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20:43:56

고모토 다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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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다이사쿠
河本大作 | こうもと だいさく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Koumoto_Daisaku.jpg
출생 1883년 1월 24일
일본 제국 효고현 사요군 사요정
사망 1955년 8월 25일 (향년 72세)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위안
군사 경력
복무 일본 제국 육군 (관동군)
1914 ~ 1932년
최종 계급 대좌
주요 참전 러일전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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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관동군의 참모이자 황고둔 사건의 주모자. 가와모토 다이사쿠로 잘못 읽은 경우도 간간이 보인다. [1]

2. 생애

일본 효고현 사요군 미카츠키정[2]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한 후 기병소위로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일본으로 돌아와 1914년에 26기로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 고급 참모로 부임하였다.

관동군에 있으면서 봉천군벌의 수장이자 북양정부의 육해공 대원수인 장쭤린이 일본의 만주철로 부설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보자, 장쭤린의 암살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장쭤린만 죽여 없애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잘 풀릴 것입니다. 장쭤린을 하야시키고 그 후임자가 모든 정책을 바꾸어 나간다고 누가 보증하겠습니까? 만약 더 다루기 힘들다면? 장쭤린을 죽여 없애면 그 아들 장쉐량이 반드시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며 그 부하들 역시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치안 유지 명분을 이유로 삼아서 봉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거에 만주를 점령한 다음 다른 사람을 찾아 우리 군대의 보호 아래 정부를 조직한다면 만주 문제는 한번의 수고로 영원함을 얻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 당시 고모토를 비롯한 관동군 과격파가 노리는 것은, 장쭤린을 제거하고 더 고분고분한 인물을 내세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장쭤린 사후의 혼란을 구실로 출병하여 만주를 통째로 병탄하는 것에 이르고 있었다. 후지와라 아키라 교수는 고모토의 목표를 만주사변의 프로토타입이라 평했다.

원래는 무라오카 죠타로 관동군 사령관이 다케시타 요시하루 소좌를 시켜 베이징에서 장쭤린을 암살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모토가 나서서 그런 일은 정부가 아니라 개인이 책임져야 하니,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후 다케다, 긴다 등의 심복들과 지도를 펼쳐놓고 논의한 끝에 철로 위에서 장쭤린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맨 처음의 목표는 봉천 서쪽 40킬로미터의 거류하였으나 그쪽은 중국의 감시가 엄중하여 황고둔이 장소로 정해졌다. 특공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 흔적이 많이 남아 은폐가 어렵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열차를 폭발시켜 죽이는 것으로 하였다.

그 후 이토 겐지로란 민간인으로 하여금 다리 아래에 폭탄을 설치하게 한 다음에, 예비 행위로 '있으나 마나한' 중국 민간인 세 사람을 끌어들이라고 지시했다.[3] 또한 독립수비대 2대대 4중대장 도미야 가네오를 포섭하고, 용산에 주둔한 공병 20연대가 봉천으로 자주 지원을 오는 것을 이용하여 이들도 끌어들였다. 그리고 관동군 병력을 동원하여 장쭤린의 행선을 감시하게 하였다. 한편 관동군 공병대는 6시간의 작업 끝에 600 kg짜리 폭탄을 설치했다. 그 후 1928년 6월 4일 새벽 5시 23분 장쭤린이 탄 열차가 황고둔 삼동교를 지나자, 고모토가 공병 중위 후지이 데이쥬에게 지시하여 폭탄 스위치를 눌러 터트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만주군벌 장쭤린은 폭사하였다.

사건 직후 일본 육군성과 참모본부 수뇌부에 의해 도쿄로 소환되었다. 도쿄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작전부장 아라키 사다오와 작전과장 오바타 도시로에게 이번 사건이 관동군의 소행임을 비밀리에 알려주었다. 그러자 일본 육군 내부의 만몽 병탄을 주장하던 '후타바카이' 모임의 장교들은 고모토를 지킬 것을 천명하며 고모토를 찾아가 격려하며 그의 뜻을 잇겠다고 외쳐댔다. 그들은 급기야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집무실에 쳐들어가서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 소리를 지르며 상급자인 육군대신을 윽박질러댔다.(...) 이러한 황당한 행패에 대해서 호사카 마사야스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고모토로 대표되는 군인들의 '대의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심정과 행동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의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모토는 육군성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그런데 일본 육군 수뇌부는 그를 더 추궁했다가 만약 일본의 소행이라고 밝혀질 경우 그것이 더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그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헌병대 사령관 미네 유키마쓰의 조사와 민정당의 추궁 덕분에 일본 내부에서도 차차 이 사건이 관동군의 소행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나카 기이치 수상은 12월 24일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와 소수인원이 장쭤린을 폭사시켰다며, 범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육군을 숙정하며 규율을 바로잡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각료들은 군법회의에 반대하며 군행정상의 사건으로의 처리를 요구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다나카 수상은 사건을 은폐하여 행정문제로 다루기로 결정했고, 1929년 4월 고모토 다이사쿠는 형벌 대신에 예비역에 편입되는 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1932년 군에서 예편한 후 남만주철도 이사와 산시산업주식회사(山西産業株式会社) 사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한 뒤 옌시산과 교섭하여 전범으로 체포되는 대신 공산군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가로 그의 군사고문이 되기로 하였다. 이어진 국공내전 중 12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지휘하며 옌시산의 산시 성을 지키기 위해 공산군에 맞서 싸웠다.

국공내전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혈전이었던 타이위안 전투에서 패하면서 홍군에게 붙잡혔다. 홍군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다가 1955년 옥사하였다.

옥사하기 직전에 황고둔 사건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자신이 황고둔 사건의 장본인임을 밝히면서도 '국가를 위한 희생'이었다며 끝까지 반성을 거부하였다.
[1] 河는 '가와(かわ)'로 훈독할 수도 있고, '고(こう)'로 훈독할 수도 있다.[2] 현 사요정[3] 사건 직후 살해하고 현장에 놓인 시신 품 속에 국민혁명군 신분증과 명령서를 넣어 이 테러가 장제스의 소행으로 위장하려 했으나, 두 명은 살해되었지만 한 명이 도망쳐 봉천군벌 정부에 사실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