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3 01:03:04

대한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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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大韓帝國軍
Korean Imperial Armed Forces(KI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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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모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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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1897년(대한제국군 개칭)
해체 1907년(군대 해산)
소속 원수부
통수권자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군 대원수)
군령권자 대한제국 황태자
(대한제국군 원수)
편제 대한제국 육군
• 대한제국 호위대
• 대한제국 시위대
• 대한제국 헌병대
• 대한제국 친위대
• 대한제국 진위대
• 대한제국 지방대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상무영
병역제도 모병제
상비군 약 2만 8천 명(1902년)
전신 조선군
후신 대한민국 국군[1]

1. 개요2. 상세
2.1. 수뇌부2.2. 교범과 전략2.3. 역사
2.3.1. 칭제 전의 혼란 수습기2.3.2. 창군과 급속한 팽창2.3.3. 원수부 중심 체제 정립2.3.4. 일본의 한국 장악과 강제 군축2.3.5. 해산2.3.6. 해산 이후
2.3.6.1.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2.3.6.2. 의병과 독립군
3. 군종
3.1. 육군
3.1.1. 병과3.1.2. 편제3.1.3. 징병제3.1.4. 보부상과의 관계3.1.5. 교육
3.1.5.1. 장교 교육3.1.5.2. 외국 군사고문단의 훈련3.1.5.3. 군사 유학3.1.5.4. 부사관 및 병 교육
3.2. 해군
4. 계급5. 장비
5.1. 장비 도입
5.1.1. 1903년의 대규모 장비 도입
5.2. 군수공업
5.2.1. 칭제건원 이전5.2.2. 칭제건원 후
6. 군가7. 예산8. 실전
8.1. 의화단 운동8.2. 과의 간도 영유권 분쟁8.3. 의병 진압8.4. 일본에 대한 저항
9. 대중매체에서10. 여담11. 같이보기

1. 개요

대한제국군()은 대한제국군대이다. 대한제국황제총사령관이자 대원수였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으로 구성된 육군과 해군 두 개의 군종으로 편제한 모병제였다.

전신은 당연히 조선군으로 갑오개혁 때 편제가 개편되었다가 아관파천대한제국 수립을 거쳐 창설되었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의 삼군영 조직을 통해 세를 불려나갔고 청의 의화단 운동간도 영유권 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군제가 대폭 축소되었고 군대 해산을 거쳐 일부의 명맥만 유지하다 대한제국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2. 상세

2.1. 수뇌부

대한제국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통수권자는 대원수 직위를 역임한 대한제국 황제였다. 황제는 원수부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국군을 이끌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 등 당대 다른 군주제 국가들에도 보편적으로 남아있던 특징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군주제 국가들의 군부는 정부의 문민통제를 받지 않았고, 그들과 병립하며 군주에 충성했다. 일본군 대원수였던 일본 천황 직속의 대본영(大本營)이나 독일군 최고전쟁지도자였던 독일 황제의 군사내각(Militärkabinett), 또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일원만이 보임되던 오스트리아 제국군 총감(Generalinspektor)직 등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시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이 군무를 담당하였으나 을미개혁군부(軍部)로 개칭되었다. 군부대신이 오늘날의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 원수부 관제 발표 이후 군부대신의 권한이 약화된 반면 원수부 각부 총장들의 권위가 상승한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한국을 장악한 후 한국 황제의 저항 동력을 뺏는 과정에서 원수부가 폐지되고 군부의 권한이 대폭 증대되었다. 물론 이 당시 군부대신들은 일본에 영합한 친일파들이 역임했다.

참모총장직의 경우 러일전쟁으로 들어온 일본이 원수부를 해체하며 고종의 군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참모부와 함께 잠시 도입하였으나, 실제로 임명되지는 않고 도로 폐지되었다.

2.2. 교범과 전략

대한제국 시절 편찬된 근대적 교본의 번역본을 현재에도 볼 수 있는데, 당시 대한제국군이 어떠한 훈련을 받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 대한제국 보병조전 國防軍史硏究所 #
    군대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보병에 대한 훈련 방법에 대해 설명한 교범이다. 각개전투부터 당시 최대 전투단위인 여단급 기동에 이르기까지 각 제대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특이 사항으로는 중대급 제대까지 산개대형을 밀집대형 못지않게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교하자면 일본육군조전에서는 신병훈련에서 분대급 산개대형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가장 기본적인 제식훈련부터 부대의 이동과 진형 변환 및 일제돌격과 대기병 방진 구성법 등 당대 표준적인 보병 운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 대한제국 전술학교정(상/하) 國防軍史硏究所 ##
    전술학 교범. 전쟁의 속성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적 이해를 바탕으로 각 병과의 속성과 각 제대별 운용 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교범이다. 보병의 경우 여기서도 산병전에 대해 근래의 주목받는 전술로 매우 효용이 크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판세가 갈리지 않을 시 증원을 통해 밀집돌격하여 백병전을 가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기병에 대해서는 추격을 통한 적 잔여병력의 파괴를 중시하는 등 아주 공격적인 행동을 주문한다. 포병의 경우 빠른 진지 구축과 방렬 및 포대이동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현대와 유사하지만, 시대적 한계 상 4km 이내의 거리 내에서의 전투를 상정한다거나 최전선에서의 직사 포격을 지양하지 않는다. 그 외 공격과 방어, 수색과 경계 등의 상황별 전술을 상세히 기술했다.

    3책 서문에 따르면 전술학교정 편찬에 참고한 해외 군사 서적들은 "불국성서이병학교전술학교정", "덕국전략학교정", "덕국육군사관학교 전술학교정", "일본육군대학교용 수병술(용병술)", 그리고 "오국군사학교전술학교정"이다.

2.3. 역사

2.3.1. 칭제 전의 혼란 수습기

한국의 진정한 근대적 군사편제의 설립은 1894년 갑오개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오사변청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중앙군은 대거 무장해제당하고 일본이 조선의 정국을 장악하면서 중앙의 군사력은 사실상의 공백 상태가 된다.

1895년 1월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신식 군대인 훈련대가 설치되었으며, 5월에는 시위대가 창설된다. 3월 1일 기존의 지방군과 수군 사령관들이 가진 병부와 마패를 회수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에는 군무아문이 군부로 개칭되었다. 이어 5월에는 지방군과 수군이 의해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일제히 해산되면서 지방의 군사력마저 공백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시위대는 경복궁에 난입한 훈련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훈련대장 홍계훈이 전사하였다.[2]

이후 훈련대가 반역 혐의로 해체되면서 조선의 군사력은 1895년 9월 13일 시위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친위대 2개 대대가 사실상의 유일한 군사력으로 남게 된다. 지방군의 경우 친위대와 같은 날 진위대가 설치되었으나 총 2개 대대에 불과하였다. 그 외 옛 친군영을 비롯한 구식 군졸들을 그러모아 공병/마병/치중병으로 구성된 신설대 12개 대대가 존재하였으나 이들은 현역병이 아니었다. 이렇듯 조선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전횡, 지방군의 증발로 인한 지방의 민란이라는 내우외환에 처했다.

당연하게도 고종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침략을 막을 군사력의 증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며 일본의 영향력을 제거한 고종은 내각 주요 인사들을 친러, 친미파로 대거 갈아치운다. 군제 개편도 바로 시작하여 파천 직후인 3월 3일에 신설대 공병대와 치중병대원들을 새로 친위대에 소속시켜 친위대를 5개 대대로 급격히 증강했다. 5월에는 바로 연대편제를 도입, 친위대를 친위연대로 개편하였다.

동시에 지방군의 복구도 시작하여 해산된 구식 지방군졸들을 그러모아 지방대를 설치, 진위대로 개편하기 전 임시 편제에 소속시킨다. 5월 30일 각 지방의 친군영들[3]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군악대)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천 명이었다.

동시에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대관식민영환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러시아군 군사 고문단의 파견을 타진한다. 푸챠탸 대령을 필두로 하는 14인의 러시아 군사 고문단은 동년 10월에 조선에 차례로 입국하여 기존 조선군에 뿌리박힌 일본식 군제를 제거하고 러시아식 군제를 이식한다. 그들은 우선 친위대에 대한 훈련부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하고 1달 후인 3월 16일, 친위대원들 중 러시아식 훈련을 이수한 정예부대들을 빼내어 시위대를 재창설한다. 이로써 중앙군은 친위와 시위 2개 부대로 구성된다. 6월에는 군제개편이 더욱 가속화되어 지방대대장 10명이 임명되고 왕궁을 지킬 호위군이 신설된다.

2.3.2. 창군과 급속한 팽창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다. 칭제 시점에서 중앙군인 시위대가 약 2600명, 지방의 진위대는 7천 명이었다. 또한 독립협회의 여론전으로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철수하면서 사관 양성은 오롯이 한국인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고, 장교 양성을 위해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본격적으로 개교한다.

1898년에는 시위대 1대대와 2대대를 합치고 포병 중대(포대)를 설치하여 연대로 개편하였다. 1900년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기병 대대를 설치하여 보병 대대 2개에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등 제대로 된 4각 편제를 구성했다. 군악대(소대급)도 2대를 설치하였고 1902년에는 보병 연대가 2개로 늘어나 시위대의 총 병력은 약 5천 명에 이르렀다.

또한 기존의 호위군을 개편하여 황제의 근접 경호를 맡는 경호실 격의 호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 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지방대가 원수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99년 11월부터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고 이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침략하자 군사력의 강화를 느끼고 국방비를 증액했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0일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합시켰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 제6연대는 의주에 본부를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어 1만 600여 명에 곡호대(曲號隊) 378명을 두었다. 시위대와 진위대를 합쳐 1만 8378명에 이르렀다.

1902년에는 시위대는 2개 연대에 포병1개 대대와 기병 1개 대대를 합친 5천 명, 친위대 2개 연대 4개 대대 4천여 명을 두었고 이후 진위대는 확장을 거듭하여 18개 대대에 1만 8천 명으로 늘었고 호위대 730여 명과 헌병대 등을 합쳐 최대 2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연대 개수로 따지면 10개 연대였다. 고작 6년 전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합쳐 4개 대대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급격한 발전이었다.

2.3.3. 원수부 중심 체제 정립

파일:원수부 청사.png
<rowcolor=#ffd800> 원수부 청사와 고종의 행차 행렬
군사란 나라의 울타리이고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입니다. 집에 울타리가 없으면 방어할 계책이 없으며, 사람에게 손톱과 어금니가 없으면 위엄을 보일 권력이 없습니다. 옛날에 군사를 잘 양성하는 사람은 비록 100만의 많은 군사가 있어도 몸으로 팔을 움직이고 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하여, 전쟁에서 적과 상대하여 죽을 고비에 나아가는 것도 한결같이 팔과 손톱이 마음에 복종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휘 체계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대오를 편성하여 대관(隊官)을 정하고, 대장(大將)에게 총괄하여 거느리게 하되 차례를 나누어 영솔하게 하는 것은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대오를 편성한 명칭은 있지만 병정(兵丁)들이 제 마음대로 대오를 옮기고 있는 것도 심상한 일로 보고 있으며, 그 우두머리로 된 사람들 역시 지휘 체계와 기율(紀律)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신년에 폐하가 도성(都城)을 떠나 변란을 피하여 갈 때 한 명의 호위 군사도 없었으며, 갑오년에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침범하였을 때에도 한 명의 방어하는 군사가 없었으며, 을미년에 대궐에 침범한 역적의 군사들의 화가 황후(皇后)에게 미쳤으나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용단을 내리고 지휘 체계를 엄하게 정하여 장신(將臣) 이하 대장으로부터 편성한 대오의 군사에 이르기까지 일체 정한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만일 군사 규율을 어길 것 같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마시고 위력으로 제압하고 은혜로 양성하소서. 이렇게 하여 적을 공격하면 승리하고, 이렇게 하여 업신여김을 막는다면 견고해질 것입니다. 군사 제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1898년) 1월 3일 양력 4번째기사에 수록된 최웅의 상소문.

광무개혁을 위해 고종은 강력한 군주권을 행사할 필요를 느꼈다. 게다가 민권운동이 활발해지고 쿠데타 시도까지 활발해지면서 고종은 군사력을 확실히 장악해야만 했다. 이로써 1898년 고종은 각국 대원수의 예에 따라 자신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899년(광무 3년) 6월에는 일본군 원수부의 사례에서 따온 최고 통수 기구인 원수부가 개설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다. 대한제국군은 기존처럼 황제-군부대신-군대를 거치는 군령체계에서 황제 고종이 직접 대원수로서 군권을 장악하는 체계로 바뀌게 된다.

기존의 군부는 많은 권한을 상실하고 원수부가 주관하는 일의 후속 지원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격하된다. 1900년이 되면 군부 산하에는 포공국과 경리국만이 남게 된다. 반대로 원수부의 각국 총장은 군부대신과 동격의 19발의 예포를 받을 수 있었으며, 각부 대신과 판사 등에게 훈령을 내리거나 직접적으로 의정부에 안건을 상정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해졌다. 이로써 원수부는 대한제국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등극한다.

시위대친위대, 그리고 호위대는 원수부에 직접 속하였다. 한편 북방에 파견된 친위대원들의 비위행위가 문제가 되자 육군참장 백성기의 건의로 헌병대와 육군법원이 창설되었다. 이들 역시 원수부에 소속된다. 정확히는 1900년 9월부로 검사국 총장이 헌병사령관을, 군무국 총장이 육군법원을 관할하게 된다.

고종이 이렇게 원수부를 세워 군권을 장악한 이유는 내우외환에 더 잘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899년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위험이 가시화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비적들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과의 전쟁을 대비하려면 각 정부조직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군부가 있었음에도 원수부의 권한이 극대화되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원수부는 북방에 병력을 증원하여 청비들을 격퇴하고 각지의 민란을 진압했다. 이로써 한국의 불안한 치안을 명분으로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외국 군대의 개입 명분을 사전에 차단하였다.[4]

2.3.4. 일본의 한국 장악과 강제 군축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9일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일의정서를 체결 후 1차 군축을 요구한다. 이로써 일본은 1905년 4월 16일에 대한제국군 친위대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시위대 역시 보병대대 3개로 구성된 1개 연대 규모로 축소시켜 버린다. 당시 시위연대 인원수는 2,513명이었으며 여기에 기/포/공병 잔존병 515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지방 진위대의 병력도 크게 감축시켰다. 1901년 이후 6개 연대이자 18개 대대 1만 8천 병력이던 진위대는 연대 편제가 모조리 폐지되고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5] 축소되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했다. 진위대 7개 대대를 다 합쳐도 고작 4,438명에 불과했다.

수뇌부와 통수체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극심했다. 우선 1904년 9월 원수부가 약화되고 곧 폐지된다. 반대로 군부의 기능이 복구되었으며, 참모부가 신설되었다. 일본은 이를 두고 군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라 선전했으나, 실상 이는 황제 고종의 군권을 박탈하고 친일 인사들을 한국 군부에 꽂아넣어 일본의 한국 장악을 원활히 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해산을 앞둔 1907년 4월 제2단계 군축이 이루어진다. 중앙군은 총원 3,704명의 시위혼성여단으로 개편되어 외연적으로 확대되나, 지방 진위대는 예하제대의 조정이 이루어져 부대 수는 유지하되 인원이 백 명 가량 감소한다. 이로써 한국군의 저항 동력을 거의 빼놓은 일제는 한국에 진주한 한국주차군을 상설화하면서 한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2.3.5. 해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군 해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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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한제국군 해산#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한제국군 해산#|]][[대한제국군 해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민승환 자결 기록화.png
<rowcolor=#ffd800> 박승환의 자결과 시위대의 봉기
그리고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한국군을 해산하기 위해 통감부를 통한 비밀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대한제국군의 화포, 기관총 등의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고 탄약 600만 발과 무기류의 관리를 일본군 일임하에 두도록 했으며, 대한제국군 사병들이 반발하여 봉기할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군 일원에게 금족령를 발령하여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의 탄약고 및 무기고를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미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병들에게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 보급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 31일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발령과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다음날인 8월 1일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8월 3일부터 9월 3일 사이에는 진위대까지 해산시켜 일부 호위대 병력을 제외한 전 대한제국군을 해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산에 반발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였고 시위대 소속 2개 대대 등이 저항하여 일본군과 남대문 전투를 벌였다. 지방의 진위대들은 각지에서 봉기하고 을사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호위대 일부는 황제의 호위병으로 유지되었다. 해산인원 중 257명은 경찰관이나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되어 옛 동료들의 반대편에서 총을 잡았다. 1907년 이후에도 조선 보병대, 조선 기병대와 군부의 일부 기관은 남아 일부 군인들이 근무했으나 1910년에 일본군으로 소속을 완전히 옮긴다. 노백린 등은 군대 해산 후에도 근무하다가 이때 군문을 떠났다. 일본군 소속으로 옮긴 뒤에 계급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군의 계급에 상당하는 것으로 대우하다가 1920년에 계급 명칭까지 일본군과 완전히 합친다.

2.3.6. 해산 이후

2.3.6.1.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
해산 이후에도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한제국군은 병합 후 조선왕가의 호위를 맡은 조선보병대였다. 시위보병 2연대 2대대를 개편하여 '근위보병대'로 개칭했다가 경술국치 후 조선보병대로 명칭이 바뀐다. 이들은 남한 대토벌 작전을 비롯한 일본의 의병 학살에도 동원되었다. 조선기병대가 해체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다 1930년대에 사라진다. 1931년에 대부분 군인들이 전역 조치되고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흔적은 사라졌다.
2.3.6.2. 의병과 독립군
한편 반대로 정미의병에 합류한 구 대한제국군 장병들은 훈련과 무기의 질에 있어서 상당한 전력 향상을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원주진위대와 수원진위대 강화분견대는 아예 부대 전체가 무장탈영하여 의병에 가담한다. 1907년 11월에 일어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13도 창의군의 1만 병력 중 3천여 명이 대한제국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1910년까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우다 이후에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이 된다.

대표적인 대한제국군 출신 의병독립군 인사들로는 원주진위대 무장봉기를 주도한 특무정교 민긍호, 강화진위대를 모아 저항하다 일본에 잡혀 처형당한 의병장 이능권과 육군 장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저항운동을 전개한 나중소김좌진, 육군 참령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 무관학교 생도 출신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대한민국 초대 무임소장관 지청천 등이 있다.

3. 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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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d9241d><tablebgcolor=#d9241d> 파일:대한제국 국장 겸 황실 문장.svg}}}{{{#!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5%;"<tablewidth=1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대한제국군의 편제 }}}}}}
원수부 군부 참모부 교육부 시종무관부 동궁배종무관부 육군무관학교
대한제국군
친위대
대한제국군
시위대
대한제국군
진위대
대한제국군
호위대
대한제국군
헌병대
대한제국군
상무영
대한제국 해군

3.1. 육군

파일:대한제국 시위대(1898).jpg 파일:대한제국군 병영.jpg
대한제국군 시위대[6] 1906년 서울에서 촬영된 대한제국군 병영[7]

3.1.1. 병과

당대에 일반적인 구성을 따라 주력 전투병과로 보병, 기병, 공병, 야전포병이 존재했다. 이 중 근본이 되는 것은 단연코 보병이었다. 기병의 경우 유럽 국가들과 같이 세부적인 병과가 나누어지지는 않은 듯하다. 전술학교정에 따르면 대한제국군은 추격섬멸과 전과확대 및 수색경계와 정찰, 통신에 특화된 것으로 파악했으며, 기병총도 지급했다. 군마는 해외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야전포병의 경우 77mm 크루프 포나 빅커스 등의 경포와 기관총 즉 개틀링 기관총맥심 기관총 등이 주무장이었다. 야전포병은 야포병과 산포병으로 세부 병과를 구분했다. 이외에도 육군예식에는 요새포병해안포병에 대한 조항도 존재한다. 해안포병의 경우 1901년 3월 8일부로 칙령 제7호 "연해지방 포대 설치에 관한 안건"을 통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8] 요새포병은 실제로 설치되었는지 불명확하다. 포병은 기병과 마찬가지로 군마의 존재가 필수적인 병과였다.

한편 공병의 경우 보루 축조, 진지공사 및 교량건설 등을 담당한다. 전술학교정에 따르면 공병의 기본적인 무장은 보병과 동일했으며, 1903년 경 공병용 장비를 도입하기 위해 예산을 지출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외에 치중병, 즉 병참 병과와 의무병과, 헌병 병과 등이 존재하였다.

3.1.2. 편제

최고위 군사 편제는 여단과 혼성여단이었다. 실록위키에 따르면 여단 편제는 1898년 1월 26일 경외의 각 부대를 여단으로 편성하라는 고종의 조칙에서 처음 언급된다. 시위대친위대는 각 2개 연대 약 4000명 규모로 여단급 규모를 갖추었으나 실제로 여단 편제를 띄지는 않고 개별 연대가 원수부에 직접 속했다.

이와 별개로 관병식 때에 임시 혼성여단을 꾸려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임시혼성여단은 보병 2개 연대와 기병 및 포병 각 1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1907년 대한제국 2차 군축 당시 시위혼성여단이 등장하며 중앙군이 비로소 여단급 부대가 되었으나 실상 이는 일본이 한국군을 해체하기 직전에 임시로 모아 놓은 형태에 불과했다. 해산 직전 시위혼성여단은 시위보병 2개 연대와 시위기병 1개 대,[9] 시위야전포병 1개 대와 시위공병 1개 대로 구성되었다.

대한제국군의 여단 편제가 군사적으로 제대로 기능하기에는 미흡함이 많았을 것이라 예상된다. 근본 제식 교범인 <보병조전>에는 연대여단의 교련 방식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나 구색만 갖춘 수준으로 매우 내용이 소략하다. 이는 주한 러시아 군사 고문단의 교육이 주로 중대급 이하 소부대 훈련에 맞추어져 있던 것과 무관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보병조전은 이 시기에 편찬되었기 때문. 또한 조승옥의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무관학교 생도들의 전술학 교육은 최대 대대급까지였다.[10]

한편 <야외요무령>이나 <육군예식> 등의 규범에 따르면 사단사단장에 대한 규칙 역시 언급된다. 야외요무령에 따르면 대한제국 육군 사단은 전략 단위이며, 보병 2개 여단(4개 연대), 기병 1개 연대, 야전포병 1개 연대, 공병 1개대대, 가교종렬 1열, 탄약 1개 대대, 치중 1개 대대와 야전위생부로 구성된다. 당대의 일반적인 사각편제 사단을 목표로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한제국 중앙군의 규모 자체는 미흡하게나마 1개 사단에 필적했으나,[11] 상설 여단조차 꾸리지 못한 상황에서 실제로 사단을 편성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한 채 러일전쟁을 맞았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육군예식>에 따르면 사단장은 13발의 예포를 받을 수 있었다.

한편 관서지역에는 '관서사령부'라는 이름의 제대가 존재했음이 실록에 언급된다.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따르면 이는 변방 방위의 중요성으로 인해 1902년 신설된 제대로, 평안남도 관찰사 민영철에게 지휘권이 주어졌다. 예하부대는 평양의 진위 제4연대와 의주의 진위 제6연대였다. 이 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던 지점이며 동시에 청비들이 남하하며 국경을 침범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를 제외하면 사실상의 최고 편제는 10개의 연대들이었고, 실제 병력운용의 중추를 맡은 것은 연대본부보다는 각 대대중대였다. 군사력의 중추인 대대중대는 기본적으로 러시아 제국군의 편제를 따랐다. 1개 대대는 5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1개 중대는 4개 소대가 모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편제는 한국이 일본의 영향하에 장악당한 1905년 4월부로 개편된다. 일본군식 편제가 다시 이식된 것. 이때부터 4개중대가 모여 1개 대대를 구성하게 된다.

각 부대의 예하제대 구성은 부대별로 시기별로 차이가 조금씩 나는 편이다. 우선 러일전쟁 발발 직전 기준 중앙군인 시위대의 경우 2개 연대를, 개별 연대가 보병 2개 대대와 포병 1개 대대를 갖추었다. 이와 별개로 시위기병대대는 독립대대의 형태로 원수부에 속했다. 친위대 역시 2개 연대 체제였으나 개별 연대가 보병 2개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원수부 직할로 공병중대와 치중중대를 갖추었다. 지방군인 진위대는 6개 연대와 1개 대대 규모였으며 개별 연대는 보병 3개 대대만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헌병대의 최고 제대는 사령부였고 그 밑에 바로 중대가 편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군 호위대는 1개 대대 규모였다.

그러다 일본이 주도한 1905년 4월 1차 군축 당시 친위대가 해체되고 진위연대들도 해체되어 진위대대들로 감편된다. 시위대 역시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연대로 감축되었다가 1907년 제2차 군축 당시 시위혼성여단으로 잠시 증편된다.

이하는 러일전쟁 개전 당시 편제이다.
  • 대한제국군 친위대
    • 친위 제1연대
      • 제1대대
      • 제2대대
    • 친위 제2연대
      • 제1대대
      • 제2대대
    • 곡호대
    • 공병중대
    • 치중중대
  • 대한제국군 시위대
    • 시위 제1연대
      • 제1대대
      • 제2대대
      • 포병대대
    • 시위 제2연대
      • 제1대대
        • 군악대
      • 제2대대
      • 포병대대
    • 시위기병대대
      • 군악대
  • 대한제국군 진위대
    • 진위 제1연대 - 강화
      • 제1대대
      • 제2대대
      • 제3대대
    • 진위 제2연대 - 수원
      • 제1대대
      • 제2대대
      • 제3대대
    • 진위 제3연대 - 대구
      • 제1대대
      • 제2대대
      • 제3대대
    • 진위 제5연대 - 북청
      • 제1대대
      • 제2대대
      • 제3대대
    • 관서사령부
      • 진위 제4연대 - 평양
        • 제1대대
        • 제2대대
        • 제3대대
      • 진위 제6연대 - 의주
        • 제1대대
        • 제2대대
    • 제주진위대대 - 제주

3.1.3. 징병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따르면 징병제 논의는 1894년1895년에 최초로 언급되었으나 당시의 국가 상황으로 인해 고종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다 1901년 원수부에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18세에 입대하여 3년간 복무하는 형태의 징병제를 제안하나 여론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다 1903년 3월 15일, 황제 고종이 원수부에 징병제 도입을 준비하라고 명령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원수부는 선비-후비-예비-국민병 형태의 징병제도를 연구하였다. 이는 동시대 일본의 그것을 강하게 참고한 형태였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연말이 되도록 징병제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13일 고종이 이에 대해 질책하는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두 달 뒤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며 대한제국의 국민개병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3.1.4. 보부상과의 관계

대한제국 육군은 황실을 떠받치던 또다른 축이었던 보부상 집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국협회를 구성하던 주요 세력이었던 상무사의 보부상들은 원수부 설치 이후인 1900년 5월부터는 상무영을 구성하고 일부를 선발해 군사훈련에 들어간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이래로 보부상들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근대적 경찰력이 아직 맹아 상태에 있던 과도기에 황실의 수족으로서 각 지역에 파견되어 치안 업무에 종사하였다.[12]

3.1.5. 교육

3.1.5.1. 장교 교육
육군무관학교와 육군연성학교, 육군유년학교가 존재했다. 무관학교는 오늘날 사관학교의 기능과 동일하였으며 장교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1896년 최초 창설시 교육기간은 1년이었으나 1898년부로 속성과인 1과와 2과는 군부대신이 정하는 기한 동안 훈련을 받되 정규과정인 3과는 5년간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부지는 구 훈련도감 신영 자리에 위치했다. 초대 교장은 연무공원에서 윌리엄 다이 준장에게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은 이학균[13]이었다. 조승옥에 따르면 이학균 참장은 1903년까지 교장을 역임하며 무관학교의 기틀을 다졌다.

국군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군사교범, 근대군사교육의 시작>에 따르면 무관학교의 학과는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외국어학 총 8개 학과로 구성되었다. 사용하던 교범은 총 12권으로 전술학 부문에 "보병조전", "전술학교정", "야전요무령"과 "보병공작교범" 4권, 축성학 부문에 "축성학교정", 군제학에 "군제학교정", 병기학 부문에 "병기학교정", "사격교범", "보병사격교범" 3권, 지형학에 "지형학교정", 위생학에 "위생학교정", 마학에 "마학교정"이 있었다.

초기 교육은 외국의 군사학 교범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진행하였으며 이 때문에 개설된 강의 중에서는 어학 강좌의 비중이 40%가량으로 매우 큰 편이었다. 무관학교에서 어떤 언어를 가르쳤는지는 불명이나 가장 가능성 높은 언어들은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일본어 6개 언어이다. 보병조전과 전술학교정 등의 한국어 군사교범이 편찬된 이후에는 자체 교범을 두고 생도들을 가르쳤다. 당시 무관학교에서 가르치던 수업 내용과 교범들은 이후 제국군 출신 독립지사들을 통해 독립군으로 흘러들어가 신흥무관학교 등지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맥을 잇게 된다.

유년학교는 무관학교 입학을 위해 설치된 초등군사교육기관으로, 교육기간은 3년이었다. 연성학교는 일종의 고등군사교육기관이며 장교와 부사관의 전술 및 검술 등의 보수교육과 군사학 연구를 위해 설치된 학교였다. 그러나 두 학교 모두 일제가 러일전쟁으로 한국의 정국과 군사력을 사실상 장악한 1904년 9월에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그 외에 특별임관 방식이 존재하였다. 무관학교 1회 졸업생 배출 직후인 1900년 3월 27일자 칙령에 따르면 무관 임명은 무관학교 졸업생 중 원수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임명하지만, 그 외 군무에 숙달된 자는 졸업증서가 없어도 임명할 수 있다고 예외 조항을 두어 무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이들을 배려했다.
3.1.5.2. 외국 군사고문단의 훈련
3.1.5.3. 군사 유학
군사 유학은 갑오개혁의 여파로 인해 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로 갔다. 일본 유학은 가까운 곳에서 우수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상적국에 영합한 친일파들이 생겨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병무어담. 하지만 모든 일본육사 유학파들이 변절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독립운동가 노백린이갑, 유동열이 일본 유학파 출신이다.

박단비의 논문 <대한제국 시기 한인의 일본육사 입교와 졸업 후 동향>에 따르면 일본육사로의 본격적인 유학이 시작된 것은 칭제 전인 갑오개혁 때이다. 당시 친일내각은 게이오의숙 교장 후쿠자와 유키치와 연계하여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한인유학생들은 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와 보통학을 배우고 세이조(成城)학교[14]를 거쳐 일본 육사에 입교했다. 1896년 8기, 1898년 11기가 입교했다. 아관파천칭제 이후 정부 차원의 일본군사유학은 중단되었으나, 대신 사비유학생들은 1902년에 15기로 입교했다. 일본육사 출신자들은 원수부 회계국장 민영환의 건의로 주로 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 일본이 한국을 장악한 후 곳곳의 요직으로 진출했다.

프랑스 생시르 사관학교에 한 생도가 입학한 기록도 남아 있다. 다름 아닌 외교관 이위종이 바로 그이다. 1900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입학했다. 그와 상술한 전술학교정 편찬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15] 아직까진 불명이다.
3.1.5.4. 부사관 및 병 교육
오늘날 국군의 육군부사관학교육군훈련소와 같은 부사관 및 병 양성교육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육군연성학교가 부사관에 대한 교육도 담당하긴 했으나 연성학교가 개교한 시기는 이미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였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대신 제식훈련교범으로써 기능하던 "보병조전"에 중대장 이상급 지휘관의 책무로 부하를 교육하는 책임이 있다고 명시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교육은 각 부대에서 "보병조전"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리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3.2. 해군

파일:Korean_empire_navy_emblem.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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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대한제국군의 첫번째 군함 양무호, 그 밑은 두 번째로 도입한 군함 광제호와 승조원들. 맨 뒷줄 오른쪽 끝이 초대 함장 신순성이다.

일단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성립하기 전, 조선군에서의 수군 체제 및 개혁 시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기존의 진관 체제에선 통제영을 최고 기구로 하는 수군이 존재했다. 수군 기지는 주로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3년 12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설치되고 민영목이 기연해방사무(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기연해방영은 1888년 4월 통위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조정은 해군 양성을 위해 1892년 영국에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 통제영학당(總制營學堂)을 설치하였다. 통제영학당에서는 1893년 9월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듬해(1894) 4월 영국에서 콜웰(W. H. Callwell) 예비역 해군 항해 대위와 커티스(J. W. Curtis) 하사가 파견되어 왔으나, 일본을 비롯한 대외의 압박으로 1894년 11월 통제영학당은 폐교된다.

같은 해 갑오개혁으로 수군을 해산하고 1902년 대한제국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해상 방위 전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 한동안 해군이 없었다. 원래 고종은 영국의 최신 기선 전함 구입을 원했는데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로 무산되었고 대신 일본이 제시한 화물선 한척을 구입했다. 1903년에 중고상선 (석탄운반선)을 한 척 구입하여 갑판대포를 얹어 군함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양무호 구입은 일본의 강매였는데 그 과정은 양무호 항목 참조. 양무호는 80 ㎜ 포 4문과 5 cm 포 2문을 장착하여 화력도 빈약했으며, 심지어 이런 군함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배를 당시 국방예산의 30%나 주고 구매했다.[16] 양무호는 1904년엔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이 징발해 사용하였고,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후에는 부산에서 견습 선원들을 위한 실습선으로 쓰이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에 매각되었다.

1904년에는 1,056t급 광제호(光濟號)를 구입한다. 3인치 포를 3문 장착하고 있는 광제호는 배 자체도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 발주하여 건조한 새 배로, 양무호와 비교하면 훨씬 괜찮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광제호는 해군 함정이 아니라 세관의 연안 감시선 역할을 맡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석탄 운반에 쓰이다가 8.15 광복 후 귀국 일본인들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은 모두 신순성(愼順晟, 1878-1944)이었다. 그는 대한 제국 해군 해체 이후 상선사관으로 근무했다. 경술국치 전날, 신순성 함장은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국 해방을 1년 앞두고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신태범 박사가 광복 이후 열린 한국 기선 취항식에서 이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해군을 다룬 으로 한국 근대 해군 창설사가 있다.

군복은 우용곡 작가가 대한제국 해군 군복에 대해 다룬 블로그 참조.
  • 관유 함선 목록
조선 말부터 들여온 대한제국 황실 혹은 정부 소유 함정들(기선, 500톤 이상)[17] - 해군 함정은 아니며, 정확히는 이운사(利運社)라는 관영 회사의 소유였지만 편의상 여기에 서술한다.
  • 창룡호(蒼龍號, Signal) 경하 혹은 기준 403톤 만재 536톤 - 1887년 도입
  • 현익호(顯益號, 붕기복호, Bankchef Henrikssen) 만재 709톤 - 1892년 도입
  • 이운호(利運號, 조주부호, ???) 1000톤급 - 1893년 도입

4. 계급

러시아 제국군[18]의 계급 체계를 모방했으나, 계급 상하 관계를 러시아군의 대 - 중 - 소 체계와 달리 정 - 부 - 참 체계라는 전통적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군에는 준장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대한제국군 역시 준장이 없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서방 군대의 Lieutenant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 번역이다. 말 그대로 정규 위관/ 대리 위관 / 참모 위관인 것. 이는 조선군의 관례상 대 - 중 - 소는 부대의 전투 서열상 상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도 구세군대한본영에서는 정 - 부 - 참 체계로 계급명을 나타낸다. 영관이란 표현은 현재 동북아에서 한국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이 정부참 체계는 명나라의 군사계급체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명과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 녹영군의 군사장교계급체계를 간략하게 서술하면 파총-천총-수비-도사-유격-참장-부장-부총병-총병관(정2품)-제독군무총병관(줄여서 제독, 종1품)이었다. 아무래도 역사상 이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기에 이러한 체계가 채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청나라 군대도 상하계급을 정-부 체계로 구분하고 '영관' 계급이 있었는데, 우리와 다른 점은 정 - 부 - 이 아니라 정 - 부 - 이라는 것이었다.# 고종이 여러 개혁 및 개편 과정에서 옛 전통으로부터 명칭을 따오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한제국군의 계급체계도 이러한 전례들을 참고한 듯하다.

참고로 같은 계급을 중화권에서는 교관급 장교로 불리며, 북한일본(구 일본군현 자위대), 베트남에서는 좌관급 장교로 불린다. 조선경비대 시절에 잠시 다시 정 - 부 - 참을 도입했으나 1948년 이후 대 - 중 - 소로 바뀌었다.

파일:daehan1.jpg
파일:daehan2.jpg
파일:daehan3.jpg

병사와 부사관들은 계급장에 소속 부대를 표기했으며, 참교부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줄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장교부터는 계급장 양 옆에 별이 표시되며, 장군부터는 별이 금색으로 바뀌었다. 위관급은 중앙에 태극 문양, 영관급과 장관급은 중앙에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과 오얏나뭇잎이 태극 문양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장이 잘 정리된 사이트들 1 2 또한 장교들은 견장 계급장과 함께 소매에 ㅅ자 형상 수장 계급장도 사용하였다. 줄 1개(참위) ~ 11개(대원수)로 구분되었다.

1894년에 해당 계급을 설치했다. 실록에 따르면 대장은 연령 정년이 없고 부장이 70세, 참장이 65세, 영관급 장교는 54세, 대위에 상당하는 정위는 47세, 기타 위관급 장교부사관은 45세였다.

주요 장성급 장교대한제국군/장성급 장교를 참고할 것.

5. 장비

대한제국군 보병장비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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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이 구매했던 맥심 기관총#

막 근대화를 시작하고 중공업이나 기술이 부족하던 현실적인 여건상 소화기부터 중화기까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한제국군이 운용한 주요 장비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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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고종황제와 원수 순종황태자.
보다시피 피켈하우베 형태의 예식모도 도입되었었다.
파일:external/bemil.chosun.com/%B4%EB%C7%D1%C1%A6%B1%B9%B1%BA2.jpg
육군 군복들. 육군의 복제는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군복을 참고했다고 하며, 예장(예복), 정장(정복), 상장(常裝, 근무복), 군장(전투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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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는 초초혼 작가가 대한제국 군복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 '그림으로 보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개인출판 하였으며, 2024년에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5.1. 장비 도입

대한제국군의 무기류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다. 칭제 전에는 청나라에서 제조한 마우저 소총 및 기타 잡다한 소총들을 사용하였고, 아관파천 직후에는 친위대의 급격한 증편에 맞추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000정의 소총을 도입하기도 했다. 얼마 후 입국한 러시아 군사고문단들이 한국 장병들을 훈련시킬 때 사용한 소총이 베르단인 것으로 보아, 이 3000정은 베르단 소총일 가능성이 높다.

그 외 1902년 영국으로부터 빅커스 포를, 1899년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리볼버 300정을 구입하기도 하였으며, 1900년에는 프랑스로부터 그라 소총 1만정을, 1901년 3월에는 미쓰이 물산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30년식 소총 1만 정과 탄약 100만발을 구매했다.[29]

5.1.1. 1903년의 대규모 장비 도입

최대규모의 수입은 1903년 프랑스와의 무기계약으로, 소총 1만 2천 자루를 구입하였다. 1903년 2월 28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소총들은 일본에 주문한 양무호와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1903년에 대한제국은 프랑스계 회사인 용동상회를[30] 통하여 소총 5만 자루와 총검 5만 자루, 탄환 1백만발을 구매하였다. 그러나 1904년 12월 17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 소총들은 결국 영국령 홍콩에서 압류당하여 결국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 소총들은 1908년에 마지막으로 다시 언급된다. 당시 미국인 일부가 상하이 체류 한국인들과 계약을 맺어 마우저 소총 2만 5000정을[31] 정미의병에 공급하고자 밀수입을 시도했다. 이때 일본은 혹시 1903년 한국정부가 수입하려던 그 프랑스제 소총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 측에 수사를 의뢰했다.[32]

5.2. 군수공업

5.2.1. 칭제건원 이전

조선 기기창이 주도하여 탄약을 생산하고 총기와 화포를 시험하였다. 기기창은 본래 청나라가 지어 주고 1881년 톈진 기기국에 유학하여 서양기술을 배운 영선사 군계학조단 출신 조선 기술자들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존에 3만 조선 중앙군을 전부 무장시킬 수준의 군수공장을 건설해 주기로 했던 청이 방침을 바꾸어 기기창을 탄약생산과[33] 소화기 수리만 가능한 소규모 공장으로 짓기로 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본래 조선을 강화시켜 일본러시아에 대한 방파제로 삼고자 했던 청은 1880년 전후로 생각을 바꾸어, 조선을 약화시켜 자신들의 지배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이 벌어지자 청은 조선의 독자적 개화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며 기기창 건설도 차일피일 미루게 되며, 그 결과 기기창이 완공된 것은 영선사 파견 6년 후인 1887년이었다.

1889년에는 가평에 제약소(화약공장)이 세워지면서 조선은 비로소 근대군수공업의 첫발을 떼게 된다. 그러나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조선이 미국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식산흥업 정책에 투입하려던 계획을 청나라가 파토내면서 운영 자금이 부족해진 기기창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출처:]

5.2.2. 칭제건원 후

1895년 군부관제가 발표되며 기기창의 소속은 군부 포공국 포병과 산하로 변경된다. 서적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따르면 1896년 러시아로 파견된 민영환이 러시아군의 탄약제조공장을 시찰하며 큰 감명을 받았고, 주한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어 시위대를 훈련시킬 때 우렘노프라 하는 러시아인 기술자가[35] 기기창에 들어와 무기 생산을 감독하였다. 비슷한 시기 조신화 정위를 비롯한 3인이 일본으로 가서 총기 생산장비를 구매하였다.

당시 기기창에는 우렘노프 외에도 50명의 독일인 기술자가 근무하였다. 1900년에는 외부대신 박제순이 대포 제조 기계 구매를 위해 일본 포병공창에 접촉하기도 했다. 한편 양상현의 논문 <대한제국의 군제 개편과 군사 예산 운영>에 따르면 1901년 프랑스인 기술자 페이어(Payeu)와[36] 루이(Louis)가[37] 추가로 고용되었다. 동년 8월 12일에는 황성신문 기사를 통해 삼청동 기계창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계획이 보도된 바 있다.

이듬해인 1902년에는 포대영에서 대포 2문을 시험 생산하였으며 1903년에는 탄피 기계를 추가 구매한다. 그리고 김명수의 논문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에 따르면 1903년에는 한국은 용산 일대에 군수공장을 짓는 협약을 맺는다. 러시아가 한국에 제식물자를 판매하려 하자 일본이 군부대신 신기선에게 접근하여 소총 제조 공장 건설 계약과 30년식 소총 라이센스 생산 계약을 맺은 것. 용산 군기창은 1905년 완성되어 일 10정의 30년식 소총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러일전쟁으로 한국의 운명이 사실상 결정된 시기였기에 군기창은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

군복의 경우에는 자급 체제를 갖춘 편이다. 각 부대별로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직접 제작했다. <군대내무서>에 따르면 각 연대본부의 피복위원은 장인들을 지휘하여 군복을 새로 갖추는 업무를 맡았다고 명시되어 있다. 한편 1900년 4월 17일 육군참장 백성기가 군수물자 생산문제를 상소로 올린 것을 계기로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논문 <대한제국의 군제 개편과 군사 예산 운영>에 따르면 1900년부터 내장원경 이용익이 피복위원장을 겸임하며 군화 1만 7천 족을 구매하였으며 이듬해인 1901년에는 육군피복제조소 공장이 세워졌다.

6. 군가

남아있는 군가는 단 하나, 육군박물관 소장 <육군무관학교학도계칙> 후면에 그 원 소유자인 이범서가[38] 낙서해 놓은 제목 불명의 군가 뿐이다. 조승옥의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에서 재인용하자면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음은 알 수 없다.
군인들아 군인들아 대한제국 군인들아
잊지마라 잊지마라 충군애국 잊지마라

정병(精兵)을 배양하니 부국강병 기초로다
황실의 군대요 국가의 간성(干城)이라

나아가세 나아가세 죽을망정 나아가세
번개처럼 휘두른 칼에 추풍낙엽 적군일세
대한국기 높이 달아 억만 군인 개선가다

세간에는 충성가(忠誠歌)가 대한제국군의 군가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충성가는 6.25 전쟁 당시 불려진 대한민국 국군의 군가다.

7. 예산

칭제 이래로 한국의 군사예산은 꾸준히 증가하여 1904년에는 5,349,521원에 달한다.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전체 정부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한 비율은 대략 23%에서 27% 사이였으나 1901년부터 1904년까지는 급속히 증가하여 대략 38%에 달했다. 특히 1901년에는 41%가 군사비로 지출되는데 서인한은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서 이것이 전국 31곳에 해안포대를 설치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만성적인 재정부족에도 군사 비용이 과다하게 지출된 셈인데, 이는 강병 육성을 통해 대외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이다. 이를 위해 군비에는 각지의 둔토나 궁내부 내장원에서 관할하는 황제의 개인 비자금까지 투입되었다. 내장원의 자금 지원은 특히 부대 창설비와 해외에서의 장비 구입과 같이 거금이 들어가는 사업에 주로 사용되었다. 가령 1903년 군부에서 프랑스소총 5만자루와 총검 5만 자루, 탄환 1백만 발을 구입하는 데 사용한 30만 원은 내장원이 빌려준 것이었다.

그 외에도 내장원에서는 탁지부가 지급하지 못하는 월급을 대신 지급해 주거나, 역둔토에서 생산한 곡식을 군부대에 군량미로 공급하기도 했다.

8. 실전

8.1. 의화단 운동

1899년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한제국 내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쳐들어와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의화단 진압을 위해 열강 8개국이 참전하였고, 러시아 제국고종에게 참전을 제안하였지만 초기의 대한제국군의 군세는 열악하고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이후 국방비를 대폭 늘려서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켰고,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이들과 교전하였다. 진위 5연대의 소대장 조기설, 김성열,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명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에는 이범윤을 북간도로 파견하여 한국인 보호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8.2. 과의 간도 영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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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의병 진압

일본은 1905년 4월에 18개 진위대를 8개 진위대로 감축시켰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일본은 원수부에속해있던 군령권과 군정권을 다시 군부에 환원시키고, 친일적 인사이면서 훈공과 근로가 가장 많은 육해군 대장으로 부원수를 두고 대원수와 원수에 諮詢하는 책임을 맡게함으로써 중심부에서부터 군통수권을 해체시켜 나갔다. 일본은 특히 대한제국 내부에서 황제에게 속한 군통수권의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여론을 조성해 나가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경우, “군부가 있는 이상 원수부는 승격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39]

일본은 고종의 군통수권의 지위를 격하시킨 이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을사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진위대를 투입하였다.

을사의병 당시 폐하의 군대에게 대적할 수 없다며 교전을 피하다 잡힌 최익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들은 일본군에겐 적의를 가지지만 대한제국군에겐 교전을 피하거나 소극적이 되어 알아서 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8.4. 일본에 대한 저항

청일전쟁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의 만행을 겪고 아관파천으로 탄생한 대한제국군이었기에 당연히 일본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서울과 덕수궁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의 항일 장교들을 교체시키거나 추방하고 용산에만 일본군 5만명을 주둔시키는 등 대한제국 각 거점에 주둔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같은 곳에 주둔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사병들은 상대편의 장교를 봐도 경례를 하지않고 무시했으며 사소한 충돌도 잦았다. 당연히 장교들도 서로 경례를 하지 않았다.

을사조약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일본이 퇴위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였다. 7월 20일에는 시위혼성여단 소속1연대 3대대 소속 병사 100여 명이 동조하여 종로의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대한제국군이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한 일본은 대한제국군을 해체하기로 하고 7월 31일 순종의 군대해산 칙명을 받아내어 8월 1일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9월까지 진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남대문 전투를 벌였고 원주 진위대, 여주 파견대, 강화 분기대, 홍주 분견대, 진주 분견대, 안동 분견대 등 진위대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을사의병과 합류 정미의병이 되어 전국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며 저항하였다.

9. 대중매체에서

  • 북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는 주연 중 하나가 대한제국군 소속이며 2부 초반부에 남대문 전투 장면이 나온다.[40] 다른 북한 영화인 <맹수 사냥꾼>에서는 극초반에 주인공이 소속되어 있다가 해산되어서 위와 같이 남대문 전투에서 전멸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임화수가 제작에 참여한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에서는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 주둔중이던 대한제국군 시위대일본군에 제압당하는 모습과 중반부에 군악대와 보병들이 경무청 앞에서 시위중인 독립협회 회원들의 사이를 행진곡을 연주하며[41] 지나가는 모습으로 등장, 이때 한 독립협회 회원이 연주중이던 군악대의 을 발로 차 넘어트리고 다른 회원들이 그 넘어진 북을 굴리면서 조롱하는데 이때 별다른 항의도 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북을 회수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간간히 등장.[42]
  • 2018년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에서 등장. 3화부터 대한제국 경무대를 배경으로 사열한 모습으로 나오며 검은 제복에 붉은 줄무늬, 군모엔 오얏꽃(이화문) 문장이 달린 제복 차림이다. 이후 유진 초이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교관이 되면서 자주 등장한다. 22화에서는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싸운 남대문 전투가 나오며 탈출한 군인들은 이후 정미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전쟁을 수행한다.
  • 대체역사물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 대한제국 영해를 침범한 일본 해군 함선들을 향해 대한제국 해군이 경고 사격을 가하여 퇴거시킨다. 그런데 황제를 비롯한 승조원들이 모두 갑판으로 나와있고 현대식 이지스함이 근대식 전함마냥 함포 사격으로 근접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심각한 수준의 고증 오류라며 많은 밀덕들과 해군 출신 군필자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43]

10. 여담

요동간도 영유권 분쟁을 두고 진위대 외에도 1902년부터 간도에 주둔한 '북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1905년까지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며 철도부설을 하던터라 처음에는 러시아 공사가 이런 월경 공격에 대해 침략 행위라며 항의하는 서한을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곧 러시아는 청군에 공동대응하자며 대한제국과 이런 합의를 맺었다. 첫째,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간도 및 그 부근 3마일 이내의 지역에 주를 설치하여 관리한다. 넷째, 간도에 소란이 생겨 주장(州長)의 권한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협동하여 적절한 방어책을 강구한다.

이범윤의 사포대는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대한제국군 편제에 속한 정규군이 아니었으나 고종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고 세를 걷어 사포대를 유지함을 허가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민병대준군사조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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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 대한제국군,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고 정부 자체도 대한제국 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 애초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천명했는데 임정은 대동단결선언에 따라 대한제국의 주권이 순종의 포기 이후 국민에게 넘어갔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현 국군이 구 대한제국군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2] 훈련대는 시위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훈련대의 반란을 막기 위해 고종이 신임하는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으로 맡기고 해체를 앞두고 있었으나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대장 3명(우범선, 이두황, 이진호)이 이끄는 훈련대가 궁궐로 들어오자 꾸짖으며 막아서다 일본군에게 사망한다.[3] 예를 들어 대구시의 친군남영, 평양시의 친군서영, 경성군의 친군북영 등.[4] <대한제국기 군사 중심의 정국운영과 원수부 창설의 의미>, <러일전쟁 이전 대한제국 원수부의 군무정책 강화와 군사운영의 성격>[5] 북청진위대는 계획상 존재, 실제로 창설되지 않음.[6] 1898년 헨리 아펜젤러가 촬영한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사진이다.[7] 출처: 국립민속박물관[8] 가령 고종실록에는 광무 6년 8월 20일자 기사에 월미도 포대 건축비로 6,510원을 사용했음이 나타나 있다.[9] 중대급이었다.[10] 정확히는 보병 병과가 대대까지, 나머지 병과는 중대급까지 배웠다.[11] 보병의 경우 시위, 친위 합쳐 4개 연대에 번상한 평양진위대대까지 존재하였기에 숫자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포병의 경우 연대급으로 편성하기에는 규모가 미흡했고 공병과 치중병, 기병은 각각 대대에서 중대급에 불과했다.[12] <대한제국의 개혁이념과 보부상>[13] 최종계급 육군참장.[14] 일본육사 입학 코스 중 하나였던 학교다.[15] 정확히 말하자면 전술학교정의 참고문헌으로 사용한 생시르 사관학교의 교범을 어떻게 구하였는지[16] 참고로 동시기 일본 해군연합함대 기함으로 쓰였던 전함 미카사는 305 ㎜ 주포에 152 ㎜ 부포를 달았다. 일본이 미카사를 비롯한 시키시마급 전함 4척을 영국에서 구입하는데 예산 5800만 엔이 들어갔는데 이는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30년치와 맞먹는다.[17] 창룡호와 현익호에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인 신순성이 부함장으로 근무했다.[18] 1895년 갑오개혁 당시 조선군 개편은 독일식 일본군을 참고했으나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원년에 창설된 대한제국군은 프랑스식 제정 러시아군 체계를 따랐다.[19] 원래는 정장이 되어야 하나 대장이라는 용어가 예전 조선군 시절부터 있었기 때문에 대장 계급명 사용.[20] 1904년 원수부를 일본이 폐지시킨 후 촬영된 순종의 군복 차림 사진을 보면 팔소매 계급장을 대장 계급장으로 착용하였으므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수부 폐지와 함께 대원수, 원수 계급 자체가 없어지고 황제와 황태자의 계급이 대장으로 격하되었다고 추정한다.[21] 위 표에서는 원사 계급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대한제국군이 모방한 일본군의 특무조장(후에 준위로 계칭)을 생각해볼때 원사보다는 준사관에 해당하는 계급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대한제국군에 준사관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22] 다만 일본군의 준사관은 한국군의 준위보단 원사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23]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썼고, 1905년 설립된 용산 군기창을 통해 직접 생산까지 할 계획이었지만 실제 생산을 했었는지 그냥 놀렸는지는 기록 부족으로 알 수 없다.[24] 6정을 보유했다.[25] 다만 성능부족 등으로 주력은 아니었으며 일부가 지방군이나 해안포대에서 운용되었고 상당수는 치장물자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주력은 크루프 포였다.[26] 알프레드 크루프가 세운 크루프 사에서 만든 대포다.[27] 그러나 구매시점을 생각하면 한때 인터넷 상에서 일본군 야포보다 뛰어났다며 떠들어대는, 주퇴복좌기가 설치된 최신 모델은 1900년대 초에 도입한 10여 문 남짓뿐이고, 이조차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자국의 주력 야포가 러시아군의 76mm 속사포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고 봐 수백 문을 발주하여 전쟁 말기에 인도되었으며, 종전 후 국산화하여 대량으로 도입되었다. 대부분은 당시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군이 쓰던 크루포 야포와 동일한 모델로 추정되는 구식 모델이다. 레밍턴 롤링블럭 등 당시 구한말 조선군의 신식무기 및 설비 구매 당시 청국의 조언이나 입김이 제법 담겨 있었다.[28] 1902년 맥심 기관총 6정과 함께 모델 불명의 빅커스제 야포 4문과 빅커스 QF 2.95인치 산포 8문을 도입한 기록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기록사진도 있다. 그 밖에 해안포도 구입했었다는데, 이 역시 기종 불명이다.[29] 1900년 12월 28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참조.[30] 런던상회라고도 한다.[31] 의화단 운동 당시 홍콩에서 보관하던 소총들이다.[32] 1908년 1월 16일자 통감부문서 참조.[33] 정확히는 동모(퍼커션 캡) 생산.[출처:] 김연희의 논문 <영선사행 군계학조단의 재평가>, 배성준의 서적 《한국 근대 공업사》와 서인한의《대한제국의 군사제도》.[35] 1904년 1월 8일 계약 만료로 귀국[36] 한성기계국 수석기사로 계약.[37] 한성기계국 군물조사원으로 계약.[38] 무관학교 2회 졸업생[39] 고종의 軍統帥權 강화시도와 무산과정 연구-대한제국의 멸망원인과 관련하여-. 장영숙 14쪽[40] 군복 고증에서는 조금 아쉬운 것이 빨간색과 검은색 복제로 구성되어 있는 실제 대한제국군 군복과 달리 온통 검은색으로 깔맞춤되어 있다. 묘사된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견장 역시 빨간색 견장에 '시위대'라고 써져있는 것이 아닌 검은색 견장에 '시위-'라고 되어있는 것도 흠, 다만 일본군 군복은 고증이 꽤 잘된 편인데 당시 대한제국군 군복 색상이 일본군의 메이지 19년식의 군복과 유사하다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고증에 맞지 않는 군복을 보인 듯[41] 이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행진곡은 독일의 행진곡인 옛 친구(Alte Kameraden)[42] 이쪽도 군복 고증이 상술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급은 아니지만 대한제국군의 피켈하우베가 철모가 아닌 단순한 원형 모자 위에 꼬챙이를 단 괴상한 형태의 모습으로 나온다. 다만 당시 한국에서 피켈하우베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장식이 많고 비싼 피켈하우베의 특성상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도 어렵기에 영화를 제작할 당시 원형 모자에다 꼬챙이들 달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43] 심지어 일본 함대의 군함은 그냥 현실의 한국 해군 군함에다가 일장기만 어설프게 붙혀놓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