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2:57:14

후시미노미야

파일:후시미노미야 나시모토노미야.png
파일:일본 황실 문장 2안-2.svg
파일:아리스가와노미야.png
파일:간인노미야 문장.png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한 미야케
 
 
 
 
 
 
 
 
 
 
 

구황족 가계도 · 구 미야케
}}}}}}}}}

[ruby(伏見宮,ruby=ふしみのみや)]
후시미노미야
파일:후시미노미야.png
<colbgcolor=#bd0029> 후시미 가문의 가몬
후시미노미야 십사리국
伏見宮十四裏菊
본가 황실(皇室)
가조 요시히토 친왕(栄仁親王)
종별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
직궁가(直宮家)
출신지 야마시로국 교토
(山城国京都)
근거지 야마시로국 후시미전 어령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키오이정
지류
분가
[펼치기 · 접기]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구니노미야(久邇宮)
가쵸노미야(華頂宮)
고마츠노미야(小松宮)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히가시후시미노미야(東伏見宮)
가야노미야(賀陽宮)
아사카노미야(朝香宮)
다케다노미야(竹田宮)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간인노미야(閑院宮)
당주 제24대 후시미 히로아키(伏見博明)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1446553.jpg 파일:external/www.japanesehistory.de/Prince%20Fushimi%20no%20miya%20Sadanaru%201858-1923.jpg
20대 당주 구니이에 친왕 22대 당주 사다나루 친왕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14482322.jpg 파일:external/www.takei-m.net/107.jpg
23대 당주 히로야스 왕 24대 당주 히로아키(博明)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ushimi-no-miya_Ura-gigku_inverted.png 파일:후시미노미야 나시모토노미야.png
다른 문장
1. 개요2. 성립3. 역대 당주4. 부흥 및 방계 궁가5. 1947년 신적강하와 이후

[clearfix]

1. 개요

일본세습친왕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 네 곳 중 가장 먼저 생겼을 뿐더러 나머지 세습친왕가 세 곳과 1947년에 신적강하구황족은 물론이고 현재의 황실도 후시미노미야에서 떨어져 나온 간인노미야 계통이므로 크게는 후시미 궁가의 후손이다.

2. 성립

14세기 중후반 일본의 난보쿠초 시대에 황가가 분열하여 남조(南朝)의 다이코쿠지토(大覚寺統)와 북조(北朝)의 지묘인토(持明院統)가 경쟁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지묘인토의 정통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으로 등극하지 못한[1] 요시히토(榮仁) 친왕이 창설한 궁가가 시초였다. 궁가의 명칭은 영지였던 교토의 후시미(伏見)에서 따왔다.

그런데 3대 사다후사(貞成) 친왕 때 그의 큰아들 히코히토(彦仁) 친왕이 제102대 고하나조노 덴노로 즉위하면서 전기를 맞이했다. 사다후사 친왕의 차남이었던 사다츠네(貞常) 친왕이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었을 때 그의 형인 고하나조노 덴노가 대대로 신적강하 없이 황족의 자격으로 세습할 수 있는 칙허를 후시미노미야에 내리면서 궁가의 지위가 천황이 소속된 직궁가(直宮家)에 버금갈 정도로 상승하게 되었다. 실제로 19대 당주였던 사다유키(貞敬) 친왕은 천황의 직궁가가 단절되는 바람에 유력한 차기 천황으로 꼽힌 적이 있었다.[2]

그 사이에 가끔 자신들의 딸을 도쿠가와 쇼군가에 시집보내기도 했다.

3. 역대 당주

대수 당주 생몰년
1대 요시히토(榮仁)[3] 1351~1416
2대 하루히토(治仁)[4] 1370~1417
3대 사다후사(貞成)[5] 1372~1456
4대 사다츠네(貞常) 1425~1474
5대 구니타카(邦高) 1456~1532
6대 사다아츠(貞敦) 1488~1572
7대 구니스케(邦輔) 1513~1563
8대 사다야스(貞康) 1547~1568
9대 구니노부(邦房) 1566~1622
10대 사다키요(貞清) 1596~1654
11대 구니나리(邦尚) 1615~1654
12대 구니미치(邦道) 1641~1654
13대 사다유키(貞致) 1632~1694
14대 구니나가(邦永) 1676~1726
15대 사다타케(貞建) 1701~1754
16대 구니타다(邦忠) 1732~1759
17대 사다모치(貞行)[6] 1760~1772
18대 구니요리(邦頼)[7] 1733~1802
19대 사다유키(貞敬) 1776~1841
20대 구니이에(邦家) 1802~1872
21대 사다노리(貞教) 1836~1862
22대 사다나루(貞愛)[8] 1858~1923
23대 히로야스(博恭)[9] 1875~1946
24대 히로아키(博明)[10] 1932~현재
  • 여타 궁가에 비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주의 이름을 짓는 법도 다른 궁가와 다르다. 일단 1대 요시히토(榮仁)와 2대 하루히토(治仁)는 천황의 자리를 이을 예정이었고 천황과 혈통상 가까웠기 때문에 직궁가처럼 이름에 히토(仁)를 넣어서 지었다.[11]
  • 그러나 3대 사다후사(貞成)부터 22대 사다나루(貞愛)까지는 아예 별도의 세습궁가로 이어짐으로서 독자적인 통자(通字)[12]사다(貞)와 구니(邦)를 정해서 교대로 짓게 되었다.
  • 22대 사다나루에게는 적자인 구니카(邦芳)가 있었지만 정신박약아였던 까닭에 지점 카쵸노미야(華頂宮)의 당주로 보냈던 서자 히로야스(博恭)가 본점 후시미노미야로 돌아와 이를 계승하면서 23대 히로야스의 후대부터는 카쵸노미야의 통자인 히로(博)를 썼다. 대신 후시미 방계파생유닛 궁가이며 히로히토의 처가인 구니노미야(久邇宮)에서 '아사'(朝)와 '구니'(邦)를 교대로 쓰고 있다.

4. 부흥 및 방계 궁가

19대 사다유키(貞敬) 친왕대부터 자식을 엄청나게 낳아 대기 시작했다. 다만 사다유키의 자식들은 많았지만 구니이에(邦家) 친왕이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고, 9남(실제는 10남)이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13]를 창설한 일 이외에 나머지 자식들은 요절하거나 출가했기 때문에 황족의 규모가 그렇게까지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대 구니이에(邦家) 친왕은 확인된 자식만 33명이었고 그 중 아들이 17명이나 되었다. 구 《황실전범》의 제정으로 영세황족주의가 도입되자 황실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불어난 황실을 유지하는 데 돈이 들다 보니 궁가를 잇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왕자들은 화족으로 신적강하시켰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렇게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창설을 허용한 사정도 있는 것이 당시 직계 황족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당장 메이지 덴노 본인부터 동생이 요절하고 위로도 장성한 아들이 1명밖에 없던 상황에 그나마 가깝던 간인노미야가 단절되고 다이쇼 덴노가 태어나기 전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승계 순위 1위이던 시절이 장기간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그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후시미가 당주는 그저 먼 황족이 아니라 계승순위 3위인 황족이었다.

1947에 신적강하구황족 11궁가 가운데 9궁가가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및 손자들이 창설한 것이었으며 어차피 이전부터 있었던 나머지 두 궁가의 당주도 구니이에 친왕의 자손이었다.[14] 따라서 소위 "구황족"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구니이에 친왕의 후손이며 고준 황후가 후시미노미야 방계 후손이었으므로 아키히토 덴노의 직궁가하고도 혈연 관계가 있다.

5. 1947년 신적강하와 이후

북조 3대 스코 덴노의 적장남 요시히토(栄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의 하나였다. 이후 쇼코 덴노가 딸 하나만 남기고 죽자 3대 당주 사다후사(貞成)의 아들 중 적장자인 히코히토(彦仁)는 고하나조노 덴노가 되었고 차남인 사다츠네(貞常)는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었다. 후시미계 궁가 10가문 가운데 종가(宗家)로 황적이탈 당시 당주 히로아키(博明)와 그의 모친[15], 누이 2명이 강하했다. 현재는 당주인 히로아키가 딸만 3명이나 두어 장기적으로 남계(男系)로서는 단절될 예정이다.

표면상으로는 자발적으로 황적이탈했다지만 미국의 압박 등으로 이뤄진 것이라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현재의 황실과 구황족과의 교류를 위한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가 만들어져 주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1324173825.jpg

이 사진은 1994년 초 아키히토 덴노환갑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축하행사를 겸해서 열렸을 때 찍힌 것이다. 참석 멤버들은 천황 부부를 비롯한 황족 및 후시미계 구황족, 그리고 시집간 공주와 사위 및 그의 자손, 미치코 황후였으며 황후의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이구이다.[16]

역사적인 연원도 있는 데다 현재의 황족 가운데 후계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구황족 부활 등으로 일부[17]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후시미 궁가는 또 하나의 황실'이라는 내용으로 책까지 나왔을 정도다. 모든 구황족 궁가들이 후시미노미야의 분가이지만 정작 종가인 후시미노미야는 현 당주인 히로아키가 딸 셋만 두었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 단절 확정이다.

게다가 구황족들이 신적강하 이후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18] 등으로 인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이들을 다시 황족으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구황족 각 궁가의 당주들에게 황적 복귀 의사를 물은 적이 있지만 한 명도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19] 그만큼 그들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후시미노미야의 현 당주인 히로아키가 자서전을 내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은 것과 동시에 그가 한 다단계 회사의 홍보모델로 활동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의혹에 대해서 본인은 성질을 내면서 인터뷰를 회피했다고 한다. 해당 보도에 대해서 그동안 구황족 복귀를 부정적으로 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황족 복귀에 대해서 여러가지 사유로 중립적으로 보던 사람들 속에서는 구황족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마저도 논란이 생긴 것에 대해서 놀라워했다.

[1]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2] 메이지 시대에 구《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황위 계승 서열이 철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춰서 후계 천황을 정할 수 있었다. 이때 후시미노미야와 간인노미야가 경합한 끝에 현 황실의 직계 조상인 간인노미야에서 즉위하여 지금의 황실로 이어지게 되었다.[3] 북조 제3대 스코 덴노의 장남[4] 궁가를 상속받은 지 몇 달만에 급서하는 바람에 친왕선하를 받지 못해서 그냥 '왕'이다. 요시히토의 장남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5] 제102대 고하나조노 덴노의 부친이었다. 고코마츠 덴노의 양자로서 즉위한 고하나조노 덴노는 친아버지를 태상황으로 높이고 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추존 천황으로서 '고스코(後崇光) 덴노'라고 불린다.[6] 제116대 모모조노 덴노의 차남이었다. 15대 당주 사다타케(貞建)는 적장남인 구니타다(邦忠)만 남기고 나머지 자식들은 출가시켰는데 구니타다가 요절해서 당주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7] 15대 사다타케(貞建) 친왕의 아들로, 사다모치(貞行)가 요절하자 환속하여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8] 원수육군대장. 구 《황실전범》의 제정으로 인해 천황의 5세손까지만 친왕을 칭할 수 있게 되면서 사다나루 이후의 당주들은 '친왕'이 아니라 '왕'으로 칭해졌지만 구니이에(邦家)는 천황의 5세손으로 간주하며 이전에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아 친왕이 된 자는 그대로 친왕으로 한다는 경과 규정을 두었다. 사다나루는 20대 당주 구니이에의 14남임에도 불구하고 적자라는 이유로 본가인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는데 친형인 21대 당주 사다노리(貞教)와의 나이 차이가 22살이나 나는 걸 보면 본래 서자로 태어난 것을 적자로 간주해 계승시켰다는 말도 있다.[9] 원수해군대장, 군령부총장(=해군참모총장). 명목상 자리만 차지하던 다른 황족과는 달리 해군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이것 때문에 천황도 해군을 어쩌지 못했을 정도였다. 사생활은 소탈한 면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태평양 전쟁 때 끝까지 항전을 외치는 등 아직도 일본을 망친 원흉 가운데 한 명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전쟁 중에 저택이 전소되는 바람에 근처의 료칸에서 기거하다가 죽었다.[10] 23대 히로야스(博恭)의 손자. 아버지 히로요시(博義)가 수면제 남용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궁가의 당주가 되었지만 1947년 신적강하 때 '후시미 히로아키'라는 이름으로 일반 국민이 되었다.[11] 훗날 즉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친왕에게도 히토(仁)를 넣어 명명하게 되면서 나머지 3개 세습친왕가는 가츠라노미야의 2대 당주인 도시타다(智忠) 친왕을 제외하면 모두 직궁가와 동일한 통자인 히토(仁)를 쓴다.[12] どうりじ 또는 けいじ(系字). 한국항렬자와 비슷한데 항렬자가 횡적인 형제 관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일본의 통자는 종적인 계보를 나타내는 차이가 있다. 북한김정일김정은 부자의 '정'()도 통자의 예로 본다.[13] 훗날 구니이에 친왕의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아사히코의 4남이었던 모리마사가 계승하면서(참고로 모리마사는 계승 이후 바꾼 이름이었다.) 영친왕의 처가이자 이방자 비의 친정이 된다.[14] 4친왕가의 하나인 간인노미야와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를 말한다. 간인노미야는 구니이에 친왕의 16남인 易宮(다카노미야/야스노미야)가 봉사손으로 입적하면서 고토히토(載仁)라는 이름으로 친왕선하를 받아 6대 당주가 되었으며, 나시모토노미야는 구니이에 친왕의 손자인 모리마사(守正)가 계승했다.[15] 히로히토 황태자의 황태자비 간택 당시 마사코 여왕과 함께 탈락한 고셋케의 이치조 도키코(一条朝子). 후에 히로아키의 부친 히로요시(博義)의 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살 차이라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히로아키와 이구는 전후 동반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치조 도키코와 이방자 여사·영친왕은 항구에서 함께 배웅했다.[16] 외가쪽으로 따지면 후시미 궁가 계통이고 아키히토 덴노와 6촌 형제이다.[17] 주로 극우 세력[18] 이혼, 불륜, 성매매, 야쿠자 연계 등등[19] 사실 히로아키를 비롯한 이들 당주들은 아직도 주위에서 '전하(殿下)'로 불리며 황족 대접을 받고 있기는 하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0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