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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윤영렬 尹英烈 | |||||
출생 | 1854년 4월 15일 | ||||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現 충청남도 아산시) | |||||
사망 | 1939년 11월 4일 (향년 85세) |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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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백웅(白熊) | ||||
부모 | 아버지 윤취동, 어머니 안동 김씨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2] | ||||
배우자 | 한진숙 (1851 ~ 1938, 1867년 결혼) 신덕경 (? ~ 1894, 첩) 이름 미상 (첩) 장복첨 (1902 ~ 1950, 첩) | ||||
자녀 | 장남 윤치오[A] (1869 ~ 1950) 차남 윤치소[A] (1871 ~ 1944) 삼남 윤치성[A] (1875 ~ 1936) 사남 윤치병[A] (1880 ~ 1940) 장녀 윤활란[A] (1884 ~ 1969) 오남 윤치명[A] (1885 ~ 1944) 차녀 윤노덕[A] (1889 ~ 1979) 육남(요절)[10] 칠남 윤치영[A] (1898 ~ 1996) 삼녀 윤씨[12] (? ~ ?) 팔남 윤치정[B] (1921 ~ ?) 사녀 윤길희[B] (1924 ~ 1973) 오녀 윤인희[B] (1927 ~ ?) 구남 윤치일[B] (1935 ~ 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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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 ~ 대한제국의 군인 겸 정치인. 윤취동의 아들이자 윤웅렬의 동생이며 윤치호의 숙부, 윤치영 전(前) 서울시장의 아버지, 윤치소의 아들인 윤보선 전(前) 대통령의 조부이다.2. 생애
조카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학식이 모자라서 글을 못 읽지만 수완과 판단력은 좋았다고 평가된다. 1938년 조카 윤치창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치창에게 "집이 돈에 비해 너무 큰 것 같지 않냐?"고 말한 것이 그 증거. 1867년[17] 한진숙[18]과 결혼해서 6남 2녀[19]를 두었다. 자식도 많이 낳고 장수[20]해서 1927년 회혼례도 올렸다.3. 가계
- 장남 윤치오 (1869 ~ 1950)
- 장손 윤일선 (1896 ~ 1987)
- 차남 윤치소 (1871 ~ 1944)
- 삼남 윤치성 (1875 ~ 1936)
- 사남 윤치병 (1880 ~ 1940)
- 오남 윤치명 (1885 ~ 1944)
- 육남 (불명): 요절.
- 칠남 윤치영 (1898 ~ 1996): 서울특별시장
- 팔남 윤치정 (1921 ~ ?)
- 구남 윤치일 (1935 ~ 1985)
4. 여담
여성 편력이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색마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여러 부인을 거쳤으며 자녀가 무지하게 많다. 총 20명이 넘는다.[21][22][1] 도제공파(陶齊公派) 20세손 ○렬(○烈) 항렬이다.(족보)[2] 큰누나 해평 윤씨는 일반인, 작은누나 해평 윤씨 (1835 ~ 1920)는 시인, 수필가였으며 형 윤웅렬 (1840 ~ 1914)은 관직자였다.[A] 한진숙 소생[A] [A] [A] [A] [A] [A] [10] 신덕경 소생[A] [12] 이름 미상의 첩 소생[B] 장복첨 소생[B] [B] [B] [17] 당시 13세. 다만 당시 기준으로는 조금 일찍 결혼한 편이지 아주 이른 편은 아니다.[18] 1851년생으로 남편 윤영렬보다 3살 연상이다.[19] 첩이 낳은 자식까지 합치면 9남 5녀.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그의 회고록에서 자식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20] 2개월만 더 살았다면 5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모든 연대를 살 수 있었다. 조카 윤치호가 윤영렬의 자식들이 늙은 윤영렬을 잘 돌보지 않아 윤영렬이 말년을 빈곤하게 살았다고 자기 일기에 적은 바 있으니 자식들이 정성껏 돌보았다면 1940년대까지 살았을 수도 있었다.[21] 의친왕, 육종관(육영수의 아버지)와 더불어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22] 81세에도 아들을 낳았으니 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