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기의 만주군 보병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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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유신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본군에서 사용한 군용 도검.[1]2. 역사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을 본떠 근대 군대를 창설하면서, 군용 도검도 한 손으로 사용하는 서양식 세이버를 도입하였다. 그러면서 일본도의 칼날을 개조해서 세이버 손잡이에 끼운 물건 역시 혼재했다.그러나 1877년에 일어난 세이난 전쟁에서 근대식으로 재편한 병사들이 일본도를 든 사쓰마무사들에게 예상 밖의 큰 피해를 보자, 똑같이 일본도를 사용하던 무사들로 구성된 발도대(拔刀隊)를 조직하여 이에 맞섰고, 그 영향으로 군도 역시 세이버 스타일 외장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기존의 일본도 도신을 이용한 양손검들이 많아졌다.
쇼와 시대(1920-1940)에는 서양을 모방하기보다 전통을 강조하는 국수주의 열풍이 불면서 전통 일본도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져 1934년 전통 일본도 모양의 94식 군도가 제정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기존의 세이버형 군도는 '구군도', 일본도형 군도는 '신군도'로 구분짓는다.
뒤이어 패용 고리를 하나 줄인 98식(1938년 채용), 외장을 간략화하고 내구성을 강화한 실전 지향 군도인 3식(1943년 채용), 그리고 부사관용으로서 95식(1935년 채용) 등이 채용되었다.
신군도와 구군도 모두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군대가 해체되면서 폐지되었고 대다수가 승전국인 미군 감독 아래 용광로로 들어가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보존상태도 아주 뛰어난 것들이 많아 해외에서도 1천 달러 이내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특히 98식은 아름다운 외양으로 중국 등지에서 모조품을 엄청나게 만든다. 국내에 군도랍시고 들어오는 것들 대부분이 98식 전도의 데드카피 혹은 복제품들이다.
2.1. 사용 계층
기본적으로 군도를 사용하는 계층은 장교 혹은 부사관뿐이었으며, 그 외에는 육군 기병, 치중병(보급대), 헌병 등의 특수병과 본부 근무자, 관외에 거주하는 부사관과 병사들 정도였다. 특히 이러한 병사 및 부사관들을 대도본분병(帯刀本分兵)이라고 불렀다.대도본분병의 군도와 장교의 군도는 제식도 달랐다. 대도본분병의 군도는 일정하게 생산되는 보급품으로서 지급받는 형태였지만, 장교는 권총과 더불어 돈을 내고 군도를 사야만 했다. 제식은 정해져 있었지만 대개가 사비로 사는 것이었기에 형태에 세세한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가령 칼날은 공업도라 불리는 공장제 양산형 칼날을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일본도의 칼날을 빼서 군도 외장에 끼워 쓰는 경우도 많았다. 남은 군도들 중 이러한 것들이 상당히 많다.
2.2. 부작용
군도에 과도하게 집착하던 끝에 결국 맹목이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는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군도를 제식 무장에서 의전용으로 변경했지만, 일본군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엄연한 제식 병기였다. 하지만 이는 지나파견군, 특히 중국 전선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의 경우 중국군이 전쟁 막바지에 공장 지대를 빼앗기고 탄약 등 무기 생산 능력이 저하되어 전술 교리를 백병전 및 야간 백병 기습 등을 늘리는 방면으로 수정하게 되자 이에 대항하여 군도를 착용한 것이기도 하다.이처럼 중일전쟁 막바지에 갈수록 국민당군 및 공산당군은 백병전의 수단으로 항일 대도를 사용하였고 일본군 또한 군도가 제식 병기로 쓰이는 일은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태평양 전선에서는 예외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군의 군도와 총검을 사용한 반자이 돌격은 미군에게 강력한 쇼크를 주었고 전술적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한 미군의 소총, 기관총과 기관단총 세례에 의해 반자이 돌격을 하는 일본군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태평양 전쟁에서 군도는 무겁기만 하고, 포로 참수나 백병전 외에는 쓸모가 없어서 지휘관들 허리만 아프게 하였다. 사정이 이런데도 계속 차고 다녀야 했는데, 심지어 비행기 조종사까지도 그러했다. 그런데 일본 군도는 단조로 만들어져 자력이 강하여 나침반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이 때문에 신참 조종사가 조종하거나 항로를 잘 모르는 경우 휘어진 나침반을 보고 조정하게 되어 엉뚱한 경로로 가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https://youtu.be/EzRLfjjRsQ0 항공 나침반에 직접 실험해보니 별 영향 없었다는 결과도 있어서 조금 의심되는 이야기이다. 출처 바람. 사실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비행기 조종사들이 칼을 차기 싫어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남았거나, 일본군에 대한 나쁜 인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군도는 경찰들은 물론 심지어 식민지 학교 교사들까지 차고 다녀 겁주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멋진 외장 때문에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통 일본도 계열에서는 대량 생산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안시하고 싸구려 취급한다. 외장의 가격도 전통 일본도에 비하면 상당히 싼 편. 이런 이유 때문에 갑옷을 입고 타치(太刀)를 차고 연무해야 하는 고류 유파의 경우 수련생이 궁여지책으로 군도를 사서 패용하는 경우도 있다.
3. 구군도(旧軍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1934년까지 사용된 세이버 혹은 세이버 스타일의 외장을 가진 군도. 8식과 16식, 그리고 양손 세이버라 불리는 군도가 존재하며, 부사관도로는 25년식이 존재한다. 양손 세이버의 경우는 제식으로 형태가 규정된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허용을 받은 것으로 양손 세이버 종류에 대한 제식넘버나 형식명은 규정된 것이 없다.- 육군장교/준사관도(陸軍將校准士官刀)
- 8식 군도(八式軍刀)
- 19식(十九式)
- 양손세이버(兩手サーベル)
- 지휘도(指揮刀)
- 겸용도(兼用刀) - 장교는 지휘도와 양손세이버를 모두 구비해야 했으므로 금전지출이 컸기 때문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나온 물건. 지휘도와 비슷하나 실전이 가능하게 튼튼한 칼날을 가진 것이었지만 인기는 없었으며 무엇보다 제식규정에 어긋나는 물건이었다.
- 육군부사관/병도(陸軍下士官兵刀)
- 25식(二五式)
- 32식(三二式)
- 해군도(海軍刀)
- 16식(十六式)
- 문관도(文官刀)
- 경찰도(警察刀)
4. 신군도(新軍刀)
1934년에 채용된 94식 전도를 비롯한 일본도형 군도 전반을 지칭한다. 구군도가 세이버이거나 세이버 외장을 채용한 것과는 반대로 일본도의 외장을 채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내외에 군국주의의 상징으로써 알려진 도검이며, 현대 군도 수요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계층.- 육군장교도(陸軍將校刀)
- 육군부사관도(陸軍下士官刀)
5. 공업도/실용군도(工業刀/室用軍刀)
일본 군도에는 전통적인 골동품 칼날을 사용한 것이 많았고 당시에도 도공들이 장교들의 주문을 받아 전통적인 방식의 칼날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것들은 생산성이 좋지 않았고 가격도 비쌌으며, 성능 면에서도 특별히 우월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적인 군수품으로써 공장에서 생산된 칼날로 돈없는 하급 장교들의 군도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전통적인 장인의 제품보다 강도나 절삭력 등에서 더 성능이 좋았다.그러나, 일본도의 중요한 미적 요소인 하몬이 존재하지 않으며 싸고 양산형이라는 이유 때문에 찬밥 취급을 받았다. 한가지 혼동에 주의할 점은, 이 공업도들은 하나의 완성된 칼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칼날만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도는 원래 외장과 칼날을 따로 구분하고, 98식, 94식 등의 군도 제식은 말하자면 외장의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다.
- 무라타도(村田刀) - 총기설계자 무라타 소장이 제조한 칼날
- 만철도/흥아일심도(滿鐵刀/興亞一心刀) - 남만주철도공사에서 제조한 칼날
- 미카사도(三笠刀) - 전함 미카사의 파괴된 포신으로 만든 칼날
- 조병도(造兵刀) - 육군조병창에서 생산된 칼날
- 진무도(振武刀) - 금속공학을 통한 타바드강(鋼)으로 만들어진 칼날
- 군수도(群水刀) - 군마수전사의 사장인 미야구치 타케히데가 만든 칼날
- 스테인리스도(耐錆鋼刀) -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칼날
6. 일본 군도를 사용하는 검술
7. 착용법
일본 군도/패용법 문서 참조.8. 일본 군도에 대한 오해
8.1. 일본 군도는 쓰레기인가?
국내에서는 일본 군도, 특히 신군도에 대해서 '칼날의 품질이 매우 좋지 않은 쓰레기.'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특히 이에 대해서는 전통 일본도는 장인이 만들어 품질이 매우 좋지만, 군도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서 나쁘다는 소문과, 일본도를 흉내내려고 강철 파이프에 무른 철을 삽입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근본적으로 5%의 진실과 95%의 과장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루머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일본 군도라고 해도 칼날의 종류가 매우 많아서 군도라는 한 마디로 성능을 일반화할 수 없다. 장교들의 경우 집안에서 소장하는 일본도의 칼날을 빼다가 외장만 군도로 바꿔 끼우고서는 나서는 경우가 많았고, 또 세키시를 비롯한 도공의 집결지와 야스쿠니 신사의 제조공장 등에서는 전통적인 일본도를 만들던 장인들이 모여, 장교용 군도의 수요를 충당했다.
장교용 군도 중 돈을 좀 들인 것들은 이렇게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칼날을 사용했고, 비교적 싼 공장제라 하더라도 차이가 많다. 가령 무라타도(村田刀)의 경우 비록 하몬을 비롯한 전통 일본도의 외형적 특징은 없었지만 강도와 절삭력, 녹에 대한 내구성 면에서는 전통 일본도에 뒤지지 않거나 더 뛰어났으며, 전함 미카사의 반파된 포신으로 만든 미카사도(三笠刀) 또한 뛰어난 평을 받았다.
강철 파이프에 무른 철을 삽입한 공정 또한 루머는 아니어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제조한 이른바 만철도 혹은 흥아일심도라고 불리는 도검이 실제로 그런 공정으로 제작되었다. 이 도검의 양산형이 바로 탄소량 0.5% 정도의 강철봉을 뚫고는, 탄소량 0.06% 정도의 부드러운 철을 내부에 삽입. 가열하여 전동 해머로 가공하고 그라인더로 갈아 모양을 잡은 다음, 기름 열처리로 열처리를 완료하고 숙련공의 손으로 마무리를 하는 물건이었다. 이 도검 또한 높은 품질로 알려져 호평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사실 루머는 일본도 어쩔 수 없어서 만철도는 열차의 선로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저질 칼날의 의혹이 있을 만한 것은 이른바 조병도인데, 이것은 대도 본분병, 즉 부사관과 병들에게 <지급>되는 육군 조병창에서 대량 생산되는 칼날이었다. 육군도검강(陸軍刀剣鋼)이라는 탄소 함유량 1.0~1.1%의 고탄소강을 사용하여 기름 열처리를 통해 제조하며, 연마는 죄다 기계로 하고 하몬이 없으므로 군도 중에서도 가장 싸구려의 멋없는 칼날이었지만, 스펙대로만 만들어진다면 성능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2] 그러나 중일전쟁 개전과 확대 등으로 군도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 군도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조병창에서도 장교용 칼날의 생산 채비를 갖추었고 급하게 수요를 메우기 위해 민간 도공에게도 주문을 내렸는데, 이때 수요에 맞추느라 민간 도공 선에서 품질관리가 잘 안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또 스테인리스도라는 것이 있는데, 말 그대로 칼날을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것으로써 녹은 안 슬어 관리는 편하지만 강도, 절삭력 모든 면에서 보통 칼날보다 못하다. 해군은 물론 육군도 전장에서 칼날이 녹스는 문제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으며 이 때문에 많이 유행했다고 하므로 이러한 스테인리스 칼날을 가진 군도가 문제를 일으켰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집안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는 칼 등, 골동품의 칼날을 전용해서 군도로 썼을 경우에도 문제가 있었다. 흔히 가보로 내려오는 것은 에도 시대의 칼일 것이다. 이때의 검은 사무라이들의 정장처럼 갖추어야 했지만, 에도 내에서 칼을 뽑는 행위는 반란행위였다. 거기에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다 보니 실전성보단 하몬이나 모양새 등 미적인 요소를 특히 강조하는 풍조가 강했다. 거기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제철법이 들어와 그전과 비교해서 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지만 막상 도검의 품질 자체는 크게 하락했다.#
당장 위에 미사카도와 재료 면에서 비교해보면 품질부터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전근대식 제철법으로 만든 전통 일본도와 근대 기술로 만든 전함 포신을 강재로 쓴 미카사도와의 차이는 현격할 수밖에 없으며, 굳이 미카사도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도 당장 자동차의 판스프링을 잘라 모양만 흉내낸 일본도 모조품도 에도 시절 일본도보다 우월하다.
일본 육군 군도 처리반의 군속으로 일했던 나루세 칸지(成瀬関次)의 저서 「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에 의하면, 마사무네의 칼날을 사용한 군도가 일격에 휘어져버렸으며, 마사무네를 시조로 하는 소슈덴의 칼날도 유연하게 지나가는 공통적인 지점이 있어 죄다 휘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칸지 씨는 이러한 잡칼이 명성을 얻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인맥에 의했던 것이라며 큰 실망을 토로하고, 그에 비해 군도 수리반에 속해있었던 카고 오장(加古 伍長)[4]의 사례를 들며 자동차의 폐품 판 스프링을 사용해 칼을 만들었는데 군도 수리반에서 자루와 칼집을 만들어주고 테스트를 하자 성능이 좋고 베는 맛이 좋아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일본도의 휘어짐 문제는 山本七平의「내 안의 일본군(私の中の日本軍)」이라는 서적에서도 은연중에 언급된다고 한다.[5] 이러한 골동품 칼날을 사용한 군도가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6]
결론적으로는 일본 군도의 비체계적인 조달과정으로 인한 품질관리 실패와 전통 일본도를 전투용으로 유용하는 장교들의 일탈문제[7] 등이 후술할 도태된 무기를 실전용으로 사용한다는 구시대적인 행보와 맞물려 퍼진 악평이며, 도검의 성능 자체는 문제가 없다.
8.2. 일본 군도의 의미
사람들은 일본 군도의 존재를 제국주의와 사무라이라는 두가지 요소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국민무사도의 강조와 파시즘의 열풍에 의해 생겨난 과거의 망령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러한 점에서 일본 군도는 실전도검이며, 항공기가 폭격하고 기관총이 난무하는 시대에 칼싸움을 위해 다시 등장한 시대착오적인 물건 아니면 일본군이 확장한 전선마다 자행한 민간인 학살시에 요긴하게 쓰인(예시:#, 100인 참수 경쟁)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본 군도는, 특히 신군도는 비록 외형이 일본도의 형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유럽 세이버가 가지고 있던 의미를 그대로 승계한 것이며 실제 전장에서의 의미와 역할도 동일했다. 정확히는 19세기 후반에 세이버가 가지고 있던 의미를 승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세-르네상스까지만 해도 도검은 실전에서 싸우기 위한 무기였지만, 18세기에 들어 도검은 권위의 상징, 소속부대의 표시, 계급장과 같은 역할을 겸하게 된다. 실전에서의 사용은 그 다음 일이었다. 기병들에게는 여전히 실전의 중요한 도검이었지만 보병들에게는 의미가 많이 약해졌고 보병들은 75cm정도의 짧은 검을 소지했으며 긴 장검은 장교들과 일부 정예부대만이 소지하게 되었고, 이들이 실전에서 검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장식의 형태와 유무, 손잡이나 가드의 형태, 손에서 떨어트리지 않기 위한 Tassel등의 요소들이 실전보다는 각 부대와 병과, 계급을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표시 도구로써의 의미가 훨씬 중요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9세기 중후반, 총검전투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이 시대에 이르면 도검의 상징적 역할은 더욱 커진다. 여전히 도검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들어가는 고려 대상은 얼마나 실전적인가, 실전에서 검증된 형태인가, 베기와 찌르기에서 얼마만큼 역할을 할 수 있는가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칼이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하고,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칼에게 이미 요구되고 있던 상징으로써의 역할이 더더욱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장교들이 칼을 쓰게 되는 주요 목적은 상대에게 달려들어서 칼싸움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돌격시 병사들을 이끌고 선도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 즉 지휘도로써의 역할이 더욱 컸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를 단행했으며, 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군도의 착용 방식부터 외형상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유럽 세이버의 의미와 형태를 완전히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물론 도검은 기병용의 경우 실전 도검으로써의 요소가, 보병도의 경우 상징적인 역할이 더욱 컸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외형과 장식의 형태와 유무로 계급을 구분하던 버릇도 마찬가지다. 이는 일본도 형태를 가진 신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근본적으로 권위와 상징을 필요로 하던 헌병, 장교, 부사관들만이 도검을 소지할 수 있도록 하고, 일반병 등은 장검을 못 가지게 했던 점에서도 이러한 유럽 세이버가 가지고 있던 상징적 위치를 그대로 계승했음을 잘 보여준다. 만일 시대착오적인 도검전투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일반병이 검을 가지는 것도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본 군도는 세이버 외장을 가진 구군도 시절부터, 신군도와 3식에 이르기까지 항상 실전이라는 요소를 생각하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 세이버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1차대전까지의 유럽 장교들이 그러했듯이 군도는 지휘도였으며 상징이었고 병사들을 이끄는 장교들이 부사관과 병들과 구분되기 위한 하나의 코드였다. 19세기 유럽군의 부사관이 창을 들고 다니던 것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물론 전쟁터에서 돌격할 때 손에 드는 물건이므로 다른 무기를 들 수 없으니 적과 마주할 때에는 충분히 찌르고 벨 수 있을 만큼의 강도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 이는 화려한 장식이 너무 많아 무기라기보다 차라리 인테리어 제품에 가까웠던 17세기 유럽의 장교용 폴암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것이었고, 18~20세기의 유럽 세이버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일본 군도도 똑같았다.
일본 군도의 사용법인 군도의 조법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군도의 조법은 상대의 검이나 총검과 교전하는 내용이 전혀 없고, 오직 선 상태에서 빠르게 발도하여 적을 제압하는 내용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일본의 군도술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인 사무라이 환상의 재림이 아니라, 군도라는 장비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2차대전 당시의 경향을 감안하여 최소한 간단하고 합리적으로, 쉽고 빨리 배울 수 있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럽 세이버와 비교한다면 영국 말콤 폭스 대령이 주도한 군용검술의 간략화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8]
실질적으로도 일본 군도의 실전투입량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는데, 군도수리반의 군속으로 일했던 나루세 칸지(成瀬関次)의 나루세 수리반이 북지나방면군에서 9개월간 수리한 군도는 총 1681자루였는데, 이 중에서 약 500여 자루(30%)만이 실전투입에서 고장난 군도였고, 나머지 1100여 자루는 모두 무리한 시험베기[9]나 행군중의 사고에서 고장난 것이다.
즉 일본 군도는 근본적으로 서양 세이버의 전통을 이은 권위의 상징/계급의 표상/병과의 표시/지휘도로써의 위치를 가진 도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 군도가 그 당시 현대적인 개념이였나 하면 유럽국가보다 30년 늦게 폐지[10]된 것은 옹호 불가능으로, 자신들도 전투능력보단 보단 복식규정의 일부란 이유로 군도를 채택했으면서[11] 러일전쟁 등에서 군도로 효용성을 봤단 이유로 부사관급에 지급할 화기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끝냈을 방식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계속 사용했다는 것. 동시대 다른 나라 군대와 비교되는 특이한 행동이어서 1/35, 1/72 스케일의 소형 밀리터리 프라모델 피규어 중 구 일본군 피규어는 어떤 회사 제품이든지 일본도를 뽑아든 장교의 피규어가 들어있다.
9. 일본 군도와 한국군
창군 초기 국군은 장교들에게 따로 권총을 지급해줄 여력이 없었기에 일본군 출신 국군 장교들은 장교의 상징으로 전부터 쓰던 일본 군도를 계속 패용하고 다니곤 했다. 군복에서도 계급장 말고 다른 게 없으니 망토를 걸치고 다니기도 했다.[12] 군용차가 없으니 말을 타고 다니는 건 덤. 당연히 미군 고문관들은 이런 관습이 일본군을 연상시킨다며 질색했지만 한국군 장교들은 그럼 권총이랑 지프차를 줘 이XX들아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내외의 반발이 워낙 극심했던데다, 후에 권총도 지급되고 하면서 대부분의 장교들은 알아서 패용을 그만두게 되었다.일본도 패용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일본군 대좌를 지낸 김석원 장군인데, 메누키를 일본군의 육군삼련앵(陸軍三連櫻)에서 태극무늬로 바꾼 군도를 전속 부관이 들고 수행했다. 6.25 전쟁 당시 제6사단장이었던 장도영은 용문산 전투에서 포위되자 차고 다니던 군도로 할복자살을 시도했지만 부하 김용태가 칼을 빼앗고 설득하여 자살을 단념하였다고 한다. 김종원은 여순사건 당시 용공혐의자를 일본도로 참수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한국전쟁 때는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을 외치다가 중국국민당군 출신 상관에게 "네놈이 왜놈이야?"라며 욕 먹은 적도 있다. 플래툰(잡지)에 따르면 이 상관은 국부군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사람이라 일본 군도를 보유한 부하들을 왜놈의 개라고 비난하고 휴대를 금지했다.
10. 대중매체에서의 일본 군도
야인시대에서 황병관과 시비가 붙은 스즈끼 대위가 휘두른다. 당시 일본군에 대해 잘 모르는 시청자들은 왜 야쿠자도 아니고 엄연히 현대 군인이 뜬금 칼을 휘두르냐고 어이없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2차 대전 관련 FPS 게임 중 태평양 전쟁 배경게임에서는 한번은 나온다. 특히 반자이 돌격 등으로 해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즉사기인 경우가 많으니 달려오는 게 보이면 먼저 잡고 보자.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는 적 일본군들이 간혹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있으나 플레이어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반자이 어택을 할 시 등장하는 근접무기이며 맞으면 즉사하기 때문에 반자이 어택을 상대하기 피곤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
배틀필드 1943에서는 일본군 저격수가 근접무기로 신군도를 사용한다.
레드 오케스트라 2의 확장팩인 라이징 스톰에서는 직접 플레이 가능한데, 일본군 장교(분대장, 사령관)를 선택하여 써볼 수가 있다. 칼들고 돌진하면 반자이 버프를 받는데 이걸 이용하면 기관총 사격등에 의한 패닉상태에 빠지질 않기 때문에 빠른속도로 적진 근처의 엄폐물로 갈 수가 있다, 그리고 칼질은 즉사기이기 때문에 근접공격으로서도 좋아 미군 유저들이 주워다가 쓰기도 한다(...).[13]
[1] 비공식적으로 6.25 전쟁까지 사용됐다.[2] 현대의 고성능 베기용 도검들도 똑같이 단일 강재에 기름 열처리로 만들어진다. 어느 정도냐면 0.5% 탄소 함유량을 가진 강철로 일본도를 만드는 미국 콜드 스틸 사의 제품의 경우, 고정하고 칼날을 45도까지 휘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정도의 탄성에, 돼지 몸통을 한 번에 절단하는 절삭력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일본도적인 미적 요소가 없을 뿐이지, 성능만 보면 결코 나쁘지 않은 것이 이런 도신이다. 다만 육군도검강은 탄소량이 1.0% 정도로 아주 높은 편이라, 날은 아주 날카롭고 잘 안 죽겠지만 제조 여하에 따라서는 탄성이 그렇게 높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현대의 특수강 중 하나인 T-10은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예 실리콘을 첨가하여 질긴 성질을 부여한 걸 생각하면 그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3] 비단 군도만이 아니라 대전 후기 일본군 물자의 품질 관리는 모든 면에서 악명이 아주 높다.[4] 오장은 분대장이라는 의미이며, 상병 위에 위치한다. 곧 병장이라 할 수 있는데, 대우는 부사관 대우를 받았다. 사실 미국이나 다른 나라도 병장부터 부사관이다.일반적으로는 하사로 번역. 1940년대에 병장 계급이 신설됐고 그전에는 부사관의 부재시 상병들이 부사관의 역할을 대신하는 "오장근무상등병"이라는 계급이 있었다.[5] 이 책에서는 또 부사관들이 은근히 관급품 군도가 아니라 일본도를 들고 다니던 것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종군도의 사용을 말해주는 사례 중 하나. 또한 장인이 만들었더라도 실전 지향으로 만들어진 소화도(昭和刀)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실전에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6] 현재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일본도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특히 혈조를 판 것은 더욱 심하다고 한다. 물체를 절단하는 스에모노 기리시 바닥에 크게 부딪치면 조금 휘어서 칼집에 안 들어간다고까지 하며, 오히려 하몬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고도(古刀)와 같은 물건들일수록 강도가 좋다고 한다. 하몬이 아름답게 표현된 신도(新刀)나 현대도(現代刀) 들이 이런 문제가 많다고 한다.[7] 물론 장교에게 칼을 지급하지 않고 사비를 들여 맞춰야 하는 제도 자체의 문제기도 하다.[8] 이유는 비슷했다. 둘 다 도검의 전쟁터에서의 사용비율이 매우 적었고 당시 실전에서 굳이 시간 들여가며 심도있는 검술을 연마해야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최소한의 기량만 갖추는 선에서 끝내고자 한 것이다. 첨언하자면 검객이었던 알프레드 휴턴 대위는 이걸 아주 싫어해서 〈Cold steel〉 등의 검술서를 출판해가며 정면으로 반발했다.[9] 일본군 부사관이나 장교들이 모두 검술을 배웠던 것은 아니다. 군도 조법의 전군보급은 1940년이 되어서였고, 진검은 장교가 되어서 처음 잡아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검도를 배우기는 하지만 죽도와 진검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베기에 대해 익숙하지는 않았다. 통나무를 잘못 때리거나 철조망을 자르거나 기타 무리한 짓으로 칼날이 휘거나 이가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10] 대체적인 유럽국가들은 1차대전 종전(1917)이후 실전 도검을 더이상 채택하지 않았고, 장교의 복장 규정에서도 전투복에서는 삭제되었다. 미군의 M1941커틀러스도 M1917의 일부 설계변경품일 뿐이었다. 일본의 실전도검 폐기는 1945년 패전하고 나서.[11] 첫 신군도인 94식은 쇼와 9년(1934) 2월 14일자 육군복제중개정령으로 제식이 정해졌다. '육군복제중개정(陸軍服制中改正)'이란 육군 의복 제식 규정 중 일부를 개정한다는 의미이다.[12] 애초에 창군 초기에는 미군복이 제때 보급되지 않아서 그냥 잉여품 일본군복을 입었다.[13] 사실 미군이 주워다 쓰면 일본군 특유의 돌격시 괴성반자이~!을 지르지 않기 때문에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어 오히려 효율적이다...는 개뿔. 평소엔 돌격 차지를 해도 소련, 독일, 특히 일본과는 달리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않기 때문에 특히 시끄러운 일본과 많이 비교되는 좀 밋밋한 편이었으나 이 카타나를 줍고 돌격 차지를 시전하면 재미나게도 뭐라 뭐라 대사를 소리치며 달려간다. 카타나 줍고 기분 좋았나 보다 다만 일본군과 달리 반자이 어택 버프가 없어 몰래 뒤에서 적을 써는데는 좋지만 정면에서 돌격하기는 어렵다는 점 정도...사실 패치 때문에 일본군의 반자이도 효과 없어진 지 오래다 참고로 해당 게임의 업적 중 미군으로 군도를 주워 일본군을 베는 업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군 쪽은 군도와 관련된 업적 따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