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8:33:19

다카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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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결혼으로 인한 황적이탈
[궁]: 분가하여 새 미야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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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카사노미야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三笠宮崇仁親王
파일: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이름 다카히토(崇仁)
미야고 미카사노미야(三笠宮)
출생 1915년 12월 2일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궁성 내산전
(現 도쿄도 치요다구 황거)
사망 2016년 10월 27일[1] (향년 100세)
도쿄도 주오구 성 루카 국제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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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어칭호 스미노미야(澄宮)
신위 친왕(親王)
경칭 전하(殿下)
부모 부친 다이쇼 천황
모친 데이메이 황후
형제자매 첫째 형 쇼와 천황
둘째 형 야스히토 친왕
셋째 형 노부히토 친왕
배우자 유리코 비
1923년 6월 4일 ~ 2024년 11월 15일 (향년 101세)
자녀 3남 2녀
장녀 고노에 야스코
1944년 4월 26일 ~ (80세)
장남 토모히토 친왕
1946.1.5 ~ 2012.6.6 (향년 66세)
차남 요시히토 친왕
1948.2.11 ~ 2014.6.8 (향년 66세)
차녀 센 마사코
1951년 10월 23일 ~ ([age(1951-10-23)]세)
삼남 노리히토 친왕
1954.12.29 ~ 2002.11.29 (향년 47세)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기병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도쿄대학 문학부 (역사학과 / 연구생)
종교 신토
오시루시
(お印)
[2]
삼나무(若杉)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48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35년 ~ 1946년
최종 계급 소좌
병과 기병
근무 지나 파견군
대본영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
파일:다카히토 친왕 소쿠타이.jpg
소쿠타이(束帯)를 입은 다카히토 친왕
파일:미카사노미야 문장.svg
미카사노미야의 문장

1. 개요2. 출생과 종전 전까지의 삶
2.1. 군인 생활2.2. 츠노다 사건2.3. 전후의 삶
2.3.1.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대한 태도
2.4. 말년
3. 사생활4. 가족
4.1. 황실 가계도4.2. 자녀
5. 약력6. 낭설들
6.1. 포로 보호 루머6.2. 무타구치 렌야 관련 루머6.3. 이건 관련 루머

[clearfix]

1. 개요

일본의 황족. 고대 오리엔트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어칭호는 스미노미야(澄宮), 미야고(궁호)는 미카사노미야(三笠宮). 이 미야고는 성년이 되는 1935년 다카히토 친왕이 성년식을 거행했을 때, 나라현에 있는 미카사 산(三笠山)의 이름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친왕의 자녀에게는 주어지지않고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어린 시절의 어칭호는 스미노미야(澄宮).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사다코)의 4남(막내)으로, 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이며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부이다. 사망 직전 기준으로 살아생전의 황위계승 순위는 5위였으며, 본래 후순위로 그의 아들 3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현재 그의 후순위 계승자는 없다.

대단히 장수하여 만 100세까지 살았으며, 구황족을 제외한 메이지 이후 황족으로는 유일하다.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다카히토 친왕의 고모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1887~1990, 향년 102세)과 아키히토 상황의 막내 외삼촌이자, 고준 황후의 막냇동생인 히가시후시미 구니히데(東伏見邦英, 1910~2014, 향년 103세)가 있었다.

2016년 10월 27일 타계할 때까지 황족 중 최연장자였다.

2. 출생과 종전 전까지의 삶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037963.jpg

큰형 쇼와 덴노와는 14살, 바로 위의 셋째 형 노부히토(宣仁) 친왕하고도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다카히토 친왕이 태어날 때는 메이지 덴노후궁이자 다이쇼 덴노의 서모인 소노 사치코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형들과 달리 다이쇼 덴노사다코 황후 부부가 궁정에서 직접 길렀다. 당시 관습상으로는 양육계를 따로 두었고, 황실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시종들의 손에 자랐다. 그러다 1960년 첫 아이 나루히토 친왕을 낳은 아키히토 황태자& 미치코 황태자비 부부는 아이를 자신들의 곁에 두고 키웠고, 이때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아이들을 부모의 곁에서 키우게 되었다.

형들과는 나이 차가 있는데다, 3명이나 되는 형들이 있어 황위계승 가능성도 낮았기에 비교적 행동반경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이는 훗날 성인이 된 그가 빨갱이 왕자 소리 듣는 배경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양사학을 전공하던 다카히토가 전후 "(초대) 진무 덴노는 실제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역사학계에서 진무 덴노는 스진 덴노에서 모티브를 딴 신화적 존재라는 게 정설이지만, 덴노가를 신성시하는 극우주의자들에겐 그런 팩트를 말해줘봤자 신성모독이나 당하는 기분일테니. 그러나 다카히토는 "나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애국자로 칭송받고 사실을 말하는 자는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세상을 경험했다"고 발언하며 소신을 지켰다.

사실 '빨갱이 왕자'는 비꼬려고 만든 별명이고, 다카히토 친왕은 그 외에도 별명이 많긴 했다. 어릴 땐 글솜씨가 있어서 동요의 왕자님(童謡の宮さま)으로 불렸고, 다이쇼 시대의 시 작품에는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레코드로 취입한 적이 있었을 정도. 1957년에는 아내 유리코 비와 함께 <첫눈(初雪)>이라는 하이쿠 모음집을 내기도 했다.

아울러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왈츠의 왕자님으로도 불렸다. 유튜브를 찾아보면, 다카히토 친왕이 무도회에서 왈츠를 추는 장면이 실려 있는 극장 상영판 1950년대 일본 뉴스도 있다. 이러한 연유로, 그가 갖고 있던 직함 가운데는 일본레크리에이션협회 총재도 있었다.

2.1. 군인 생활

일본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에는 츠지 마사노부(辻政信)가 자원하여 교육을 맡았다고 하며, 후에 중일전쟁 중에 중국파견군(支那派遣軍)에서 같이 근무했다. 당연하지만 츠지 마사노부 보다 훨씬 똑똑했다. 츠지가 근성론을 주창하며 "전쟁이란 의지가 센 쪽이 이긴다"라고 하자 "그럼 적들도 똑같이 의지가 강하다면 어쩔 텐가?"라고 되물었다.

2.2. 츠노다 사건

지나파견군 총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와카스기'라는 가명을 썼으며, 그의 정체는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황족임이 거의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이때 중국통이었던 통역 키무라 타츠오(木村辰男)로부터 중국어와 관련 정보를 배워둬서 타계 직전까지도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이후 대본영 참모로 전출되면서 귀국한다.

귀국한 뒤 전쟁 종결을 모색하는데, 바로 윗 형인 노부히토 친왕, 동료인 츠노다 토모시게(津野田知重) 소좌와 함께 도조 히데키 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츠노다 사건)을 세웠다. 이 쿠데타 계획의 골자는 '주전파'로 분류된 도조 히데키 이하 일본군 장교들을 처단한 뒤 다카히토 친왕이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계획의 과격함에 놀란 다카히토 친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헌병대에 자수해버렸고, 그에 따라 츠노다 소좌도 체포되어 쿠데타 계획은 미수로 그친다.[3]

다카히토 친왕이 이 사건에 관여한 것은 분명했지만 주도자들 중 하나가 황족, 그것도 쇼와 덴노의 동생이라는 지위 높은 황족이 관여되어 있어서, 자칫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상당히 큰일이 일어날 게 뻔했기에 불문에 부쳐졌다.

1944년 9월에는 다카히토 친왕이 본인의 지원으로 육군기갑본부로 전출되었고, 츠노다를 비롯한 관련 장교들도 가벼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러한 까닭인지 1945년 4월 큰형인 쇼와 덴노와 면담을 요청했을 때는 '뭔 말을 하려는 건가??'라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고 알려진다. 근데 도조나 기시한테는 알리지 않았다. 종전 당시 계급은 일본 육군 소좌으로 항공총군 참모직에 있었다.

그리고 훗날 이걸 안 기시 노부스케
이 천하의 역적 놈들!! 내가 네놈들[4]을 교수대에 올려주마!
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만약 전하께서 묵인만 하셨다면, 너와 너의 친구들은 그 자리에 없었을 거다.
라는 츠노다 토모시게의 조롱 섞인 대꾸만 들었을 뿐,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못하였다.

츠노다 토모시게는 패전 후 일본 과학기술진흥재단에 일하게 되었는데, 미군이 레이더망으로 쓰던 주파수 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허락이 떨어지자 그 대역에다 TV방송국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이 방송국이 훗날 덕후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긴급 방송 없이 기어코 정규 방송을 내보내고는 걸로 유명해지는 용자 방송국 TV 도쿄가 된다.

2.3. 전후의 삶

도쿄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고고학, 중동 역사, 셈어 계통 언어(Semitic languages)를 공부하였다. 특히 아나톨리아 고고학 전문 역사학자로서 알려졌다. 오랫동안 도쿄여자대학 등에서 고대 중동역사의 강의를 담당하면서 '황족 강사(宮さま講師)'로 불렸다.

사단법인 일본중동역사학회 설립에 관여했으며, 학회장을 맡았다. 이 학회에서는 미카사노미야 오리엔트 학술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외에 오카야마시립오리엔트미술관 명예고문이기도 하다.

재단법인 중근동 문화센터의 설립에도 진력하여, 센터의 총재로서 터키에서 카만 칼레후유크 유적의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서거 시까지 현지에서 상설연구기관으로서 아나톨리아 고고학 연구소의 건설을 진행해 왔다.

또한 전후 "여성 천황 허용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을 주장하였다는 게 알려졌다. 과거 평화헌법을 제정하는 책임자의 유품 중에서 다카히토가 직접 쓴 내용의 원고가 발견되었는데, 그 원고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당시 의회가 이를 무시한 덕분에 일본 헌법황실전범에 이를 넣는데 실패했고, 그 직후에 라디오를 통해서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정도였다. 사망하기 수 년 전에는 라디오를 통해서 '현 일본 언론들의 행태 때문에 내가 과거에 주장한 여제 허용이 상당히 어렵지 않나'라는 의견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2.3.1.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대한 태도

1950년대 후반부터 기원절(紀元節)의 부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학자적 입장에서 진무 덴노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여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이때 1959년 ≪일본의 새벽;건국과 기원을 둘러싸고(日本のあけぼの 建国と紀元をめぐって)≫라는 책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그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애국자로 칭송받고 사실을 말하는 자는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세상을 나는 경험했다.
偽りを述べる者が愛国者とたたえられ、真実を語る者が売国奴と罵られた世の中を、私は経験してきた。
라는 말을 하기도 해서 제법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바로 이때이다. 해당 책을 집필했던 당시 일본 극우파들은 다카히토 친왕을 극렬 비난하면서 그를 황적에서 파낼 것을 대놓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우익 단체가 미카사노미야 저택 앞에서 면담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행위에 대해 한국중국에 사과해야 한다"며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2차례 가량 하였다. ≪동방학 회상(東方学 回想) VIII. 학문의 추억 3.≫이란 책에서 모리 마사오(護雅夫), 나카네 치에(中根千枝) 등 5명의 학자들과의 좌담회에서 지난 전쟁 시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1943년 1월 나는 중국파견군 참모로서 난징에 있는 총사령부에 부임해서 1년간 근무했다. 그 사이 나는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알고 말았다.
성전(聖戰)이라는 대의명분이 사실과 한참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 내용이 정의의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겉으로는 성전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성전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상실한 나로서는 오직 평화만을 바랄 뿐이었다.
1998년 중국장쩌민 주석 방일 당시 궁중연회 자리에서는, "중국인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어록과 난징대학살 희생자 수에 관해 남긴 어록은 다음과 같다.
"'황군이 그 이름에 반하는 행위(폭행, 약탈)를 하고 있는 지금은 현지인으로부터 존경 따위 받을 리 없다. 지금의 황군에 필요한 것은 장비도, 계획도 아닌 '반성'이다. 스스로를 돌이켜 스스로를 삼가고 일거수일투족이 폐하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볼 것."'
"皇軍がその名に反する行為(暴行略奪など)をしている、これでは現地民から尊敬などされるわけがない。今の皇軍に必要なのは装備でも計画でもない、“反省”だ。自らを顧み、自らを慎み、一挙一動が大御心に反していないかを自身に問うこと"
"'피해자 수가 논의되고 있지만, 숫자가 문제인 게 아니야. 학살이 이루어진 것 자체가 문제야."'
"犠牲者数が議論されているが、数が問題なのではない。虐殺が行われたこと自体が問題なんだ" 출처

2.4. 말년

파일:external/img.47news.jp/PN2012070801001013.-.-.CI0003.jpg
말년의 다카히토 친왕
2016년 들어 나이가 100살이 넘는데다 아들 셋을 연이어 보낸 탓인지 급성폐렴으로 입원했다. 아내 유리코 비와 작은며느리 히사코 비, 조카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 등이 문병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큰며느리 노부코 비는 참석하지 않았다.

노부코 비는 황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사별한 남편 토모히토 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두 딸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와도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 그냥 미카사노미야 일가와 노부코 비가 사이가 나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리코 비가 사망하고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시집을 가도,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노부코 비 때문에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장례식에는 참석했다.

2016년 10월 27일, 입원하고 있던 세이로카 국제병원(聖路加 国際病院)에서 오랜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100세. 닛케이 부고기사

3. 사생활

군복무 시절 지나파견군에 재직했기에 1972년 중일수교 직전에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바 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 중국어히브리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학술관계의 업무에 있어서 다른 황족과 동석하는 기회도 많았다.

1970년과 1989년에 부부동반으로 영친왕 부부의 장례식 참석차 한국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본 방계 황족 출신(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기 때문. 참고로 광복 이후 현재까지 일본 황족이 한국을 공식방문한 것은 2002년 그의 3남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부부가 유일하다. 사실 이전에도 다카히토 친왕은 1936년 4월에 황족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말 그대로 쇼와 덴노직계 황족 자격으로 조선과 만주를 사찰하기 위해 들른 것. 당시 발행된 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 다카히토 친왕의 조선 방문기를 보도하였다.

2010년대 들어 아키히토 덴노의 삼촌뻘 되는 황족 가운데 생존해 있던 사람은 다카히토 친왕뿐이었다. 또한 옛 제국헌법 하에서 귀족원 의원을 지낸 사람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4. 가족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1324172139.jpg

화족 가문의 딸인 다카기 유리코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유리코는 1923년 6월 4일생으로,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 자작과 부인 다카기 구니코(高木邦子)의 차녀이다. 유리코가 여자 가쿠슈인 본과[5]를 졸업한 해인 1941년에 결혼했다. 유리코 비의 친정아버지 마사나리는 패전 후 1947년 신헌법 제정에 따라 화족 신분이 박탈되고 재산을 잃으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자살했다.

한편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유리코 비의 큰시아주버니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낸 바 있다. 이때 스게마사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일기가 유명하다. 스게마사의 이모[6] 야나기하라 뱌쿠렌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으로, '다이쇼 시대 3대 미인' 중 하나이자 문학적 재능과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유리코 비는 2024년 11월 15일 만 101세로 별세했으며, 일본 황실 황족 중 가장 최연장자였고 다이쇼 시대 출생 황족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이다.

남편과 시아주버니들의 나이 차 때문인지, 큰아주버니 쇼와 덴노와 큰형님 고준 황후와는 각각 22살, 20살 차이. 당시로서는 거의 부모자식뻘 수준의 나이 차를 자랑했으며, 큰집 시조카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와는 2살 차이밖에 안 난다.

둘째 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막내 형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수 세츠코 비는 한 번 임신하였지만 2.26 사건 당시 유산한 뒤로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고, 막내 형수 키쿠코 비는 한 번도 임신하지 못했다. 노부히토 친왕에게 게이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반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맏형 히로히토 덴노의 직궁가와 마찬가지로 자식을 여럿 두었다. 그래서 패전 후 미카사노미야 일가는 재산이 가장 적었는데도 딸린 식구들이 많아서 꽤 힘들게 지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꽤나 훈훈한 일화가 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전우회(특히 TV 도쿄)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고 한다.

다카히토 친왕의 자식대에서는 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행 황실전범상으로는 2016년 10월 다카히토 친왕의 별세로 인해 미카사노미야 가문도 장기적으로 단절될 예정이다. 또한 다카히토 친왕과 유리코 비 부부는 함께 장수했지만, 그의 세 아들들은 건강상의 문제로 모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4.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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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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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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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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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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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4.2. 자녀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2?1324172139.jpg

1966년 장남 토모히토 친왕의 만 20살 성년식 때 찍은 가족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첫째 고노에 야스코, 넷째 센 마사코, 셋째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어머니 유리코 비, 막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둘째 토모히토 친왕,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

다카히토 친왕은 자녀 양육에서도 자유방임주의자였기에, 생전 자식들에게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장남 토모히토 친왕의 가쿠슈인 시절 학교성적은 뒤에서 맴돌았다고 한다.
  • 장녀 고노에 야스코(1944년 4월 26일생, 만 [age(1944-04-26)]):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인 고노에 타다데루(近衛忠煇)의 부인. 1970년 타다히로(忠大)를 낳았다(1남). 가쿠슈인 초등과,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일본적십자 직원이던 타다데루와 결혼하여 황적에서 이탈했다. 훗날 남편 타다테루는 일본적십자사 사장이 되었다. 외아들 타다히로는 구니 게이코(久邇桂子)와 결혼하여 자녀 3명을 낳았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구니 아사다케(久邇朝建)로, 고준 황후의 큰오빠인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차남이다.
  • 장남 토모히토(寬仁) 친왕(1946년 1월 5일 ~ 2012년 6월 6일, 향년 만 66살) 아소 다로 전 총리의 여동생이며,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녀인 아소 노부코와 결혼하여 1981년 장녀 아키코 공주와 1983년 차녀 요코 공주를 낳았다(2녀).
  • 2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宜仁) 친왕(1948년 2월 11일 ~ 2014년 6월 8일, 향년 만 66살): 가츠라노미야(桂宮). 독신. 1988년 쓰러진 이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2008년 패혈증이 발병하여 2014년 죽을 때까지 눈을 편안히 감지 못했다고 한다. 또 1988년 쓰러진 이후부터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오른쪽 눈은 실명한 상태였으며, 계속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 2녀 센 마사코(1951년 10월 23일[7] ~ 만 [age(1951-10-23)]살): 센 소시츠(千宗室)의 부인. 1984년 장남 아키부미(明史), 1987년 장녀 마키코(万紀子), 1990년 차남 다카부미(敬史)를 낳았다(2남 1녀). 언니 야스코와 마찬가지로 가쿠슈인 초등과,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를 졸업했고,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프랑스 파리소르본대학교유학을 떠났는데,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상이 일본에까지 들려오는 바람에, 어머니 유리코 비가 크게 걱정하여 프랑스까지 직접 찾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조카 쓰구코 공주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세한 것은 쓰구코 공주 항목을 참조. 귀국하여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외국어를 활용한 왕실 외교와 공무 등을 했다. 1983년에는 다도(茶道)로 유명한 센 가문의 아들 16대 소시츠와 결혼하였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에게 다도를 가르쳐준 스승이자 일본 다도의 기초를 만드는 등의 공헌이 커 지금도 다도의 원조라 불리는 센노 리큐의 가문이다. 정작 센노 리큐는 히데요시에게 밉보여 자결하고 말았으나, 후손들은 별 제약없이 계속 다도를 수련해 이러한 다도를 일본 전역으로 퍼트리게 된다. 참고로 소시츠는 마사코보다 5살 연하.
  •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憲仁) 친왕(1954년 12월 29일[8] ~ 2002년 11월 21일, 향년 만 47살): 다카마도노미야. 1살 연상인 톳토리 히사코와 결혼하여 1986년 장녀 쓰구코 공주, 1988년 차녀 센게 노리코, 1990년 3녀 모리야 아야코를 낳았다(3녀). 노리히토 친왕은 2002년 스쿼시 경기 중 심장마비로 돌연사했고, 그의 아내 히사코 비는 여전히 활동 중이다. 이미 2002 한일 월드컵노리히토 친왕과 함께 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아베 신조의 아내 아베 아키에 여사와 함께 방한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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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남 노리히토 친왕이 타계한 뒤에 찍은 사진. 뒤편의 하늘색 옷을 입은 여성이 노리히토 친왕의 아내 히사코 비이며, 그 옆의 수염 난 남성이 장남 토모히토 친왕, 다카히토 친왕의 옆에 있는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차남인 요시히토 친왕이다.
    왼쪽의 맨 뒷줄에 초록색 옷을 입은 여성은 차녀 센 마사코이며 바로 옆에 있는 갈색 옷을 입은 여성이 바로 장녀 고노에 야스코이다.
    유리코 비의 바로 뒷줄에 있는 교복을 입은 남학생은 센 마사코의 막내아들 타카후미이며 바로 왼쪽에 있는 남성이 남편인 센 소시츠.
    유리코 비의 바로 옆에 있는 남성은 고노에 야스코의 남편인 고노에 타다테루이며,그 바로 왼쪽의 젊은 남성이 외아들 고노에 타다히로이다.
    바로 밑의 진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센 마사코의 딸 센 마키코.
    맨 앞줄의 파란 옷을 입은 여성은 토모히토 친왕의 큰딸 아키코 공주이고, 바로 옆의 연분홍색 옷을 입은 여성은 토모히토 친왕의 작은딸 요코 공주이다. 아키코 공주 옆의 가쿠슈인 교복(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은, 노리히토 친왕의 3녀 아야코 공주, 그 옆의 여학생은 노리히토 친왕의 2녀 노리코 공주이다.
    마지막으로 요코 공주 옆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은 고노에 타다히로의 부인 고노에 케이코와 그 아들이다.
  • 친손녀 5명, 외손자 3명, 외손녀 1명, 외증손 3명이 있다. 생존한 황족들 가운데서 증손을 본 것은 미카사노미야 부부뿐이다.

5. 약력

  • 1915년 12월 2일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4남으로 탄생
  • 1936년 가쿠슈인(学習院) 초등과와 중등과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 48기로 기병장교로 임관
  • 1941년 10월 22일 화족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 자작의 차녀 다카기 유리코와 결혼하여 이후 3남 2녀를 두었다.
  • 1943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코드네임 '참모 와카스기(参謀・若杉)'로 난징의 지나파견군(支那派遣軍) 총사령부에서 근무
  • 1944년 9월 육군기갑본부로 전출
  • 1947년 4월 도쿄대학 문학부 연구생이 되어 고대 오리엔트사를 전공
  • 1955년에는 도쿄여자대학 강사. 이후 여러 대학의 역사학 강좌를 맡은 바 있음.
  • 1979년 중근동문화센터(中近東文化センター)를 설립하고 총재를 맡음
  • 1991년 프랑스의 비문문예(碑文・文芸) 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 1994년 영국 런던 대학교 동양-아프리카 연구원 명예회원
  • 2016년 10월 27일 타계(사망) / 11월 4일 장례식

6. 낭설들

리그베다 위키 때부터 다카히토 친왕의 군복무 시절에 대해 근거없는 낭설들이 퍼져 오늘날까지도 인터넷 상에서 돌고 있는데, 이 문단에서는 그런 낭설들을 정리했다.

6.1. 포로 보호 루머

해당 내용은 731 부대 문서의 r53에서 처음 작성된 것으로, 다카히토 친왕의 반전(反戰)적인 태도와 섞여 국내에서 마치 사실인 양 퍼진 이야기이지만 본 문서에서 이미 설명된 것처럼 다카히토 친왕이 복무한 곳은 난징의 지나방면군 총사령부 뿐, 그가 731 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자료는 단 하나도 없다.

다만 731 부대 출신자들 중에서 당시 기준으로 황족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전후에 황적이탈 당하는 구황족의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왕으로 다카히토와는 고종사촌 관계[9]이며 패전 후 연합군측은 731부대 관여자들에 대해서 처벌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츠네요시 역시도 731부대가 생체실험하는 부대라는 걸 직접 봤음에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731부대에서 활동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JOC 회장/IOC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의혹이 있어서 이번 임기 종료를 핑계로 해당 직위에서 내려온 다케다 츠네카즈는 이 사람의 막내아들이며 거기에 자칭 메이지의 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케다 츠네야스도 이 사람의 손자들 중 하나.

6.2. 무타구치 렌야 관련 루머

어느 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대위{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가 15군 사령부에 시찰을 왔다.
다카히토 대위: 무타구치 공의 부대는 보급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황족이라서 상급자인 무타구치에게도 하대할 수 있었다.}
무타구치 중장: 전하, 보급이 뭐 걱정 있겠습니까?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입니다.
다카히토 대위: (황당한 듯) 그런가? 그래, 다 말이 된다고 하겠네만, 만약 적군도 같은 생각이면 어쩌려는가?
이렇게 말하자 무타구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무타구치 렌야 문서의 r1391버전에서 삭제된 부분, {} 안의 내용은 본래 각주로 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무타구치 렌야 문서의 r309, r310, 311버전에 걸쳐 작성된 위의 일화는 보급을 등한시하여 임팔 전투에서 참패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타구치 렌야의 무능함을 비꼬는 듯하게 작성되어 마치 사실인 양 퍼진 내용이지만, 문제는 자신의 황족 신분으로 무타구치를 하대한 위의 내용과 달리 다카히토 친왕은 난징의 지나방면군 총사령부에서 복무하던 당시 '와카스기\'(若杉)라는 가명을 사용해가며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카히토는 난징에서 가명까지 써가며 신분을 숨겼다. 황족들은 기본적으로 군대에 들어갈 때 별도의 가명을 썼었다고 한다. 게다가 구태여 난징에서 한참 떨어진 버마까지 갈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위의 일화는 명백한 거짓이다.

6.3. 이건 관련 루머

조선의 친일 왕족인 모모야마 켄이지와 동기였다는 이 주장은 한국 위키피디아에 명기된 주장으로 사실 모모야마는 일본육군사관학교 42기, 일본육군대학 51기생이고 다카히토가 육군사관학교 48기, 육군대학 55기로 제법 차이가 난다. 만일 다카히토가 일본육사나 일본육군대학에서 이왕가 사람을 봤다면 육군사관학교 45기, 육군대학 54기이자 이건에게는 이복동생인 이우가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일본 황족들 중에서 이건과 사관학교 동기라고 한다면 731부대 출신인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뿐이며, 이건의 육군대학 동기 중에는 황족이 없다.


[1] 101번째 생일을 약 1개월 앞두고 노환으로 사망했다[2]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3] 일단 군인 신분으로 군부를 뒤엎는 것 자체가 군인은 천황에 명령에 복종하라는 것을 거부하는 반역인데다가, 노부히토와 다카히토가 마음만 먹으면 황위 계승을 직접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당시 기준으로 승계 서열 4~5위에 1위와 2위인 아키히토랑 마사히토는 미성년자, 3위이자 그들의 친형인 야스히토 친왕은 병으로 요양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 쿠데타가 실현되었으면 황실 내 대규모 권력투쟁으로 이어졌을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로 전후 히로히토가 강제 퇴위당할것을 고려해서 황족 한명을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이 있었다.[4]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다카기 소키치, 츠노다 토모시게, 히라바야시 모리토(다카히토가 헌병대에 자수할 당시 헌병 사령관.)[5]가쿠슈인 여자 중등과&여자 고등과에 해당.[6] 스게마사의 어머니인 이리에 노부코의 이복 여동생.[7] 前 황족 코무로 마코(1991년생)와 생일이 같다.[8] 카코 공주(1994년생)와 생일이 같다.[9] 츠네요시의 어머니 마사코(昌子)가 메이지 덴노의 6황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