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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2월 14일, 니가타항을 출항하는 제1호 북송선 쿠릴리온호와 토보리스크호

1. 개요2. 배경3. 대한민국의 저지 시도와 실패4. 북송5. 이들이 받은 차별6. 매체의 재일동포 북송7. 타국의 비슷한 사례8.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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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在日朝鮮人北送事業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북한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주도로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들과 그 가족을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시킨 사업. 사업이 주로 진행된 1959년부터 1967년까지 9만 3000명이 이 사업에 의해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 사업을 추진한 북한에서는 이를 '귀국사업'이라고 칭했다. 북송사업이라는 표현은 남한과 민단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2. 배경

재일 조선인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에 200만에 달했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이 이뤄지면서 상당수가 한반도로 귀국하고 약 60만 명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전후 베이비 붐에 따른 자연 증가와 4.3 사건 당시 피난민들과 6.25 전쟁 당시에 일본으로 피난(밀입국)간 한반도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늘어난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 재일 조선인들은 골칫덩어리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인해 일본인이라는 국적도 상실했다. 하지만 일본에 거주하기에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먹여 살리기는 해야 한다.

6.25 전쟁 시 미국의 창고역할을 하면서 벌던 돈으로 일본은 고속발전을 이루었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면서 빈곤하게 살아갔다. 일본에게는 2등국민, 아니 그 이하였던 격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기는 싫었기 때문에 우회적으로 적십자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전쟁이 가라앉은 1950년대 중반부터 재일 한국인들을 데려 가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과도 북한과도 수교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각국 정부도 이들을 안 받는 상황으로[1] 일본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사실 일본은 한국에 재일교포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재일 조선인 대부분의 고향이 남한이며 미국의 입김이 있는 만큼 어떻게든 한국을 선택하는 것이 부담이 적었을 것이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한일 수교 협상에서 재일 한국인의 영주권을 인정하라는 조항 등으로 일방적인 일본의 추방을 거부한다는 뜻을 내비쳤고 국교 정상화도 1965년에 가서야 한일협정으로 이루어졌으니 미수교 상태였던 일본이 한국에 재일 한국인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이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가?'라고 한다면 역시 의문이 제기된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도토리 키재기였던 만큼[2] 재일 한국인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또한 1950년대의 북한은 아직 김일성 일인 독재체제가 아니었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 여러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던 시절이라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게다가 일단 북한은 미국과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이 큰 장애물이었다.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구상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5월 조총련이 출범했으며, 조총련은 출범하자마자 "귀국운동"을 시작했다. 조총련 출범 두달만인 7월 15일 도쿄에서 '조선인 귀국 희망자 도쿄대회'를 개최했다. 1956년 2월 27일 평양에서 북한과 일본 양측 적십자가 평양에서 공동 대화에 조인했다. 1956년 4월부터 수십명의 재일교포들이 귀국(북송)을 주장하며 일본 적십자사 등에서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북한은 1956년 6월 20일 내각 명령 53호를 통해 '일본에서 귀국하는 조선 공민의 생활 안정'에 관한 방안을 공포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북한 북송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김일성이 야심차게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기간시설망 확충은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만 북한 내에서 경공업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추진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행동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8월 종파사건과 함께 깔끔하게 숙청되었다. 이 당시 북한에서는 6.25 전쟁으로 인한 인구 손실은 엄청난 수준이었고,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중반~60년대에는 베이비붐으로 출산율이 6명대를 넘을 정도로 높았기는 했지만, 이들 세대는 아직 성인이 되기 한참 이전이었기 때문에 노동력으로 동원할 수는 없었다.

김일성은 막대한 인력을 끌어올 방법을 고민한다. 8월 종파사건으로 중국과의 갈등이 빚어졌고 이에 북한 내에 주둔하던 중국군들이 모두 철수한데다가 마침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던 상황도 있기 때문에[3] 일본 정부와 몰래 교섭을 시작, 일본과의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북송사업이 추진되는 데는 큰 장벽이 있었다. 두 나라는 미수교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소속 진영이 달랐다. 일본은 미일동맹으로 묶여 있는 자유주의 진영이었으나 북한은 중국과 동맹으로 묶여 있던 공산주의 진영 국가였다. 이를 간과하고 무리하게 추진했다가는 다른 나라들이 이를 걸고 넘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북한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적십자를 중간에 끼워넣기로 한다. 일본은 적십자 위원회를 움직이기 위해서 특사를 파견하고 끊임없는 요청을 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의 북송을 추진하기 위한 실사단을 유치하는 등 적십자에 대한 전방위적인 홍보를 도모하였다. 북한 역시 연일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북송 추진을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결국 적십자 위원회는 재일한국인이 원하는 인도적 귀향에 대해서 적십자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4][5]

이와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1958년 8월부터 조총련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귀국'을 간절히 요청하는 공개 청원과 결의를 반복하였고, 이에 9월 북한에서 김일성이 재일교포들의 간곡한 청원을 받아들여 귀국사업을 추진하는 형식으로 사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를 넘더라도 북한에게는 한가지 큰 산이 남아있었다. 다름아닌 대한민국이었다.

3. 대한민국의 저지 시도와 실패

1959년 1월에 일본 외무대신인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이 사업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하자마자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와중에 그나마 있는 외교역량을 총 가동하면서 막기 위해 노력했다. 배까지 수배했던 일본의 북송을 1차적으로 저지한 것도 대한민국이었으며[6] 일본의 재일 한국인 북송을 준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통보까지 보내는 등 한국은 이를 막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민단과 함께 재일한국인의 북송을 막기위한 공작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한일이 동시에 재일교포 북송 문제를 미국에 청했을 때 일본은 미일동맹의 연장 협의를 통해서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등 전방위적인 지원에 나선 반면, 한국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감안해 공식적으로는 지지를 표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북송에 대해서 묵인하는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송사업은 추진되었다.

4. 북송

1995년 4월 9일 KBS 일요스페셜 방송 '통한의 증언, 북송선'
북한은 북송에 앞서서 재일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 폭격수준의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방문해서 의료지원이라던가, 생활수준 등을 홍보하고 이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몇몇 어용작가들이 북한에 가서 쓴 소설[7] 시장에 출판되고 각종 홍보 삐라들이 마을을 뒤엎었다. 이러한 선전에 속은 많은 재일 조선인들이 북송을 선택했다.[8] 또한 4.3 사건여순 사건, 그리고 대구 10.1 사건 등으로 남한 정부에 학을 뗀 사람들도 많았던 점도 북한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북의 선전은 당장 한글을 모르는 재일 조선인, 일본인들이 한글을 새로 배우는 열풍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부수적인 효과도 나타났다.

그리고 1959년 12월 14일에 처음으로 북송 선박이 출발하였다. 북한은 체제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북송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하였으며 만경봉호[9]와 니가타항은 북송의 상징으로 유명해졌다. 1959년에 시작된 북송은 198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북송으로 93,340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는데 이중 최소 6,839명이 한반도 계통과 혼인하였거나 한일 혼혈로 태어나 일본 국적을 얻은 일본인이었다. 특히나 재일 조선인의 대다수는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제주도, 전라도, 경상도 출신이라서 북한에 연고가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5. 이들이 받은 차별

북송 재일동포 에이코의 생애 마지막 투쟁
KBS 다큐 인사이트 - 째포 에이코 | KBS 20241121 방송
썸네일에 보이는 사람은 재일교포 북송 시절에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47년만에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한 가와사키 에이코[10]다. 2024년 현재, 재일교포 북송 당시 피해를 당한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을 위한 NGO 단체인 모두모이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첫 재일교포 북송 당시였던 1959년 12월 15일, 청진항의 환영 인파를 본 재일교포 북송자들과 청진항에서 그들을 맞이한 북한 당국자들, 환영 인파들의 증언은 일치했다. 양쪽 다 서로의 모습에 침묵하고 말았다고 한다(...). 재일교포 북송자들은 환영 인파들의 꾀죄죄한 모습을 보면서 쇼크를 받았고, 북한 당국자들과 환영 인파들은 다양한 옷을 입고 있는 재일교포 북송자들이 일본에서 차별받고 고생한 사람들이 아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청진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자들에게 대접된 음식은 지지리도 형편 없었고, 초대소에서는 우는 사람 속출에, 다음 배로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정해진 지방으로 일방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사실 북한에서도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들을 다짜고짜 괄시한 것은 아니고 일본에서 기술과 지식을 배워 온 이들을 우대하여 고급직장에 배치하고 좋은 집과 더 많은 배급을 주기도 했고, 어느 정도 배려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대약진 운동을 피해서 북한으로 달아났던 조선족들은 재일교포들을 보면서 "같은 민족인데도 일본에서 오면 쌀을 주고 중국에서 온 우리들은 이렇게 괄시를 하냐?" 라며 반발했다.

문제는 물질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일본에서 살다온 이들이 적응하기엔 매우 안맞았고, 더군다나 성장에 대한 확신과 낙관이 아닌 이것에 대한 불평불만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풍토 역시 말조심 못한 재일교포들을 잡아넣기 딱 좋은 명분이었다. 북한의 배려란 어디까지나 딴에는 좀 챙겨준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리 북한이 연 10%씩 성장하고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많이 차별을 받았다한들 이미 기본적인 소득차가 상당히 컸었고, 일본도 고도경제성장기인 시절인지라[11] 이후로도 북한과 일본의 경제적인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는 않았고 북한의 경제성장이 일본보다 먼저 꺽이면서 1990년대까지도 차이는 더욱 벌어지기만 했었다. 이러니 일본에서 생활하다 온 재일교포들 입장에서는 북한이 가난한 나라일수밖에 없기는 했다. # 물론 재일교포들도 경제적, 정치적 차별이 싫어지던 차에 선전에 홀라당 넘어와 북송된건 사실이고, 북한 사회가 경제보단 서로 돕고 이끄는 사회이니 정신적 재부나 사상이 우월하고 살기 좋다고 선전했다. 물론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니 청산리 정신이 있던 60년대는 물론, 사회가 급속도로 경직된 70~80년대에도 사람 사는 정이야 당연히 남아있었다. 문제는 이것의 근본 바탕이 김일성 우상화와 전부 직결된다는것. 북한은 보위부에서 사람을 잡아넣을때도 김일성의 교시와 방침대로 해야하며 체포 시 해당 직장 당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 수령과 당이 절대적이고 사람을 잡아넣는 정치경찰 또한 여기서 절대 벗어나지 못했으니 정치경찰도 김일성의 교시에서 한치도 못벗어나는 사회에서 물질적인 차이에서 오는 불평불만이야 당연히 죄가 된다.

게다가 북한에서 주창한 '서로 돕고 이끄는 나라, 정다운 나라, 경제는 몰라도 사상은 우월하며 꼭 승리로 갈수 있다'는 주장이 전부 김일성의 은혜와 은덕이라는 식의 논리를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온 이들이 한치의 거부감 없이 바로 받아들였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일것이다. 결국 1970년대에 이런 상태에서 말조심을 못하거나 김일성의 지나친 우상화에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생각한 재일교포는 싸그리 사회에서 격리되었고, 여기에 적응한 재일교포만이 1980년대까지 살아남아 현재까지 그 후손들도 살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이런식이다보니 근본적으로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뿐 아니라 정치적인 인식 또한 차별이 만연했고, 출신 성분이 안좋은 축에 속했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출세한 재일교포들은 그나마 출신 성분을 덜 보는 예술계에 진출하거나 그냥 능력에 상관 없이 농촌이나 공장에서 감시와 견제를 받으며 남아있었고, 90년대 들어가며 결과적으로, 북송을 선택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는 이들이나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귀국한 이들보다 못한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1960~70년대 한국으로 다시 온 교포들도 남한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지만 북한에 비하면 장난일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순혈주의로 악명이 자자하던 북한에서는 재일교포조차 제3계급, 그러니까 노예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이들은 "째포", "쪽발이"[12]라는 멸칭으로 불리면서 북한 특유의 계급사회에서 모든 면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진짜 무서운 점은, 북송교포들은 결코 억울하게 잡혀간것이 아니라 북한 사회에서 실제로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저질러 잡혀간것, 즉, 북한 사회의 규율과 규범, 죄의 범위가 얼마나 기형적이고 억압적인지 알수 있고 정말 별의별것, 연좌될 집안에서 태어난것조차 죄인 상황이라는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은의 어머니인 고용희도 이렇게 북송되어 북한으로 왔었던 재일교포 출신이다. 고용희같은 경우엔 재일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과 결혼하여 낳은 한일혼혈들은 피가 더럽다면서 더 심한 차별을 받는다고 한다.[13] 그래서, 일본으로 간 탈북자들은 대부분 이런 한일혼혈들이다. 250명 정도 된다고 통계를 내고 있다. 재일 탈북자 인터뷰. 재일교포 북송으로 북한으로 넘어간 일본계들을 일본에서는 예전에 중국에 머물던 히키아게샤처럼 받아들이는데 일본 정부 차원에서 별다른 지원책은 힘들다고 한다. 그나마 민단이 지원해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아무리 가난한 나라였어도 재일교포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었다.

그리고, 한국인 배우자를 따라 북한으로 건너갔던 일본인들은 더더욱 힘들었다. 명문대 출신의 일본인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함께 북한으로 갔다가 굶주림과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북한 로동당원에게 성노리개가 되어 성상납 하는 지경에까지 몰려 탈북을 시도하다 가족과 함께 사살당했다는 비참한 사례까지 존재한다. 어느 일본인 여자는 김일성이 접견나온 자리에서 김일성에게 제발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던 사례도 존재했고 이는 김일성에게도 충격을 줬다고 한다.

결국, 자식들과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서 북송을 고집했던 사람들은 평생을 걸쳐 알게 모르게 사죄했다고 한다.

요덕 수용소에서 나와 월남하여 조선일보 기자가 된 강철환의 저서 "수용소의 노래"에 의하면 재일교포 출신인 그의 가족은 어느날 아무 이유 모르게 요덕수용소로 끌려간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제주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넘어가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조총련 간부까지 역임했다. 그런데 전혀 일본 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없던 한덕수(韓徳銖)[14]라는 자가 갑자기 의장에 임명되었고[15] 나중에 이자가 교민들을 일일이 설득하여 지상락원에 가자고 한다. 이에 강철환의 할머니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아들, 딸, 손주, 손녀 다 끌고 북한에 갔다가 어느날 밤 갑자기 요덕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간다. 그런데 왜 끌려간지 그 이유는 끝까지 아무도 모른다. 흠좀무한 것은 요덕수용소에 이처럼 재일교포 출신들이 하도 많아서 한 구역에 몰려서 함께 살았고 일본인 부인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재일교포 중에서 상당수가 이렇게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도 "째포"라는 비칭으로 불렸으며 그제서야 다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공산주의 이론이 다 거짓말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집안에서는 철저히 일본어만 사용하였고 마을 주민들끼리도 일본어를 썼다. 상당수의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은 김일성 초상화에 절을 하라는 지시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행을 택했던 한 재일교포 출신의 탈북자 가와사키 에이코의 증언에 따르면, 청진항 부두에 접안할 무렵 선착장에서 고함을 지르던 조선학교 선배가 있었다고 한다. 먼저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도착했었던 그 선배는 배에 타고 있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북한 군인들이 못 알아듣도록 일본어"그 배에서 절대로 내리지 말라!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라!" 라고 외쳤다고 한다.

한 탈북자의 언급에 따르면, 평남 북창 지역에 재일교포 조순덕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조막손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일본 친척들이 돈을 송금했고 그래서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굶어죽지 않고 풍족한 생활을 했다. 이러한 생활을 바탕으로, 일제 승용차와 전자제품, 현금 등을 지방정권 기관에다 기부를 빙자해서 반쯤 강탈하고 훈장을 수여받거나, 굶는 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내어주어 애국자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들이 재일교포라는 출신 성분 땜에 중앙당 5과 대상에서 탈락하고, 고려민항 스튜어디스로 채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술자리에서 자신이 그렇게 충성했음에도 재일교포를 차별하는 북한 사회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은 것을 계기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당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체제 비판했다는 것과 지금까지 바친 것은 전부 남조선 안기부 놈들의 공작금(...)이였다는 죄목을 뒤집어썼다.

재일교포 2세인 박춘선 씨(실명)의 인터뷰에 따르면, 1963년에 북송한 자신의 오빠 박안복이 1980년부터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을 언니로부터 듣게 되고, 1987년에 방북하여 오빠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출장중이라는 북한 당국의 말만 듣고, 오빠의 행방은 알지 못한 채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이후 조총련의 요구로, 2000만엔이라는 거금을 바치고, 1990년에서야 조총련 중앙본부로부터 오빠가 간첩 혐의로 85년에 이미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피붙이를 죽인 원수들에게 돈을 갖다 바친 셈이다. 박춘선 씨의 오빠 이외에도 여러 일가 친척들이 북송해서 박춘선 씨는 그들에게 돈과 생필품을 보내왔지만, 방북 당시 이러한 것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그들 모두 북송을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된다. 이전까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 친척들이 걱정되어 이를 알리는 것에 주저했고, 실제로 인터뷰에 앞서 조총련 관계자가 "본국(북한)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어도 좋으냐?"라고 협박을 해왔다고 밝히면서, 북한에 대한 진실을 알려야한다는 일념 하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심지어, 북한 정부는 이들을 더끌어 오길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초를 주면서도 일본에 사람들이 더욱더 갈 수 있도록 종용하는데 힘썼다.[16] 그리고 일본은 북한이 북송하는 중간에 만난 연례적인 적십자 회의에서 북한에 있는 재일한국인들이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연락을 하자는 북한의 제의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행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설령 북한이 일본이 거절할 걸 뻔히 알면서 빈말로 제안한 거라 할지라도 일본이 제의에 찬성을 하면 북한이 제안을 실행하지 않을 경우 북한만 나쁜 나라가 되어서 일본이 명분을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북한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이는 일본 정부 역시 재일교포 북송의 인권 문제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북송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심사가 있었다. 통례적인 심사였으나 몇몇 재일 조선인들은 그 중간에 걸러지거나 아니면 현명히 자진해서 포기하였다. 걸러진 경우는 병결이 대부분이었지만 북한 입장에서도 민주주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을 끌고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 통례적인 심사 속에서 북한은 자발적인 북송 희망자들에게 북한 입장에서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 특히 재일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들 중에 그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두고 가길 종용했다. 이런 과정 속에 많은 사람들이 북송을 거부당했다. 물론, 생각해보면 북송되지 않은 사람들은 행운아다.

현재 많은 탈북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북한을 탈출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북한의 현실을 깨닫고 절망한 재일교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탈북을 시도했다. 우선 가장 많이 사용한 탈출 방법으로 일본에서 북송을 희망하는 재일교포들을 태우러 청진항을 다시 출발하는 만경봉호의 화물칸 구석에 몰래 숨어서 북한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방법을 통해서 몇몇 재일교포들이 탈북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탈북에 성공하는 재일교포들이 생기자, 청진항의 경비가 삼엄해지고, 만경봉호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면서 1960년대 중후반부 이후부터는 만경봉호을 통한 탈북이 불가능해진다. 이외의 탈출 방법으로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쪽배를 타고 나가 일본 화물선을 발견해 귀순을 요청한다던지, 가끔 북한에 들르는 일본 화물선의 화물칸에 몰래 잠입하는 방법, 헤엄을 쳐서 해외 무역선에 몰래 잠입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탈북을 시도했다고 한다.

일부 재일교포들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을 다시 일본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북한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물론, 북한 당국의 대처는 진정서를 제출한 재일 교포들을 모두 자강도와 양강도 산간 오지로(...) 추방시켜버리는 것이였다.

어떤 재일 한국인 출신 탈북자는 맨 처음 대한민국으로 오길 희망했고 대한민국 관계자와 이야기를 했으나 대한민국 관계자들이 했던 말은 "그 당시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살기 좋았으니 북송하신 것 아닙니까?"였다고 한다. 북송 당시 9살이었고 부모 손에 이끌려 갔던 사람한테 이딴 소리를 한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계산이 돌아가서 북한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 사람은 일본으로 갔다.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진행되던 시기 북송을 장려하기 위해, 재일교포들에게 북한의 체제를 찬양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북한 당국의 검열을 피해 북한의 실상을 전달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먼저 북송선을 타게 된 사람들 중 일부는 남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가로쓰기로 써서 보내면 참말이고 세로쓰기로 써서 보내면 거짓말이라고 일러주고 북송선에 탔는데 그 후 먼저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로부터 오는 편지라고는, "북조선은 듣던 대로 좋은 곳이니 북송선 타고 와서 같이 살자"는 내용이 세로쓰기로 적힌 것들 뿐이라 편지를 받아 본 사람들이 북송을 포기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전승에 따라서는 반대로 세로쓰기가 참말이고 가로쓰기가 거짓말인 버전도 있고, 또 볼펜으로 쓰면 참말이고 연필로 쓰면 거짓말인 버전, 이름을 한글로 써서 보내면 참말이고 한자로 써서 보내면 거짓말인 버전도 있다. 그 밖에도 '재일교포들은 가마가사키 만큼 풍요롭다' 라며 편지를 보냈지만, 사실 가마가사키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거리로 일종의 슬럼이었다. 그리고, "북한으로 올 때 꼭 바늘과 실을 가져와달라", "집안에 있는 먼지 한 톨마저 모두 다 가져와달라" 라는 일본 속담과 관용어로 "바늘과 실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처지다" 라는 것을 알려줘서 못 오게 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증언은, 위의 영상에서 가와사키 에이코씨가 직접 설명한 방법이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17]가 이를 파헤쳤으며 특히 그녀가 발간한 '북한행 엑서더스'에 이러한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KBS 파노라마에서 북송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도 있다.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막기 위해서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이었기에 한국 정부는 오리발을 내밀었으나, 2009년 당시 공작 활동 중 사망했던 공작원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사실상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재일교포 북송의 실상을 가지고 한국 정부에서는 어린이들에 대한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과 함께 쏠쏠하게 써먹었다. 여하튼 일본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으로 민단한국은 일본에서 이미지가 나빠질대로 나빠졌고 조총련이 기세를 얻게 된다. 게다가 북송은 북송대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으로 북한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겨우 뒤집어진다.

북한이 1960년대 중반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사업 중단을 막기 위해 동독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2021년 10월 14일에 일본에서 재일교포 북송과 관련된 재판이 시작됐다.# 그러나, 2022년 3월 23일 패소했다.# 2심에서 이를 뒤집어졌다.#

다만 북한 내에서 원군사업을 하고 있는 재일교포 후손들은 대우가 좋은 것으로 보인다. 원산시 기준 재일교포 후손들이 1군단 지휘부와 창도군 살림집 건설장에 전달한 게 도합 북한 돈 900만 원(약 1125달러)와 돼지고기 250kg이란 것을 보면 무역을 통해 부유하게 사는 모양이다. 다만 국가수훈과 표창은 받을 수 있어도 성분 때문에 간부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24년 8월 6일 열린 제84차 위원회에서 북송 재일교포와 후손 17명에 대해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북송 재일교포가 북한 정권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

6. 매체의 재일동포 북송

영화 True North 예고편 한국어 자막판 링크
재일교포 시미즈 한 에이지(淸水ハン榮治) 감독이 재일교포 북송자와 탈북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2020년에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 True North 에서는 북송된 재일교포 가족이 아버지가 일제 간첩으로 몰려 연좌제로 가족 모두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관련 기사 링크 주인공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막 끌려왔을 때의 복장이 잠옷 차림에 가방을 매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북한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았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참고로 주인공 가족이 왜 잠옷을 입은 차림이냐 하면,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때는 주로 새벽에 비몽사몽했을 때 끌려가는데 이때는 정신도 못차려서 제대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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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일에 방영된 이제 만나러 갑니다 472화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가 게스트로 출연해서 북한의 일본 관련 외교 스캔들에 대해 다루면서 함께 언급하고 있다.

여우고개에서 출판된 만화가 김한조가 그린 우리가 외면한 동포 재일조선인 1장의 눈물의 북송선 편은 재일교포 북송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오마이뉴스에서도 눈물의 북송선 편이 개재되었다. 남에선 "빨갱이" 북에선 "재끼들"... 버려진 사람들 또한, 눈물의 북송선 이외에도 김한조 관련 기사를 클릭하면, 우리가 외면한 동포 재일조선인의 다른 재일교포 관련 만화도 볼 수 있다. # 다만 오마이 뉴스 성향상 당시 상황에 대한 왜곡이 섞여있다. 가령 북송편에서는 당시 남한 정부가 민단을 제외하면 별 일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하나, 당시 한국정부는 위에 적혀있듯 일본에 대한 테러까지 실행하며 북송을 저지하려 했다.

1960년 재일교포 북송으로 북한행을 선택한 재일교포 2세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2003년 탈북할 때까지의 43년 간의 북한에서의 일대기를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책으로 집필했다. 관련 조선일보 기사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쓴 가와사키 에이코

피와 뼈 - 최양일 감독 영화. 재일교포 북송 부분은 짤막하게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 마사오의 누나 하나코의 첫사랑 찬명이 이 때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마사오도 한 때 찬명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북한으로 넘어갈 뻔 했으나 찬명의 소식이 끊기면서 포기했고[18], 이후 마사오의 아버지 김준평이 혼외자식 류이치를 반강제로 끌고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재산까지 다 뺏기고 가난하게 살다 비참하게 죽고 만다.

용오 the Negotiator 제1권 (시모키타 반도 편) - 마카리 신지 작, 아카나 오사무 그림의 일본 만화. 국내에서는 학산문화사를 통해 발매. 주인공 용오가 교섭인으로서 접촉하는 대상으로 재일교포 북송 당시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공작원으로 성장한 윤민철이 등장한다. 윤민철의 어머니는 친정이 남한이라 함께 가지 못했고,[19] 이후 윤민철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행방불명된 것을 알고 북한행을 단념했지만, 아들 윤민철을 그리워하며 북한으로 보낸 것을 평생 후회했다. 윤민철의 어머니는 죽기전 아들을 보고 싶은 소망에 용오에게 아들과 만남을 의뢰했고, 극적으로 병실에서 모자가 상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민철은 함께 온 다른 북한 공작원의 손에 배신자라는 죄목으로 최후를 맞는다.

1984년에 방영된 MBC드라마 동토[20]의 왕국에서는, 아버지를 일본에 남기고 단독 북송을 택했던 남자가 일본에서 방문한 드라마의 주인공 앞에서 오열하며 일본으로 다시 데려가달라고 소리지르는 장며니 나온다.

7. 타국의 비슷한 사례

이와 비슷한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는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있다.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은 쌍방향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그리스와 튀르키예로 각각 간 사람들은 현지에 적응을 어려워했다지만, 적어도 북한에 간 재일교포들처럼 비극적으로 끝나진 않았다.

8. 관련 링크


[1] 사실 6.25 전쟁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라가 너무 가난해서 그들을 받을 만한 처지가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를 '국가에서' 해외입양을 장려했을때고 그리고 무엇보다 국교 정상화 자체가 되지 않았다.[2] 엄밀히 따지면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긴 했지만 그래봤자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었다는 것은 똑같다.[3] 남한은 못 받아주는 상황이지만, 북한은 받아줄 수 있다는 식의 대대적인 선전부터 시작해서 일본이라는 메이저 국가와의 연락 구축도 가능하다는 두 가지 계산이 가능하다.[4] 사실 이 실사단의 방문과 맞춰서 재일 조선인 몇십명이 일본 적십자위원회 밖에서 농성을 하였던 것이 컸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배삯도 줄테니 우리를 북한에 데려다 줘!"라는 것이었고, 이런 저런 조사를 하던 조사단의 입장에서도 이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5] 다만, 농성하던 사람들이 "진짜로 북한으로 가길 원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씩 의견이 엇갈린다. 이들이 어용단체인지, 실제로 가고 싶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당시 남한보다 북한이 조금 더 잘살았다는 점, 그리고 일본 정부가 재일한국인이 일본을 떠나도록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합리적으로도 북한에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6] 위에서 언급한 농성자들이 배를 수배해서 북한으로 가려고 할 때 선박회사를 압박해서 배 자체를 못 가도록 하였다.[7] 위에서 불쏘시개 겸 소설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된 내용이 하나도 없었고 무슨 유토피아인 마냥 적어놓았던 것.[8] 당시 남한보다 북한이 더 잘살기는 했다.[9] 참고로 만경봉호에는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북한 공작원도 타고 숨어들어왔다. 이후 북한 공작원의 활동 의혹이 생기자 일본은 만경봉호의 입항 검색을 강화했다.[10] 한국어 이름도 있으나 북한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싶지 않고 북한에 남아있는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11] 1960년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473달러, 북한이 137달러로 북한의 1인당 GNP가 일본의 1/4 수준이었다.[12] 북한에서 살았던 재일교포에 증언에 따르면 그냥 '쪽바리'로 불리운다고 한다.[13] 북한이 대북전단에 대해 그렇게나 발작 수준으로 격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동봉된 삐라에 김정은의 혈통문제를 지속적으로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14] 1973년 일본에서 일어난 '두 아이 납치 사건에 관여된 자이며 '조총련계의 왕'이라고 불렸던 자이다. 어느 탈북자의 수기에 따르면, 어떤 재일교포 북송자는 죽어가면서 김일성, 김정일과 함께 한덕수의 이름을 거론하고 욕을 하며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15] 이는 한덕수에 악감정에서 나온 매도에 가깝다. 한덕수가 일본공산당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던 김천해를 비롯한 거물급 재일 공산주의자들보다 명망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노동운동가 출신이고 투옥도 당했었다.[16] 심지어 일주일에 1,000명 옮기는 것을 1,500명으로 늘리도록 일본을 압박하기까지 했다.[17] 영국 출신에 호주로 국적을 옮기고 일본인 배우자를 둔 교수이다. 전공은 일본 사회・경제사.[18] 링크의 영상을 보면, 이 때를 회상하면서 하는 대사가 "나는 북으로 못 갔다. 아니, 안 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라고 말한다.[19] 다만, 재일교포 북송 당시 북송을 선택한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은 북한이 아닌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고향으로 둔 남한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친정이 남한이라 함께 가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히 고증 오류라고 할 수 있다.[20] 언 땅이라는 뜻으로 북한을 의미.