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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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식(王瑜植) | |
1870년[1] 2월 20일 ~ 1930년 (향년 60세) | |
복무 | 조선군 → 대한제국군 일본군 |
기간 | 1895년 ~ 1930년 |
임관 | 무과 급제 |
최종계급 | 대한제국군 부령(중령) 일본군 소장 |
최종보직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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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제남(濟南)[2].2. 생애
1870년 2월 20일 태어났다. 1886년(고종 23) 부사용(副司勇:종9품)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1895년에 조선군 훈련대 소속 무관으로 임관했다. 참위(소위) 시절에 일본 유학을 보냈다. 고종이 군부 내의 박영효 같은 친일 장교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8기를 특별과정으로 졸업했고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
복귀해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지냈고 1899년에 부위(중위)로 진급했다. 1901년에 정위(대위)로 진급, 1904년에 참령(소령)으로 계속 진급했다. 군부 교육국 교육과장으로 근무했고 보병과 포병 부대에서도 근무했다. 군사법원 판사도 지냈다. 군대 해산 후에는 근위보병대대(조선보병대)의 대대장으로 근무했고 당시 계급은 부령(중령)이었다.
조선보병대가 일본군 소속의 조선주차군으로 귀속되면서 그도 따라 이동했다. 1920년에 일본군과 계급이 합쳐지면서 보병대좌로 진급했다. 그후 소장까지 진급했고 1930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