グアムの戦い (1941年)
the First Battle of Guam
1941년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일본 제국이 미국령 괌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전투다. 1944년 미군의 괌 탈환전과 구분하기 위해 제1차 괌 전투, 혹은 괌 전투(1941)로 구분된다.
1. 배경
남방작전 전체적으로 보면 괌은 일본에게 그다지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 대가로 북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를 획득하여 필리핀을 동쪽에서 압박하고 있었고, 괌은 북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사이에 끼어있었다. 일본으로선 굳이 공략하지 않아도 살짝 압박만 가하면 무너질 곳이었지만 그래도 개전 전 설정한 태평양 외곽 방어선 내에 미국령이 남아있다는 건 영 찜찜했던지라 약간의 전력을 투입해 초기에 무너뜨릴 계획이었다.2. 전투준비
2.1. 미군
미국은 일본과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괌에 있던 민간인 중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소개시키고 전투를 준비했으나 애시당초 괌에는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전투병력이라고는 고작 해병대 1개 중대 153명이 전부였고 이를 보조하는 전력으로 괌 원주민 경비부대와 민병대 300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해상세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어서 소속함 5척이 모두 전투력이 없었다. 해안경비정 YP-16, YP-17 2척, 퇴역급유함 반스 1척, 화물수송함 골드스타 1척에 그나마 소해함 AM-33 펭귄이 유일한 현역함이었다. 그중 골드스타는 개전 당시 필리핀에 가있던 상황이었다. 있어봤자 도움도 안되었겠지만.
더군다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일본이 주력함비율에서 양보하는 대가로 태평양 주요도서의 요새화를 금지하는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서 섬 요새화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워싱턴 조약은 파기된 지 오래였지만 미국은 대공황에 따른 재정 부족, 건함에의 우선적 자금 집행, 타 지역에 대한 우선 요새화 등으로 괌에 충분한 방어설비를 준비하지 않았다. 때문에 가장 강력한 중화기가 펭귄이 보유한 3인치 함상대공포 2문이었다.
항공전력은 아예 없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공격받은 웨이크 섬의 상황과 비교해도 차이가 컸다. 웨이크 섬은 해안포도 부족하지만 충실히 배치했고 소량이나마 와일드캣 전투기도 배치되어 항공작전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두 섬의 규모 차이는 하늘과 땅 수준임에도 배치된 해병대 병력은 비슷해서 방어밀도 차이가 엄청났다. 웨이크 섬의 면적은 7.1㎢였지만 괌 섬의 면적은 544㎢에 달했다. 이는 미군이 적극적인 방어작전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진주만 공습을 통보받은 미군은 즉시 섬 내의 일본인들을 모조리 체포, 구금한 후 방어태세에 돌입한다.
2.2. 일본군
일본군도 괌의 허술한 방위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애시당초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항공작전은 사이판에 전개한 기지의 전투기만으로 지원할 예정이었고, 전투병력은 남해지대의 5,500명에 사이판의 제5특별근거지대 소속 해군육전대 400여 명으로 도합 5,900여 명이었다.일본군의 전략은 단순했다. 섬 각지의 해안 여러 곳으로 동시다발 상륙전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미군은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모든 해안선에 병력을 배치할 수 없을 것이고, 손쉽게 상륙교두보 여러 곳을 확보한 뒤 주요 거점들로 진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압도적 전력을 가진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3. 전투
12월 8일 오전을 기해, 사이판에서 이륙한 수십여 기의 일본기들이 맹폭을 가했다. 항구시설 및 해병대 막사 등이 폭격을 받았고,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소해함 펭귄은 2문의 3인치 대공포로 급강하폭격기 1대를 격추시켰으나 지근탄으로 항행불능 상태에 빠지자 승조원들이 밸브를 열어 자침시킨 다음 탈출했다. 이 날 오전에 가해진 폭격을 끝으로 일본군은 추가적인 폭격을 하지 않았다.미군은 주력을 괌 남단 오르테 반도의 입구에 결집시켰다. 오르테 반도에는 수비대 막사가 있었고 섬 유일의 항구인 아프로 항구를 감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소수 병력들은 민병대와 함께 괌 각지의 원주민 마을을 방어하고 있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틀 후인 12월 10일 새벽, 일본군은 총 3개 방면으로 나뉘어 괌 섬으로의 침공을 시작했다. 그중 주력은 괌 서쪽 중부 둥카스 해안에 상륙한 부대로 이들은 해안을 따라 아프로 항구로 남하했고, 그 과정에서 아가나(Agana)라는 마을에서 민병대와 소수 해병대가 결합한 방어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수비대는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한 후 보유하고 있던 기관총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돌격을 저지했다. 짧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일시 후퇴, 공격계획을 재검토했다.
하지만 미군 지휘부는 둥카스 해안 외에도 섬 남부와 동부에서도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들은 아가나에서 일시적으로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그리고 아직 주력인 해병대 병력이 온전한 상황임에도 아군의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항복을 결정했다.
결국 그 날 오전 6시 45분, 미군은 일본군에 항복했다. 이후 섬 각지에서 민병대에 의한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미군의 항복명령이 전파되면서 모두들 투항했다.
4. 결과
일본군의 승리였다. 하지만 미군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설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양군 모두 사상자는 적었다. 미군은 전사자 17명, 부상자 35명, 일본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6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미군의 경우 대부분의 피해가 12월 8일 새벽의 공습에 의한 것이었다.이후 일본군은 괌을 오미야토(大宮島, 대궁도)로 개명한다.[1] 그러나 이후에는 거의 방치하기에 이른다. 일본이 괌에 주둔시킨 병력은 개전 전 미군이 주둔시킨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일본은 남방의 다른 지역을 공격하는데 주력하느냐 수많은 원주민이 거주하는 괌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느니 그냥 원주민들 적당히 어르고 달래자는 생각을 했던 것. 때문에 1943년까지 괌은 다른 일본 점령지와 달리 상당히 온건하고 유순한 형태의 일본 통치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1944년이 되면서 미군의 침공이 임박해지고 이를 막기 위한 병력이 증파되면서 말짱 꽝이 되고 누가 일본군 아니랄까봐 개막장 통치가 시작된다.
5. 기타
괌 해병대 중에서는 항복을 거부하고 정글로 들어가 게릴라전에 나선 6인도 있었다. 이들 6명 중 5명은 일본군과 교전 중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으나 딱 1명, 통신사관 조지 레이 트위드(George Ray Tweed) 중사만 살아남았다. 트위드 중사는 괌 전투 전투 2년 반이 지난 1944년 7월, 탈환전 준비를 위해 괌 인근에 진출한 아군 구축함과 통신에 성공, 구축함이 보내준 함재선을 타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무사히 탈출했다. 미군은 괌 수비대가 전원 죽거나 투항한 줄 알고 있었기에 트위드 중사의 귀환에 크게 환호했고, 본토 기지로 귀환한 이후 수훈무공훈장(Legion of Merit)과 은성훈장을 수여받는다.[1] 일본은 전쟁기간 점령한 지역의 영문명칭을 죄 한자식으로 뜯어고치는 데 쓸데없이 집착했다. 옥시덴탈리즘이 극단화되어 영문을 광신적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쇼난이 된 싱가포르가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