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7 00:58:59

가와베 마사카즈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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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베 마사카즈
[ruby(, ruby=)]
파일:카와이.jpg 파일:external/forum.valka.cz/Kawabe_Masakazu.jpg
생몰년도 1886.12.05 ~ 1965.03.02 (78세)
최종계급 대장
1. 개요2. 행적

1. 개요

일본군의 장성.

2. 행적

파일:kawabe-12.png
젊은 시절의 가와베

무타구치 렌야와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임팔 작전을 승인했다. 이 멍청한 행동으로 일본군을 끔살 시킨다. 게다가 작전이 누가 봐도 완전히 실패한 뒤에도 체면 때문에 무타구치와 책임 떠넘기기를 하느라 철수가 늦어서 더더욱 많은 아군을 팀킬했다.

심지어 중일전쟁의 계기인 노구교 사건 당시에도 무타구치의 상관으로서 무타구치가 독단적으로 일으킨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묵인, 방조했다. 게다가 항공총군 사령관시절엔 제4항공군 사령관에 도미나가 교지를 임명시키라고 조언을 했던 전적까지 있었다. 1945년 12월 2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짧게나마 감옥살이를 한 무타구치와는 달리 완전하게 불기소 석방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린 무다구치 렌야와는 달리 그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에겐 아버지같은 존재로 불리웠고, 심지어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가와베 마사카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장례식 때 수많은 장병들과 부하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죽음의 철도 건설 당시 버마 방면군(緬甸方面軍)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가 임팔 작전 패전 직후인 1944년 8월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신규 부임한 기무라 헤이타로와 교체되고 일본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패전 이후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 방면군 포로학대의 책임을 지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당했으나 죽음의 철도 공사기간(1942년 9월~1943년 10월) 중 버마방면군 사령관은 가와베 마사카즈가 맞다.

가와베 마사카즈는 패전후 극동군사군사재판을 받았으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런 재판결과 때문에 리처드 마이니어(Richard Minear) 매사추세츠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1970년대에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라는 책을 집필하여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부당함과 부실함을 비판하면서, 그 근거 중 하나로서 죽음의 철도 공사 당시 버마에 있지도 않았고 포로학대를 지시한 증거도 없는 기무라 헤이타로에게 버마에서의 포로학대혐의를 씌워 유죄 판결을 내린 반면, 당시 버마방면군 사령관이자 죽음의 철도 공사를 완공시킨 가와베 마사카즈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 나간 사실을 들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개전에 깊게 관여한 기무라를 죽이기 위해 덮어씌웠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