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군 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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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 해군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운용했던 두 척의 공작함 중 하나로, 함명은 아카시 문서의 1번 항목인 아카시시에 위치한 호수인 아카시노우라(明石の浦)에서 유래했다.2. 제원
明石 (工作艦)기준배수량 | 10,500t |
전장 | 154.66m |
전폭 | 20.50m |
출력 | 10,000hp |
속력 | 19.2kt |
항속력 | 14kt로 8,000해리 |
무장 | 12.7cm 연장대공포 4문, 25mm 3연장 기관포 4기 |
승무원 | 433명(공작부원은 336명) |
총계획 | 5척 |
건조 | 1척 |
취소 | 4척 |
동형함 | 미하라(미건조), 모모토리(미건조) |
3. 개요
1937년 1월 18일 사세보 공창에서 기공하여 1938년 6월 29일 진수, 1939년 7월 31일 준공되었으며, 연합함대 소속이 되었다.일본군식 함종 분류로는 공작함인데, 군함의 정비와 수리를 시행하는 움직이는 수리 공장을 의미한다. 그 함급에 걸맞게 아카시는 기계 공장, 조립 공장, 담금질 공장, 주조 공장, 제련 광물 공장, 제련 공장, 강 공장, 용접 공장, 목공 공장, 병기 공장, 전기 공장, 공구실, 청사진실 같은 것을 보유하고, 기술자 336명이 114대의 기계를 운용하고 있었다. 114대의 기계들 중 상당한 숫자, 혹은 전부를 독일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그 덕에 연합함대의 평시 연간공수의 40%를 단함으로 시행할 수 있을 정도[1]라고 한다.
그리고 공작함의 특성상 갑판에 3기의 중(重)기중기가 세워졌고, 디젤기관을 탑재한 2개의 연돌 중 앞쪽이 함내 공장의 배연용이었으며, 선체형상도 수평갑판형(갑판이 함수에서 함미까지 수평)을 채용해 철저히 작업을 취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작에 종사하는 일반 공작부원(군속이나 민간인)도 다수 탑승했다.
4. 실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남방작전에 참가한 아카시는 전방으로 진출하여 팔라우 제도, 필리핀의 다바오, 술라웨시 섬의 스탈링 만, 몰루카 제도의 암본 항 등 남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함정들을 수리했다. 그리고 1942년 8월 23일, 트럭 섬에 입항해 이를 거점으로 손상선박의 수리임무에 종사했다.1942년 11월 13일 과달카날 해전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포틀랜드급 중순양함에게 얻어맞아, 20노트로 속도가 줄어들고, 함포가 회전하지 않고, 키를 수동으로 움직여야 하며, 직경 1미터가 넘는 구멍이 32개나 뚫리고, 40개 이상의 파편 자국이 나서 함장마저 자신의 배를 떠있는 고철이라고 부른 카게로급 구축함 9번함 아마츠카제를 12월 15일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게 수리했다. 하지만 한달 뒤 아마츠카제는 1944년 1월 호위임무 도중 발견한 미 잠수함 레드핀을 쫒아가다 반격을 당해 함수와 함교가 통째로 날아가버렸지만.. 또 다시 아카시가 달라붙어 임시 함수와 함교를 만드는 등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일본으로 귀항시켰다.[2]
경순양함 아가노(阿賀野)는 1943년 11월 11일에 공습을 받고 다음 날 잠수함에 의해 함미를 공격당해 4개의 추진축 가운데 2개를 상실했고, 굴뚝과 함교 사이에 큰 구멍이 생기고, 보일러 실도 침수, 기타 손상 다수로 함의 포기도 고려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카시의 응급수리에 의해 1944년 2월 15일에는 14노트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까지 회복시켰다.
이러한 수리 능력 때문에 미 해군의 중요 목표물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1944년 2월 17일, 미군 기동부대의 트럭 섬 공습에 의해 아카시도 큰 손상을 입었지만, 트럭 섬에서 탈출에 성공해서 팔라우로 회항했다. 하지만 1944년 3월 30일에 다시 항공모함 호넷 소속 미군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어 좌초 및 착저상태가 되었다. 이로서 아카시는 모든 기능을 잃어버렸으며, 일본 해군은 더 이상 현지에서 제대로 된 함선수리를 받을 수 없으므로 이후 전선에서 파손된 선박들은 모두 일본 국내로 귀환해 수리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944년 5월 10일 해군함적에서 제적된 아카시는 현지에서 침몰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54년에 해체처분되었다. 동형함으로 미하라(三原)와 모모토리(桃取)가 건조될 예정이었지만 전황 악화로 인해 백지화되었고, 종전 후 엉뚱하게도 키타카미와 호쇼가 공작함으로 개장되었는데 그냥 해외의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실어나르는 수송선 역할만 하다가 스크랩 처리되었다.
5. 평가
평소의 일본군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쓸모있는 함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카시는 혼자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사용하여 일본 해군을 지원했으며, 그 지원은 매우 유용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일본군이나 연합군이나 평가를 매우 후하게 쳐준다. 이는 미국이 우선격침대상으로 선정한 것도 있으며, 당장 아카시를 손실한 후에는 안그래도 부족한 일본군의 군함들이 수리를 받기 위해 본국을 들락거리고, 일부는 연료부족으로 본국에 주저앉기도 해서 안그래도 밀리는 상황에서 전력손실이 추가로 발생했다는 것만 봐도 아카시의 존재는 매우 컸다고 보면 된다.그러나 한편으로 2차 대전 직전을 기준으로 당시 해군력에서 세계 1, 2위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영국이 그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각기 10척에 달하는 전용 공작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전간기 세계 3위 해군력을 보유하던 일본이 처음부터 제대로 공작함으로 설계된 함선을 오직 한 척 보유했다는 사실은 일본군의 열악한 군수지원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진정한 대양 해군이 되려면 원양항해능력을 가진 군함을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양작전을 펼치는 군함들에 연료, 물자, 정비소요를 현장에서 지원해서 이를 위해 귀환하지 않고 지속적인 원양 활동을 지원 할 수 있는 지원시스템의 확립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지원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다수의 군함을 보유하여 구색을 맞추더라도 진정한 대양 해군으로 평가받기 어렵다. 그런데 일본해군은 세계 3위의 해군력에 걸맞은 지원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가령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주력함 보유 비율인 미5 : 영5 : 일3,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보조함 보유 비율인 미10 : 영10 : 일7을 공작함에 그대로 대입할 경우,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대비해 최소 6대의 공작함을 보유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거 없다.[3]
아카시 1척이 연합함대의 평시 연간공수의 40%를 단함으로 처리한 사실을 가지고 일본의 함선 유지보수 능력이 아카시의 2.5배밖에 되지 못 했다는 주장을 하고는 하는데 함선 유지보수능력의 상대값인 정비소요의 처리율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명백한 오류를 가진 논리이니 주의하자. 정비소요는 처리능력 만큼만 일어나는게 아니라 더 일어날 수도(전시) 덜 일어날 수도(평시)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척에 너무 많은 수리를 도맡은게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군대라는 곳이 사용자 정비로는 수리가 불가능하나 창정비(해군이니 조선소)로 올리지는 못하는 수준의 고장은 군수지원부대의 순회정비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수리를 받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이동정비소인 아카시가 정비소요의 다수를 처리하는건 당연한 결과다.
물론 순수 공작함이 아카시만 존재[4]했다는 사실은 일본 해군이 함대결전사상에 연연해 보급이나 정비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앞서 설명하였듯 일본해군은 공작함을 6척은 가져야 했던 규모였다. 다만 공작기기의 수량 부족이라는 문제 때문에 어쩔수 없었던 점도 있는데, 아카시에 실려있던 독일산 공작기기의 수는 일본 모항에도 없는 규모였기 때문에 동형함을 만들어봤자 채워넣을 기계가 없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독일산 공작기기의 숫자가 제약이 있는 이상, 아카시와 같은 공작함을 6척으로 늘려봐야 공작기기를 1/6로 쪼개는 결과밖에 안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일본 자국산 공작기계라도 채워넣어 6척 모두를 운용하는 게 1척만 돌리는 것 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기 때문에 이 부분은 일본군이 보급, 정비 문제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다만 아카시나 마미야의 경우 1년 내내 돌아나니는 함정이며 내부에 있는 공작 기기나 냉동고 같은 시설들은 모두 함선 내의 연료로 돌리는 만큼 막대한 연료가 들어가며 응급수리가 필요한 함선이 발생하면 심할 경우 1일에 1번꼴로 연료를 보급해야 할 만큼 연료소모가 심각하므로 공작함들이 조약에 대입하여 6척이 있어도 문제이다.[5] 이로 인하여 유조선들의 일부가 항시 해상저장탱크로 있어야 하며 미군 잠수함들이 어뢰문제를 해결하고 활약을 하기 시작하던 시점이라 유조선의 지속적인 손실로 인한 막대한 연료소모를 감당할 수 없으며 더 심각한 문제는 미 태평양함대의 거점인 진주만은 오래전부터 개발되어 전함을 수리할 수 있는 대형 드라이독이 4개나 있었지만 트럭의 경우 위임통치령이라는 특성상 군사시설 설치가 한동안 금지였기 때문에 너무 늦게 대규모 기지 개발에 들어갔으며 환초라는 점 때문에 대규모 건선거를 건설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태생적인 약점으로 인해 공작함들의 부담이 늘어나므로 결국 공작함들 대부분이 연료부족으로 인하여 제대로 기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6. 기타
함대 컬렉션의 칸무스로 나오기도 했다. 아카시(함대 컬렉션) 참고.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에도 등장했다.
벽람항로에도 등장했다. 아카시(벽람항로) 참고.
[1] 도해 군함, 다카히라 나루미/사카모토 마사유키 저, 188쪽[2] 하지만 그렇게 살려 보낸 아마츠카제는 귀항 도중 B-25 18기에게 발각당해 폭탄 3발을 맞아 대파되었고 조타 불능 상태가 되어 결국 폭뢰로 자폭해 함생을 마감했다. 자세한 건 아마츠카제 문서 참조.[3] 미국 참전 이전부터 석유 공급이 끊긴 데다 경제 제재까지 겹쳐 돈이 많이 없기 때문.[4] 전노급 전함인 아사히(朝日)를 공작함으로 개장해서 1942년까지 써먹었고, 그 밖에도 중소규모의 상선을 임시수리함으로 개장해서 써먹긴 했으나,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택도 없었다.[5] 단례로 43년에 남태평양 해역군은 월 평균 130만 배럴(19만톤 가량)의 연료를 공급받았는데 이를 위해 1만 5천톤급 유조선 17척을 운용하였으며 누메아와 툴라기, 에스페란투산토에 115만톤의 저장시설이 있어서 유조선들이 저장시설에 그냥 연료를 내려놓고 돌아가면 되지만 연합함대의 거점이던 트럭은 건설 용지가 부족하여 20만 배럴의 저장능력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