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6:42:57

아사카 야스히코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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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8년(736년) 강하
덴표 11년(739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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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11년(739년) 강하
덴표칸포 3년(751년) 강하
덴표칸포 4년(752년) 9월 12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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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칸포 7년(755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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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호지 3년(759년) 복귀
덴표호지 8년(764년) 강하
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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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진고케이운 3년(769년) 5월 강하
호키 2년(771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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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2년(771년) 7월 복귀
호키 2년(771년) 9월 강하
호키 3년(772년) 12월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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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5년(774년) 12월 복귀
엔랴쿠 6년(787년) 2월 5일 강하
엔랴쿠 21년(802년) 12월 27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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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23년(804년) 6월 21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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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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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덴초 2년(825년) 7월 6일 강하
덴초 3년(826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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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덴초 5년(828년)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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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조와(承和) 2년(835년)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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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承和) 11년(844년) 강하
닌주 3년(853년) 강하
조간 4년(862년) 강하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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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간교 4년(880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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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나 8년(884년) 6월 강하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복귀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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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간표 원년(889년) 5월 13일 강하
간표 3년(891년) 12월 27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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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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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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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조헤이 6년(936년)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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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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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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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랴쿠 4년(950년) 강하
덴토쿠 4년(960년) 10월 2일 강하
강하
고호 4년(967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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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겐 2년(977년) 4월 17일 복귀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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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貞和) 5년(1016년) 강하
간닌 2년(1020년) 12월 26일 강하
만주 2년(1025년) 12월 29일 강하
겐에이 2년(1119년) 8월 1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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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쇼 4년(1180년) 강하
분에이 7년(1270년) 12월 20일 강하
고안 10년(1287년) 10월 4일 복귀
에이닌 2년(1294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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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포 3년(1319년) 2월 18일 취득
가랴쿠 3년(1326년) 6월 13일 강하
겐토쿠 2년(1330년) 2월 11일 복귀
랴쿠오 원년(1338년) 8월 11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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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나 5년(1356년) 1월 6일 강하
게이초 10년(1605년) 강하
게이초 14년(1609년) 강하
간분 3년(1663년) 11월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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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포 3년(1743년) 10월 27일 강하
분세이 9년(1826년) 강하
게이오 2년(1866년) 강하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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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강하
메이지 23년(1890년) 12월 24일 강하
메이지 25년(1892년) 12월 26일 강하
메이지 26년(1893년) 11월 15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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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2년(1899년) 9월 2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4월 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11월 27일 강하
메이지 36년(1903년) 2월 6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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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년(1904년) 11월 14일 강하
메이지 39년(1906년) 10월 28일 강하
메이지 41년(1908년) 11월 8일 강하
메이지 43년(1910년) 7월 20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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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4년(1911년) 4월 17일 강하
다이쇼 3년(1914년) 1월 21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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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4년(1915년) 9월 3일 강하
다이쇼 7년(1918년) 5월 29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7월 24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11월 9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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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2년(1923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5월 3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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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5년(1926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13일 강하
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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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쇼와 4년(1929년) 12월 2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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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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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초대 아사카노미야
제3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아사카 야스히코
朝香鳩彦
파일:야스히코 왕.jpg
구칭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朝香宮鳩彦王)
출생 1887년 10월 20일
교토부 교토시
사망 1981년 4월 12일 (향년 93세)
시즈오카현 아타미시
재임기간 제3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1937년 12월 2일 ~ 1938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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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신위 -(王)- → (황적이탈)
경칭 -전하(殿下)- → (황적이탈)
부모 부친 아사히코 친왕(朝彦親王)
모친 츠노다 스가코(角田須賀子)
형제자매 9남 9녀 중 17째(8남)
배우자 노부코 내친왕[1](允子内親王)
자녀 2남 2녀)
나베시마 키쿠코(鍋島紀久子)
아사카 타카히코(朝香孚彦)
오토와 타다히코(音羽正彦)
오규 키요코(大給湛子)
학력 가쿠슈인
도쿄육군지방유년학교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종교 신토기독교 (가톨릭)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0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08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장
병과 보병
주요 보직 제1근위사단장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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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야스히코 왕 소쿠타이.jpg
소쿠타이(束帯)를 입은 야스히코 왕

1. 개요2. 초기 생애3. 중일전쟁4. 태평양 전쟁5. 전후6. 가족

[clearfix]

1. 개요

일본구황족이며 중일전쟁에서 활약했던 군인. 대일본상이군인회(大日本傷痍軍人会)의 총재를 맡은 바 있기도 하다. 난징 대학살의 원흉으로 강하게 의심되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촌수를 따지면 쇼와 덴노(히로히토)에게는 35촌 증조할아버지뻘인 인물이며, 쇼와 덴노의 황후인 고준 황후(나가코)의 숙부 중 하나. 이방자 비에게도 숙부가 된다.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園祥子)의 8녀인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쇼와 덴노의 고모부가 되기도 한다.

즉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고준 황후의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인 셈.

2. 초기 생애

1887년 10월 2일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측실 츠노다 스가코(角田須賀子)의 8남으로 출생했다. 일본의 4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후손.

일본 황족 남자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 어릴 때는 황족과 화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다가 육군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유학하여 프랑스 육군사관학교[2]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프랑스 유학 당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나루히사 왕은 사망하고 야스히코 또한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1926년 대좌로 승진했다. 1930년에는 육군대학의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1근위사단장이 되었다. 1935년에는 군사참의관이 되었는데, 이 자리는 쇼와 덴노에게 영향력 있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황도파의 과격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2.26 사건이 벌어지자, 아사카는 이를 지지하여 쇼와 덴노에게 쿠데타를 승인할 것을 권고했으나, 쇼와 덴노는 이를 거부하고 쿠데타 부대에게 원대복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쇼와 덴노와 아사카노미야는 사이가 벌어졌고, 이후 1937년 아사카는 야전직으로 전출되어 상하이 파견군을 맡고 있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사령관 아래에서 근무하였다.

3. 중일전쟁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대본영은 애초부터 對중국 전면전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상하이 이상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지만, 중지나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반성하지 않는'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는 것이 필수라고 여겨서 독단적인 난징 공격을 실시했다. 이 때 야스히코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난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마쓰이는 일본군이 처음으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군대의 군기를 엄정히 유지할 것이며, 난징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난징에 일장기도 게양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대민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정상적인 방침을 세웠다. 그러다가 1937년 12월, 마쓰이가 결핵에 걸려 몸져눕자 아사카가 사령관 대리로서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 공략을 지휘하였다.[3]

이후 포로 학대와 민간인 공격 명령을 내렸다는 말도 있으나, 이 명령은 아사카가 직접 내렸다는 설도 있고, 조 이사무(長勇) 소장이 내렸다는 설도 있다. 결국 조 이사무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한 뒤 할복 자살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4. 태평양 전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92px-Asakanomiya_yasuhiko.jpg
1940년대 당시의 야스히코

1938년, 아사카는 본토로 돌아와 대본영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 후 군사 지휘는 맡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자, 제2차 세계대전과 삼국동맹을 주장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츠노다 도모시게를 중심으로 하여 아랫동생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4], 쇼와 덴노의 동생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그리고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와 함께 도조 히데키 암살로 시작하여 막 나가는 군부 정권을 엎어버리는 쿠데타에 참여했다.

하지만 쿠데타의 과격성에 놀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실행하기 전에 자수해서 실패했다. 그러나 물증도 딱히 없었고, 완전히 발각된 것도 아니라서 의혹이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쿠데타 참여자 중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책임자가 대충 묻어버린 탓에 상부에 알려지지도 않아 쇼와 덴노는 그런 사실도 몰랐으며, 전후에야 밝혀지게 된다[5].

웃긴 건 저기 쿠데타 암살 명단 중에 자신과 고노에 후미마로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은 황족이고 고노에 후미마로는 유명한 후지와라 씨족의 후예인 고노에 가문의 당대 당주라 대놓고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진짜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자신과 고노에 또한 100% 숙청 확정이다. 오히려 그 덕분에 자기 목이 붙은 셈. 이쯤 되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자수한 게 본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1945년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하고 미국몰락 작전을 계획할 때 또 사고를 친다. 무언가 하니 결호작전과 육해군의 통합. 그러나 아사카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더 이상의 항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쇼와 덴노와 일부 신료들의 결단[6]에 따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일본 제국은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야스히코가 이런 개드립을 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이 자가 황도파라는 것이고, 내면적으로는 전후의 전범재판 기소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복을 하지 않고 미군의 인명 피해를 계속 내 미군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고 간다면, 일본은 미국에게 점령당하지 않고 본인은 죽음을 면한다. 즉, 지 목숨 구하려고 본인 백성들을 마치 전쟁터에 개 몰듯 몰아대서 포화에 갈아넣겠다는 것이라는 심산이었을 것으로서, 사실이라면 그는 그야말로 본인밖에 모르는 치사한 인간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랬다고 하더라도 미군 수뇌부가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일본 제국 본토 침공에 대해 망설였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금상천황(今上天皇)으로 재위하던 쇼와 덴노 또한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잘 되어도 폐위되거나, 나아가서는 혹시라도 자국의 군주제가 폐지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불안해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망한 군주제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몰아내고 연합군으로 전향해 1년 동안 이탈리아 내전을 치른 결과 무솔리니는 죽었음에도 국민투표에 따라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되었다.[7]루마니아 왕국은 종전 이전에 추축국에서 연합군으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 소련에게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에 왕가가 쫓겨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채 쇼와 덴노는 황위를 유지하고 전후에도 재위했으며, 황실도 무사했다.[8][9] 아예 왕정이 폐지된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연합국이 강제로 폐지시킨 게 아니라 국민투표에 따라 결정된 것이고, 그 결과도 찬반이 거의 반반으로 갈렸기 때문에 '전후 추축국=군주제 폐지'라는 공식은 애초에 맞지 않다. 태국도 추축국이었지만 왕실이 무사했다. 이처럼 전후 추축국 중 군주국의 공화국 전환은 소련 점령 지역이 아닌 이상 연합국의 강제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의향이 작용했고, 일본은 황실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이 전쟁 중에도 부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10] 황실은 그 영향력을 다행히 상당부 지켜냈다.

5. 전후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이 아사카 야스히코[11]를 전쟁 범죄 혐의로 연합국 점령군 최고사령부에 기소를 한 것 때문에 그는 GHQ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의 일본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 방침에 따라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 황족을 기소할 경우 그들을 우러러보던 일본 사회가 반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 이러한 일본의 전범들 처벌 문제 때문에 미국중국의 사이가 크게 악화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국공내전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1947년 8월 14일, 아사카의 가족들은 연합국 점령군 최고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강등당하였다. 아사카의 가족들은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동안 살고 있던 자택 또한 일본 정부에게 압류당하였다. 법적인 처벌은 면했지만 그래도 명예와 재산을 상당부 잃어버렸다. 아사카 일가의 저택은 이후 수상 관저로 잠시 쓰이다가 현재 도쿄도 정원미술관(東京都庭園美術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아사카와 그의 가족들은 시즈오카현아타미시의 별장으로 이주하였다.
파일:Tokyo_Metropolitan_Teien_Art_Museum.jpg
도쿄도 정원미술관

1951년에 아들과 며느리, 기타 가족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전후에는 골프를 주된 취미로 삼으면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골프 애호는 전쟁 이전에도 여전히 그대로여서, 예전부터 도쿄 골프 클럽(東京ゴルフ倶楽部[12])의 명예 총재직을 맡기도 했을 정도이다.

이후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의 자택에서 계속 살다가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당연하지만 천주교식으로 치러졌다.

6. 가족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8녀인 후미노미야 노부코 내친왕과 결혼, 2남 2녀를 낳았다.

===# 구황족 가계도 #===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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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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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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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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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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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지 천황의 제8황녀이다.[2] 생시르, 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홈페이지.[3] 여담이지만 장택상의 형인 장직상이 1937년 중일전쟁에 참가해 아사카를 만난 적이 있다. 이 대화에서 장직상은 "아사카를 만난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발언했다. 이후 장직상은 황기 2600년 봉축 행사에 참가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남선전기의 사장을 맡는 등 친일 행적 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여기서 이 장직상은 "한국 사람들이 지원병제를 실시하니 기뻐하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4] 말이 동생이지 아버지 아사히코 친왕이 워낙 늙어서까지도 정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고작 이 둘의 나이 차이는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동갑이긴 해도 야스히코가 더 일찍 태어났지만 말이다. 더불어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역시 메이지 덴노의 내친왕이자 노부코의 여동생인 도시코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야스히코 왕과 나루히코 왕은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이 된다.[5] 참여자들의 이력이 천황의 친동생들부터 친왕에 육군 대장 등 정말로 화려한데다가, 이미 군부 내에서도 도조 히데키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숙청 대상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다카히토 전하가 허락하셨으면 넌 죽었어!"라는 츠노다의 비웃음만 받고 끝났다.[6] 이중 쇼와 천황이 궁성사건 등 군부의 완고한 반발을 무릅쓰고 항복을 시인한 것을 일컬어 천황의 성단(聖斷)이라고 한다.[7] 국민투표 결과는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여론이 갈려서 결과가 거진 반반이었다. 북부의 주된 여론이었던 왕실 폐지가 근소한 차이로 결국 이기게 되었지만, 만약 왕실 유지 측이 이겼다면 연합국이 굳이 왕실을 폐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8] 다만 대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덴노를 비롯한 일본 황실은 평범한 입헌군주제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위상이 비교적 낮아져버렸고, 일본 황실의 직궁가(다이쇼 덴노의 직계후손)를 제외한 세습친왕가와 화족들도 전원 평민으로 전락했다(신적강하). 이는 직궁가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었는데, 왜냐 하면 당시에도 직궁가는 그러잖아도 남계가 부족해서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와 직궁가를 배출한 간인노미야, 특히 후시미노미야와 그 분가들로 남자들의 수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는 이미 대가 단절된 상태였다.[9] 근데 사실 미군정은 전쟁 범죄 의혹이 있는 황족만 강등시키려고 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대거 강등된 이유는 황실의 큰어른 뻘이지만 이전부터 자신의 황족 신분을 싫어하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황족들에게 황적 이탈을 독려했기 때문이다.[10] 국화와 칼 제2장의 내용에 따르면, 미군이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의 진술서 중 천황을 비방하는 내용이 적힌 것은 단 세 통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본인 병사들이 포로로 잡힐 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심문 훈련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진짜 의견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음에도 이러했다. 심지어는 그 세 통마저도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 건 한 통뿐이었다.[11] 더이성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궁가인 '아사카노미야'는 평민들의 성처럼 그냥 '아사카'가 되었다. 당연히 왕 작위도 박탈.[12] 한자어 같지만 '클럽'의 외래어 표기인 쿠라부(クラブ)를 각 글자에 같은 독음의 한자를 대응시켜 만든 아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