으로 모함의 방향을 상실한 제로센 7기도 행방불명되었다.

즈이호의 제로센 편대는 엔터프라이즈가 쇼카쿠와 즈이호를 포기하고 전진함대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나름의 목적을 달성하였지만[16], 결과적으로는 쇼카쿠의 공격기 편대가 전투기의 호위 없이 미 항공전대에 돌입하게 방치하여 큰 피해를 가져오게 했으며, 호넷의 격침이라는 목표 달성은 결국 실패했다. 게다가 모함의 방향을 상실한 제로센 편대가 귀환하지 못하여 쇼카쿠에 복귀한 제로센은 꼴랑 3기. 즈이호가 전투 초기 기습 폭격으로 항공갑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더 이상의 편대가 출격하지 못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일본군으로서는 매우 큰 피해였다.

이 점에 대해서 당시 편대장 히다카 모리야스(당시 대위)는 "당시 적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반전을 감행했다."고 죽기 전에 회고하였다. 실제로 엔터프라이즈 정찰 폭격기의 공격과 호넷의 1차 공격대로 인해 이미 쇼카쿠는 대파, 즈이호는 중파된 상태였고, 만약 엔터프라이즈의 2차 공격대까지 합류했다면 침몰까지 갈 수도 있던 상황이기는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피해를 최소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 당시 일본군은 모함을 지켰으니 적절한 임기응변이였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건은 현 일본 항공자위대 간부교육 교재에 "현장에서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사령부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혹은 일치하지 않는가?"의 사례로 교육되고 있다.

4.3. 양측의 1, 2차 공습

오전 9시경, 일 기동함대의 1차 공격대가 호넷을 발견한다. 당시 엔터프라이즈는 스콜로 몸을 피한 상태였으므로 모든 공격은 호넷에게 집중되었다. 호넷은 즈이카쿠의 급강하 폭격으로 폭탄 1발을 피탄, 이어서 쇼카쿠 함상공격기 대대의 공격으로 우현 기관실에 어뢰 2발이 명중하여 침수 및 정지하게 된다. 이어 다시 함상폭격기의 250kg 폭탄 3발이 비행갑판에 명중했다. 설상가상으로 호넷은 공격 도중 대공포에 피격당한 일본기 2기의 자살공격까지 얻어맞았다. 맹렬한 불길에 휩싸인 호넷은 승조원과 주위 호위함의 도움으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투능력은 물론 항행능력까지 완전히 상실하여 중순양함 노샘프턴의 예인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허나 일본측의 피해도 커서 62기의 1차 공격대 중 전투기 5기, 폭격기 17기, 뇌격기 16기 총 38기를 손실했다.

9시 30분에는 호넷의 1차 공격대가 일 기동함대 상공에서 쇼카쿠를 향해 공격을 실시했다. 즈이카쿠는 엔터프라이즈와 마찬가지로 스콜에 의해 가려졌고, 즈이호는 연기를 내뿜으며 퇴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공격은 쇼카쿠에 집중된다. 폭격기의 공격으로 쇼카쿠는 3발의 1000파운드 폭탄에 피탄된다. 하지만 함내 가연성 물질을 최소화하여 유폭은 막을 수 있었다. 쇼카쿠와 쇼카쿠 승조원들은 바로 전선을 이탈하여 소화작업을 실시했다. 돈틀리스 폭격기와 분리된 어벤저 뇌격기들은 일본 기동부대 본대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에게 뇌격을 가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즈이호 소속 제로기의 요격으로 도착이 늦어진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와 호넷의 2차 공격대도 본대를 찾지 못하고 곤도 제독의 전진부대를 공격한다. 키리시마와 토네에게 가해진 엔터프라이즈 공격대의 뇌격과 폭격은 모두 빗나갔고, 호넷의 2차 공격대는 오전 9시 20분경 선두에 있던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를 공격하여 450kg 폭탄 두 발을 명중시킨다. 그러나 공격이 전진부대에 집중된 덕분에 쇼카쿠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진부대의 준요는 공격을 받자마자 바로 사경을 헤메는 쇼카쿠에게서 함대 항공지휘권을 승계받고 9시 45분경 3차 공격대를 발진시킨다.

오전 11시 15분, 일본 기동부대의 2차 공격대가 다시한번 미 기동부대 상공에 등장한다. 공격대는 출격 직후 통신 분석으로 존재가 파악된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쇼카쿠의 함상폭격기 대대가 엔터프라이즈에게 2발의 직격탄을 내었으며 그중 1개가 엔터프라이즈의 전방 엘리베이터를 파괴했다. 오전 11시 45분에는 출격이 약간 지연됐던 즈이카쿠의 함상공격기 부대가 엔터프라이즈에게 뇌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빗나갔고, 포틀랜드가 몸을 던져 막은 유일한 명중탄은 불발이었다. 공습이 끝난 후 16기동부대가 더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킨케이드 제독은 철수 명령을 내린다. 엔터프라이즈가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데다가 자신의 함재기에 더해 호넷의 함재기까지 수용하여 더이상의 함재기 이착함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2차 공격대 역시 사우스다코타의 맹렬한 대공포화와 와일드캣 전투공중초계 편대의 추격에 24기의 함재기를 손실했다.

4.4. 일본의 후속공격

오전 9시 45분경 준요에서 날아오른 일본 기동부대의 3차 공격대 29기는 오후 12시 15분경 미 기동함대 상공에 도달한다. 3차 공격대는 시계 불량으로 전력이 분산되어 엔터프라이즈에 지근탄 1발, 사우스다코타에 1발을 기록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고, 대공포화에 11기의 함재기를 손실했다. 대부분이 사우스다코타의 전과였다.

준요의 가쿠다 가쿠지 제독은 호넷을 확실하게 격침할 생각으로 집요하게 공격대를 투입했다. 요크타운에게 치명상을 입혔음에도 끝장을 내지 못해 참패의 빌미를 제공한 산호해의 교훈이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오후 1시 준요에서 4차 공격대 15기가, 15분 후에는 즈이카쿠에서 5차 공격대 13기가 발진했다. 이것도 모자라 오후 3시 35분에는 마지막 6차 공격대가 준요에서 떠올랐다.

오후 3시 15분경 준요의 4차 공격대는 호넷을 예인중이던 노샘프턴에게 뇌격을 가했으며 노샘프턴은 예인줄을 끊고 회피한다. 이때 우현에 또다시 어뢰 한 발을 피격당한 호넷이 사실상 회생 불능의 상황에 놓이자 함장 메이슨 대령은 총원 퇴함 명령을 내렸다. 3시 55분에는 즈이카쿠의 5차 공격대가 호넷을 폭격하여 1발의 지근탄을 기록했다. 6차 공격대의 폭격기 4기와 제로기 6기는 5시 2분에 표류중이던 호넷을 향해 폭격을 가했다.

호넷을 포기한 17기동부대의 잔여 함정은 철수를 시작했다. 옳은 결정이었다. 곤도 제독의 전진부대가 우세한 수상함 세력을 믿고 야전을 벌일 생각으로 아베 제독의 전위함대는 물론 즈이카쿠까지 합류시킨 채 남하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4.5. 호넷의 침몰

호넷이 대파된 후, 호넷의 항공대는 적의 공격을 버텨낸 엔터프라이즈가 수용하여 전선에서 이미 이탈하였다. 호넷을 자침시키기 위해 잔류한 미군 구축함 두 척이 포탄과 어뢰를 호넷에게 잔뜩 쐈지만 호넷은 가라앉기를 거부했고, 일본 함대가 다가오자 결국 미군은 호넷을 버려두고 도망쳐야 했다.

이후 버려진 호넷을 뒤따라온 일본해군 전위함대가 포착한다. 호넷의 자침에 실패한 미합중국 해군은 승조원들을 모두 대피시켰음에도 급히 도망치느라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였고, 인양 케이블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호넷을 노획하길 원했던 일본군 사령부는 구축함 아키구모와 마키구모 두 척을 별도로 편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함대로부터 떨어져 호넷을 인양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현장의 일본군 지휘관들은 이미 신나게 불타오르고있는 데다가 수시로 이곳저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호넷을 노획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아키구모의 함장 소마 쇼헤이 중좌는 이러한 호넷의 상황을 보고서는 미국도 인양을 포기하였다고 판단, 인양하지 않고 격침시키기로 한다.

이에 삼식 연장포 스물네 발을 사격하나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였고, 이번에는 접근하여 폭뢰를 투사하여 격침시키려 하였으나 "역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가?" 라는 의견에 중단하고 어뢰를 사용하여 뇌격처분을 하기로 한다. 이에 아키구모와 마키구모가 각각 어뢰를 두 발씩 발사하여 그 중 세 발을 명중시키고, 호넷은 서서히 우현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본영에 제출할 사진을 촬영해야 했지만 이미 해가 저물어 사진촬영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의견이 나왔는데, 호넷을 그림으로 그려서 제출하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키구모 소속 신호원 '나카지마 이츠키'가 이 일을 맡았다. 아키구모는 호넷을 그리던 중 날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자 탐조등을 조사했는데, 마키구모로부터 "무슨 짓인가?" 라는 항의를 듣고 일시 중단했다. 하지만 아키구모는 그 뒤에도 미해군에게 단번에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는 이러한 위험한 행위를 수 차례 반복한 끝에 결국 호넷의 스케치를 무사히 완성시킨다.

가라앉은 호넷의 선체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한지 77년만인 2019년 2월 12일 솔로몬 제도 인근 심해에서 발견됐다. 또한 F4F 와일드캣의 날개 잔해도 호넷의 선체 근처에 잠들어있다.

5. 결과

이 전투 결과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 한 척을 잃었고 한 척은 손상당했다. 이로써 미국 해군이 개전 당시 가지고 있던 7척의 항공모함 중 새러토가와 엔터프라이즈는 임무 수행 중 손상을 입어 수리를 위해 전열에서 빠져야 했고, 나머지 네 척(렉싱턴, 요크타운, 와스프, 호넷)은 전부 태평양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한 척인 레인저는 지구 반대편 대서양에서 홀로 임무 수행 중이었다. 즉 이 시점에서 미국 해군은 과달카날은커녕 당장 태평양 전체에서 운용이 가능한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남지 않았다.

미국 해군이 입은 피해상황만 놓고본다면 일본 해군의 대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본 해군 역시 피해가 작지 않았는데 쇼카쿠와 즈이호는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즈이카쿠준요는 비행대를 다수 잃었고 히요는 기관부 문제로 전투에 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에서 작전이 가능한 베테랑 항공기 탑승원들을 거의 다 소진하게 되었고, 육상기지의 베테랑들도 솔로몬 제도에서 소모전으로 잃어버려 이후 이런 식의 잘 짜인 작전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고. 특히 함재기 파일럿의 보충 문제 때문에 기동함대 운용에 타격을 입어 효과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해 귀중한 구축함의 낭비로 이어져 이후 연합함대의 약체화가 진행되었다.[17]

결국 일본 해군은 준요를 제외한 전 항공모함을 일본 본토로 후퇴시키고, 1944년 필리핀해 해전 때까지 미국 해군과의 함대항공전을 피하게 된다.

덕분에 일본의 운명이 걸리다시피 했었던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일본 해군 항모부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전사가 에릭 하멜은 이 산타 크루즈 해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은 일본 해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일본이 연합국을 대상으로 최후의 승리를 할 가능성을 빼앗아 간 승리였다.”

정리하자면, 미국 해군은 큰 한 방을 먹었지만, 일본 해군도 미국 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으며, 후의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본군 측에는 즈이카쿠준요가 가동 가능한 상태였지만, 함재기가 없는 항공모함은 빈 깡통에 불과했다. 상술했듯 이 전투로 항모 이착함이 가능한 정예 조종사는 거의 다 소진되었고, 비행기는 어디서 가져올 수 있다고 해도 조종사는 그게 불가능했다.

일본 해군 항모기동부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핵심 장비인 항공모함과 핵심 인원인 항공정비원 다수를 잃어버리면서 이미 그 조직에 금이 가버린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또다른 핵심 인원인 조종사/항공승조원을 대거 잃어버렸다. 게다가 미드웨이와 산타크루즈에서 인원들을 잃으면서 그 인원들이 갖고 있던 노하우(Know-how)도 같이 사라졌다.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새로운 장비와 인원을 지속적으로 보충하면서 노하우를 전수시켜서 그 조직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도록 움직이게 해야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육해군 모두)의 조종사 수급 체계는 지속적인 인원 보충과 노하우 전수를 하기엔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빈약했다. 단기 함대결전만을 상정하고 소수정예 위주로 육성되었던 일본 해군항공대는 이미 이 시점에서 일차적으로 와해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해도 당장 미군에게 남은 항공모함은 한 척도 없었고, 항공모함을 제외한 수상함 세력은 일본군이 우위에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구축함을 동원한 동경특급 대신 대규모 수송선단을 파견해 과달카날에 증원군을 보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완전히 과달카날을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And then there was one patched-up carrier." - Rear Admiral 'Thomas C. Kinkaid'
"...그렇지만 응급수리된 한 척의 항공모함이 남아있었다." - 해군소장 '토마스 C. 킨케이드'

미국군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응급수리 후 다시 투입한다.

다시 수리된 엔터프라이즈에 승조원들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의 엔터프라이즈의 생존을 떠올리며 갑판에 다음의 글을 게시했다.
"Enterprise VS Japan"

6. 기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일본은 세련된 전술을 성공시킬 전력이 남지 않게 된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미드웨이 해전보다 이쪽이 분수령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같은 경우 항공모함이 네 척이나 말아먹혔지만 항공기 탑승원들은 대부분 구조된 반면 이쪽은 항모는 잃지 않았지만 중일전쟁때 부터 단련되온 최정예 항공기 탑승원들을 대부분 잃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참여한 함정중 사우스다코타의 첫 함장이던 '토마스 개치(Thomas Leigh Gatch)'대령은 함 승조원들의 위생 상태 등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승조원들은 세탁이나 샤워 등을 잘 안 했고, 배의 청결상태도 개판이었다. 그러나 개치 대령이 단순히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딴 거보다 우린 실전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으로 그런 것이었고, 그의 생각은 옳았음이 아주 잘 드러났다. 사우스다코타는 이날 하룻동안만 적기 26기를 격추했다.[18] 더 재미있는 점은, 보통 이런 성향을 가진 지휘관이라면 야전 경험이 많은 베테랑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토마스 개치 대령은 이 사우스다코타 함장 자리가 그의 군 인생 최초의 함장 자리였고 그 전에는 해군 법원 재직과 사관학교의 포술 이론 강의 등 행정 및 참모 위주의 경험을 쌓았던 '책상물림'이었다. 개치 대령은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다른 야전 경험이 많은 제독들에게 질시를 조금 당했다고. 그도 그럴게 사우스다코타와 같은 신형 함선의 초대 함장 자리라면 당연히 '끗발'이 세기 마련이고 해당 인사도 그에 맞는 경력을 가진 인사가 배치되는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런 '책상물림'이 그것도 이전까지는 아예 함장 경험이 없던 사람이 함장 자리를 맡았으니 질시를 당했던 건 당연했다.

그래도 토마스 개치 대령은 함장 자리를 포커쳐서 따낸 건 아닌지 이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함선을 잘 지휘했고, 이후 과달카날 해전 때 사우스다코타가 정전으로 장님 신세가 된 상황에서도 잘 버텨서 함선과 승조원들을 구하였다. 다만 이 산타크루즈 해전 때 사우스다코타의 함교가 공습을 받으면서 개치 대령 본인도 목에 부상을 입고 약 1달간 치료를 받은 뒤 퇴원하였고, 과달카날 해전 이후엔 부상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함선 근무가 곤란해서 법무 분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며 중장까지 진급하였다.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포틀랜드는 엔터프라이즈처럼 강운함이자 수훈함임을 증명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제 잠수함들이 포틀랜드를 포착하자 어뢰를 3방이나 발사했다. 아무리 회피 기동을 잘 해도 최소 한방은 맞을 각오를 할 상황이지만 모두 불발했다. 이런 행운은 훗날 과달카날 해전에서도 나왔다.

제2차 세계 대전/이야깃거리 문서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이때 구축함 USS 스미스는 적기의 자폭[19]에 맞고 불이 붙었는데, 비행기에 실려있던 어뢰까지 유폭하며 난장판이 벌어졌다. 화재에 유폭까지 겹친 최악의 상황에서 스미스의 함장은 재치를 발휘해 사우스다코타의 뒤로 지나갔는데, 거대한 전함이 지나가며 일어난 물보라가 배를 덮치며 타오르던 불길이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소금기 섞인 바닷물에 배에 실린 장비들이 손상되는 문제가 생겼지만 화재는 진압되었고 스미스는 남은 장비들을 이용해 전투에 나섰다.

또한 이 전투에서 엔터프라이즈 항공대 소속 조종사 스탠리 '스위드' 베타자는 호넷을 공격하고 귀환하던 적기를 2기 격추하고 엔터프라이즈를 방어하며 5기를 격추해 이날 하룻동안만 7기를 격추해 총 12기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더블 에이스를 달성한다. 그 외에도 같은 항공대 소속이던 로널드 '플래쉬' 고든은 치킨 게임으로 적기를 격추하는 데도 성공한다. 여러모로 이야깃거리들은 미드웨이 해전 못지 않게 많았던 해전.

배틀 360 - 산타크루즈 대전. 위에서 언급된 두 명의 조종사도 이 다큐멘터리에서 본인들이 직접 출연한다.

[1] 엔터프라이즈, 호넷[2] 사우스다코타[3] 노스햄프턴, 펜사콜라, 포틀랜드[4] 주노, 샌디에이고, 산후안[5] 쇼카쿠, 즈이카쿠[6] 즈이호, 준요[7] 공고, 히에이, 하루나, 키리시마[8] 타카오, 아타고, 마야, 묘코, 스즈야, 쿠마노, 토네, 치쿠마[9] 나가라, 이스즈[10] 호넷[11] 엔터프라이즈[12] 포터[13] 쇼카쿠[14] 즈이호[15] 만일 조금 더 무거운 폭탄이 실려있었거나 유폭할 함재기라도 있었다면 그대로 가라앉았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다.[16] 미군 편대로서는 운이 없게도, 격추된 5기 중 2기가 지휘관급 함재기였다.[17] 손실된 일본군 측 함재기는 92대, 미군 측 함재기는 81대이다, 무엇보다도 사망한 일본군 측 항공기 탑승원은 148명, 미군 측 항공기 탑승원은 26명으로 큰 차이가 난다. 일본군 측의 비행기는 199대, 미군 측의 비행기는 136대로 상당한 전력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8] 사우스다코타와 함께 16문의 40mm 보포스를 장착했던 엔터프라이즈는 7기를 격추했다.[19] 그 유명한 카미카제는 아니다. 무작정 나가서 적함에 자폭한 것이 아니라, 전투 중 피격되어 귀환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조종사들이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적군을 같이 데리고 갈 작정으로 돌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