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9 19:44:35

몬순 전단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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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몬순전단U-848.jpg
페낭으로 향하는 유보트. 몬순 전단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다.[1]

1. 개요2. 파견 원인
2.1. 인도양의 중요성2.2. 추축국간의 전략물자 교역/교환
3. U-511의 항해와 보급항 신설4. 본격적인 잠수함 파견
4.1. 1진 파견4.2. 2진 파견4.3. 이후
5. 최후의 항해, 그리고 U-2346. 독일 항복 이후

1. 개요

몬순 전단(영어: Monsun Group, 독일어: Monsun Gruppe)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와 태평양, 인도양 일대에서 활동한 추축국의 잠수함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2]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통상파괴 임무 이외에도 교역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총 41척의 유보트가 아시아 및 인도양으로 파견됐지만, 그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몬순은 기후현상인 계절풍 몬순에서 따온 게 맞으며, 유래는 아시아와 인도양으로 파견된 유보트들이 주로 연합군 초계기들을 피하기 위해 비행기가 뜨기 어려운 날씨인 몬순철에 항해한 데에서 유래됐다.

몬순 전단은 독일 국방군의 모든 부대들 중 유일하게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합동해서 협동작전을 펼친 부대이다. 이들은 일본군 잠수함들과 인도양에서 통상파괴 활동을 벌였으며, 아군 오사를 피하기 위하여 잠수함간의 공격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2. 파견 원인

2.1. 인도양의 중요성

몬순 전단이 파견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도양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 필요가 있다.

인도양은 예나 지금이나 유럽/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이어주는 바다인 관계로 전략적 중요도가 상당하다. 그런 관계로 1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3] 2차 세계 대전에서도 독일 해군은 이곳으로 무장상선[4] 이나 포켓전함 등을 파견해서 영국령 인도 - 영국령 아프리카 식민지들 - 이집트 - 최종적으로는 유럽과 영국 본토로 이어지는 영국의 수송라인을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독일 해군의 수상함대를 통한 인도양 통상파괴작전은 처음에는 나름대로 효과를 봤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를 위시한 영연방 국가들이 전쟁에 참전하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정신을 차린 1941년 말부터는 이는 슬슬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1942년부터는 독일 해군이 더 이상 수상함대를 이용해서 인도양에서 효과적인 통상파괴작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1942년 일본 해군은 독일에게 "인도양에도 유보트들을 좀 보내주십쇼" 라고 요청했고, 이를 전해들은 독일 해군 역시 인도양에 유보트들을 파견하려고 시도해봤지만, 당시에는 주요 전선이었던 대서양에 투입할 유보트들도 모자랐던 데다가, 대서양에서 유보트가 워낙 좋은 실적을 내고 있었기에[5] 보조전선이었던 인도양에 유보트들을 파견하는 것은 곤란했다. 게다가 인도양에는 대서양의 프랑스처럼 마땅히 유보트가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항구가 없었던 것도[6] 한 몫했다. 따라서 1943년 이전까지 유보트의 행동반경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이 최대치였다.

그러나 1943년 중순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1943년 5월, 유보트의 마지막 전성기가 끝났고,[7] 그와 동시에 대서양에서의 유보트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독일 해군은 "이왕이면 이제 대서양에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하는 유보트들 인도양으로 보내 버려서 망할 영국 놈들 좀 괴롭히면 어떨까?" 라는 마인드로 유보트들을 인도양으로 파견시켰다. 이것이 바로 몬순 전단의 탄생 계기이다.

2.2. 추축국간의 전략물자 교역/교환

사실독일 해군이 몬순 전단을 파견한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인도양에서의 통상파괴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추축국간의 교역을 위해서였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시에 독소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서 당연히 소련을 통한 독일-일본간의 육상교역로는 끝장났다. 따라서 남은 선택지는 바다밖에 없었다.

1942년, 일본 해군의 잠수함 I-30이 1500kg의 운모와 600kg의 셸락을 실은 채 독일으로 항해했고, 성공적으로 독일 본토에 도착했다. 이를 본 독일 해군 역시 U-511을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파견시켰고, 후술하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대성공.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독일과 일본은 소규모의 전략 물자나 무기, 병기 설계도 등등을 잠수함에 실은 뒤 서로에게 잠수함을 이용해서 보내주었고, 이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잠수함 교역" 에는 일본 해군의 잠수함이 더 유리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일본 해군의 잠수함들은 넓디넓은 태평양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탓에 크기가 컸고, 이에 항속거리가 우월해서 한번에 더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8][9] 이후 일본 측에서는 이러한 잠수함을 이용한 독일/이탈리아와 일본의 전략물자 교환을 "견독잠수함작전(遣独潜水艦作戦)" 이라고 불렀다.

또한 의외의 사실이지만, 초기에 잠수함을 소규모로 아시아로 파견시키는 임무에는 이탈리아이탈리아 왕립 해군도 많이 참여했다.[10] 이탈리아 왕국은 추축국 주요 3국 중 유일하게 전쟁 전부터 유럽과 아시아에 모두 해군력을 파견하고 있던 국가였고,[11] 또한 (독일이나 일본도 이미 했던 생각이었지만) 잠수함을 통하여 인도양을 가로질러 일본과 교역이나 물자 교환 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왕국은 1943년 5월 3척의 수송용 잠수함들에 각종 프로토타입 폭탄, 전차 설계도, 전략물자 등등을 적재하고 일본으로 파견시켰다. 하지만 이들 중 2척은 가던중 격침된 관계로 1척만이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같은해 6월 1척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소속 잠수함이 추가로 페낭으로 보내졌는데, 이 잠수함은 무사히 살아남아 페낭에 도착했다. 또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보르도에 주둔하던 잠수함 7척을 수송용 잠수함으로 개조하여 아시아로 파견시킴과 동시에 없는 살림에 새로운 수송용 잠수함 로몰로(Romolo)급[12][13] 건조에 나섰을 정도로 일본과의 전략물자 교역/교환에 적극적이었다.

3. U-511의 항해와 보급항 신설

비슷한 시기, 독일 해군은 항로 개척 겸 일본에게 유보트를 판매할 목적으로 U-511(훗날 로-500으로 개명된다)를 일본으로 파견했다. U-511은 성공적으로 인도양을 건너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말레이시아 페낭 주, 최종적으로는 구레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서 독일 해군은 유보트를 인도양을 넘어 아시아까지 파견시키는 것이 가능함을 알게 됐다.

한편 U-511에 승선한 독일 승조원들은 페낭에 남아서 일본군과 함께 그곳을 유보트 기지로 개조하는 임무에 동원되었다. 페낭은 이전에 영국령 말레이의 수상기 기지로 쓰인 곳이었고 따라서 그곳의 기반서슬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고로, 작업 자체는 순조로웠다. 그렇게 페낭은 몬순 전단의 첫 번째 기지이자 보급항이 되었다. 이후 고베에 두번째 몬순 전단 기지가 세워졌고, 그 외에도 소규모 잠수함 보급항이 싱가포르, 수라바야, 그리고 자카르타에 세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1943년 초, 윌리엄 도메스 대위 휘하에 있던 유보트 U-178이 본부의 명령을 받고 작전구역을 넘어 아시아로 항해를 시작하였고, 이는 몬순 전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파일:몬순전단 일정.jpg

몬순 전단의 경로. 항속거리가 짧은 유보트로는 한번에 아시아까지 도달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몬순 전단은 여러 차례의 보급을 받으면서 페낭까지 항해했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먼저 독일 본토나 노르웨이, 프랑스 등의 유보트 기지에서 출발한 다음, I(브라질 연안) 에서 수송용 유보트(14형 유보트)에게 1차적으로 연료보급을 받고, II(모리셔스 연안) 에서 유조선에게 2차적으로 연료보급을 받은 뒤 III(인도양)에서 통상파괴작전을 벌인 뒤 최종적으로 계속 항해해서 IV(페낭)에 도착하는 것이 몬순 전단의 기본항로였다.

당연하지만 위 경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들 유보트들은 대서양과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우회해서 갔다. 영국이 통제 중인 수에즈 운하는 잠수함으로 들키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 본격적인 잠수함 파견

4.1. 1진 파견

1943년 6월, 11척의 유보트와 1척의 이탈리아 잠수함이 페낭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이들은 U-511과 U-178을 제외하고서는 처음으로 대규모로 아시아로 파견된 유보트 전단이었다.

하지만 몬순 전단 1진 중에서 최종적으로 페낭에 도착한 유보트들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유보트들이 대서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격침당하였고, 간신히 대서양을 벗어나고서도 아랍해 등 다른 해역에서 격침당한 유보트들도 있었다. 또한 동행했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잠수함 1척은 아프리카까지는 같이 갔으나, 1943년 9월 조국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곧바로 더반으로 가서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또한 U-516은 연료탱크가 손상되어 기름이 유출된 다른 유보트들에게 자신의 연료를 나눠준 다음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하여튼 이런 악재를 뚫고 몬순 전단 1진 중 어찌어찌 페낭에 도착한 잠수함들은 12척중 단 4척; U-186, U-188, U-532, 그리고 U-168 뿐이었다.[14] 달리 말하자면, 페낭에 도착한 4척과 결과적으로는 살아남은 이탈리아 잠수함과 U-516을 제외하면 무려 절반인 6척이 가던 도중 격침당한 것이다.

4.2. 2진 파견

1진 파견에서 유보트 손실이 무려 6척이나 발생하였기에, 독일 해군은 추가로 이들의 손실을 만회할 5척의 유보트들을 페낭으로 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유보트 3척(U-848, U-849, U-850)이 도중에 격침당하고[15] 1척(U-219[16])은 본국으로 다시 귀환, 유일하게 U-510만이 6척의 연합국 선박을 가라앉히면서 페낭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하여튼 이 경이로운 손실률에 당황한 독일 해군은 이후로 유보트들을 인도양이나 아시아에 파견할 때 더 이상 직접적으로 "진"(Wave) 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4.3. 이후

이후로도 유보트는 계속 아시아로 파견되었고, 중간중간 살로 공화국이나 일본 해군의 잠수함들도 아시아와 유럽을 왕복하였다. 2진 이후부터 독일의 항복까지 무려 28척의 잠수함(유보트 25척 + 살로 공화국 잠수함 1척 + 일본 잠수함 1척)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항해했지만, 이들 중에서 성공적으로 도착한 잠수함은 단 8척이었고, 나머지는 연합국의 대잠전력 강화로 인하여 모조리 가던 도중에 격침되고 말았다.

어찌 되었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추축국의 전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1944년 4월 16일 일본 해군의 잠수함 I-29가 독일을 떠났고, 이는 공식적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항해한 마지막 일본 해군 잠수함이었다. 그보다 몇 달 이전이었던 1944년 1월을 2일에는 살로 공화국 해군 소속 수송용 잠수함 바그놀리니가 아시아로 항해했고, 이는 아시아로 간 마지막 이탈리아 해군 소속 잠수함이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막강해진 연합군의 대잠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I-29와 바그놀리니 모두 끝내 아시아에 도달하지 못하고 격침당했다.

그나마 독일은 계속해서 유보트를 일본으로 보내려고 발악했다. 전술했겠지만, 2진의 실패 이후로도 무려 25척의 유보트가[17] 개별적 혹은 소규모 선단을 이루어 아시아로 항해했다. 하지만 독일이 1944년 중순 대서양 유보트 기지의 거점이었던 프랑스를 상실하면서 유보트 활동에는 커다란 제약이 걸리게 된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전까지 몬순 전단이 재보급을 받았던 브라질 연안과 모리셔스가 완전히 연합국의 통제하에 들어가면서[18] 항속거리 문제가 발생, 몬순 전단 파견은 더더욱 위축되었다. 또한 이 시점에서 독일 해군은 유보트를 더 이상 통상파괴 목적이 아니라 일본에 중요 기술이나 물품들을 전해 줄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19]

5. 최후의 항해, 그리고 U-234

1944년 12월 28일, U-195가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U-195는 2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출항해서 아시아에 성공적으로 도달한 마지막 유보트가 되었다. 이후로 1945년 2월, U-864가 전략물자와 제트전투기 부품들을 싣고 출항했지만, 출항한 지 고작 4일만에 격침당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234_KptLt_Fehler_USS_Sutton.jpg
캐논급 호위구축함 USS Sutton[20]에게 항복하는 U-234.

그렇게 일본으로 항해한 마지막 유보트는 10형 유보트 U-234였다. 이 배에 관한 내용은 U-234 문서를 참조.

6. 독일 항복 이후


[1] 사진속 유보트는 9형 유보트인 U-848으로, 몬순 전단 제 2진에 포함돼 페낭으로 항해하던 도중 1943년 11월 5일, 공습으로 브라질 근해에서 승조원 전원과 함께 가라앉았다.[2] 몬순 전단 자체는 독일 해군과 유보트들에게만 한정되었지만, 현재는 일본이나 이탈리아의 잠수함들도 몬순 전단의 일부로 친다.[3] 그 유명한 엠덴의 주된 활동무대가 바로 인도양이었다.[4] 상선으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작게는 구축함급에서 순양함급의 무장을 설치한 함선들을 말한다.[5] 일명 1st/2nd Happy time 이라 불리는 시기이다.[6] 당장 인도양 근처의 인도, 버마(미얀마), 실론(스리랑카), 호주, 남아프리카 등은 모조리 영국령 식민지였다.[7] 이미 대서양에서 유보트는 1942년 후반부터 하락세가 보이고 있었으나, 때맞추어 1942년 말에 에니그마를 1차례 개량하면서 일시적으로 다시 유보트의 활동실적이 크게 올랐다.[8] 유보트는 500톤만 넘어도 유효한 전력이었고 천 톤을 넘으면 대형 취급받았지만 일본 해군은 1,500톤은 되어야 유효 가치가 있는 잠수함으로 취급해줬다. 일본 해군이 대형 취급하려면 6천 톤은 되어야 했다.[9] 다만 잠수함의 크기가 큰 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좋은 항속거리를 가진 대가로 일본군 잠수함들의 피탐률은 대체로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10] 이탈리아는 본토에 매장되어 있는 지하자원/전략물자는 사실상 전무하지만, 사정이 비슷한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전략물자를 수탈할 점령지나 식민지는 거의 없었다. 독일이나 일본도 수탈할 자원이 적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이탈리아는 아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11] 이탈리아가 그 적은 해군 전력으로도 전쟁 이전부터 아시아에 손을 뻗을 수 있었던 이유는 톈진 덕분이다. 당시 톈진은 이탈리아의 조계지였고, 톈진이 항구도시였던 까닭에 이탈리아는 진작 아시아 지역에 자국 해군을 보내 둔 상태였다.[12]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의 이름은 딴 함급이다.[13] 계획대로라면 12척의 로몰로급이 건조돼야만 했으나, 건조 작업이 지지부진해서 이탈리아 항복 전까지 완공된 건 딱 2척(레무스 로물루스)이었다. 게다가 그 2척마저도 건조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격침당했다.[14] 이들 중 U-186을 제외한 다른 유보트들은 페낭에 도착하기 전까지 도합 6척의 연합국 상선들을 가라앉혔다.[15] 상단 사진의 유보트(U-848) 또한 당시 격침당한 유보트들 중 하나이다.[16] U-219는 이후 1944년 8월 다시 아시아로 항해에 나섰고 그때는 성공적으로 자카르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17] 유보트라 불리는 독일 잠수함들만을 말하는 것으로, 살로 공화국이나 일본의 잠수함들까지 합치면 28척의 잠수함이 아시아로 파견되었었다.[18] 수송용 유보트들이 대기해야 하는 브라질 연안에는 초계함이나 초계기가 득실거렸고, 유조선들이 기항했던 모리셔스 인근에서도 역시 연합군 공군과 해군이 닥치는 대로 독일 상선들을 격침시키고 있었다.[19] 사실 통상파괴작전은 원래 물자를 전달해 주려다가 부수적으로 생긴 목표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쪽이 원래 몬순 전단의 임무에 더 가까웠다.[20] 이 함은 훗날 대한민국 해군에 공여되어 강원함(F-72)이라는 이름으로 1977년까지 운용되었다. 이후에는 필리핀에 넘어가 부품 수급용으로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