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자위대 항공막료장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우에무라 겐타로 | 제2대 사나기 사다무 | 제3대 겐다 미노루 | 제4대 마쓰다 다케시 | 제5대 우라 시게루 |
제6대 무타 히로쿠니 | 제7대 오무로 쓰토무 | 제8대 오가타 가게토시 | 제9대 우에다 야스히로 | 제10대 이시카와 간시 | |
제11대 시라카와 모토하루 | 제12대 쓰노다 요시타카 | 제13대 히라노 아키라 | 제14대 다케다 고로 | 제15대 야마다 료이치 | |
제16대 나마타메 오사무 | 제17대 모리 시게히로 | 제18대 오무라 히토시 | 제19대 요네카와 다다요시 | 제20대 스즈키 아키오 | |
제21대 이시즈카 이사오 | 제22대 스기야마 시게루 | 제23대 무라키 고지 | 제24대 히라오카 유지 | 제25대 다케고치 쇼지 | |
제26대 도타케 이쿠오 | 제27대 쓰마가리 요시미쓰 | 제28대 요시다 다다시 | 제29대 다모가미 도시오 | 제30대 호카조노 겐이치로 | |
제31대 이와사키 시게루 | 제32대 가타오카 하루히코 | 제33대 사이토 하루카즈 | 제34대 스기야마 요시유키 | 제35대 마루모 요시나리 | |
제36대 이즈쓰 슌지 | 제37대 우치쿠라 히로아키 | }}}}}}}}} |
일본국 제3대 항공막료장 [ruby(源田, ruby=げんだ)][ruby(実, ruby=みのる)] 겐다 미노루 | Minoru Kenda | |
<colbgcolor=#007fff><colcolor=#FFF> 출생 | 1904년 8월 16일 |
일본 제국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카게정 (現 일본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아키오타정) | |
사망 | 1989년 8월 15일 (향년 84세) |
일본 에히메현 마츠야마시 | |
재임기간 | 제3대 항공막료장 |
1959년 7월 18일 ~ 1962년 4월 6일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해군병학교 52기 |
복무 | 일본 제국 해군 |
1924년 ~ 1945년 | |
항공자위대 | |
1954년 ~ 1962년 | |
최종 계급 | 대좌 (일본 제국 해군) 항공막료장 (항공자위대) |
최종 보직 | 항공막료장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 |
주요 보직 | 일본군 해군 연합함대 |
서훈 내역 | 욱일장(旭日章, 2등급) 서보장(瑞宝章, 2등급) 훈공장(Legion of Merit)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군인, 자위관. 제3대 항공막료장을 지냈다. 전임자는 사나기 사다무였고 후임자는 마쓰다 다케시였다.좀 더 상세한 정보는 이 글을 참고할 것.
2. 생애
1904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일본해군병학교 52기로 졸업했다. 1928년에 19기 비행학생으로 입과하여 파일럿이 된다. 요코스카 항공대 분대장, 제2연합항공대 참모, 요코스카 항공대 비행대장, 제1항공전대 참모 등을 지냈다. 1932년부터 겐다서커스(源田サーカス)라 하여 곡예비행을 다니기도 했다.일본 해군 시절의 겐다 미노루.
기존의 거함거포주의에 부정적이라 해군 전력 모두 항모를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항공제일주의자였다. 그 때문에 항공기의 위력을 높게 평가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장관에게 중용되었다. 하지만 독선적인 성격과 급한 성격 때문에 대놓고 야마토급 전함등을 건조하는 건함 계획을 비난 했기 때문에 군 내부에서 평가가 갈리는 편이었다.[1] 영식함상전투기(A6M) 개발에도 참여하였고, 엔진의 성능이 떨어진다면 장갑을 희생해서라도 비행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생존성 및 전력을 향상 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 의견이 반영 되었다. 또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도입한 폭격기무적론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고 이 때문에 동기였던 시바타 타케오와 대립했었다.[2] 다만 겐다 또한 중일전쟁의 참상을 보고는 전투기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했다고.[3] 이후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여 여러 작전을 냈다.
자살특공병기인 MXY-7 오카의 개발을 최종적으로 승인했기 때문에 특공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특공 전법을 수행하는데 있어 영향을 끼쳤을 확률은 높으나, 정작 겐다 자신은 T공격부대(어둑해질 무렵 항공 공격을 가하는 야간공격부대) 창설을 주장했고, 자살특공을 거부하고 야간 공습을 주장한 미노베 타다시 소좌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131항공대(통칭 '후요 부대')를 창설한데다 자신의 부대에서 특공을 내보내는 일은 없었다. 전쟁 말기에 시덴으로 활약한 343 해군항공대의 사령관이기도 했고[4] 파일럿들의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에 스기타 쇼이치, 칸노 나오시등 343항공대의 에이스들에게 존경받는 한편, 343항공대와 사이가 나빴던 사카이 사부로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종전 후 연합국이 천황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거사를 일으킨다는 황통호지 작전(皇統護持作戦)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343항공대의 에이스였던 시가 요시오 소좌를 포함해 총 2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실제로 작전이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좌.
전후에[5] 1954년 방위청에 들어가 항공막료감부 장비부장[6], 항공총대 사령관 등을 지내고 사나기 사다무에 이어 항공막료장이 되었다.[7] 곡예비행을 하던 경력이 있던 터라 블루임펄스의 창설을 돕기도 했다. 1962년까지만 해도 자위대의 4대 막료장들은 중장 계급장을 달았는데 미군을 방문하던 자리에서 중장 취급을 당하자 빡돈 겐다는 미국에서 계급장을 대장으로 고쳤다. 규정 위반 문제가 떠올랐지만 겐다의 행동은 사후 승인을 받아 1962년 12월 1일부터 통합막료회의의장, 육상막료장, 해상막료장, 항공막료장은 대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 차후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를 통해 록히드한테 뇌물을 받고서 F-104 도입을 밀어붙인 게 확인되었다.
1962년에 퇴직했고 자민당 참의원으로 활동했다. 정치 활동에 대한 소회로 "국회만큼 일본어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다"란 말을 남겼다. 국회 시절 구 일본군 인맥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일우호의원 연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이 핵을 갖추자 일본의 핵무장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야마토 민족은 핵 3, 4방 맞아도 항복할 민족이 아니었다며 전쟁에서 항복한 천황의 성단 덕분이니 천황에 의해 구원받은 우리는 천황제를 수호해야 한다." 같은 말을 남겼다. 히로시마에서는 겐다의 사임을 요구했다.[8][9]
1978년에 일본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할 때 유일하게 반대한 5인의 의원으로 대만에서 추켜세워줬다.
1986년에 국회의원을 은퇴했다.
1989년 8월 15일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의 한 병원에서 뇌혈전으로 사망하였다.
3. 여담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곤 하지만 어차피 일본 연합함대의 고위 간부였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로센의 방어력 강화대책을 요구하는 일선부대와 제작사의 의견을 "더욱 엄격한 훈련과 한층 가벼운 전투기를 만들어야 할 회의에서 이따위 무의미한 공론을 듣고 있자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야마토 정신으로 돌파해야 한다.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하는 이 때에 해이해진 것이 아닌가?"면서 묵살해버렸다.[10]FX기종 선정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것이나 커티스 르메이에게 욱일대수장을 수여한 것 때문에[11] 비난하는 목소리도 많고, 일본에선 평가가 크게 갈리는 인물이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는 아카기에 제로센을 몰고 착함한다. 그리곤 제로센을 칭찬하면서 메서슈미트나 스핏파이어에도 안지냐는 후치다의 말에 "절대로 안진다!"며 자화자찬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미드웨이에서도 겐다 미노루 역의 인물이 출연한다. 다만 역할을 맡은 배우가 일본 본토인이 아닌[12] 일본계 캐나다인이었다보니 그의 일본어 발음이 유독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다. 해당 배우는 피터 신코다(Peter Shinkoda)
[1]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경우 전함은 쓸모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할 당시 관계자들에게 이제 실업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등 전함 건조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야마토급의 추가 건조를 승인하는 등 일관성이 없는 행보를 보였다.[2] 시바타는 작전반경이 줄어들더라도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아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3]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초반 적지 않은 폭격기들이 호위를 받지 못한 채 조기경보 및 관제 시스템과 인프라는 물론 항공기 성능과 수량도 부족했던 중국 공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4] 참고로 저 343 해군항공대의 사령관으로 있을 때 비행대장이던 시가 요시오와의 일화가 있다. 자세한 건 시가 요시오 문서로.[5] 여러 사업도 하고 그랬는데 수완이 없었다고 한다.[6] 군수참모부에 상당한다.[7] 당시 육군 항공대 출신과 해군 항공대 출신의 파벌 싸움이 있었는데 겐다 미노루를 끝으로 한동안은 육군 항공대들이 차지하게 된다.[8]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게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 수뇌부는 항복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의 피해에 대해서 일본 수뇌부는 축소하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지만, 나가사키 원폭 이후에는 더 이상 감출 수도 없었다. 그리고 천황의 성단을 운운한 옥음방송은 저러한 사실 덕분에 명백한 정신승리로 여겨진다.[9] 게다가 본인은 전쟁 이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기에 저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다.[10] NHK스페셜 다큐멘트 태평양전쟁 3부 <일렉트로닉스가 전장을 지배한다> 中. 증언한 인물은 제로센 설계기사 소네 요시토시.[11] 커티스 르메이에게 욱일대수장이 수여된 건 항공자위대 설립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나, 알다시피 르메이는 도쿄를 한 번 석기시대로 되돌렸던 인물이다.[12] 다른 일본군 장교들은 모두 일본인 배우들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