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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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대 공승배 | |||||
※ 초대의 당시 직함은 육군항공사관학교장이었으며, 2대 이근석 교장부터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직함이 변경됨 | |||||
※ 초대~26대, 39대 : 소장 또는 소장 이하 / 27대~현임 : 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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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 출생 | 1924년 12월 15일 | ||
전라남도 나주군 (現 전라남도 나주시) | |||
사망 | 2015년 2월 2일 (향년 90세) | ||
서울특별시 | |||
본관 | 흥덕 장씨 | ||
호 | 석은(石隱) | ||
직업 | 군인, 외교관 | ||
복무 | 대한민국 공군 | ||
1948년 ~ 1968년 | |||
재임기간 | 제9대 공군참모총장 | ||
1966년 8월 1일 ~ 1968년 8월 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colbgcolor=#128AD1> 배우자 | 송원희 | |
자녀 | 장대환 등 3남 2녀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60기 육군사관학교 (5기) | ||
최종계급 | 중장 | ||
최종보직 | 공군참모총장 | ||
주요보직 | 주미대사관 공군무관 공군본부 인사국장 공군본부 작전국장 제11전투비행단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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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공군의 장성. 육사 동기였던 박원석 중장에 이어 9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회장의 부친이자 장승준 매일경제신문 및 MBN 사장의 할아버지이며, 동향인 정진기 매경 창업주와는 사돈 관계이다.2. 생애
1924년 12월 15일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21회)를 졸업한 뒤[1]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60기로 입학했고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1945년 8월 15일에 졸업했다.[2]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해 육군소위로 임관했고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중등학교에서 일본 육사로 직행한 수재로, 생도시절에는 독립운동가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김일성"처럼[3]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생각으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학교 성적도 꽤 우수했다고 한다.[4] 박 전 대통령은 장지량이 초급 장교였을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좋게 보았기 때문에 웬만한 사안은 경청해주며 흔쾌히 들어주었다는 후문.
김신조의 서울 침투 사건 당시 美 5공군 사령관 매키 중장[5]과의 인연으로 김신조의 124부대 및 김일성 숙소의 위치 같은 미국의 극비 정보를 공유하는데 성공했으며,[6] 사건 후 대노한 박정희 前 대통령이 대대적인 보복을 지시하자, 실무진들과 공격계획을 입안하였다.[7]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제10전투비행전대장, 공군본부 인사국장, 작전국장, 제11전투비행단장, 공본 작전참모부장,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1966년에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참모총장시절에는 지방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을 헬기에 직접 모시고 수행하면서, 참모총장의 지위를 대장(大將)으로 격상시키고(후임부터 적용), 공군의 중요한 안건을 이른 시일 내에 현안으로 올려 공군을 지원하는데에 진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경쟁자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는데, 개중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끼고 공격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신중한 처신으로 살아남았으며, 전역하는 자리에서도 이 일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군인 신분으로 대한중석 회장을 지냈다. 1968년 이임했고 후임자는 대한민국 공군의 첫 대장인 김성룡 대장이다. 전역 후에 에티오피아 대사, 필리핀 대사, 덴마크 대사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부회장, 성우회 회장, 한국군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장(戰場)과 기업 경영[8] 양 쪽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인물로 상황판단과 응용력, 처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월 2일 향년 91세로 별세. 기사
3. 논란
말년에 국방일보에 회고를 연재했고 2006년에는 회고록인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를 출판[9]했으나 여러 사실관계의 오류와 공적 가로채기, 그리고 자기 미화들로 논란을 빚었다.먼저 해인사 폭격과 관련하여 장지량 장군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해인사 폭격을 막은 것 처럼 서술하였으나, 이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김영환 장군의 공적을 가로챈 것이었다. 이는 이후 공군본부 차원의 검증 과정에서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관계가 드러났다.[10][11]
또한 장지량 장군이 빨간 마후라를 고안했다는 서술도 있었으나 이 또한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이 빚은 오류로 잘못된 서술이다. 장지량 장군은 빨간 마후라를 회고록에서 본인이 고안한 것 처럼 증언하였으나 김두만, 윤응렬 장군 등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은 공군 역사자료발굴위원회에서 이를 부정한 바 있다. [12]공군에서는 김영환 장군이 빨간 마후라를 고안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13]
F-4 도입과 관련해 미국이 F-104를 한국에 판매하려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도 마음이 기울었으나 자신이 맥도널 더글러스 사에 방문, F-4를 직접 탑승한 후 그 우수성을 알아보고 F-4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시켰다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며 다른 정황들과 일치하지 않는 등 신뢰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F-4 문서 참조.
그 밖에 F-102가 록히드사의 물건이라고 언급한다거나[14] 영국과 이스라엘의 F-4 도입 시기를 실제보다 빠르게 이야기 하는 등 사실관계의 오류들도 여럿 발견된다.
한마디로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은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원로가 공군의 초창기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된 여러 오류들로 인해 확인되지 않은 다른 내용들까지도 신뢰하기 어렵게 된 경우로 볼 수 있다. 장지량 장군은 김영환 장군 등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과 대한민국 공군을 세운 동료들이자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우로 막역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회고록으로 이러한 논란을 일으킨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15]
[1] 조상호 전 체육부장관이 동기동창이며, 훗날 그의 사돈이 될 정진기 매경 창업주가 학창시절 교생이었다.[2] 패전으로 일본군으로 임관은 하지 못 했다.[3] 이때의 김일성은 북한의 수령인 그 김일성(김성주)라기보단, 일본육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김경천 장군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4] 그러나 일본 육사에 진학해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었다는 주장은 본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만 주장한 이야기로 그 신빙성이 높지 않다.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아래 논란 부분 참조.[5] Seth Jefferson McKee(1916.11.06 – 2016.12.26) 최종 계급은 대장.[6]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우리 전투기를 급파해준 덕분에 도움을 받게 된 매키 중장이 보답한 것이라 한다. SR-71참고[7] 푸에블로호 피랍 사태 및 베트남 전쟁 국면과 맞물려 미국측이 만류했다고 한다.[8] 복마전 양상을 띤 대한중석의 누적된 부정적 작태를 일신하고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9] 장지량 前총장 회고록 발간[10] 해인사 공습을 지시받은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은 공비는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처벌을 각오하고 명령을 거부해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그런데 장지량 장군(당시 중령)은 자신이 미국을 설득해서 폭격을 막아낸 것이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했고 문화재청에서도 이게 사실이라고 속아넘어간 것. 장지량 장군이 이를 주장한 것이 2001년이었는데 김영환 장군은 1954년에 항공기 사고로 순직했고 그 형인 김정렬 장군도 1992년에 지병으로 사망하여 직접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 살던 김정렬의 장녀가 뒤늦게 이를 알아차리고 바로 잡았다.‘해인사 팔만대장경’ 살려낸 김영환 장군, 지하에서 통곡[11] 해인사 공습과 관련해 장지량 장군의 자서전의 오류들이 논란을 일으키자 공군은 '역사자료 발굴위원회'를 구성해 사실관계 검증에 나섰으며,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인 김두만, 윤응렬 장군 등의 증언을 통해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이와 관련해 윤응렬 장군이 작성한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 공군 역사자료 발굴위원회의 종합보고서, 그리고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 <항공 징비록>을 참조할 것. 윤응렬 장군이 장지량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12] 김영환 장군과 함께 복무한 공군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환 장군이 빨간 마후라를 하고 다녔던것은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을 동경하여 붉은색의 머플러를 두르고 다닌것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김영환 장군은 짧은 챙모와 가죽부츠를 신고다니는등 루프트바페의 비행사처럼 꾸미고 다녔다고 한다.[13] 동 시대에 같이 근무한 창군 멤버 이강화 장군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빨간 마후라에 대한 아이디어 제기 및 지시는 김영환 장군이 한 것 같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장지량 장군인 것 같다. 두 사람이 단장-부단장으로 근무했을 때의 일화이기 때문.[14] F-102는 컨베이어사의 물건이다. 아마 F-104와 헷갈린듯 하다.[15]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이 빚은 논란들을 정리한 기사: '빨간 마후라' 해인사 폭격을 거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