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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제2대 버마방면군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 木村兵太郎 | Kimura Heitarō | |
출생 | 1888년 9월 28일 |
사이타마현 | |
사망 | 1948년 12월 23일 (향년 60세) |
도쿄도 스가모 형무소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1908년 ~ 1945년) |
최종 계급 | 대장 |
학력 | 일본육군사관학교 (20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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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구 일본군의 육군 포병 장교.삼간사우에서 사우에 해당되는 인물로, A급 전범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7인 중 하나이다.
행적으로 보면 무능력한데다가 희대의 탈영까지 저지른 졸장에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모두 관여한 전범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후에 저지르지도 않은 민간인 대량학살 누명을 뒤집어 쓴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888년 9월 28일 사이타마에서 출생한 기무라는 어린 시절은 히로시마에서 보냈고,[1] 1908년 육사 20기로 졸업한 후 야포병 제16연대에 소위로 부임했다. 1916년 육군대학 28기를 수료한 기무라는 1917년부터 참모본부에서 일했는데 1922년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23년 귀국 후 소좌로 승진한 기무라는 1925년까지 육군대학에서 교관직을 맡다가 1926년 포병 제24대대장으로 임명받아 현직부대로 돌아왔다.1928년 중좌 계급이었던 기무라는 포병감 부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 런던 군축조약에 일본대표의 일원으로 참석도 했다. 1931년 대좌로 승진해 야포병 제22연대장을 했는데 1935년 육군성의 정비국 과장을 거쳐 1936년 소장으로 승진해 육군성 병기국의 국장에 올랐다. 1939년 중장으로 승진해 제32사단장으로 부임한 기무라는 1940년 만주로 파견되어 관동군 참모장을 지냈다. 1941년 4월부터 1943년 3월까지는 육군차관이었다가 이후 군사참의관 겸 무기행정본부장을 지냈고, 1944년 8월 30일 버마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현지에 부임했다.
2.2. 버마에서의 기무라
기무라의 부임 이후 버마 방면군은 버마 전선에서 벌어진 170고지 전투, 람리 전투, 메이크틸라 전투 등에서 줄줄이 패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1945년 영국군이 버마로 진공을 개시하자 버마의 방위는 수세에 몰렸다. 이때 기무라는 영국군의 버마 침입을 알고는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아무런 지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2] 4월 13일 버마의 수도 랑군 북서부의 방위선을 지휘하던 28군 사령관이던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현지에서 벗어나려는 기무라에게 "전쟁 진행 속도가 빨라 랑군이 전장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랑군이 공격받는데 방면군 사령관이 이동하거나 달아나면 작전상 곤란을 초래한다."라고 비판했다.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다시 "방면군 사령부를 빨리 시암 고원으로 전진시켜 제 1선에서 지휘하시오."라고 진언했지만 기무라는 이를 기각했다. 방면군 참모장이던 다나카 신이치(田中新一)도 "방면군 사령부는 의연하게 랑군에 남아 현실적인 통제를 가하면서 정신적으로 중심을 잡아야 방면군 스스로가 랑군을 지켜낸다."고 주장했지만 기무라는 다나카가 출장을 나가 있는 때를 틈타서 사령부의 철수를 결정했다. 4월 23일 기무라는 전선에서 고생하던 예하 부대 및 일본이 지원하던 버마 정부의 바 모우 수상, 자유 인도 정부의 찬드라 보스 주석 및 일본 거류민들을 그대로 놔둔 상태로 막료들과 함께 비행기로 랑군을 탈출해 태국 국경지대인 몰메인으로 철수(사실상 도주)했다.
기무라를 포함한 버마 방면군 사령부의 랑군 포기로 방면군의 지휘계통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라와디 강 서부에서 영국군과 교전하던 제28군은 적진에 고립되어 여기서 탈출하려던 부대원의 반수 이상이 죽는 궤멸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참고로 보통 전투에서 사상자 20~30%면 전멸로 간주되는데, 제28군에서는 사망자만 50%가 넘었다.[3] 버마와 인도에서의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총 약 14만 4천 명이었는데, 버마에서의 전사자 중 무려 52% 가량인 약 7만 5천 명이 기무라 헤이타로가 도망친 직후에 나왔다고 한다.[4]
즉 기무라가 제대로 된 지휘만 했었다면 적어도 그럭저럭 버마 방어전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남은 사람들은 육지로 탈출했는데, 거기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도 이 당시에 버마에 있었는데, 기무라가 사령관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하다가 자신의 부대원들이 분리되어 정글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임종 전 혼수 상태에서 "적중 돌파로 분리된 부대를 어떻게 해서든 장악해야 한다!"[5]는 단말마를 남겼을 정도로 죽을 때까지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스스로 도망쳐 군인으로서의 지휘 책임도 저버렸고, 동맹국의 요인들도 깡그리 무시하며 달아난 기무라 헤이타로의 처사는 버마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기무라한테 관심이 죄다 쏠리는 바람에 똑같이 무단이탈을 한 도미나가 교지의 적전도주를 크게 징벌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무라는 도망 이후 본토에서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1945년 5월 7일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들의 기강이 얼마나 해이했는지 보여주는 셈.
2.3. 극동국제군사재판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된 기무라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기무라의 죄목은 제 3차 고노에 내각, 도조 내각에서 육군차관을 지낸 일과 전쟁 포로에 대한 학대 혐의였다. 당시 일본의 육군장관은 총리대신이 겸했기에 실질적인 군사 책임자로서 기무라가 지목이 된 것이었다.기무라는 육군차관 재직시의 책임으로 기소되었으며,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서의 행동은 기소되지 않았다. 동남아 지역의 포로 학대와 미얀마에서의 죽음의 철도에 대한 책임자로서 기소되기도 하였으나[6], 후술할 바와 같이 기무라는 죽음의 철도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해당 지역 총사령관으로써 책임을 묻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운 기소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기무라의 변호사를 포함한 일본 측에서는 기무라가 도조의 길동무 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여기며 대체로 기무라가 사형이 될 가능성이 적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하지만, 기무라에 대한 11명의 판사투표는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 주동자들에게만 유일하게 엄한 처벌을 내리고 나머지 일본 전범들에게 매우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으로 유명한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을 제외한 10명이 유죄로 인정했고 미국, 영국, 중국,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네덜란드의 7명 판사들이 사형에 찬성했다.
당시 기무라 헤이타로는 처음부터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형 판결 전날에 낙관적인 입장이었던 부인인 기무라 카누이(木村可縫, 1899~1993?)[7]에게 처음부터 결론이 붙어 있는 재판이라며 자신이 풀려날 것을 단념하라고 말했다.
2.4. 최후
결국 1948년 12월 23일 기무라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화장 후 유골 대부분은 같이 처형된 다른 A급 전범 6명의 유골과 같이 태평양에 뿌려졌다.기무라의 묘는 현재 도쿄 아오야마 다테야마 묘지에 있는데, 사후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겨우 빼돌린 유골 중 일부는 1960년 건립된 순국칠사묘에도 들어가 있다.
기무라의 사후 아내인 기무라 카누이는 1954년 창설된 전범자의 유족회인 <시라기쿠(白菊) 유족회>의 2대 회장을 역임하고[8] 처형된 A급 전범들만의 유족회인 '칠광회(七光会)'를 운영하는 등 전범자들의 명예회복(?)에 나섰으며, 헤이세이 시대 초반인 1991년 8월 기준으로도 생존해 있었다지만, 그 이후 근황은 알 수 없다. 1993년 시라기쿠 유족회가 회원의 고령화를 이유로 해산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정황상 그녀가 1993년 사망하고 회장이 사망한 여파로 시라기쿠 유족회가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나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나마 말년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1985년[9]에는 총리 관저와 협의하여 A급 전범의 위패 합사를 취하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10] #
그리고 기무라 헤이타로 부부의 자식 2명 중 장남인 기무라 타로(木村太郎, 1931~)는 일본은행 감사를 지내다가 1993년 은퇴한 후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A급 전범 신주 분사를 신사 측 주도로 실현시키려고 했으며, 2015년 9월 문예춘추지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 그리고 장녀인 기무라 유리코(木村百合子, 1929~)는 조슈 누마다 번주 가문의 후손인 철도 기술자 토키 히로미츠[11]와 결혼했다.
3. 버마의 도살자?
한국과 일본에서는 버마의 도살자(ビルマの屠殺者)[12]라고 많이 불리며 버마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른 인물로 알려졌다. 왜 한국과 일본 한정이냐면, 영어 등 다른 언어로 Slaughter of Burma를 검색해보면[13] 기무라 헤이타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마 전역의 한 당사자였던 영국이나 미국 사이트를 찾아봐도 위에서 언급된 대량학살은 거론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의 악행에 가장 피해를 입었다는 미얀마측 사이트를 뒤져봐도 딱히 당시 일본군의 학살에 대한 기록이 없다.애초에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기무라 헤이타로가 미얀마에서 100만 명이나 학살한 것이 맞다면 이 규모는 난징 대학살의 40만 명을 크게 상회하는 숫자인데, 난징대학살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단기간에 4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00만은 어떨까? 이게 맞다면 미얀마 어딘가에서는 유골로 된 땅이 있어야 할 정도로 많은 수의 유해가 있어야 정상이다. 100만 명이 죽었다면 이같은 증거들이 남을 수 밖에 없다. 이정도 규모의 학살이 숨긴다고 숨겨질 수 있을 리도 없고.
다만 중국 측 자료 중에서는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해외판에서 A급 전범 14명의 죄상에 대해 밝힌 적이 있는데, 여기서 기무라 헤이타로는 '미얀마 전선에서 침탈 행위를 일삼은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버마 전선에서 기무라의 행적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 인민일보 일본어판[14]
사실 기무라 헤이타로가 일본 본토의 군사참의원에 있다가 버마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1944년 8월은 임팔 전투(1944년 3월~7월)까지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고 이미 버마 전역의 전황은 기울어 일본군이 수세에 몰린 상태이기도 하다. 또한 1945년 3월에는 영국의 지원을 업은 버마 국군이 대규모로 일본군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1945년 5월 수도 양곤이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는 시점에서 버마 지역 대부분에서 이미 일본군은 축출된 상태였다.기무라의 부임 시기에 버마에서 발생한 일본군 전쟁범죄로는 1945년 7월 7~8일 버마 원주민 637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칼라공 마을 학살사건(Kalagong massacre) 정도가 유명하나[15], 이 사건은 일본군 책임자들이 따로 있어 전부 버마 현지에서 재판받고 처벌받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무라가 최고 사령관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는 해도 이 학살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16] 또한 그의 포로학대 사례로 거론되고 실제로 극동군사재판에서 기소되기도 했던 죽음의 철도(1942년 9월~1943년 10월)나 바탄 죽음의 행진(1942년 4월)등의 사건[17]은 전부 그의 버마전선 부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기도 하고,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그가 비밀명령을 내렸다는 얘기도 근거가 없다.
즉, 나무위키 등 국내에 유통되던 기무라 헤이타로 정보는 거의 다 일본 웹사이트에서 출발한 소위 삼간사우 스레드, 다시 말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어난 일본군의 졸전과 비인도적 범죄, 잔학행위는 (일본군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이 아니라) 이들 몇몇 무능하고 사악한 일부 장군들에 의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출처불명의 일본 인터넷 스레드, 더 거슬러 올라가면 패전과 전쟁범죄의 책임을 몇몇 군장성에 돌리고 싶은 일부 구 일본육군 출신들의 주장에 기원을 두고 있을뿐,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버마 전선(영문) 거기에 학살이나 위안부 관련한 행적과 망언, 주변인들의 평가 등 이전까지 이 문서에 기록되었던 각종 기술내용 중 그 신뢰성이나 1차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리 찾아봐도 전혀 없다.[18]
사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기무라 헤이타로가 처형된 사유는 버마에서의 행적보다는 그의 육군차관 시절 행적과 훨씬 큰 관련이 있다. 당시 육군대신은 도조 히데키가 겸임하고 있었고 기무라는 육군차관으로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조력하였는데, 특히 진주만 공습에서 관여하였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무라 헤이타로에 대한 판결문(569페이지)을 보면, 육군차관으로서 그 지식을 활용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개전하는데 도움줬다는 점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극동군사재판 관련 자료 어디를 찾아보아도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에서 대량학살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며 실제로 그게 기무라 헤이타로가 처벌받은 이유도 아니다.
버마에서의 포로학대 혐의도 당시 기무라 헤이타로가 사형 판결을 받은 이유였으나 사실 이는 죽음의 철도 같은 구체적인 잔혹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 때문이 아니라 종전 당시 일본군 버마전선 최고 책임자로서 처벌받은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다. 왜냐하면 죽음의 철도는 1942~1943년 10월까지 공사된 것이고 기무라 헤이타로는 1944년 8월 버마에 최초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19] 그렇다고 해서 당시 일본에 있던 기무라 헤이타로가 죽음의 철도를 지휘한 증거도 없다. 때문에 매사추세츠 대학교 역사학과 리처드 마이니어(Richard Minear) 교수는 1970년대에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라는 책을 집필하여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부당함과 부실함을 비판하였는데, 그 근거 중 하나로서 죽음의 철도 공사 당시 버마에 있지도 않았고 포로학대를 지시한 증거도 없는 기무라 헤이타로에게 버마에서의 포로학대혐의를 씌워 유죄 판결을 내린 사실을 들기도 하였다.
또한 죽음의 철도를 둘러싼 공사 당시의 기록과 전후 재판 기록 등 2천페이지에 달하는 1차 사료를 집대성하여 2005년경 출판된 책 The Thailand-Burma Railway, 1942-1946#에서도 기무라 헤이타로의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문 원문을 봐도, 기무라 헤이타로가 적극적으로 포로학대를 지시했다는 언급은 없으며, 유죄판결의 근거로는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전선 최고책임자로서 포로학대를 방지하고 감독할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 임무를 소홀히 하였음이 언급될 뿐이다(570페이지)[20]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무라 헤이타로의 버마에서의 대량학살 혐의와 이에 관련된 일화들은 사실상 전부 후대의 창작이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버마에서의 대량학살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난 것과는 별개로, 전술한 것처럼 여러 전쟁들의 개전에 관여한 것과 희대의 적전도주 기록 등을 보면 긍정적인 평가가 사실상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으며, 심지어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기무라는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일할 때에 겉으로는 군인들에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실제로는 포로 학대를 방치했다고 기술된 것을 보면, 높은 위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하들의 전쟁 범죄를 알면서도 눈감아준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21][22]
4. 주요 이력
- 1929: 육군포병학교 강사
- 1929: 정식 임관
- 1929~1931: 런던 군축 회의 당시 일본 대표단 일원
- 1931~1932: 육군 22포병연대장
- 1932~1934: 육군포병학교 강사
- 1934~1935: 해안포병학교 조교수
- 1935~1936: 통제부, 경제동원국, 전쟁수석장관
- 1936~1939: 육군 전쟁기술부 책임자
- 1937~1939: 육군본부 참모
- 1939~1940: 32 사단 사단장
- 1940~1941: 육군 만주 사령관
- 1941~1943: 육군 차관
- 1943~1944: 최고 전쟁위원회 위원
- 1944~1945: 버마 방면 사령관
- 1948: 전범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
[1] 이 때문인지 기무라 헤이타로는 자신의 실질적인 고향은 히로시마라 여겼다고 한다.[2] 이는 후술할 출처 불명의 야사가 아니라, 다무라 마사타로(田村 正太郎, 1908~?)가 저술하고 1985년 1월 출판된 '버마 탈출기·외교관이 본 버마 방면군 궤멸의 날'에서 인용한 정보라고 한다.[3] 임팔 전투 사상자 비율이 약 60%였다.[4] 임팔 전투에서는 기무라의 적전도주 후 일본군 사망자의 약 70% 정도인 5만 2천 명이 사망했다.[5] 해석하자면 퇴각하면서 잃어버린 내 부대원들을 어떻게든 구출해야 한다는 의미. 시게사부로는 평생 동안 부하들을 살리지 못한 자책과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다.[6] 극동군사재판 당시 검찰은 기무라에 대해 죽음의 철도가 있었을 적에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서 (죽음의 철도에) 가까이 있으면서 (강제노동 과정에서의 포로 학대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책임을 물었고 실제로 영미법계의 국가에서는 무거운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이 고의 또는 부주의로 타인을 죽게 한 경우 모살·고살로 판결된다.[7]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8] 1대 회장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부인 야마시타 히사코(山下久子)였다.[9]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논란이 일었다.[10] 그러나 도조 히데키의 유족 측에서 "A급 전범이 합사되고 있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총리가 공식 참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도쿄 재판의 전승국 측 이론"이라고 우기면서 합사 취하는 좌절되었다.[11] 土岐實光, 1922~2011. 누마타번(오늘날의 군마현 누마타시) 번주를 맡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자작 가문이 된 토키(土岐) 가문의 후손으로, 일본 국유철도의 설계기사장으로 일하며 DD51형 디젤기관차의 주임 설계기사를 맡았고, 이후에는 도큐차량제조의 전무 이사로서 올 스테인리스 철도 차량의 국산화와 일본 국철으로의 도입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버마의 도살자라는 별명은 재판 당시 죽음의 철도에 대한 책임을 두고 검사 측에서 그를 비난할 때 사용한 명칭이라고 한다.[13] 구글 등으로 검색해보면 종교 문제 등으로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 사진이 나오므로 주의 필요.[14] 중국 측 자료 또한 그 근원이 일본이기 때문에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견도 있으나, 중국공산당 기관지씩이나 되는, 꽤나 영향력있는 언론에서 출처도 조사하지 않고 기재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가짜일 가능성은 요원하다.[15] 당시 칼라공 마을 인구가 900~1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16] 물론 극동군사재판에서 기무라는 이 학살을 포함한 잔학 행위를 막지 못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7] 이 쪽은 오히려 츠지 마사노부와 관련있는 사건이다.[18] 이러한 날조된 에피소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극동군사재판에서 기무라가 '버마 정부는 내게 훈장을 줘야 한다. 내가 버마 인구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극동군사재판 당시 기무라는 자신에 대한 변론을 전혀 실시하지 않아 공판 기록에 기무라의 발언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다.[19] Although the Death Railway was built from 1942 to 1943, and Kimura did not arrive in Burma until late 1944, Kimura was also charged with the abuse and deaths of the military and civilian prisoners used to construct the railroad(비록 죽음의 철도는 1942년부터 1943년까지 건설되었고, 기무라는 1944년 후반이 되도록 버마 전선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기무라는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동원된 군인과 민간인 포로들에 대한 학대와 죽음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영문위키)[20] 극동군사재판 판결문에서 기무라 헤이타로의 버마 관련 내용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가 버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의 군대에 적절한 군인다운 태도로 행동하고 포로들을 학대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기무라의 변호에서 촉구되었다. 포로 학대의 성격과 정도를 볼 때, 재판소는 그의 본부에서 몇 마일 안에 있는 대규모의 많은 경우에서 기무라가 전쟁 규칙을 집행하는 의무에 태만했다는 것을 발견한다다. 그러한 상황에서 육군 지휘관의 임무는 실제로 그러한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일상적인 명령의 발행만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의무는 전쟁 범죄의 커미션 이후를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며, 그러한 명령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전쟁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그의 법적 의무를 고의로 무시했다.(It has been urged in KIMURA's defence that when he arrived in Burma he issued orders to his troops to conduct themselves in a proper soldierly manner and to refrain from ill-treating prisoners. In view of the nature and extent of the ill-treatment of prisoners, in many cases on a large scale within a few miles of his headquarters, the Tribunal finds that KIMURA was negligent in his duty to enforce the rules of war. The duty of en army commander in such circumstances is not discharged by the mere issue of routine orders, if indeed such orders were issued. His duty is to take such steps and issue such orders as will prevent thereafter the commission of war crimes and to satisfy himself that such orders are being carried out. This he did not do. Thus he deliberately disregarded his legal duty to take adequate steps to prevent breaches of the laws of war.)"[21] 비슷하면서 다른 케이스로는 마쓰이 이와네가 있는데, 이쪽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실질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주도할 당시에는 학살을 알고 있으면서 막지 않았으나, 이쪽은 애초에 학살 당시에 결핵에 걸려 병가중이던 상황이었으니 기무라랑 비교하기에는 애매하고, 오히려 병이 나은 후 부하들에게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2] 실제로 기무라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네덜란드의 왕비 막시마 소레기에타의 아버지이자 악명 높은 군사독재자 호르헤 비델라 시절에 아르헨티나의 농업부 장관을 역임한 호르헤 소레기에타가 있다. 호르헤 소레기에타는 '국가 안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농업부 장관이었기에 직접적으로 반인륜적 만행을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위계에 있던 특성상 비델라 정권에 반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산하 직원들이 실종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눈감아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방치했고, 이것 때문에 딸이 네덜란드의 왕자였던 빌럼알렉산더르와 결혼할 때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에서 반발이 매우 거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